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조스님은 증오(證悟)를 부정했던가 ? (2)
김호성 교수의 이른바 ‘돈오의 새로운 해석’에 대하여
글/ 박성배(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부룩대학 비교학과 종교학 교수)
이제까지의 인용문에서 초보자들을 가장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첫 출발인 십심(十心)의 초심(初心)과 마지막의 구경립(究境立)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해오(解悟)와 구경위가 근본적으로 둘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양자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강조해야 할 것이고, 해애(解碍)가 있고 없는 차이를 두고 말하면 같다고만 말할 수도 없게 되어있다.
성철스님이 ‘해오가지고는 안된다’고 강조하는 것이나 김교수가 ‘해오면 된다’강조하는 것이나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 성철스님은 해오가 십신의 지위에서 얻는 경험이고 그렇기 때문 에 거기엔 해애가 없을 수 없으니 해오가지고는 안된다고 강조하는 것이고 김교수는 아마도 해오가 본질상 구경위와 통하는 면만을 보고 해오만으 로 충분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뭏든 김교수는 성철스님에 반대한다는 것이 결국 보조스님에 반대하는 것이 되고만것 같다. 적어도 <해오(解悟) 가지고는 안된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보조스님과 성철스님의 주장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보조스님온 바로 그 다음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 문제를 회통하고 있다.
任一切衆生 隨根同別 以六相義 會通可見 昧者 約根本智 該收五位論則 不許漸修之行 是但知總相者也 若約行解昇進階位漸次論則 不許時不移知不異 如王寶印文成 無前後之旨是但信別相也 皆由未離情見 理智不圓故(也)( 보조전서p.85)
일체 중생은 그들의 근기에 따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는 것이니 항상 화엄철학에 나오는<六相의 理論>을 가지고 회퉁해 보면 (범부의 초심과 구경위의 관계는]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치를 끼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은 간혹 根本智만을 강조하여 그 속에 五位를 모두 집어 넣어 말하기 때문에 결국 계놀라는 수행을 인정하지 않게되니 이들은 六相 가운데서 오직 총상(總相)만을 아는 자들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수행자의 수행과 승진을 강조하여 점차적인 계위 만을 말하면 결국 그들은 시간조차 초원하는 영원한 지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꼴이되어 이는 마치 임금님의 도장이 찍힐 때 한번 눌러 이루어진 문양에 먼저와 다음의 차이가 없는 이치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과 다 같게 될 것이다. 이들은 오직 別相만을 믿는 자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 情見을 극복하지 못하고 理智가 뚜렷하지 못한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필자의 의역)
보조스님은 여기서 분명히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한 자들을 어두운 者들이라 힐책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도 감정적인 견해에 사로잡혀 있고 아직도 理智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理智 자체에 완전하다거나 또는 불완전하다는 구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에게는 정견이 있고 없고에 따라 그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어쨌든 이 문장에서도 김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보조스님이 해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거나 證悟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혼적을 보인 대목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거듭 강조하는 바이지만 보조스님의 圓頓成佛論은 그 밑바닥에 증오사상을 깔고 있다고 말해도 조금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圓頓이라는 말 자체가 一乘의 대명사요, 一乘敎는 三乘敎의 헛점을 찌르고 나온 사상이다. 여기서 삼승의 허점이란 십천겁을 닦은 다옴에야 깨달을 수 있다는 사상이요, 이에 대한 일승의 대안온 깨침은 금생에 가능하다는 것이요, 더구나 김교수처럼 해오만 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證悟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보조스님이 이통현 장자의 證悟를 상기해 보자. (論中 但明一生功終 本無十千劫之文也 화엄론 가운데는 오직 일생에 공부가 끝난다는 것 만을 밝혔고 아예 십천겁 이란 말은 없다.) (보조전서, P.84) 증오사상을 이해함이 없이 어떻게 여기에 나온 "一生功終*" 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보조스님의 증오사상이 결정적으로 나타나 있는 곳은 역시 그의 ‘간화결의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줄 안다. 원돈성불론이 普照三文 가운데 圓頓信解門의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듯이 <간화결의론>은 ‘경절문徑截門’의 근거가 되어 있다.
필자는 보조스님을 한 사상가로 본다. 선불교수행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를 아주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애쓰신 분이 다름아닌 보조스님이다. 한국불교의 역사상 선사는 많았다. 그러나 사상가는 드물었다. 보조스님의 수제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진각스님도 스승의 사상가적인 면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애석한 일이요 불행한 일이었다. 요즈음 선에 치우친 사람들은 말끝마다 가섭만을 높이고 아난을 헐뜯지만 사실 아난없는 불교의 역사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난이 부처님의 말씀을 후학들에게 전해 주지 않았더라면 후학들이 어떻게 팔만대장경을 집대성 할 수 있었으며 팔만대장경이 없는 불교가 불교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가섭이 훌륭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고 아난이 가섭 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도 아니 다. 어느 쪽으로 치우치건, 치우친 것은 좋지 않다는 말이다. 보조스님의 제자들이 보조스님만큼 치우치지 않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이기지 못해 하는 소리이다.
‘원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이 보조입적 후 제자 진각스님에 의하여 발간되었다 하여 두 책의 普照眞著設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책들이 다루고 있는 문제나 문제를 다루는 논리의 전개방식이나 또는 글투가 전부 보조스님의 그것들과 다르지 않고, 뿐만 아니라 진각스님에겐 그런 면이 없었으니 이 두책의 내용올 보조스님의 주장으로 보아도 무 방할 줄 안다.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은 상호보완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때로는 서로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는 글귀들이 간혹 튀어나오기 때문에 보조사상의 체계적인 파악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게는 한 책이 다른 책을 부정하는 것 처럼 보일 수도 있게 되어 있다. 그 대목을 잠깐 정리해 보자
《간화결의론)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변으로 시작된다.
或問牧牛子, 華嚴敎 既明法界 無碍緣起 無所取捨, 何故 禪門 揀十種病 而看話也. 答, 近來汎學輩, 不知禪門 話頭參詳處 妙密旨趣, 多有此義.(보조전서,p.91)
어떤 사람이 목우자(보조스님)에게 물었다. 화엄교에서도 이미 이 세상 온갖 것들이 모두 가지가지 인연으로 생겨나 서로 서로 걸림이 없어 무엇하나도 버리고 말고 할 것이 없다고 가르쳤는데 어째서 선문에서는 열 가지의 병통을 가려 내는 (취사 선택을 하면서) 화두참선을 합니까? 그래서 나는 (보조스님은) 대답하였다. 요즈음에 어설피 공부하는 무리들이 선문에서 화두를 들고 참선할 때의 말로 할 수 없는 묘한 뜻" 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의심을 많이 품고 있다. (필자의 의역)
간화결의론은 그 첫줄부터 원돈성불론이 미처 다 다루지 못한 문제를 다루려는 결의를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첫 대목부터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원돈성불론의 주제는 ‘신해信解’인데 비해 간화결의론의 주요 관심사는 ‘행증行證’이다. 그러므로 원돈성불론에서는 스승의 경지를 바로 나의 경지 로 받아들이는 ‘不二'가 논리의 주축을 이루지만 간화결의론에서는 ‘증證’이 그 궁극의 목표이기 때문에 스승과 다른 점을 무자비하게 지적하고 "어디가 다른가', '왜 다른가', '어떻게 하면 이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철저히 따지고 있다.
그러므로 간화결의론에서는 취사선택처럼 보이는 ‘反不二的’인 분위기가 강하게 풍긴다. 여기서 우리는 화엄학에서도 하지 않는 취사선택을 왜 선문에서 구태여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뚜렷이 알 수 있다. 보조스님은 원돈성불론에서 화엄의 교리를 많이 원용했지만 간화결의론에서는 노골적으로 화엄학의 허점을 찌른다. 한 예를 들어 보자.
然此義理, 雖最圓妙, 摠是識情 聞解思惟邊量故, 於禪門話頭參詳 徑截悟入之門, 迥全揀 佛法知解之病也. (보조전서, p. 91)
그러나 (선가들의) 이러한 이치가 비록 아무리 완전하고 절묘하다 할지라도 모두 다 지식과 감정에 결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이해하여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얻어낸 헤아림에 불과하기 때문에 선문에서 화두를 참상하여 똑바로 깨달아 들어가는 공부를 하는 마당에서는 불법을 지해로 처리하는 병통을 하나 하나 철저하게 가려내는 것이다.(필자의 의역)
보조스님의 知解에 대한 힐책은 실로 준엄하다.
그러나 김교수는 해오가 지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는 분이므로 보조스님의 그러한 꾸지람은 우리하고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해오를 얻은 사람은 과연 보조스님의 꾸지람 밖에 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을까? 원돈성불론에서 보조스님이 "故 理智雖現而生習氣 念念猶侵 有爲有作 色心未殄 是謂 十信凡夫 爲解碍處也”(그러므로理智가 비록 나타났다 할지라도 다생의 습기 때문에 잡념은 생각마다 여전히 침범하고 매사가 인위적이고 조작적이어서 밖의 것에 끄달리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십신 범부의 解碍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의 解碍는 解悟이전에 있는 일인가 이후에 있는 일인가?
문맥으로 보아서 ‘理智’가 비록 나타났다 할지라도 말할 때의 ‘理智現’이 해오를 가리키고 있 으므로 해지는 물론 해오 이후에 있는 일이다. 그 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이 위에 인용한 <간화 결의론>의 ‘佛法知解之兵’과 방금 말한 〈원돈 성블론>의 ‘解碍’의 관계는 어떤가? 전혀 상관 없는 것인가? 그렇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구태여 따지자면 知解는 解悟이전이니 더 나쁘고, 해애는 해오 이후 이니까 좀 더 났다고 말할 수 있올 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화두참선을 하고 있는 마당에 어느 것이 좀 더 났고 어느 것이 좀 더 못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토리들의 키 재기지 어떤 것이 키가 좀 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간화결의론의 정신이 이미 모든 병통을 하나 하나 남김없이 철저히 가려내는 것이라면 知解는 해오 이전의 것이니까 잡아 내고 <해애>는 해오 이후의 것이라 하여 무사히 통과시켜줄 것 같은가? 공부해 나가는데 있어서 병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기서는 지해가 바로 해애이다. 그렇다면 김교수는 ‘解悟絶對’를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길이 있다면, <원돈성불론>의 서론적인 공식으로 돌아가 구경각에서 얻을 수 있는 부처님의 果海가 십신초심의 해오에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양자는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말만 내세우는 길 밖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이제까지 살펴 본 바와 마찬가지로 〈원돈성불론>의 근본정신에도 맞지 않고 〈간화결의론>의 저술 목적에도 위배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온 보조사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간화결의론’은 그런 서론적인 단계를 벗어나자는 데에 그 저술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信解’를 문제삼는 圓頓文에서 일반론으로 했던 말을 지금 ‘行證’을 문제 삼는 경절문 에서 되풀이하고 있으면 보조스님으로부터 어설피 공부하는 무리들이란 꾸지람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필자의 이러한 논리는 김교수에게 먹혀 들어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話頭徑截門은 근기가 약한 사람들에게 시설한 일시적 방편문 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조스님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經典的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보조스님이 김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아니한 증거는 무수히 발견할 수 있어도 김교수의 주장을 밑받침해 주는 증거는 발견할 수가 없다. 먼저 김교수의 주장부터 들어 보자. 김교수는 그의 '돈오돈수적 점수설의 문제점 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보조는 언제나 일률적으로 解悟가지고는 안된다. 知見의 병통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는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해야 한다' 고 강조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知見에 걸리고 義理에 걸리는 병통을 깨뜨리기 위해서 화두에 의한 禪인 간화선을 보조가 강조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누구에게나 권유되었던 것이 아니요, 보조선의 마지막 종착역 (究竟)으로서 간화선이 자리하는 것도 아니다. 보조선의 체계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돈오점수 만으로도 충분하였다. 그러나 근기가 하열한 중생들은----화두선을 하는 사람이 근기가 낮은 것으로 이해된다—의리에 체(滯)하므로 이를 타파하는 약으로서 간화선이 보완적으로 시설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간화선이 오히려 下劣衆生에게 제시된 약인 것이다. (김지견박사 화갑 기념논문집, P.411)
김교수의 주장과는 相異한 보조스님의 말씀을 인용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김교수의 보조관에 대해서 잠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김교수는 간화선 올 돈오점수설 밖에다 놔두고 있다. 김교수는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가령 그의 ‘돈오점수의 새로운 해석’ (한국불교학, 제15집, p. 446)이라는 논문에서도 그는 定慧雙修나 惺寂等持를 그대로 돈오점수설이라고 주장하면서 원돈신해문이나 경절문은 보조적인 역할밖엔 않는다고 말하였다. 원돈신해와 간화경절을 빼버린 돈오점수설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런 것을 보조스님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千聖의 궤철(軌轍)’ 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초년부터 열반 직전까지 평생을 주장했던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이 원돈신해도 간화경절도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信解도 看話도 모두 다 빼버린 돈오점수설, 이것이 보조사상일까? 김교수는 간화선을 의리에 체(滯)한 근기가 하열한 중생들에게 제시된 약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세상에 의리에 체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고함을 치고 싶다. 〈나는 근기根機가 하열한 중생이 아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가? 필자는 아직 그런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필자가 이해하는 한, 보조스님도 그런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는 것 같고 따라서 그는 그런 사람을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론은 누구나 의리에 체하고 누구나 근기가 하열하므로 누구나 참선해야 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보조스님에게 있어서 사람의 근기가 上根機냐 下根機냐하는 말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때로는 교육적인 격려의 뜻으로 상근기라 칭찬하기도 하고 때로는 겸허를 촉구하고 분발시키기 위해서 하근기라 꾸짖기도 하나 우리는 그렇다고 하여 개관적으로 상근기와 하기가 따로 구별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보조스님의 참뜻은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은 불교를 하나의 <도 닦는 이론>으로 정리할 때 누구나 무리없이 받아 들일 수 있는 말이다. 먼저 믿고, 그리고 나서 자기의 믿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믿는 사람답게 살고, 이리하여 마침내 믿음이 증명되면 이를 일러 불제자다운 삶 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이론올 소상하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믿지도 않고, 여전히 의심이 많으며, 따라서 행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는 데에 있다. 있어도 보통 있는 게 아니라 의외로 많고, 너무 많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래서 선승들은 ‘신해행증’이라는 격식을 아예 부정해 버린다. 그리고서 자기들의 길을 격식 밖의 도리를 걷는 격외선(格外禪)이라 부른다. 격식같은 것은 아무리 잘 알아 보았자 아무 짝에도 쓸 모가 없으니 격외선 도리가 먹혀 들어가게 되어 있다.
<원돈성블론>에서 의 세계를 신해의 차원에서 아무리 잘 설명해 보아도 해애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證의 세계는 그림의 떡일 뿐 모처럼의 신해도 풍전등화나 다를 바 없다. 간화결의론은 이런 고민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상근기니 하근기니 하는 구별은 문제 밖의 이야기다.
간화결의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조스님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理宗或有 源流俱別之論, 曰法別·門別·機劣, 此義不然. 但言初從 親證一心法界亦別. (보조전서), P. 102)
선종에서 어떤 사람들은 근원적인 것과 파생적인 것은 전 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말하기를 결국 의지하는 법이 다르고, 들어가는 문이 다르고, 사람의 근기가 다르다고 결정론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치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처음 박지범부의 지위에서 마지막 똑바로 꺾어 증득해 들어 가기까지 (그때 그때마다) 들어가는 문이 다르고 (문따라 거기에 알맞은] 능력이 다르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어찌 대보살이 친히 증득하는 <한 마음의 법계>에도 또한 그런 구별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필자의 의역)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어떤 특별한 약만을 먹도록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어떤 병을 앓을 때는 그에 맞는 약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보조스님은 수행자의 종교적 성장과 발전과정을 인정하였고 또한 거기에 따른 능력과 경지의 차이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타고난 근기 에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차이 없는 것에 집착하여 성장발전을 볼 줄 모른다면 결국엔 공부가 잘되어가는지 잘못되어가는지조차 구별할 줄 모르는 멍청이가 되고 말 것이다. (계속〉
1992년 7월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