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 麻谷寺
마곡사의 ' 麻谷 '
마곡(麻谷)이라는 절 이름에 대하여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泰華山麻谷寺史蹟立案)"에 의하면, 보철화상이 법을 얻어오자 사람들이 삼(麻)처럼 많이 모여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방에서 이 절로 법을 물으러 오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골(계곡)을 가득 메운 모습이 삼과 같아서 "마곡"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숭려 중에 보철이라는 인물이 없으며, 중국 조계(曺溪) 혜능(慧能.. 638~713))의 증손 제자인 마곡 보철 (麻谷 寶徹)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철이 우리나라에 왔다는 기록도 없으며 또한 신라 말에 성주산문을 개창한 낭혜화상 무염이 보철의 법을 받아오기는 하였지만 그 또한 마곡사와 연관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충청도 내포지역에서는 청양의 장곡사, 공주의 마곡사, 예산의 안곡사(현재는 소실되었음)을 삼곡사(三谷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긴골절"이나 "삼골절" 등의 우리 말이 "장곡사"나 "마곡사"같은한자어로 바뀌게 되었고, 그 이름이 마곡이다 보니 중국의 麻谷 寶徹이 연상되어 그 관계 속에서 창건주를 마곡 보철과 연관시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곡사의 배치는 사역(寺域) 중앙을 관통하는 계곡을 중심으로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영산전을 중심으로 하는 남원(南院)과 대광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북원(北院)이 그것이다. 남원은 수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곳이며, 북원은 교화를 중심으로 하는 곳이다.
심하게 꺾여 흐르는 마곡천으로 인하여 사역은 물이 꺾여 흐르는 안쪽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절로 들어가는입구도 마곡천이 심하게 꺾이는 곳을 지나 남쪽으로 더 내려 돌아가서 자리잡고 있다. 지형의 특성을 고려할 때 물에 의한 피해를 줄이고자 하는 배치와 그에 따른 진입동선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십승지 十勝地
십승지(十勝地)란 천지 대개벽이 일어날 때 재앙을 피하기에 좋은 10곳의 지역을 말한다. 정감록이나 격암유록에 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 인간은 끔찍한 질병과 굶주림, 추위와 더위, 공포에 시달리게 되고,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함으로서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십승지(十勝地)에 해당하는 지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끔찍한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으며, 자손이 끊기지 않고 보존될 것이라고하여, 재난을 피하는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십승지의 정확한 위치는 책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십승지를 언급한 책들로는 정감록, 남서고 비결, 남격암 산수 십승 보길지지, 감결, 징비록, 운기구책, 유산록 등 60여 종이 있다. 그러나 십승지에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십승지를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 흉년, 전염병, 전쟁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십승지는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통로가 대개 한 곳 밖에 없는데, 물이 빠져 나가는 곳으로 험한 계곡과 협곡으로 되어 있다. 십승지가 대부분 태백산, 소백산,덕유산, 가야산,지리산 등 산이 높고 험하여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어 있는 곳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십승지는 발전보다는 미래에 다가올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자손보존의 땅이다. 따라서 한때 난리를 피하기에는 좋은 곳일지 몰라도 여러 代를 살면서 번창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곳이다.
비결(秘訣)에 따르면 마곡사가 위치한 터는 예로부터 기근이나 병란의 염려가 없다는 십승지 중 하나에 해당하는 吉地이다. 또한 이곳은 풍경이 매우 뛰어나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 불리었어며, 많은 시인 묵객들의 찬탄을 받던 곳이었다.
남사고(南師古), 정감록의 비결(秘訣)
남사고(南師古)는 조선 명종 때의 학자이다. 보조선사(普照禪師)가 폐찰을 중건하라는 왕명을 받고 그 제자인 수우와 함께 명승을 돌아다니다, 이곳 마곡사터에 이르러 다리에 올라 춤을 추면서 "복지가 맑은 개울에 임해 있으니 금방울 소리가 소나무 사이에서 울린다 (福地臨淸澗 金鈴激松間)이라는 詩를 읊었다.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무교(舞橋)가 바로 이것이다.
그 후 범일대사와 도선대사가 다시 터를 잡았는데, 천만년 오래도록 절로 삼을 큰터이며, 삼재(三災)가 들지 못하는 곳이라 하였고, 유구와 마곡의 두 개울 사이는 1000명의 목숨을 살릴 곳이며, 만약 이곳을 집이나 묘로 몰래 쓰는 사람은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이러한 내용을 담은 문적들이 兵禍에 다 사라지고 없으니, 기근과 병화가 없다는 십승지는 무엇일까?
마곡사 가는 길
춘(春) 마곡, 추(秋) 갑사라는 말이 있듯이, 마곡사의 봄날은 눈부시다. 마곡사로 올라가는 입구부터 노란 유채꽃은 봄처녀의 흔들리는 마음과 같다. 일주문부터 극락교까지 산책길은 춘마곡(春麻谷)의 핵심이다.
마곡사 주변을 흐르는 상원골 계곡은 사찰을 감싼 모양이 태극모양이라 "태극천(太極川)"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절이 산 중에 있지만, 마곡사는 계곡 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원골 계곡에는 용암이 흐른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구름문양을 띈 바위가 자리 잡았다.그리하여 상원골이 있는 마을 이름은 구름바위가 있다 하여 운암리(雲岩里)이다. 조선 숙종 때 송상기는 "유 마곡사기"에서 " 절은 고갯마루 아래에 있고 10여 리 길가에 푸른 시냇물과 흰 바위가 있어 저절로 눈이 트였다"고 하며 仙景을 칭송하였다.
그냥 찾아도 좋은 마곡사 가는 길
마곡사는 다른 절과는 달리 매표소를 지나 한참을 걸어 들어가되 바로 오른쪽에 절을 두고도 줄곧 올라가야 한다. 펄쩍 건너뛰면 닿을 듯한 오른쪽 계곡 건너에 마곡사가 있으나, 물길을 따라 한참을걷고 다시 한번 다리를 건너야만 해탈문과 천왕문에 닿게 된다.
길을 걷다보면 아름드리 느티나무 사이로 일록달록 단청으로 치장된 전각들이 보이고 목탁 소리에 실린 염불소리가 들릴 수도 있다. 흐르는 물은말 할 것도 없고, 커다란 바위에 조차 빛이 가득하다. 마곡사 찾아가는 길은 그래서 좋다. 아무런 준비없이 털썩 해탈문을 지나고 천왕문을 지나는게 아니고, 돌아가고 건너가는 계곡길이 미리 마음을 열어주고 몸가짐을 챙겨 주니 그냥 찾으면 된다.
마곡사 계곡은 그냥 위에서 아래로 하염없이 물만 흐르기만 하는 그런 계곡이 아니다. 맑고 깨끗한 물에는 반질반질한 바위들이 도반처럼 발 담가 어깨동무한 채 물소리로 합창한다. 울퉁불퉁 못생겼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온 느티나무도 강강수월래를 하는 춤꾼들 처럼 울타리를 만들어 한 몫하고 있다.
덤비는 여인의 엉덩이
마곡사의 문화재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에만 해도 마곡사는 30여칸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현재 마곡사는 대웅보전이 보물 제801호, 대광보전이 보물 제802호, 영산전이 보물 제800호이고, 이밖에도 대웅보전 앞마당의 5층석탑이 보물 제799호, 범종이 지방유형문화재 제 62호, 괘불 1폭, 목패(목패), 세조가 타던 연(輦 ..가마), 청동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가 있으며, 감지금니묘법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제6권이 보물 제270호이며,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이 보물 제269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곡사 계곡은 태극 모양으로 휘돌아 나가는 형상으로 물길 양쪽으로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 계곡을 돌아 처음으로 맞게되는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게 되면 극락교를 건너게 된다. 극락교를 건너기 전 좌측으로 이런저런 전각들이 있고, 다리 건너 멀리 대광보전이 보인다.
주변의 형세가 이승과 극락을 절묘하게 갈라놓은 듯 하여 누구라도 쉽사리 그 다리의 이름이 극락교쯤 될 것이라고 짐작하게 되며, 그 다리가 극락교임을 알게되면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극락교 위쪽으로는 산 빛 가득 머금은 계곡 상류가 산 속으로 헤집고 들어가고 아래로는 수많은 잉어들이 유유자적 유영하고 있다. 여느 절 고인물에서 보아왔던 연못 속 잉어들과는 천양지차의 모습이다. 하기야 식수로 사용하여도 될 듯한 맑은 계곡 물에 살고 있으니 잉어에게는 이곳이 극락임이 틀림없다.
극락교 極樂橋
극락 極樂
극락은 불교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佛國土)를 가면 있다고 하는 이상향(이상향)으로, 참된 마음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믿고 염불하면 죽어서 극락에 태어난다고 한다.이를 극락왕생(極樂往生)이라고 한다.극락에는 아미타불이 살고 있으며, 어떤 번뇌와 괴로움도 없이 평안하고 청정한 상태이다. 선행의 정도에 따라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타화자재천으로 구분되며 극락에 들어간 사람의 머리에는 꽃이 자라는데,
이 꽃이 극락에서 남은 시간을 재는 역할을 한다. 극락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종료할 무렵이면 이꽃은 점점 시들게 된다. 이 꽃이 완전히 시들게 되면 다시 윤회하는데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 (부자집 자녀 또는 왕족이나 귀족)으로 윤회하게 된다.
해탈문과 천왕문 사이에는 5기의 부도가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다시 마곡천을 만나게 된다. 마곡천에는 새로 만든 극락교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면 북쪽의 산을 등진 넓은 평지가 있어, 北院의 마당을 이루고 있다.
마당의 뒷편을 가로막으며 북원의 중심 불전인 대광보전이 서있다. 그 앞마당에는 5층석탑이 있고, 동쪽으로 심검당, 서쪽으로 응진전이 위치하고 있다. 대광보전 뒤편 산비탈에는 대웅보전이 자리잡고 있는데,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지형의 경사를 이용해 중첩되어 있다. 그 모습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 볼 수없는 마곡사의 풍경을 자아낸다.
마곡사의 전설
마곡사는 신라시대 말기부터 고려시대 전기까지 약 200년 동안 폐사가 된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고 있었는데,1172년(명종 2)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게 되었다.
知訥이 절을 중창하려고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이 오히려 지눌을 해치려 하자 지눌은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신술(神術)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 도둑에게 달려들게 하자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지눌(知訥)은왕에게서 전답 200결(結)을 하사받아 마곡사를 중창하였다. 당시에는 건물 수가 지금의 배가 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 뒤 60년 동안 폐사된 채 방치되었다가 1651년(효종 2)에 각순(覺淳)이 대웅전과 영산전, 대적광전 등을 중수하였다.
일주문 一柱門
해탈문 解脫門
해탈(解脫)은 불교 수행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로서,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일주문 그리고 해탈문을 지나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라는 불교수행의 과정과 이상을 건물의 안배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설명해 주는 문이다.
마곡사 해탈문은 천왕문과 더불어 입구에 해당하는 문으로 천왕문보다 앞서 위치하고 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세속이 아닌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고 부르며, 내부에 금강역사상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금강문(金剛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해탈 解脫
해탈이란 "해방된다" 또는 자유로 된다"는것을 뜻하는데, 심신의 고뇌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 해탈에 대한 생각은 불교 이전부터 印度의 사상계에 보급되어 있었던 것으로 ,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궁극적인 이상 목표를 이 해탈에 두고 있다.이는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고뇌를 낳는 근본으로서의 무명(無明)을 멸함으로써 해탈의 도가 달성된다고 한다. 즉 無明은 지혜가 없는 것이며 그 지혜란 세계 인생의 진리로서의 연기의 도리를 여실하게 아는 작용이며,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은 如實하게는 知見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무명을 멸해서 모든 존재가 상의상대(相依相待)라고 하는 緣起의 관계에 있음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 고뇌의 속박을 벗어나 이상을 달성하는 길, 즉 해탈의 도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해탈의 도는 중도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의 수행이라고 한다. 이와같은 해탈은 불교에서는 이상으로서의 열반과 동일시되고 있다.
마곡사 해탈문은 도리통 3칸, 양통 2칸으로 어간을 개방하여 출입할 수 있도록 하여 山門의 정형적인 평면형을 이루고 있다. 개방된 어간을 제외한 나머지 벽을 모두 판벽으로 구성했음이 특이하며, 양 협간에는 금강역사와 함께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를 모셨다.
해탈문은 공포의 구성과 형태, 가구수법 등 전체적인 건축양식이 조선시대 후기 건축의 전형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려주고 있는 기록은 없고,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조선 헌종 12년(1846)에 승려 정순을 화주로 하여 중수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탈문 안에 "태화산마곡사해탈문중수기"가 있어 1910년에 중수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금강역사와 문수동자 및 보현동자는 모두 소조(塑造)이며, 문수와 보현동자는 각각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다. 금강역사는 장수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얼굴이 신체에 비해 큰 편이고 험상궂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으나, 조선 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니고 있다.
천왕문 天王門
마곡사 천왕문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 6월에 중수하였다는 명문이 편액에 적혀 있어, 해탈문의 중수 시기와 같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부분적인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건립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치마 맞배지붕이며, 지붕의 구조는 무고주 5량집이다. 내부 양 협칸에는 홍살로 칸을 막은 다음 사천왕을 안치하였다. 기단은 방형 치석을 외벌대로 만들었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원주를 세웠다.
명부전 冥府殿
마곡사 명부전은 원통전을 중심으로 하는 수행 영역인 南院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명부전의 성격상 교화영역에 포함되어야 할 건물이나, 이 건물을 지을 당시 교화 영역인 北院 영역에 마땅한 터가 없었는지 남원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명부전 주변으로 담장이 있는데, 원통전을 중심으로 하는 영역과는 별도로 담장 북쪽이 열려 있어서 명부전에 출입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명부전이 교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것으로 이 건물을 지을 당시 북원 영역에 마땅한 터가 없어서 이곳에 명부전을 지었던 것으로 보이는 근거이기도 하다.
명부전 冥府殿
관세음보살과 함께 중생 구제의 큰 원력으로 많은 대중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는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을 명부전 혹은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의 구세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데, 그 때문에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그 협시인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외에도 염라대왕을 위시한 지옥의 십왕상을 봉안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부처가 입멸한 후, 미륵보살이 출현할 때까지 육도윤회의 현실세계에서 중생들을 구제하도록 석가모니부처로부터 수기(授記)를 받았다고 한다. 흔히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대원본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지장보살 地藏普薩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보살이다.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뒤 未來佛인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도록 의뢰받은 보살이며, 관세음보살과 함께 가장 많이 신앙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옥에 몸소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 구제하는 지옥세계의 부처님으로 신앙되고 있다. 그는 부처가 없는 시대 즉, 석가모니불은 이미 입멸하고 미래불인 彌勒佛은 아직 출현하지않은 시대에 천상,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중생들을 교화하는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에게 "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성불(成佛)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중생이 모두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라"라고 다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지장보살을 모신전각을 지장전, 명부전 혹은 시왕전(十王殿)이라고 한다.
영산전 靈山殿
영산전 靈山殿
석가모니부처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한 연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 영산회도(靈山會圖)를 모시기 위하여 특별히 지은 전각이다. 영산회(靈山會)란 석가모니부처가 영취산(靈鷲山)이라는 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침을 베풀던 모임이다. 아라한(阿羅漢)은 모든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을만한 사람이란 뜻으로 석가모니부처의 제자들을 말한다.
세조 보연 世祖 寶輦
이곳 마곡사에는 世祖와 매월당 김시습의 불연(佛緣)같은 인연의 그림자가 있다. 生六臣의 하나인 金時習이 마곡사에 은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세조는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 마곡사로 행차하였다. 당시 매월당 김시습은 무주 덕유산 백련암에 십여 년 간 머물다가 이곳 마곡사에 와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김시습은 세조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마곡사를 떠나 부여 無量寺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조는 " 김시습이 나를 버리고 떠났으니, 연(輦 .. 가마)을 타고 갈 수 없다 " 하며 소를 타고 돌아갔다고 한다.세조는 떠나면서 마곡사에 인연의 흔적을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영산전(靈山殿)의 편액이다. 그 인연의 또 하나는 세조가 올 때 타고 온 세조연(世祖輦)이다.
매화당 梅花堂
영산전 앞마당 북쪽에 위치한 매화당은 스님들의 요사 겸 수행공간으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영산전앞마당을 등지고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앞마당에 면해 5칸 규모의 대방을 두었고, 그 앞쪽 영산전 앞마당 쪽에 툇마루를 두었다. 대방 북쪽으로는동쪽과 서쪽에 각각 익사를 두고 여기에 작은 방들을 배열하여 스님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부도 浮屠
해탈문과 천왕문 사이 梅花堂 일곽을 감싸고 있는 담장의 축대 아래에 5基의 부도가 있다. 그 중 2基는 部材가 소실된 상태이며, 중앙에 위치한 3基의 부도만이 비교적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모두 탑신이 타원형을 이루고 있는조선시대에 많이 조영되었던 부도의 형식이다.지붕은 모두 반곡된 처마를 지닌 모임지붕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2基는 간단한 지대석만 지니고 있고, 중앙의 1基만 지대석 위에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의 하대석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紅苑堂日禪之塔 그리고 比丘尼斗行之塔
중앙의 부도에는 탑신 정면에 세로로 긴 장방형으로 구획한 속에 "홍원당일선지탑(紅苑堂日禪之塔)"이라는 탑명이 새겨져 있고, 그 바로 북쪽의 부도에는 역시 장방형으로 구획한 속에 "비구니두행지탑(比丘尼斗行之塔)"이라고 쓴 탑명이 새겨져 있다. 이들 부도는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畵僧의 산실
이곳 마곡사는 뛰어난 화승(畵僧)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국 불교는 선종(禪宗)을 표방해왔기 때문에 범패, 회화, 조각 등 불교미술의 분야에서는 공백이 없지 않다. 신라시절만 해도 석양지(釋良志) 등 뛰어나 조각가의 이야기, 충담(忠談) 등 음유시인들에 대한 설화가 많다.그러나 고려 말엽에 이르면 이른바 풍류승들에 대한 기록이 격감한다. 다만 뛰어난 선승들이 한국의지성을 대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 음악, 미술 등 예술분야에서는 거의 그 맥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마곡사에는 근대의 불교 명화백이라고 할 수 있는 금호(錦湖), 보응(寶應), 일섭(日燮), 석정장(石鼎) 등이 잇따라 배출되었다. 마곡사 본당에 비로자나불이 안치되어 있다는 것은 이 절이 화엄종의 영향을 입었다는 증거이다. 즉 창건 당시에는 선종적 특징이 강했지만,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엄학 계통의 사찰로 성격이 바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때 화엄의 변상도 등에 재질있는 화승들이 출현하였고, 그 맥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범종각 梵鐘閣
마곡사 동종
전체 높이 107cm, 종신(鐘身)의 높이 80cm로 그리 크지 않은 종이다. 원래 심검당 툇마루에 있었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 鐘身에 " 순치십일년갑오춘충청도안흥지사자산안곡사대종조성(順治十一年甲午春忠淸道安興地獅子山安谷寺大鐘造成) "이라는 銘文이 있어, 조선 효종 5년에 지금은 폐사가 된 충청도 안곡사에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또한 종의 주조에는 보언, 법현, 민화, 조법 등의 주조장이 참여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鐘身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넓어지다 중간부터 수직으로 내려오는 한국 종의 전통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종신의 상부에는 두 줄로 격자무늬 띠를 두르고 , 각 격자 속에 원을 그린 다음 梵語를 새겼다. 범어 띠 아래 네 곳에 유곽을 두었다.
유곽은 종신의 형태에 따라 사다리꼴을 이루며, 속에 9개의 유두를 돋을새김하였다. 유곽 사이에는 상하로 두광을 지닌 보살상을 새겼다. 구연부에는 연꽃과 보상화를 섞은 덩굴무늬 띠를 돌렸다. 종을걸기 위한 용뉴는 두 마리의 용으로 이루어졌는데, 섬세한 조각으로 이루어 졌고, 음통은 없다.
마곡사와 김구선생
마곡사에는 백범 김구가 머물렀던 백범당이라는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는 김구가 해방 후 1946년 여러 동지들과 이곳을 찾아와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아직도 새파랗게 자라고 있다. 백범 김구는 마곡사를 떠난지 근 50년만에 마곡사를 찾아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柱聯) ..라는 원각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이 향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却來觀世間 돌아와 세상을 보니 猶如夢中事 모든일이 꿈만 같구나
김구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하고 살인범으로 낙인찍혀 인천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그곳을 탈옥하고,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다가 하은당이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백범일지에는 그의 출가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사제(師弟) 호덕삼(扈德三)이 머리털을 깎는 칼(削刀)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네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
지금도 마곡사에는 김구가 삭발하였던 바위가 있고, 지금은 마곡사와 공주시청이 이곳 삭발바위와 마곡천을 잇는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그곳에서 마곡천 절경을 굽어보는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또한 마곡사 생태농장에서 군왕대로 이어지는 "백범 솔바람 명상 길"을 두어 마곡사를 방문하는사람들이 1시간가량 산보하기 좋다.
백범 김구가 지냈던 백범당에는 백범 김구의 진영과 1946년 마곡사를 방문했을 때 마을사람들 및 일행들과 함께 찍은사진들이 걸려 있는데, 김구 뒤로는 왼쪽에는 완장을 찬 좌익이 서있고, 오른쪽에는 넥타이를 맨 우익이 서있다.
김구의 국모보수(國母報讐)사건
김구가 21세이던 1896년 2월 그는 청나라로 향하다가 단발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안주에서 귀환하던 중 황해도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물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같이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장연 출신이면서 경성말을 하고, 흰 두르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굳이 일본인이 조선사람으로 위장한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민비 살해 사건)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백범일지에는 그를 쓰치다라고 그 이름을 밝혔다).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고 살해하였다. 김구는 살인이유로 국모의 우너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석달 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이어 11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로 강도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高宗은 판결을 보류하였다.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과 명성황후에 대한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민심을 의식한 조선 법부는 고종황제가 전화로 인천감옥장에게 내린 형집행 보류지시를 근거로 사형 집행예정일 하루 전 날 형집행을 보류시켰다.
김구는 1898년 3월 동료 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중 이듬해인 1898년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이곳 공주 마곡사를 떠났다. 4월 부모와 상봉하여 방랑 중 5월 평양 영천암에서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하였다.
백범 솔바람 명상길
백범 김구가 머리 깎고 스님이 된 바위
대광보전 大光寶殿
마곡사 대광보전은 네모지게 다듬은 자연석을 가지런히 쌓아 한 단의 기단을 축조하고 그 위에 건립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현재 마곡사의 교화(敎化)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북원(北院) 영역의 중심건물로 앞쪽에 넓은 마당을 둔 뒤에 자리잡고 있다. 대광보전이라는 현판에 맞게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봉안하고 있다.
비로사나불 毘盧舍那佛
비로자나불은 어떤 실체를 가진 부처라기 보다는 진리 그 자체를 부처님으로 형상화한 이름이다. 그래서 법신불(法身佛)이라고도 한다. 법신불이란 말이 진리의 몸인 부처님이라는 의미이다. 진리를 세상의 사물에 비교하여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진리에 가까운 것이 있다면 빛이라 할 수 있다.
따뜻함으로 세상의 만물을 길러내고, 밝음으로 세상의 앞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비로사나불은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이라는 뜻인데, 佛智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의 본존불이다.무량겁해(無量劫海)에 공덕을 쌓아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대광명을 발하여 법게를 두루 비춘다고 한다.
마곡사 대광보전은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었다. 대광보전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해탈문, 천왕문과 일직선으로 놓여 있으며, 眞理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건물로,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없으나 불에 타버린 것을 1813년(조선 순조 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마곡사는 임진왜란 이후 이미 중창불사로 많은 전각을 지어 번성하던 정조 6년(1782)에 대법당(大法堂)을 비롯한 1,050여 칸이 소실되는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후 가장 먼저 대법당이 중건되는데, 이 대법당은 본존불을 봉안하는기능 외에 사찰 전체가 감당하여야 할 상당 부분의 예불의식을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양식이라고 하는데 밖으로 뻗쳐나온 부재의 끝이 날카로우며, 위에 연꽃봉우리를 장식하였다. 앞면 5칸에는 3짝씩 문을 달았는데, 문살은 꽃모양을 조각으로 장식하였고 가운데 칸 기둥 위로 용머리를 장식하였다.
자연석을 이용해 막돌허튼층 쌓기로 만든 기단은 나지막한 편으로 도리통 5칸의 긴 건물과 함께 수평선이 강조된 형상을 이루며, 넓은 마당 뒤편을 편안하게 막아주고 있다. 기단 중앙 전면에는 기단과 동일한 재질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길게 계단을 설치하였다.기단 윗면은 강화다짐으로 마감하였고, 기단과 계단은 근래에 들어와 개축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기단앞에는 오래된 掛佛臺 지주 하나가 짝을 잃은 상태로 남아 있는데, 상당 부분이 땅에 묻힌 채 노출된 키가 매우 낮다. 그 옆에는 새로 조성한 화강암 재질의 괘불대 지주 한 쌍이 서 있다.
대광보전 기둥을 비롯하여 일부 단청이 벗겨지기는 하였으나 대광보전은 건물 내외 전체에 단청을 하여 화려하게 장엄을 하였다. 특히 내부의 단청은 변색이 거의 없이 단청이 남아있고, 그 다양하고 화려하게 베푼 단청의 무늬는 남방화소라 불리는 마곡사의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이러한 전통은 특히 벽면 곳곳에 그려진 벽화에서 잘 나타난다. 일부 지워진 것도 있으나 외벽과 내부 벽 곳곳에는 사천왕과 16나한을 비롯한 인물화와 산수화 등 뛰어난 그림이 남아있다.
수월백의관음벽화 水月白衣觀音壁畵
순조로운 出産과 어린 아이의 생명을 보살펴 준다는 백의관음(白衣觀音) .. 관세음보살은 근기(根機)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바꾸어 나타는데, 흰 옷을 걸치고 있는 백의관음이 그 중 하나로 백의관음신앙은 고대 인도에서 발생하였다.
중국의 수월관음(水月觀音)이 형성되기 이전에 성립되었으나, 唐나라 말부터 수묵화의 발달과 선종의 융성에 따라 수월관음상에 흰 옷을 입힘으로써 두 신앙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이를 벽화나 탱화 등 불교미술로 표현한 것이 바로 "백의관음도"이다.
대광보전 내부 서측면 후불벽에 있는 백의관음도(위 사진)은 고주 사이에 한지를 여러 겹 겹쳐 발라 후불벽을 조성하여 일반 화폭에 그린 것처럼 섬세하게 그렸다. 그림 속 관음보살은 물결이 넘실거리는 해상 위의 기암괴석에 앉아 머리 위에서부터 아래로 백색의 장포(長袍)를 입고, 정면을 향해 반가좌를 한 모습이다.
頭光과 身光을 갖추었으며 상호(相好 ..얼굴)는 초승달 모양의 둥근 눈썹에 꼬리가 위로 올라간 가늘고 긴 눈, 두툼한 코에 작고 붉은 입술을 표현하였다. 양손은 반가좌한 오른쪽 다리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았고, 맨발인 상태의 왼쪽 발은 홍련의 청록색 연밥을 밟고 있다.
옷자락 사이로 빠져나온 긴 머리카락이 양쪽으로 3갈래씩 드리워져 있으며, 입상의 化佛이 표현된 보관을 쓰고 목에는 영락(瓔珞 .. 구슬 목걸이)으로 장식하였다. 옷자락의 주름을 비롯해 연꽃의 꽃잎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매우 섬세하게 그렸다.
또한 보살의 양쪽 반석 위에는 관음보살을 향해 합장 배례하는 남순동자(南巡童子)가, 화면 우측에 버들가지가 꽂힌 흑색의 淨甁이 좌측에 그려졌다. 배경을 이루는 부분은 모두 먹으로 표현한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암벽의 세밀한 단층과 명암표현에서부터 굽이치는물결과 포말, 우측 상단에 표현된 대나무잎 등 섬세한 묘사는 벽화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 하나의 백의관음도
마곡사 대광보전에는 또 하나의 백의관음도가 그려져 있다. 대광보전 외부 남측면이 그것이다. 외부 포벽에 그려진 백의관음은 天衣 자락을 휘날리며 맨발로 물결 위에 서있는 모습으로, 몸을 옆으로 기울여 화면 오른쪽에 합장해 있는 남순동자를 굽어보고 있다. 또 두 손은 앞으로 모았는데, 왼손에 정병(淨甁)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감로수가 쏟아지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南巡童子
남순동자(南巡童自)는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근거하여 관음보살의 오른쪽 아래에 합장하고 서 있다. 남순동자는 일찍이 문수보살의 안내를 받아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자 남방의 모든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고, 마침내 보현보살을 만나 십대원(十大願)을 들은 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佛道를 이룬다.
남순동자라는 이름은 南行하여 53명의 선지식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며,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관음전 (또는 원통전)에서 해상용왕과 함께 관음보살을 양 옆에서 협시한다. 그러나 이들은 조각상을 하지 않고 후불탱화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삿자리의 전설
대광보전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한편 마루 위에는 참나무로 만든 삿자리가 깔려있다 (지금은 그 위에 카펫을 깔아 놓았고..)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한 앉은뱅이가 마곡사에 찾아와 불구를 면하게 해달라고 비로자나불에게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정성을 다하여 삿자리를 짰다고 한다. 기도가 끝날 무렵 삿자리가 완성되었고, 앉은뱅이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 문을열고 걸어서 나갔다고 한다.
창살문
사찰의 창살문은 화려한 꽃살문이 아니더라도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게 하는 탓에 위대하다. 깊은 밤 창살문에 붙은 창호지 틈새로 은은한 달빛이라도 새어들면 세속의 욕망은 소리없이 사라질 것 같다.창살문 하나에도 이토록 깊은 무념무상의 경지가 숨어 있는 듯하다. 그 옛날 어느 목공의 섬세한 손끝 하나에도 지극한 불심과 예술혼이 숨어있다.
5층석탑 5層石塔
대광보전 앞마당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이 탑은, 고려말에 元나라를 통해 유입된 라마교 탑의 영향을 받은 청동제 상륜부를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 중에는 특이한 조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탑은 세계에서 3개밖에 남아있지 않은 귀중한 문화재이다.
보물 제 799호
기단부는 폭에 비하여 높이가 낮고, 1층 탑신부의 폭을 기단에 비해 약간 줄이기는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체감은 매우 적은 편이다. 체감이 적고 너비에 비해 고준한 비례, 세부적인 조각 형태 등은 이전의 석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석탑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기단부는 백제 분위기의 지방색을 보이고, 상륜부는 고려말 원나라와의 교류를 통한 새로운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삼국시대 이래 한국석탑의 전통과 백제적인지방색 그리고 원나라와의 교류 관계 등 고려시대 말기의 여러가지 새로운 경향 중의 한 특색을 보여주는 석탑이다.
임진왜란 때 석탑 안의 유물은 도난을 당하였으며, 1972년 해체 수리를 하면서 동제 향로(香爐)와 문고리가 발견된 바 있다. 탑의 전체 높이는 8.67m이고, 청석(靑石)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2층의 기단, 5층의 탑신 그리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상하 2층으로 지대석과 하대석 및 상대석으로 구성되었다. 너비에 비해 높이가 높고 체감은거의 없다. 이와 함께 여러 개의 돌을 쌓아올려 만든기단의 기본적인 조형은 백제계 석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지대석은 두 단으로 하단은 지하에 매몰되어 있으며, 상단은 단면을곡선형으로 하였고, 각 면에 2개씩의 안상(眼像)을 새겼다. 안상이 모습은 삼국시대에서 남북국시대 신라에 이르는 전형적인 형태를 벗어나 고려시대에 많이 볼 수 있는 복잡한 형태이다. 상하층 기단의 하대석과 갑석은 장대석으로 만들었고, 상층기단의 중대에는 모서리에 隅柱를 새겼는데, 단면이 반원형을 이루는 수직의 쇠사리를 두어 형태를 강조하였다. 상층기단과 갑석은 아래를 사절(斜切)함으로서 중대와의 연결을 부드럽게 하였다. 갑석 상부에는 두 단의 탑신괴임을두었다.
옥개의 상부에는 상륜부(上輪部)의 하부 평면에 맞추어 亞자형 형면 받침재를 두고, 그 위에 청동제 상륜을 올렸다. 상륜은 고려말 원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들어온 라마교의 탑 형식을 따른 것으로 우리나라 전통적인 석탑 형식에 라마탑이 上輪으로 결합된 것이다.
각층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한 개의 별석(別石)으로 이루어졌다. 각 층의 탑신석은 모두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새겼다. 1층과 2층 탑신은 모서리를 한 번 접었는데,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이다. 2층을 제외한 1층과 3층 이상의 탑신에는 우주 안쪽으로 상하좌우에 상하 인방과 벽선과 같은 방형 윤곽을 새겼다.
1층 탑신은 남측면에 문비(門扉)가 있음을 나타내는 자물쇠를 돋을새김하였는데, 자물쇠 빗장 중앙과 양단의 장식조각이 돋보인다. 2층 탑신은 네 면에 四方佛을 양각하였다.옥개석은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아래에 매우 낮게 두단의 옥개받침을 두었다. 3층 이상에서는 그나마 옥개받침을 더욱 간략하게 새겼다. 처마부는 전체가 완곡한 곡선을 이루도록 하였는데, 중앙부에 직선이 잇는 신라계 석탑과는 다른 모습이다.추녀마루를 돋을새김으로 강조하였고, 그 끝에 볼록한 부분을 두었다. 처마의 모서리와 추녀마루 끝에 장식조각을 베풀었는데,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모습이다. 옥개석의 추녀부 아래에는 작은 구멍 또는 철물이 박혀 있는데, 풍탁을 끼우기 위한 것으로 현재 5층 옥개에만 하나의 풍탁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석가모니불 괘불탱 .. 보물 제1260호
동제은입사향로 銅製銀入絲香爐
높이는 20.2cm이고,입지름이 19.5cm인 이 향로는 나팔 모양의 높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 입부분은 넓은 테가 있고, 테에는 8개의 구름무늬를 새겼다. 몸통 가운데에는 4곳에 圓을 만들고, 그 안에 범자를 새겨 넣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덩굴무늬로 채웠다.
몸통 맨 아래부분에는 굵은 선으로 연꽃잎을 새겼다. 나팔 모양의 받침대에는 윗부분에 구름과 엎어놓은 연꽃잎을 두었고, 아래에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몸통과 받침대는 따로따로 만들어 연결시킨 것으로, 연결 부위에는 작은 半圓 모양의 받침장식이 있다. 몸통 전체에는 무늬를 먼저 새기고, 무늬마다 은(銀)을 입혀 넣는 은입사(銀入絲) 방법을 사용하여 화려한 고려시대 향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고려 후기에 나타는 양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 불교 금속공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응진전 應眞殿
응진전은 대광보전 앞마당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응진전은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좌우에 가섭과 아난을 협시로 모시고, 주변에 16나한(羅漢)을 모신 건물로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한다.
공주태화산마곡사나한전중건기( 公州泰華山麻谷寺羅漢殿重建記 .. 철종 3년. 1852)에는 건물이 오래되어 퇴락함에 따라 중건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건축 양식과 이 기록으로 보아 응진전은 1846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羅漢殿(나한전)과 應眞殿(응진전)의 구별
나한전은 나한상(羅漢像)을 안치하는 사찰 당우의 하나로, 석가모니를 주불로하여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 가운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성자들을 봉안한다. 500나한상을 모신 오백나한전과 16나한상을 모신 응진전(應眞殿)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백 나한이 중생에게 福을 주고 소원을 성취해 준다고 믿어 많은 나한전이 생기게 되었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사의 오백나한전이 유명하다. 나한전에 봉안된 현존 나한상은 거의 조선시대 작품으로 다른 불상들과는 달리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표정도 해학적이면서 인간적인 정취를 자아내므로 친근감을 불러 일으킨다.
대웅보전 大雄寶殿
싸리나무 기둥의 전설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 염라대왕이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번이나 안아 보았느냐고 묻는단다. 그래서 안아 본 횟수에 따라 극락의 차원이 달라진다고 한다.
싸리나무 기둥 ?? 딴지 걸기
많은 사찰에서 싸리나무 기둥을 자랑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칡덩굴 기둥을 자랑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감탄과 더불어 의문을 갖게 된다. 전설의 아름다운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왜 이처럼 신령스러운 절에는 싸리나무 기둥이 많을까? 하는 의문과 과연이 싸리나무 기둥이 우리가 알고 있는 뒷산의 그 싸리나무가 맞을까?하는의문이다. 손가락 굵기의 싸리나무 밖에 본적이없는데 그 싸리나무가 얼마나 자랐으면 이처럼 큰 기둥이 되었을까?하는 의문말이다.
쌍향수로 유명한 송광사의 구유도 안내판에는 싸리나무로 되어 있는데, 조직 검사 결과 느티나무로 밝혀졌다고 한다. 물론 이곳 마곡사 대웅보전의 기둥도, 논산 쌍계사의 기둥도 모두 느티나무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옛 스님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해야 하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추론이 있을 수 있으나, 사리함(舍利函)을만드는 나무를 일러 사리(舍利)나무로 하였는데, 이것이 싸리나무로 변음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절을 많이 해야 하는 집이기 때문에 "절"이라고 불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절에서는 경배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절에서는 모든 것이 경배의 대상이 되는데, 그 중에 부처와 더불어 경배를 받고 있는 것이 사리이다.
이렇게 귀한 사리를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절 근처의 나무 중에서 귀한 나무를 골라 사리함을 만들고 그 사리를 보관하였던 것이다. 이때 사리함을 만든나무가 바로 느티나무이었다. 따라서 사리나무라고 하면 사리함을 만드는 느티나무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느티나무 기둥은 자연스럽게 사리나무 기둥으로 불려왔다는 추론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무리 커봐야 2~3cm 정도의 손가락 굵기 정도로 밖에 자라지 않는 싸리나무가 으름드리 기둥으로 자랐다고 느껴지는 데에서 오는 신비감이 더해져 사람들은 이 나무기둥을 더욱 싸리나무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어쨋거나 불가사의하게 여겼던 싸리나무 기둥이 느티나무 기둥으로 밝혀진 것은 안타깝지만 우리가 가져야 할 경건한 마음은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심해야 될 것은 우리 둘레에는 늘 가짜 싸리나무 기둥이 세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방 庫房
심검당 尋劒堂
심검당은 사찰에서 선실(禪室) 또는 강원(講院)으로 사용되는 건물에 많이 붙이는 이름이다.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심검당이라고 한다. 심검당의 검(劒)은 마지막 무명(無明)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의 혜명(慧明)을 증득(證得)하게 하는 취모리검(吹毛利劍)을 상징한다. 사찰 내에 적묵당(寂默堂)이 심검당과 함께 위치할 경우에는 적묵다은 선원으로, 심검당은 강원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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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규봉 ...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非山非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