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치 않은 책이지만,
읽고나서(만약 이글을 읽는 독자가 술을 한방울도 못마신다고 해도)
"아,그렇겠다.나도 혼자 어디 먼 곳에 가서 그 고장의 맛있는 위스키를 한번 마셔 보고 싶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면,필자로서는 무척 가슴 뿌듯한 일이 될 것이다.
책의 머리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렇게 겸손하게 나오니...
사실 사진투성이에 듬성듬성한 활자들...
얇은 이 책자를 손에 들고 휘리릭 책장을 훑으며
'하루키가 돈독이 올랐나? 이게 뭐여?'
혼자서 좀 궁시렁 대었다.
상실의 시대와 해변의 카프카를 좀 난해하게 읽어낸지라
위스키 성지 여행의 가벼움이 얕잡아 보였다.^^
그런데 책장을 열자마자 머리글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든다.이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위스키'란 테마로 여행하며
하루키를 따라가노라니
은근히 하루키의 머리말에 동화 된다고 할까?
스코틀랜드의 아일레이 섬.
발아한 보리로만 만들어지는 '싱글 몰트'에 대한 예찬은 끝이 없다.
아일레이를 성지 순례처럼 나선 그는
스카치 위스키란
발아한 보리로만 만들어지는 '싱글몰트'와
그 밖의 다른 곡물을 증류한 '그레인'을 블렌딩해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오~호~~!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의 연주를 싱글 몰트로
텔레비젼의 재방송 프로그램을 스카치로 비유하는 아일레이 주민들의 자긍심을
하루키가 거니는 아일레이 곳곳을 따라가다보면
술에는 문외한인 나도 제법 이해하며
아아 도 터지는 소리 내게 된다.
홀로 섬을 찾아와
작은 코티지(별장풍의 아담한 숙박시설)를 빌려
몇주일간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책을 읽는다.
난로에는 향좋은 이탄이 타고
비발디의 테잎을 은은하게 틀어놓고 전화선은 뽑아두고
책을 읽다 지치면 창밖의 어두운 파도를 바라보며
싱글 몰트를 홀짝인다.
이런 지경이라면
위스키 할아버지라도 마셔봄직 하겠다.^^
너무나 근사한 풍경이지 않은가 말이다.
(책을 스캔해서 사진이 좀 머슥하다..^^;;)
아일레이에서 이렇게 사람 혹하게 하더니
아일랜드로 건너가 아이리쉬 위스키로 또 살살 유혹한다.
좋은 위스키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것은
갓 구운 파이를 냉장고에 처박아 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믿는다는 아일랜드 사람들.
물과 위스키를 반반씩 섞어 마시며
펍이나 레스토랑에서 얼음을 주문하지 않아야 '문명인의 한사람'으로 대접 받을 가능성이 높다나 어쩐다나.^^
하루키 자신은 맛있는 걸 묽게해서 마시는게 아까워서
절반은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잠시 쉬다가
물을 부어 맑은 물과 고운 호박빛의 액체가 녹아드는 순간을 음미하며 드신다는데.
조니 워커를 스트레이트로 마셔본 바
목줄기에서부텀 뱃속까지 훌러덩 뒤집어지게 불타던 기억이 떠오르며,
절대로 그와 같은 동질감을 맛볼일은 없으리란 생각 하나는 확실했다.
식전의 아이리쉬 위스키는
제임슨,튜러모어 듀,부시밀스 정도.
식후론 패디,파워즈,부시밀스 몰트정도라고 자신의 개인적인 기호를 귀뜸하는 하루키에게
생각지도 못한 위스키 지식을 배워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더.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
그의 경험치로는 술이 만들어진 장소에 가까우면 가까울 수록 좋단다.
도쿄의 바에서 싱글 몰트를 마실때에도 스코틀랜드의 작은 섬,
그 섬의 바닷바람과 오렌지빛을 내며 타는 이탄을 떠올리고
아이리쉬 위스키를 마실때에도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의 여러 퍼브를 떠올리며
그 곳에 깃든 친밀한 공기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고 .
위스키 예찬은 긴가민가로 망설여지지만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차츰 길어지는 아일랜드 여행.
산책후 들린 퍼브에서 식사후 마시는 한잔의 위스키와
난로옆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혼자만의 시간
그리고 바다를 내다보며 홀짝이는 한잔의 싱글 몰트.
그 한 잔만은 자꾸 신경이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