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신앙의 땅/대전교구 청양 다락골 성지
탄생과 죽음, 최양업 신부와 무명 순교자들
명평자 베르디아나 대전 Re. 명예기자
칠갑산 줄기를 돌아 서쪽으로 가다보면 충남 청양과 보령을 경계로 하는 화성면 농암리에 다락골 성지가 있다. ‘달을 안은 골짜기’라는 아름다운 뜻을 가진 다락골에는 ‘새터’와 ‘줄무덤’ 두 개의 성지가 있다. 새터 성지와 줄무덤 성지는 가톨릭교회의 고되고 서글펐던 ‘박해’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다.
줄무덤 성지는 천주교 4대 박해 중 가장 길고도 참혹했던 병인박해 때 무참히 죽어간 교우들의 시신을 옮겨 모셔놓은 곳이다. 흥선대원군이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자행한 천주교탄압은 5년 동안 지속되었고 이로 인해 아홉 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한 8000여 명의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곳곳의 교우촌이 정부의 무자비한 수색에 여지없이 발각되었는데, 이때 다락골에 살던 많은 교우들 역시 홍성과 공주 관아로 끌려가 갖은 고문 끝에 치명하였다.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다락골 출신 교우들은 치명한 무명 순교자들의 시신을 극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야음을 틈타 몰래 다락골 언덕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치명자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할 겨를도 없이 가족끼리 한 무덤에 줄지어 매장하였다. 이것이 줄무덤이다,
줄무덤으로 올라가는 언덕 입구에는 두 개의 ‘무명 순교자상’이 있다. 하나는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경건히 순교를 기다리는 ‘죽음’을 상징하는 순교자상이고, 다른 하나는 결박된 몸으로 초연히 고개를 하늘로 향하고 있는 ‘부활’을 상징하는 순교자상이다. 거룩한 그 모습이 마음속 숙연함과 처연함을 불러온다.
병인박해때 순교한 37명의 순교자들이 묻힌 줄무덤
십자가의 길을 따라 기도를 하며 올라가다보면 길이 끝나는 곳에 내리막 언덕이 나타난다. ‘제1줄무덤’이다. 경주 최 씨의 묘역 아래쪽에 14기의 나지막한 무덤들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언덕을 조금 더 내려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제2줄무덤’이 보인다. 아래쪽에 나란하게 10기의 무덤들이 줄지어 있다. 하얀 성모님상이 모셔져 있는 무명자의 무덤에선 누군가의 애틋함이 느껴진다. 내려왔던 언덕을 되돌아 올라가 오른쪽으로 능선을 돌아 넘어가면 ‘제3줄무덤’이 나타난다. 13기의 무덤이 빙 둘러선 소나무 숲 안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다락골 줄무덤에는 초기 박해시대에 오로지 신앙만을 증거하다 스러져 간 37기의 고운 넋들이 잠들어 있다.
다락골로부터 700여 미터 떨어진 자리에 있는 새터 성지는 ‘길 위의 사제’, ‘땀의 순교자’로 일컬어지는 우리나라 가톨릭 역사상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1821~1861)가 태어나 만 6세까지 살았던 곳이다.
1791년에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한 채 천주교 의식에 따라 모친의 상을 치렀던 일 때문에 불거진 ‘진산사건’은 윤지충과 권상연의 참수로 일단락되는 듯하였으나, 사실 이것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시작으로서 이것이 바로 ‘신해박해’였다. 박해가 시작되자 서울에 살던 최양업 신부의 조부 최인주는 박해를 피해 아내와 함께 고향인 다락골에 피신해 들어와 살았다. 그 후로 신자들이 속속 숨어 들어오면서 다락골은 점차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최인주는 이곳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낳았고,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이성례와 혼인하여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포함한 여섯 아들을 낳고 길렀다. 그리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만 6살이 되던 해에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더 깊은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하였다.
2021년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생가복원사업 진행
새터는 또한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탕 신부의 마지막 사목 장소이기도 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정부는 천주교의 근절을 목표로 전국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발령하는 등 엄격한 훈령을 공표하였다. 당시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정부의 포교망을 피해 다락골로 피신해 숨어 지내며 교리를 전파하고 있었다. 정부의 가혹한 탄압으로 교인들의 고초는 나날이 혹독해졌고, 사제들에 대한 검거조처는 날로 엄해지고 있었다.
교인들의 처절한 고통을 지켜볼 수 없었던 앵베르 주교는 사제들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교인들을 재난으로부터 구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두 신부에게 쪽지를 보내 자수를 권하였다. 이에 따라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새터에서 마지막 사목 서한을 보내고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 후, 홍성 관아에 자진 출두하여 앵베르 주교와 함께 갖은 문초 끝에 순교하였다.
2021년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는 청양 다락골 성지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생가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문화재 지정신청이 무산되어 재정적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다락골 성지의 최 아녜스 수녀는 많은 신자들이 청양 다락골 성지에 관심을 갖고 생가 복원을 위한 후원에 참여하여 사업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