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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27
마태복음 5:43-48
이웃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로 밝히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 왕국이심을 선포하신 말씀이다. 이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말씀이 아니라 이미 구약(율법)의 말씀이며 그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은 모세보다 권위 있는 선지자로, 하나님 왕국의 왕으로서 율법의 본질적인 뜻을 선포하셨다. 그 뜻을 드러내신 방식은 먼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율법관을 폭로하심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옛사람에게 너희가 ~라고 들었으나”라는 표현으로 옛사람, 즉 율법에 속한 자들로부터 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율법을 친히 주신 분이 완성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살인”(21-26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형제로 알지 못하고 노하며, 라가라 하고, 미련하다고 함으로 율법의 완성자를 죽이는 것이다. “간음과 이혼”(27-32절)에 대한 말씀은 율법을 남편으로 삼아 자기 행위로 의를 이루려고 하는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의미이다. “맹세”(33-37절)에 대한 말씀은 죄인들이 어떤 맹세를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기에 하나님의 맹세, 곧 언약하신 그대로 예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다는 의미이다. “보복”(38-42절)에 대한 말씀은 율법을 근거로 보복하는 인간의 죄를 폭로하시며, 율법을 요구하는 자에게 진리를 넘겨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밝히신 것이다. 결국 율법의 본질은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진리로 완성하여 넘겨주신다는 선포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43절). 엄밀하게 말해서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은 율법에 있으나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것은 율법에 없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신 30:7)
시편에 보면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처럼 하신 말씀들이 곳곳에 나온다(참고 시 27:12, 28:3-4, 44:5, 74:10-11, 108:12-13 등). 대표적으로 다윗이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시 139:21-22)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말씀을 근거로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던 것 같다. 그러니까 사실은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자신들은 선민이라는 입장에서 이방인들은 미워해도 된다는 이분법적 선악론으로 인간이 적당히 행할 수 있는 율법으로 바꾸어 버렸다.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8-11)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절)라고 하셨다. 모세보다 더 권위 있는 분, 율법을 주셨던 분이 지금까지 인간이 이해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해석하고 적용한 것은 모두 틀렸다고 선언하면서 직접 그 본뜻을 선포하셨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우리가 과연 받아들이고 지킬 수 있는가?
본문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누가복음 10:30-36에 나오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되물으시길 “율법에 무엇이라고 하였느냐?”라고 하자 율법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라”라고 하셨고, 율법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말씀하신 비유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자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그를 보살펴 준 자는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니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개와 같이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율법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라고 물으셨다. 율법사에게 이웃은 제사장이고 레위인이었으며, 자신은 이런 이웃을 사랑하기에 충분히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질문에서 답을 도저히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율법사는 자기 입으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서 “자비를 베푼 자”라고 하였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자기중심에서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 이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 즉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한다. 죄인은 하나님을 원수로 여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원수의 이웃이 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시며 자비를 베푸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눅 23:34)
결국 원수는 진리를 반대하고 박해하는 자들이고, 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반대하고 박해하였던 ‘나’와 ‘우리’가 원수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기도가 이루어져 그 은혜가 베풀어짐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원수, 곧 진리를 대적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45절).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이같이 한즉”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호포스’는 ‘~하기 위하여’라는 뜻이고, “되리니”라는 말의 ‘기노마이’는 ‘생겨나다, 만들어지다, 존재하게 되다’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그 하늘들에 계신 너희의 그 아버지께서 아들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해를 악한 자와 선한 자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즉 해가 비치고 비가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악인이요 불의한 자를 의인으로 아들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는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6-47절). 악인, 불의한 자를 아들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사람들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이라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 “무슨 상이 있으리요”라는 말씀은 자기중심적인 사랑 안에는 구원이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죄인의 대표격으로 여기는 세리들도 하는 것이고, 혈육의 형제나 이방인들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서로 원수라는 것이 드러났다.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5-36)
“자기 집안 식구”라는 말은 ‘혈육, 육정’이라는 뜻이다(요 1:13). 곧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약 4:4)이다. 이런 점에서 혈육, 육정에 의한 율법 행함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빌 3:18)이다. 그래서 죄인들이 육으로 뭉치고 힘을 모은 사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었다.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5-28)
그러므로 자기 사랑으로 똘똘 뭉쳐 하나님의 원수 된 자들이 스스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 이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의 결론이면서 5장 전체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온전하심”이란 말의 ‘텔레이오스’는 ‘완성한, 완전한, 흠 없는, 성숙한’이라는 뜻으로 명사형이 ‘텔로스’(끝, 성취, 결론, 종결, 마침, 목표, 목적)인데 여기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하신 ‘테텔레스타이’(원형 : ‘텔레오’)라는 말이 왔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성취하셔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나타내셨다.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0-14)
결국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를 은혜로 입히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드러내셨고,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라고 하신 “내 아버지”를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가 되게 하셨다.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2024103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