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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융합의 시대, 말라카를 담다-아름다운 도시 디자인 여행
말라카는 또말레이 군도,인도,그리고 중국의 문화요소와 유럽풍의 요소들이 모두 뒤섞이면서 독특한 건축과 문화도시 경관을ㅁ 만들어 내었으며, 400년간 식민지 지배속에서도 독특한 문화의 꽃을 피운 생명력의 도시이다. 말라카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부터이다.말레이,인도, 중국, 이슬람,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흔적이 한 덩어리로 이룬 도시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내기 힘든 유례일 것이다.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부터ᅟᅵᆼ 전 세계적으로 찾아내기 힘든 유례일 것이다. 여기에 이주 중국인들이 말레이 사람들과 결혼해 낳은 페라나칸 [Peranakan]의 문화까지 더해져 인간 융합적인 독특한 건축과 문화도시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말라카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과 문화도시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매우 다양한 숍 하우스와 도시건물들이 남아 있는데 이 건물들은 종류도 다양하며 건축 양식의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도시 자체가 역사, 건축, 예술의 종합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이 건축물들 중 대부분은 네덜란드와포루투갈의 식민지 지배 기간에 지어졌다고 한다.
말라카는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앞에 승리와 탐욕의 상징적 정복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문화 요소들 속에 전쟁 뒤에 남는 또 다른 자취들로 도시를 재탄생시켰다. 건축과 예술 디자인이 숨어 있는 생명력 있는 도시를 발견했다.
500년 전 Gores 상인들은 1월에 말라카에 두세 척의 배로 항해해 와서 8월이나 9월에는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어디서 왔다고 밝히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은 매우 정직하고 신용이 있는 사람들로 말수가 적다. 금,구리,비단,도자기,보석함,부채 등을 팔며 무역은 말라카,중국, 일본에서 한다고 하며, 카톨릭은 믿지 않으며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친다라고 하였다. 서양인 부른 우리나라의 국호의 역사 꼬레아,코리아이다.
1402년 건국된 말라카왕국은 당시 동남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포르투칼은 자신들이 유럽시장에 판맿기를 희망했던 상품을 인도시장에서 구입할 경우 말라카를 통해 유입되는 같은 종의 상품과 경쟁할 수 없어 말라카의 무역항을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1509년 알부케르크는 말라카 점령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포로로 잡힌 아라우조가 1510년 말라카에서 알부케르크에게 편지를ㄹ 보냈다.
Gores 또는 Guores 란는 사람들이 말라카에서 무역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엇다.
과연 500년 전 동남아시아에도 우리 조상은 해상무역을 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가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해 사해四海를 평정한 사실이나 장보고가 당나라와 ㅇ신라,일본삼국에서 모두 국가조직과별도로 움직이던 독립무역선단은 중계무역뿐만 아니라 이슬람상인들이 당나라까지 가져온 서역의 물품들을 신라와일본에 전했고, 당시 인기있었던 자기를 직접 청해진에서 생산하기도 했다. 이 후예들이 말라카에서 활동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말라카는 말레이시아 말라카 주의 주도로, 말레이반도 서해안 남부에 위치해, 동서 해양 교통의 말라카 해협에 속하는 항구도시이다. 말라카 강 어귀에 있으며 강의 좌측에 세인트 폴 언덕이 솟아 있다. 동남아시아 특히 말라카 해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며, 아시아의 쿠바, 역사적인 도시를 가꾸고 사는 중국인, 말레이인, 인도인, 포르투갈인, 그리고 혼혈인들, 다인종 다문화가 한데 어울려 이룩한 역사적인 도시이다.
현재는 싱가포르에 밀려 연안 무역항에 지나지 않지만 과거 수백년간 말라카는 아시아에서 제일 가는 무역항이었다.
원래 한촌에 불과하였으나 14세기에 수마트라섬에서 온 팔라메시바라가 이곳을 중심으로 이슬람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동서무역의 중계지로 번창하였다. 1511년 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이 왕국을 멸망시키고 아시아 최조의 유럽식민지로 만들어 향료 무역의 독점과 그리스교의 선교 기지를 삼았다. 그 후 1641년 네덜란드가 빼앗아 해협을 지배하였고, 1824년 영국의 소유가 되었다.
말라카는 서방세력들이 처음 발을 디딘 동양의 땅이었고, 동ㅇ양과 서양, 거대하고 상이한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엇다.
과거 수백년간 말라카는 아시아에서 제일 가는 무역항이엇다. 무역량으로 따지면 수에즈운하에 비견됐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수심이 너무 낮아져 항구로서의 기능이 거의 상실했다. 간척 개발이 한창인 해변보다 오래된 가옥이 늘어선 말라카 강변의 분위기가 한층 더 아름답다.
수마트라섬 ㄱ스리비자야왕국에서 온 팔라메시바라왕자가 자신이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 곳이 바로 나무아래에서이다.
말레이왕국의 공식 문양에는 호랑이가 받치고 있는 가운데 그림들은 말라카나무,국조, 국화, 동해 패낭대교,팜나무이며, 그 위에 이슬람 국가임을 상징하는 초승달과 칼문양이 그려져 있다.말라카 나무는 말레이 역사에서 우리의 단군신하만큼 중요한 역사의 상징이다.<말레이 왕국의 문양><말ㄹ라카 나무>
왕자는 이곳에서 궁지에 몰린 아기 사슴이 자신의 사냥개를 물리치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얻었다고 전한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작은 힘으로도 용맹하게 맞서면 큰 힘을 이길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나무의 말라카이름을 따서 1402년 말라카 왕국이 건립된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최초의 해상왕국
팔라메시바라왕의 바람대로 작은 왕국 말라카는 전 세계의 큰 도시들을 상대로 세계적인 항구도시로 발전하엿다.
말라카는 아랍인들에게 신밧드로 잘 알려진 중국 무슬림 출신의 정화제독이 전 세계 바다를 누빌 때 해상 중계지로 삼았던 곳이다.
그 흔적을 따라 중국에ㅂ서 출발-말라카-인도의 말라바르 해안에까지 이르는 말라카 해협은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에 있는 깔때기 모양의 해협으로 길이는 무려 900㎞에 이르지만, 폭은 상대적으로 좁아서 10㎞가 채 안되는 곳도 있는 독ㄴ특한 해협이다.
말라카해협은 국제무역에 있었서 과거부ㅆ터 상당한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과 인도라는 거대한제국을 잇는 가장 빠른 해상로이었기 때문에 동양을 잇는 해양의 실크로드로 불리는 곳이다.
말라카는 9세기 초 장거리 해상 기술의 발달로 말라카 해협이 중국과 인도 사이의 무역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수마트라섬 남쪽 팔렘방을 중심으로 선원들을 위한 숙박업, 창고업, 시장등이 발달하면서 동남아시아의 최초의 해상제국이 건설되었다. 바로 스리비자야 왕국이다.
*명나라의 정화함대를 극진히 대접한 술탄왕국
말라카는 아랍인들에 신밧드레 잘 알려진 중국 무슬림 출신의 정화제독이 전 세계 바다를 누빌 때 해상 중계지로 삼았던 곳이다.
술탄왕국이란 이슬람교 왕국에서 술탄이라는 사람이 종교와, 정치를 모두 담당햇던 왕국이다.
1402년 건국할 당시에는 이슬람의 요소가 부족했지만 1414년 2대왕이었던 머갓 이스칸다르샤가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3대 무함마드 샤를 거쳐 이스람왕국으로서 입지를 다졋으며, 아랍인, 인도인 상인들이 모여들어 거대한 무역왕국으로 성장했다.
이 때 서역에서 온 이스람상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무역활동을 하고 있던 시기이었기 때문에 팔라메시바라는 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나라 전체를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또 명나라에 사신을 조공을 보내고, 해외원정을 나온 정화함대를 극진히 대접하는 등 중국과의 우호를 다지는 데도 상당한 정성을 들였다.
***정화함대
정화는 1403년 명황제의 명을 받아 선박 200여 척에 선원과 병사 2만 7800명을 태운 세계 ㅇ하최대규모의 함대가 출항한다. 큰 배의ㅣ 길이가 400m,너비가 160m에 달했다. 1차 세계 원정대였다. 정화의 대항해는 1433년까지 28년간 총 일곱 차례에 18만 5천㎞을 항해하였다.
명의 영락제가 이 원정을 명한 이유는 1, 영락제에 의해 황제에서 쫓겨난 뒤 잠적한 조카 건을 찾는 것이고, 2,해외에 거주하는화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동시에 국가의 위엄을 과시하는 일이었다의 ㅣ. 3,광대한 무역시장을 개발하고 남양의 국가들과 연계를 맺어 남해양평화유지와 조공무역 대외정책이었다.
정화원정대는 인도양을 거쳐 소말리아 모가디슈까지 33개국에 닿았다.중국,세계를 발견하다의 저자 게빈 멘지스는 콜럼버스보다 71년 ㄱ먼저 정화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다ㄴ고 주장한다. 또ㅗ 마젤란보다 98년 앞서 세계를 일주했으며, 디아스보다 60년 먼저 희망봉을 회항했다고 한다.
이 저자느ㄴ 1434년 중국의 정화함대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불을 지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고안한 비행장치, ㅊ다연발 기관포 등이 그의 독창적 발명품이 아니라 중국에서 이미 발명된 것들이다.
함대를 이끌던 정화는 1433년 사망하지만 정화의 함대는 1434년 피렌체에 도착해 교황 유게니우스 4세를 알현하고 지도, 천문학,수학, 예술,건축,인쇄술 등을 전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불을 지폈다. 영락제 사후 정화의 항해기록과 해도는 물론 선박도 파괴되었다. 이는 동양이 쇠락하는 큰 요인이다.
*말라카 해협의 부의 원천적 가치
말라카 왕국은 향료 무역과 중계무역으로 번창하였고, 15세기 후반에는 전성기를 맞아 말레이 반도 전체와 수마트라섬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엿다. 하지만 이들의 영광은오래가지 못했다. 16세기초 유럽인의 동남아에 대한 최초의 군사공격이 이곳에서 이루어졋다. 인도의 고아지방에서 기지를 가지고 있던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침공하여 결국 1511년 포루투칼은 말라카를 점령하고 향료무역을 독점하엿다. 서양세력들이 이곳을 최초로 노렸다는 것은 말라카해협이그만한 부의 원천이라는 입지적 조건을 가진곳이었기 ㄷ 때문이다.
이후 말라카는 네덜란드와 영국에의해 차례로 점령을 당한다. 1842년 영국과 네덜란드가 제1차 영화조약을 맺어 말라카해협을 기준으로 지배권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이때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나누어ㄴ지게 되는데, 어느 한 나라가 말라카해협을 독점할 수 없는 요충지로 계속 신경전을 벌였다. 이에 1819년 영국의 레플스가 말라카해협의 가치를 꿰뚫어 보고 말레이 반도이 끝 지점에항구도시를 건설한다. 이곳이 싱가포르이고 지리적인 이점으로 인해 지금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된 것이다.
*동방에 카톨릭을 포교한 프란시스 자비에르상
성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언덕 위로 벽채만 남은 세인트폴 성당이 보인다. 이 성당은 카톨릭을 처음 포교한 성 자비에르와 관련된 일화로 유명하다. 자비에르는 말레이반도와 일본, 중국을 오가며 카톨릭을 알리는 데 힘쓰다 1552년 중국 광저우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말라카에서 6개월 안치된 후에 그이 첫 해외 포교지였던 인도 고아로 가게 되었는데 관을 열어보니 전혀 썩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자비에르가 바다에 십자가를 던지자 사나운 광품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는 일화도 유명하다.얼마후 한 어부가 같은 자리에서 게를 건져올렸는데 신기하게 자비에르릐 십자가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말라카에서는 등에 십자 모양의 무늬가 있는 게는 성스럽게 여겨 잡지 않는다고 한다.
**세인트 폴 성당 언덕에서의 지나간 전쟁 발자취 열강의 치열한 전쟁속에 남아 있는 요새의 잔재-산티아고
말라카왕국은 건국 100여 년만인 1511년 포르투갈에 의해 멸망했고 뒤이어 1641년 네덜란드, 1795년부터는 말라카를 포함한 말레이시아 전역이 영국의ㅣ 지배를 받는 수차례의 전쟁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향료를 발견한 지 겨우 9년 만에 포르투갈은 당시 황금보다 더 귀했던 향료를 독점하기 위하여 동남아시아로 왔는데 그들은 말라카를 시작으로 아시아 침략의 포문을 열엇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통치시절에 탄생된 다문화 정체성 도시
왕성한 접촉을 통해 강력한 왕국과 도시가 생겨낫고 사방에서 온 이민과 유입된 강한 영향력이 전형적인 다문화 정체성의 도시를 탄생시킨 특징이 있다. 작은 어촌의 옛 항구가 무색할 정도로 큰 항구와 대형 상점으로 성장하였다. 중국 황제의 지원을 받은 왕은 권력을 독립적으로 겨우 유지해야 하였으며, 소수 인종집단이 많았고, 대략 80개나 되는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양한 소수 민족사회 사람들은 이러한 시기에 세워진 도시에 자신들만의 구역에서 살앗다. 이슬람이 유입되어 술탄의 지위를 가졌으며, 그로서 말라카는 이슬람을 연구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1511년 포루트칼에 점령을 당하고, 현재의 세인트 ,폴 언덕이 세워졌고, 총독과 주교용 궁전, 교회 5곳,벼원 2곳, 대학1곳과 다른 공공건물 등이 이 지역에 세워졌다 이로 인해 이슬람의 모스크와 무덤이 훼손되었고 이름람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독특하게 독립된 소수민족 거주지와 다문화주의의ㅣ 전통은 지속되었다.
말라카는 인접국가로부터 번번히 침략을 당하여 1614년 네덜란드가 점령하였으며, 자바와 바타비아(자카르타)를 동양거점으로 만들었다.네덜란드는 기존의 인프라를 그대로 장악하였고, 세인트 존 언덕에 새 요새를 구축하고 1650년 예전 총독 저택은 스타트후이스(의사당)로 개조되엇다. 천주교성당인 성 베드로 교회는 1710년 세워졌으며, 1753년에는 말레이시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 교회인 말라카 그리스 교회가 세워져 지금까지도 이용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중이던 1795년~1818년 말라카는 영국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그로 인해 요새는정문만 남기고 파괴되엇으며, 1824년 영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조지 타운은 영국이 1786년 세웠으며 포르와 네덜와는 달리 영국은 자유무역정책을 채택하였고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새 마을에 정착해서 수출작물을 생산하도록 권장하였다. 이로써 1826년 싱가포르, 말라카와 함께 동남아시아의 해협 식ㅓ민지의 일부가 되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네덜란드 건물-크라이스 처치의 붉은 벽돌
말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처음 한 일은 안전한 거주지 겸 요새에이 파모사를 짓는 것이었다. 원주민 노예를 동원해 술탄의 왕궁과왕릉, 모스크를 철거하고, 성벽 두께가 3m나 되는 요새와 다양한 용도의 건물을 세웠다. 지금은 그 형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뒤이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포화속에 살아 남은 것은 성문과 성당이다.
에이 파모사 요새는 전체적으로 붉고, 거칠게 풍화된 듯 보인다. 가까이서 보면 마치 철이 녹슨 것처럼 보이는데, 철 성분이 함유된 홍토 벽돌로 만들어서이다. 이 벽돌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 쓰인 것과 같은 종류로 수백년이 지나도 변화가 없을 정도로 튼튼하다.
요새 아래쪽에는 멀리서도 붉은 벽과 지붕들이 눈에 띄는데 스태이드더스 빌딩ㅇ를 볼 수 있다. 원래 네덜의 총독의 공관이었는데, 현재는 말라카 민족 박물관이자 랜드 마크로 사랑받고 있다. 크라이스 처치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18세기에 세워졋다. 거대한 대들보와 시계탑에서 네덜란드의 또 다른 분위기가 풍긴다.
*인간과 다문화 복합적 융합문화가 잘 짜여 있는-태피스트리
몇 세기 동안 두 도시의 발전은 말레이, 인도, 중국, 이슬람,포르투칼,네덜란드, 영국의 영향력을 포함하는 다양한 소수 민족과 문화전통을 통합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런 모든 것이 언어, 건축, 종교, 관습, 요리법, 의식과 축제를 포함하는 풍부한 무형 되어 ㅇ문화유산으로 표현되어 인간과 다문화 복합적 융합 문화가 잘 짜여 있는 태피스트리를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인과 말레이 사람 들이낳은 페라나칸의 문화
1979년 말라카에서 보존지역이 처음으로 확인되었고, 1985년에 개보수작업에 마무리되었다. 말라카는 아시아에서 카톨릭 세례를 받은 첫 번째 도시이며 400년간의 식민지 지배속에서도 톡특한 문화의 꽃을 피운 생명력있는 도시이다. 말라카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면서부터이다. 중국인들 말레이 사람들과 결혼해 낳은 페라나칸의 문화까지 더해져 인간 융합적인 독특한 ㅎ문화를 창조해 놓은 도시이다.
*조지타운의ㅏ 독특한 건축과 융합, 문화도시 경관
조지ㅌ타운은 영국이 1786년에 세웠으며, 포르와 네덜와는 달리 nr은 자유무역정책을 채택하엿고, 세계 각국사람들에게 새 마을에 정착해서 수출작물을 생산하도록 권장하엿다.
조지타운은 동아ㅇ시아와 동남아시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과 문화도시 경관을 조성한 다양한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매우 다양한 숍 하우스와 도시건물들이 나아 있는데 이 건물들은 종류도 다양하며 건축양식의 발전단계도보여주고 있다. 이 건축물 중에 일부는 네덜와 포르 지배 기간 중에 지어졌다고 한다. 시내에는 약 200개의 중국인 사원이 있으며, 이슬람 모스크, 인도의 시바 사원도 있으며, 동남아시아에 있는 전형적인 복합도시의 하나로 화교와인도인 거주자가 많다.
*술탄 팰리스의 말레이시아 전통양식의 건물로 된 왕궁 붉은 지붕의 전통가옥촌 캄풍모텐
나무로 지은 붉은 전통가옥촌 캄풍모텐이다. 우리나라 한옥에 해당하는 것이 캄풍인데 지상에서 1~2m높이에 있고, 천장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하면 비가 많이 와도 물에 잠기지 않고, 통풍이 잘돼 위생적이라고 한다. 1922년 지은 빌라 센토사는 그중 가장 오래된 집인데 말레이시아 국기를 내걸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개인 가옥이지만 집주인이 평생 동안 공들여 모은 골동품과 개인 소장품을 전시해 박물관으로 개방하고 있다.
그 독특한 문화에서 볼 수 잇는 도시의 융합 문화는 15세기의 말라카왕궁의 모습으로 바닥이 지면으로부터 1~2m떨어져 ㅇ세워졋으며며, 나무로만 지어진 점이 말레 건축구조를 보여준다.
1511년부터 포르, 네덜,영이 각가 지배하다 1957년에 독립을 하면서 정권을 넘겨받은 말라카는 각각 다른 나라의 통치는 시대마다 다른 특ㅕ징을 남겨 놓았으며 오늘날 이 아름다운 도시 말라카는 어떤 대형 박물관에도 다 못 채울 만큼 많은 유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모든 거리와 모든 기념물에는 승ㄴ리과 탐욕 그리고 무용담과 정복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는 역사의 시간을 거꾸로 향할 수 있는 문화융합의 대표적 도시이다.
*바바와 뇨냐-헤리티지 박물관
중국인과 말레인이 결혼해서 낳은 2세를 바바,여자는 뇨냐라고 한다. 바바뇨냐란 바바(중국인 남자)와 뇨냐(말레이시아 여자)가 결혼해 만든 독특한 문화를 말한다. 중국인들의 생활양식을 말해주은 가구에서부터 요강과 같은 작은 물품, 결혼식 때 사용한 결혼 예복과 함, 신혼부부들이 사용하는 침대, 생일에 먹은 음식,생활의 즐거움을 중요시하는 중국인들이마작을 즐기기 위해 따로 만들어 놓은 방, 그리고 죽은 후 묻힐 관까지 전시되어 있다.
현재 항 제밧 거리로 불리는 존커 스트리트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골동품 수집상들에게 잘 알려진 곳으로 300년이나 오래된 진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골동품 가게들로 넘쳐나고 있으며, 여러 가지 골동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
2015.12.24 01:40 자주적인 말태답사기를 쓰려고 오래 전부터 자료들을 대부분 준비하고 정리하였으나 마지막 정리.편집을 하지 못하다가 이 책을 준비해서 간단히 정리해보다. 책내용이나 실린 사진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없어서 크게 실망한 책이다. 오늘 시험보는 날이라 오후에 귀가해서 쉬었다가 저녁 뒤늦게 정리하다 보니 이제서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