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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월-문산회 특별산행] 문경새재 <부봉> 산행 (2)
▶ 2015년 11월 13~14일 (금·토요일, 1박1일) ◀
♣ [산행 코스] 문경읍 <고요장>→ <문경새재 주차장>→ 제1관문→ 원터→ 주막→ 제2관문→ 과거옛길의 시비(詩碑)→ 부봉 들머리→ 오름길→ 암벽 철계단→ 부봉(釜峰) 정상→ (하산길) 동화원 방향 내림길→ 새재길(대로)→ 문경새재아리랑비(碑) → 제2·1관문→ 문경현감 신길원충렬비(聞慶縣監申吉原忠烈碑)→ 주차장(원점회귀)→ 청운주막(점심식사)→ 귀경·귀향
♣ [정겨운 대원들, 함께 걷는 길] — 아름다운 명품길, 청정한 새재에 들다
☆… 오전 9시 20분, 산행복장을 정비하고, 새재 입구 <옛길박물관>을 기점으로 산행에 돌입했다.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늘 등정하는 부봉(釜峰)은 제2관문과 제3관문 사이의 동쪽에 솟은 암봉이다. 제1관문 가는 길목의 오른 쪽 잔디광장에 진홍색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끌었다. 새재의 가을이 그렇게 익고 있었다. 좌우로 학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듯한 성곽을 거느린 제1관문(주흘관)을 지났다. 본격적인 명품길 <새재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 오늘은 토요일, 사람 많은 주말이지만 좀 이른 시간이라 비교적 한산했다. 길은 2차로 정도의 너른 길인데 부드러운 마사토(磨砂土)를 단단히 다져놓아 사람들이 걷기에 아주 편안하고 쾌적했다. 여름철 이 길은 숲의 터널이지만 지금은 갈잎이 지고 추색이 감도는 분위기이다. 길 아래 흐르는 조령계(鳥嶺溪)의 물소리가 산의 적막을 깨우며 청랑하게 흐른다. 이틀 동안 내린 비로 계곡의 수량이 엄청나게 불어났다. 콸콸콸 맑은 물이 줄기차게 흐르고 있어 간밤 쾌음으로 더워진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주었다. 그리고 청정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길의 주위엔 여름옷을 벗어버린 나무들이 즐비하지만 그 속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것은 역시 장대한 소나무이다. 하늘을 찌르는 노송(老松)들은 수많은 역사의 시간 속에서 새재를 지키는 청직한 혼(魂)인지도 모른다. 우아하고 당당하다. 봄에 피는 꽃이나 오월의 신록도 아름답지만 푸른 옷을 다 벗어버린 나목(裸木)은 그 존재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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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 난 소나무] — 또 하나의 아픈 역사(歷史)와 일제의 만행(蠻行)
☆…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상처 난 소나무’가 아픈 세월을 견디고 있다. 노송의 둥치에 곳곳에 일제 수탈의 상처가 아직도 그렇게 남아있었다. 일제(日帝)가 송진을 채취하기 위하여 몇 백 년 노송의 허리에 톱으로 껍질을 잘라 놓은 흔적이다. V자 모양의 이 상처는 일제 말기(1943~1945년) 기름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하여 전쟁 중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송진을 채취한 것이다. 60여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다. 저들의 악랄한 수탈(收奪)이 어디 소나무뿐인가. 아직도 90노파의 주름진 얼굴에 진한 눈물을 흘리게 하고 있는, 소위 정신대 할머니의 지울 수 없는 상처가 그렇지 않은가. 저들은 무자비한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물자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착취해 갔다. 우리는 지금도 그 역사적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는 것이다. 주변의 국가나 민족에게 통한의 아픔을 안겨준 일본은 아직도 그 죄과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아베 수상을 비롯한 정치가들은 침략을 주도한 전범(戰犯)들을 안치한 야스쿠니 신사에 몰려가 참배하고 큰 소리 친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참 비열한 소인배의 근성이다. 일본(日本), 일본인(日本人)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야비한 집단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 이런 소나무 상처를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서는 아픔을 느낀다.
상처난 소나무 [지료화면]
♣ [제2관문 조곡관(鳥谷關)] —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
☆…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에 이르렀다. 관문의 동쪽은 주흘산 영봉(1,117m)에서 뻗어 내려온 장대한 산줄기와 닿아 있고 서쪽은 조령산의 신선암봉(939m)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의 절벽이다. 성문 앞에는 동쪽 주흘산에서 흘러내려온 계곡이 가로질러 나가고 있다. 산과 절벽과 물과 문루가 어우진 풍광도 아름답지만 이곳은 전술상 아주 천혜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성문 앞은 해자(垓字, 성곽 주위를 둘러친 물)의 역할을 하는 계곡이 흐르고 성문의 안쪽은 비교적 너른, 울창한 송림(松林)이어서 많은 군졸이 주둔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성문 앞의 계곡 위에 조곡교(鳥谷橋)를 만들어 꽉 짜인 산세가 준수하고 골짜기의 한 가운데를 장악하고 있는 성곽(城郭)과 문루(門樓)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주위에는 쭉쭉 뻗은 장송의 군락이 어울려 절묘하게 아름다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늘 따라 반듯한 관문의 누각과 장대한 노송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 [과거옛길의 시비(詩碑)들] — 선인(先人)들의 문향(文香)이 그윽한
☆… 제2관문(조곡관)을 지나, 호산아 회장이 대원들을 잘 닦여진 대로(大路) 옆으로 나 있는 ‘과거옛길’로 인도했다. 옛날 선인(先人)들이 다녔던 바로 그 산길이다. 영남에서 한양을 다닐 수 있는 길은 조령(문경새재)과 죽령, 그리고 추풍령을 경유하는 세 개의 길이 있는데,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는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왕래하였다.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드러나듯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곳의 과거옛길에는 문경새재를 지나는 감회를 읊은 시(詩)를 비에 새겨 곳곳에 세워 놓았다. 은은한 정취가 흐르는 한시(漢詩)가 있는 옛길이다. 크고 작은 미끈한 자연석에 새재를 넘은 선인들의 작품들을 새겨 놓았다. 서포 김만중의 ‘조령’, 다산 정약용의 ‘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 회재 이언적의 ‘새재에서 아우에게’, 소쇄양의 ‘조령’, 석천 임억령의 ‘새재에서 이별하며 주다’, 학봉 김성일의 ‘문경 지나는 길에’, 동강 신익전의 ‘새재에서 시 두 편’, 퇴계 이황의 ‘새재를 넘으며’ 등이다. 이름만 들어도 주변의 신록이 넘실거리고 계곡의 청랑한 물이 흐르고 있다. 그 길목의 선인들의 서정이 흐르는 화강암 시비들이 빛을 발한다.
石徑躡雲高 (석경섭운고) 돌길을 지나 구름 위로 올라서니
縈紆三十里 (영우삼십리) 굽이굽이 새재 길 삼십리
人行喬木杪 (인행교목초) 사람은 나무 꼭대기를 밟는 것 같고
馬入翠屛裏 (마입취병리) 말은 푸른 병풍 속으로 들어가는 듯
— 소세양(蘇世陽)「鳥嶺(조령)」
조선조 성종~명종 연간을 살았던 문신 양곡(陽谷) 소세양(蘇世陽)의 시(詩)이다. 푸른 숲[취병(翠屛)]을 지나 높은 새재[운고(雲高)]를 올라가는 풍경을 그리고 있는 오언절구이다.
白山南走三千里 (백산남주삼천리) 백두산은 남으로 삼천리를 달려와
大嶺橫分七十城 (대령횡분칠십성) 큰 고개 가로질러 칠십 고을 나누었네
從古覇圖自割據 (종고패도자할거) 예부터 제후들 할거할 곳 있었거니
至今殘壘未全平 (지금잔류미전평) 지금까지 그 요새 흔적이 있다네
迎人靑嶂重重出 (영인청장중중출) 짓푸른 봉우리 거듭거듭 솟아있고
照眼丹楓樹樹明 (조안단풍수수명) 눈부신 단풍은 나무마다 아름답다
劍閣勒名吾老矣 (검각늑망오노의) 공명을 세우기에 내 이미 늙었거니
停驂聊復賞新晴 (정삼료복상신청) 가던 길 멈추고 개인 하늘 볼 밖에
— 김만중(金萬重)「鳥嶺(조령)」
조선시대 중기의 숙종 때의 문신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년)의 작품이다. 장대한 백두대간의 위세와 큰 고개인 새재가 분수령을 이루어 여러 고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짓푸른 첩첩 산이 하늘로 솟아있고 눈부신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고 노래하고 있다. 서포가 새재를 넘을 때가 노년인가. 공명을 접어두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가 흐른다. 서포는『구운몽(九雲夢)』『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서포만필(西浦漫筆)』을 남긴 문장가이다. 숙종 때 장희빈(張禧嬪)과 관련하여 남해(南海)의 고도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 [본격적인 부봉 산행] — 조령계 건너 부봉(釜峰)으로 가는 길
☆… 제2관문 위의 과거옛길을 지나, 제3관문으로 조금 올라간 지점의 길목 가장자리에 부봉으로 올라가는 화살표가 있는 작은 표지석이 나타났다. 일행은 비가 와서 물이 흘러넘치는 계곡을 건너 산길로 접어들었다. 날씨는 여전히 짙은 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부봉으로 올라가는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된 것이다. 선두에 김명식, 채홍철, 정용호 대원이 나아가고 뒤를 이어 이정근, 이동우, 이정식 대원과 호산아 회장이 뒤를 따랐다. 산길은 낙엽이 쌓여 길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간간이 산죽의 군락지가 있고 또 하늘을 찌르는 장대한 전나무·잣나무들이 아직도 시퍼렇게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기도 했다. 낙엽이 많이 쌓여 선두에서 잠시 길을 잃기도 했지만 비교적 가파른 오름길을 지나서 능선 길로 접어들었다.
☆… 본격적으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산길이 시작되었다.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험하고 경사가 급한 길이었다. 어느 정도 고도를 올린 지점부터 우리는 안개 속으로 들어왔다. 주변의 풍경은 오리무중,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그저 눈앞의 바윗길 가파른 오르막길, 그리고 장대한 노송이 안개 속에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렇게 바위 능선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위를 타거나 절벽 위의 길을 치고올라서 계속 고도를 높여 나갔다. 간밤의 음주의 여독으로 몸이 무거웠지만 신선한 바람결이 온몸을 상쾌하게 했다.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지는 오르막길, 청랑한 공기가 뜨거운 가슴을 쓸어주었다. 그런데 오늘, 뒤에서 묵묵히 걷는 이정근 사장의 모습이 남다르게 보인다. 수년 전 처음 산에 나왔을 때의 육중한 몸매와 산행 중의 진땀을 생각하면, 지금은 군살이 다 빠지고 산을 오르는 안정된 걸음걸이가 탄탄한 산꾼이 다 된 것 같았다. 그 동안 얼마나 몸의 단련을 하였겠는가. 그랬다. 2008년인가 1월 1일 새벽 5시 캄캄한 새벽에 집 앞에 있는 대모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수년 동안 남모르게 땀을 흘렸다고 했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을 이럴 때 쓴다.
♣ [안개 속 천상으로 오르는 계단] — 부봉의 정상에서 신선처럼 노닐다!
☆… 오전 11시 45분, 드디어 부봉의 철계단 아래 도착했다. 사위는 완전히 안개 속이다. 오늘 부봉을 오르는 산길에는 우리 대원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비록 시야는 열리지 않았지만 우리들만이 호젓하게 오르는 산행은 나름대로 묘미가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철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수직의 암벽에 설치해 놓은 계단이므로 가파르기 짝이 없었다. 30m 정도의 계단의 끝이 보이지 않으므로 그야말로 하늘로 오르는 계단이었다. 수직의 철계단을 오르고 다시 가파른 절벽의 바윗길을 돌아올라,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는 부봉의 산정에 올랐다.
☆… 바위봉우리가 볼록하게 올라온 부봉의 정상은 비좁았다. 바위 주위에는 소나무들 호위를 하듯 서 있고, 안개 자욱한 산정은 천상(天上)의 어느 곳이었다. 이백의 표현을 빌리면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다. 우리는 그대로 신선(神仙)이 되어 있었다. 정상 등정을 기념하는 인증샷을 누르고 뽀얀 막걸리로 한 잔으로 목을 축이니 이것이 바로 신선주가 아닌가. 간식으로 가져온 모시 송편, 인절미 그리고 <고요장> 난로에서 구워낸 단고구마로 요기를 했다. 그렇게 안개 자욱한 부봉 정상에서 환담을 하며 40여 분간을 신선처럼 노닐었다.
♣ [문경새재의 지형] — 백두대간 문경새재와 부봉(釜峰)
☆… 문경 지역에 든 백두대간(白頭大幹)이 관음리 포암산과 하늘재를 지나 새재에 접어들면서, 한 줄기를 뻗어 주흘산 영봉(1106m)을 밀어 올리고, 또 한 줄기를 서쪽으로 뻗어 부봉(釜峰) 6개 연봉을 만들어 놓고 계속 뻗어나간다. 대간의 산줄기는 마패봉에서 안부(鞍部)인 제3관문 조령(鳥嶺)에 내려와 잠시 숨결을 고른 뒤, 다시 조령산으로 치솟아 올라간다. 조령산의 대간은 이화령에서 남으로 방향을 틀어 백화산으로 이어진다. 부봉(釜峰)의 6개 봉우리는 916~933m의 암봉이다. 가파르고 아기자기한 암벽과 우람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절경이다. 오늘 우리가 오른 상봉(제6봉)의 정상에 서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백두대간 능선과 문경새재 계곡의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계곡[鳥嶺溪]을 따라가는 새재길은 동쪽의 주흘산 연봉과 서쪽의 조령산 연봉 사이에 있는 깊은 계곡이다. 부봉은 동쪽의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조령계곡으로 치고 들어와 솟은 거대한 암봉으로, 그 위치가 새재의 깊은 곳에서 떨치고 솟아있다. 새재 주변의 산을 거대한 꽃잎이라면 부봉을 그 꽃술[花芯]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부봉은 문경새재 전체 계곡의 한 가운데 솟아있는 고고한 암봉이다.
♣ [동화원으로 내려가는 하산 길] — 가파른 내림 길, 올라온 만큼 내려가는
☆… 처음 부봉에 올라온 이정근 사장은 날씨가 좋은 날 꼭 다시 와서 천하의 승경을 조망하겠다고 했다. 오후 12시 30분, 하산을 시작했다. 이제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야 할 때가 되었다. 하산 길은 제3관문 쪽 ‘동화원’으로 내려가는 능선 길이다. 가파르게 올라 온 만큼 그 높이를 내려가야 한다. 가파른 능선의 산길은 경사가 급하고 험했다. 그리고 급전직하 아래로 쏟아지는 산길은 어제 내린 비로 물기를 머금어 미끄러웠다. 발걸음을 옮기기기 아주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낙엽이 쌓인 곳은 더욱 미끄러웠다. 한참을 쏟아져 내려오니 완만하게 경사진 너럭바위가 나타났다. 주변의 소나무 한 그루가 고고하게 바위를 지키고 있다. 만고풍상을 겪은 노송이 안개 속에 젖어 있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 그리고 계속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등산(登山)은 올라간 만큼 내려오는 길의 여정이다. 사람으로 말하면 정직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산이고 자연이다. 그리고 산은 순수 생명의 원천이다. 산이 품고 있는 물은 서서히 또는 유장하게, 아래의 세상으로 흘려보내 모든 만물을 살린다. 산에서나 우리 인생에서 욕심을 부리거나 성급하면 반드시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험한 구간일수록 더욱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방심하거나 성급해서는 안 된다. 내려오는 거리가 녹녹치 않았다. 백두대간에 속해 있는 새재의 산(山)이 높고 골이 깊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오니 경사가 완만한 산록에 이르고 산죽의 군락지가 나타났다. 그 아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소리 따라 내려오니 제3관문 아래 문경초점(문경초점)에서 흘러내린 계곡에 나타났다. 조령계곡이다. 물을 건너면 바로 제3관문에서 제1관문까지 관통하는 그 새재대로이다.
♣ [‘문경새재아리랑비’] — ‘새재아리랑’의 구성진 가락이 흐르는…
☆… 새재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오니 ‘문경새재아리랑비’가 있고 그 옆에 정자가 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버튼을 누르니 <문경새재아리랑>이 흘러나왔다.
☆… <문경새재아리랑비>는 제2관문 조곡관에서 어느 정도 올라온 지점의 길목에 위치해 있다. 버튼만 누르면 흘러나오는 ‘문경새재아리랑’은, 노랫말에 담긴 문경새재를 실제로 체감할 수 있어 가슴을 울린다. 민초(民草)들이 오가고, 선비들이 과거 보러 갈 때 넘던 문경새재는 예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였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요인 아리랑은 정선·진도·밀양아리랑 등 지역마다 다양하게 전해 내려오는데 문경 지역에서도 옛 선비들의 고달픔과 애환이 담겨있는 <문경새재아리랑>이 전해 내려온다. 그런데 최근 아리랑 가운데 문경새재아리랑이 ‘우리나라 아리랑의 원조(元祖)’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후렴)
문경은 새재에 물박달나무
홍두께 방망이로 다 나가네(후렴)
홍두께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 애기 손질로 녹아 나네(후렴)
문경은 새재 고개는 왠 고갠지
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나네(후렴)
☆… 문경새재는 예부터 민초들이나 선비들이 넘나들던 애환이 서린 ‘아리랑’ 고개였다. 문경새재 외에도 문경 곳곳에는 아리랑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문경시는 문경새재아리랑의 전승과 보급을 위해 2008년부터 ‘문경새재아리랑제(祭)’도 열고 있다. ‘문경새재 옛길 달빛사랑 축제’ 등 각종 행사에도 문경새재아리랑 공연이 단골로 무대에 오른다. … 문경 읍내에는 문경새재아리랑 전수자 송옥자 씨가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를 꾸려가고 있다. 문경으로 시집와 시할머니가 흥얼거리는 아리랑 소리를 들으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송옥자씨는 송영철 선생에게서 문경새재아리랑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송옥자씨가 물레, 솜틀 등을 직접 돌리며 소리하는 모습에는 ‘한(恨)’의 정서와 함께 아리랑의 진수가 전해진다.
문경새재아리랑비 [자료화면]
* [제2관문~제1관문] — 청정 조령계의 아름다운 명품길
☆… 제2관문 조곡관까지 내려왔다. 장대한 노송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계곡의 가장자리에는 암반에서 솟아나는 조곡약수가 있다. 조고관은 조선 선조 때(1594년) 축성된 관문으로 새재의 세 개의 관문 가운데 그 풍광과 문루가 가장 아름다운 명소이다. 여기서 주흘관(제1관문)까지의 구간은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이다. 사람들의 ‘걷기’는 보통 이 구간을 왕래하기 때문이다. 제1관문으로 내려가는 새재 길은 낙동강의 원류 중의 하나인 조령계곡(鳥嶺溪谷)을 따라 이어진다. 길 따라 흐르는 계곡물은 수정처럼 맑다. 버들치나 꾸구리가 서식하는 청정계곡이다. 새재 길은 날씨가 좋으면 맨발로 걸으면 건강에 좋다.
♣ [자연과 역사의 숨결] — ‘산불됴심’의 한글 표지석
☆… 예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추앙받던 주흘산의 기상이 흐르는 새재의 길에는 역사적인 유적지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렇게 나무들이 즐비한 탄탄대로를 걷다보면 ‘상처난 소나무’가 과거의 아픔 역사를 증언하고, 조선 후기 한글 사용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산불됴심’ 표석이 또 눈길을 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산불예방과 주흘산을 비롯한 자연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에 고어(古語)로 된 한글비석은 모두 4점이 남아있는데, 새재의 ‘산불됴심’ 표석을 제외하고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순수 한글 비석이라 할 수 있다.
♣ [명소(名所) ‘용추계곡’] — ‘교귀정(交龜亭)’과 장대한 노송 한 그루
☆… 마사토로 잘 닦여진 길을 따라 내려오면 한 그루 장엄한 노송(老松)과 어우러진 ‘교귀정(交龜亭)’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교귀정’은 조선세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구 경상감사가 관인(官印)를 인계·인수하던 교인처(交印處)이다. 1470년 경(성종초)에 건립하여 지속적으로 사용해 오다가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로 터만 남아 있었다. 1999년 6월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귀정 앞 에는 장엄한 노송 한 그루가 비껴 서 있는데 그 용자(容姿)가 아주 장관이다. 그리고 새재의 절경 용추(龍湫)가 있다. KBS 인기역사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왕건에 의해 최후를 맞는 장면을 촬영한 장소이다. 옛날 이 길목을 지나는 시인, 선비들이 용추의 수려한 경치를 노래했다. 그 중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시비가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문득 시선을 끄는 소나무 장대하지만, 그 아래 조금 내려오면 울창한 전나무 군락지의 푸른 숲이 청신한 기운을 뿜어낸다.
♣ [새재 길의 삶의 흔적들] — ‘주막(酒幕)’과 ‘조령원터’
☆… 조령계의 맑은 물을 끼고 내려오다 보면, 새재를 넘나드는 과객들이 고단한 몸을 잠시 쉬어가는 ‘주막(酒幕)’도 있고 새재를 넘는 관리들의 여관 역할을 하던 ‘조령원터’가 있다. 새재는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길[영남대로]이다. ‘새재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이나 관리, 상인 등이 이 험준한 새재를 지나다 피로에 지친 몸을 잠시 한 잔의 술로써 여독을 풀고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는 곳이다. 산수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은 주막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놓았다. 주막 입구에 율곡(栗谷) 선생의 ‘새재에서 묵다’ 시비가 서 있어 대학자의 숨결을 체감할 수 있다
♣ [문경새재] — 천혜의 요새(要塞), 우리나라의 남북을 잇는 요로(要路)
☆… 우리 일행은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에 이르렀다. 청정한 새재 길을 걷는 맛이 아주 쾌적해서 좋다. 곳곳의 유적지와 산천의 풍경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여유도 있다. 보통 새재 길의 본격적인 출발점은 제1관문(關門)이다. 문경새재에는 사적 1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 개의 관문이 있다. 관문은 신라시대부터 외적의 방비나 입국자의 조사를 위해 국경·군사요충지에 세운 성(城)의 출입문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조정은 문경새재에 3개의 관문을 축성했다. 제1관문이 주흘관(主屹關)이요, 제2관문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은 조령관(鳥嶺關)이다.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은 새재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오른쪽의 주흘산(1079m) 정상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와 왼쪽의 조령산(1,026m)에서 뻗어 내려온 산맥이 만나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자연적 지형을 잘 살린, 그 규모가 아름답고 위엄이 있는 성문이다. 좌우의 성곽은 학(鶴)의 날개처럼 앞으로 뻗어내어 축성하고 그 성문 앞은 시야가 확연하게 열린 광장을 조성하여 모든 상황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 [문경새재] — 청운의 뜻을 품은 수많은 인재들이 거쳐간 길
☆… 영남대로(嶺南大路)로 지칭되는 문경새재 과거(科擧) 길은, 조선 태종 때 개설 되어 약 600여 년 동안 영남과 충청도-경기도-한양을 잇는 요로(要路)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등극하여 금의환향한 길목이 이곳이었다. 조선시대의 사림(士林)의 중심은 영남의 선비들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 구미로 낙향하여 채미정(採薇亭)을 짓고 제자를 길러낸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위시하여, 그 계보에서 용출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등이 모두 이 길을 오고가면서 문명(文名)을 떨치며 세상의 영욕을 다했다. 무엇보다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롯하여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모두 이곳을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며, 조선시대 전기 대문장가 서거정(徐居正)도 대구의 양친을 그리워하며 이 고개를 넘었고, 한때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안동 예안의 퇴계 선생을 찾아오면서 지나간 길도 이 길이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이 길을 넘어서 영남의 민정을 살피러 갔다. 새재를 지나는 수많은 선비들의 사연이나 감상도 많다. 그래서 이름난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한두 편의 시를 남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
새재옛길의 역사와 문경의 민속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옛길박물관' 전경
♣ [영남대로 문경새재] — 그러나 때로는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 새재는 역사적으로 비운(悲運)의 현장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던 곳도 바로 이 길이었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고니시의 부대는 부산에서 열흘만에, 척후병들이 그렇게도 경계(警戒)한 문경 새재 입구에 도착했다. 비조불입(飛鳥不入), 문경새재는 나는 새도 못 들어간다는 천혜의 요새였고, 여기만 뚫으면 한양까지는 일사천리였다. 그러나 선조 임금으로부터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은 천혜의 요새인 이곳을 그냥 왜적에게 내줌으로써 충주 탄금대에서 참패하고 처절한 최후를 맞았다. 전투 이틀 만에 신립 장군은 자결했고, 부장 김여물은 전사했다. 그리고 열흘이 채 안 되어 한양은 왜군에 넘어갔다. 고니시는 한양 입성 사흘 전 피난 간 선조를 쫓아 함경도로 진군했다. 백성들은 몰래 도주한 왕과 관료들에 분노해 궁궐과 관아를 불태우며 분노했다.
♣ [문경 현감신길원충렬비(縣監申吉元忠烈碑)] — 왜군과 맞선 의기와 장렬한 순국!
☆… 문경새재는 비장(悲壯)의 충혼(忠魂)이 살아있는 곳이다.… 임진년 4월 26일, 문경현감 신길원(申吉元)은 고니시의 왜군이 접근해오자 피하지 않고 대적하다가 몇 안 되는 군사마저도 다 달아나고 총상을 입고 홀로 적장 앞에 섰다. 북상하는 왜군의 길을 막았다. 적장이 칼을 빼어들고 속히 항복하여 길을 비키라고 협박하자, 공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내가 너희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며 꾸짖었다.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을 가해 왔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고 꾸짖기를 계속하니,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다. 왜란 끝난 후, 숙종 32년(1706년) 조정에서는 공의 장렬한 순국을 기리어 '현감신길원충렬비(縣監申吉元忠烈碑)를 세웠다. 새재 <옛길박물관> 입구의 오른쪽 길목에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간과한다.
♣ [문경 ‘청운주막’에서의 점심식사] — 고향의 민속음식 ‘배차적’과 ‘국밥’
☆… 산행을 마치고 문경읍내로 내려왔다. <청운각(靑雲閣>의 길 건너편에 있는 <청운주막>에서 국밥과 배추전(고향말로 ‘배차적’이다)을 주문하여 요기를 했다. <청운각>은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유적지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이곳 '문경서부심상소학교'(현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0년까지 2년 9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거쳐하던 하숙집이다. 약관의 박정희 교사가 첫 부임지의 교단에 설 무렵은 강압적이 일제 식민통치가 극(極)에 이르렀는데, 당시 일제의 한민족말살정책은 교육 현장에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우리의 말과 글은 물론, 민족의식을 자각시키는 역사를 가르치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나 민족의 굴욕과 아픔을 몸으로 느낀, 혈기왕성한 청년교사 박정희는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유서 깊은 우리의 역사와 민족 문화와 정신을 일깨웠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해전과 호국정신을 많이 강조했다고 한다. 결국 그러한 일련의 행동이 일본인 교사에게 발각되어 집단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당시 일인 교장으로부터 모욕적인 질책을 받고 분연히 맞받아치고 만주로 떠났다. <청운각>은 당시의 퇴락한 초가집을 수리 복원하고, 그 옆에 추모기념관을 지어 경내를 아름답게 조경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 [에필로그]— 새재 부봉 산행의 추억,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
☆… 오늘 비록 흐리고 산정에는 안개가 자욱했지만 새재의 맑은 기운이 가슴을 열어주었다. 연 이틀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난 뒤의 아주 쾌적한 산행이었다. 산행 속에서 인적이 없는 낙엽 쌓인 산길이 호젓하고, 가파른 바윗길이 아기자기했고 정상에서 신선처럼 노닐었던 시간이 한 폭의 그림으로 가슴에 남아있다. 안개 속에서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장중하면서도 돌올하게 솟은 바위와 푸른 소나무가 어우러진 풍경, 은은한 바람결이 번잡한 가슴을 씻어주었다. 자연은 순수하다. 무한한 생명의 기운이 솟아나는 곳이다. 여기에 어디, 시속의 번잡한 다툼과 잘못된 욕망의 촉수가 작용할 수 있겠는가.
☆… 이번 산행은 특별했다. 새로 지은 별저(別邸)에 우리를 초대하여 정성을 다하여 대접해 준 이정근 사장에게 깊이 감사한다. 그 따뜻한 정성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하루의 밤낮을 같이 지내면서 산행을 함께 한 우리 대원들이 또한 고맙기 그지없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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