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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 비신의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 |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波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보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89년 《회여록(會餘錄)》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비고(高句麗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인보(鄭寅普)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 사학자인 이진희(李進熙)는, 비문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 해(海), 파(波)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이어 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波"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의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쳤는데, 그 뒤 신묘년(331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 왜구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 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