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창 前제주지검장 사건을 지켜보면, 우리 사회에는 "주홍글씨"가 맹위를 떨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찰은 며칠 전까지 수사지휘권자였던 인사를 질곡으로 밀어 넣는데 주저함이 없고 법무부는 도마뱀이 자기 꼬리를 자르듯이 김 前지검장을 면직시켰다. 김 前지검장은 이제 일개 필부로 돌아가 엊그제까지 자기가 휘둘렀던 "법의 칼날" 앞에, 옹호하는 세력도 없이, 노출되었다. 양날을 지닌 법의 칼날은 과연 김 前지검장을 얼마나 깊이 벨 수 있을까? 그는 지금 범법을 이유로 법의 심판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중범죄가 아닌 경범죄를 이유로 사회적 매장을 당하고 있는가?
이런 종류의 논고는 아무리 잘 해도 본전을 찾기 어렵고,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검사장이었던 인사를 두둔할 필요가 있냐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지만,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 우리 사회는 법과 정의를 외치면서도 법을 짓밟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김 前지검장의 사건을 따져, 우리 사회의 법의식을 가늠하고, 법집행 당국의 실태를 논하고자 한다.
근대 刑法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범죄자를 처벌하지만, 죄형법정주의는 과잉처벌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은 죄 만큼만 처벌할 것"을 내포하기 때문에, 범죄의 구성요건을 엄격하게 해석할 것을 요구한다.
김수창 前제주지검장의 음란행위(자위)는 형법상 '공연음란' 혐의를 받고 있다. 공연성(公然性)이 없는 단순 음란은 형법상 범죄가 되지 않는다. 경찰은 여러 곳에서 수집된 CCTV 영상을 증거물로 채택하고 김 前지검장의 행위를 공연음란으로 몰아간다.
심야 식당 부근에서의 자위행위가 음란할 수는 있어도 "공연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공연'이란 공중 앞이나 무대등에서 음란행위를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김 前지검장이 행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의적으로 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그를 목격하였다고 하더라도 공연성이 부족하다. 경찰이 공개한 CCTV에 찍힌 장소는 지형지물이나 통행상황으로 미루어 공연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백주에 노상에서 벌린 일도 아닌데, CCTV가 찍었다고 하여 그의 행위가 공연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변태 여부는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 공연성과 직접 관련이 없다. 변태 성욕자들은 대개 드러내지 않고 자기들끼리 변태를 즐긴다. 흥미위주로 그의 행위를 변태성 공연음란으로 몰아감은, 지검장의 부적절한 행위와는 별론으로, 구성요건 충족성이 떨어진다. 경찰은 그이가 자위행위를 하는 것을 여고생이 본 것인지, 아니면 그이가 여고생이나 다른 행인을 겨냥해서 자위를 했는지를 따져 봐야 한다.
우리 헌법(제27조제4항)은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규정한다. 법무부가 서둘러 김 前지검장을 면직시켰음은 이 '무죄추정의 원칙'과 맞지 않는다. 김 前지검장의 음란행위가 사실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그의 부적절한 행위를 이유로 그를 형법상 "공연"음란죄로 처벌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를 주홍글씨로 낙인찍음은 옳지 못하다. "아쉬울 것 없는 인사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라는 궁금증을 뒤로 물리자. 그를 신속히 정리한다고 하여 검찰의 신뢰가 곧바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고위층의 분노가 있었더라도, "검찰조직의 위상을 추락시켰다"는 원성을 잠시 유보하자.
그를 단죄하기 위하여서는 "그의 행위로 인하여 누가 어떠한 피해를 침해당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경찰의 발표대로 그의 행위가 CCTV에 수차례 노출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이 그 행위의 위법성을 가중시키지 못한다. CCTV가 공연성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CCTV는 공연성이 없는 개인의 사생활을 찍어 망신주는데 이용될 수 없다.
경찰이 스스로 수사중인 사건을, 그 공익성이 크지 않음에도, 언론에 흘렸음은 음란죄보다 더 무거운 "피의사실공표죄"를 구성할 소지가 있다. 김 前지검장의 행위가 "황당하고 미운 것"과 그를 "법률적•사회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행위이다. 법집행 당국의 사려분별을 촉구한다.
2014.8.21. 전 재 경
「복수와 형벌의 사회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