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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인 여행의 마지막날이 시작되었다. 북부지방 치고는 공기가 좋은 편이라 전에 없는 좋은 날씨 속에 여행이 진행되어서 좋았다. 호텔의 해뜰 무렵의 아침놀이 아름답다.
버스에 오르고 있는 일행. 철강도시로 탈바꿈한 가욕관시의 경우는 조금 예외라 할 수 있겠지만 돈황 등은 사실상 관광 산업으로 먹고 사는 곳이어서 관광을 위한 제반 여건이 좋았던 것 같다. 버스는 항상 이렇게 이층이었는데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사진을 찍기에는 좋지 않았다. 햇빛을 막기 위한 코팅 때문이었다.
이번 여행 중에 가장 기대가 되었던 코스 중 하나인 가욕관이 이날의 첫번째 관람장소였다. 작년 당가촌처럼 너무 일찍 와서 출구가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을 이용하여 가욕관임을 알려주는 글자가 있는 이곳에서 모두들 기념 촬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매표소 너머로 보이는 모습. 앞쪽의 말을 탄 모습의 동상은 명태조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운 공로가 있는 장수 풍승(馮勝)이란 사람이다. 뒤로 가욕관의 성루가 보인다. 성루는 동쪽 관문인 광화문(光化門)이다.
출구를 지나 풍승의 동상 앞에서 단체 사진을 한 장 찍고 동문에 도착하였다. 이곳부터 본격적인 가욕관 관람이 시작된다. 그리 멀지 않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가이드가 말하는 밧데리 차(전동차)를 타고 이르렀다.
동문에서 일행이 다 모이기를 기다렸다. 앞서 온 사람들은 그 사이 기념 사진도 찍고 주위도 둘러보는 비교적 여유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천하웅관(天下雄關)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각. 중국인 관림객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규모가 조금 크다 하면 거의 천하라는 접두어를 붙인다. 산해관에는 천하제일관이라는 간판을 붙여놓았다.
산해관 앞쪽의 광장은 사진 찍기에 좋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단체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삼각을 설치하여 다 맞춰놓으니 중국인 아줌마 사진사가 나타나 아예 "이, 얼, 싼" 하며 자기가 맞춘듯 사진을 후딱 찍는 것이었다. 실소가 나왔다. 그리고 나중에 장당 10원씩에 팔았는데 해상도가 아주 떨어졌다. 그 사진은 윤영희 선생이 구입하여 회원들에게 돌렸다. 물론 나에게는 오지 않았다.
광화문의 문루가 보인다. 옹성이 있고 그 옆으로 통과하게 되어 있다. 왼쪽으로는 극장인 문창각이 있고 오른쪽에는 관제묘가 있었다. 극장은 아마 위문공연을 했던 장소일 것이고 관제묘는 관우가 재신이 아닌 무신(武神)으로 인정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이곳이 광화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보통은 정면으로 출입구가 있게 마련인데 수원 화성처럼 안쪽에 옹성을 만들어 적을 유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지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벽 위에 올라 본 모습. 이 성은 명나라 때 축조한 것이다. 안쪽에는 주둔군들이 묵을 숙소인 파오 같은 것이 있고, 대포인 홍이포도 전시되어 있었다. 광화문의 기둥 사이로 보이는 곳은 서쪽의 문으로 유원문(오른쪽)과 가욕루이다. 가욕루를 나서면 바로 서역, 곧 실크로드로 나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니 외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다. 축조 당시 그대로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특이한 것은 명나라 때 축조한 성인데도 벽돌로 쌓은 것이 아니라 판축법을 이용해서 쌓았다는 것이다. 이 성벽의 끝쪽이 오늘 코스의 마지막이 되는 장성제일돈이 된다.
이번에는 유원문쪽에서 본 모습. 왼쪽의 경사로로 올라 걸어온 것이다. 이곳의 내성벽도 벽돌을 이용하지 않았다. 최소한 구운 검은색 벽돌은... 그런데도 보수를 조금 했을지라도 원형이 놀랍우리만치 잘 보존되어 있었다.
광화문에 이르러 유원문에 도착하였다. 보이는 계단을 내려서 성문을 나서면 바로 서역으로 통하는 가욕루이다. 가욕루 바깥에는 검은 바탕에 붉은 글씨의 표석이 서 있었다.
유원문의 통로로 올라갔던 길인 광화문이 보인다. 성문의 내벽은 벽돌로 쌓은 것이 보인다. 가욕관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조금 작아보였다.
유원문을 내려오면 외성벽과 내성벽 사이의 통로를 따라 다시 옆으로 돌아 가욕루의 문으로 가야 한다. 외성벽과 내성벽 사이로 보이는 이 건물은 유원문의 문루이다.
가욕루를 나와서 보이는 모습. 앞의 것이 가욕루이고 뒤의 것은 유원문이다. 이곳에서 좀 더 멀리까지 나가 전경을 보고 싶었지만 단체 여행의 특성상 개인적인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이곳에는 명나라 때 장수 복장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액세서리 등을 파는 사람이었다. 말하지면 잡상인이었는데 가욕관을 지키던 사람의 후예 치고는 다소 부끄러운 직업이 아닐까 한다. 생긴 것은 우락부락하게 장군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관람을 마치고 돌아나가는 길. 왼쪽이 내성벽이고 오른쪽은 외성벽이다. 외성벽은 성벽 위에서 보았던 장성제일돈까지 이어지는 외성[郭]이다. 둘 사이의 마감처리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왠지 외성벽의 모습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다 돌아나와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관제묘였다. 관우는 명나라 때 특히 숭배되었던 것 같으며, 이곳에서는 재산이 아니라 당당히 문무성신(文武聖神)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말하자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관제묘의 관우상. 얼굴이 붉은 것은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관우가 쓰던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시자도 늠름해보인다. 사진을 찍지말라는 간판이 전반적으로 붉은 색조를 띠는 분위기에서 파란색으로 유난히 두드러져 보인다. 아무런 통제도 하지 않으면서 저런 간판은 왜 붙여놓았는지?
두 번째 들른 곳은 현벽장성이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깎아지른 듯한 벽에 매달려 있는 장성이란 뜻이다. 이곳도 복원을 해놓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서쪽 끝의 장성 모습을 잘 재현해놓았다. 중간중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도 있었다. 이곳도 벽돌보다는 주로 흙으로 쌓은 곳이었다.
현벽장성을 오르기 시작하는 회원들. 이 성벽을 통하여 올랐다가 왼쪽으로 난 낙타 대상 행열 구조물을 설치한 곳으로 내려온다. 바로 성벽 옆의 통로쪽으로 내려오지는 않고 장건과 곽거병 등 석각군 사이로 난 통로가 있다.
이곳 현벽장성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이다. 이 성벽이 가욕관과 이어지고 또 장성제일돈에 이르러 끝이 나는 것이다. 산 위로 용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성벽이 경이롭게 보인다. 이런 성벽을 6500km에 걸쳐 한 군데도 끊어지지 않게 쌓았다니...
중간중간 벽돌로 쌓은 곳이 나오는데 주로 망루 부근이었다. 흙담으로 쌓은 곳은 물론이고 이렇게 벽돌을 구워 쌓은 성벽에도 사람들의 낙서가 많았다. 증거를 남겨 놓은 것이다. 자기가 왔다는, 그리고 낙서자가 바로 나라는...
꼭대기까지는 2개의 망루가 있었다. 아주 높지는 않았지만 내부는 나선형 모양의 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사람 발자국에 많이 닳은 계단을 보니 이곳은 복원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남아 있는 곳인 듯하였다.
성가퀴 사이로는 우리가 올라온 곳이 내려다보였다. 바로 아래로는 소그드인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 낙타 대상이 보이고, 그보다 보금 멀리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석각군이 보인다.
이곳은 복원했다가 허물어져 다시 수리한 모습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성벽이다. 왼쪽으로는 내리막길이 보인다. 북경쪽 만리장성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정취가 느껴졌다.
성가퀴 사이로는 대상들의 행렬이나 석각군 같은 조형물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신흥 철강도시라는 가욕관시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화력발전소가 보였다. 작년 서안 북부지역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어제까지 있었던 돈황에 비하면 이곳은 정말 공기가 아주 안 좋은 편이었다.
현벽장성의 정상에서 내려오는 지점의 시작점에서 본 모습. 주로 흙을 이용해 쌓은 성벽이 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고 그 너머로는 뿌연 도시 구역이 보인다.
두 개의 망루가 보이는 현벽장성. 저 망루를 오를 때는 좁은 나선형통로여서 키도 큰데다 색에 매어놓은 삼각 때문에 걸려서 고생을 했다. 내려가면서 보니 더 아름다워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낙타 대상 조형물은 플라스틱 같은 재질로 비교적 조잡하게 만들었는데 아래쪽의 석각군은 아주 잘 만들었다. 맨 앞에 있는 사람은 서역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는 장건이고 그 다음은 흉노를 물리친 공로가 있는 청년 장수 곽거병이다. 사진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현장법사도 있다. 신라의 승려 혜초도 이 길을 통해서 천축국까지 이르렀으리라.
실크로드 옛 길이라는 각석 위로 장건을 앞세운 석각군이 보인다. 그 뒤로 우리가 돌아왔던 현벽장성이 산의 능선을 따리 쭉 이어지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돌아본 현벽장성. 저렇게 가파른 산등성을 따라 성을 쌓게 만든 흉노족도 대단하고 그를 막으려는 중국인들의 의지도 참으로 놀랍게 느껴진다.
공식적인 일정의 마지막 코스는 장성제일돈이었다. 돈대란 평지보다 약간 두드러진 곳에 대를 쌓고 적을 방위하기 위한 시설이다. 장성제일돈은 용머리인 장성의 동쪽 끝 노룡두에서 이어지는 장성의 서쪽 제일 끝, 말하자면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장성제일돈 표석. 제 뒷부분에 보이는 흙무더기가 말하자면 돈대인 셈이다. 이곳에는 반지하에 전시관을 설치해놓았으나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다.
장성제일돈에서 볼만한 곳은 황하로 유입되는 기련산의 눈 녹은 물이 흐르는 강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있었는데 발 아래쪽은 투명 아크릴 판으로 바닥을 깔아 내려다보면 아찔하였다.
주위에는 이런 봉수대 모양의 돈대 외에도 한나라 때의 주둔지 같은 것을 재현해놓은 곳 등이 있어 돌아볼 만하였는데 기차시간이 촉박하여 가이드가 재촉하는 바람에 전동차로 휙하니 왔다가 휙하니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점심은 가욕관시에 와서 먹었다. 밤에 불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던 마답비연상은 낮에 보니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란저우에 가까워졌다는 표시일 것이다.
어제 저녁을 먹었던 곳. 식사가 괜찮았다. 밤의 멋진 네온사인과는 다른 차분하고 고급스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내부에는 어제나 다름없이 관광객보다는 비즈니스 맨들이 많이 보였다.
란저우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타러 가는 모습. 가욕관 남역에서 출발하여 약 4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한다. 이번에 타보지 못한 탈것이 무엇이었더라?
이번에는 루안쭤(軟坐)를 이용해서 란저우까지 갔다. 이 기차도 깔끔해보였고 워낙 인구가 많은 나라여서인지 몰라도 운행하는 기차의 길이가 장난이 아니었다.
깔끔해보이는 내부. 이렇게 복잡한데 이동하면서 매점으로 가는 길에 보니 중간에는 승객이 하나도 없는 텅빈 객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우리가 기점에서 출발해서 그러려니 했지만 중간에 서는 역에서 타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기차는 시종 기련산맥을 타고 달렸다. 기련산에 왜 만년설이 덮여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10월이 지나가지도 않은 시점에 이렇게 눈을 볼 수 있다니... 뿐만 아니라 이곳을 통과할 때는 고도가 높아져서 귀도 멍멍해졌다.
감숙성쪽은 회교를 믿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기차를 타고 휙휙 지나가는 마을에는 이렇게 이슬람 사원으로 보이는 건물이 참 많았다. 중국 속의 다른 나라인 셈이다.
우리가 타고온 허씨에(和諧)호.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거 허씨에이다. 우리는 이 기차의 2호차에 탔었다. 쭉 뻗은 모습이 보기 좋다.
다시 란저우. 밤에 보는 란저우역 광장의 마답비연상은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여행이 끝나가는 시점에 여행을 기념할 만한 것 중의 하나로 머리에 각인된 것 같았다.
마지막 저녁은 꺼우뿌리라는 곳에서 먹었다. 개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인데 유명한 빠오즈(包子) 곧 찐만두 체인점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이벤트를 많이 하는 것 같았다. 마침 생일을 맞은 조인숙 선생을 위해 깜짝 생일 파티가 있었다. 왕관을 쓰고 케이크에 불을 붙여서, 생일 축가와 함께 훅~
호텔로 향하는 길은 시내 구역을 통과할 때는 제법 밀렸다. 그러나 시내구역을 벗어나자 거의 차 한 대 지나지 않는 길을 달리게 되었다. 공항 가까운 곳에 있는 호텔이었기 때문.
마지막 밤을 보낸 란스호텔(蘭石). 란석은 란저우 석유[石化]회사에서 직영하는 호텔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설이 꽤 훌륭했다. 다만 주위에 볼만한 것이 없이 큰 도로만 뻗어 있어 밤산책을 하지 못했다. 사실 이곳에 오니 날씨도 꽤 추워진데다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머리가 어떤 의욕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분위기라도 오늘이 첫날이었다면 한번 나가볼 생각을 했을 텐데...
첫댓글 감사합니다
산해관과 가욕관을 헷갈린 듯...
두 관문을 다 보고 나니 그에 대한 감회가 이런 실수로.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