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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만행(萬行)을 점차(漸次)로 삼는 뜻
문 어찌하여 만행이 스스로 원만한 한 법을 대번에 깨치지 아니하고 점경(漸經)으로 빙 돌아 소선(小善)에만 근로(勤勞)할 것인가. 선종(禪宗)에서도 ‘한 생각이 나니 않으면 한 티끌도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하였거니와, 만일 다투어 아지랑이를 좇고 공화(空華)만을 경집(競執)한다면 환(幻)을 닦는 격이라 마침내 진리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답 제불(諸佛)은 실로 환(幻)임을 요달하시어 바야흐로 환의 중생을 제도하시고, 보살은 공(空)임을 밝히는지라 이러므로(어떤 법이든) 공(空)으로 좇아 건립하시니,『열반경(涅槃經)』에 이르기를 “일체법이 모두가 환상(幻想)과 같으나 여래(如來)께서는 그 가운데 계시어도 방편의 힘으로써 결코 물들거나 집착하는 바가 없으시니, 왜냐하면 곧 제불(諸佛)의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하였고 또 중론(中論)에서는 “말하자면 공의(空義)가 있기 때문에 일체법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므로 돈(頓)은 종자를 이미 싸고 있는 것과 같고 점(漸)은 싹이 피어나는 것과 같으며, 또 마치 구 층의 누각을 보매 곧 보는 것은 단박에 구 층을 한꺼번에 볼 수 있으나[頓見]오르는 것은 반드시 계단을 밟아야 오를 수 있는 것과 같아서 단박에 심성(心性)을 요달(了達)하고 보면 마음이 곧 부처라 갖추지 아니한 성품이 없지만, 그러나 반드시 공(功 )을 쌓아서 두루 만행(萬行)을 수습해야 하며, 또 마치 거울을 닦으매 닦는 것은 한꺼번에 두루 닦으나 그러나 밝고 맑아짐에 따라 점점 분명하게 볼 수 있듯 만행을 두루 닦으면 깨침은 곧 점점 수승해 지나니, 이것이 이른바 점원(漸圓)이 아닌 원점(圓漸0이요 또한 위(位)없는 가운데의 지위(地位)며 행(行) 없는 가운데 뛰어난 행(行)인 것이다.
이와 같이 과(果)에 사무쳐 인(因)을 싸고 미세함으로부터 드러남에 이르는 것이 다 모름지기 자선근(慈善根)의 힘이니, 이런 후에야 비로소 참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실다운 교화를 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 층의 누각이라도 한 삼태기의 흙에서부터 시작되고 천릿길도 첫걸음이 있어샤 하며 도도히 흐르는 강물도 근원에서는 한 족자의 물에서부터 비롯되고 울창한 나무도 처음엔 터럭끝만한 씨앗에서부터 생기는 법, 도(道)를 닦음은 소행(小行)이라고 버리지 못하며 어듬에선 조그마한 빛이라고 그 밝음을 거절치 못하는 것이니, 한 구절의 법문이라 할지라도 한번 정신에 물들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고 보잘것 없이 작은 선행(善行)이라 할지라도 만세토록 그 과(果)는 엊지 않는 것이다.
『열반경』에 이르기를 “한 가지의 선심(善心)을 닦으면 백 가지의 악을 파괴할 수 있으니, 마치 자그마한 금강석 한 조각이 능히 수미산을 무너뜨리며 조그마한 불시가 능히 온 세상을 태우며 조그만한 독약이 능히 ant 생명을 해칠 수 있듯 작은 선(善)도 그와 같이 능히 큰 악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하였고, 『일마니보경(日摩尼寶經)』에는 부처님께서 가섭 보살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모건대 중생들이 비록 수어벗는 세월을 애욕(愛欲)가운데서 죄악의 덮인 바가 되어 있으나 이들중 누그든지 만일 부처님의 경전을 듣고 한법이라도 반성하여 착함을 생각한다면 그 모든 죄업이 한꺼번에 녹아 없어지리라.”고 하였다.
또 「대지도론(大智度論)」에는 여래가 성도(成道)하실 때에 열 가지의 미소(微笑)하심을 적었는데 그 가운데 한 구절을 보면 “여래께서 세간을 관찰해 보니 소인(小因)으로 대과(大果)을 받는 이도 있고 소연(小緣)으로 대보(大報)를 받는 이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불도(佛道)를 구하려고 한 구절의 게송을 찬탄하거나 한번이라도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말을 하거나 한 자루의 향을 사르는 등의 일로도 끝내는 부처를 이루는 이들과 같은 것이다. 하물며 실상법(實相法)을 듣고는 대번에 아는 이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나지 않음도 멸하지 않음도 아닌 실상의 이치로 만이 인연을 행한다면 그 업과(業果)는 반드시 허망되지 않을 것이므로 그래서 미소하신 것이다.”고 하였다.
또 누군가가 ‘달마 대사는 양무제와 함께 공덕의 인연을 담론할 때에 공덕이 없다고 하였는데 보살이 국성(國城)을 버리고 탑묘를 건립하신 것이 어찌 허설(虛說)이라 하겠는가.’고 묻기에 나는 ‘대사께서 공덕이 없다고 말씀할 것은 곧 복덕의 인과를 부정하신 뜻이 이니다. 무제가 유위공덕(有爲功德)은 한량이 있고 공무상(空無相)의 복은 헤아릴 수 없음을 요달치 못하였으므로 다만 저의 탐착심을 파괴해주려 하였음인 것이다. 다만 탐착하지만 아니할 것 같으면 곧 모두가 무위(無爲)가 되기 때문이다. 보살이 또한 윤왕(輪王)이 되매 그와 같은 복보(福報)로 인과가 뚜렷하거늘 어찌 없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고 답한 적이 있다.
만일 이같은 이치를 바로 안다면 처(處)함이 법계와 더불어 양(量)이 같아서 다함이 없으려니와 그렇지 못하다면 곧 이 모든 것이 유위윤회(有爲輪廻)의 과보를 면치 못할 것이니 마땅히 일체를 탐착(貪着)치 말아야 할 것이다.
충국사(忠國師)께서는 “제불보살은 모두 다 복지이엄(福智二嚴)을 갖추셨는데 어찌 인과를 없다고 부정하겠는가. 다만 이치를 가지고 집착하여 사(事)에 막히지 말며 또 사(事)로서 이치를 장애하지 않아 종일토록 행하여도 행한 자취가 없음에 어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생법사(生法師)는 ‘어찌하여 손가락을 튕기고 합자아하는 (그런 보잘것 어벗는 행동들도) 불인(佛因)아님이 없다고 합니까.’라는 물음에 “일체법이 모두가 정한 성품이 없어서 마땅한 인연을 따르나니, 만일 탐염(貪染)으로서 연(緣)을 삼은즉 인천(人天)의 보(報)에 마땅하며, 보리심에 회향하는 것으로 연(緣)을 삼은즉 불과(佛果)를 이루는 보(報)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진여(眞如)도 오히려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거든 하물며 보잘것 없는 선행(善行)이랴.”고 답하였다.
또 이르기를 “만선이 이치로 무루(無漏)와 같다는 것은 대개 만선이란 그 근본에 있어 모두가 이치를 도와 발생하기 때문인데 이치가 이미 다름이 없다면 [一理]선(善)인들 어찌 둘을 용납하리오, 근본으이 여래장성(如來藏性)이 곧 만선의 인(因)이 되며 또한 정인(正因)이라고도 하여 이것이 친히 만선을 내는 것이다.”고 하였다.
또 태교(台敎)에서는 “보잘것 없는 선행(善行)이라고 가벼이 여긴다면 부처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이는 곧 세간의 불종(佛種)을 멸하는 짓이기 때문이아.”고 하였고 또 “선(善의 기틀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인천(人天)의 화보(華報)를 감득(感得)하는 것이요, 다음은 불도(佛道)의 과보를 감득하는 것이다. 만일 불안(佛眼)의 입장에서 중생을 원조(圓照)한다면 만선은 구경(究竟)에 부처님의 일대사(一大事)를 감득하는 출세(出世)의 정의(正義)가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형계 존자(荊溪尊者)는 이르기를 “터럭만한 선행(善行)도 근본은 보리(菩提)로 나아가는 것이니, 마치 칼이나 횃불을 잡을 때 그 자루를 쥐어야 할 것인데 만일 행하는 바의 선행에 대하여 마음으로 상(相)을 짓는다면 흡사 칼날을 잡거나 불꽃을 안는 것과 같은 것이다.『법화경』에서도 흩어진 마음으로 염불하는 것이나 적은 음성으로 찬탄하는 것이나 손가락으로 성상(聖像)을 그리는 것이나 모래를 모아 탑을 쌓는 일 등 보잘것 없는 이런 선행일지라도 점점 공덕을 쌓아 모두 불도를 이루게 됨을 밝히셨다.”하였다.
또 『대비경(大非經)』에서는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고하시되 “만일 어떤 중생이 있어 부처님 처소에 한 번이라도 신심을 발해서 조그마한 선근이라도 심는다면 마침내 없어지지 않아서 가령 멀고 먼 백천억 세월을 지났다 할지라도 저 고그마한 한 번의 선근으로 반드시 열반을 증득하게 되리니,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바다 가운데 떨어져서 비록 오랜 세월을 지났다 하더라도 마침내 훼손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므로 대성(大聖)께서 기틀에 순하여 구부려 응하심에 대소승(大小乘)을 막론하고 두루 잊지 않으시나니, 앞뒤를 제접(提接)하고 머무르심에 반만(半滿)을 어찌 폐하시겠는가. 혹은 소승을 칭찬도 하시나 끝내는 심극(深極)으로 이끌어 돌아오게 하시며, 혹은 반교(半敎)를 꾸짖으시나 또한 초문(初聞)에서 막힐까 저어하신 것이니, 황엽(黃葉)이 어찌 금(金)일 것이며 빈 주먹이 어찌 실답겠는가. 모두가 곧 누르고 드날리는 뜻이요, 방편으로 달래어 제도(濟度)하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의 참 뜻을 얻지 못한 자는 다만 방편의 말씀에만 집착하여 서로서로 시비하며 취사를 확정(確定)해서 혹은 소승을 고집하고 대승에 막혀 근본종지를 잃어버리니 또한 비록 그렇게 종지(宗旨)는 크다 하나 큰 지취(旨趣)를 어찌 밝힐 것이며, 한갓 소승(小乘)을 배척한다 이르지만 조그마한 행실도 오히려 헛되이 잃어버리는지라 뜻을 운용(運用)한즉 헛된 거짓에다 붙여 맡기고 말을 낸즉 분수를 넘고 머리를 지나 정법륜(正法輪)를 끊고 대반야(大般若)를 비방하여 깊고 끝없는 허물이 l이에 더 지남이 없으리니, 비록 수없는 세월을 지난다 한들 어찌 다하리오. 길이 무간(無間)에 침륜하고 말 것이다.
『정명경(淨名經)』에 이르기를 “방편 없는 지혜는 얽매임이요, 방편 있는 지혜는 풀림이며, 또한 지혜 없는 방편은 얽힘이요, 지혜 있는 방편은 풀림이라.”하였으니, 어찌 가히 권(權)만을 고집하여 실(實)을 비방하며 또한 어는 일정한 곳에만 치우쳐서 유(有)를 어긴다든가 무(無)를 배척하는 짓을 하리오, 다만 대소(大小)를 쌍(雙)으로 넓히며 공유(空有)를 함께 운용(運用)하여 일심(一心)으로 삼관(三觀)을 행한다면 곧 온갖 허물됨이 없어지리라.
그러므로 법체(法體)만을 순하는 입장에서는 터럭끝도 성립하지 못하거니와 또한 지용(智用)을 따르면 항상 대업(大業)을 일으키는 것이니, 체(體)는 용(用)을 떠나지 않으므로 고요하되 항상 비추며 용은 또한 체를 떠나지 않으므로 비추되 언제나 고요하므로 체와 용이 항상하고 아울러 비춤과 고요함도 역시 항상한 것이다. 그러나 지취(旨趣)를 알고 정종(正宗)에 돌아가면 마침내는 체용(體用)을 함께 떠나게 되리니 또한 무엇이 비추고 무엇이 고요하겠는가.
만일 체(體)에 의거한다 해서 용(用 )을 장애하거나 성(性)을 집착해 연기(緣起)를 파괴하여 이(理)와 사(事)가 원융하지 못하고 진(眞)과 속(俗)이 격리함을 이룬다면 참으로 동체(同體)의 비(悲)도 운용(運用)할 수 없고 무연(無緣)의 자(慈)도 이룰 수 없으리니, 실로 이러하다면 선악을 이미 한 가지로 보지 못하거늘 원친(寃親)을 어찌 능히 구원하겠는가. 허물됨이 막심하고 잃음 또한 막대할 것이다. 또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대저 선지식이란 비록 밝게 불성을 보아서 부처님과 더불어 그 지견은 동등하지만 만일 그 공(功)으로 논한다면 성현(聖賢)들과 가지런하지는 못하나니, 반드시 오늘부터라도 걸음걸음에 자량(資糧)을 훈습해야 한다.”하였다.
또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심자 비구(蕈子比丘)는 도리어 옛 시은(施恩)을 버섯이 되어 갚았으니 비록 이치는 얻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행문(行門)은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많은 학인들은 이 두 가지 일을 다 잃어버리고 있구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라. 성품을 봄이 자세치 못하면 다만 곧 말을 따라 의통(依通)하는지라 점검할 때를 당해서는 정(正)과 조(助)를 한꺼번에 상실하고 마나니, 이러므로 선성(先聖)도 마침내 계급을 넘치지 않으시고 가슴을 어루만져 위로하셨거늘[道益高者意益卑]어찌 가히 쉽사리 생각하고 말겠는가. 그래서 육즉(六卽)르로 넘침을 간별(揀別)하시고 십지(十地)로 공덕을 판단한 것인데, 만일 모두가 곧 즉(卽)에서 본다면 어떤 것이 범(凡)이며 어떤 것이 성(聖)이 천격(天隔)이며, 또 만일 그 이치를 논한다면 초지(初地)에 이미 일체지(一切地)를 다 갖추었으나 그 행으로 말한다면 후지(後地)는 곧 전(前)보다 몇 배로 뛰어난 것이니, 이것은 곧 저 팔지(八地)에 올라서야 비로소 일념간에 중생을 이익케 할 수 있거니와 하지(下地)에서는 다겁에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