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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30-34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4월이 되자 날씨는 완연한 봄이 됐습니다. 산수유, 개나리, 목련, 그리고 벚꽃까지 그야말로 온천지가 꽃 대궐입니다. 불과 얼마 전만해도 얼어붙은 것 같던 대지가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잠자던 것들이 깨어난 것처럼, 그리고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계절이 부활절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치 이 계절의 대자연의 변화가 부활절의 영적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저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부활]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면 풀은 생기를 되찾아 움이 트고,
뿌리만 지탱하던 가로수 길의 잔디는 물론 돌 틈에서도
파란 싹들이 돋아나고,
자작나무나 포플러, 벚나무 등에도 부드럽고 향긋한 새 잎이 펼쳐지고,
보리수 역시 새 움을 터뜨린다.
새들은 봄을 맞아 즐겁게 둥지를 만들기 시작하고,
파리는 양지 바른 벽에서 윙윙거리고 있다.
풀도 나무도 새도 벌레도 아이들도 모두 즐거워 보였다.
톨스토이는 봄의 이 잠자던 것이 깨어나는 듯한,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듯한 역동적인 계절의 변화를 그림처럼 묘사하면서 이 소설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앞으로 풀어가려는 이 소설 이야기를, 봄철의 대자연의 변화를 통해 미리 비유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소설은 속물 같았던 주인공 네플류도프가 자기가 버린 여인 카추샤 때문에 인간성을 되찾는 이야기입니다. 죽은 듯 잠들어있던 이 사람의 참된 인간성이 되살아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문제투성이였던 러시아가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그런 소망을 담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톨스토이가 주님의 부활에서 이 이야기의 ‘모티브’(Motive)를 찾아냈다는 점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토대로 이 소설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 주인공 네플류도프가 부활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변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톨스토이는 봄기운이 대지에 스며들면서 대자연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이 한 심령에 그리고 한 공동체에 자리 잡게 될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봄은 톨스토이가 발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영감을 일깨워줍니다. 봄기운이 대지에 충만해 지면서 잠자던 개구리가 깨어나는 것처럼,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충만해 지게 되면 잠자던 심령이 깨어납니다. 봄이 얼어붙었던 대자연을 꽃 대궐로 바꾸어놓는 것처럼,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심령과 공동체를 새롭게 변화시켜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변화의 구체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주님을 따르던 두 제자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낙심하고 절망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변화되어 다시 사역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주님의 부활이 제자들을 회복시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부활이 이 두 제자를 어떻게 회복시켰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의 회복
우선 이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갈 때 어떤 상태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2-24절을 보면 이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 두 사람은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과 죽은 뒤 부활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주님의 빈 무덤을 보고, 천사로부터 전해들은 주님의 부활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비롯해 몇 사도들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 보니, 사실이었다는 증언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들은 그 말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제자는 믿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믿지 못했고, 여인들과 제자들의 증언도 믿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믿음이 크게 흔들렸던 것입니다.
사실 믿음을 변치 않고 잘 지켜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믿음은 사는 것이 바빠서 한 눈 팔다보면 희미해지고, 시험이 오면 흔들리고, 고난이 다가오면 잃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는 대단한 믿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기근이 닥치자,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갑니다. 믿음이 크게 흔들린 것입니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자기를 따르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세우고자 합니다. 또 믿음이 휘청거린 것입니다. 이러기를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다시 일으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연약합니다. 우리 힘으로 지켜가기가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흔들릴 때 붙잡아 주시고, 넘어질 때 일으켜주시고, 잃어버렸을 때 되찾게 해 주셔야 지켜갈 수 있습니다.
전설적인 미국 오페라가수 제시 노먼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변화를 위한 축하공연에 초대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 7만 이상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록밴드와 인기가수들의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오랜 동안의 광란의 도가니가 마무리 되는 마지막 무대에 노먼이 섰습니다. 한 동안 미동도 않고, 두 손을 모으고 서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다시 록밴드 나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잠시 후 반주도 없이 아카펠라로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노래는 뜻 밖에 찬송가였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장래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도록 조용해 졌습니다. 3절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잊고 있던 찬송을 따라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찬송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동안 스타디움을 떠나지 못하고 적막 속에서 침묵에 잠겨 있었습니다. 한 기자는 그날 그곳에 성령이 임하셨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 이 공연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다시 교회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되찾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회복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제자가 그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가 굳건한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믿음의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열정의 회복
본문 3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 이 두 사람이 그동안 체험한 것을 나누면서 했던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정이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더그 배니스터(Doug Banister)목사님이 쓴 [훌륭한 교회에서 위대한 교회로]라는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인트로렌스 강 아래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하트 아일랜드가 있다. 거의 1세기 전에 볼트라는 거부가 아내를 위해 그 섬을 구입한 뒤 그곳을 다듬어 하트 모양으로 꾸몄다.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섬이 하트 모양을 이루자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웅장한 성채를 짓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석재를, 유럽의 보물창고에서 온갖 예술품을 수입했다. 성탑과 첨탑이 세인트로렌스 강물 위로 웅장하게 솟아올랐다. 그 성체는 마치 라인 강줄기를 따라 늘어서 있는 성채들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볼트의 아내가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열정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인부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탈리아의 대리석과 스코틀랜드의 석재가 부둣가에 그대로 버려졌다. 성채를 짓는 공사는 중단되었다. 지금도 하트 아일랜드에 배를 정박한 뒤 볼트 씨가 반쯤 건축하다 중단한 성채의 쓸쓸한 복도를 거닐 수 있다.
그렇습니다. 볼트는 아내가 죽자 열정이 식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성채 짓는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성채에서 사는 꿈도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열정이 식자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제자가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열정이 식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던 그 열정이 식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가던 길을 계속 갈 수가 없었습니다. 쓸쓸히 돌아서서 낙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정이 식으면 하던 일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비전을 품고 꾸어오던 꿈도 사라져버립니다. 짓다가 만 성채처럼 우리의 인생이 그저 황폐해지고 쓸쓸해져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본문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 열정을 회복했습니다. 그들의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그들의 마음에 불을 붙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다 그 마음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 속에서 새로운 열정이 용솟음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람이 그랬습니다. 나이 75세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음에 불이 붙었습니다. 새로운 열정이 용솟음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이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부르심을 따라나섰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사람입니다. 바닷가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음에 불이 붙었습니다. 새로운 열정이 용솟음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배도 그물도 버리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여주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꺼져가는 마음의 불을 다시 타오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꺼져가는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어 활활 타오르게 하듯이, 우리의 식어가는 열정을 다시 타오르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여러분의 열정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사명의 회복
본문 3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 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 두 사람이 고향으로 낙향하던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사실을 깨닫고 마음에 열정이 회복되자, 바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당시 시간을 따져보겠습니다. 29절을 보면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주님께서 떠나신 뒤 자기들끼리 대화를 했습니다. 벌써 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거리를 따져보겠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11.2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입니다. 이 정도면 걸어서 세 시간 정도의 거리입니다.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입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너무 늦었고, 또 거리도 멀기 때문에 잠자고 다음날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마음이 급했습니다. 다시 자기들이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던 자리로 가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그래서 그 밤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자기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주님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사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사명을 다시 되찾게 됩니다. 그래서 사명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미국의 국립공원에 가보면 곳곳에 안내문이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이를 주다가 적발되면 벌금 100불을 내야 한다고 적혀있습니다. 왜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했습니다. 야생동물이 사람들이 주는 먹이에 길들여지면 야성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먹이활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게을러지고 사람이 먹이를 주지 않으면 굶어 죽습니다. 그래서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야성을 잃어버린 야생동물과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야생동물들이 스스로 먹이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사명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명을 알면서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예 이것이 사명이라는 것조차도 잊고 살고 있습니다.
한 번은 백만장자 부자가 아프리카를 여행하다가 그곳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남루한 차림에 삐쩍 마른 모습의 선교사가 땀을 흘리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어디를 가고 계십니까?” 선교사가 대답했습니다. “예, 저 고개 너머 나환자촌에 복음을 전하러 가고 있습니다.” 부자는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나 같으면 백만불을 준다고 해도 그런 곳에는 가지 않을 겁니다.” 선교사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물론 저도 그 정도 돈을 받고는 안 갑니다.” 부자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얼마를 받고 가는 겁니까?” 선교사가 목에 매달린 십자가를 꺼내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게 이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셨기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 잃어버렸던 사명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그 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사명을 회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사명, 전도의 사명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상도중앙교회 박봉수위임목사님 설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