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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국에는 수많은 성곽이 남아 있다.
높은 산에는 산성(山城)이 있고 야트막한 산에는 토성(土城)이 있으며 평지나 바닷가에서는 퇴락 했지만 읍성(邑城)이 있다.
성곽은 소수의 수비군이 다수의 침략군을 격퇴하거나 침공속도를 늦추어
후방이 대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하는 건축물이란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또 성곽을 크고 높게 쌓음으로써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인공장애물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그러므로 성곽을 공격하는 군대는 수비군에 비하여 몇 배의 기동력과 병력의 소모를 감수하여야 하고,
공격에 따른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각오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전략적·전술적 이익이 보장되는 성곽의 축조와 분포는 일반적으로 도성(都城)을 중심으로 하여
이를 수호하는 수비군을 지원하는 산성이나 도성 다음 가는 큰 성을 주변에 만들고,
백성들의 생업지인 여러 큰 고을에 읍성을 쌓아 관아와 고을에 소속된 군사들은 물론
유사시에 읍성 밖의 백성들까지도 수용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성곽의 분포는 수도인 도성으로 통하는 중요한 통로를 통제하거나 봉쇄할 수 있는 요충지에 산성을 쌓고
병사를 주둔시켜 전란에 대비하고,
성을 버리고 산성으로 퇴각하여 인근의 여러 소속 군병들과 백성이 합세하여 적의 진로를 차단하거나
통과한 적군의 퇴로를 차단·공격하여 적의 보급로를 끊는 역할도 하였다.
1. 산성
산성은 한국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형식은 입지조건과 지형선택의 기준에 따라
테뫼식(또는 머리띠식)과 포곡식(包谷式)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테뫼식 산성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성벽을 두른 모습이 마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며,
대개 규모가 작은 산성에 채택되었다.
한편 평야에 가까운 구릉(丘陵) 위에 축성한 것도 있으며
경주 월성 ·대구 달성(達城) 등은 평지에 있는 독립구릉(獨立丘陵)을 이용한 특이한 예이다.
산성의 둘레는 400∼600m 가량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800m가 넘는 큰 것도 있으며
성벽은 토축(흙으로 쌓은것)으로 한 것이 많고, 때로는 그것을 2중 3중으로 둘러 구축한 것도 있다.
포곡식 산성은 성 내부에 넓은 계곡을 감싸안은 산성으로,
계곡을 둘러싼 주위의 산릉(山陵)에 따라 성벽을 축조한 것이다.
성내의 계곡물은 평지 가까운 곳에 마련된 수구(水口)를 통하여 밖으로 흘러나가며
성문도 대개 이러한 수구 부근에 설치되어 있다.
성벽은 대개 견고한 석벽(돌)으로 축조되었으나 백제의 부소산성(扶蘇山城)은 토축이다.
이 성은 둘레가 2,000m 내외이나 조선시대의 포곡산성은 5,000∼6,000m 내지 1만m가 넘는 대형산성도 적지 않다.
이들은 가공석재를 사용한 완전한 석축성벽과 무사석(武砂石)으로 구축된 성문, 그리고 총구멍이 있는 여장(女墻)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현존하는 이들 산성으로는 임진왜란 때의 행주산성, 병자호란 때의 백마산성·남한산성 등을 비롯하여
부여의 성흥산성·부소산성·청마산성·청산성·석성산성·건지산성, 공주 공산성,
경주 남산성·부산성·명활산성, 주산산성, 물금증산성, 화왕산성·목마산성,
김해 분산성, 함안 성산산성, 성주 성산성, 양산 신기리산성·북부동산성 등을 들 수 있다.
(1) 산성의 기능
고대로부터 한반도는 평지가 부족하고 그에 비해 산지가 많은 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대부분이 평지 지역인 중국과 많은 비교가 된다. 그
리고 바로 이러한 지형적인 차이점으로 인해 우리나라와 중국의 방어 체계 또한 현격히 달라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먼저 우리나라의 성과 성지에 대해서 알아보면 우리나라에는 많은 형태의 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산성이 압도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고대로부터 산지가 많이 분포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주요 교통의 요지는 바로 산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통의 요지를 먼저 점령하는 국가가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기에 그만큼 산의 중요성은 높았던 것이다.
이러한 전술은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한국 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받아들여졌던 전략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산의 중요성은 예부터 부각되어 옛 국가들은 모두 산을 점령하면 거기에다 견고한 산성을 쌓아서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다르다. 대부분이 평지인 중국은 굳이 산성을 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중국인들은 일직선상에 성을 만들어 쌓아올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만리 장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만리 장성은 그 규모에 비해서 견고한 방어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에 북방민족이 모두 만리 장성을 넘어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리장성과 같이 일직선상에 쌓은 성은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적군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한순간에 성으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그에 반해 각각 독립된 우리나라의 산성은 하나가 무너져도 다른 성들은 그 기능이 살아 있다는 점에서 대비된다.
(2) 대표적인 산성의 예
1)금정산성
사적 제2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길이 1만 7336m, 면적 21만 6429평. 동래온천장의 북서쪽 해발고도 801m의 금정산정에 있는 한국 최대의 산성이었으나,
현재는 약 4km의 성벽만이 남아 있다.
산성의 위치·규모로 보아, 신라 때 왜적을 막기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보이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증보문헌비고』와 『동래읍지』에는 1703년(숙종 29)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석축으로 개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수축하였고, 1808년(순조 8) 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문(東門)을 신축하고 성을 보수하였으며,
1824년 부사 이규현(李奎鉉)이 성내에 건물을 짓고 진장(鎭將)을 배치하였다.
1970년에 4 개 성문 중 동·서·남문이 복원되었다.
2)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요충지로 기능해 온 장소이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인조 2년(1624)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민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 들어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2. 읍성
수도로서 나라의 중심이 도성(都城)이라면 군, 현의 주민들이 살면서 군사적이거나 행정적인 기능을 지닌 곳은 읍성이다.
그러나 모든 행정 중심지가 성곽을 두르는 것은 아니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만 성곽이 설치되었다.
읍성은 지방 행정 관서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며, 성안에 관아와 민가를 함께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읍성은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아울러 갖는 특이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부(府)·목(牧)·군(郡)·현(縣)은 도(道) 산하에 있는 행정적인 단위로서, 이를 통틀어 고을(邑)이라 하고,
그 지방관들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고을을 에워싸서 축조한 성곽을 읍성이라 한다.
읍성의 형태는 부정형(不整形)의 타원 또는 원형을 이루며 돌이나 흙으로 쌓았다.
평상시에는 읍성이 행정 단위가 되지만 유사시에는 방어 기능의 성곽이 되어 성문을 굳게 닫고, 군·관·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성을 지킨다.
이러한 읍성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존재로서 고려 말에 등장하여 조선 초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 초기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이 179개가 나타나는데 당시 부, 목, 도호부, 군, 현 등 행정 구역이 330여 개였던 것으로 미루어보면
반수가 넘게 읍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이 위치하는 입지조건으로서는 가장 좋은 조건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넓고 평평한 곳, 수천(水泉)이 풍부한 곳, 교통이 편리한 곳, 비옥한 토지가 있고 경작지가 가까운 곳,
내부가 험하고 큰 곳, 주민들이 번성한 곳, 그리고 석재가 많아서 공력을 덜 수 있는 곳이 순위별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백성들이 비상시에 성에 들어가서 오랜 기간을 성내에 머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풍부한 수원과 백성들이 거주하고 관사를 설치할만한 적당히 넓은 지형이 요구되었으며,
주위에는 토지가 비옥하고 충분히 경작할만한 곳들이 선택되었다.
읍성은 남해, 서해안 지방과 북쪽의 변방에 주로 축조되었는데, 고을의 크기나 중요성에 따라 그 규모는 크게도, 작게도 축성되었다.
경상, 전라, 충청 지방의 해안에 읍성이 많이 설치된 것은 고려 말 이후 잦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고
함경, 평안도에 읍성이 많은 것은 거란, 여진족들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읍성 가운데에서 평산성이 아니고 순수하게 평지에 축조된 형식은 조선 초기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전남 승주군의 낙안읍성이나 홍성의 해미읍성 등은 평지에 축조된 대표적 읍성이며 오늘날까지도 성벽의 옛모습을 잘 지니고 있다.
(1) 읍성의 방어시설
1) 성문(城門)
성문의 수는 성곽의 규모, 축성목적, 지형 등 제번 여건에 따라 정해졌다.
성문의 형식에는 개거식(開据式), 평거식(平据式), 홍예식(虹霓式), 현문식(懸門式)이 있다.
2) 여장(女墻)
여장은 그 역할이 적의 화살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한 방어시실로서, 『
화성성역의궤』에 고제(古制)의 여장의 규모는 높이가 6척이고, 넓이가 7척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서는 성체에 여장을 시설하는 것을 규식화되어 예외없이 여장을 시설하고 있으며,
이 여장의 수와 입보(入堡)하는 인정(人丁)의 수를 맞추도록 하고 있다.
3) 치성(雉城)
치성은 성 밑에 접근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
규모는 전면(前面) 15척, 좌우 각 20척의 규모를 제도로 정하도록 하고 있으며, 거
리는 150척마다 1개소씩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4) 옹성(甕城)
옹성은 적의 침공시 가장 취약한 성문을 보강하기 위한 시설로서
성석(城石)은 모두 연석(무사석)을 사용하여 축조하고 있다.
옹성의 길이는 50∼60척 정도로 성문에 설치한다.
5) 해자(海子)
해자(垓子)라고도 하며 성벽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시설이다.
이 해자의 규모에 대하여,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해자는 성 밑에서 4척 밖에 굴착(掘鑿)하며,
해자의 넓이는 반드시 4척 깊이는 2척 이상으로 하고 해자 주변은 반드시 벽돌로 쌓아야 한다고 하여
그 규모 및 우마장(牛馬墻) 시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록에 의하면, 해자는 성벽에서 8.4m 떨어져야 하며,
그 규모는 8.4m의 넓이에 깊이는 4.2m 이상으로 시설토록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현문(懸門)
현문(다락문)의 경우 고려시대에 나주 금성산성에 설치한 기사가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중국 명나라의 도본(圖本)에 의하여 문종대에 의주성에 시설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밝혀진 바 없으며,
다만 『묵자(墨子)』에 수록된 바와 같이, 중국식 제도의 현문은 성문에 겹문을 매달아 놓고 수직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으로
2개의 겹문을 모두 올려야지만 통행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금성산성의 예와 같이 현문을 내려야지만 통행이 가능한 고려시대의 현문 설치 방법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7)도성
도성은 수도의 방어를 위하여 구축한 성곽으로 삼국시대 백제의 부여와 고구려의 평양에는 외곽을 두른 나성(羅城)의 일부가 잔존하고 있어
도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도성을 축조하지 않고,
대신 월성을 비롯하여 경주를 둘러싼 산 위에 남산산성·선도산성(仙桃山城)·명활산성(明活山城) 등을 배치하여 국토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한편 고려와 조선 시대의 도성은 국도의 시가지를 둘러싼 주위의 산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하였다.
개성의 성벽은 토축(土築)이었으며, 서울의 성곽도 처음에는 토축한 부분이 많았으나 뒤에 모두 석성(石城)으로 견고하게 개축하였다.
또한 조선 정조 때 축조한 둘레 약 5 km의 석축으로 된 수원성(水原城)은
그 규모와 형식에 있어 서울성에 버금가는 한국의 대표적인 도성이다.
이 현문을 내려야지만 통행이 가능한 고려시대의 현문 설치 방법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8)행성(장성)
631년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 동북의 부여성으로부터 남쪽 랴오둥[遼東] 지방에 이르는
해안선 1,000여 리에 장성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백제에서도 진사왕(辰斯王) 때 청목령(靑木嶺) 이서에 관방(關防)을 설치하였고,
신라 성덕왕(聖德王)은 721년에 발해(渤海)와의 국경지대에 북경장성(北境長城)을 설치하였으며,
헌덕왕(憲德王)은 826년 패강장성(浿江長城) 300여 리를 축조한 바 있으나 현존하지 않으며
현재 유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신라가 왜적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관문성(關門城:경주군)이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거란(契丹)과 여진(女眞)에 대한 대비책으로
압록강구에서 동해안 정평(定平)에 이르기까지 천리장성을 축조한 사실은 유명하다.
이 장성은 압록강과 청천강(淸川江)의 분수령(分水嶺)을 이용하여 산정을 이용한 부분은 토축에 의거하고,
평지는 석축으로 되어 있는데 정평 부근에서 조사한 토축장성은 내황(內隍)과 외황(外隍)시설을 갖추고 있음이 밝혀졌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4군 6진의 설치로 확정된 국토의 경계를 방어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소규모의 행성들이 축조되었다.
이들은 천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적이 침입하기 쉬운 영로(嶺路)를 차단할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 많다.
이러한 행성은 병자호란 이후에도 다시 논의되어 영조 때 압록강에 연한 영토에 많은 행성이 시설된 일이 있었다.
9)기타의 성
서울 동쪽 한강변에 있는 백제시대의 풍납토성은 평지에 축조된 토성이며,
임진강의 적성면(積城面)에 있는 육계토성(六溪土城)도 이와 비슷한 토성인데 그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특수한 것으로는 임진왜란 때 경남 연해지방에 주둔한 왜군들에 의하여 축조되어 몇 개소에 남아 있는 일본식 성곽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