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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장 주석
칠십인의 사명 (누가복음 10:1-16)
칠십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방문하고, 그를 영접할 준비를 시키고,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 둘씩 둘씩 각처로 보냄을 받았다. 다른 복음서 기자는 본문의 기사를 취급치 않고 있다. 이들은 열두 제자와 똑같은 지시를 받았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Ⅰ. 그들의 인원 수 : 그들은 칠십 인이었다. 예수께서 열두 명의 제자들을 택할 때 열두 족장, 열두 지파, 그리고 열두 지파의 왕을 생각하고 선택했던 것과 같이,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칠십 장로들을 생각하고 선택한 것 같다. 70인들이 모세와 아론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출 24:1, 9). 그리고 후에 그들은 모세가 치리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선택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예언의 영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민 11:24-25). 엘림에 있었던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는 열두 사도와 칠십 제자의 모형이었다(출 15:27). 구약을 희랍어로 번역하기 위해서 애굽의 톨레미(Ptol-emy)왕이 채용했던 사람들은 유대의 칠십 장로들이었다. 그래서 이 번역을 셉투어진트-70인역-이라고 부른다. 대 산헤드린도 이 인원수로 구성된다.
1.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파송할 만한 많은 사람들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 기뻐한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업은 헛되이 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권세는 증가하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고통을 받지만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증가할 것이다. 이 칠십인들은 열두 사도처럼 그리스도와 항상 가까이 있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고 기적을 보았다. 믿은 자들이었다. 앞장의 끝에서 언급한 세 사람들이 성실하게 부름에 응답했다고 하면 이 칠십 인에 속했을지도 모른다. 이 칠십 인은 베드로가 사도행전 1장 15절과 21절에서 말한 대로 "주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었으며, 120명 가운데 포함된 자들이었다. 사도행전과 서신에 나오는 사도들의 동행자 중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 칠십 제자들이었을 것이다.
Ⅱ. 이들의 활동과 사업 : 예수께서는 서로 용기를 얻게하고 격려해 주도록 둘씩 둘씩 보냈다. 만일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그를 일으켜 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열 두 제자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고을로 보내시지 않으시고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만 보내셨다(1절). 그들은 마치 선구자와 같았다.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곧 그들의 뒤를 따라 가셨을 것이다. 그러나 한 곳에서 오래 머물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는 곳마다 행하신 것과 같은 두 가지 일을 수행하는 명령을 받았다.
1. 그들은 "병자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야 한다(9절). 이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보고 싶게 하고 그의 이름이 능력 있는 예수를 영접할 준비를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2. 그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한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온다. 만일 자신을 생각해서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면 흠 없이 서야 한다. 이제 그날이 다가온다. 너희는 그것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얻기 위해서 우리의 이익과 기회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가까이 왔을 때 우리는 나가서 맞아야 한다.
Ⅲ. 예수의 지시
1. 그들은 기도로 일을 시작해야 되고 기도하는 중에 다음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1) 그들은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영혼의 필요성을 충분히 알아야 한다. 그들은 추수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둘러보아야 되고 알아야 한다. 또한 그들한테 복음을 듣기를 원하며 받아들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야 되며 또한 지금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 차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거두어들일 일손이 모자라기 때문에 버려지고 잃어버리는 곡식들이 많이 있다. 전도자들은 귀중한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맡은 일에 충실해야 한다. 영혼을 마치 그리스도께 드릴 이 세상의 보화처럼 여기고 돌보아야 한다. 그들은 또한 일군이 매우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의 교사는 매우 많으나 일군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로 사람을 인도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 되는 일과 자기들 파로 인도할 뿐이다. 훌륭한 전도자는 해야 될 일이 많기 때문에 많은 전도자가 있기를 바란다. 장사꾼이 손님이 적은 것을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일군이 적으면 포도원에 있는 일군들로 하여금 걱정하게 하신다.
(2)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기 위해 간절히 소원해야 된다. 왜냐하면 추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추수하기 위한 일군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도한 다른 사람도 보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셨기에 그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과 성공하게 하실 것을 바라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예언자처럼(사 6:8)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기를 소원해야 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담대하게 나아가도 좋다.
2. 그들은 고통과 박해를 예상하고 출발해야 한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나 가라. 그리고 그것을 잘 이용할 결심을 해라. 너희의 적은 포악하고 잔인한 이리 같아서 너희를 찢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너희를 위협하고 괴롭힐 것이다. 또한 너희의 적은 울부짖는 이리같이 너희를 무섭게 하고 박해할 것이다. 또한 약탈하는 이리 같이 너희를 물어뜯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먹이가 된다고 해도 어린양처럼 평화롭게 참아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용기를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면 이리 가운데 양과 같이 보낸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3. 그들은 장기간의 여행을 하는 것처럼 많은 준비를 할 필요가 없고 그들을 위해 편리를 제공하는 하나님과 친구들을 의존해야 한다. 돈 전대나 옷이나 음식물을 넣는 자루나(열두 제자의 경우와 같이 9:3) 새 구두도 가지고 가지 말라. 또한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이것은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보기 위해서 자기의 종을 보낼 때 한 명령이었다(왕하 4:29).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전도자들이 버릇없고 무뚝뚝하고 예의가 없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러나 다음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 그들은 바쁜 사람답게 가야 한다. 그들에겐 임무를 수행할 일정한 곳이 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의식이나 의례적인 인사 때문에 그곳에 가는데 방해받거나 늦어져서는 안 된다.
(2) 그들은 사업가답게 가야한다. 이 사업은 저 세상에 관계된 것인데, 그들은 이 일에 전심을 다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속적인 이야기 때문에 혼란에 빠져서는 안 된다. Minister verbi est;hoc age ─ 즉 너희는 말씀의 일꾼이다. 너희의 직무에 충실하라.
(3) 그들은 엄숙한 사람처럼, 그리고 슬픔에 잠긴 사람처럼 가야한다. 곡하는 사람은 칠일 동안 아무에게 인사를 하지 않기고 되어 있다(욥 2:13). 그리스도는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탄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전도자는 여러 가지모습으로 그를 닮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덜어 주려고 하는 인간의 비참에 깊은 감동을 받고 있으며, 그러한 느낌을 자기들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한다.
4. 그들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들의 평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평안을 빌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결과와 성공은 받는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5, 6절).
(1) 그들의 책임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이 평안할 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1] 그들은 개인 집에 들어간 것 같다.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유롭게 전도할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들의 선생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가는 곳마다 각 집에서 복음을 전파했다.(행 5:42; 20:20)
[2] 그들은 "그 집에 사는 모든 사람, 모든 가족에게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평안할지어다는 유대인의 일상 인사였다. 그러나 그들은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에게는 습관에 따라 형식적으로 인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들어가는 집의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인사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의례적으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문안하지 말고, 너희가 들어간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실하고 실제적으로 너희가 평안할지어다 하라. 이것이 의례적으로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전도자들은 온 세상으로 나가서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파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의 복음, 평화의 계약, 지상에 평안을 선언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와서 평화의 은혜를 받도록 초청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모든이에게 평안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전도하는 사람들이 영혼의 구원을 진실하게 소원해야 되며, 그들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는 것이 좋다.
(2) 성공여부는 그들이 전파하고 기도해 준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다르다. 그 사람들이 평안의 자녀인 자도 있고 아닌 자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평안은 그 집에 따라 다르다 Recipitur ad modum recipientis ─ 즉 받는 자의 태도가 받은 내용을 결정한다.
[1] "너희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평안의 자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들은 복음의 빛과 사랑으로 인하여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 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이 온화한 자들이다. 그들은 은총에 의하여 복음의 위로를 받을 자격을 갖춘 자들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평안은 그들을 찾아낼 것이며 그들을 위한 너희의 기도는 응답될 것이며, 복음의 약속은 그들을 확신시켜 주어 복음의 특권이 그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또한 잃어버리지 않을 열매가 그들 가운데 살아 남아서 계속될 것이다."
[2] "너희는 너희가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주의하려고도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평안의 자녀가 한 사람도 없는 집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평안은 분명히 그들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사실상 어떤 몫도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평안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벨리알의 자녀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벨리알의 지배하에 있는 어떤 사람도 계약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평안은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고 책임을 다함으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다윗의 기도와 같이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시 35:13)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사명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평안은 우리에게 다시 돌아와서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만나는 이웃이나 평안의 자녀에게 전달될 것이다.
5. 그들은 그들을 영접하고 환영하는 자들의 친절을 받아야 한다(7, 8절). "복음을 영접하는 자들은 그것을 전파하는 너희를 영접하고 환대할 것이다. 너희는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그러나 생활은 도움 받아도 좋다."
(1) "부끄러워하지 말라. 너희를 환영하는 것을 의심하지 말고 폐가 된다고 생각 말라. 그 대신 그들이 주는 것을 진심으로 먹고 마셔라. 왜냐하면 그들이 너희에게 베푸는 친절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너희가 그들에게 베푼 친절 즉 평안의 기쁜 소식을 전해준 것에 대한 작은 보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것을 받을 만하다. 왜냐하면 일군의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전도의 일을 하는 자도 그가 진정으로 일군이 된다면 마찬가지다. 배우는 자가 가르치는 자와 유무 상통함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행위이니라."
(2) "너희에게 준 음식에 대해서 까다롭거나 호기심을 갖지 말라.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7절). 차려 놓은 것을 먹어라(8절). 간단한 음식에 감사하라. 비록 맛이 없다고 해도 불평하지 말라." 불평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좋은 음식만을 탐하게 만들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바리새인의 광적인 금식에 빠지지 않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쾌락주의자의 호화스런 잔치도 허락지 않았다. 아마도 본문은 장로들의 식사에 관한 전통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같다. 그들의 음식은 가짓수가 많아서 차리는 사람들은 잘못하면 많은 비난을 받았다. 너희는 그들한테서 한 접시의 식사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약간의 음식은 대접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대접에 상관하지 말게 하셨다. 그러나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차린 것은 먹으라고 하셨다.
6. 그들은 그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공포해야 한다. "만일 너희가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치 않든지 너희가 전파하는 것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곳을 떠나라(10절). 또한 너희를 그들의 집으로 영접치 아니하면 거기에서 그들에게 경고하라."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가 해야할 일을 지시하신 것 같다(225절). 그들에게도 지시했다. "그들에게 분노, 저주, 원망으로 말하지 말고, 메마르고 죽어 가는 영혼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말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시는 파멸의 공포를 말해 주어라.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11절)고 하라. 너희는 그들로부터 어떤 친절도 받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라. 벧엘 예언자의 대접을 받는 여호와의 예언자는 비싼 값을 치렀느니라. 너희들의 먼지도 가져가지 않겠다고 말하라. 먼지를 그들에게 떨어버려라. 왜냐하면 먼지는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자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이다. 영접과 거절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알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고. 여기에 분명한 선택이 너희에게 주어졌다. 만일 너희가 그 은혜를 받지 못하면 그것은 너희의 잘못이다. 복음은 너희의 문 앞에 이르렀다. 만일 너희가 복음을 반대하여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의 피는 너희 머리에 있게 된다. 보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만일 너희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면 너희의 죄는 변명할 수 없고 저주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와 생명의 선택이 더욱 더 분명해질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훗날을 위하여 책임을 져야 될 것이다. 만일 이 선택을 무시하면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2절). 소돔 사람들은 사실 롯의 경고를 무시했다. 그러나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더 큰 죄이다. 그러므로 그날에 처벌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날을 심판의 날이라고 했다(14절). 그러나 강조하기 위해서 그날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은 최후의 날이며 큰 날이고 우리가 시간의 모든 날을 계산해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은 우리의 상태를 영원의 날을 위해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 복음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그리스도 권능의 대부분이 베풀어졌고, 그리스도와 아주 친근했던 마을 ─ 마태복음 11장 20절에서 볼 수 있는 ─ 갈릴리 해변의 마을인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과 같은 마을의 특별한 운명이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1] 이 마을 사람은 큰 특권을 누렸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그들에게 베풀어졌다. 이 권능은 모두 은혜스럽고 자비로운 역사였다. 그 사람들은 이 일로 말미암아 하늘 나라까지 올라갈 만큼 의기양양해졌으며, 지위가 높아지고 명예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축복된 길로 분명히 나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외적인 방편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하늘 나라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2]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는 생활의 회개와 개혁을 일으켜 주고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서 통곡하게 하고 저지른 죄 때문에 챙피를 당하게 하고 하나님의 통지에 복종하는 겸손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3] 이러한 의도를 그들은 거절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고 말았다. 그것은 "회개치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온갖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더 올바로 생각하거나 죄를 더 미워하게 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누린 특혜에 맞는 결실을 못 맺었다.
[4] 그리스도가 두로와 시돈, 곧 이방 도성에 가서 전파하고 기적을 행했더라면, "오래 전에" 이미 그들이 회개했으리라는 것은 있을 법한 생각이다. 그들은 빨리 회개하고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았기 때문에 그만큼 회개도 진심으로 했을 것이다. 거절하는 자들에겐 은혜의 방편을 주고받으려 하는 자들에겐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려면 마지막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5]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 자들의 마지막은 무시무시하게 될 것이다. 존귀 받아야 할 그들이 존귀를 무시했으므로 지옥에 떨어지게 되고 망신을 당하고 치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신앙을 지킨 자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려고 애쓰나 헛된 일이 될 것이며 오히려 가장 낮은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과 낙망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지옥은 그들에게 정말로 지옥이 될 것이다.
[6] 심판의 날에 두로와 시돈을 보다 낫게 될 것이며 위와 같은 마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자기가 원하는 규칙을 자기의 전도자들에게도 적용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전도자를 대하는 것처럼 자기도 사람들을 생각하시리라고 하셨다.(16절). 대사에게 하는 것이 바로 그를 보낸 왕에게 하는 것이다.
[1] "너희 말을 듣는 자" 즉 너희가 한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나를 존경하는 것이다.
[2] 그러나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사실상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멸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를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멸시하는 자는 사실상 본래적인 자연스런 신앙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충실한 전도자를 저버리는 자들, 비록 그들이 전도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을 하찮게 여기고 조소하며 그들의 전도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칠십인의 보고 (누가복음 10:17-24)
예수께서는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하실 때 칠십 제자를 미리 보냈다. 그때 예수께서는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올라가셨다(요 7:10). 그러나 이 때 공식 수행원의 무리는 그렇게 많았던 것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이 때는 예수께서 명절에서 돌아오기 전이었고, 아직 예루살렘이나 베다니에 계실 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왜냐하면 예수께서 거기에 계셨기 때문이다. 38절). 즉 칠십 제자들이나 최소한 그들 중 얼마는 그에게 돌아왔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Ⅰ. 성공적인 전도 여행의 보고. "그들은 기뻐 돌아왔다"(17절). 그들은 여행으로 인한 피로, 당했던 반대와 실패도 불평하지 않고 성공에 대해서 즐거워했다. 특히 더러운 귀신을 내어쫓는 것에 대해서 기뻐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비록 병자를 고치는 것만 그들의 사명으로 받았었지만(9줄어들) 틀림없이 귀신을 내어쫓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그들은 놀라운 성공을 할 수 있었다.
1. 그들은 이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리었다. 그것은 주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사탄에 대한 우리의 모든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영적 대적과 싸워야 한다. 어떤 이익을 얻든지 간에 예수께 모든 찬양을 돌려야 한다. 만일 어떤 일이 그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면 영광은 그의 이름에게 돌려야 한다.
2. 그들은 그 일이 주는 위로로 만족했다. 그들은 큰 기쁨에 넘쳐서 말했다. 큰 원수인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신자에게 있어서 사탄에 대한 승리보다 더 큰 기쁨과 만족은 없다. 만일 마귀가 우리에게 행복하다면 무엇이 우리 앞에 설 수 있겠는가?
Ⅱ. 이 보고에 대한 예수의 인정.
1. 예수께서는 그들이 말한 것을 자기가 직접 본 것과 같다고 확신시켜 주었다(18절). "나의 마음과 눈은 너희와 함께 있다. 나는 너희가 성공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사탄과 그의 나라는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사탄이 잃어버린 땅을 너희가 차지할 때의 형편을 알고 있다." 사탄은 갑자기, 회복할 수 없도록, 볼 수 있도록 하늘로부터 번개처럼 떨어졌다. 또 모든 사람이 그것은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보라. 사탄의 나라가 얼마나 비틀거리며 떨어지는가 !" 그들은 사람의 육체로부터 귀신을 내어쫓는 일에 승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영혼 속에 있었던 귀신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셨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악마의 권세라고 불리워졌다(엡 6:12).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은 이제 곧 성취될 것이고 이미 시작된 일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우상 숭배가 근절됨으로 세상에서 사탄의 나라가 파괴되고 모든 나라가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되돌아오는 일이다. 사탄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그의 왕좌에서 떨어졌을 때 하늘로부터 떨어졌다(행 26:18). 또한 예수께서는 복음의 전파가 세상으로 번개처럼 날아가서 어디에서든지 사탄의 나라를 파괴하는 것을 보았다. 이제는 이 세상의 왕을 쫓아낼 때이다.
어떤 사람은 본문을 다르게 해석한다. 마치 천사들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려고 한다. 이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어서 교만 때문에 그들의 성공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나는 교만 때문에 천사가 마귀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사탄은 바로 그 죄 때문에 하늘 나라에서 빛의 천사였던 자가 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교만해져서 올라가다가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을 너희에게 암시해 준다. 마귀는 바로 그 교만 때문에 떨어졌다"(딤전 3:6).
2. 예수께서는 반복해서 그들의 사명을 인정해 주셨고 확대시켜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을 밟을 능력을 주노라"(19절).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사용하는 자는 더 많은 것을 받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능력을 사탄을 대적하는 일에 힘있게 사용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믿고 더 큰 능력을 주셨다.
(1) 공격적인 능력 즉 뱀과 전갈을 밟으며 마귀와 극악한 귀신과 늙은 뱀을 제어할 능력을 주셨다. "너희는 첫 번 약속에 따라 그들의 머리를 내 이름으로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 자 너희의 발을 이 대적들의 목에 올려놓아라. 너희는 사자와 독사를 만나는 곳마다 밟을 것이다. 너희는 그것들을 발로 누르리라(시 91:13). 너희는 모든 대의 능력을 밟을 것이며 메시야 왕국은 악마의 나라가 파괴되는 곳마다 세워질 것이다. 마귀가 지금 너희에게 항복했으나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다."
(2) 방어할 능력을 주셨다.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뱀이나 전갈도 너희를 해치 못할 것이다. 만일 너희가 그것들 때문에 해를 당하도록 잡혀서 토굴 속에 갇힌다고 해도 너희는 가장 독한 그것들에 의해서 해를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그랬었고(행 28:5) 마가복음 16장 18절에서 약속돼 있다. "만일 너희에게 뱀같이 악한 사람이 있고 너희가 전갈 같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도(겔 2:6) 너희는 그들의 포악한 것을 무시하고 밟아버려라. 그것 대문에 방해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부터 주어진 힘 이외는 너희를 대적할 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겁을 줄지는 모르나 해할 수는 없다. 너희는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죽음 자체는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사 11:8, 9; 25:8).
3. 예수께서는 그들의 기쁨을 똑바로 알라고 말씀하셨다(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 귀신들은 이제까지 행복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존경받고 전도가 성공했고, 너희의 지위가 다른 선한 사람보다 조금 높아진 것만 가지고 기뻐하지 말라. 너희는 이런 일들만으로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왜냐하면 너희는 영생을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았으며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곳은 어린양의 생명책이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들은 은혜로 아들의 상속을 받게 되어 있고 양자가 되고, 상속의 본질인 양자의 영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아들의 가족으로 등록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기쁨의 사건이고 귀신을 내어쫓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기적을 행하는 권세보다 더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다와 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부인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양이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구원하는 은총은 영적인 은사보다 더욱 더 기뻐해야 할 것이다. 거룩한 사랑은 방언을 말하는 것 보다 더 훌륭한 것이다.
4.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렸다. 왜냐하면 자기의 제자들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뽑아 주셔서 고귀하고 영광된 봉사를 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21, 22절). 본문의 기사는 전에 살펴 본 바 있다(마 11:25-27). 그러나 본문에는 "이 때에 예수께서 기뻐하사"라는 서두가 첨가되었다. 이 때란 말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보자. 그러한 때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슬픔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에, 사단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자기의 전도자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이 때에 그는 기뻐하셨다. 복음의 확장과 사람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돌아옴으로 사탄의 땅이 점령되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심정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의 기쁨은 진정한 본질적인 기쁨 즉 내적인 기쁨이었다. 그리스도의 기쁨은 진정한 본질적인 기쁨 즉 내적인 기쁨이었다. 그는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그러나 그의 기쁨은 깊은 샘물과 같이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간섭하지 않는 기쁨이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이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왜냐하면 감사한 찬양이 거룩한 기쁨의 순수한 언어인 것처럼 거룩한 기쁨은 감사한 찬양의 뿌리요 근원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두 가지의 감사를 드렸다.
(1)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에 의해 계시된 것을 감사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21절).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며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찬양해야 한다. 예수께서 감사하신 내용을 살펴보자.
[1] 하나님 자신과 인간을 화해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인간의 자녀들에게 나타난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통하여 이러한 일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나타내 보이셨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감추어졌던 비밀을 나타내셨다.
[2] 또한 이러한 사실들이 어리고 약한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난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 이들의 능력과 지식으로는 이 약속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들의 능력을 승화시켜 주고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길러 주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린아이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할 뿐만 아니라, 약한 것을 통하여 아주 강한 일을 이루어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한다.
[3]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들에게 이것을 나타내실 때에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즉 이방 철학자들과 유대의 랍비들에게는 숨기신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사건을 그들에게 나타내시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뽑으시지도 않으셨다. 사도들이 지식과 상관없이 뽑혀진 것은 감사할 일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도들이 자기들의 지식과 그리스고의 복음을 혼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증명된 대로 인간의 지식은 복음을 타락시켰다. 기독교는 초기에 플라톤 철학에 의해서 부패되었었고, 다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의하여, 그리고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 될 당시에는 유대교 철학에 의해서 부패되었었다. 둘째로 만일 비들이나 철학자들이 사도가 되었었다면 복음 전파의 성공은 자신 랍비들의 학식과 지혜 그리고 논증과 웅변의 결과 때문이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복음 전파의 성공의 원인을 지나치게 그들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사도로 뽑으시지 않으셨다. 기드온의 군대들도 똑같은 이유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라"(삿 7:4). 바울은 사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 가운데서 교육받은 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사도가 되었을 때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지혜의 권하는 말을 버렸고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지식도 나타내 보이지도 않았고 사용치도 않았다(고전 2:2, 4).
[4]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대로 행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셨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 은혜와 그의 아들에 관한 지식을 주시고, 우리가 전도하기에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다면 이것은 만족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깊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기술로 복음을 전파하려는 자들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파하려는 자들의 손에 일을 맡기셨다.
(2)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비밀에 대해서 감사했다(22절).
[1]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확신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즉 선택된 자들에게 주시려는 모든 지혜, 지식, 능력, 권세, 은혜와 위로를 주셨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주어졌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것이 충만해야 하며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이 나와야 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을 관리할 수 있는 가장 신임 받는 자였다.
[2]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잘 알 고 있었고, 어떤 피조물도 알 수 없는 상호의식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아는 자가 없다." "여호와께서는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다"(잠 8:22).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었고"(잠 8:30) 영원부터 아버지의 품안에 있었던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성령으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며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없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찾을 수 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을 위임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자신에게는 기쁜 일이었으며 하나님께는 감사할 일이었다.
5.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러한 사건이 나타난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말씀하셨다(23, 24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돌아보셨다." 이것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된 사실과 또한 사람들에게 이 비밀을 전하는 책임이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도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알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였다.
(1) 원래의 목적과 얼마나 가까워졌나? 비록 이러한 사건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니나, 구원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해 주셨다. 만일 그를 자신이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축복이 될 것이다
(2) 그들보다 앞서간 자들이나 가장 위대했던 성도, 하늘나라에서 가장 축복 받은 자들보다 그들은 얼마나 높아졌나? "많은 선지자와 의인"(마 13:17), "많은 선지자와 임금"(24절)이 너희가 매일 계속적으로 이야기했던 것을 보고 듣고자 "원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듣지 못하였느니라." 구약의 선지자와 왕들이 아무리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신약의 성도들이 누렸던 명예나 행복보다 훨씬 못하다. 구약의 백성들이 예언에 의해서 가졌던 메시야 왕국의 축복과 영광에 대한 사상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을 축복의 날까지 수많은 시간을 기다리게 했고 희미한 그림자 정도의 그 나라의 본질을 보는 데도 많은 시간을 기다리게 했다.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보다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가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누리고 있음을 생각하고, 우리는 가지고 있는 장점을 더욱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근면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 많은 저주를 받게 된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누가복음 10:25-37)
본문에서 우리는 양심의 몇 가지 문제에 관해서 어떤 율법사와 대화하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답변이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본래 이 질문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물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본문에서 답변이 주어진 것을 볼 수 있다.
Ⅰ.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현생에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되는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질문은 어떤 율법사 혹은 서기관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던진 것이다(25절). 율법사가 "일어나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리스도께서 어떤 특별한 규정을 내릴 것이 있다면, 그 율법사는 이 질문으로 그것을 끄집어내서, 걸어 넘어지려 했다. 그러나 할 말이 없다면, 그의 교훈은 무용한 것이라고 헐뜯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 없이도 이미 자기들은 행복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율법사는 몇몇 서기관들처럼 그렇게 예수께 대한 반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인들이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러 교회로 가듯, 그리스도와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질문은 훌륭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나 그가 나쁜 의도와 혹은 비열한 의도를 가지고 질문했기 때문에 모든 좋은 점은 상실되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찾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올바른 관심을 가지고 말하고 찾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조심성 없이 단지 대화하기 위해서 특히 논쟁하기 위해서 영생과 그것을 얻는 방법에 관해서 말한다면, 본문에서 율법사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어 부르는 것이 된다. 좀 더 세밀히 살펴보자.
1. 예수께서는 그로 하여금 율법을 다시 생각게 했고, 그것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비록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을 알고 계셨으나, 그의 질문의 어리석은 점에 의해서 대답지 않으시고 지혜롭고 좋은 점에 따라서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질문으로 대답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 그는 그리스도를 시험하여 알아보려고 왔다. 그러나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를 시험하며 그 자신을 알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통한 율법사처럼 말씀하신다. 그의 직업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기에 그에게 지시하실 수 있었다. 그의 지식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는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는 우리가 하늘 나라에 이르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지금 보여 주신 것처럼 성경 말씀을 의지하고 거기에 나타난 길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기록된 율법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되며 더 멀리 전파하고 더 오래 간직해야 한다. 그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위해서 읽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읽은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을 때 율법에 기록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읽어야 되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율법에 호소해야 되며, 이것으로 잘못된 교리를 시험하여 논쟁을 끝내야 한다. 율법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 우리의 표준, 규칙, 지도가 되게 해야 한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가? 우리가 어떻게 읽어야 되는가?
2. 우리가 영생 얻기 위해서 행할 율법의 중요한 명령을 그는 얼마나 행했나? 그는 바리새인처럼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선한 피륙장사처럼 율법의 우선적이고도 중요한 두 가지 명령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을 반드시 행해야 되며 그것은 모든 율법을 포함한다고 생각했다(27절).
(1)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든 것 중 가장 온화하고 완전하며 뛰어난 최상의 존재로 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가장 큰 은혜를 입고 있는 자로 보고 감사와 관심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자신을 그와의 관계에 의해서 평가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 말에서 기쁨을 얻어야 하며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진실해야 되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야 되며 열성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최고의 사랑 즉 죽음보다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즉 근거와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잇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어야 한다. 전 생명을 드려야 한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그를 섬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그 무엇도 사랑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2) 우리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된다. 만일 우리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면 쉽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한 사람에게도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해야 되며 어떤 악도 행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해 주는 일을 우리 자신의 규범으로 정해야 된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대답에 대해서 칭찬하셨다. 비록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하여 왔었지만 그의 대답이 훌륭했기 때문에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칭찬하셨다(마 22:27). 이 점에 있어서 둘이 다 일치한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이런 사실에 만족할 것이며 바르게 말한 것을 지켜야 할 것이다. 대답은 옳게 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일이 남아 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즉 너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4. 그는 이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이것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인하도록 유도하고 있음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과 취해야 할 관점을 물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또한 자기 힘으로는 장래를 위해서 "이것을 행할 수 없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변호하려" 했다. 그래서 사실상 그 예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게 되었다. 마치 다른 한 사람처럼(마 19:28)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는 식으로 말한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육성"하기 위해서보다는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그릇된 점을 겸손히 알아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들의 선행을 교만스럽게 드러내기 위해서 훌륭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Ⅱ.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두 번째로 큰 계명에 따라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율법사의 다른 또 하나의 질문이었는데, 그것은 전자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의 계명을 추구하여 "자기가 정죄 받는" 일이 없도록 꾀한 것이다. 이미 그는 자신을 "정당화시키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그는 이미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의 "이웃"에 대해서 라면, 자기는 어느 정도 법을 다 지켰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언제나 친절히 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 여기에서 율법사의 잘못된 생각은 무엇인가?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이것에 대해서 율법사들 자신의 말을 인용한다. "너는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모든 이방인은 제외시켜라.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의 이웃은 우리 민족과 신앙을 가진 자이다." 그들은 이방인을 죽인 죄 때문에는 살인죄를 적용시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방인은 그들의 이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시 외에는 이방인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죽음의 위험 상태에 있는 이방인을 보았다고 해도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도와 줄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러한 악한 생각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별하여 선택했다고 하는 거룩한 계약으로부터 얻었다. 또한 이것을 악용함으로 범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범죄를 똑바로 보시고 이방 세계로 계약의 은총을 돌려 주셨다.
2.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 비인간적인 생각을 고쳐 주셨는가 ? 예수께서는, 우리가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할 사람들과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간주해야 된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친절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비록 민족과 종교가 달라도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한다. 좀더 자세히 관찰해 보자.
(1) 이 비유는 곤경에 처한 유대인이 선한 사마리아인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을 보여 준다.
[1] 어떻게 그가 강도를 만나게 되었는가 ? 이 정직한 사람은 평화롭게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었다(30절). 이런 장소의 언급은 이 이야기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도 이 사건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일어 난지 얼마 안 되었을 것이다. 역사의 사건은 많은 교훈을 준다. 만일 그것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본다면,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꾸며진 비유 이상으로 많은 감동을 준다. 이 사람은 강도들을 만났다. 이 강도들이 약탈해서 먹고사는 아랍인 강도들이거나 이스라엘인 중 악한이거나, 엄격한 군대의 훈련에도 불구하고 이런 악한 일을 하는 로마 군인들이었든지 간에 그들은 매우 야만적이었다. 그들은 그가 가진 돈뿐만 아니라 옷도 벗겨갔다. 그리고 쫓아오지 못하도록 하고 또한 그들의 잔악한 성격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그렇지 않으면 피를 흘려서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 그들은 그를 때렸고 상처 때문에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우리는 본문에서 노상 강도들에 대한 울분을 갖게 된다. 모든 인간성이 소멸되고 야수와 같은 자들은 말살되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악하고 이성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러진 그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져야 되며 우리의 능력이 미칠 때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곤경과 강도의 손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
[2] 그는 친구이었어야 할 자들에게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들은 자기의 민족이며 같은 종교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은 제사장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레위인이었다. 그들은 공직을 가진 자였으며 거룩한 직업을 가진 자로서 직무로 보아 온정과 동정을 베풀었어야 했다(히 5:2). 그들은 이와 같은 경우에 당연히 구해줄 의무가 있다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는 자들이었다. 이 의무는 죽음의 곤경에 빠진 자들을 구해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이 의무를 이행치 않았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제사장들은 대부분의 생활을 여리고에서 했었기에 거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었으며 그들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올라갔다가 그리고 되돌아올 때는 많은 제사장들이 그곳을 지나갔으며 레위인들은 그들의 수행원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그 길로 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았다. 그들은 그의 신음 소리를 들었고 만일 그를 도와주지 않으면 곧 죽게될 것을 알았을 것이다.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았으나 피하여 지나갔다. 그들이 그의 곤경을 보았을 대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그로부터 멀리 피하여 지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알지 못했다"고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잔악한 일을 저지르고 하나님의 자비로 다른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어주어야 할 사람들이 베풀어주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3] 그는 어떤 낯선 사람 즉 유대인이 가장 싫어하고 멸시하며 같이 행동도 하지 않는 민족인 사마리아인에 의해서 구출 받았다. 이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33절). 제사장은 자기의 백성인 그 사람에 대해서 마음을 닫았으나 사마리아인은 다른 민족인 그에 대해서 마음을 열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그가 어느 나라 백성인지 생각지도 않았다. 비록 그가 유대인이었지만 그도 역시 한 인간이었고 특히 곤경에 처한 사람이었다. 그 사마리아인은 모든 사람들을 존경하라고 배워왔다. 그는 언제 이 사람의 처지가 자기의 처지가 될지 몰랐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곤경의 경우에 그도 역시 동정 받고 싶어하듯, 그는 그를 불쌍히 여겼다. 사마리아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위대한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모라 사람과 가나안 여인을 칭찬했던 위대한 신앙과 같이 놀라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선은 인간의 역사이지만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인의 동정은 값싼 동정이 아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고침 받아라. 도움 받아라"(약 2:16). 오히려 그는 그때에 이 주린 자에게 그의 심정을 동하여 식물을 나누어주었다(사 58:7, 10; 잠 31:20).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얼마나 친절했는가 ?
첫째로 그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해 지나갔던 불쌍한 그에게로 가서 어떻게 해서 이런 무서운 일을 당했으며 그를 도와 줄 일이 무엇인가를 두려움 없이 살펴보았다. 둘째로 그는 더 좋은 방법이 없어서 스스로 외과의사가 하는 일을 했다. 그는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맸다." 포도주는 상처를 씻고 기름은 아픔을 없애 주고 상처를 아물게 해 준다. 그는 마치 자기가 강도를 만난 것처럼 생각하고 그의 상처의 고통을 없애 주고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셋째로, 그는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가지고 자기는 걸으면서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 여행 중 주막을 만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돈으로 음식과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있다. 만일 그 사마리아인이 이 사람을 만나지 안 했다면 아마도 그날 밤에 목적지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불쌍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는 곧 주막에 찾아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돕기 위해서 지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있는 성전 제사에 빨리 가서 참석해야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사마리아인도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과 하나님께 대한 제사는 이와 같은 자비의 행동보다 우선 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넷째로 그는 주막에서 그를 돌보아 주고 침대에 눕히고 적당한 음식을 주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다섯째로 그는 마치 자기가 어렸을 때처럼 혹은 돌봄을 받을 때처럼 그가 다음날 아침에 떠날 때 그를 위해 사용할 돈을 주인에게 주었고, 더 필요하면 갚겠다고 말하였다. 그때의 물건의 비율에 따르면 아주 많은 금액을 주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는 모든 요구에 넉넉할 정도로 만족할 한 징표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일은 친구나 형제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친절이며 관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선 낯선 이방인에 의해서 베풀어졌다.
이 비유는 본래의 의도와 다른 좋은 목적에도 적용된다. 즉 죄 있는 불쌍한 사람에 대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우리는 곤경에 빠진 이 불쌍한 여행자와 같다. 우리의 원수사탄이 우리를 약탈하고 옷을 벗겨가고 상처를 입혔다. 이러한 일은 죄가 우리에게 저질러 놓은 결과이다. 우리는 본래 유혹과 죄로 거의 죽은 즉 두 번 죽은 자들이었다.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모세의 율법 즉 율법의 사역자들이 우리를 보았으나 도와 줄 어떤 동정심도 능력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동정해 주지도 않고 위로도 해 주지 않고 다른 길로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때에 축복의 예수님 즉 선한 사마리아인(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서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했다)이 오셔서 우리를 동정해 주시고 피흘리는 상처를 싸매 주셨다(시 147:3; 사 61:1). 그는 기름과 포도주가 아닌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자신의 피를 부어 주셨다. 그는 우리를 돌보신다. 우리에게 소용되는 모든 치료비는 그에게 부담시키라고 명하신다. 그는 우리보다 무한히 위에 계시지만, 친히 자신을 늦추사 그렇게 하시고도 기뻐하신다. 이것은 그의 사랑의 풍성함을 말해주며 다음과 같이 고백하라고 지시해 준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갚을 수 있는가?"
(2) 이 비유의 뜻을 새겨보자.
[1] 진리는 율법사 자신의 말에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남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 제사장 ? 사마리아인 ? 이들 중에 누가 이웃의 일을 했느냐 ?"이 질문에 대해서 율법사는 "분명히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는 좋은 이웃이었으며 매우 친절했습니다. 곤경에 처한 정직한 유대인을 구해 주는 것은 선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이에 대한 결론적인 의무가 율법사의 양심에 압박해 왔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인간 관계의 의무는 상호 협조적이다. 친구, 형제, 이웃이란 말은 그로티우스의 말대로 tw/npro,jti─동등하게 양편을 구속한다. 만일 한 편이 묶여져 있으면 다른 편도 풀어질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모든 계약과 마찬가지다. 만일 사마리아인이 곤경에 빠진 유대인을 도와주었는데도 곤경에 빠진 사마리아인을 유대인이 구해 주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Petimusque damusque vicissim ─ 즉 이러한 친절은 보답 받아야 된다. "그러므로 가서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라. 너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어라. 그리고 그들이 비록 너의 민족, 너의 동업자가 아니고 너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신앙적으로 같은 교우가 아니라고 해도 기쁜 마음으로 관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그 일을 행하라. 비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큰 계명을 지킨 것을 자랑하기 전에 먼저 너의 사랑을 충분히 베풀어라." 이 율법사는 스스로 율법에 대한 학식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학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사마리아인에게로 보내어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다. "가서 그와 같이 행하라." 우리가 처한 장소에서 우리의 능력에 따라 곤경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 주고 도와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며 특히 율법사의 의무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제사장과 레위인 된 것을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르다와 마리아 (누가복음 10:38-42)
Ⅰ.마르다가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자기 집에서 대접했다(38절).
1. 예수께서 마르다가 사는 동네에 오셨다. "그들이 갈 때"(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그와 그들은 "한촌에 들어가셨다." 그 마을은 예수께서 지금 올라가시려고 하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였다. 예수께서는 그 길을 택하셨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선한 일을 행하고(행 10:38) 은혜의 광선을 비추고 세상의 참 빛으로 역사 하시기 위해서 두루 다니셨다.
(2)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곳마다 제자들이 동행했다.
(3) 그리스도께서는 크고 사람 많은 도시만이 아니라 작은 마을에 가셔서 은혜를 베푸셨다. 그는 은밀한 곳을 좋아하셨듯이, 가난을 동정했기 때문이다.
2. 예수는 마르다의 집에서 영접 받으셨다. "마르다가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마르다는 주인이었기에 예수님을 환영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명심해야 낳다.
(1)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는 아주 가난했기 때문에 생활의 필요한 도움을 사람들로부터 받아야 했다 .비록 예수께서 시온의 왕이었지만 예루살렘이나 그 근처에 자기의 집이 없었다.
(2) 그리스도를 특별히 보살펴 주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어느 누구보다 사랑하셨고 자주 방문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마르다의 가족을 사랑하셨고(요 11:50)자주 찾아가셨다. 그리스도의 방문은 그의 사랑의 증거이다(요 14:23).
(3)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를 자기 집으로 친절히 영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집은 마르다의 집이라고 한다. 아마 그녀는 과부였으며 그 집의 주인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혼자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대접한다는 일은 비용이 수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치 않고 제자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그리스도께 봉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돈을 쓸 수 있는가?). 이 때에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일은 무척이나 위험스런 일이었다. 특히 예루살렘과 가까웠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함으로 당하는 어떤 위험도 생각지 않았다. 예수를 배척하고 접대해 주지 않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를 환영해 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어느 곳에서나 반대를 받으셨으나, 그가 사랑해 주고 또 사랑해 주는 남은 자가 있었다.
Ⅱ.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동참하여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40절).
1. 마리아는 그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께서 마르다의 집에 도착하자마나 접대가 준비되기도 전에 복음을 전파하셨는가 보다. 마리아가 말씀을 들으려고 앉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곧 의자에 엄숙히 앉아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말씀이 오래 계속된 것을 말해 준다. 좋은 설교는 집에서 설교되어도 좋다. 친구들의 방문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는 좋은 기회가 되게 해 준다. 마리아는 이러한 보화를 손에 쥐고 그것을 더욱 더 값지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 가까이 앉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려 할 때 우리는 빨리 들어야 한다.
2. 마리아는 앉아서 들었다. 이것은 매우 진지한 태도를 말해 준다. 그녀의 마음은 침착했으며 예수님의 말씀 한두 마디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하시는 모든 것을 받으려고 아주 가까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학자들이 강의를 들을 때 교수의 발 앞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았다." 바울도 "가말리엘의 발 앞에서 교육받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의 발 앞에 앉는 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과 말씀의 인도에 순종하며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든지, 그의 발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지금 그의 발 앞에 앉는다면 우리는 곧 주가 주시는 왕관을 쓰고 그와 함께 앉게 될 것이다.
Ⅲ. 마르다는 기사를 잘 보살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분주한지라"(40절). 이것이 바로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던 마리아와 같이 있지 못한 이유였다. 마르다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영접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예수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에 준비를 하지 못했나 보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정성을 기울였다. 이러한 손님은 매일 오지 않는다. 집주인은 큰 잔치를 준비할 때 얼마나 정성이 들며 분주한지를 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1. 칭찬 받을 만한 점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1)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칭찬 받을 만한 존경심이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녀의 정성이 겉치레가 아니라 주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대접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가 바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쓰여졌다고 생각해야 될 것이다.
(2) 그녀의 기사에 대한 칭찬 받을 만한 보살핌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이 집에 대해서 보여준 태도를 보면(요 11:19). 이 가정은 귀족이며 구별된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어떤 일이 있을 때 가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창피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가정을 잘 보살피는 것이 가족을 맡은 자들의 의무이다. 지위와 안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많은 가족을 소홀히 한다.
2. 책망 받을 만한 점도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1) 마르다에게는 봉사하는 일이 많았다. 그녀는 모든 정성을 다하여 아주 화려한 대접을 하려고 했다. 즉 아주 풍부하고 다양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준비를 했다. peri. pollh.n diakoni,an 많은 봉사하는 일에 그녀는 정성을 기울였다. 많은 봉사나 먹고 마시는 것을 많이 준비하고 진수성찬으로 하며 남을 정도로 많이 차린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봉사할게 별로 없는데 "많은 봉사"가 무슨 소용 있으랴?
(2) 마르다는 봉사하는 일 때문에 분주했다. periespa/to 그녀는 그 일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어떤 걱정거리가 생기든 그것 때문에 "안달"하거나 당황해서는 안 된다. "염려"(관심)는 좋은 일이요 의무이다. 그러나 "안달"은 죄요 어리석음이다.
(3) 마르다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주님의 발 앞에 앉아있는 동생 마리아와 같이 있어야 될 때에는 봉사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 세상 적인 일은 하나님을 받드는 일과 우리의 영혼에 유익이 되지 못하는 한 하나의 유혹이 된다.
Ⅳ.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가 지금 집안 일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예수님께 불평을 했다(40절).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러므로 주님 곁에 있는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게 하소서."
1. 마르다의 이 불평은 그녀의 세속적인 마음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녀의 지나친 정성과 분주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마르다는 그녀의 동생에 대해서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일 때문에 예수님을 괴롭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속적인 일에 대한 지나친 추구는 가정의 분쟁과 친지간의 다툼의 원인이 된다. 더욱이 세속적인 일에 열심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기 쉽다. 또한 그들은 세속적인 일을 가지고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며, 세속적인 일에 대한 봉사 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그들은 종교적인 훈련에 열심인 사람들을 쉽게 비난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다시없는 기회를 놓쳐버리게 된다. 동생 때문에 화가 난 마르다는 주님께 자기가 매우 화가 나 있다고 그녀에게 말해달라고 간정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아마 예수께서는 때때로 그녀와 그녀의 평안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신 것 같다. 그래서 그녀의 수고와 어려움을 쉽게 덜어 주시곤 했을 것이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자기의 동생에게 명령하여 자기 일을 도와주게 해줄 줄 알았다. 마르다는 일할 때 마리아, 예수님,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일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 간청하는 일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 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의와 온당치 않은 불만을 들어주리라고 기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봉사는 기꺼이 해야 하나 우리 스스로 미련스럽게 하는 봉사는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후원자는 될지언정 부당한 자들의 후원자는 되지 않으신다.
2. 마르다의 불평은 마리아의 경건과 헌신에 대한 방해로 생각할 수 있다. 그녀의 동생은 접대하는 일을 마르다에게 맡겼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동생이 할 일을 않는다고 불평했다. 신앙적으로 열심인 사람들이 방해와 실망되는 일에 직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그들은 적으로부터의 반대뿐만 아니라 친구들로부터 비난과 모욕을 당하게 된다. 다윗의 금식과 법궤 앞에서 춤추던 일은 그에 대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Ⅴ.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지나친 염려에 대해 책망하셨다(41절). 마르다는 예수님께 간청했으나 예수님은 그녀를 책망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가지만으로 족하니라."
1. 예수께서는 손님이었으나 그녀를 책망하셨다. 그녀의 잘못은 예수를 접대하는 일에 대한 지나친 걱정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하던 예수께서 자기를 옳게 보아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엄히 그 일에 대해서 그녀를 책망하셨다. 그리스도는 사랑하는 만큼 책망도 하고 벌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어떤 일이 잘못되었다고 하며 거기에 대한 편가를 분명히 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에게 책망할 것이 있도다."
2. 예수께서 그녀를 책망하실 때 마르다야 하시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다. 왜냐하면 책망이란 나단이 다윗에 대해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요"라고 했던 것처럼 특별 한사람과 사건에 적용될 그때에 가장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반복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예수께서는 진심으로 그녀의 평안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진 자로서 말씀하신다. 현실 생활의 걱정으로 얽혀져 있는 사람들은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에게 거듭 거듭 말해야 한다. "온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주의 말씀을 들으라."
3. 예수께서 그녀를 책망하신 것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녀가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지나치게 화려한 대접을 하며 그 준비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누구에게든지 얼마나 많든지 상관치 않고 어떤 일을 할 때 감정으로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시려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의 봉사의 지나친 열성("너는 봉사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고 의견이 대립되고 소란하고 있다")에 대해서 책망하셨다. 또한 그것의 지나치게 큰 규모에 대해서 책망하셨다. "너는 많은 일 즉 많은 즐거움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많은 실망으로 고생하고 있다. 가엾은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 때문에 화를 내게 되고 많은 일이 너로부터 유모어를 빼앗아갔다. 따라서 분주하기 때문에 더 많은 봉사를 하지 못하게 했다." 이 세상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근심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매우 실망시키는 일이며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정당한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책망을 듣는 것은 당연하다.
4. 그녀의 염려의 죄와 잘못을 더욱더 악화시킨 것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자는, 마르다는 많은 그릇의 실사를 걱정하고 있었으나, 한 그릇이면 족했던 때였다고 하는 추측도 한다. e`no.j de, evsti crei,a ─즉 오직 한 가지만 필요하도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절제의 규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진수성찬을 기뻐하지 말고 한두 가지의 음식으로 만족해야 한다(잠 23:1-3). 딴 곳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지금 마르다처럼 마음이 분주하고 이것저것 때문에 서두르지 말고 말씀을 듣는 바로 그 마음이 필요하다. 정말 필요한 한 가지 일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마리아가 선택한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한 가지 일에 전력했어야 하는 그때에 마르다는 많은 일로 근심했다. 거룩한 것은 마음을 하나로 묶으나 세상적인 것은 분열시킨다. 그녀가 근심했던 많은 일은 필요 없는 것이었고 그녀가 무시했던 한 가지 일은 필요한 것이었다. 마르다의 염려와 봉사는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는 좋다. 그러나 지금은 해야 될 일이 있다. 이것은 분명히 더욱더 필요한 것이며 먼저 해야 될 일이며 온 정신을 집중해야 될 일이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그녀와 같은 일을 하지 않는 마리아를 책망하실 줄 알았으나 오히려 마리아와 같은 일을 하지 않는 그녀를 책망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판단은 진리에 따른 것이라고 확신한다. 마리아가 앉았던 자리에 마르다가 앉기를 원하는 그날이 올 것이다.
Ⅵ.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진실된 신앙에 대해서 칭찬해 주셨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느니라." 마리아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르다처럼 이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기다렸다.
1. 마리아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똑바로 선택했다. 그녀가 행한 한 가지 일은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는 것이었다. 진실한 경건이 바로 필요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필요한 한 가지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으면 그 어느 것도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진실한 선을 행할 수 없게 하며, 이것 외에 우리를 저 세상으로 이끌어 줄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2. 마리아는 자기를 위해서 현명하게 이 일을 했다. 그리스도는 언니의 비난에 대하여 오히려 마리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아무리 우리가 우리의 믿음과 열심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모욕당한 다고 해도 그리스도께서 우리편이 되어주실 것이다. 주께서 나를 위해 대답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책망하지 않도록, 타인의 신앙적인 열심을 비난하지 말자. 또한 우리의 신앙적인 열심 때문에 비난받아도 결코 낙망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를 도우시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조만간 마리아의 선택은 옳다고 인정받을 것이다. 또한 그런 선택을 하고 선택한 대로 사는 모든 사람들도 옳다고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지혜 때문에 그녀를 칭찬하셨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택하였고, 그의 편이 되는 것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르다가 자기 집에서 예수를 대접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좋은 일 더 좋은 행복을 택하였고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더 좋은 방법을 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편이 좋은 편이다. 그것은 영혼과 영원을 위한 편이며,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편이다(요 13:8).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들이며(히 3:14) 그리스도의 후사들이다(롬 8:17).
(2) 그것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로부터 결코 사라져버리지 않는 편이다.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은 멀지 않아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의 편인 우리를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과 악마들도 우리한테서 그것을 빼앗을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도 빼앗지 않을 것이다.
(3) 이 좋은 편을 택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리의 본분으로 택하고,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택하고, 그것을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택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지혜이며 의무이다. 매사에 우리는 신앙적인 것을 선택해야 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가장 좋은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는 마르다와 같이 일을 도와줌으로 좋은 주부라고 칭찬 받는 편과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음으로써 열심 있는 제자라고 인정받는 편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 특별한 경우에서 마리아의 선택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예수께서 판단해 주셨다.
(4) "이 좋은 편을 선택한" 사람들은 그들이 선택한 것을 받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그 선택에 대한 보상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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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 치료비 겨울 난방비를 마련해야합니다
쌀과 김치라도 마련하도록 오늘은 후원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공과금으로
30만원 병원약과 주사비가 30만원 40만원으로 먹을거라도 사야 삽니다
현재 자동이체 회원이 세분밖에 없습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카페후원계좌-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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