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퀴리 부인'으로 익숙한 그녀.
그런데 그녀는 단지 누구의 부인이 아니라 전문적인 과학자였다.
두 문제가 각각 지니는 중요성과 규모를 보고,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는 각각 한 주제씩을 전담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기로 결정했다.
폴로늄과 라듐을 추출해 원소로 확정하는 일은 꼼꼼하면서 결단력이 있는 마리 퀴리가, 방사선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느리지만 신중한 피에르 퀴리가 맡기로 했다.
일반적인 남녀 사이의 역할 분담 측면에서 본다면 이 부부의 연구 분업은 좀 특이한 측면이 있었다.
보통 남녀 사이에 일을 나눌 때면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남자, 덜 힘든 일은 여자가 맡는 식으로 분담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방사능 연구에서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분담은 그 반대로 이루어졌다.
강도 높은 노동을 동반하는 라듐 추출을 마리 퀴리가 맡고, 그보다 상대적으로 덜 힘든 방사선 연구를 피에르 퀴리가 맡았던 것이다.
여전히 세상의 편견은 그녀에게 가혹했다.
이때 가장 힘이 된 이가 바로 남편 피에르다.
1903년 스웨덴의 노벨위원회는 그해의 노벨 물리학상을 방사능 연구에 주기로 결정했다.
그에 따라 노벨상 후보에 오른 것은 베크렐과 피에르 퀴리였다.
후보 명단에 마리 퀴리는 올라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피에르 퀴리는 깜짝 놀라서 위원회에 속해 있는 친구에게 급하게 편지를 보냈다.
이 연구는 자신과 마리 퀴리의 공동 연구이며, 그 안에서 마리 퀴리가 한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노벨상을 받는다면 마리 퀴리도 마땅히 함께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이런 노력이 받아들여져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은 반은 베크렐이, 나머지 반은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가 공동으로 수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