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윤슬 외 18편
김성중
바람이 귓불을 찢는 날
일삼아 용마루길을 걷는데
저 물빛 좀 보아
반짝이는 저 물의 눈을 보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물결
아, 텀벙 뛰어들고 싶은
담양호 용마루길 걸으며
물의 나라에 취하다.
2.쌀집 할매가 사는 법
동짓죽을 쑤려면 팥이 넉 되가 필요했다. 다리 근처에서 할매가 파는 햇팥이 보기에도 좋아서 넉 되를 사려고 했지만 현금이 부족해서 두 되만 사고 다음날 두 되를 더 사기로 했다.
다음날 새로운 메뉴로 개업을 준비하는 금성산성 아래 친구 형네 식당에서 버섯전골을 시식했더니 캄캄한 밤이 되었다. 전화로 팥을 폴러간다고 했더니 언제든지 문을 두드리면 가게문을 열어준다고 했었다.
할매는 까만 봉지 두 개에 팥을 담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봉지에 담긴 팥은 햇팥과 묵은 팥이 섞여 있었다.
"할매, 햇팥이 아닌디요."
"나는 잘 안 보여"
"할매, 바구미가 많이 묵었는디요."
"몰라. 나는 잘 안 보여."
다음날 한새봉에서 40명 분 팥죽을 쑤어서 먹으려면 집에 가서 팥을 삶고 준비를 해야 해서 팥 두 되를 폴아오면서 별스런 생각을 해보았다.
허리가 굽은 쌀집 할매 나이가 여든 셋이다. 할매는 치매하고는 친구하지 않을 것 같다.
3.빈 의자
오늘 농협에 가서 화재보험을 넣고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충전 중인 휴대폰을 보니까 이상한 문자메시지가 떠 있었다. “열차 도착 시간 10분 전” 나는 왜 이 메시지가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어제 "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오늘 열차표"를 취소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 용산역에서 광주송정역까지 KTX열차는 탑승하지 않은 승객 한 명이 탑승하기를 기다리면서 계속 달렸다. 그 시간에 나는 집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밥을 먹고 병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나 실망했다. 이런 정신머리 가지고 무엇을 한단 말이냐며 심하게 나를 꾸짖었다. 그리고 서울에 가려고 예매했던 버스표를 취소해버렸다. 차분하게 다락방에서 나 자신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4.고양이가 방충망을 찢다
며칠 전 아내가 현관문과 중문을 잠시 열어두었는데 부엌 뒤 창고에 걸어둔 조기 한 두름에서 네 마리가 사라졌다고, 길고양이가 한 짓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사라진 조기가 너무나도 아깝다는 표정을 짓는다. 바닥에는 먹다 남긴 조기 대가리가 있었단다. 문을 열어둔 잠깐 사이에 어떻게 네 마리나 먹어치울 수가 있었는지 의아했다.
그 뒤에도 그 고양이는 창고 앞에서 서성거렸다. 우리는 고양이를 밀착 감시했다. 외출할 때는 창고문을 꼭 잠갔다.
그런데 아내가 방충망이 찢어진 것을 발견했다. 길고양이가 방충망을 찢고 창고로 침입했던 것이다.
길고양이 먹으라고 음식물 찌꺼기를 논에다 던져주고는 했는데, 요놈의 고양이 이젠 가시 하나도 없다.
5.건망증 유감
그제 집을 나서면서 살구나무를 며칠 못 보겠구나 싶어서 섭섭했다. 추성로와 빛고을로를 타고 가다가 양산동 다 가서야 핸드폰을 충전하면서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흑석사거리에서 일을 보고 다시 집으로 가서 핸드폰을 단단히 챙겼다.
오늘 아침 인헌동 집에서 짐을 챙겨서 낙성대•강감찬역으로 가는데 눈이 허전했다. 안경을 두고 나온 것이다.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내 정신머리를 한탄했다.
메모장에 글을 쓰다가 저장을 하지 않아서 날아가 버린 글이 몇 개인가.
정신 줄 바짝 잡고 살자, 나여.
6.서러운 집
우리 집이 망하고 서울로 가기 전에
내가 산수동에서 하숙생을 치기 전에
그 집 행랑채에서 2년을 살았던 집
13대 대통령선거 개표 방송을
라디오로 들으며 분노하던 집
수십 년 묵은 태산목 꽃이 새하얗게 피었다가
이파리가 하도 많이 떨어져서
아버지가 빗자루로 날마다 마당을 쓸던 집
누나의 딸이 잠깐 머물렀던 집
내가 정식으로 채용이 되었다고
선배 셋이서 소식을 전하러 와서
어머니가 급히 삶은 꼬막에 소주를 마시던 집
마당이 넓고 엄청나게 큰 기와집
오늘 그 집 앞을 지나가다가
그 집 행랑채에서 살던 때가 생각나서
괜시리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지금은 절로 바뀌어버린 집
인생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던 집
7.커플링
결혼 30주년 기념
양각리 시산마을 카페에서
처제와 딸이 벌이는 이벤트
그럴듯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촛불을 밝히면서 꺼내는
아들과 딸이 준비한 선물
커플시계는 차보았지만
처음 끼어본 커플 반지
결혼반지는 살림이 곤궁해서
팔아버린 지 오래
커플반지 오래오래 끼고
오래오래 한세상 누리라는
애들의 마음씨가
나를 울컥하게 하는 밤
8.꿩 대신 닭
저녁밥을 먹으려고 담양공고 앞
수타면 집으로 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금일휴업 표찰이 걸려 있다
조금 더 걸어서
무정식당에서 추어탕을 먹는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버스가 지나가면
다음 버스가 온다
지나가버린 버스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
9.비염
숨을 쉴 수 없다
코가 막히고
콧물이 줄줄 샌다
코가 근질근질하다
눈이 가렵다
잠을 자는 것이 두렵다
체질을 개선하면
비염이 낫는다는
주치의의 말씀을 듣고
탕약을 마시고
침을 맞는다
올 겨울 비염아. 안녕!
10.다락방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오르면
꿈에 그리던 다락방
창문이 세 개나 달려 있고
무등산이 보이고 남산이 보이고
추월산과 병풍산이 보이는
다락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면서
세상과 소통하리
보이지 않는 곳은 마음으로 보면 되는 것
보이는 곳은 더 세밀하게 보려고 하고
내 빈 노트에 감상을 주저리주저리 적으면 되고
나는 다락방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으면 되고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으면
그냥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다가
커피나 한 잔 하면서
옛사랑을 떠올려보기도 하는 것이다.
11.다락방에서
벼르고 벼르다가 오늘
드디어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지금까지 써온 시를 정리하려고
몸풀기를 하고 있다.
마음 독하게 먹고 골라야 하겠다.
쑥 훑어보아도 마음에 쏙 드는 시가 없다.
그러니 동지섣달 긴긴 밤을
시와 더불어 놀 수밖에 없다.
한겨울 강쟁다락방하고
친하게 지낼 일만 남았다.
12.다락방
강쟁마을 우리 집에는 넓은 다락방이 있는데 다락방이 거실만큼이나 넓은 다락방 구석에는 잡동사니를 몰아 두었고 다락방을 빙 둘러서 시집을 꽂아 두었고 컴퓨터와 프린터도 놓아두었다.
이제 나는 그곳에서 작업을 하면 된다. 무등산을 바라보면서 글을 정리하면 된다. 내가 다락방을 사랑하면서 거기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 내년 봄에 멋진 책이 나올 것이다.
이제 게으름 그만 피우고 다락방으로 올라가자. 거기에서 글을 고르고 다듬자.
13.무등산
오늘
내가 가는 길에는
늘 무등산이 있다
아침에는 다락방에서 보았고
한낮에는 강쟁들을 지나면서 보았고
관방제림에서도 보았고
담양고등학교 앞에서도 보았고
대통밥집 마당에서도 보았고
지금은 백동사거리 카페 끌림에서
나에게 손짓하는 무등을 보면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반가운 산
내 마음의 산
14.파리책
다락방에서 컴퓨터를 켜놓고 시를 고르는 작업을 하다가 잠시 산문집(그르이 우에니껴?)을 읽고 있는데 파리 한 마리가 컴퓨터 모니터에 앉아있길래 프린터를 설치하면서 인쇄를 연습했던 종이 두 장을 겹쳐서 파리채처럼 휘둘렀다는데 영리하고 날랜 파리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잠시 뒤에 읽고 있는 책에 파리가 앉는다. 나는 망설였다. 종이파리채를 집으면 파리가 날아갈 것이 뻔하다. 어떡한다? 그래 순식간에 책을 덮는 거야. 역시 나는 머리가 좋아. 그러나 어제 온 책에게 미안하잖아.
나는 과감하게 책을 덮었다. 책을 펴보니 파리가 바르르 떨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나는 코를 푼 화장지에 파리를 싸서 휴지통에 버렸다.
"그르이 우에니껴?"
15.썬크림
사람들이 썬크림을 바를 때
나는 무심했었지
남자가 무슨 크림을 바른다냐
스킨로션 한 번
얼굴에 툭 바르고 말았지
눈가에 반점이 생기고
그 반점이 더 진해지자
이건 아니다 싶어서
지금은 외출할 때는
꼭 썬크림을 바르네
반점이 점점 옅어지고 있네.
16.인생
기 드 모파상이 쓴 장편소설 「어느 인생-초라한 현실-」(새움,백선희 옮김) 마지막 장면에서 로잘리가 잔느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인생에 대해서 누구나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자기의 인생이 특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누구나 자기의 인생을 소설로 쓰면 열 권도 쓸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이란 슴슴한 것이다. 기가 막힌 인생도 한 인생이다. 그리고 그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다. 주인 대접을 제대로 해야 한다.
당당하게 나서야 한다.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여자의 일생"은 일본인이 잘못 번역한 제목이다. 원제는 UNE VIE이다.
17.쉼표
어떤 사람이 책을 읽다가 죽었다. 사인이 분분했다. 부검을 해보았더니 기도가 막혀 있었다. 사람들은 의아했다. 책을 읽던 건강한 사람이 죽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을 찬찬히 살펴보던 전문가는 무릎을 탁 쳤다. 그 책에는 쉼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남자는 책을 읽다가 쉼표가 있는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숨을 참다가 질식해서 숨졌던 것이다.
인생길, 쉬엄쉬엄 걸어가는 길이다.
18.은행잎이불 덮은 살구나무
강쟁길에서 주워온
노란 은행잎 두 바구니
살구나무가 노란 이불을 덮었다
바람에 날리기도 하는
노란 은행잎이불
살구나무는 노란 꿈을 꿀 거야
은행잎이불을 덮은 살구나무
장독대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19.나는 버스 타고 봉선동으로 간다
집을 나서면
긴 골목길 끝에
강쟁정미소가 있고
그 옆에 마을 모정이 있고
면앙정로 큰 길을 건너면
강쟁마을 생활체육관이 나오고
그 앞에 커다란 창고가 있고
그 길을 따라 죽 걸으면
논가에 커피파오 카페가 나온다.
계속 걸으면 담주초등학교가 나오고
담양여자중학교를 지나서
담양군교육청 모퉁이를 지나서
편의점 앞 담양공고 정류장에서
311번 급행버스를 탄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려 문흥IC로 빠져
나를 말바우시장에 내려준다
말바우시장(서) 정류장으로 걸어가서
일곡28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선동 쌍용사거리로 간다
나는 버스 타고 봉선동으로 간다
봉황과 신선을 만나러 간다
시를 타고 하늘을 날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