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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브르타뉴에서 그린 그림을 다 팔아버린 뒤에 아를을 떠나 버릴까봐 고흐는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이런 우려가 계속 잠복해 있긴 했지만, 고갱의 존재로 인해서 고흐가 심리적 안정을 찾기 시작한 것은 확실했다. 물론 성격이나 취향이 잘 맞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반 고흐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갱은 자신의 예술정신을 함께 꽃피울 귀중한 동지였기 때문이다.
고흐에게 고갱은 프롤레타리아의 표상 같은 존재였지만, 실제로 고갱은 파리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도시인이었다. 그렇다고 고갱이 세련된 ‘대도시형 인간’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그는 고리타분한 사고에 사로잡혀서 현인인 체하는 속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 고흐에게 고갱은 새로운 예술을 구현해낼 천재적인 화가였다. 과연 이런 반 고흐의 평가는 정당할까? 후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확실히 고갱보다 반 고흐가 훨씬 더 위대한 화가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위대하다는 기준은 예술 자체에 대한 헌신성일 것이다. 고갱은 그림 자체보다도 명성에 더 집착한 측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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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화풍을 극복하려했던 고갱의 노력
 고갱은 오만했고, 자만심에 들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으스대기도 해서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생각도 그렇게 진취적이었다고 할 수가 없다.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흥미롭게도 이런 고갱의 존재가 없었다면 아를에서 반 고흐가 그린 걸작들도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여하튼, 아를에서 고갱과 반 고흐는 미술사에 남을 만한 우정을 한 동안 과시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 고흐 역시 중요한 미학적 도약을 이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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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빈센트 반 고흐 [알리스캉의 가로수길] 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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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프랑스 아를의 알리스캉에 있는 교회 <출처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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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탄생한 그림들 중 하나가 바로 [알리스캉의 풍경]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알리스캉은 아를에 있던 고대 로마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길게 포플러가 늘어선 길로 유명했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날, 고갱과 반 고흐는 알리스캉의 풍경을 함께 그리기로 의기투합한다. 고갱은 앞에, 반 고흐는 뒤에 앉아서 각각 같은 풍경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고갱의 [알리스캉의 풍경]이다. 반 고흐도 같은 풍경을 담은 연작을 그렸다. [알리스캉의 풍경]에서 고갱은 모네의 기법을 실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빛의 떨림을 표현하기 위해서 색의 효과를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법의 차용은 고갱의 입장에서 본다면 흔한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평소에 인상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고갱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분위기에 대한 훌륭한 묘사를 편지에서 전해주고 있다. 낙엽이 마치 눈처럼 쏟아지는 곳에 앉아서 둘은 알리스캉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가을이었지만 태양은 여전히 화사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전형적인 남프랑스의 가을 풍경이 청명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다가올 비극에 아랑곳없이 이 시간만은 고갱과 반 고흐에게 이상적인 순간이었을 것 같다.
고갱 마음 속의 풍경 - 자연을 추상화 하다
 나뭇잎들은 가을을 맞아서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햇볕이 뜨거운 아를이니 얼마나 단풍의 색채도 선명하고 짙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보행자가 걸어 다니는 길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한번 씩 바람이 휘몰아가기고 했다. 스산하면서도 청량한 기운이 두 화가의 마음을 자극했을 것이다. 감상에 젖은 것인지 고갱은 햇빛과 낙엽색이 서로 마주치면서 발산하는 주홍빛과 황금빛의 어우러짐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런 노력이 고스란히 그림에 담겨 있어서 흥미롭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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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낙엽] 1888 |
빈센트 반 고흐 [알리스캉 풍경] 1888 |
이 광경은 반 고흐가 그린 [낙엽]이라는 그림에도 잘 드러난다. 이 그림에서 반 고흐는 고갱도 보았을 그 떨어지는 노란 잎사귀들을 황금빛으로 그려놓았다. 확실히 [알리스캉의 풍경]은 아를에서 그려진 여러 고갱의 그림 중에서도 독특한 느낌을 자아낸다. 아마도 고갱은 과거의 유산을 한번 이 그림을 통해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고갱이 모네의 기법을 차용했다고 해서 순진하게 인상주의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고갱의 그림은 인상주의에서 발견할 수 없는 어떤 ‘추상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림의 기법은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하지만, 그림에 드러나는 광경은 괴이쩍을 만큼 비현실적이다.
나무 아래 서 있는 행인들조차도 어떤 살아 있는 현실감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행인들은 이 그림의 중앙에 박혀 있는 특별한 무늬처럼 보일 지경이다. 말하자면, 고갱이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결코 ‘알리스캉’이라는 현실의 풍경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 그림에서 고갱은 현실을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낸 관념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것은 현실에 기대고 있지만 결코 현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고갱의 마음에 있던 그 풍경일 뿐이다.
그림은 자연과 경쟁하는 또 다른 자연
 이런 고갱의 노력이 왜 중요한 것일까? 바로 그림을 자연에 대한 묘사라는 측면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자연에 대한 묘사로 생각한다면, 예술은 자연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갱처럼 그림이 자연을 묘사하지 않고 마음의 풍경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림은 자연과 경쟁하는 ‘또 다른 자연’으로 다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고갱은 반 고흐보다 위대한 화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반 고흐를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은 이렇게 관계의 사슬로 얽혀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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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택광 / 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대학교에서 철학석사학위를, 셰필드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발행일 2011.01.20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Bridgeman Art Library, Wikipedia, Yorck Proje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