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창고로 다가간다. 살짝 문을 열어본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 퀴퀴한 물감냄새가 섞여 물씬 풍긴다. 유 노인은 소파에 몸을 접고 잠들어 있다. 빈 보드카 병이 소파 아래 있다. 소년은 이젤과 양철통을 지나 큼직한 박스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박스 안에 버려진 것들을 살펴본다. 구겨지고 찢어진 그림들이 몇 장 있다. 그 중에 손상이 덜 된 것을 고른다. 작은 캔버스 하나가 눈에 띈다. 긴 머리카락을 바닥에 늘어뜨린 여자가 무릎을 꿇고 손을 높이 들고 있다. 여자 앞에는 길쭉한 작은 상자가 있다. 하얀 옷과 검은 머리카락, 파란색 상자, 그리고 빨간색 바탕화면. 얼굴은 그저 둥글다. “그림이 너무 깜깜해. 뭐야, 얼굴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잖아.” 낮에 시장에서 보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소년은 창고의 모퉁이로 간다. 겹겹이 포개진 크고 작은 그림들을 헤아린다. 없어, 없어, 이것도, 마찬가지야, 죄다 똑같아. 하나하나 짚어 나가며 숫자를 세듯 중얼거린다.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그려진 그림을 한 점도 발견할 수 없다. 제 값을 매길 만한 것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소년은 한숨을 쉰다. 사람들이 좋아하지도 않고 잘 팔리지도 않는, 이런 그림만 그리는 유 노인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같이 그림이 비슷해. 빨갛고 새까맣고 하얗고, 얼굴은 그냥 동그라미고.” 시장에서 봤던 젊은 여자는 유 노인의 그림이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옆에 있던 남자가 그림에 관심을 보이자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다른 그림을 찾았다. 더듬거리는 러시아어와 몸짓으로 멀리 보이는 이슬람 사원을 가리켰다. 소년이 고개를 저으며 없다고 대꾸하자 레닌이나 푸슈킨의 얼굴을 그린 건 없냐고 또 물었다. 아무런 말도 안하는 소년에게 옆에 있는 남자가 불쑥 물었다. 너, 고려인이냐. 소년은 못알아들은 척 어깨를 으쓱했다.
소년은 벽 한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커다란 그림 앞으로 걸어간다. 그림 전체가 온통 빨갛고 시퍼렇다. 유 노인의 그림 중에서 가장 크다. 오랜 세월동안 그려온 그림이다. 가족들의 원망을 받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밤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그려왔다. 당국이 인정하는 재능으로 이런 그림 말고 사회주의 이념에 맞는 걸 그렸더라면, 그 시절에 영웅 칭호를 받았을 거야. 그러면 지금 이런 세상 안 살았지, 할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소년은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커다란 그림을 노려본다. 가격을 따져본다. 적어도 천 달러는 받아야 한다고 나름대로 시가를 정한다. 이보다 더 큰 그림은 이 나라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 이 그림을 사주기만 한다면 바로 서울행 비행기 티켓을 살 수 있을 텐데.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아버지의 그림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든다. 무슨 말일까. 아버지는 분명히 돈을 벌고 일을 배우러 서울에 갔는데. 소년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그런대로 팔 수 있을 만한, 없어져도 표가 나지 않을 그림을 고른다. 커다란 바위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작은 아이들이 그려진 그림 한 점과 아까 쓰레기통에서 집어 올린 그림을 고른다.
낡은 소파 위에 잠들어 있는 유 노인에게 다가간다. 담요를 끌어 덮어준다. 유 노인의 손에 종이 몇 장이 쥐어져 있다. 한국의 신문을 복사한 것이다. 치과병원에서 구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 한국인 의사가 한 명 왔다. 그는 인터넷을 통하여 서울에 관련된 여러 정보를 유 노인에게 준다. 요즘 들어 유 노인은 한국의 신문에 관심이 많다. 소년은 복사지를 들여다본다. 깨알같이 검은 글자들이 가득하다. 글자들은 하나같이 집처럼 생겼다. 러시아어나 우즈벡어, 영어와는 생김새부터 다르다. 옆으로 붙이고 밑에다 붙여서 언뜻 보면 비슷비슷한 네모 덩어리로 보인다.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도 전부 비슷하게 생겼다. 서울에는 어딜 가나 고려사람이 많더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지하철에서 구걸하거나 길거리에서 청소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벌떡 일어서곤 했지. 고려사람이 참 험한 일을 하는구나 싶어서. 한달이 넘어서야 비로소 여기는 백여 민족이 섞여 사는 중앙아시아가 아니지 싶었단다.
소년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한 장 한 장 넘긴다. 알아볼 수 있는 몇 개의 낱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많은 물건이 가득한 커다란 가게도 있고, 반들반들한 자동차도 있다. 뚱뚱한 몸과 날씬한 몸이 나란히 서있는 사진도 있다. 문득 사진 하나에 시선이 쏠린다. 광장이다. 옆구리에 칼을 차고 갑옷을 입은 사람의 동상이 있다. 아무르티무르 같은 유명한 장군인가보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고 맨 앞에는 트럭이 있다. 트럭 위에 한 남자가 올라가 있다. 확성기를 입에 대고 있는 남자를 소년은 자세히 들여다본다. 멀리서 찍은 사진이라 자세히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 아버지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다. 하지만 아닐 것이다. 아버지가 왜 거리에, 그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 있겠는가. 아버지는 김치공장에서 일한다. 소년은 그림 두 점을 챙겨 창고에서 나간다.
제 방으로 간 소년은 침대 밑에 유 노인의 그림을 넣어둔다. 나무궤짝에 헝겊을 대어 만든 앉은뱅이 책상 위에 가위와 풀과 본드를 올려놓는다. 책상 밑에서 잡지와 담배도 꺼낸다. 가위를 손에 들고서 잡지의 사진을 오리기 시작한다. 파란색 지붕으로 된 집이다. 여러 개의 작은 네모가 모여 넓은 지붕을 이루고 있다. 양 끝이 하늘로 살짝 치켜올라간 모양새가 매우 독특하다. 이슬람 사원의 희고 둥근 지붕과는 다르다. 소년은 손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오린다. 손바닥 위에 파란 지붕으로 된 집을 올려놓는다. 한참동안 들여다본다. 뒷면에 꼼꼼히 풀을 바른다. 낡고 푹 꺼진 침대에 걸터앉아 어디에 붙일까 망설인다. 벽에는 이미 여러 사진과 엽서, 그림들이 붙어 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 영화배우 사진도 있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시장도 있다. 나무가 울창한 산과 계곡, 바다도 있다. 한가운데에는 배추를 담은 커다란 광주리 옆에 검은 장화를 신고 찍은 중년남자가 있다. 소년은 그의 얼굴과 손바닥에 있는 집을 번갈아 본다. 파란 지붕 집을 시장과 강 사이의 공간에 붙인다. 벽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책상 밑에서 담배를 꺼낸다. 오십대쯤 되었을까, 시장에서 보았던 남자의 것이다.
소년은 그들이 다가올 때부터 한국사람인 것을 알아보았다. 딱히 표시가 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사마르칸트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이 작은 마을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다니. 드문 일이다. 남자는 유 노인의 그림에 관심을 보였지만 옆에 있는 젊은 여자는 사지 말라고 눈짓했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빈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여자의 손에 이끌려 다른 곳으로 갔다.
소년은 담뱃갑을 뒤집어 본다. 한 면에는 ‘HANARO’, 반대쪽에는 ‘하나로’라고 적혀 있다. 소년은 소리내어 글씨를 읽어본다. 하, 나, 로. 얇은 비닐을 벗겨내고 안을 들여다본다. 일곱개의 개비가 들어 있다. 영어로 쓰여진 면에 본드 칠을 한다. 꼼꼼히 본드를 바르고는 자동차 사진 위에 붙인다. 손가락으로 사진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중얼거린다. 남대문과 한강, 남산, 그리고 이건 한국의 집, 아빠가 다니는 공장, 자동차와 버스, 아빠가 피울지도 모르는 담배……. 소년은 턱을 괴고 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진 속 중년남자 얼굴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쓸어본다. 벽에 붙은 담뱃갑 속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낸다. 길쭉한 개비를 만져본다. 코 끝에 대본다. 씁쓰름한 탄 냄새가 감돈다. 입에 대고 후후, 연기를 빨고 뱉는 시늉을 내본다. 하나로, 라고 적힌 필터를 손가락으로 짚고 검정색 사인펜으로 글씨를 써내려간다. 또박또박 한글로 쓴다.
내, 아버지는, 서울에, 계십니다.
글자가 보이도록 뒷면에 풀칠을 한다. 여러 사진이 붙은 벽을 살펴보다가 밤의 불빛이 반짝거리는 강가에 담배개비를 꽂는다. 소년은 물끄러미 담배개비가 꽂힌 강물을 바라본다. 키슬리 말라꼬, 말라꼬! 대문 밖에서 외치는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소년은 정신이 퍼뜩 난다. 책갈피에 끼워놓은 돈을 집어들고 나간다. 새벽 하늘이 보랏빛이다.
혼자서 아침식사를 한다. 딱딱한 빵과 토마토 수프와 요구르트를 먹는다. 유 노인의 몫을 식탁 위에 차려둔다. 자전거를 타고 대문을 나선다. 똑같은 모양새의 집들과 체리나무와 포도나무가 늘어진 긴 골목을 빠져나간다. 마을 중앙에 있는 박물관을 지난다. 두건을 머리에 쓰고 장갑을 낀 여자들 몇몇이 부대를 들고 걸어간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벗어나자 하얀 홑이불을 펼쳐놓은 듯 드넓은 시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목화밭에는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마을사람들과 교사들, 4학년에서부터 11학년까지의 학생들이 모여 있다. 교장선생이 확성기를 대고 출석을 부르고 있다. 유가이 사샤! 교장선생의 호명에 소년은 오른손을 바짝 들어 보인다. 커다란 흰색 부대를 들고 맡겨진 구획으로 간다. 지글거리는 햇살이 목화밭에 쏟아진다. 줄 맞춰 길게 늘어진 작달막한 목화나무와 군데군데 놓인 커다란 자루들을 건넌다. 흰구름을 찢어 곱게 뭉쳐 놓은 듯한 목화솜들이 후두둑 떨며 길을 내준다. 까스락거리는 마른 이파리들이 소년의 발치에서 비명을 지른다. 유가이 사샤, 다시 한번 소년의 이름이 울려퍼진다. 유 노인은 안 왔느냐고 마을 회장이 묻는다. 조금 있다가 나올 거라고 소년은 큰소리로 대꾸한다.
아침해가 뜨겁다. 등이 후끈 달아오른다. 불덩이를 담은 커다란 솥뚜껑이 등판에 얹혀 있는 것만 같다. 너무 뜨거워서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뼈마디와 살거죽이 아프다. 이러다가 또 목화밭에서 쓰러지는 게 아닌가, 소년은 은근히 걱정이 된다. 푸른 이파리에 감싸인 하얀 목화솜들을 빠른 손놀림으로 훑기 시작한다. 할당량을 채우려면 부지런히 따야 한다. 빳빳이 마른 이파리가 손등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간다. 농장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도 목화밭에는 더운 정적이 감돈다. 소년은 헐렁한 자루를 보며 한숨을 쉰다. 솜털은 눈송이 같다. 자루 속으로 들어가 금세 녹아버리는 눈. 머리에 파란 두건을 쓴 여자가 옆줄에서 불룩해진 자루를 확인한다. 여자의 자루가 동화 속에 나오는 크리스마스의 선물보따리처럼 두둑하다. 교장선생이 확성기를 입에 대고 외친다. 주민들은 물론 선생들과 학생 모두 열심히 해서 목화를 가장 많이 따는 집단농장이 되자는 내용이다. 소년은 유 노인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어지럼증이 인다. 햇살아래 끝없이 이어진 목화밭이 파란 하늘과 뒤섞여 일렁인다. 저마다 맡겨진 구획 안에서 웅크리고 목화솜을 따느라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난다. 소년은 사람들과 섞여 목화밭을 빠져나간다.
대문을 열자 바둑이가 달려온다. 마당에 유 노인과 젊은 남자가 서있다. 세르게이는 사서 고생을 하고 있더군요. 비자가 아직 일년 더 남았는데도 그들과 같이 행동하고 있어요. 벌써 12일째 아무것도……. 그는 소년을 보자 입을 다문다. 어깨를 으쓱이면서 유 노인에게 덧붙인다. 걱정마세요. 상황이 좋아질 겁니다. 조선족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어요. 어르신도 국적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남한에 호적이 있다면요. 그는 소년의 어깨와 머리에 누덕누덕 묻은 솜털을 떼주고는 대문을 나갔다. K방적회사에서 한국어 통역을 하는 그가 서울에 갔다온 것을 소년도 알고 있다. 할아버지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가 사서 고생을 하다니. 유 노인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대답한다. 사샤, 아빠는 잘 지내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걱정 말거라. 유 노인은 더 이상은 입을 열지 않는다. 옆구리에 꽤 많은 분량의 신문이 끼여 있다. 소년은 문득 새벽에 유 노인의 창고에서 보았던 복사지가 생각난다. 광장 앞 트럭 위에 올라탄 남자 사진. 소년은 불안해진다.
소년은 제 방으로 간다. 여러 사진이 오려 붙여져 있는 벽을 들여다본다. 빽빽한 빌딩들이 꽉 찬 길거리, 불빛이 물에 어른거리는 강, 반짝반짝 빛나는 밤의 도시. 군데군데 붙은 아버지 사진들. 소년은 오년 동안이나 보지 못한 아버지가 어색하다. 아버지가 딛고 있는 곳이 낯설다. 나무가 무성히 우거진 산을 본 적도 없고 불빛이 반짝이는 밤의 강물이나 도시를 본 적도 없다. 유난히 해가 많은 나라, 우즈베키스탄에서 매일 볼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색깔로 변하는 하늘과 드넓은 목화밭이다. 골목마다 똑같은 구조와 가구를 지닌 집들이다. 나무라고는 녹음이 우거진 그런 나무가 아니라 거리 곳곳에 서있는 과실수뿐이다. 서울의 거리며 시장, 자동차들을 오려 붙여도 소년에게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좀처럼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배추를 씻고 다듬을 아버지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버지는 엔지니어였다. 한달에 삼천 숨을 받는 엔지니어 월급으로는 쌀과 고기 몇 근을 사기에도 부족하다. 농장 안에 있는 몇몇의 고려인들은 농사를 지으러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든지, 비싼 빚을 지고 서울로 갔다. 우즈벡 민족의 말과 글을 모르는 소수민족으로서는 달리 선택이 없다. 관공서에서도, 대학에서도 이제는 러시아어 대신 우즈벡어를 쓴다. 소년도 러시아어나 영어, 한글보다 우즈벡어를 배워야 한다. 그래야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소년은 침대 밑에서 유 노인의 그림 두 점을 꺼내어 물끄러미 바라본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아버지의 그림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든다. 소년은 벌떡 일어난다.
유 노인은 눈을 감고 있다. 소년이 다가와도 좀처럼 눈을 뜨지 않는다. 소년이 들어서는 기척에 유 노인은 소년을 돌아본다. “아버지가 서울에 간 게 할아버지 그림 때문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유 노인은 곰곰이 생각한다. 글쎄다, 글쎄다, 중얼거린다. 소년은 창고 안에 가득찬 크고 작은 그림들을 둘러본다. “할아버지도 이슬람 사원이나 푸슈킨 같은 유명한 사람 얼굴 그리면 안돼요?” 소년의 작은 목소리가 입안에서 우물우물한다. “레닌도 좋고, 막심 고리키도 좋고 톨스토이도 좋은데…… 여행자들이 아는 사람이면.” 유 노인은 말없이 소년을 바라본다. “그럼, 다른 거라도. 음, 목화밭이나 철갑상어도 좋아요.” 유 노인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뭐라고 말을 할 듯하다가 입을 다문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유 노인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떠오른다. 소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일어선다. “왜 할아버지 그림 속 사람들은 얼굴이 하나도 없어요? 눈도 없고, 코도 없고, 귀도 없고. 그냥 만날 동그라미야.” 유 노인은 소년의 눈길을 좇아 크고 작은 여러 그림을 둘러본다. 왜요? 소년의 되물음에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린다. “노예니까. 노예는 이름도 없고 국가도 없고 얼굴도 없다.” 유 노인의 메마른 목소리에 일순 창고 안에는 정적이 감돈다. 이번에는 소년이 입을 다물어버린다. 시원스럽게 대답하지 않는 유 노인도, 어두컴컴하기만 한 그림들도 못마땅하다. 괜히 물어봤다고 속으로 투덜거린다. 다시 제 방으로 들어온 소년은 침대 밑에 감춰둔 그림 두 점을 가방 속에 넣는다. 부엌에 가서 김치도 두 포기 꺼내서 그릇에 담는다. 지난달 서울에 다녀온 마을사람이 신문지로 꽁꽁 싸서 가지고 왔다. 아버지가 직접 담근 김치다. 그림과 김치를 가방에 넣는다. 자전거 뒤칸에 싣고 대문을 나선다. 바둑이가 뒤쫓는다.
점심이 가까워지자 시장은 붐비기 시작한다. 소년은 뒷문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바둑이가 조금 떨어진 전봇대 근처에 오줌을 지린다. 불룩한 돈주머니를 허리춤에 찬 남자들이 서성거린다. 돌러러, 돌러러, 중얼거린다. 외국인들이 달러를 환전하기 위해서 자주 드나드는 길목이다. 바둑이가 어디에선가 신문을 입에 물고 다가온다. 꼬리를 흔들며 소년의 발치에 신문을 툭 떨어뜨린다. 타슈켄트에서 발행하는 ‘고려신문’이다. 신문지를 제 혓바닥으로 핥으며 소년을 바라본다. 자, 이거 봐. 가져 왔어,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가 이렇게 말한다. 소년은 피식, 웃으며 강아지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신문을 오려 붙이는 소년의 습관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신문에 소년이 흥미를 가지는 것까지도. 바둑아, 소년은 나직이 부르며 손을 내민다. 바둑이의 반들반들한 코가 손바닥에 와 닿는다. 소년은 이제 바둑이란 이름이 어색하지 않다. 아직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유 노인은 한술 더 떠서 바둑이가 암컷을 낳으면 ‘손녀’, 수컷을 낳으면 ‘손자’라고 부르자고 말했다. 소년은 중얼거려본다. 손녀. 손자.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낯선 단어인 것은 분명하다. 바둑이는 신문지를 혓바닥으로 핥는다. 물기 먹은 신문지가 젖어든다. 글자가 더 새까매지고 사진도 진해진다. 눅눅한 신문지 속 사람의 얼굴에도 습기가 번진다. 작은 눈동자가 새까맣다. 머리카락과 귀도 축축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소년의 작은 노점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러시아 아줌마도, 머리에 터번을 감은 이슬람 신학생도 멈춰서 김치의 가격을 묻는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나이 어린 여자가 다가온다. 음악을 공부하러 왔다고 한다. 얘, 이거 어디서 난 거니? 여학생이 묻는다.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불쑥 대답한다. 모이 빠빠 쥐붓트 브 씨울레. 여학생은 눈을 크게 뜬다. 뭐라구? 너희 아버지가 서울에 계신다구? 소년은 고개를 끄덕인다. 여학생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소년과 의논 끝에 김치 한 포기를 칠백 숨에 산다. 김치를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가는 여학생은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소년도 기분이 좋다. 공항으로 달려갈 수 있을 만큼 큰 돈이 모아진 것만 같다. 흠흠, 목을 가다듬고 또박또박 중얼거린다. 내 아버지는, 내 아버지는 서울에 계십니다. 땅바닥에 또박또박 글씨를 새긴다. 유 사샤, 라고 쓴다. 땅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어깨가 풀썩 내려간다. 미냐 자붓 유가이 사샤. 소년의 입에서 무뚝뚝하고 억양 없는 러시아어가 한숨처럼 흘러나온다. 유 노인은 ‘가이’라는 말을 빼는 것이 옳다고 했다. ‘유가이’가 아니라 ‘유’가 맞는 성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소년의 어머니의 성도 ‘헤가이’가 아니고 ‘허’라고 했다. 공민증을 발급받으면서 러시아 군인들이 성을 잘못 적은 거라고 했다. 하지만 유 노인이 가르쳐 준대로 말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 고려사람이 많다는 김병화 농장이나 뽈리따젤 집단농장은 그런 이름이 통할까. 소년은 고개를 흔든다. 여기는 샤흐리샵스다. 아무르티무르가 태어난 작은 마을이다. 지난주에도 모슬렘인 후산에게 ‘유가이’와 ‘유’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을 때 그 애는 이해를 못했다. 그러니 계속 ‘유가이’여야 한다. 손바닥으로 글자가 새겨진 땅바닥을 휘젓는다. 희미해진 글자에 바둑이가 다가와 코를 댄다.
집시들이 힐끔힐끔 바라본다. 아까부터 소년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옷차림이 너저분하다. 한 아이가 와서 소년의 노점 주위를 돌아다니고 가면 다른 아이가 와서 똑같이 서성거린다. 그때마다 점잖게 엎드리고 있던 바둑이가 몸을 일으킨다. 치렁한 두건을 늘어뜨린 여자아이 집시가 다가온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냄비를 들고 있다. 점을 쳐주겠노라고 말한다. 소년은 고개를 내젓는다. 집시는 물러서지 않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는다. 발등까지 치렁하게 내려오는 제 겹치마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린다. 맛있겠다. 김치를 보면서 입맛을 다신다. 집시의 손톱 밑에 시커먼 때가 꽉 찼다. 오물로 얼룩이 진 맨발도 마찬가지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메케하다. 마른 풀 타는 냄새가 소년을 어지럽게 한다. 소년은 손으로 연기를 휘젓는다. 계집아이 집시가 히뜩 웃는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눈빛이다.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년은 저리 가라고 말한다. 집시의 눈이 실실 웃는다. 어슬렁거리던 집시들이 다가와 앉는다.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과 눈빛으로 소년을 마주본다. 바둑이가 낮게 으르렁거린다. 소년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저리 가라고 다시 한번 말한다.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계집아이 집시는 맛있겠다, 또 다시 중얼거린다. 때가 잔뜩 낀 손가락을 꼼지작거린다. 금방이라도 김치 한 가닥을 집어올리고 싶은 손짓이다. 바둑이가 크응, 신음을 흘린다. 소년은 못을 박듯 한자 한자 힘을 주어 말한다. 니들같이 게으르고 지저분한 애들이 맛볼 음식이 아냐. 저리 꺼져. 계집아이 집시는 소년의 말에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어머, 김치다! 어제 보았던 한국여자다.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렸던 남자도 옆에 있다. 집시들이 슬그머니 한발 물러선다. 남자는 이번에도 그림에 관심을 보인다. 커다란 바위 위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춤을 추는 여자들이 그려진 그림을 바라본다.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뭐라고 속닥속닥한다. 눈도 없고 코도 없는 사람들만 가득 그려진 시커먼 그림이 기분 나쁘다. 사지 말아라. 이런 내용인 것을 소년은 눈치챈다. 말은 못해도 한국어를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다. 유 노인은 집에서는 러시아어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김치가 얼마냐고 묻는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는 김치도 사고 그림도 사자고 여자에게 말한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푸른색 지폐가 펄럭인다.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집시들과 시선이 마주친다. 여자는 기겁을 한다. 빨리 집어넣어. 저기 서있는 집시 애들이 당신 지갑을 힐끔거리잖아, 빨리. 여자는 불안한 눈초리로 조바심을 낸다. 남자는 빠른 손놀림으로 고무줄로 묶인 뭉칫돈을 통째로 소년에게 건넨다. 아마 천 숨은 되겠다. 소년은 재빨리 돈을 받아 허리춤에 묶인 지갑에 집어넣는다. 남자와 여자의 주위로 집시들이 소리없이 다가와 에워싼다. 당황하는 외국인들을 보고 유유히 웃는다. 계집아이 집시가 남자의 뒷주머니에 성큼 손을 집어넣는다. 저리가, 남자가 큰소리로 외쳐도 집시들은 아랑곳없다. 더러운 손들이 일제히 남자의 배낭과 여자의 핸드백, 목걸이와 옷에 뻗치기 시작한다. 여자가 비명을 지른다. 집시들은 더 집요하게 달라붙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보이지 않던 애들까지 합세한다. 소년의 작은 노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시장 뒷골목을 지나는 사람들 누구도 다가오지 않는다. 양고기 꼬치를 들고 있던 모슬렘 남자들이 채 썬 양파를 집어먹으며 쳐다본다. 빵을 파는 살찐 러시아 여자도 안되었다는 표정으로 혀를 찰 뿐이다. 물건을 사던 젊은 여자애들은 길을 돌아서 지나간다. 바둑아! 가! 덤벼! 소년의 명령을 받은 바둑이가 부리나케 달린다. 날카로운 이빨이 햇빛 속에서 번뜩인다. 집시들이 우왕좌왕 흩어진다. 어린 집시 한명이 엎어진다. 오물이 얼룩진 작은 발 하나가 김치를 짓밟는다. 김치가 사정없이 짓이겨진다. 안돼! 소리치며 소년이 달려든다. 한국남자와 여자, 소년과 바둑이, 십여명의 집시들이 한데 뭉쳐 뒤엉킨다. 시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넓게 비켜선다. 집시들의 맨발이 유 노인의 그림을 짓밟는다. 누군가 소년의 머리칼을 잡아챈다. 소년의 뒤통수가 땅에 곤두박질친다. 허리춤에 동여맨 돈지갑의 지퍼가 열리고 구겨진 지폐가 빠져나온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집시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간다. 순식간에 흩어진다. 에에에에, 이상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면서 달아난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선 채 히뜩 웃고 있다. 계집아이 집시는 가운데 손가락을 길게 내밀면서 소년과 두 남녀에게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너저분하게 찢어진 김치 한 가닥을 손에 들고 있다. 자기들끼리 돌려가며 맛을 보기 시작한다. 맵다고 아우성이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그들을 노려본다. 머리카락과 옷매무새가 헝클어진 한국여자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다. 남자의 몰골도 말이 아니다. 바지와 자켓의 주머니가 밖으로 비어져 나오고 신발끈이 풀려 있다. 그들은 뒤늦게 나타난 경찰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버림받은 난민처럼 두 손을 꼭 붙잡고 시장을 빠져나간다. 이미 값을 지불한 유 노인의 그림도 팽개쳐 둔 채.
소년은 두 팔을 무릎 위에 늘어뜨리고 땅바닥에 멍하니 앉아있다. 흙이 들어갔는지 입 속이 꺼칠하다. 침을 퉤 내뱉는다. 피와 흙이 뒤섞인 뭉글한 타액이 쏟아진다. 이마와 볼이 쓰라리다. 바둑이가 넘어진 자전거 사이를 어슬렁거린다. 흐트러진 김치를 발로 쓸어모은다. 흙먼지가 묻고 잎사귀가 찢어져 있다. 소년은 바둑이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다. 바둑이는 쓰레기통 옆에 떨어져 있는 유 노인의 그림도 물고 온다. 관을 가운데에 놓고 모여 앉아 제사를 지내는 그림 속의 무리가 바둑이 입에 실려 온다. 긴 촛불을 사이에 둔 얼굴 없는 사람들을 소년은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버지의 그림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싶어요. 소년의 귓가에 아버지 목소리가 파고든다. 소년은 눈도 코도 입도 없는 그림 속 사람들을 노려본다. 천천히 일어나 김치와 유 노인의 그림을 주섬주섬 가방에 넣는다. 신문지를 움켜쥐고 자전거에 올라탄다. 귀를 축 늘어뜨린 바둑이가 자전거를 뒤쫓는다. 난동을 부리던 집시 무리가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계집아이 집시가 겁먹은 눈초리로 소년을 본다. 비굴한 표정이다. 한 발에는 큼직한 분홍색 구두가 신겨 있다. 봉변을 당한 여자의 것이다. 머리카락과 옷에 붉은 고춧가루가 묻어 있다. 다른 집시들 얼굴도 벌건 고춧물로 얼룩이 졌다. 그들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소년은 갑자기 푸스스, 웃기 시작한다. 소년이 웃자 집시들도 웃어댄다. 양고기 꼬치를 태우는 연기가 온 시장에 메케하다. 발효우유가 담긴 통을 여러 개 늘어놓고 키슬리 말라꼬, 외치는 우즈벡 여인이 소년을 물끄러미 본다. 소년은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분비물이 덕지덕지 묻은 엉덩이를 흔들고 지나가는 살진 양들이 소년과 바둑이에게 길을 터 준다. 목에 작은 팻말을 걸고 철조망 안에 갇힌 개들이 짖는다. 지퍼가 열려 있는 가방에서 구겨진 그림 한 점이 떨어져 뒹구는 것도 소년은 모른다.
시장을 벗어난 소년의 자전거는 대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바퀴 하나가 빠진 채로 느리게 굴러가는 낡은 소련 차를 지나친다. 비쩍 마른 두 마리의 야윈 말이 건초가 가득 들어 있는 수레를 끌고 또그닥또그닥 달린다. 마차에서 빠져나오는 마른 풀 이파리들이 소년의 자전거 바퀴에 감긴다. 자전거 핸들을 쥔 소년의 손등이 말의 귓가를 스친다. 히이잉, 말이 고개를 높이 쳐들며 아프다고 외친다. 굵고 깊은 말의 울음소리가 도로에 울려 퍼진다. 소년은 너무 웃어서 눈물이 번들번들하다. 좁은 골목길로 향한다. 공터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랑 신부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춤을 춘다. 거리의 악사들이 모슬렘의 민속음악을 연주한다. 일주일 낮과 밤 동안 계속될 잔치에도 지치지 않는 사람들이 우우, 함성을 지른다. 누군가 돈을 공중에 뿌린다. 사방에서 지폐가 나풀거린다. 일 숨짜리 한장이 목화솜처럼 사뿐히 날아온다. 소년의 상처난 볼을 스치며 떨어진다. 희고 둥근 지붕으로 된 사원을 지난다. 음울한 주문을 외우듯 경전 읽는 낮은 목소리들이 들린다. 저음의 피리소리 같다. 소년과 바둑이는 지치지 않고 달린다.
목화밭은 아직 한산하다.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았다. 목화솜을 트럭에 싣는 몇 사람이 보일 뿐이다. 한 사람은 수첩에 기록을 하고 한 사람은 자루를 뒤집어 하얀 솜뭉치들을 쏟아낸다. 교장선생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교직원과 학생들의 출석부가 있다. 시월의 가을 햇살이 땅에 더운 숨을 내뱉는다. 소년은 깊은 바다에 잠기듯 어지럽고 아늑하다. 제자리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만 같다. 잘게 찢어진 구름 같은 목화송이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소년의 얼굴은 목화솜털처럼 하얗고 바싹 말라 있다. 꾹 다문 입술에 땀이 스며든다. 찝찌름하다. 소년은 자전거 핸들을 놓쳐버린다. 굴러떨어진다. 허리만큼 닿은 목화줄기들이 쭉쭉 뻗어 오른다. 복사뼈와 종아리, 허벅지를 찌른다. 살이 긁히고 피가 맺힌다.
소년은 창고 문을 와락 열어제친다. 유 노인은 없다.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환한 공중에서 오래 묵은 먼지가 제멋대로 춤을 춘다. 아직 비우지 않은 물통에도 먼지가 얇게 내려앉아 있다. 의자와 쌓여진 책들, 이젤 주변에도 먼지 알갱이가 돌아다닌다. 먼지는 햇살이 만들어낸 밝은 공간, 문에서 바닥까지 비스듬하게 뻗은 사각형의 긴 공간 안에서만 날아다닌다. 소년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온몸에는 흙과 흰 목화솜털이 묻어 있다. 긁히고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흐른다. 소년은 누런 천으로 뒤덮인 커다란 그림 앞에 선다. 천의 한 귀퉁이를 잡고 힘껏 잡아당긴다. 벽화를 덮고 있던 천이 자르륵 쏟아져 내린다. 온통 빨갛다. 소년은 두어 걸음 물러나 그림을 노려본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있다. 관을 둘러싼 촛불들과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 손을 높이 들고 머리를 조아린 여인과 몸을 축 늘어뜨린 어린아이, 기차 옆에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는 노인,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노래를 부르듯 서있는 남자, 곡괭이를 들고 갈대밭에 서있는 남자, 커다란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아이……. 그들의 옷은 하얀색이거나 청색이다. 자로 잰 듯 반듯한 몸이다. 하나같이 얼굴이 없다. 눈과 코가 없는 둥근 공간뿐이다. 얼굴 없는 그들이 유 노인의 화폭 안에서 소년에게 다가온다. 눈을 그려달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다. 그림 때문이야, 소년은 소리친다. 엄마가 죽은 것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모두 다 그림 때문이야. 아버지는 삼년 동안만 서울에서 일하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서울에서는 열심히 일만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그 돈이면 소년과 유 노인이 굶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그림 때문이야, 소년은 다시 한번 소리친다.
그림의 맨 구석에 한 여인이 있다. 가슴에 두 손을 포개고 반듯이 누워 있다. 한 아이가 옆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녀 옆에 작은 비석이 있다. 고 허 나타샤, 라고 한글로 적혀 있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유 노인은 ‘고’라는 말을 반드시 적어야 한다고 말했다. 삼베옷을 입은 소년은 유 노인이 시키는 대로 조문객들에게 절을 했다. 문도 안 닫히는 낡고 작은 버스에 관을 올려놓았다. 산에 묻어야 한다고 유 노인은 말했지만 이곳은 산이 없다. 농장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로 갔다. 공동묘지다. 자갈밭을 파고 시신이 들어있는 관을 묻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소년도 돌멩이를 집어 엄마를 덮어주었다. 소년은 주먹을 쥐고 그림을 두들겨댄다. 그림이 흔들린다. 그림 속에 있는 기차가 덜커덩거린다. 화물을 싣는 옹색한 기차다. 사람들을 가득 실은 기차가 철로 위를 구르기 시작한다.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소년은 더 세게 그림을 두들긴다. 커다란 그림이 낡은 문짝처럼 삐걱거린다. 기차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바둑이가 소년의 바지를 세게 잡아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