두 번의 수술 경험은
세번째 수술을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더더욱 공포스러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스테인레스 기물 투성이의 살벌한 수술실,
온몸으로 파고드는 수술대의 냉기,
떨리는 몸 위에 사정없이 칠해지는 휘발성의 소독약,
형언하기 힘들 지경으로 불쾌한 소변줄의 이물감,
그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예측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또하나의 커다란 공포였었죠.
그러나 두 번의 경험은
이제 곧 마취 마스크가 코 위로 덮일 것이며,
그것은 채 열을 헤아리기도 전에 그 모든 고통을 제압하고,
고통의 주체인 나 자신조차도
하나의 소실점으로 빨아들일 것이라는 사실 또한 예측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혹독한 냉기로 가득한 어두운 동굴을 지나면
내 팔에 분홍빛의 작고 따뜻한 아기를 안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명을 잉태한 모성을 보다 강력하게 마취시키는,
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어딘가에서 분비되는 절대적 낙관과 긍정이
수술의 모든 공포를 넘어서게 만들어주었지요.
그것이 하나의 생명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수술인 동시에
하나의 생명을 자신의 삶 속으로 <이식>시키는 수술이기도 했다는 것을
저는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생명, 하나의 인격, 하나의 새로움을 이식받기 위해서는
차가운 수술대 위에 발가벗겨진 채로,
차갑고 예리한 메스 아래 자신을 내맡긴 채로,
자신을 온전히 증여하고 절개해야 한다는 것을,
피를 보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리한 칼날은 피부층을 가르고
지방층을 가르고
다시 근육층을 가른 뒤
<태초의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던> 어두움을 가르고 나서야
그 속에서 잠자던 새로운 생명을 끌어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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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사람은 제가 보기엔 판이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두 사람의 소지품에서 내 것과 같은 물건을 발견했을 때,
저는 흥미로움과 함께 당혹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세 사람은 일단 취향의 면에서는 일치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부터 교통정리가 되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영혼의 <판이함> 속에서 드러나는 작은 <일치점>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요.
저는 자신과 닮은 꼴의 사람을 볼 때면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창조주께서는 질서를 아시는 분이라
아마도 우리의 영혼을 진흙의 몸에 불어넣으시기 전에
당신의 서랍장 안 같은 칸에 넣어두고 계셨던 걸거야......
세 사람은 그럼 각기 다른 정도와 방향으로 진보된 <한 서랍장 안의 영혼>인 것일까요?
물론 이것은 저의 아주 개인적인 <상상>일 뿐입니다,ㅎㅎㅎ.
이 경우에 관한 <상상> 아닌 <현실>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내가 <판이하다>고 <판단>했던 그 두 사람에 대해
나는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을까,
나는 그 사람들을 총체적으로 알기 위해, 받아들이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일까,
단지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자신과의 단편적인 공통점에 집착하고
그것으로 그들을 정형화시켰던 것은 아닐까.......
제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들의 극히 일부분일 뿐인
나와의 <공통분모>, 그것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작은 사건이 제게 안겨준 당혹스러움의 극치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든가 편협한 것이었다든가 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 <공통분모> 찾기가 의미하는 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공통분모 찾기>,
그것은 <남이 이미 자기 지역에서 이루어 놓은 일을 가로채 가지고 자랑하는 일>과 같이
이미 이룩된 공통점의 토대 위에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편하게, 안전하게 시작해보고자 하는 나태함이었고
익숙한 것 속에 머물고자 하는 비겁함이었고,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끈질긴 자기애였습니다.
온전한 이해가 있다면 온전한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온전한 이해 없이도 온전치 않은 사랑쯤은 가능하겠지요.
보다 많이 <알고자 한다면>, 보다 많이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보다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그들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박절히 말하자면
저는 그들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나 자신을 사랑했을 뿐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지혜까지 허락 받았던 솔로몬조차 비탄했듯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음을 잘 알면서도,
뒤져도 뒤져도 내 안에는 새로움이 없음을 잘 알면서도,
내 안 어딘가에 미처 찾아내지 못한 새로움이 있을 것처럼 자기 안을 뒤져대는 모습이란
숨겨둔 비상금을 찾아내지 못해 기억의 꼬리를 붙들고 앉아 있는 늙은 여자의 그것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곧 가련함입니다.
그것은 맹수가 먹다 버린 썩은 짐승의 갈빗뼈 사이로 머리를 쑤셔박고 있는
한 마리의 하이에나와도 비슷합니다.
그것은 곧 추함입니다.
그것은 또한 점심밥을 먹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망각하고
며느리에게 밥상을 독촉하는 치매노인의 억센 고집과도 같습니다.
매를 댈 수도, 훈계를 할 수도 없는 그것은 막막함입니다.
스스로는 새로움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던 여자가 기실 찾고 있었던 것은
새로움은 커니와 새로움을 기함하게 만드는 낯익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여자의 얼굴을 물들이는 그것은 수치스러움입니다.
일생을 함께 할 반려자를 선택하면서
스물 다섯의 철없는 망나니였던 저는
어떤 기준도, 심사숙고도 없이 인륜지대사를 결행했습니다.
오로지 저의 <본능>이 그 모든 과정을 홀로 떠맡아 수행해나갔지요.
자신 안에 치하할 만한 유일한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과는 판이하게 달랐던 사람,
나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던 사람을 두려움없이 선택하게 해준 나의 본능이었습니다.
이후의 삶 속에서
자신의 어떠한 판단도, 의지도 그만한 선택을 수행해내지는 못했습니다.
신앙인이 된 지금,
저는 유일하게 쓸 만한하고도 충직한 일꾼이었던 본능을 접어 두고
이제 그 역할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곧 자기가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이제 내가 나를 맡길 곳은
나를 그것의 종으로 만드는 이성도 의지도 본능도 아닌
선하신 靈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둥근 원을 그리고
그 중심에 점을 찍어서
그 점으로부터 선을 뻗어 칸을 나눈 후에
오색의 빛깔을 칠하며 <방학계획표>를 짜는 아이,
저는 그 아이와도 같이
칸마다 이렇게 적어 넣습니다.
성서읽기, 성서주해서와 그 문제집 풀기, 노트 정리하기, 성무일도 올리기, 독서하기.....
이런 계획표에, 형식과 틀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보고
바오로 사도가 저를 비웃지 못하도록
저는 그 전에 꼭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ㅎㅎㅎ.
제가 오래 전에 <형식주의자>가 되었던 이유는
제대로 된 아름다운 형식의 가장 큰 효능이란
그것이 내용의 변질을 막아준다는 신념 때문이었으니까요.
나를 지배하는 나 자신으로부터,
익숙한 것들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성령께서 내게 준비해 두신 낯설고도 새로운 은사를 이식받기 위해 마련한 이 계획표는
그러나 성실함과 부지런함이 아니라 나태함과 무력함의 지표가 될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가 이 사랑스럽고 순진한 계획표만으로는 역부족인 것일까,
나는 또다시 피를 보는 극단까지 자신을 몰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나의 어리석음은 얼마나 적나라하게 자신의 추함을 확인하고 나서야 물러서려는 것일까....
굳이 피를 보지 않아도,
추함의 가장 깊은 나락까지 곤두박질치지 않아도,
자아의 좁디 좁은 영토 안을 배회하고 있는,
잠시 한 발을 바깥으로 내디뎠다가도 다시 그곳을 기웃거리는 자신의 모습에서
이미 나는 붉은 피보다도 소름끼치는 역겨움을 느끼고 있는데.....
이미 나는 자아의 역을 뒤로 하고 뚜렷한 목적지로 향하고 있음에도
왜 이 여행의 낯설음과 설레임과 고단함을 한껏 즐기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전의 자신도, 새로운 자신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조바심과 미숙함 때문일 것이고
그것이 자아의 역이 됐든, 종착역이 됐든
어딘가에 <안주>하고자 하는 비겁함과 나태함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해왔다고 여겼던 까닭에
이 무서운 집착의 발견에 저는 적지않이 당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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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저는 큰 맘 먹고서 퍼머라는 걸 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머리 모양새가 나이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옷이나 머리모양에 관한 취향이야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시겠죠.
그렇지만 뒷모습이 주장하는 나이를
앞모습이 증거하는 나이가 여실히 배반할 때
사람들은 그런 걸 <사기극> 내지 <주접>이라고 말들을 합니다,ㅎㅎㅎ.
집에 돌아온 저는 거울에 비친 어색한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다소 충격적인 말을 해주었습니다.
너는 본래 촌스러운 데다가 그다지 예쁜 얼굴도 아니었어,
그리고 네가 원했던 건 더 예뻐지는 게 아니라 <변화>였잖아,
이 어색함을 넘어서지 못하면 변화는 이번에도 물 건너 가는 거야......
우연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일생에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밖엔 퍼머를 안해 본 제가,
그것도 때마다 며칠을 못 버티고 풀어버렸던 제가 다시 퍼머를 한 것은
눈에 보이는 다짐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낯설고 어색한 외모조차 견뎌내지 못하는 네가
정신과 영혼에 어떤 수술을 감당해낼 수 있겠어,
자, 이제부터 <버티기>에 들어가보는 거야......
저는 하루하루의 소박한 계획표를 실천하면서(그런데 그 소박한 계획을 실행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네요,ㅎㅎㅎ),
성령께서 이끄시는 이 낯선 변화의 여정을,
네 번째 수술을 견디고,
가능하다면 즐겨보려 합니다.
이전에도 아무 것도 아니었던 제가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을 견뎌내는 것을 새삼 버거워한다는 것도 생뚱맞은 일이니까요.
화가의 꿈을 접었던 6학년 때 이후로
어차피 아무 것도 되고 싶은 게 없었던 인생이었거든요,ㅎㅎㅎ.
오늘로 퍼머머리 닷새째 버티고 있습니다,ㅎㅎㅎ.
첫댓글 연못 옆에 선 프리다 칼로에게 신선이 말합니다. <이 원숭이가 네 원숭이냐, 아니면 이 고양이가 네 고양이냐?>,ㅎㅎㅎ. 갈등하지 말고 한 가지만 주님께 구합시다,ㅎㅎㅎ.고양이가 되고 싶다면 원숭이의 지배에서 벗어나야겠지요.
그런데 이름 옆에 붙은 이 금딱지는 뭐래요? 운영자인 저도 모르겠네요. 신선께 금도끼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금메달은 무엇인지?
사기극 내지 주접 그리고 버티기도 살아온 삶의 변화를 주기 위함이 아닐런지...?
짐작할 수 없는 많은 변화를 거쳐서 이젠 굳건히 안착하신 듯한 자매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줘요.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에게는 큰 봉사가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퍼머한 자매님 모습 기대되는군요.내일 미사때까진 하고 계시겠죠? ^^ 항상 변화를 도모하며 남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속에 살면서도 나와 같은 행동..생각을 가진사람을 만날때면 왜 반가워지는 걸까요? 아마도 아직 고양이냐 원숭이냐에 대한 확신이 없이 살고 있진않나십군요
영혼의 눈을 떠, 자신과 타인의 모습을 명료히 알아 보고, 고양이가 됐든 원숭이가 됐든 함께, <주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을 향하여 거침없이 나아갑시다>. 오늘 주일 본기도였습니다,ㅎㅎㅎ.
프리다칼로는 제가 좋아하는 화가예요. 그녀도 언니처럼 자아가 무척 강했죠. 하지만 고독하고 외로웠어요. 주님과 함께했더라면 하는 바램이 드네요... .
맞아, 그녀가 결국 고통 이외의 것을 화폭에 담아내지 못했다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 그렇지만 자신의 고통과 한 남자에 대한 사랑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그녀의 삶과 그림을 난 좋아할 순 없었어요.
프리다칼로라는 아픈 영혼을 사랑할 줄 아는, 그보다도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OO的(!)인 미카엘라가 나는 훨씬 좋아요,ㅎㅎㅎ.
글라라언니, 난 프리다처럼 치열한 삶을 살지도 강하지도 않은 그런 사람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