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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관鎭南館, 되새기지 못한 역사 1592년 4월. 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는 귀국의 길을 빌려 산과 바다를 건너 명으로 쳐들어가 그 4백 주를 우리의 풍속으로 바꾸게 할 것이다.' 호언장담하며 15만 대군을 이끌고 현해탄을 건너 조선을 침공한다.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 정쟁을 일삼던 조선 조정은 부산포 함락을 시작으로 2개월이 채 못 되어 전 국토를 유린 당하고 선조와 세자는 평양으로 피난하게 되는데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명장이 있었으니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공.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 이순신은 거북선과 함께 훈련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5월 옥포 앞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두는 한편, 한산도대첩에서 적선을 크게 격파하며 연이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왜군의 전의를 꺾는다. 이후 1595년 왜군의 간계와 조정의 모함으로 백의종군을 하게 되나, 원균의 칠천량해전 대패로 우여곡절 끝에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남은 13척의 배로 300여 척의 왜군을 격파한 그 유명한 명량대첩의 승리로 한반도의 곡창지대인 서해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왜군의 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였던 11월 노량해전에서 안타깝게도 왼쪽 가슴에 탄환을 맞고 전사하니....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왜적을 맞아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연전연승의 불패신화를 남긴 구국의 영웅 이순신 그리고 역사의 현장 진남관.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세월은 흘러 1875년 4월. 운요호 사건으로 시작된 일제의 조선침략 야욕은 1905년 11월 17일 박제순 · 이지용 · 이근택 · 이완용 · 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매수해 일제침략의 시초가 된 을사 늑약을 체결하게 됨으로써 36년 간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는 치욕스런 역사를 남겼으니.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찌기 '역사을 잃어버린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지난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지못한 민족은 약육강식의 세계사 속에서 멸망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는 선각자의 준엄한 경고일 터이다. 치미는 울분을 삭히며 송구한 마음으로 그 분께서 남해바다를 굽어보던 망해루를 오른다. 진남관 정면에 서있는 망해루望海樓. 일제 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91년 4월에 재 복원한 2층 누각이다. 마침 해체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공사용 임시건물 너머로 진남관鎭南館을 한참 바라보았다. 공사가 마무리되는 2019년에는 역사의 참교훈을 일깨워주는 진남관의 위용을 볼 수 있으려나~ 국보 제304호인 여수 진남관의 복원공사 전 모습.
일제는 임진왜란 당시 승전의 역사가 담긴 이곳을 여수 보통학교 등 학교건물로 사용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하기사 일국의 국모를 시해하고 궁궐을 동물원으로 만드는 저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랴마는....
종고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던 진남관의 옛 모습. 종고산은 국가에 변란이 있을때마다 산이 울었다는 전설이 전하는 신령스런 산. 왜적의 침입을 알리려 얼마나 울부짖었을까....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거북선 실제 모형. 군관 나대용의 도움으로 제작된 거북선은 판옥선과 함께 일본해군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조선의 전설적인 전함으로 그동안 실체규명에 어려움을 겪어왔는데 임진년 6월 14일에 올린 이순신의〈당포파왜병장 唐浦破倭兵狀〉에 유일하게도 구조와 기능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너무도 소중한 기록이라 그대로 옮긴다.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을 만들었습니다. 앞에 용두를 설치하여 아가리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꼬챙이를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해서, 비록 적선 수백 척이 있다 하더라도 그속으로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번 싸움에 돌격장突擊將으로 하여금 이 귀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들어가 천자포 · 지자포 ·현자포 · 황자포 등의 각종 총통을 쏘게 했습니다." * 출처 :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Daum 백과 전장터에서 군사를 지휘하던 독전기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돕기위해 군사를 파병했던 명나라 황제 신종이 이순신 장군에게 선물했다는 참도斬刀. 난중일기亂中日記. 임진왜란(1592년~1598년) 7년 동안 전쟁터에서 이순신 장군이 손수 쓴 진중일기로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무찌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거북선과 화기들. 특히 화포장火砲匠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든 비격진천뢰(왼쪽)는 임진왜란 때 큰 위력을 발휘했다. 일제는 신작로를 낸다는 핑계로 민족정기와 인맥을 끊어 버리기 위해 진남관만 남겨놓고 좌수영의 모든 건축물을 헐어 버렸는데 여수시가 끊어진 민족정기를 잇고 진남관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설치한 '좌수영 다리' 좌수영 다리 건너 관광객과 지역주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자 건립한 매영정梅營亭. 진남관은 봄이면 매화꽃이 만발해서 매영성梅營城으로도 불렸는데 매영이란 이름은 그런 유래를 반영한 듯. "若無湖南약무호남 是無國家시무국가", 즉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역시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1593년 임진왜란 중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사헌부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남기신 글귀로 호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명언이다. 매영정을 지나 이어지는 '고소 1004 벽화마을' 고소동 골목길은 여수에서 가장 오래된 산동네로 여수엑스포를 계기로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진남관에서 여수 해양공원까지 1004M에 걸쳐 여수지역 역사와 문화, 풍경, 특히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벽화에 담아놓았다. 1954년 1,4 후퇴 때 당시 12세의 나이로 여수로 피난내려와 구두닦기를 하면서 권투를 시작해 6·25전쟁 15주년을 맞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WBA세계챔피언 전에서 이탈리아 니노 벤베누티를 꺾고 한국복싱 최초 세계 챔피언에 오른 김기수 선수의 모습도 보인다. 아기자기한 그림에 눈길을 주며 걷다보면 여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역시 벽화골목에서 바라본 바다풍경. 거북선을 제조했다는 장군도와 돌산도 사이로 연육교인 돌산대교가 보인다. 고소 1004 벽화골목길 입구에서 만나는 고소대 비각. 고소대는 원래 좌수영의 포루砲壘로써 전라좌수영 성채의 장대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군령을 어긴 황옥천의 목을 베어 군율을 엄히 세운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왜군을 상대로 23전 23승 23kO승의 빛나는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의 전적을 기리고자 충무공의 막료로 활약했고 후에 황해병사를 지낸 수군통제사 유형과 좌수영 지역의 유지 및 후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통제이공수군대첩비(보물 571호)와 충무공을 따르던 장졸들과 지역주민들이 충무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타루비墮淚碑(보물 1288호) 등이 안치되어 있다. "진남관에 뭐가 볼 게 있다고, 별 것도 아니던데" 진남관을 다녀온 사람들이 흔히 내밷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보고 들은 느낌이 없었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요즘처럼 인터넷에서 발품만 조금 팔면 지천으로 널려진 자료 한번 찾아보지 않고 어찌 이땅의 역사와 오늘의 소중함을 말할 수 있으랴! 짧은 시간 아름다운 추억을 뒤로 여수를 떠나며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통제이공수군대첩비 비문을 가슴에 담는다. "임진년에 왜적이 함대를 몰고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몰려올 때 가로 막힌 곳은 한산도요, 경계점은 노량露梁이요, 가장 험한 곳은 명량이었다. 한산도를 빼앗기면 노량을 지키지 못할 것이요, 명량이 적의 손에 들어간다면 서울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당시에 이 세 군데의 요지를 막아낸 사람이 누구였는가?" 아, 이순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