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전라북도 전주시 금암동에 있는 [깡통교회]를 아십니까? 미군들이 쓰던 창고 구조물을 구해다 세우고 그 위에 양철(함석)지붕을 덮은, 그래서 영낙없이 깡통 을 반 잘라다 엎어 놓은 것 같은 '괴상망칙'한 교회말입니다. 창문이라고 내놓은 '몰골'이 하도 어설 퍼 흡시 전쟁터 난민 임시 수용소 같은 교회. 교회 건물임을 알아채릴 수 있는 표식이라곤 건물 앞쪽 상단부에 높지 않게 올려놓은 십자가가 달린 철탑이 전부인 교회.... 그러나 바로 이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숫자가 4천여명에 육박한다면 여러분 믿으시겠습니까? 40명도 아니고 400명도 아닌 4천여명 말입니다.
본 이름인 [전주 안디옥교회]보다는 [깡통교회]로 더 많이 알려진 이 '괴상한'교회를 예수마을 가족 들(조성래, 이승룡, 나성헌, 최용덕)이 지난 6월 말에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익히 그 소문은 오래전에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자칫 어떤 이들은 [전주 안디옥교회]가 매우 특이한 교회당 건물 디자 인으로 유명한 교회인줄 오해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교회의 예배당 건물이 그 형태나 구조 가 특이하다 못해 괴상망칙하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깡통 반틈을 엎어놓은 이 교회 예배당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디자인'운운한다면 그것은 이 교회에 대한 모욕일 수 있습니다. 전주 안디옥교회가 주목을 받고 있는 더 큰 이유는 이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이들의 삶의 자세때문 이지 결코 특이한 예배당 모습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일반 기성교회의 틀 속에서 자라온 저희에게 [전주 안디옥교회]의 소문은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창고같은 함석지붕 교회당 건물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런 건물일 수 밖에 없게된 내용은 더욱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일반 교회들의 재정(헌금)사용 내역에 있어 외부로 내 보내는 선교, 구제비는 전체 재정의 10∼15% 선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선교,구제비의 비율이 전체 20%, 30%에 이르는 교회 들은 대단한 자부심과 함께 칭송까지 받을 수 있는 '훌륭한'교회로 인정되어집니다. "야! 삼분의 일씩 이나 이웃과 나눈다고?"
그러나 전주 안디옥교회는 창립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교회전체 재정의 몇%를 밖으로 내보내 왔 는지 아시겠습니까? 놀랍게도 60%입니다. 어느 성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말이 60%이지 실제로 는 80%가 넘을 때도 있습니다." 일반교회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전체 재정의 60∼80%를 밖으로 내보낸다 면 교회당 건물 유지와 상임직원(교역자, 사무, 관리)사례비, 각 부서 교육비 명목의 지원금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주 안디옥교회는 지금부터 10여년 전 창립될 때부 터 철저하게 교회재정의 60%를 밖으로 나누어왔으며 그러고서도 교회가 점점 성장하여 개척당시의 70 명성도가 10년이 지난 지금 4천성도로 급격하게 자라났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단순히 숫자상의 성장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많이 내보내고서도 교회가 성장.유지되어 왔음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나누는 교회! 나누는 크리스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가장 강조하며 가르치신 것 가 운데 하나가 '이웃과 함께 나의 것을 나누는 삶'입니다. 성경 구석구석에 '나의 소유를 이웃과 함께' 하는 교훈과 명령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속에 모셔들인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 징표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이웃과 함께 기꺼이 아낌없이 나누는'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 바로 '나누는 교회'로서의 모습이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다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쓰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행2:44∼45) 그러나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불신자(비기독교인)들의 평가는 안타깝게도 {나누는데 인색 하고 쩨쩨하고 교회당 올리기에 환장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해도 더 이상 그들은 그런 평가를 철회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함께 더 많이 나누기 위해 할 수 있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첫째는 우리 자신이 땀흘리 고 수고하여 더 많이 버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제 손으로 열심히 일하여 선한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가난한 성도들을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엡4:28) 이 말씀은 도적질하던 사람들에게 명하셨던 말씀인데 하물며 우리 모두에게 당연히 적용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두번째는, 제한된 수입에서 우리보다 더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선 우리 자신이 좀 덜쓰고 아끼 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수익을 추구하는 영리단체가 아닌 교회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전주 안디옥교회 예배당 건물이 조립식 양철지붕 깡통교회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 다. 애초부터 전주 안디옥교회는 "주는 교회가 되어 교회재정의 60%이상을 밖으로 내 보낸다"는 대강 령을 실천하다보니 '번듯한'예배당 지어 올리는 일은 '꿈에도'상상못할 일이었습니다. 설령 누가 공짜 로 지어서 헌납하였더라도 그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야 할 재정이 아까워(없기도 하고) 그 건물 을 포기하였을 게 뻔합니다.
전주 안디옥교회는 양철지붕이기에 한여름엔 그 열기가 어마어마하지만 그 흔한 에어컨 하나 설치되 어 있지 않습니다. 교인 수가 수천명이 되어도 대형 버스 같은 건 구경조차 할 수 없습니다. 교육관조 차도 조립식 건물입니다. 놀라운 일은 이 교회를 개척하시고 지금까지 이끌어 오신 이동휘 목사님께는 승용차 한 대 조차도 없습니다. 그걸 유지하려면 기사도 둬야 하고 유지비도 적잖기 때문입니다. 요즘 도회지 교회 목사님 들 사이에 최고급 승용차 마련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이 때에 티코 한대 조차도 거절하시는 이 목사님의 모습은 하나의 충격입니다.
어느 성도가 들려준 말입니다. "목사님댁 가구도 전부 남이 쓰던 것들이예요. 교인들 집에서 안 쓰는 것 가져오라고 해서 나누어 쓰게 하시지요" "좀 불편하게 삽니다. 선교를 위해, 이웃을 위해!" 이동휘 목사님께서 외치시는 말씀입니다. 이 교회는 교회재정의 상당한 비 중을 차지하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목사님 스스로 교인 수가 2천명이 넘을 때까지 부교역자를 두지 않으시고 목사님 혼자서 교인들을 돌보셨으며, 교회엔 사찰(관리인)도 두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 교 회엔 사찰이 없습니다. 전 교인이 사찰인 것입니다. 수천명 교인의 이 교회 사무실에는 단 두명의 사무직원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나마 2년전만 해도 한 명 뿐이었고 4년전엔 한 명의 사무원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교회는 각 기관에 대한 재정보조가 일체 없습니다. 어린이 교회학교, 중고등부, 대학부, 성가대...! 모두가 자체 헌금으로 유지할 뿐 아니라 자체헌금 가운데서도 60%는 무조건 선교비로 사용케 되어 있 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봉사자는 결코 어떤 보수도 받지 않습니다. 지휘자, 반주자...! 어린이 주일 학교의 경우 이 교회는 먹을 것과 상주는 것을 하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교회 교인들은 불평이나 원망은 커녕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주는 교회"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어느 어린이가 쓴 글입니다. "우리 교회는 깡통을 절반 잘라 엎어 놓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우리교회가 좋다. 왜냐하면 우리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고 남을 도와주는 교회이기 때문 이다"
이 교회는 현재 국내의 어려운 농촌교회 마흔 한 곳을 지원하고 있으며, 아홉군데의 개척교회를 전폭 적으로 지원하고, 이 교회를 중심으로한 [바울선교회]를 통해 약 75명에 가까운 선교사를 후원하고 있 는가하면, 해외 13교회, 25기관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소년소녀 가장, 장애자 재활원, 타선교단 체 등 31군데의 국내 기관 및 어려운 개인에게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는데 이 교회가 한 달 동안 바깥 으로 내보내는 헌금 총 액수가 무려 6,500여만원이라니...! 함석지붕 조립식 깡통교회에서 1년에 7∼8억의 거대한 금액을 남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우리 한국 교회들에게 하나의 경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우기 그렇게 나누기 위해 자신들은 '미련해 보일 정도'로 아끼고 고생을 자초해 가면서 말입니다.
저희 예수마을 가족들은 '깡통'속에서 '가난하지만 부요한, 부요하지만 가난한' 성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우리가 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였습니다. 저희는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또 발견 하였습니다. 주보에 아무리 찾아 보아도 [담임목사 이동휘]라는 표기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겨우 찾아낸 이목사님의 성함은 교회전화안내란에 부교역자 이름 다음 맨 끄트머리에 적혀있을 따름 이었습니다. 이목사님이 얼마나 겸허하신 분이신가를 알 수 있는 한 단면이었습니다. 저희는 이동휘 목사님과 함께 나흘간을 언젠가 보낸적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저희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는 이목 사님의 모습은 조용하시면서도 온화하시고 너무나 겸손하신 모습입니다. 오! 이 세대의 우리가 이목사 님과 같은 존재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저희는 전주 안디옥교회가 부럽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교회를 가지고 있는 전주라는 도시가 부럽습니다.
다행히 "전주 안디옥교회를 닮자"라는 운동이 급격하게 번지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는 교회... 이 나라가 회생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는 이런 교회 들이 더욱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크리스챤들이 점점 많아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 기꺼이 우리의 씀씀이를 줄일 수 없을까요? 좀 더 넓은 집, 좀 더 큰 차, 좀 더 성능좋은 가전제품을 가지고 싶은 욕망을 포기하고 좀 불편하게 사는 것 을 선택하는 대신 그것조차도 없는 이웃들을 위해 우리의 소유를 뚝 떼어 나누어 줄 '진정한 용기'를 가질 순 없을까요?
문득 언젠가 저희 [찬미]회보에 소개된 집없는 고아소년에게 방이라도 하나 구해 주라고 거금 백만 원을 보내오신 서울의 한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사는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그 백만원은 아마도 결혼 비용으로 힘들게 힘들게 모아 둔 돈이었을 것입니다. 저희에겐 그런 넒은 마음과 용기와 호쾌한 결단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 . 그래서 때론 저 희 자신이 밉고, 종아리를 때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최근 어느 신앙 월간지에서, 자신이 죽은 이후 자신의 안구(눈)에서 각막을 떼내어 앞 못보는 각막질 환 환자들에게 이식해 주라는 '안구기증'행사에 전주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수백명씩 동참했다는 기 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참 멋있는 '예수쟁이들'이라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대구에서도 몇 교회들 이 대거 참여한 바 있지만).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졸렬한 마음의 사람인지 살아있는 동안도 아니 고 죽은 이후에 조차도 보통 렌즈정도에 지나지 않는 손톱만한 각막(안구 전체가 아닌)을 이웃과 나누 는 것에도 몸서리를 치며 손을 내젓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전주 안디옥교회 교인들은 물질로서도 힘 에 겹도록 이웃들과 나누면서 자신들이 죽은 이후에까지 자기의 몸을 이웃에게 내어 주는 사람들 아 닌가요?
대구의 큰 교회 목사님께서 순천 어느 집회에 가셔서 "우리는 백 몇 십억을 들여 새 교회당을 웅장 하게 짓고 있다"고 설교시간에 자랑하시더라는 이야기를 예수마을에 들린 순천에 사는 어느 청년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모두 씁쓸히 웃었지요"라고 덧붙였습니다. 대구 사람으로 부끄러웠 습니다. 사실 저희 자신도 제대로 올바르게 살지도 못하면서 대구의 그 큰 교회를 욕할 자격도 없습니 다. 그래도 안타까운 것은 저희 젊은이들이 설레는 가슴으로 사모하고 부러워하고 흉내내고 싶고 본받 아 살고 싶은 교회가 우리 주변에 너무나 적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멀리 있긴 하지만 전주 땅에 있 는 [깡통교회]라도 바라볼 수 있으니 위안이 됩니다. 아! 사모가 됩니다. 닮아 살고 싶습니다. 가슴이 벅찹니다. 짧은 생에 이 땅에 살다가 정말 돈 한푼이라도 멋있게 쓰고 주님나라로 돌아갔으면 좋겠습 니다. 안디옥 교회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9장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이 행한 일에 대한 바울 사도의 칭찬과 고린도 교회에 대한 훈계가 오늘날의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성경(특히 예수님 이후의 신약 성경)에서 언급된 [헌금]의 대부분은(아니, 전부는) 바로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제발 우리도 흉년으로 고생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라고 여러차례 간청했습니다(8:4) 그런데 마케도니아 사람들의 형편이 넉넉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어려운 시련 과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오히려 넘치는 기쁨으로 헌금을 많이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이 힘껏 헌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겹도록 헌금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8:2∼3) 그러면서 바울 사도 는 고린도후서 8:1에서 마케도니아 성도들의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푸신 큰 은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나 자신도 넉넉하진 못했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나의 것 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그 마음과 용기야말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은혜"라는 말입니다. 많은 교 회들이 [우리교회는 은혜가 넘치는 교회다]라고 하는데 고린도후서 8:1에 의하면 정말 은혜가 넘치는 교회는 전주 안디옥 교회같은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성전건축'을 교회 최대의 대역사(大役事)로 꼽고 전 교인의 최고, 최대의 에너지를 건축헌금에 쏟게하여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건축헌금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의 반, 삼분의 일을 쾌척(快擲)한 교인은 있을 수 있어도 선교를 위해,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재산의 전부 혹은 반, 삼분의 일을 내놓은 교인은 그토록 드문 것입니다. 평생 '힘을 다하여, 아니 힘에 지나도록' 헌금해본 기억이 교회당 건축 때 뿐이라면 우리는 참으로 불행한 크리스챤들 아니겠습니까? 깡통교회 [전주 안디옥교회]! 무언의 행동, 실천으로 한국교회의 개혁을 도전하고 영적 대각성에 대 한 경종을 울리는 그대들이여! 복되도다. 오! 복되도다!
전주에 들러 만난 한 목사님! (개척 7∼8년만에 800여명의 성도로 급성장하고 있는 전주 온누리교회 의 담임이신 오몽근 목사님). "우리 교회도 지금 예배당이 너무 비좁아 옮겨서 넓혀야 하는데... 조립식 으로 짓기로 했지요." 돌아오는 길! 전주 땅에 대한 부러움과 시샘으로 울화통이 공연히 터져 올라 한숨만 푹푹 나왔습니 다. 전라북도 전주! 참 복된 도시입니다.
* 선교를 위한 교회구조의 갱신 글: 이동휘 목사(전주 안디옥교회)
1. 재정구조의 갱신
(1) 재정의 60%는 선교비로 : 삭개오가 회개한 후 주님께 대한 첫 결단이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였다.(누가19:8) 이것이야말로 구원 받은 자의 생활 패턴이라고 본다. 우선 교회 는 이 정신을 앞장서서 따라야 된다고 믿는다. 주님께 바친 이상 헌금은 내 것이 아니고, 교회 것도 아니며(교회는 관리할 뿐이다) 하나님 재산이다. 하나님 재산은 하나님 뜻대로 써야 한다. 하나님 뜻은 세상 구원이다. 온 세상 구원을 위해 쓰라고 하실 것이다. 적어도 절반은 남을 위해 쓰라고 하실 것이 다. 마지막 날 하나님은 제직들(목사, 장로, 권사, 집사)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내 재산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교회 재정은 제직회에서 관리하기 때문이다. 대답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십일조는 전액 선교비로 지출한다. 십일조가 교회재정의 60%를 차지하므로 '60%를 선교비로 사용한다'는 말과 '십일조는 선교비로 지출한다'는 말이 일치해 가고 있다. 개척 첫날부터 공포한 후 현재까지 시행중이다.
(2) 교회는 일년 예산을 세우지 않는다 :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명령하실 때 '아멘'으로 순종하여 실천하기 위해 예산없이 지낸다. 매월 결산만 보고할 뿐이다. 믿음선교(Faith Mission)에 근거를 두고 있기도 하다. 이 결과 하나님은 선교사 역의 증가를 주셨고, 1월보다 3,5,7월 갈수록 선교비는 증액되었다. 선교사역이 요청될 때 마다 바로 재정지원을 집행하고 증액시킴으로 1월과 12월에는 엄청난 증액폭이 났음을 보았다. 선교사역도 일년 예산을 세웠더라면 그런 큰 확장은 없었을 것이다.
(3) 각 기관은 지원하지 않는다 . 어린이 교회학교, 중고등부, 대학부, 찬양대 등 교회 내 모든 기관은 전혀 교회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 고 자체 운영토록 했다. 첫 해에 퍽 어려울 듯 했으나 첫 1년 결산은 참으로 아름다왔다. 헌금으로 군 것질하는 쓸모없는 파티나 소모적인 것이 모두 정화되었고, 대신 헌금은 꼭 필요한 복음선교와 구제하 는 일에 쓰여졌다. 이런 방침때문에 어떤 기관도 성장에 애로되는 일도 없었다. 활기있는 기관으로 변했고 연초(年初)때 면 으례히 있게 마련인 '우리기관의 예산증액이 왜 적느냐?'하는 불평도 자연히 없어졌고, 자체의 힘이 강해졌다. 그러면서도 각 기관 자체도 60%를 선교비로 사용해야 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어린이 교회학교의 경우 꼭 필요한 경비를 지출하는 것 외에 먹을 것이나 상을 주는 일을 하지 않으 므로 '다른 교회는 먹을 것이나 상도 주는데 왜 우리교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느냐'고 항의도 하고 교 회를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교사들이 끝까지 "우리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요 남을 도와주는 교회"란 인 식을 심어줌으로써 타교회로 갔던 아이들도 모두 돌아왔고, 주는 정신으로 무장시키게 되었다. 여름 성경학교의 폐회식도 아무 선물없이 예배로 마무리했고, 성탄절에도 축하의 떡을 나눠 먹는 것 으로 끝난다. 일체의 상이 없다. 어린이들이 바친 헌금으로 많은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4) 모든 봉사자는 어떤 보수도 받지 않는다 . 찬양대 지휘, 반주자 등 봉사자들은 어떤 보수도 받지 않는 무보수 봉사자이다. 또한 성탄이나 연말에도 어떤 성도에게든 수고와 감사의 예물을 주지 않는다. 일년 내내 고생과 땀을 흘린 교사나 구역장들등 수고의 댓가를 받아야 할 사람은 많지만 "상급은 천국에서 받음"을 인식시키 고, 이 땅에서는 "나는 무익한 종이라!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는 겸손과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며 시상(施賞)은 생략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사기에 영향이 있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오히려 역으로 그들은 이런 우리교회를 자랑하고 있다. 목사 장로 뿐만 아니라 집사들에게 조차도 지금까지 교회재정으로 선물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 러나 그들은 충성에 충성을 다하공 있다. 선물, 파티등이 봉사자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것이 결코 아님 을 알았다. 제직회, 교사수련회라는 명분으로 수백만원씩 아낌없이 낭비하는 교회들의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농촌 교회 사역자의 사례비가 월20만원 내외임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2. 의식(儀式)구조의 갱신
(1) 교회는 예식행사로 지탱된다 : 구약시대엔 3대절기(유월절, 오순절, 장막절)를 비롯하여 안식일 예 배로부터 안식년, 희년등 절기의식을 통해 신앙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세례와 성 찬의 성례를 주축으로 하여 오늘의 교회는 많은 의식을 행한다. 목사 임직식 및 위임식, 장로 장립식 및 취임식, 집사 안수식, 권사 취임식, 목사정년 은퇴식, 성전봉헌식, 약혼식, 결혼식, 장례식, 추도식, 근속기념식, 교회설립기념식 등 허다한 의식이 펼쳐진다.
(2) 그러나 교회의 의식행사들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 오늘날 교회행사들이 세속화 되어가고 있다. 장로회 헌법에는 목사.장로 위임 임직식을 대예배때 시 행하도록 되어 있다.(본교단)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행사는 세속행사의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지극 히 물질위주의 잔치가 벌어진다. 이제 이런 의식들은 개혁되어 져야 한다. 그동안 우리가 캠페인을 벌 여온 몇가지를 제안한다.
1) 교회 행사를 간소화 하자 . 교회안에서 성스런 행사들이 많이 거행되고 있고 이는 축하할 만한 행사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감 격과 기쁨을 지나치게 물질로 표현하는 경향이 짙어간다. 물질은 마음의 표현이기에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질의 표현만이 유일한 축하의 방법인 것으로 고정화된 점은 시정해야 한다. 풍 부한 축의금을 표하지 못한 경우 참석했다 하더라도 송구스런 마음이고 시종 불안하다. 또한 빈번한 행사에 "안 갈수도 없고..."하는 짜증스런 참예와 의례적으로 가는 병폐가 크다. 교회적으로도 1년에 선 교비로는 단돈 100만원도 지출하지 않으면서 한번 행사에 1,000만원을 거뜬히 소비해 버리는 관례는 도대체 언제부터였는가? 엄청난 식사비, 행사 주인공 내외분께 해주는 고급양복, 기념품, 여비 등 한 날 행사비가 다 "소모적" 이며 "낭비적"이다.
임직 받는 이들도 당연히 교회에 큰 기념품을 해 놓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고 따라서 돈없으면 장 로도 못된다는 세속적 용어가 범람하기까지 이르렀다. 권사 직분 남발로 교회차량등 교회비품을 마련 한다는 소문이 사실무근이길 바란다. 사회개혁과 정화에 앞서 교회행사 간소화를 실천하자. 청첩장에 "축의금, 축품, 화환은 접수하지 않습니다"를 표기하자. {직분 받는 날}은 {십자가를 지는 날}이다. 교회는 최고의 상품으로 성경 한권을 임직받는 이들에게 주자. 임직받는 이들도 왜 하필 임직받는 이 때에 기증품을 해 놓는가? 은혜에 감격되었을 때 해 놓으 면 더 좋지 않은가? 교회 행사는 엄숙하고 성령의 기쁨이 넘치는 [예배]가 되도록 하자.
2) 사례를 받지 말자. -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수고해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뜻이 담긴 사례비가 오히려 한국 교회에 큰 병폐로 자리잡고 있다. 농촌교회는 사례비 줄 돈이 없어서 부흥집회를 못한다. "그 강사 모실려면 OOO만원은 주어야 한다"등등의 불쾌한 인사들이 우리 한국교회의 부패상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 주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다. 돈 받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 다 같이 한국교회의 오염을 제거해 새롭게 정화시키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있고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으면 그것으 로 주님의 보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크고 작은 어떤 모임에도 사례비를 거절하자. 받았을 경우 선교 와 구제비로 사용하자. 작은 교회가 돈 걱정않고 원하는 사람 모셔다가 우리 주님의 은혜를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풍토를 형성하자. 주님이 웃으시고 기뻐하실 것이다.
3) 부흥회 헌금은 선교비로 쓰자. 언제부터 생긴 습관인지 몰라도 '부흥회때 나온 헌금은 그때 다 써야 한다'는 관습으로 모두 소비해 버리는 석연치 않은 일들이 거듭되고 있다. 부흥회 강사 사례비로 듬뿍 지불하고 그 나머지는 본교회 목사, 전도사, 사찰, 수고한 사람, 기타 순으로 나눠 먹는다. 이것이 부흥회 강사가 헌금봉투를 붙잡고 간절하게 기도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 것일까? 수고한 사람의 보상을 돈으로 갚기인가? 이 러다보니 혹 헌금액수가 적어 이 요식을 갖추지 못할까하여 별미헌금, 축복헌금 등 변태헌금까지 강요 하고 있는 현실을 흔치않게 볼 수 있다.
강사의 수고는 지극히 크다. 진땀을 뺀다. 그 수고로 한국교회는 큰 힘을 얻는다. 그러나 그 상은 장 차 그 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신다. 이 땅에서는 교통비만으로 족하다. 그 나머지는 전액 선교비나 구제 비로 사용하자. 아얘 그때 집회헌금은 어떤 목적으로 쓰겠다고 구체적인 명목을 제시하자. 은혜 받고난 마지막 저녁에 부흥회 헌금 배분문제로 인한 의견충돌로 부흥회때 받은 은혜를 다 쏟아 버리는 교회들도 적지 않음을 본다. 부흥회 헌금도 역시 하나님께 바쳐진 하나님 재산이다. 그분이 제 일 기뻐하시는 일에 쓰도록 하자.
4) 근속 기념식을 폐지하자 . 교회행사중 목사근속기념식, 장로근속기념식이 있다. 희생적으로 봉사하시는 충성된 분들에 대한 위 로의 잔치이다. 피곤을 풀고 용기를 내어 더 힘있게 일하라는 뜻이라고 본다. 칭찬하는 말 한마디에 엄청난 힘을 얻는 수가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념식은 폐지되어야 한다. 첫째 그 이유는, 너무 의식화된 느낌이다. 다른 교회도 하나까 하자는 식이다. 하나의 어떤 행사가 있 을 때 같이 치뤄 넘기자는 속셈도 있다. 진정 감사하는 눈치는 별로 없다. 스승의 날에 40년이상 근속 자에게 표창하는 일은 있다. 그러나 교회의 청첩장에는 심지어 장로 10주년 근속기념식, 목사 15주년 근속기념식 등 너무나 남발이다. 40년 봉사한 집사는 집사니까 거론도 않는다. 목사, 장로만 칭찬받을 조건이 있다면 다 없애야 한다.
둘째,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죄인이 칭찬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근속 기념식에는 으례히 축사가 있기 마련이다. 달변의 인사(人士)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 사람 혼자 교회 부흥 다 시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예수자랑만 허용될 강단에서 지나친 인간 공적이 부각된다. 기념받는 당사자 본인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자기 부족함 때문에 몸부림칠 수 밖에 없을텐데 그런 칭찬을 들으면 마음이 무척 괴로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만해질 것이다. 바울 같은 성자도 "나는 죄인의 괴수(두목)"라고 했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악인의 두목이 강단에서 칭찬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세계의 엄청난 인구가 지금도 지옥의 불구덩이속에 떨어지는 판국에 우 리가 무슨 대단한 일 했다고 공로치하를 받는가!
셋째, 진정한 상은 하늘에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따에서 상 받으면 하늘에서의 상이 없어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마태6:3). 그래서 오 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받을 보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는 것'과 '나의 당연한 권리(물질적 사례를 받을 권리-편집자주)'를 쓰지 않는 그것입니다"(고린도전서 9:18) 교회안에서까지도 [가짜상]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만이 최후 인간의 정가표를 제대로 붙일 것 이다. 우리의 충성은 교회에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OO교회를 '통해서' 충성할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상 줄 권리도 의무도 없다. 최후에 주님께서 알아서 잘 할 것이다. 천 사들 앞에서 찬란히 하실 것이다.
5) 불편하게 삽시다. 외국제 호화 사치품이 이 민족정신을 썩게 한다. 30만원대의 재떨이, 14만원대의 스타킹, 72만원짜리 손지갑이 있다고 한다. 안락하게, 남부럽지 않게, 기죽지 않게, 편리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인간 본능 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수백만원 수천만원 들여서 올갠을 장치하고, 음향시설도 최고급으로 하고, 꽃꽃이 도 찬란하게 하고, 당회장실 등을 위시해서 모든 시설품도 최고급으로 하려고 야단이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웅장한 수양관과 교회묘지가 꼭 있어야만 하는가? 대형버스로 교인을 모셔와야만 하는 이런 풍토는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세계 구원과 불쌍한 이웃을 위해서다. 2만원이면 아프리카에서 80명분 밥을 줄 수 있는 구제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좀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 편리하게 살자면 불평이 나온다. 예수님 은 말 구유에서 출생하신 불편을 겪으셨다. 그리고 가난한 목수집에서 불편하게 사셨다. 그런데 왜 교회는 헤롯왕궁의 안락의자를 동경하고 또 그것을 추구하는가? 고급호텔에서 각종 기독교 모임을 가지는 것도, 고액 사례비, 총회장등 명예직분을 탐내어 금전살포 하는 것은 분명히 말하거니와 벌 받을 짓이다. 가짜 명예박사 학위 매매등도 목사들이 탐내는 부분이라 하니 한심스럽다. 불편하게 살자.
* 10년간 이를 실천한 전주 안디옥교회에 대한 통계 및 결과 60% 선교비, 40% 경상비의 비율이지만 사실 40%중에서도 대부분은 교회대지 구입비로 나가고 실질 적인 교회 경상비는 전체 예산의 10%에 불과하다. 교회당도 여전히 함석지붕이다. 그럼에도 다른 일반 교회와 성장은 별 차이가 없다. a. 교인 년평균 40% 성장을 가졌다. 교회 경상비를 교회 예산의 10%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성장은 둔화되지 않았다. 물질과 교회성장과는 별 관계가 없다. b. 교회 대지도 상당히 확보했다. (*편집자주: 교인수의 증가에 따라 예배처소가 너무 협소하므로 조 립식 건물로서라도 확장할 대지는 꼭 필요하다) c. 선교현황: 해외선교, 특수선교, 농어촌 선교 등 200항목에 지원하고 있다. (사람, 기관 포함/ 93.7 현재) d. 대 사회적 적응: 불신 사회에서도 매우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e. 한국 교회에서의 위치: 선교적 교회로 많은 교회가 방문등을 통해 배우려고 한다. 재정의 50∼60% 선교하는 교회가 한국에 상당히 늘고 있다. f. 교인들의 긍지: 교인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전혀 없음에도 본 교회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하고, 선교하는 교회, 나누는 교회로서의 긍지를 크게 가진다. g. 선교하면서도 기존 교회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 2006년 2월 현재 안디옥교회는 재적 8천명, 주일 출석 인원 5천명으로 여전히 깡통예배당에서 5부로 예배를 드린다. 98년에 장애인부서가 생겨 장애인 재적도 220명이 넘는데 이 가운데 매주 110명가량이 출석한다. 읽어보니 몇몇 수치들만 바뀌었고 십여 년 전 기사 그대로이다. 좋은 정신이 시간이 지나도 잘 지켜지는 것은 참 귀하다. 올 3월 이동휘 담임목사님이 퇴임하시는 걸로 아는데, 깡통교회의 전통과 아름다움이 잘 지켜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