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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삼짇날 : 화전놀이 광양당(廣壤堂), 차귀당(遮歸堂), 봉화산도당굿
음력 3월 3일을 삼짇날이라 한다. 고려시대에는 9대 속절(俗節)의 하나였으며, 이날을 ‘강남 갔던 제비 오는 날’, ‘삼질(삼짇날의 준말)’, ‘삼샛날’ 또는 ‘여자의 날’이라고 한다. 양의 수가 겹치는 삼짇날은 양의 기운이 가득한 날로 주로 사람들은 이 날 교외나 산 같은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음식을 먹고 꽃을 보며 노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화전놀이, 꽃놀이 또는 꽃다림이[花柳, 會聚]라고 하기도 한다.
충남 아산시 화전놀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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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화전놀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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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세시기」에는 “진천(鎭川) 풍속에 3월 3일부터 4월 8일까지 여자들이 무당을 데리고 우담(牛潭)의 동서 용왕당 및 삼신당으로 가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라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제주도 풍속에 매년 봄철에는 남녀들이 광양당(廣壤堂), 차귀당(遮歸堂)으로 운집하여 주육을 갖추어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하였다. 또 그곳에는 뱀, 독사, 지네 따위가 많으며 만일 회색의 뱀을 보면 차귀신이라 하여 금기하고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봉화산 도당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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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부정 |
불사할머니거리 |
본향거리 |
상산거리 |
대감거리 |
산제석거리 |
군웅거리 |
뒷전 |
또한 삼짇날에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도당굿을 하기도 하는데, 서울 중랑구에 위치한 봉화산 도당이 대표적이다. 이밖에 삼월 삼짇날에 갓난아기의 배냇머리를 깎아주면 머리카락이 잘 자라고 머리에 부스럼도 나지 않는다고 하며, 산이나 들에서 나비의 색깔을 보고 그 해의 길흉을 점치기도 한다. 경남지역에서는 삼짇날에 머리카락을 끊어서 물에 흘려보냄으로써 머리카락이 잘 자라기를 기원하기도 한다.
화전놀이 [花煎]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
정의 삼월 삼짇날 교외나 산 같은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음식을 먹고 꽃을 보며 노는 꽃놀이. 진달래꽃으로 화전(花煎)을 지져 먹고 가무를 즐기는 여성놀이이다. 화류(花柳) 또는 회취(會聚)라고도 한다.
유래 화전놀이의 전통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시작하였다. 『교남지(嶠南誌)』 권4, 경주 산천조에는 화절현(花折峴)이라는 고개가 나오는데, 그 이름은 신라의 궁인(宮人)들이 봄놀이를 하면서 꽃을 꺾은 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한편 같은 책 고적 조에서는 재매곡(財買谷)을 소개하여, “김유신의 맏딸 재매부인을 청연(靑淵)의 위에 있는 골짜기[上谷]에 묻었으므로 이 이름을 붙였는데, 매년 봄에 같은 집안의 부녀자들이 그 골짜기의 남쪽 물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꽃들이 만발하고 송화(松花)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골짜기의 입구에 초막을 하나 얽었는데 그런 까닭으로 송화방(松花房)이라고 하였다.”고 했다. 물과 산이 있고 수많은 꽃이 만발한 데다 놀이를 위한 초막까지 따로 얽었으니, 꽃과 송화로 지짐을 지져먹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이미 신라시대에 모습을 갖춘 화전놀이의 전통은 조선 전기에도 크게 다를 바 없이 이어진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권7, 세조 3년 4월 22일(을묘)의 기록을 보면, “이때에 금령(禁令)이 자못 간략하므로 무풍(巫風)이 성행하였으니, 도성의 남녀들이 떼 지어 술을 마시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매양 한 번 술자리를 베풀면 반드시 음악을 베풀고 해가 저물어서야 헤어져 돌아갔다. 남녀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큰 소리로 떠들면서 태평시대의 즐거운 일이라고 하였다. 귀가(貴家)의 부인들도 또한 많이 본받아서 장막을 크게 설치하고는 며느리들을 다 모아서 호세(豪勢)와 사치를 다투어 준비하는 것이 매우 극진하였다. 진달래꽃[杜鵑花]이 필 때에 더욱 자주 그러하니 전화음(煎花飮)이라고 하였다.” 한다
.집안의 여성들, 특히 시집온 며느리들이 함께 모여 놀이를 위해서 장막을 세우고 참꽃으로 지짐을 지져 먹으며, 질펀한 음주와 가무악을 즐겼으니 이때의 봄나들이는 신라의 화전놀이는 물론 후대의 화전놀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당시의 화전놀이가 여성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16세기의 시인 임제(林悌)는 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 상권(上卷)에, “작은 개울가에 돌 고여 솥뚜껑 걸고, 기름 두르고 쌀가루 얹어 참꽃[杜鵑花]을 지졌네. 젓가락 집어 맛을 보니 향기가 입에 가득, 한 해 봄빛이 배속에 전해지네.”라는 맛깔스런 시 한편을 남겼다. 이 시로 보자면 남성들도 낭만적인 화전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남성들의 화전놀이는 부정기적인 봄맞이 풍류의 일환이었으며, 참여 범위도 지인(知人)들로 제한되어 여성들의 화전놀이와는 구별된다. 또 남성들에게는 가벼운 여가 활동이었으나 여성들에게는 일년에 한 번밖에 없는 공식적인 집단 나들이였다는 점에서 그 문화적 의미에 차이가 있다.
한편 화전놀이와 화전가(花煎歌)의 만남은 조선 후기, 그것도 19세기 초 이후에야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이르러 여성들은 화전놀이의 과정과 소회를 담은 전형적인 화전가를 즐기기 시작한다. 화전가의 창작과 음영이 화전놀이의 중요한 내용으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여성들의 화전놀이는 남성들의 화전놀이는 물론 그 이전 시기 여성들의 화전놀이와도 다른 면모를 보여주게 되었다.
지역사례 영남지방 여성들의 화전놀이는 춘삼월 진달래꽃이 만발할 무렵에 마을 또는 문중의 여성들이 통문을 돌리거나 해서 놀이를 가기로 뜻을 모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뜻이 모이면 시어른들의 승낙을 얻은 뒤에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한다. 참여 인원은 대략 30~60명 내외이다. 젊은이로부터 늙은이까지 두루 참여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삶의 이력이 붙어 집안이나 마을에서 인정받는 중년 여성들이 주도하며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따라가지 않는다. 음식을 비롯하여 놀이에 드는 경비는 화전계(花煎契)가 있으면 그 기금으로 충당하고 그렇지 않으면 일정하게 갹출한다.
놀이날이 정해지고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여성들은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놀이날이 되면 미리 준비한 음식과 조리도구 그리고 지필묵(紙筆墨)을 챙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무의 반주를 위해서 풍물을 가져가기도 한다. 지필묵은 현지에서 화전가를 지을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여성들은 어느 때보다 용모에 정성을 들여서 곱게 단장하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선다. 놀이하는 장소는 보통 마을에서 10리 안팎의 거리에 있는, 산천경개가 수려한 곳이다.
현장에 도착하면 우선 음식을 장만한다. 이미 가져간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만발한 진달래꽃잎을 한 움큼씩 따와 화전(花煎)을 만든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3월 3일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화전을 소개하였다. “참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을 하여 둥근 떡을 만들고 그것을 기름에 지진 것을 화전이라 한다. 이 것이 곧 옛날 오병(熬餠)의 한구(寒具)이다. 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 국에 띄우고 꿀을 섞고 잣을 곁들인 것을 화면(花麵)이라고 한다. 혹 참꽃을 녹두가루에 반죽하여 만들기도 한다. 또 녹두로 국수를 만들어 혹 붉은색으로 물을 들이기도 하는데 그것을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水麵)이라 한다. 이것을 아울러 시절음식으로 제사에 쓴다.”
화전을 다 부치고 푸짐한 먹거리가 마련되면 본격적인 놀이판이 벌어진다. 판마다 한결같지는 않았지만 음주가무를 즐기고, 시댁 식구 흉보기를 비롯해서 거리낌 없는 담화가 이루어졌다. 음주가무와 자유로운 담화 말고도 신명풀이가 끊이지 않도록 다양한 놀이들이 베풀어졌다. 대표적인 놀이가 윷놀이와 꽃싸움이다. 꽃싸움은 진달래꽃의 꽃술을 서로 마주 걸고 당겨서 먼저 끊어지는 쪽이 지는 놀이인데, 때에 따라서는 편을 갈라 승패를 가르고 상주(賞酒)와 벌주(罰酒)를 나누어 마시면서 즐기기도 하였다.
화전놀이는 여성들이 평소 숨겨두었던 다양한 재주를 마음껏 드러내는 경연장이 되기도 하였으니, 놀이판은 연극과 엉덩글씨, 봉사놀음, 꼽사춤과 병신춤, 모의혼례와 닭싸움 같은 다채로운 놀이로 채워졌다.
다른 한편으로 화전놀이는 화전가의 산실이기도 하였다. 화전가는 일반적으로 서사(序詞), 신변탄식, 봄의 찬미, 놀이의 공론, 택일, 통문 돌리기, 시부모 승낙 얻기, 준비, 치장, 승지찬미, 화전굽기, 회식, 유흥소영(遊興嘯詠), 파연감회(罷宴感懷), 이별과 재회 기약, 귀가, 발문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사실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정회를 담아내는 화전가는 화전놀이의 현장에서 또는 귀가 후에 만들어진다.
화전가를 짓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합작(合作)이다. 여러 명이 일정 부분을 분담하여 지은 뒤에 그것을 합쳐 한 편의 화전가를 완성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개인작이다. 참여한 여성들이 따로따로 화전가를 짓는 것이다. 다 지으면 작품들을 놓고 합평을 하기 때문에 창작자는 자연히 사실성과 문학성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화전가는 비록 개인작이라고 하더라도 일정하게 공동작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풍요로운 음식을 먹고 마시며 가무악과 놀이를 즐기는 가운데 어느덧 초봄의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간다. 이제 여성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걸 어찌할 수 없다. 다음의 화전가는 이때의 심정을 담고 있다. “정신없이 놀다보니 해는 어이 잘 가는고, (중략) 잘있거라 잘있거라, 산천초목 잘있거라. 꽃은꺾어 손에들고 잎은따서 입에물고, 내려오며 놀아보세. (중략) 그럭저럭 내려오니 해는지고 달이솟네. 가련하다 인생들아 몇몇천을 놀자하니, 마음대로 아니되네. 명년이때 다시만나 즐거웁게 놀아보세. 다놀고 헤어지니 섭섭하기 그지없다.”
정신없이 놀다가도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여성들의 운명이다. 그들과 좋은 시간을 함께 했던 자연 그리고 동료들과 만남을 지속하고 싶지만 여성들에게 허용된 것은 거기까지이다. 내년의 화전놀이를 기약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리는 여성들의 손에는 곧잘 한 움큼의 봄꽃이 들려 있다.
충남 아산시 도고면 오암리 |
정의 음력 3월 3일을 가리키는 말. 고려시대에는 9대 속절(俗節)의 하나였다. 이날을 ‘강남갔던제비오는날’이라고도 하며, 삼질(삼짇날의 준말), 삼샛날 또는 여자의 날이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삼중일(三重日), 삼진일(三辰日), 상사일(上巳日), 상제(上除), 원사일(元巳日), 중삼일(重三日), 답청절(踏靑節), 계음일(禊飮日) 같은 이칭이 있다. 양의 수가 겹치는 삼짇날은 파릇파릇한 풀이 돋고 꽃들이 피어 봄기운이 완연하다. 그래서 이날은 봄에 걸맞는 모든 놀이와 풍속이 집중되어 있다.
내용 이날은 9월 9일에 강남 갔던 제비가 옛집을 찾아와서 추녀 밑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치며, 나비도 날아든다. 마른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고 산과 들에 푸르고 붉은 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삼짇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산으로 놀러 가는데, 이를 화류놀이라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화전놀이, 꽃놀이 또는 꽃다림이라고 하며, 대개 늙은이는 늙은이들끼리, 젊은이는 젊은이들끼리, 부인들은 부인들끼리 무리를 지어 가서 화전을 비롯한 음식들을 먹고 하루를 즐긴다. 고시조에 “낙양 삼월시에 곳곳이 화류로다. 만성춘광이 그림에 들었세라. 아마도 당우세계(唐虞世界)를 다시 본 듯 하여라.”라고 읊은 것이 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날 절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기도 한다. 3월을 노래한 사친가(思親歌)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다.
연자(燕子)는 날아들어 옛집을 찾아오고
호접(胡蝶)은 분분하여 구색을 자랑한다.
백마금편(白馬金鞭) 소년들은 화류춘풍(花柳春風) 흥에 겨워
쌍을 지어 노닐 적에 산화작작(山花灼灼) 난만개(爛漫開)라.
슬프도다 세월이여 애오생지(哀吾生之) 가린하나
탄광음지(嘆光陰之) 여류로다.
슬프도다 우리 부모 답청절(踏靑節)을 모르시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보면, 조선 중엽 이후에는 많은 유생들이 삼월 삼짇날에 시제(時祭)를 지냈다고 한다.
놀이 봄에는 다양한 놀이와 행사들이 펼쳐진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여자아이들은 물곳(물넝개) 풀을 뜯어서 대나무쪽에다 풀 끄트머리를 실로 매고, 머리를 땋아 가느다란 나무로 쪽을 찌고 헝겊조각으로 노랑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만들어 입혀서 각시 모양의 인형을 만든다. 요, 이불, 베개, 병풍을 차려놓고 인형놀이를 하는데, 이것을 각시놀음이라 한다. 사내아이들은 나뭇가지에 물이 오를 때쯤 되면, 버드나무나 미루나무 가지를 꺾어 비틀어서 뽑아 속뼈는 내버리고 껍질로 피리를 만들어 불고 다니면서 논다. 북청 지역에서는 “앵앵 울어라 너의 어미 죽어서, 부모가 왔다 앵앵 울어라.”라고 노래 부르며, 옹진 지역에서는 “피리야 피리야 늴늴 울어라, 너의 어머니는 소금맞이 갔다가 소금물에 빠져죽었다.”라고 노래를 부르며 피리를 분다.
이때를 전후하여 경로회를 베풀어 노인을 모시고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강릉 풍속에 노인을 공경하여 매년 좋은 계절을 당하면, 70세 이상의 노인들을 청해서 명승지로 모셔서 위로한다. 이를 청춘경로회(靑春敬老會)라 한다. 비록 종에 속한 천한 사람일지라도 70세가 된 사람은 모두 모임에 나오도록 한다.
삼짇날에는 전국 각지에서 한량들이 활터에 모여 편을 짜 활쏘기대회[弓術會]를 연다. 활을 쏠 때는 기생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한량들 뒤에 나란히 서서 소리를 하여 활 쏘는 이의 기운을 북돋워준다. 그리고 화살 다섯 개가 과녁에 바로 맞으면 기생들은 북을 울리고 “지화자 지화자…….”라는 소리를 하면서 한바탕 춤을 춘다.
절식 삼짇날 무렵이면 봄기운이 왕성하고 흥이 저절로 나, 사람들은 산과 들로 몰려나가 화전과 수면을 만들어 먹으며 봄을 즐긴다. 찹쌀가루에 반죽을 하여 참기름을 발라가면서 둥글게 지져 먹으니 이것을 ‘화전(花煎)’이라고 한다. 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혀서 가늘게 썰어 오미자(五味子) 물에 넣고, 또 꿀을 타고 잣을 넣어 먹으니 이것을 화면(花麵)이라고 한다. 더러는 진달래꽃을 따다가 녹두가루와 반죽하여 만들기도 하며, 붉은색으로 물을 들이고 꿀물로 만들기도 하는데, 이것을 ‘수면(水麵)’이라고 하여 제사에도 사용한다. 이날 각 가정에서는 봄철 여러 가지 떡을 해서 먹는다. 흰떡을 하여 방울 모양으로 만들어 속에 팥을 넣고, 떡에다 다섯 가지 색깔을 들여, 다섯 개를 이어 구슬을 꿰어 만든다. 작은 것은 다섯 개씩이고, 큰 것은 세 개씩으로 하는데, 이것을 산떡[饊餠, 꼽장떡]이라고 한다. 또 찹쌀과 송기와 쑥을 넣어서 떡을 하는데, 이것을 고리떡[環餠]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날에는 부드러운 쑥잎을 따서 찹쌀가루에 섞어 쪄서 떡을 만들어 먹으니 이것을 쑥떡이라고 한다.
봄철에 먹는 술로 각 가정에서는 여러 가지 술을 빚으니 소면주(小麪酒), 두견주(杜鵑酒), 송순주(松荀酒), 과하주(過夏酒)가 유명하고, 관서지방에서는 감홍로(甘紅露), 벽향주(碧香酒)와 해서지방의 이강주(梨薑酒), 호남지방에서는 죽력고(竹瀝膏), 계당주(桂當酒), 호서지방의 노산춘(魯山春), 서향로(瑞香露)가 유명하다. 그리고 사마주(四馬酒)는 넷째 오일(午日)에 거듭 빚은 술이므로 이렇게 부르는데, 이 술은 한 해가 지나도 변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송사(宋史)』에 “고려에는 상사일(上巳日)의 쑥떡을 제일 맛있는 음식으로 친다.” 하였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3월 3일에는 쑥잎을 따서 찹쌀가루에 섞어 쪄서 떡을 만드는데, 이것을 쑥떡이라 하였으며, 중국에는 없는 것”이라 하였다.
속신 이날 흰나비를 보면 그 해에 상복을 입게 된다고 하여 불길하며, 호랑나비나 노랑나비를 보면 그 해 운수가 좋다고 여긴다. 삼짇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물이 흐르듯이 소담하고 아름답다고 하여 부녀자들은 다투어 머리를 감기도 한다. 삼짇날에는 동면하던 뱀도 나오는데 이날 뱀을 보면 좋지 않다고 해서 꺼린다. 이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고, 호박을 심으면 잘 되고, 약물을 마시면 연중무병하고, 평소에 하지 못하던 집안 수리를 해도 무탈하다고 여긴다.
지역사례 『동국세시기』에는 “진천(鎭川) 풍속에 3월 3일부터 4월 8일까지 여자들이 무당을 데리고 우담(牛潭)의 동서 용왕당 및 삼신당으로 가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 행렬이 끊어지지 않고 사방의 여인들이 모두 와서 기원하므로 사람들이 보기에 시장을 이룬 것 같이 일년 내내 들끓었다.”라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제주도 풍속에 매년 봄철을 당하면 남녀들이 광양당(廣壤堂), 차귀당(遮歸堂)으로 운집하여 주육을 갖추어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하였다. 또 그곳에는 뱀, 독사, 지네 따위가 많으며 만일 회색의 뱀을 보면 차귀신이라 하여 금기하고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경북 고령, 문경에서는 ‘3월의 첫 뱀날이 발달하여 삼짇날이 되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월성에서는 쑥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 그 해 뱀에게 물리지 않는다고 하고, 칠곡에서는 이날 호박을 심으면 잘 된다고 한다. 달성, 군위, 의성, 영덕에서는 이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며, 청도, 칠곡, 금릉, 문경에서는 농사를 짓기 전의 마지막 놀이이기 때문에 며느리들이 울타리를 붙들고 운다고 한다. 선산과 달성에서는 흰나비를 보면 복을 입고 노랑나비를 보면 길(吉)한 일이 있으며, 약물을 먹으면 무병하고 집안의 보수 작업을 아무리 해도 무탈하다고 한다. 의성에서는 이날 뱀을 보면 “썩은 새끼”라 부르는 금기가 있고, 달성에서는 이날 뱀을 보면 운수가 길하다고 한다.
영천에서는 춘경제(春耕祭)를 지내며, 달성에서는 그 해의 길흉을 점치며, 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에 겨울 동안의 묵은 때를 씻고, 교외로 나가 청유(淸遊)를 즐기며 가정에서 화전과 화주를 만들어 조상에게 고사를 지낸다. 이날 여자들은 진달래꽃을 꺾어 조상단지 앞에 꽂아두고 농사의 풍년과 해충의 예방을 빌기도 한다. 삼짇날을 고비로 앞으로 고된 농사일에 부대낄 것을 생각하니 슬퍼서 젊은 며느리들이 울타리를 잡고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경남 함양, 거창, 합천에서는 이날 용왕먹이기를 강조하기도 한다. 거창에서는 삼짇날에 바람이 불면 그 해 대마 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전북 군산, 익산에서는 삼짇날 조상에게 시제를 지내는데, 이것을 ‘시사(時祀)’라고 한다. 전주에서는 이날 아이들 머리를 깎아주고, 새 옷을 입히고 손에 실을 매준다. 전남에서는 삼짇날 제비를 맞이하기 위하여 제비집을 손보기도 한다. 제비가 집에 와서 새끼를 네댓 마리 까고 길러서 나가면 그 해 복을 받는다고 여긴다. 이날 당제를 지내는 곳도 있다. 머리카락의 끝을 자르면 그 머리가 더 잘 자란다고 하여 머리를 자르기도 한다.
충남에서는 삼짇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물이 흐르듯이 소담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부녀자들은 다투어 머리를 감기도 한다. 화류놀이는 미리 통문을 돌려 장소와 날짜를 정하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논다. 문장에 능통한 사람들은 즉흥시나 시조를 읊고 부녀자들은 안방가사를 읊으며, 농부와 아이들은 민요를 불러 흥을 돋우는데, 충남에서는 “제화제화 제화하 얼씨고 절씨고 좋을씨고 춘삼월 화전놀이를 간다. 춘향의 방문 앞 이도령 걸음으로 이그작 아그작 걸어서 거들거리고 나간다. 세모시 마당 앞에 금자라 걸음으로 아그작 아그작 걸어서 거들거리고 나간다. 둥그다당실 둥그다당싱 에라 두둥실 연자 버리고 마 거리고 거들거리고 나간다.”와 같은 민요를 부른다.
제주도에서는 까마귀가 새끼를 치되 한 마리를 치면 그 해는 가뭄이 온다고 하고, 두 마리를 치면 농사가 괜찮다고 하며, 세 마리를 치면 물이 넘쳐 흉년을 면치 못한다고 한다. 농어촌에서는 꿩알줍기라 하여 꿩알을 주워오면 공덕지물이라 하여 재수 좋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과는 대조적으로 한편에서는 꿩알을 주우면 재수를 망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이유로 꿩은 천신(天神)으로 내려온 하늘 닭이니 잡아서는 못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황해도에서는 화전 외에도 고운 밥, 곧 흰쌀밥을 해먹고, 아이들은 진달래꽃을 따다가 얇은 돌을 깔고 그 속에 꽃잎을 따 넣은 후 불을 때어 익혀서 꽃짐을 해 먹는 놀이를 하기도 한다. 어촌에서는 까나리잡이를 3월부터 시작하여 5월 단오 무렵까지 하는데, 까나리잡이를 할 때는 고사도 크게 지낸다. 함남 지역에서는 삼짇날 동류수(東流水)에 몸을 씻으러 가는데, 이곳에서 몸을 씻으면 일년간 재액을 떨어버린다고 한다. 신인과 묵객들도 강변 정자에 모여 시를 읊고 화전놀이를 한다.
광양당제 [廣壤堂祭]
정의 광양당(廣壤堂)에서 춘추(春秋)에 남녀가 모여 지내던 제의. 광양당은 지금의 제주시 이도 2동에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이곳을 과양이라고 하고 당에 대해서도 과양당이라고 하였다. 본래 토속적인 무속신당이었으며 본향당의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된다.
내용 광양당제는 무속신당인 광양당에서 베풀어지던 제의로 본래 하로산또, 곧 한라산신을 위하여 당굿 형태로 벌이던 것이다. 한라산신은 제주도 당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남성 신격이다. 그 직능으로 보면 산신(山神)으로 수렵과 목축의 신이다. 그러한 점에서 비록 산신이라고는 하지만 한국 본토의 산신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조선조 들어 사전(祀典) 정비의 일환으로 한라산신에 대한 제의가 국가의 공식적인 제사로 인정되면서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조선 태종 18년(1418) 한라산이 사전(祀典)에 등재되어 한라산신에 대한 제사가 춘추로 베풀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광양당에서 모시던 하로산또와 국행제로 모시게 된 한라산신은 종종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한라산신제는 한라산에 따로 마련된 제장에서 관 주도로 지냈으니 광양당에서 민간인들과 심방들이 주도하여 지낸 광양당제와는 분명히 달랐다. 한라산에 대한 국행제는 제대로 시행된 것 같지 않다. 이는 왕조실록에 한라산신제와 관련한 기록이 통일되지 않은 데서 확인된다. 특히 1702년 이형상(李衡祥) 목사의 장계에는 사전에 누락되어 있다고 하였으며, 조정에서도 그 누락된 까닭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로 보아 조정이나 관에서도 한라산신제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진산 한라는 주 남쪽에 있는데 한편으로 두무악 또는 원산이라고도 한다. 그 관에서 제를 행한다.”라고 하였다. 태종 이후 한라산신제가 시행되기는 한 셈이다.
한편, 같은 기록에 “속전에 이르기를 한라산 주신은 계제로 태어나 성덕이 있었고 죽어서는 명신이 되었다. 마침 호종단이 이 땅을 진양하고 배를 타고 강남으로 향하는데 산신이 매가 되어 돛대 머리로 날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단의 배를 격쇄하여 서경 비양도 암석 사이로 침몰시켰다. 나라에서는 그 영이함을 포상하여 식읍을 내리고 광양왕에 봉하여 해마다 향폐를 내리어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라고 적었다. 이 이야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읍지류에도 실려 있다. 속전이라 하였으니 구전을 토대로 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호종단의 단혈에 대한 전설은 제주도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으며, 중앙 정부에서 한라산을 사전에 등록하여 제사 지내는 것을 이와 결부짓고, 다시 이를 광양당과 관련짓고 있다. 한라산신의 지역 수호신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며, 한라산신과 광양당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한라산신과 광양당신에 대한 혼란이 바로잡힌 것은 1702년 이형상이 신당 철폐를 한 뒤의 일이다. 이때에야 비로소 한라산신제가 사전에 제대로 등재되고 본격적인 제향이 이루어졌다. 그동안에는 어찌하였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당시 제주목에 사묘(祀廟)로 광양당(廣壤堂), 차귀사(遮歸祠), 천외사(川外祠), 초춘사(楚春祠) 같은 신당들이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각 지역을 대표하는 신당이었다. 광양당은 다른 지역의 대표적인 신당들과 함께 사묘로 인정되었던 셈이다. 이로 보아 제주도에서는 사전 정비에도 불구하고 토착신에 대한 제향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라산신에 대한 유교식 제의와는 별도로 광양당에서는 하로산또에 대한 당굿이 지속적으로 베풀어졌다. 이러한 양상은 이형상 목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광양당에서 이루어지던 당굿은 금지되고 한라산신에 대한 유교식 제의가 강화되었다. 이 시기까지 광양당의 위상이 어떠하였는지는 남구명(南九明)의 『우암선생문집(寓庵先生文集)』 「탐라시기사지(耽羅時紀事志)」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광양당은 제주도 전역에 산재한 신당의 조종(祖宗)이라고 한다. 이로 보아 광양당은 지금의 송당본향당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한 만큼 이형상에 의하여 훼철된 뒤에도 광양당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고 따로 유지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비공식적으로나마 비념 수준의 제의를 지속하였다.
의의 광양당은 근래까지도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토속 신앙의 생명력이 강했다. 한라산신에 대한 유교식 제의는 한라산에서 지내다가 추위로 인하여 불편을 겪게 되자 제주성 남쪽 산천단으로 옮겨 지냈다. 그 전통이 남아 지금도 산천단에서는 매년 한라산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광양당은 제주도를 대표하는 신당이었으며 본래 토착신인 한라산신을 모시는 곳이었다. 한라산신은 사전 정비에 따라 제주목을 대표하는 산천신으로 제향되기도 하였다. 사전 정비 이후에도 토착신에 대한 제향의 성격이 강하게 유지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1702년 이형상에 의하여 정비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차귀당제 [遮歸堂祭]
정의 제주도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차귀당에서 베풀어진 제의. 조선시대에는 봄과 가을에 남녀가 모여 신에게 제사 지냈다. 차귀당은 오늘의 고산본향당으로 짐작된다.
유래 기록에 따르면 차귀당을 비롯한 대정현 관내의 신당은 이형상 제주목사 이전에 한 차례 혁파를 겪었다. 이러한 사실은 『인조실록(仁祖實錄)』 인조 3년(1625) 3월 3일 신해조(辛亥條)에 “대정현의 심방에 대한 세포(稅布)를 견감(蠲減)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제주인 김효의(金孝義)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또 대정에 있는 신사(神祠)는 혁파한 지가 이미 오랜데 심방에게 세포(稅布)라고 일컫는 것을 해마다 징봉(徵捧)하니 백성들이 거의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호조가 청하여 그들의 소원에 따르도록 한 까닭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라고 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와중에도 차귀당은 사묘(祠廟)로 지정될 정도로 대표성이 있는 당이었기에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주목되는 바는 차귀당은 사신(蛇神)을 모시는 당임에도 불구하고 대정현의 사묘 또는 성황사(城隍祠)로 제향되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본래부터 한라산신을 모시던 광양당이나 내왓당과는 성격을 달리 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마땅하다. 결국 광양당이나 내왓당이 한라산신을 모시는 당이어서 사묘로 인정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차귀당의 예로 보아 전래의 무속 신당이 그대로 사묘로도 인정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제주도의 기층 신앙이 공고하게 유지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양상은 1702년 이형상 목사가 신당을 철폐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형상 목사가 제주 지역의 신당을 철폐할 당시 차귀당도 함께 철폐되었다. 이에 따라 차귀당제도 지속되지 못하였다. 민간에서는 소규모로나마 그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다시는 이전과 같은 규모를 회복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차귀당제에 대한 기록은 제주도의 기층 신앙이 얼마나 공고하게 유지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절도(絶島)였던 까닭에 토착 신앙이 늦은 시기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양상에 대해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조차 쉽사리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면에서 이형상은 매우 예외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차귀당제는 전승되지 않는다. 차귀당은 고산본향당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간단한 비념만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내용 {차귀당제(遮歸堂祭)의 형태} 차귀당제는 본래부터 당굿 형태로 지냈다. 해마다 정해진 날 신당에 마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심방이 제의를 집행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봄과 가을에 남녀가 신당에 모여 신에게 주육을 바치고 제사를 하니(於春秋 男女群聚 具酒肉祭神) 그 무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簫鼓不絶).”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차귀당이 사묘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사묘조(祠廟條)를 통하여 그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에는 각각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 성황사(城隍祠), 여단(厲壇)이 있었다. 제주목에는 이 밖에 광양당(廣壤堂), 차귀사(遮歸祠), 천외사(川外祠), 초춘사(楚春祠)가 있었다. 이 가운데 차귀사는 대정현 소속의 사묘였다. 차귀사는 곧 차귀당이다. 차귀당을 성황사로 삼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로 보아 차귀당은 대정현을 대표하는 무속 신당이었는데, 그 대표성을 인정받아 사묘로도 지정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묘로 지정되었다고 해서 철저하게 관 주도 아래 유교식으로만 제사를 지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봉화산도당굿 [峰火山都堂]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 | 국립민속박물관 |
정의 서울시 중랑구에 위치한 봉화산 정상의 도당에서 삼짇날 마을의 평안과 마을 사람들의 무병과 복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굿. 2005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도당굿은 경기도 일원의 마을굿을 부르는 이름이지만 근래에는 경기도 일부 지역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서울의 일부 마을에서도 도당굿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도당굿(都堂-)의 도(都)자는 도시(都市), 도성(都城), 도원수(都元帥), 도사공(都沙工), 도편수(都-)에서 보듯이 모두 으뜸, 우두머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 한국의 여러 지역 마을 제의는 근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대체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모든 마을 제의가 그렇듯이 봉화산도당굿도 그 기원이나 유래를 정확히 밝힐 수 있는 옛 문헌이 없다.
근래에 서울시청이나 중랑구청 또는 중랑문화원 등에서 발간한 자료집들에서는 봉화산도당굿의 역사가 400년쯤 되는 것으로 적고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15, 세종 29년 3월 병인에 “연대의 상단에는 가옥(假屋)을 조성하여 병기(兵器)와 조석으로 공급하는 물과 불을 지피는데 필요한 기물을 보관한다.”라는 기록이 보이고 이 기록에 의거 『봉우재 이야기』에서 도당의 연대를 400년으로 가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건물이 처음에는 초가 단칸이었으나, 광무 4년(1900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청을 올린 기와집으로 개축되었다고 하였다.
봉화산도당을 400년쯤으로 보려는 타당성은 다른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봉화산도당굿의 당주 계보가 방씨(여) → 오토바이(여) → 강기순(여) → 신위행(여, 현 당주)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방씨의 남편인 최씨가 이곳 도당굿의 13대째 당주였다.
고로(古老)에 의하면 면목 1동의 ‘고문계(이 지역 무당들의 모임인 듯함) 최씨무당’ 하면 꽤 이름난 무당이었다고 한다. 신위행 현 당주의 신어머니가 곧 최씨 부인인 방씨무당이다. 이러한 몇 가지 사례로 볼 때 봉화산도당의 제의는 최소 400년 이전부터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봉화산도당의 신상(神像)은 불사산신할머니로 흰색 고깔에 흰색 장삼을 입고 붉은 가사를 입고 앉은 자세이다. 이곳에 산신할머니를 모시게 된 유래에 대해 “먼 옛날 이곳에서 산신을 정성껏 모시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이곳 마을 주민들이 이 할머니를 산신할머니로 섬기게 되었다.”라는 이야기가 마을에 전한다. 또 건물 안에는 높이 5척의 석불(石佛)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고깔을 쓴 산신할머니 소상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석불에 대해서는 그 형태를 알 수 없어 그것이 불상 형태인지 또는 자의적으로 된 일반 석상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봉화산의 도당에서 오랫동안 산신을 섬겨왔다는 것은 확실하다. 제례(祭禮)의 축문에 “봉화산 산신께 엎드려 감히 고하나이다.”라는 문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내용 봉화산도당굿은 마을의 신앙의례이다. 그러나 신앙의례로만 끝나지 않고 굿 자체의 연희성과 마을 전체의 축제성을 지니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을굿은 역사성과 전통성을 지니면서 나름대로 굿의 형태와 구조를 지닌다. 봉화산도당굿은 도당굿 과정 초반에 제례 및 진적 의식이 들어 있어 유교식 제의와 무굿의 복합 형태를 이루고 있다.
봉화산도당굿의 사제무는 신(神)이 내린 강신무(降神巫)이지만, 남부 지역 세습무가 단골판을 이어 받듯이 이곳 도당굿에서도 사제 권한을 이어 받는다. 이곳에서는 도당굿 사제 권한을 가진 무녀를 당주라고 부르는데 당주 밑에는 작은 당주를 두기도 하여 당주로부터 사제권을 이어받게 되어 있다. 현재 조사에 의해 드러난 당주 계보는 최씨무당(13대: 최석길의 어머니) → 방씨(14대: 최석길의 부인) → 오토바이(15대: 최석길의 작은부인) → 강씨(16대: 2000년 미국 이민) → 신위행(17대: 현 당주, 방씨의 신딸)으로 이어지고 있다.
봉화산도당굿에 참여한 악사 역시 계보를 이루고 있는데, 최석길(방씨의 남편) → 김순선(사망) → 김광수(김순선의 아들)와 김흥수(김광수의 동생)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에는 김광수가 당주 악사로 정해져 있다.
봉화산도당굿은 도당과 아래쪽 제단 및 우물터에 각각 제물을 차리고 거리부정에서 시작하여 뒷전까지 16제차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유식 형태의 제례도 들어 있다.
제물은 제당(도당) 안에 불사할머니상, 북두칠성님상과 제당 아래에 별도로 꾸며진 제단(굿청) 제물 그리고 우물터에 용왕상을 차린다. 이는 고정으로 바쳐진 제물이고 그 밖에 일시적인 제물로 거리부정 제물상과 대잡이거리의 순력상, 뒷전거리의 제물상을 들 수 있다. 봉화산도당굿에서는 쇠머리와 쇠족을 바치고 다른 고기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일반 제물로는 떡을 많이 올리고 다른 지역과 같이 메, 과일, 나물, 두부, 부침개, 과자를 올린다.
봉화산도당굿 16제차의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거리부정: 일명 죽동굿이라고도 하며 선부정이라고도 한다. 본전인 도당에 잡귀 잡신의 부정이 들지 못하게 막아주고 풀어준다. 도당에 들어서는 산길에서 한다.
② 주당물림: 제당(당집) 안의 부정을 가시고 청정하게 하며, 굿당에서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주당을 맞지 않도록 하는 굿이다. 막걸리와 나물 같은 제물을 약간 밖에 버린다. 도당 앞 산길에서 하는 부정거리는 서서 하는데 당집 안에서는 앉아서 한다 하여 앉은부정이라고도 한다.
③ 불사할머니거리: 봉화산의 신령을 대표하는 산신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위해주는 굿으로서, 이 불사할머니굿에서 천궁불사 또는 사해용왕불사라 하여 용궁(물동이)타기를 한다. 당 안에서도 주민들에게 공수를 주지만, 당집 문 밖에서도 물동이를 타면서 주민에게 공수를 내려주고 축원을 해준다.
④ 제례 및 진적: 도당굿의 굿청은 당집이 아닌 그 아래쪽에 꾸며져 본굿이 진행되는 굿청에서는 제례 및 진적부터 시작이 된다. 이 제례는 제관 3명(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이 헌작(獻爵), 배례(拜禮), 독축(讀祝) 등으로 유식 형태의 제례를 올린다. 초헌관이 세 번 절하고 아헌관이 두 번, 종헌관이 두 번 절하여 모두 일곱 번 절하고 각각 술잔을 올리며 제관 중 한 명이 축문을 읽는다.
⑤ 부정·가망청배: 굿청의 부정을 가시며 신을 청하는 굿으로 앉아서 장구를 치며 신을 청하는 무가를 부른다. 주민들은 상에 돈을 놓고 술잔을 올리기도 하며 절을 한다. 무녀는 이들을 위해 축원해 준다.
⑥ 본향거리: 일명 산거리라고도 한다. 먼저 산신을 위한 축원을 드리고 이어서 산말명, 대신할머니, 산제장, 굴막제장 할아버지를 놀리는 굿으로 윗대의 만신, 당지기를 비롯하여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즐겁게 놀려주면서 공수를 주고, 각자의 씨족 후손들과 태어난 곳을 위해 보살펴 달라는 굿이다. 곧 조상거리와 같은 굿이다.
⑦ 상산거리: 일명 상산마누라 또는 장군거리라고도 한다. 상산거리는 원래 상산의 높은 산신님(이곳에서는 도당님인 산신할머니격)을 맞이하여 대접하고 잘 보살펴 달라며 기원하는 굿인데, 봉화산도당굿에서는 상산거리 내용이 장군거리를 겸하고 있다. 곧 나라를 지키던 여러 장군들을 청하여 놀아주고 마을을 잘 보살펴달라고 기원하는 내용을 함께 한다.
⑧ 별상거리: 별상거리에서 별상은 마마신(홍역마마)을 이르는 말이다. 이 굿에서는 별상님을 위해주며 마을 주민의 병을 막아주고 마을을 평안하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굿 중간에 삼지창과 월도로 사슬을 세운다.
⑨ 신장거리: 산신장이나 도당신장을 위해주고 잡신들을 다스려 인간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기원하는 굿이다. 이 굿에서는 오방기를 뽑게 하고 공수를 주며 복을 준다.
⑩ 대감거리: 도당대감, 살륭대감, 군웅대감, 봉화산미륵대감을 청해서 위해주고 마을을 잘 돌보아 달라고 기원하는 굿이다. 신장거리에 이어 기를 뽑게 하고 복을 준다. 주민들은 굿판에 나와서 무복을 걸치고 무감(무관)을 서기도 한다. 끝에는 제당과 굿청 주위를 돌며 술과 떡 따위를 조금씩 버린다.
⑪ 산제석거리: 마을의 모든 부정한 것을 막아주고 주민들의 무병장수와 만복을 기원하는 굿으로서 재수굿에 해당한다. 이 굿에서는 바라를 팔고 계면떡을 판다. 바라팔기는 무당이 바라를 들고 주민의 신수를 가려주며 돈을 받는 것을 말하며, 계면떡팔기는 떡을 나누어주고 떡값을 받는 것을 말한다.
⑫ 창부거리: 광대신인 창부님을 모시고 대접하며, 한 해 동안 마을과 주민이 무사하게 지내고 또 안락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원하는 굿이다.
⑬ 군웅거리: 군웅은 장수신으로 모시는 신령이다. 이 굿에서는 여러 장수신을 모셔 대접하고 마을과 주민에 잡귀를 물리고 해가 없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굿이다. 신칼 위에 쇠머리를 얹어 가슴에 받치고 놀다가 사실을 세운다. 쇠머리를 얹은 신칼이 바로 잘 서면 굿을 잘 받는 것으로 여긴다.
⑭ 용신거리: 도당으로부터 30여 미터 아래에 있는 옛 우물터에서 우물용왕님을 위하는 굿이다. 옛날에는 이 우물을 많이 사용했었는데 우물이 사용될 때에는 물이 늘 맑고 깨끗하며 물이 잘 나오도록 기원했었다. 현재는 우물을 사용하지 않으나 옛 우물터인 만큼 굿을 해주고 산가뭄이나 산사태를 없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⑮ 대잡이거리: 우물터에서 용왕굿을 마치고 도당의 굿청에 올라와 한 쪽에서 대를 잡힌다. 마당에 제물상을 하나 차리고 그 옆에서 대잡이가 대를 잡으면 무녀의 축원과 빠른 악기의 반주 소리에 대가 흔들리고 신이 내리면 그때부터 대를 앞세우고 제물상을 들려 도당을 중심으로 산허리를 한 바퀴 돌아온다. 중간 중간에 상을 내려놓고 축원을 하며 마을을 위해준다.
⑯ 뒷전: 도당굿의 마지막 절차로 온갖 잡귀를 풀어먹이는 거리이다. 끝에 술과 음식을 조금씩 버리고 이어서 칼을 던진다. 이때에 칼끝이 바깥쪽을 향해야 된다. 이것은 잡귀와 모든 부정한 것이 밖으로 나갔다는 의미이다. 이 뒷전거리를 마지막으로 봉화산도당굿이 끝난다.
의의 봉화산은 중랑구 지역에 위치한 단일 산봉우리로서 중랑구 내의 묵동, 중화동, 상봉동, 신내동의 접점지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봉화산도당굿을 2개 마을씩 합동으로 번갈아 주관을 한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중랑구 전체의 제의로 지내오고 있다. 봉화산도당굿도 시초에는 마을 제의로서 신앙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에는 많은 주민의 호응과 참여로 큰 축제판을 이루고 있다. 중랑구 각 동의 유력 인사들이 봉화산도당굿을 통해 단합하게 되는 계기를 이루며, 각 동의 주민들도 함께 참여하여 본인의 가정과 마을을 위해 기원하고 사제무로부터 축복을 받으면서 모두 화합하고 즐거움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