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8월13일부터 9월3일까지 네 번에 걸쳐 매주 화요일 오후 7∼10시 서울 미내사 강의실에서 강의한 신심명(信心銘)의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이것은 미내사 클럽에서 발간하는 격월간 <지금 여기> 11-12월호에 '케피소스 강가의 침대와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이기도 한데, 이제 이미 책이 나왔으므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여기에 올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내용들도 정리되는 대로 계속해서 올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는 신심명(信心銘) 16번까지를 읽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17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이 17번 글은 잠시나마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7. 歸根得旨 隨照失宗 (귀근득지 수조실종)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근본을 잃나니
그런데 이 글에서 참 많이들 오해하게 되는 것은, '귀근(歸根)'이라는 말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歸根]'라고 말하면 우리는 대뜸 정말 돌아갈 '근본'이 따로 있거나, '근본으로의 돌아감'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사실을 사실로서 다 담아낼 수 없는 언어(言語)의 한계에서 비롯된 우리의 오해이자 착각이며, 우리의 분별심이 만들어낸 망견(妄見)입니다. 사실은 돌아가야 할 '근본'도, '근본으로의 돌아감'이라는 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여기',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자리가 이미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단 한 번도 그 '근본'을 떠난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참나(眞我)'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참 기가 막힌 말인데, 저는 오늘 이 사실을 양자역학(量子力學)에서의 기본원리인 '불확정성의 원리'를 통하여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물리학(物理學)의 세계를 잘 모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저는 '물리' 혹은 '생물' 과목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가 띵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게, 도대체가 그 내용들이 제겐 그저 어렵고 이해할 수가 없기만 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신심명의 이 글을 풀이하는데 있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물리학의 이론을 들먹이는 것은, 저는 오직 '인생(人生)'과 '인간(人間)'과 '자아(自我)' 등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데, 우연히 어떤 책을 읽다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의 그 짤막한 명제(命題)와 그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접하는 순간 문득 그것이 저에게는,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삶과 영혼의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너무나도 절묘한 방편으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신심명의 이 17번 글을 읽는 순간 바로 그 불확정성의 원리가 떠올랐고, 그랬기에 그를 바탕하여 여기에서의 '귀근(歸根)'을 설명하려는 것인데, 그러나 그때의 제 가슴을 울린 진동만큼이나 잘 설명할 수 있을는지요! 어쨌든 노력해 보겠습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양자역학에서의 기본 원리의 하나로서, 입자(粒子)·파동(波動)의 이중성을 이해하기 위해 1927년 하이젠베르크(W.K.Heisenberg)가 도입한 원리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입자(粒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확정된 값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입자는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가지는데,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려 하면 '운동량'의 측정이 부정확하게 되고, 반대로 입자의 '운동량'을 정확하게 알고자 하면 입자의 '위치'는 완전히 불확실하고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인해 19세기 초 뉴턴(Newton) 역학을 바탕으로 한 결정론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물리 세계에서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고 단지 통계적으로만 기술(記述)할 수 있다는 비결정론적인 새로운 세계관이 대두되었다고 하는데, 하여간 제가 이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주목한 것은, '하나의 입자(粒子)는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입니다. 참 절묘한 발견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원리를 그대로 <우리 자신>과 <삶>에 적용해 보면,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자신>과 <삶> 그 자체에도 분명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그 두 가지 중 '운동량'이라는 측면에서만 자기 자신과 삶을 들여다보고 '위치'라는 측면을 항상 놓쳐버리기에,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에건 자기답지 못하고 자신다움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늘 부초(浮草)처럼 떠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기 한 점(點) ― 우리의 <존재>와 <삶>이 현재 점하고 있는 어떤 위치 ― 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오면서 언제나 그 한 점(點)을 다른 점(點)들과의 비교선상에서만 바라보도록 오랫동안 조건지어져 왔으며 또한 그렇게 길들여져 왔어요.
그래서 이젠 아예 그 점을 그 점 자체로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려① 어떤 것이든 다만 비교선상의 한 점으로밖에 볼 수 없게 되었지요. 말하자면, 무엇이든 비교하지 않으면 깊이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오랫동안 다른 무엇과의 비교선상에서만 자기 자신과 삶을 보아왔고, 또한 그런 측면에서만 인간과 관계(關係)들을 이해해 왔기에 단 한 순간도 진정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다움의 모든 것'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내면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두리번거리며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운동량'에 주목하면 '위치'가 불분명해져 도무지 알 수 없게 되는 것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① 그러나 아이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아직 이 눈을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자신을 남과의 비교선상에 두지도 않으며,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과거나 미래의 그것과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저 매순간 순간 다만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뿐이며, 그렇게 오직 '현재'를 살 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자유롭고 행복하답니다. 예수도 말했잖아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3) 라구요.
그러나 하나의 입자(粒子)는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지니듯이, 우리네 <존재>와 <삶>도 다만 비교선상에서만 바라볼 수 없는 어떤 '절대(絶對)의 창(窓)'을 지금 이 순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언제나 흔들리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무엇이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자신의 <존재>와 <삶> 속에 분명히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오랜 세월 언제나 비교선상의 자신만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우리 대부분에게 있어서 잊혀져버린 이 '절대의 창'이 삶의 어느 순간 다시 열리기만 하면
② 그 순간 우리 안에서는 세상과 삶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눈이 뜨여져, 그토록 우리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내면의 모오든 갈증이 끝이 난 평화를 깊이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언제나 '운동량'이라는 측면 ―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모든 것을 비교선상에서 바라보는 마음을 말합니다. 곧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이지요 ― 에서 인생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던 데에서, 어느 순간 '위치'라는 측면으로 그것을 바라볼 줄 아는 ― 즉 '비교'라는 프리즘을 통해서가 아닌, 그래서 자기 자신을 다만 자기 자신으로서 바라보고, 과거나 미래와의 비교 속에서가 아니라 '현재'를 다만 '현재'로서 바라보는 ― 눈이 뜨이는 것인데, 이 단순한 '눈'의 전환이 사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든 비교하면 어떤 <기준>과 <잣대>가 생겨 길다-짧다, 높다-낮다, 크다-작다, 부족-완전 등의 모든 상대적인 세계가 나타나지만, 그와 같은 비교와 분별이 마음으로부터 내려지고 그냥 어떤 것을 그것 자체로서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상대적이었던 그 하나 하나가 사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의 것[絶對者]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③ 그러니 보세요, 결국은 우리의 '눈' ― 곧 마음 ― 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눈 하나가 달라지니 '상대(相對)'가 곧 '절대(絶對)'잖아요? 그러나 또한 사실은 '상대'도 없고 '절대'도 없어요. 그 모든 것은 다만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구(虛構)적인 분별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근본'이니 '근본으로의 돌아감'이니 하는 것도 없어요. 눈 한 번 뜨고 나니, 다시 말하면, '돌아가야 할 근본'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것 같은 무명(無明)과 망견(妄見)이 내 눈에서 한 번 벗겨지고 나니, 뭐, 돌아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늘 우왕좌왕하던 그 자리에서 바로 해탈(解脫)인 걸요!
지금 여기가 바로 근본이요, 번뇌(煩惱) 그것이 바로 보리(菩提)이며, 내가 이미 부처요, 우리 모두가 이미 절대자(絶對者)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이며, 그와 같이 '돌아갈 근본'이라는 것이 아예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귀근득지(歸根得旨)'의 참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우리 눈에 비치는 대로 따라가니, 곧 '수조(隨照)'하니 말입니다, '실종(失宗)'이라, 근본을 잃어버린단 말입니다. 우리 눈에 비치는 게 뭐예요? 모든 상대적인 비교와 분별의 세계가 아닌가요? 그런데 그것은 낱낱이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허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재(實在)인 양 따라가니, 그리하여 이미 '근본'에 있으면서도 다시 '귀근(歸根)'하려 하니, 이 전도몽상(顚倒夢想)을 어찌할까요! ② 그러나 사실 이 창(窓)은 닫힌 적이 없어요. 언제나 열려 있어요. 그렇듯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미 '절대(絶對)'의 자리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눈앞을 가리는 한 가닥 분별심 때문에 이를 때닫지 못하고, 언제나 '지금 여기[此岸]'는 아직 아니라 하며 끊임없이 '저기[彼岸]'를 가려 하니, 이를 어쩌면 좋아요? 성경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요한계시록 3:7∼8)
③ '생멸(生滅)'이 곧 '진여(眞如)'요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이며, '색(色)'이 곧 '공(空)'이요 '중생(衆生)'이 곧 '부처인 불이(不二)……. 그리고 이것은 마치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위치'에 주목하면 '운동량'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꼭같습니다.
다른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안데르센 동화집에 보면 '미운 새끼오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지만, 조금 각도를 달리하여, 그리고 여기에서의 '귀근(歸根)'의 참뜻과 관련하여 그 얘기를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그리고 이 얘기는 도덕경 15장과 중복되는 것이나, 사실 미내사에서도 강의한 내용이기에 여기 그대로 싣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진 모르지만, 백조알 하나가 이제 막 부화(孵化)를 기다리는 몇 개의 오리알들 사이에 끼여 있었고, 어미오리는 그것도 모른 채 새끼 오리들이 얼른 알을 깨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사랑스러이 그것들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때가 되자 새끼 오리들이 한 마리씩 알을 깨고 나오는데, 저마다 방금 깨고 나온 알껍데기들을 한 움큼씩 뒤집어 쓴 채 '꽤액꽤액' 연신 소리를 지르며 자신들의 탄생을 세상에 알립니다. 뒤이어 맨 나중에 우리의 주인공인 아기 백조 ― 미운 새끼오리 ― 도 오래고도 두터운 자신의 껍질을 깨고 수줍은 듯 기지개를 켜며 알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아, 햇살 가득한 세상은 참 눈부시구나!' 그런데 그때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따뜻하고 사랑스런 눈길로 자신의 뒤늦은 탄생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미오리와, 자신보다 조금 먼저 알을 깨고 나와 뒤똥뒤똥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서로 장난을 치고 있는 새끼오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도 당연히 자신도 한 마리 오리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알을 깨고 나온 처음 한동안은 아무것도 모른 채 서로 장난치고 뛰놀며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거듭되고 그들의 몸집이 조금씩 커갈수록 뭔가 미묘한 기운이 그들 사이에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뭔가가 좀 이상해진 것이지요. 뭐랄까, 하여간 서로 다르다는 느낌이랄까……. 원래 백조는 오리보다 몸집이 크고 빛깔도 희며, 목과 다리도 길고, 서로 닮지 않은 점이 많습니다. 그러한 뚜렷한 차이가 그들의 몸집이 커가면서 보다 구체적이고도 분명하게 그들 사이에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조금씩 '미운 새끼오리'는 그들로부터, 그리고 다른 이웃 오리들로부터도 심한 따돌림과 놀림을 받게 됩니다. '어머, 넌 참 이상하게도 생겼구나! 어쩜 그리도 못생겼니?' '이 애는 어쩌면 이렇게 클까?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네?' '이 녀석은 너무 크고 흉측해.' '쳇, 저 새끼오리는 도대체 무슨 꼴이람? 저렇게 못생긴 놈은 우리 가문의 수치야!' '너같이 못생긴 녀석은 차라리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는 게 나아!' '차라리 어디 먼 곳에라도 가버렸으면 좋겠다!' …… 모두들 그렇게 말하며 그를 미워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녀석은 '미운 새끼오리'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모욕감을 못견디겠다는 듯 갑자기 달려들어 그의 목을 물어뜯기도 했는데, 이러한 일들은 날이 갈수록 심해만 갔습니다. 불쌍한 '미운 새끼오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못생겼으면 모두들 이렇게 미워할까 하고 생각하니 한없이 슬퍼지기만 했습니다. 어릴 때의 그 맑고 천진하던 얼굴에는 점차 웃음이 사라졌고, 온갖 어두운 그늘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아,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나도 한 마리 오리로 태어났건만, 왜 나는 늘 이 모양일까?' 아무리 봐도 자신이 싫었습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고, 걸음조차 제대로 오리걸음으로 걷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밉기만 했습니다. 덩치는 또 왜 이리 크며, 온 몸을 뒤덮고 있는 깃털은 다른 오리들처럼 노랗지 않고 왜 이리 보기 싫도록 희기만 한지! 또한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는 길다란 목은 그저 징그럽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싫어질수록 그런 못난 모습으로 자신을 낳은 엄마가 원망스러웠고,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과 운명이 저주스럽기만 했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미운 새끼오리'에게는 모든 것이 다만 자신이 '병신(病身)'임을 증거하는 것들밖에 없었습니다. 그 고통과 자기환멸, 그리고 깊디 깊은 절망감 속에서 '미운 새끼오리'는 또한 얼마나 '온전한 오리'가 되고 싶어 안달했으며, 얼마나 그것을 위해 몸부림쳤는지요! 오리처럼 몸집을 작게 하여 그들과 같이 되어보려고 얼마나 자주 단식(斷食)했으며, 음식을 먹을 때에는 무엇보다도 덩치를 키우지 않기 위해 얼마나 주의깊게 절제하며 음식을 가려먹었던지! 또한 오리처럼 걷기 위해 그들의 보폭(步幅)과 걸을 때의 뒤뚱거리는 자세를 세심하게 관찰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보폭과 뒤뚱거림을 정확히 맞추어 걷기 위해 얼마나 자주 넘어지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지! 그리고 오리에 비하면 아뜩할 만큼 긴 목을 그들처럼 짧게 해보려고 온 몸에 ― 특히 목과 날개 부위에 ― 힘을 주고 얼마나 오므리고 또 오므렸던지! 그래도 여기까지는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노력한 보람이 있어 제대로 되어가는 것 같았지만, 아! 온 몸을 뒤덮고 있어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드러나 버리는 희디 흰 깃털은 어찌할꼬! 생각다 못한 '미운 새끼오리'는 어느 날 걷기 연습을 하다 우연히 보아 둔 호수 곁 진흙 구덩이에 들어가 몇 날 며칠을 뒹굴고 또 뒹굴었습니다. 혹여라도 자신의 보기 싫은 흰 깃털이 오리처럼 노오랗게 될까 싶어서……. 뿐만 아니라 오리와 같은 목소리의 톤을 내기 위해 아프도록 입을 쩍쩍 벌리며 발성연습을 한 게 얼마이며, 잠드는 순간까지도 오리들을 의식하며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잠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주눅들며 가슴 졸여야 했던지! 아아, 그는 그가 받았던 깊디 깊은 상처와 절망만큼이나 처절히 '온전한 오리'가 되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정말이지, 처음 한동안은 진짜 오리가 된 것 같기도 했고, 그 우쭐한 기분에 때로는 그들 앞에 보란듯이 으스대며 나서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가끔씩은 설핏설핏 아직 오리가 되기에는 부족한 자신의 모습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뭐,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일이기에, 마침내 자유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아아, 나도 한 마리 온전한 오리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때 나의 이 모든 고통도 끝나리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날이 가면 갈수록 '온전한 오리'가 되는 일은 자꾸만 더 힘겹고 어려워져만 갔고, 어떤 땐 아무리 마음을 모으고 애를 써도 조금의 진척이 없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날이 자꾸 반복될수록 이번엔 그 많은 노력과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선뜻 오리가 되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밉고 환멸스럽기까지 했으며, 오리가 되는 길이 그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깊디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갈 즈음의 어느 날 그는 문득, 자신이 그 오랜 세월동안 그토록 애쓰고 노력하고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조금도, 정말이지 조금도 오리가 되어 있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마침내 통곡하며 오열하고 맙니다. '아아, 나는 지금껏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구나……조금도 오리가 되지 못했구나……!' 그 자각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줬고, 더할 나위 없는 절망감은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발작하듯 날개를 편 채 펄쩍펄쩍 뛰게 만들었는데, 바로 그 순간 그는 문득 후드득 하고 공중을 날게 됩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은 오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에 그것은 너무나 놀랍고도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어, 내가 날다니, 내가 날 수 있다니……!'
바로 그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갑자기 그의 앞에 펼쳐져 버렸습니다. '미운 새끼오리'는 그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자신은 오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이미 처음부터 오리가 아니었기에 '온전한 오리'가 될 수도 없었으며, 오리가 되려는 그 많은 노력들이 사실은 모두가 부질없는 헛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아, 나는 오리가 아니다! 나는 그냥 나일 뿐이다!(I am who I am!)'
그리곤 '온전한 오리'가 되려고 몸부림치던 동안에 언제나 저주스럽고 환멸스럽던 <그 몸 그대로> 너무나 자유롭고 눈부시게 공중을 몇 번 훨훨 날다가, 때마침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한 떼의 백조들을 만나자, 벅찬 가슴으로 그들 사이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행복한 날갯짓을 하며 '미운 새끼오리'는 창공을 높이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아, 나는 처음부터 오리가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냥 나였다! 나는 못생긴 것도 아니며, 너무 커서 언제나 부끄럽고 저주스럽던 이 덩치도 큰 것이 아니다. 호수물에 비칠 때마다 스스로 화들짝 놀라며 못견디게 싫었던 이 희디 흰 깃털도 잘못된 것이 아니며, 너무 길어 언제나 징그럽게만 느껴지던 이 목도 이제 보니 그냥 사랑스런 내 목일 뿐이다. 아! 나는 그냥 처음부터 나였고,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으며, 이 모든 '진실'을 안 나는 지금 이 모습 이대로 너무나 행복하다……!'
이것이 제가 조금 각색해 본 '미운 새끼오리' 이야기인데요, 보세요, '미운 새끼오리'에게 어떻게 <자유>가 왔죠? 그가 그토록 닮고자 노력했던 '온전한 오리'가 됨으로써 자유가 왔나요? 아니에요. 그렇기는커녕 그는 오히려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백조라는 걸 알게 되면서, 다시 말하면, 언제나 오리의 관점과 오리의 기준과 오리의 잣대로 자신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자신을 그냥 자신으로서 보게 되면서, 그렇게 '눈' 하나가 바뀌면서 스스로를 오리라 여겼던 데서 비롯된 그 모든 짐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거예요. 그것도 스스로를 오리라 여기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참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는 이미 처음부터 백조였어요. 그는 이미 처음부터, 그리고 단 한 순간도 백조가 아니었던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그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의 '근본' ― 곧 본래 백조인 자신의 진아(眞我) ― 을 떠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미운 새끼 오리' 이야기는 정확히 '깨달음'이 무엇이며, '귀근(歸根)'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참 좋은 예화(例話)예요. '미운 새끼오리'가 그랬듯이, 우리도 삶의 어느 순간 자신을 다만 자신으로서 바라보는 눈이 뜨이고, 과거나 미래와의 비교 속에서가 아니라 '현재(現在)'를 다만 '현재'로서 바라보게 되는 눈이 뜨이면, 그리하여 존재의 그 모오든 '진실(眞實)'을 알게 되면, 아아 그땐 우리가 단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는 대자유(大自由)가 마침내 우리 안에서 싹트기 시작해요.
마침내 삶의 '쉼'이 오고, 다시 마르지 않는 강 같은 평화가 우리 안을 넘치도록 흐르게 되지요. <자유>란 그렇게 와요. 끊임없는 노력과 수고로써 미래의 어느 순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 '미운 새끼오리'에게서 보듯이 ― 어느 순간 문득 '진실'을 보는 눈이 뜨이면, 우리는 본래 자유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신은 오리로 태어났다는 그 착각 하나가, 그래서 자신은 언제나 부족하고 못난 존재라는 그 오해 하나가,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중생(衆生)이라는 그 미망(迷妄) 하나가 '돌아가야 할 근본' ― 도(道), 깨달음, 참나[眞我], 부처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 이라는 또 하나의 환영(幻影)을 만들어놓고, 끝없이 끊임없이 거기에 매달리며 거기로 '돌아가려는' 허망한 몸부림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수조(隨照)'하면 '실종(失宗)'이라, 좋습니다, 다음을 보겠습니다.
18. 須臾返照 勝却前空 (수유반조 승각전공)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空)함을 넘어서리라.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추어보면……그래요, '미운 새끼오리'에게서 보듯이, 깨달음이랄까, 자기 자신과 삶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눈의 열림이랄까, 삶에 대한 깊고도 새로운 이해랄까 하는 것은 삶의 어느 순간 문득 그렇게 찾아옵니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요!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쓴 혜능(慧能)은 장터에서 땔나무를 팔고 돌아서다가 우연히 어떤 선비가 읽는 금강경(金剛經) 한 소절(小節)을 듣고는 문득 깨치게 되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원효(元曉)는 잘 자고 일어나 자신이 전날 밤에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의 썩은 물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고통스러이 구토하다가 한 순간 삶의 모든 갈애(渴愛)가 끝이 났으며, 조금 전에 말씀드린 '미운 새끼오리'는 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깊은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다 갑자기 전혀 다른 세계 ― 그러나 사실은 본래부터 그러했던 ― 가 그의 앞에 펼쳐져 버립니다.
또한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완벽주의'에 갇혀 꼼짝달싹을 못하다가, 어느 순간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벌레처럼 파리하게 떨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고는, 미친 듯이 술을 마시며 울부짖다가 지쳐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신은 이미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解放)되어 있더랍니다. 어느 경우이든 다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문제' 속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해방'을 맞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예수는 참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日)과 시(時)를 알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25:13) 라구요.
그래요, 어쨌든 그렇게 내 눈앞을 가리고 있던 무명(無明)이 벗겨지고 한 순간만이라도 '진실(眞實)'을 보게 되면, 그땐 '勝却前空(앞의 공함을 넘어서리라)'이라, 그런데 이때 '앞의 공함(前空)'이란 앞의 14번 '遣有沒有 從空背空(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게 되나니)'에서 '從空'의 공(空)을 말합니다. '공[眞空]'이란 따르거나 좇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추구의 대상도 물론 아니구요.
그런데 뭔가 그러한 진여(眞如)의 세계, '참(眞)'의 세계가 따로이 있을 것 같은 생각 ― 이것이 공상(空相)입니다 ― 에 자꾸만 그것을 따르다 보면 오히려 진공(眞空)을 등지게 된다는 것인데, '미운 새끼오리'의 경우를 예로 들면, 정말이지 자신이 '온전한 오리'가 되기만 하면 자신의 생(生)의 모든 갈애(渴愛)가 끝날 것만 같아 끊임없이 그것을 추구했건만, 그럴수록 자신의 본질과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눈앞을 가리던 무명(無明) 한 자락이 떨어져 나가면서 비로소 모든 '진실(眞實)'을 알고 나니, 자신은 본래부터 백조요 본래 부처였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 것이지요(勝却前空).
19. 前空轉變 皆由妄見 (전공전변 개유망견) 앞의 공함이 전변(轉變)함은 모두가 망견 때문이니
그렇지요? '미운 새끼오리'의 경우에서 보듯이요. 아아, 그런데 그게 지금 이 순간의 우리 모두의 얘기란 말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 꼭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이 신심명 강의 첫 시간에 제가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善惡果)' 얘기를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 태초(太初)의 하와가 저지른 어리석음을 지금도 우리는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잖아요?
아아, 얼마나 애틋한 말인가요! 그리고 이 말은 참 유명한 말이 되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기도 하는데, 그런데 우리가 구하려는 그 '참(眞)'이라는 게 뭘까요? 그게 정말 '참(眞)'일까요? 아니에요. '참(眞)'은 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참(眞)'을 구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진정한 '참(眞)'이 우리에게 와요. 몇 사람의 말을 인용해 볼까요?
라즈니쉬가 이 신심명을 강의하면서 한 말이에요. '진리는 찾을 수 없다. 반대로 모든 탐구가 중단됐을 때 진리가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 탐구자가 없어졌을 때 진리가 당신을 찾아온다. 진리에 대한 모든 욕망이 사그라들고, 어디로 가야만 하는 동기가 사라졌을 때, 갑자기 인간은 빛으로 가득 차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갑자기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해 온 바로 '그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자기 자신이 모든 것의 원천, 자기 자신이 실재(實在)인 것이다.'
또 <나는 누구인가?>를 쓴 라마나 마하리쉬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이른바 깨달음의 상태란 뭔가 새로운 것을 얻거나 멀리 있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이렇게 존재하고 또 항상 존재해 왔던 그대로 그냥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다만 참되지 않은 것을 참되다고 아는 것을 그만두기만 하면 됩니다.' 또 있어요. 이 신심명을 쓴 삼조(三祖) 승찬(僧璨) 스님과 승찬으로부터 법(法)을 이어받아 사조(四祖)가 되는 도신(道信)이 서로 만나는 장면인데요, 아직 어린 사미승(沙彌僧)에 불과했던 도신이 어느 날 불쑥 승찬을 찾아와 묻습니다.
'스님, 해탈(解脫)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허, 이놈 봐라. 아직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승찬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되물었습니다. '이놈아, 누가 널 묶었더냐?' '아뇨.' 어린 도신은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왜 해탈을 하려는 거냐?' '……' 사미승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멍하니 승찬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젠 됐느냐?' '예, 스님.' 사미승은 큰절을 올리고는 환한 얼굴로 되돌아 갑니다. 그렇게 그는 그 순간 깨달음을 얻고는 이후 중국 선종(禪宗)의 사대(四代) 조사(祖師)가 됩니다. 아아, 진실로 진실로 '不用求眞 唯須息見'입니다.
21. 二見不住 愼莫追尋 (이견부주 신막추심)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우리의 사고(思考) ― 혹은 이를 마음[心]이라 해도 좋습니다 ― 는 그 속성상 언제나 모든 것을 둘로 나눕니다. 그래야만 제 직성이 풀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여기'와 '미래의 저기'를 나누고,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나누며, '번뇌(煩惱)'와 '보리(菩提)'를 나누고, '중생(衆生)'과 '부처'를 따로 둡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속(俗)'과 '성(聖)'을 나누고, '부족'과 '완전'을 나누며, '나타남'과 '돌아갈 근본(根本)'을 나눕니다.
그리곤 이 세계가 실제로 그렇게 둘로 나누어져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자세히 캐묻지도 않고, 또한 그럴 틈도 주지 않으면서, 이번엔 그 둘 중 하나만을 간택(揀擇)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내몹니다. 다른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지요. 아니, 사실은 사고(思考)에는 다른 여지가 없습니다. 일단 둘로 나누면 그 중 하나만을 택하려고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언제나 안달하는 것이 또한 사고의 속성입니다.
아아, 그런데 우리가 그 사고 안에서 살고 있으니, 그리고 그 사고가 보여주는 것이 전부요 사실인 양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가 끊임없이 그 양편 모두에 끄달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그러나 사고가 보여주는 것은 실재(實在)가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실재 같은 허구입니다.
22. 有是非 紛然失心 (재유시비 분연실심)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그렇지요, 잠깐만이라도 시비(是非)를 일으키면…….
23. 二由一有 一亦莫守 (이유일유 일역막수)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으나, 그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둘'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사고(思考)가 만들어낸 허구적인 분별(分別)입니다. 그럼 '하나'는 무엇일까요? 그 '하나'는 이를테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원효(元曉)와 해골바가지' 이야기에서 원효는 동일한 해골바가지를 가지고 한 번은 '깨끗하다' 하고 다른 한 번은 '더럽다'고 분별했습니다. 그러나 해골바가지는 그냥 해골바가지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봄에 눈부신 햇살 속에서 목련꽃이 화사하게 필 때 우리는 그것을 보며 '아름답다' 하지만, 곧 그것이 힘없이 툭! 져버릴 때 우리는 그 떨어진 꽃잎을 보며 '추하다' 합니다. 그러나 목련꽃은 그냥 피었다가 그냥 질 뿐입니다. 제 집사람은 언제나 이전에 살던 집을 좁다 하며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가고 싶어했습니다. 물론 집사람이 다니던 교회가 옮겨가면서 그 교회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도 작용해서 우리는 결국 이사를 했습니다만, 전에 살던 집도 제게는 그저 감지덕지(感之德之)했습니다. 어쨌든 제가 그 집을 '넓다' 하며 감지덕지하든 집사람이 '좁다' 하든 그 집은 그냥 그 집일 뿐이었습니다. '많다'-'적다', '길다'-'짧다', '높다'-'낮다', '앞'-'뒤'라는 등등의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그 '하나'란, 말하자면, 우리가 분별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있는 그대로의 것' 또한 사실은 실체(實體)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 또한 언제나 변화합니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흐른다는 것인데, 그것을 불가(佛家)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니 그것 또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에요(一亦莫守).
24. 一心不生 萬法無咎 (일심불생 만법무구)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 가지 법(法)이 허물이 없다.
그렇지요?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 말해 분별심(分別心)이 일어나 간택(揀擇)하지만 않으면, '있는 그대로의 것'은 그냥 그것일 뿐입니다. 버릴 것도 취할 것도 없고, 번뇌(煩惱)도 없고 보리(菩提)도 없으며, 성(聖)도 없고 속(俗)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고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냥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 만 가지 법이 허물이 없습니다.
25. 無咎無法 不生不心 (무구무법 불생불심) 허물이 없으면 법이랄 것도 없으니,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다.
그래요, 그래서 그냥 살면 돼요. 그냥 살면 그것이 그대로 천지(天地)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어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삶이 얼마나 쉽고 가벼우며 또한 신명나겠어요? 살아있음은 그래서 축복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과 삶의 본질이에요. 햐∼!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제 가슴이 막 벅차 오르네요!
26. 能隨境滅 境逐能沈 (능수경멸 경축능침)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27. 境由能境 能由境能 (경유능경 능유경능)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이 26번과 27번은 제가 지난 94년 4월 영남일보를 사표내고 50일 단식(斷食)을 하려고 올라갔던 상주의 극락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럴려니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고, 그래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그 얘기는 다음 시간에 하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