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당 설립 15주년과 주보성인축일 축하 음악회와 치맥파티를 아주 성황리에 마무리할 수 있게 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기념타올을 만들었으니 각자 1장씩 갖고 가십시오.
오늘은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한국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그분들의 모범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마련된 한국 순교성인 대축일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세계교회사상 유일무이하게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서학’(西學)이라 불리던 천주교에 대해 천진암 주어사에서 공부하던 석학들 중, 1784년 이승훈이 중국 북경에서 예수회 그라몽 신부님한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나라에 천주교 신앙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신앙공동체 형성 10년 만에 성직자영입운동을 해서 최초로 입국한 신부님은 중국의 주문모(1752-1801) 신부님이었는데, 1794년 겨울 입국 이후 1801년 신유박해까지 6년 사목하는 동안, 4,000여 명이던 신자가 10,000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런데 사제입국 사실이 1795년 알려져서 낮에 천주교 서적을 번역하거나 만들고, 밤에 성사활동을 했던 주 신부님은 사목활동의 한계를 느끼고, 평신도 회장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 결과, 중인 최창현이 신심과 덕행의 모범으로 총회장이 되었고, 신부님의 피신을 도우며 극진히 보살폈던 강완숙(골롬바)가 여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부님과 함께 미사 드리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들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신부님 숙소를 아는 사람은 강 골롬바 여회장과 몇몇 지도자뿐이었습니다. 조선정부가 사제 체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주 신부님의 활동은 아주 제한적이었고, 사목활동도 극비리에 이뤄졌습니다. 사제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었는지 신태보 복자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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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가 어지간히 가라앉기는 했지만 기도서를 다 잃어버렸다. 그러니 무슨 방법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겠는가? 그러던 중에 순교자 몇 명이 나온 어느 유족이 용인에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략) 그들은 기도서 몇 권과 복음서 해설서를 갖고 있었지만, 모두 깊숙이 감춰놓았다. (중략)
우리는 가까운 친척 못지않게 아주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기도서를 다시 읽고, 주일과 첨례를 지켰다. 그들은 (주문모) 신부님에게서 성사 받은 사람들이라 내가 그들에게 신부님에 관한 얘기와, 신부님이 권고하신 내용을 들을 때 마치 직접 신부님을 뵙는 것처럼, 내 마음은 기쁨과 행복으로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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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보 복자는 1790년대 초 입교해서 교우촌에 숨어 있다가, 1827년 전주에서 체포되어 13년 옥중생활 후 1839년 기해박해 때 참수 당했습니다. 신부님 만나는 게 소원이었지만, 한 번도 못 만나고 순교했습니다. 그 당시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편안하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매일미사에 참석하도록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2. 우리나라의 순교자들 중에는 80대 노인도 있었지만, 13세 소년도 있었습니다. 그 소년이 우리 본당 주보성인이신 “유대철 베드로 성인”입니다.
유대철 성인의 아버지는 서울사람인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였습니다. 유대철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처럼 늘 기도하고 열심히 교리공부도 하며 착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엄마와 누나에게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엄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아들이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구박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어째서 이 어미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느냐?”
그러면 성인은 하늘의 임금이요 만물의 주인의 법을 따르는 것이 더 옳지 않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성인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족에게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엄마에 대해 마음 아프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4년 후의 박해 때 많은 교우가 순교하는 것을 보면서 순교하려는 마음이 생겼고, 1839년 7월 말, 포도청에 자수했습니다. 포도청에서는 그가 천주교 집안임을 알고 감옥에 가뒀습니다. 심문내용은 배교하고, 교우들 이름을 말하라는 엄포였습니다. 감옥 간수들은 그에게서 배교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수많은 위협과 고문으로 몸이 찢기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용맹한 소년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어떤 포졸이 담뱃대 통으로 그의 넓적다리를 내리쳤고, 그의 살점을 떼어내면서 소리쳤습니다.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 “믿고 말구요. 이렇게 한다고 믿지 않을 줄 아세요?” 화난 포졸이 벌건 숯덩이를 집게로 집어 입을 벌리라고 하자, 소년은 “자요!”라며 입을 크게 벌렸습니다. 그 모습에 포졸은 크게 놀라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감옥에 있던 교우들은 고문으로 실신한 그가 정신이 들게 하려고 허둥지둥하자 깨어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수고하시지 마세요. 이쯤으로 죽지 않을 거예요.”
그는 문초와 고문을 각각 14회, 태형 600대, 치도곤 45대 이상을 맞았기 때문에 온몸이 상처였고, 뼈가 부러지고 살이 헤어져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평온하고 기쁜 얼굴을 잃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매를 모질게 맞아서 살점이 헤어져 몸에 대롱대롱 달려 있자, 성인은 그것을 떼어 형리에게 던지면서, 절대로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노끈으로 목을 조여 죽이는 형벌을 받았지만, 어느 누구보다 용감하게 순교했습니다.
3. 우리는 주보성인축일을 맞아, 3가지를 결심해야겠습니다.
1) 하느님께 대한 불타는 마음으로 순교한 유대철 성인의 열렬한 신심을 본받읍시다!
2) 부모들은 자녀들이 주님께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질 수 있도록 모범을 보입시다!
3) 미사, 기도를 통해 주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성 정하상 바오로, 성 유대철 베드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