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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浦項] - 꿈과 희망의 도시 글로벌 포항
경상북도수목원 북구 죽장면 상옥리 1-1
내연산 남쪽 산줄기 600m 고지에 조성한 경상북도수목원은 6년간의 준비 끝에 개관한 자연학습장, 총 3천222ha의 부지에 1천510종 17만9천226본의 나무와 풀이 식재돼 규모면에서 동양최대를 자랑한다. 전시실에는 목재표본과 약용 식물 야생동물 박재 등을 전시하고 야외에는 인공연못을 만드는 등 휴식공간을 조성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정보와 함께 소품하기에도 적합한 장소를 만들었으며 경북지역민들의 학습 및 휴식공간으로 활동할 수 있고 아름다운 인공 연못을 있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적합하다.
과메기라는 말은 청어의 눈을 꼬챙이로 꿰어 겨울철 설한풍에 말렸다고 해서 관목어(貫目)에서 유래한다. '목'을 구룡포 방언으로 '메기'라고 발음하여 관목이 '관메기'로 변하고 다시 ㄴ이 탈락하면서 '과메기'로 굳어졌다. 배지기는 3~4일이면 숙성되지만, 통마리는 숙성까지 15일 정도가 걸린다
구룡포(九龍浦) - 웅장한 산세가 아홉 마리의 용과 같다 하여 구룡포.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구룡포
구룡포공원
포항시와 구룡포수협에 따르면 구룡포항에서 위판되는 대게는 수협 위판 기준으로 전국 생산량의 53%를 차지하고 있으며, 제철을 맞은 요즘은 1일 평균 30,000마리를 위판하고 이를 물량으로 하면 10톤에 이른다“고 전했다.
구룡포대게는 구룡포항에서 위판된 후 유통센터 및 택배 등을 통해 전국으로 유통되고 있으며 일부 물량은 구룡포항 대게 전문식당 및 유통센터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
포항시 관계자는 “시에서 지난해부터 대게 생산자단체인 구룡포근해자망선주협회에 대게 유통센터 건립사업을 지원하고 있으며 구룡포대게가 많은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인근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어 광고 제작 및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재 등 전국적인 홍보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룡포 모리국수
비린내 나지 않는 생선을 모디(모아)넣고, 모디가(여럿이 모아서)먹는다는 모디국수가 모리국수로 바뀌었다. 어부들이 어판장에서 팔다 남은 생선들을 가지고 와서 국수를 끓여 달라고 해서 시작되었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발산리와 흥환리와의 경계 지점에 있는 봉우재에 자리하고 있다. 1819년경에 설치된 것으로, 이곳의 봉수는 남쪽 뇌성산 정상에 있는 뇌산(磊山) 봉수대에서 연결되어 북쪽의 대동배(大冬背) 봉수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서울 목멱산(木覓山:지금의 남산)까지 이어졌다. 현재는 대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봉수는 고대로 부터 내려오는 통신 방법의 하나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서로 연락을 하였던 통신수단이다. 이 방법을 국방에 이용하기 위한 시설로 만든 것이 봉수제이며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중앙에서는 병조의 무비사에서 지방에서는 수령의 직접책임 아래 이루어 졌다. 군사정보는 그 정세의 완급에 따라 거화법에 의하여 전보 되었는데 조선 세종1년(1419년)에 완성된 거화법을 보면 5구분법이 있었다.
해상과 육상을 구별하여 해상의 경우 평상시에는 1거, 왜적이 해중에 나타나면 재거(再炬),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거, 접전시에는 4거, 육지로 침입하면 5거로 하였다.
동쪽 땅끝 한반도 동쪽 땅끝 주소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 동경 (경도) : 129˚ 35' 10 북위 (위도) : 36˚ 02' 51 땅끝마을
구룡포항
병포리 해안에서 열 마리의 용 중에 아홉 개의 용이 승천을 하고 승천하지 못한 용 한 마리가 머문 곳이란 전설이 내려오는 구룡포는 포항시의 화려함과 다른 소박한 포구다. 과메기와 대게 철 외에는 잡히는 것이 많지 않은 곳, 그러나 이곳은 하룻밤이면 고등어가 천 마리가 잡힐 만큼, 어느 곳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황금 어장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신대륙이었다. 지금은 비록 화려했던 옛 명성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동해남부 어항의 집결지로 수많은 어선들이 출항하고 회항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룡포 우체국을 돌아 들어간 작은 골목 안은 마치 시간을 되돌려놓은 것처럼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살았던 일본 가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일본 강점기 일본인들의 거류지였던 구룡포 읍내 장안동 골목 사이에 자리한 이곳은 돈이 넘쳐나 개가 돈을 물고 다녔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의 홍보관 >
구룡포 한반도지
우리나라 지형을 닮은 ‘한반도지’에서는 석 달 열흘간 목욕을 하면 삼천리 정기를 받는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국립등대박물관(호미곶등대박물관)
국내 최초의 국립등대박물관으로 우리나라 등대의 역사는 물론 인류와 등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한국 등대의 발달사와 각종 해양 수산자료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이곳에는 빛을 비추는 등명기, 등명기를 돌리는 회전기 등 등대에 사용된 구식 시설물 등 등대 관련 자료 및 소장품 3천여 점이 전시되어있다.
기청산식물원[箕靑山植物園] 북구 청하면 덕성리 362번지에 있는 식물원.
내부는 이 식물원의 모태이며 동의나물·산수국·자란초·팥꽃나무·댕강나무·깽깽이풀·둥글레 등 전국 각지에서 자생하는 식물을 볼 수 있는 자생화원을 비롯하여 다양한 고사리를 식재한 양치식물원,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멸종위기종 식물과 희귀 특산식물을 식재한 울릉식물관찰원, 약초 전시원인 사상본초원, 생태연못인 용연지, 습지원, 아열대원, 향기향수원, 암석원, 해변식물원, 세계 각국의 꽃들이 어우러진 외래정원, 희귀멸종식물원, 비비추 품종과 붓꽃과의 식물이 만발한 호스타·아이리스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성재(南城齋) 남구 대송면 남성리 465
남성재는 고려 의종때 한림학사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영일 정씨의 시조인 형양공 정습명(?∼1151)의 묘단하 재숙지소이다.
내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
진경산수화로 그린 겸재의 그림. 정선은 58세 때인 영조 9년(1733) 이른 봄부터 1735년 5월까지 2년 정도 지금의 포항지역인 청하현감을 지냈다고 한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내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 맨 위의 폭포가 연산폭포(7폭)이고, 아래 두 가닥 물줄기가 관음폭(6폭)이며 맨 아래가 잠룡폭(4폭)으로 바로 내연삼용추도 이다
냉수리 신라비-현존 최고의 신라비(국보 제264호) 신광면 우각리 113
영일냉수리신라비는 1989년 4월 6일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 이상운 소유 밭에서 밭가리를 하던 중 평소 걸림돌이 되어온 것을 파헤쳐서 빨랫돌로 사용하려고 집으로 운반하여 물로 씻어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어 행정기관에 신고하여 학계에서 현지 조사한바 귀중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비에는 신라의 실성왕과 내물왕 두 왕이 진이마촌의 절거리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를 내렸는데 계미년 9월 25일에 지증왕등 각부의 대표 7명이 함께 논의하여 두 왕의 조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다음 별교를 통해 절거리가 죽은 후에는 아우 아사노사신지는 재물 분배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말 것이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중죄에 처할 것임을 결정 하였고, 이 명령은 중앙기관의 전사인 7명과 지방관서의 촌주 2명이 일을 마치고 이 사실을 기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계미란 간기와 지증왕 등 각 칭호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연관 지어 볼 때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는 국가에서 세운 비로 당시 신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고,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현존 최고의 신라고비이다
달전재사(達田齋舍) 연일읍 달전리 425
조선 태종(太宗)2년(1402)경에 창건한 건물이라고 구전될 뿐 확실한 근거자료는 없고, 현재는 조선조 성리학자로 동방 오현(五賢)중의 한 분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선생의 묘소를 수호하는 재사로 사용하고 있다. 구전(口傳)에 따르면 이 건물은 약8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불상(佛像)은 없지만 승도(僧徒)들이 거주하며 묘소를 수호하였다고 한다.
모포줄[牟浦] 다리기 남구 장기면 모포리 338
전하는 바로는, 옛날 장기현(縣) 현감의 꿈에 뇌성산에서 한 장군이 용마를 타고 우물가에 내려와서 물을 마신 후 “이곳은 만인이 밟아주면 마을이 번창하고 태평하며 재앙이 없을 것이다.”라고 이르고는 사라졌다. 그 말에 따라 현감이 줄을 만들게 한 후 격년제로 8월 16일 남북으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북으로는 구룡포와 대보, 남으로는 양남·양북 주민들로 나뉘었다.
모포리에서는 오랫동안 줄다리기 행사가 전해지는데 이때 사용되는 모포줄은 단순한 줄이 아닌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소중히 모셔지고 있다.
뇌성산 아래 골매기당에 있으며, 줄은 마을의 수호신이자 신체(神體)로서 할배신과 할매신을 의미한다. 마을에서는 풍요와 평화를 기원하는 뜻에서 매년 정초에 당제를 지내고, 음력 8월 16일에는 골매기당의 줄을 꺼내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이기는 마을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보경사[寶鏡寺]
신라 진평왕 25년(602)에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온 지명법사가 왕께 아뢰어 「동해안의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략을 막고 장차 삼국을 통일하리라」하자 왕이 기뻐하며 포항을 거쳐 해안을 타고 올라가는데 오색구름이 덮인 산을 보고 찾은 곳이 내연산이며 그 연못을 메우고 팔면보경을 묻고 절을 창건하여 보경사라 하였다 한다. 경내에는 보경사원진국사비(보물 252)와 보경사부도(보물 430)가 있으며 조선 숙종의 친필 각판 및 5층 석탑 등이 있다.
보경사 경내 천왕문 우측 동편(보경사 종무소 마당)에 있는 탱자나무는 2그루가 수관을 형성하고 있고, 수관은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수세는 왕성하다. 근원경은 0.8m, 수고는 6m이다. 탱자나무는 수령이 오래된 것이 희귀하므로 노거수로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축하하며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99년 12월에 완공됐다. 상생의 손은 국가행사인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인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조형물인 상생의 손은 두 손이 상생(상극의 반대)을 의미한다.
성화대의 화반은 해의 이미지이며, 두 개의 원형 고리는 화합을 의미한다. 상생의 두 손은 새천년을 맞아 화해와 상쇄의 기념정신을 담고 있다. 재질은 청동과 화강암이고, 성화대(15m*20m)와 함께 오른손(H8m*L4m*W4m)과 왼손(H3m*L6m*W4m)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이 특이하다.
영일민속박물관 북구 흥해읍 성내리 39-8
향토풍습 및 민속유물을 영구보존하고자 지역 주민들의 뜻을 모아 구 영일군과 영일문화원이 공동으로 현종 원년(1835년)에 건립된 당시 흥해군의 동헌 건물이었던 제남헌을 수리하여 1983년 10월29일 개관이후 1985년 5월 제2전시실을 신축하여 민속박물관으로서는 국내최초로 1987년 6월 30일 문화부로부터 준 박물관으로 지정됨
오어사[吾魚寺] 남구 오천읍 항사리
원효와 혜공이 함께 계곡에서 고기를 잡아먹다가 두 마리 고기를 보고 서로 자기 고기라고 했다고 하여 오어사라고 하였다는 설화가 전함.
일월지와 연오랑세오녀설화 남구 오천읍 용덕리 (해병대 제9227부대 내)
일월지는 옛날 상고시대에 신라시대로부터 「해달못」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부터 한자식으로 부르게 되어 일월지라 부르고 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못이라 하여 천제지 또는 해와 달의 빛이 다시 돌아왔다고 광복지라 불렀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때 고기잡이를 나간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바닷가에 흔들리는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일본 왕과 왕비가 됐다. 이후 영일만에는 해와 달이 그 빛을 잃었다. 점괘를 보니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다가 일본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나왔다. 신라왕이 사신을 일본에 보내 연오랑과 세오녀를 불러오려 했으나 연오랑은 “하늘이 시킨 일을 돌이킬 수 없다.”고 거절했다. 연오랑 부부는 그 대신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고 주문했다. 사신이 돌아와 연못가에서 제사를 올리니 해와 달의 정기가 다시 돌아왔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고, 당시 제사를 올린 연못(일월지)은 경북도 기념물(제120호)로 지정돼 있다.
임곡온천랜드(임곡온천) 남구 동해면 임곡리 113-2임곡온천랜드는 최근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통하여 과거 조그마한 목욕탕 단계를 벗어나 시원하고 전망좋은 찜질방식 온천, 해수탕으로 새로 오픈하여 최근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늘었다.특히 이곳 임곡휴게소는 텔런트 이휘향씨의 남편인 김두조씨의 소유였으나 2001.4월에 약 40억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한동대학측에 기증하여 화제가 된 곳이며 해수탕을 별도로 설치하여 온천과 해수탕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시설되어 있다.
일명 석병성(石屛城)이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돌문마을[石門洞]에서 눌태리 계곡과 응암산(鷹岩山)을 거쳐 동해면 흥환동 배일리에 이르기까지 산등성이를 따라서 쌓은 석성(石城)이다. 이 석성은 현재도 약 5.6km정도가 남아 있다. 1655년(효종 6)에 축성하였으며 둘레 25리에 높이가 10척이나 되었다. 현재 국내 최대 규모로 남아 있는 이 돌성은 여지도(輿地圖), 경주도회좌통지도(地圖) 등 고지도의 표식과 일치한다.
이 성은 목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소속은 울산목장으로 감목관의 관할하에 군사 244명이 1008필의 말을 놓아 길렀으며, 목장 안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는 웅덩이 50여 곳과 마구간 19개 소가 있었다고 한다. 눌태리 등지에 성벽의 잔해가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구룡포읍 읍사무소 정원에 당시 성의 출입문으로 쓰이던 돌문의 일부가 남아 있다.
장기읍성[長鬐邑城]
산성(山城)과 같은 기능을 겸한 읍성으로서 해발 252m의 동악산(東岳山)에서 해안쪽인 동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지맥 정상(해발 100m)의 평탄면에 축성된 동 ·서로 약간 긴 마름모꼴이다. 성 전체의 모양은 연잎 모양의 말굽형이며, 180도 시각으로 동해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쌓았다. 1011년(현종 2) 축성되었는데, 당시 고려가 여진족의 해안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토성(土城)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1439년(세종 21) 왜구의 침입에 대비, 돌성으로 재축된 후 군사기지 등으로 이용되었다
주상절리(柱狀節理)는 용암이 식으면서 기둥 모양으로 굳은 것이다. 땅 속의 마그마가 땅 위로 올라와서 식으면 수축하게 되는데 빨리 식으면 원기둥 모양, 천천히 식으면 다각형 기둥 모양으로 굳는다.
포항 달전리의 주상절리가 있는 곳은 원래 돌을 캐는 채석장이었다. 산을 이루고 있는 암석을 캐내다가 주상절리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주상절리에 약간의 손상이 생겼다. 경주에서 영덕으로 가는 큰길가에 있는데, 신생대 제3기말(약 200만 년 전)에 형성된 것이다.
현무암으로 된 5각형 내지 6각형의 돌기둥이 여러 개 이어져 높이 20m, 너비 100m, 전체면적 32,651㎡ 규모의 암벽을 이루어,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하다. 국내 다른 지역의 주상절리가 신생대 제4기(약 30만 년 전)에 형성된 점을 보아, 시대성이나 규모로 볼 때 포항 달전리의 주상절리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지형이다. 또한 발달상태가 좋고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아 보존할 필요가 있다.
정몽주유허비(螺谷書院) 남구 오천읍 구정리 123-2 (구정리 제일1차아파트 일진검도관옆)
이 비는 고려시대의 충신(忠臣)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선생(先生)의 충절(忠節)을 후세(後世)에 길이 계승하고자 이 지방 유생(儒生)들이 뜻을 모아 선생(先生)의 생장지(生長地)이고 고택(古宅)의 유허지(遺墟止)인 이곳에 인조(仁祖) 12년(1634)에 건립하였다
포스코역사관 괴동동
창업전사, 창업기, 포항건설기, 광양건설기, 대역사 완성 이후,테마존, 창의관, 청암관, 세계 속의 테마존, 창의관, 청암관, 세계 속의 포스코, 야외 전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야외 전시장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용광로인 삼화고로의 실물을 볼 수 있다.
포항에서만 재배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반 개량종 시금치에 비해 키가 작지만 향과 맛은 훨씬 뛰어나고, 가격도 비싸다. 포항의 바닷가 노지에서 햇빛과 바닷바람, 유기 퇴비를 먹고 자란다. 바닷바람이 적당한 염분을 제공하여 맛을 더 좋게 해주고, 자연스럽게 뿌리 부분에 흙이 쌓이도록 모래땅을 복토해주므로 뿌리가 길고 강하면서 빛깔도 보기 좋은 붉은 색을 띤다.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길게 자라지 못하고 뿌리를 중심으로 옆으로 퍼지며 자라기 때문에 뿌리부터 줄기와 잎까지 영양분이 고르게 퍼져서 일반 시금치에 비해 당도가 높을 뿐 아니라 저장기간도 길다. 일반 시금치는 사계절 내내 나는 데 비해, 포항초는 10월 말부터 이듬해 3월까지의 겨울이 제철이다. 된장국에 넣어 끓일 때에는 생것으로 넣어도 되지만 수산(蓚酸)이 녹아내릴 수 있으므로 살짝 데친 뒤에 넣고 끓이는 것이 된장의 영양을 훨씬 잘 흡수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풍력발전기 호미곶면 대보리
경북 포항시 호미곶면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한 해맞이광장의 한 켠에 장엄하고 육중한 자태를 뽐내는 듯 유유히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임곡방면 언덕위에서 내려다보는 호미곶면 전경은 풍력발전기와 조화를 이루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구룡포방면에서 오다보면 호미곶면의 온갖 재앙이라도 물리칠 듯 우뚝 서 있는 풍력발전기를 만날 수 있다. 마치 마을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 있는 풍력발전기는 한반도 최남단의 거센 바람 따라 오늘도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다.
하학재(下學齋) 남구 연일읍 달전리 177
하학재는 조선 중종조(中宗朝)의 현신(賢臣)인 우재 손중돈(1463∼1529)의 도음산 묘하재사(墓下齋舍)이다. 손중돈은 양동마을 입향조(入鄕祖)인 양민공 손소(孫昭)(1433∼1484)의 5男2女중 2男으로 1489년(성종 20년) 문과에 급제후 벼슬길에 올랐고, 연산군 10년 김해도호부사 때 간언하다 파직되었으나, 중종(中宗) 즉위 후 1506년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매 주민들이 연임의 상소를 올렸고, 이임후 상주 단밀현(丹密縣)에 생사당을 세워 화상을 모시고 제향을 받들었다.
호미곶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 한반도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이곳을 일곱 번이나 답사 측정한 뒤 우리나라의 가장 동쪽임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호랑이는 꼬리의 힘으로 달리며 꼬리로 무리를 지휘한다고 하여 호랑이 꼬리는 국운상승과 국태민안의 상징이겠기에, 여기 호미곶에 일제는 쇠말뚝을 박아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으려 하였으며 한반도를 연약한 토끼에 비유해 이곳을 토끼꼬리로 비하해 부르기도 하였다.
호미곶등대
오얏(李)이란 지금의 자두를 말합니다. 자두라고 부르게 된 연유를 알려면 우선 이씨(李氏)의 성씨(姓氏)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중국 이씨(李氏)는 노자로 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노자는 중국 고대의 철학자이며, 도가(道家)의 창시자입니다. 본명은 이이(李耳). 자는(자는 성인[옛날에는 16세 이상]이 되어 관례를 치르면 자를 부여했다. 자를 받으면 어른으로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담(聃). 그래서 노담(老聃)이라고 보통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자는 오얏나무밑에서 태어났으므로 오얏나무를 나타내는 나무 목(木)자와 사내아이(子)를 가리키는 아들 자(子)자를 합하여 오얏 이씨(李氏)라는 성(姓)을 만들었고 귀가 매우 커서 귀 이(耳)자를 이름으로 삼았다고 전하여 옵니다.(담(聃)이라는 글자도 사전을 찾아보면 '귀가 넓어 축 처져서 귓바퀴가 없음, 사람(老子의) 이름'으로 나와 있습니다)
일설에는 노자(老子)라고 부르는 이유도 노자(老子)가 태어난 곳의 나무가 늙은 오얏나무였으므로 늙을 노(老)자에 아들 자(子)자를 붙여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겨난 글자가 오얏 리(李)이고 오얏열매가 대부분 붉은 빛이어서 붉은(紫) 오얏(李)이라는 뜻의 자리(紫李)라고 불렀는데 모양이 복숭아 하고 비슷하게 생겨서 언제부터인지 붉은(紫) 복숭아(桃)라는 의미의 자도(紫桃)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현재 전해 내려오는 자두나무의 유래입니다.
대보등대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착공 당시의 등대는 지금의 위치보다 남서쪽인 고금산 산등성이로 일본인들이 명당 혈을 찌르기 위해 쇠를 박은 곳이라 한다. 이때 주민들이 “범 꼬리에 불을 켜면 범이 놀라 꼬리를 쳐, 큰 천재지변이 난다”고 반대, 기초공사를 중단하고 지금의 자리에 새로 착공했다고 한다. 일본인에 의해 좌우되는 등대 건설 현장에 맞선 선조들의 항일투쟁의 역사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호미곶등대의 불빛은 12초마다 한 번씩 하얀 불빛을 내뿜는다. 아득한 밤바다, 12초마다 눈이 부시다. 호미곶등대의 불빛은 바다 바깥 40km까지 뻗어나간다.
호미곶 청포도 시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 '청포도'로 유명한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1904~1944)의 시비(詩碑)가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호미곶에 우뚝 서 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호미곶과 가까운 포항시 남구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원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려 청포도를 지었다고 한다.
시비는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 크기로 육사를 기리는 비문과 청포도 시가 새겨져 있고. 시비 조형물 디자인은 영남대 홍성문 교수, 비문은 아동문학가 손춘익씨, 글씨는 서예가 정현식씨가 각각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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