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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오선사 유트브로 보기 https://youtu.be/r0lcML1Y784
운문록 상권 상당 대기 44-1. 질문한 뜻을 놓치지 말라.
조사선 사가어록에 이어 운문록을 보설(普說)하고 있는 이 납승(衲僧)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의 교주(敎主)이신 석가모니불의 근본 뜻을 전하는 본원(本源)은 바로 진리(眞理)입니다.
그럼 진리(眞理)가 무엇입니까?
세계적인 철학자들이 바라보는 인간들이 바라보는 진리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영리하지만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우주의 동물들이란 주제의 학설을 소개합니다.
인간들이란 ‘영리하지만 과대망상에 빠진 동물’이란 주제입니다.
니체는 29세에 집필했으나 생전에 발표하지 않은 미발표 원고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 서두에서, 인간을 “우주의 한 구석에서 우연히 나타난 영리한 동물”로 묘사한다.
인간은 인식 능력을 발명해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에 놓고, 자신이 만든 ‘진리’라는 개념을 경외하지만, 니체의 시선은 차갑다. 인간 지성이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생산한 ‘진리’ 역시 절대적·영원불변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기중심적 파토스(정서)에 사로잡힌다. 니체는 “만약 우리가 모기와 소통할 수 있다면, 모기 또한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인간의 ‘특권적 지위’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드러낸다. 그의 비판은 이성 중심주의가 지닌 과대망상을 폭로하려는 시도였다.
진화론적 관점과 인식의 한계
니체의 핵심 질문은 “과연 인간이 자기 자신과 객관적 실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가?”이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인간 인식 능력도 진화 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선택된 결과일 뿐, 우주적 진리에 도달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달팽이가 달팽이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듯, 인간도 감각과 지각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세계를 ‘모델링’한다. 수족관 속 물고기가 바깥세계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난 세계를 전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니체의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한 번도 제대로 찾아 나선 적이 없다”는 말은, 진리 개념이 필연적으로 인간 조건의 한계 속에 묶여 있음을 함축한다.
서양 철학 전통 속 진리 개념의 전개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를 ‘사태와 명제의 합치’(Correspondence)로 정의했다. 이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핵심 정의가 되었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의 존재가 그 합치를 보증한다고 보았다.
칸트는 인간 인식이 객관적 세계와 합치하는 것이 가능한 조건을 ‘보편적·초월론적 인식 구조’에서 찾았다. 진리는 주관적 인식과 보편 조건의 합치 안에서만 성립한다.
헤겔은 진리는 고립된 명제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전체 체계에서 실현된다. 진리는 역사와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니체는 이 전통을 전면 부정한다. 인간은 본능과 충동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며, ‘진리’는 생존을 위한 언어적·개념적 허구일 뿐이다.
진리와 권력 — ‘진리의 정치학’
니체 이후 푸코는 그의 계보학적 관점을 확장해 “진리는 언제나 권력과 결탁되어 있다”라고 분석했다.
전통 철학이 ‘진리는 해방, 오류는 예속’이라고 전제했다면, 푸코는 진리 규정 자체가 권력 작용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진리는 시대와 제도, 담론 권력이 구성한 사회적 산물이며, ‘객관적 사실’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작동한다.
20세기의 도전 — 논리실증주의와 비트겐슈타인
논리실증주의자들과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진리를 ‘명제와 사실의 일치’라는 최소 정의로 환원했다. 세계를 이루는 모든 참·거짓 명제를 나열하면, 그것이 곧 세계의 완전한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니체의 시선에서 보면 생명과 의미의 장을 도려낸 차가운 기호 논리에 불과하다.
이후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 개념을 도입해 진리를 맥락·관습·언어 공동체의 합의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다시금 니체와 통하는 해체적 시각을 열었다.
완전한 객관성의 불가능성과 그 위험
니체는 ‘완전한 객관성’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설사 가능하더라도, 삶을 지탱하는 환상·열정·창조성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초인’(Übermensch)은 냉철한 자기 인식과 더불어 생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다.
진리 탐구의 역설 — ‘길 위의 인간’
니체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제부터라도 찾아 나서야 한다”라고 했다. 그에게 진리란 완성된 목적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균열과 변화를 겪는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창조적 통찰이었다.
완전하고 불변하는 진리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 여정 속에서 인간은 자기 한계를 깨닫고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낸다. 이것이야말로 진리 탐구가 주는 궁극적 가치다.
마무리 하자면 인간은 ‘영리하지만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동물’ 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세계와 자기 자신을 성찰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진리의 단편들은 여전히 삶을 풍요롭게 한다. 니체의 통찰은 ‘진리’를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과 권력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진리를 소유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로 변모하는가?”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뜻은 인간중심의 진리가 아니라 우주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인 인간과 관게없이 본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본래의 실체를 어떻게 인간세상의 규현하여 완연한 자유와 절대평등의 근원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절대진리를 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슆다.
그래서 운문선사은 이렇게 초구를 날립니다.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별 일없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무엇을 찾느냐?]라고 하십니다. 진리의 당체는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실체적으로 존재의 본원이 그대로 텅빈 허공과 같은 본래공(本來空)이며 무일물(無一物)인데 왜 그대들은 별 일없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무엇을 찾느냐?라고 초구를 뛰우면서 운문선사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그저 밥 먹고 똥오줌 쌀 줄만 알 뿐이다.]라고 하십니다.
진리의 당체는 원래 없는 것이니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럼 자신은 남들이 선지식이라 깨달음을 얻었으니 부처님 같이 십여시을 얻어 무엇이든 하고 완전한 자유를 구과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찾아 왔지만 나는 그저 밥 먹고 똥오줌 쌀 줄만 알 뿐이다.라고 하신 것은 일체 유의법이 개시불법이듯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일체처와 일체시가 모두 지금 여기에 천연성인 본성되로 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럼 사람이 태어나 무엇을 할까요 몸으로 하는 유위적 행동은 네가지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먹고. 싸고. 하고. 자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어떤 동물도 식물도 생명이 있는 산하대지(山河大地) 비글조수(飛禽鳥獸) 초목총림(草木叢林)은 전부 있는 그대로는 인연에 따라 모든 행동과 말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원이며 본래불(本來佛)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한 말씀을 덧 붙입니다.
[별달리 안다 한들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하시면서 나는 무학이라 배움이 없고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 함이 없으며, 구할 것이 없고 찾을 것도 없으며 깨달음도 구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무위행을 밝히 십니다. 그리고는 그럼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구하고 찾고 얻어려 하는데 라는 뜻으로 이렇게 반문을 하십니다.
[그대들은 제방에서 참선(參禪)하며 도(道)를 묻는데, 그러면 제방에서 참구한 일이 무엇이냐? 한번 꺼내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즉 그대들이란 여기 찾아 오는 사부대중들에게 묻는 말입니다.
“그대들은 제방에서 참선(參禪)하며 도(道)를 묻는데” 즉 실참도 하고 법회가 열리면 나와서 나에게 묻는데 왜 묻는가 물을 것이 어디에 있는가 원래부터 모든 것은 허공성(虛空性)인데 무엇을 물을 것이 있는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 뿐인데 왜 묻는가 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다 말씀하셨는데 무엇이 궁금할게 있느냐 그것은 오직 그대 욕심이며 의심이며 믿음이 약해서 그런 것이니 이렇게 물을께 없다라는 것을 밝혀 드리면서 이렇게 만약에 물을 것이 있다면은 “그러면 제방에서 참구한 일이 무엇이냐? 한번 꺼내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내 보아라 하니 아무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 아상에 젖어 남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부정하는 의심병 환자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이지요. 그래서 다시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다시 말씀하셨다.
"중간에 너의 집안 아버지를 속여서야 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수행을 왜 해야 합니까? 자기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착각 속에 세상의 인생살이가 원래 그렇게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진리인줄 알면서도 그 생노병사를 벗어나른 길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출가를 하여 수행을 한다고 하는데 그럼 수행이란 조사선에서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수행이란 참선이란 내 의심병인 탐진치(貪瞋癡) 견문각지로 얻어 들은 풍월로 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관하여 모든 것이 다 내 삼독심이 바탕이 되어 신령스런 성품을 밝해 내어 나는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불생불멸을 얻겠다는 자기의 욕망에 따라 하고 있으니 이것은 수행이 아니라 헛짓을 하는 시공을 놓치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작금의 참선수행은 조사선에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잘 관하여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며 진상이며 진실 여상한 진여(眞如)인 줄 알아차리는 그놈이 바로 부처인 마음인 것을 체달하면 이것이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첨선을 하면 물론 마음의 오위백법(五位百法)을 스르소 격어 보겠다는 것이지만 실질적이 깨달음은 다 선문답을 통하여 마음이 부처임을 깨달으면 이것으로 확철대오(確澈大悟)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 마음을 알면 온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형상은 다 내 마음이 지어낸 헛상인 줄 아는 것이니까 더 이상 의심할 것이없지요.
모든 경계는 매 마음이 그려낸 공화인줄 알면은 본래부터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이 바로 진정한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운문선사는 이렇게 말씀을 이러 갑니다.
[내 뒷 꽁무니나 따라다니며 흘린 침이나 받아 씹어 새겨 자기 것이라 하고서는 '나는 선(禪)을 알고 도(道)를 안다'고 말한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치 운문선사의 뒷 꽁무니나 따라다니며 운문선사가 흘린 침이나 받아 씹어 새겨 자기 것이라고 하고서는 이제 운문선사의 무파비를 다 보고 들었으니 이제 진리를 다 파악했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문각지(見聞覺知)입니다.
즉 남의 소나 세는 격이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입니다. 운문선사에게 배울 것은 사실 하나도 없습니다. 선사라도 진리의 당체는 불입문자(不立文字)이며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심행처멸(心行處滅)입니다. 석존께서도 진리의 당체는 말을 해도 틀렸고 글로 쓰도 틀렸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인 어쩔 수 없이 내가 방편으로 설명할 뿐이라고 하셨듯이 모든 선지식은 오직 선기방편(禪機方便)으로 하고 있을 뿐 이것은 상대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그 방편을 알려 줄 뿐 진리는 설파할 수 없다고 하시는 말인데 이 선문답으로 한 소리를 들어면 그래 내가 한 소식을 했다.
라고 마치 깨달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알아차렸다라는 본래부터 그렇게 다 알수 있지만 이것역시 마음으로 지은 유위의 식심의 작난임을 알아야 하는데 그럼으로 일체유위법은 개서허망(皆是虛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스스로 마음의 문이 열린 것은 오직 자기 스스로 알뿐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며, 설영 깨달음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명색에 빠져버리는 것이니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고 깨달음 아님도 아니니 께달음 그대로가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슆습니다. 돌~~~~~~~~!!!!!!!!
[설사 그대가 일대장경을 외운다 한들 무엇에 쓰려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일대장경을 외우는 것을 염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염불은 사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일대장정인 삼승 12분경도 다 팔만사천 방편문인 것이지 그것을 다 외우고 자기 나름 해석해 보아야 진리에 계합하는 일은 아무른 관련이 없습니다. 물론 백장선사의 백장광록에서는 부처님의 경전도 그 말씀을 깊이 새겨 그 근본적 도리를 체달하면 인연성불(因緣成佛) 할 수 있음을 밝혀주셨지만 사실 힘든 일이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을 한 번 읽어만 보는데 8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것을 다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다 읽었다면 자연적으로 깨달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조사선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오돈수(頓悟頓修)라 시절인연이 닿으면 언제 어디서나 바로 깨달을 수 잇다는 것입니다. 즉 한마디의 향상일구나 향상일로에 의하여 즉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조사선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니 운문선사는 “설사 그대가 일대장경을 외운다 한들 무엇에 쓰려 하느냐?”라고 반문을 하십니다. 그럼 왜 부처님은 그렇게 팔만사천의 경전을 설했을까요. 마음의 경계는 무량수무량광(無量數無量光)이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 전체를 다 밝히려면 지금의 컴푸트로도 다 밝힐 수 없습니다. 사람의 뇌를 분석해 보려고 하니 전자파와 뇌파는 다른 것이라 전자파로는 한 사람의 뇌를 만들려면 세계에서 재일 큰 컴을 지구만큼 크게 말들어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것은 마음의 할량 없고 넓은 반야 지헤는 사실 불가할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심법계를 밝힌 것을 보면은 그 당시는 전기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전기라는 자체가 없는 시절에 이금의 과학기술이 밝혀낸 전자제품과 원리를 어떻게 다 알았는지 양자학도 아직 부처님이 말한 소립자의 원리를 따라가지를 못하니
그 반야 지혜야 말로 이 불교를 따라 갈려고 연구하고 발명품을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은 이미 본연인 자연의 법칙이나 우주의 법칙에서 밖에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뇌파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은 인간이야 말로 부처님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또 이렇게 설법을 이어 가십니다.
[옛사람은 그대들이 갈팡질팡하는 것을 보고는 마지못해 '보리와 열반'을 말씀하셨으나, 그것은 그대를 매몰하거나 말뚝을 박아 묶어두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음 수행을 하시는 납자들에게 선어록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로 사구백비(四句百非)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럼 왜 사구백비로 말씀을 하실까요? 중생의 삶이란 전도몽상(轉倒夢想)이라고 합니다.
전도몽상(顚到夢想)이란 표현은 불교 용어 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도 "원리전도몽상(原理轉倒夢想)" 이라는 구절이 있다. 전도(顚到)는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는 것을 말하며, 몽상(夢想)은 헛된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꿈인줄 모르고 현실로 착각하고 있다. 돈은 사람을 위해 만들었는데 돈에 집착하다 보니 돈의 노예가 된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이 있는데 너무 비싸고 좋은 옷을 입으니 내가 옷을 보호하게 되었다. 평수가 넙은 좋은 집을 선호하고 비싼 가재도구가 많으니 사람이 집을 지키는 개가 된다.
마치 구름이 태양을 가려 밝은 하늘을 볼 수 없듯이...검정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검게 보이듯이 말이다.
우리가 그 많은 재산을 곁에 두고 다 써보지도 못하고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번뇌와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갖는 잘못된 견해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눈앞의 모든 현상이 결국은 다 없어지고 말 것인데도 영원불멸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권세나 재물은 반드시 낮은 곳으로 떨어지고 부자는 가난한 자가 된다. 자기의 육체와 천년만년 살 것같은 가족 까지도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 사별했다고 해서 식음을 전폐하며 너무 애통해 하지말라. 인생은 유한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
둘째 세상살이가 괴로움보다 즐거움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파리가 꿀맛에 도취해 빨다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결국 죽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같은 뿌리이니 있는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셋째 나라고 하는 존재는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한 번 애욕에 사로 잡히면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 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사람의 몸은 더럽고 추한 것이 아닌가?
무엇인가 얻지 못하면 괴로운 것이 아니고 남을 베풀지 않해서 괴롭다. 베풀면 복을 받게 되므로 오히려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마태복음 5장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이 있다. 원수를 사랑하면 원수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진다.
불경에도 "원망을 맺지마라, 원망한 자를 만나면 괴롭다" 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를 원망하지 않으니 내 마음이 편하여 좋아진다.
지금 우리 사회는 탐욕과 경쟁, 승리를 위해 만들어진 전도몽상이 차고 넘친다. 우리 실버들은 평생 오만과 아집, 편견으로 살아오지 않했는가? 하는 반문을 나부터 해본다. 고통의 뿌리는 바로 전도몽상이다. 즉, 집착과 욕심인 것이다. 우리는 이를 버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미래는 앞으로 닥쳐올 일...오로지 지금 현실이 중요하다. 하루 하루를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다' "이 순간이 최고다' 다 하고 충실하고 성실하게 절실하게 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 무었보다 중요하다.
“옛사람은 그대들이 갈팡질팡하는 것을 보고는 마지못해 '보리와 열반'을 말씀하셨으나,”라고 하신 것은 전도몽상의 허황된 욕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 허망함을 알면서도 물질에 매달리는 중생들을 위하여 불교의 경전에서 지혜라는 보리(菩提)를 말하고 영원히 죽지않는 열반(涅槃)을 말한 것은 사람이란 욕망의 산물로 태어났다 그러니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신의 경지의 신통묘용(神通妙用)을 바란다 그러니 석존께서도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어면 왜 좋은 지를 말씀해 달라고 하니 수행을 하여 무심의 경지를 얻으면 묘각(妙覺)이라고 경지에 오르면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이루어진다고 하셨고 무심의 경지에 이르면 생사일여(生死一如)라 생도 없고 무생의 도리를 증득하여 불생불멸의 세계인 열반(涅槃)에 이른다고 하신 것을 운문선사는 이것은 다 욕망에 빠지지말고 심처에는 그러한 욕계자체가 없는 꿈같은 것이라고 하시면 그럼 왜 석존은 보리와 열반을 말했는가?
사람의 삶이 인생팔고(人生八苦)라 이것을 벗어나려면 수행을 하여 고통을 벗어 날수 있는 지혜와 불생불멸의 열반을 말씀하시어 희망과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말씀하시어 최상의 극락인 열반을 말씀한 것인데 이것역시 최상을 표현할 길이 없으니 열반이라는 말씀을 유지로 남긴 명색(名色)인 것이다. 그럼 지금 여기에 살아가는 것이 어디에 지혜가 아니며 마음 수행을 하면 모든 것이 항상 즐겁고 편온하여 적정열반(寂靜涅槃)이 아니든가 하시면서 최고 최상의 극락을 표현한 명색이며 한 변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상락아정을 이루려는 희망을주기 위하여 베푼 방편임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수행을 하면 그렇게 좋은 곳으로 자연 갈 수 있다는 것으로 부처님을 따라 수행을 한 것이다. 그러나 운문선사는 사구백비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보리 열반은 “그것은 그대를 매몰하거나 말뚝을 박아 묶어두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자유가 최고 최상의 극락인데 보리지혜를 찾아 혜매게 하였고 열반을 말씀하시어 그대들은 묶어 두는 말뚝을 박아 묶어두는 것이니 반야라고 말하고 행동하면 바로 반야에 집착하는 반야는 반야가 아니며 열반에 집착하는 열반은 열반이 아니라고 하시는 사구백비인 것입니다. 돌~~~!!!!!!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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