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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와 환유
1990년대 이후 제유와 환유를 위주로 제작된 시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형식적인 민주화가 도입되고 사회 전체가 개량화되면서 환유적인 이분법이 힘을 읽었고, 나중에는 제유적인 공동체가 신자유주의를 내세운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의해 훼손되었다. 대신 은유적인 환상으로 간주되는 시들이 대량으로 제출되었다. 겉으로는 환상의 외양을 하고 있으되, 실제로는 은유적인 대상의 증식으로 표현의 영역을 넒힌 시들이다. 그런데 2010년대에는 비-은유의 영역 곧 제유와 환유와 알레고리가 다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듯하다. 정치가 퇴행하면서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따른 약육강식의 논리가 횡행하었으며, 대의정치가 훼손되면서 권력자·자본가 대對민중·무산자의 격차가 극심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용산과 세월호 사건에서 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무심하다는 것, 삶의 영역이 죽음이 영역과 접면하고 있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경험했다. 시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가 재도입되면서, 공동체를 직접 지시하는 알레고리, 공동체를 사유의 단위로 제시하는 제유, 공동체의 화법으로 말하는 환유가 새롭게 부상한 셈이다.
그런데 이 방식으로만 환유를 읽으며, 환유는 여전히 상투화된 시의 방법론이 도고 말 것이다. 비유는 본래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시인 특정한 비유를 쓴다는 것은 그 비유가 품은 세계 이해의 방식을 시인이 받아들였다는 뜻이며, 따라서 그 비유를 통해 드러나는 특별한 세계관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환유를 그 본래의 개념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확장해서 쓸 때가 되었다. 환유가 사회적인 문맥에서 파생된 경제적인 비유라는 것을 상기하자. 한 편의 시에서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문맥이 독해의 필수적인 요소로 전제된다면, 다시 말해서 ‘외적인 의미부여’가 해당 시의 주요한 독법이 된다면, 우리는 그러 시를 환유와 연관 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은유와 제유가 펼쳐놓은 수평적, 수직적 구도 아래서 환유가 출현한다고 말했다. 은유와 제유가 말들어내는 체계 곧 유비의 지평이야말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문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만들어진(곧 이 문맥을 통해서 외적인 의미가 부여되는)환유는 은유와 제유가 가진 생성적이거나 구조적인 힘을 온전히 보존한다. 우리는 관습적인 문맥을 품고 있으되, 상투성에서는 자유로운 환유를 발견할 수 있다. 최근의 시를 중심으로 이를 살펴보자.
내가 너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국 너의 바깥에 장롱처럼 버려질 것이라는 예감은
2인용 식탁처럼 물끄러미 불행해질 것이라는 예감은
모두 틀렸다
입안에 총구를 물고 방아쇠를 당겨 봐
바람 맛이 난다고 했다
하필 내가 가진 총 속에만 가득했던 총알을
너는 모르고 나는 알았다
너와 나의 단면에 대하여
생크림 케이크처럼 근사한 협화음을 감추었을 것이라는 믿음이
너에게는 없고 나에게는 있었다
누구의 생일인지 기억나지 않는 모호한 축하를
반씩 나누는 나의 샴, 나의 뒤통수, 나의 휠체어
살았다고 감동하는 모든 순간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모든 유감이여
생일상 아래 흔들거리는 왼발 오른발이여
내게 선물한 총과 갈과 너를
나는 끝까지 좋은 것이라 부르겠다
오늘은 나의 날이다.
―유계영, 「오늘은 나의 날」 전문
생일날 벌어지는 관습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 이중화된 발언들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나의 생일을 기억할까?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장롱처럼” 혹은 “2인용 식탁처럼” 버려질 텐데.(1연)다행히 너는 그날을 기억했고(2연), 그래서 생일 케이크를 들고 왔다. “총구”와 “방아쇠”는 생일 축하 노래일 것이다. 상대를 겨냥해서 입으로 무엇인가를 쏘고 있으니까. 그 다음에는 초를 끄기 위해 내가 “바람”을 분다.(3연)그러나 나는 총알을 숨기고 있고 너는 협화음에 대한 믿음이 없다.(4연)
이미 생일 축하 노래는 수백 번 불렀고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노래와 케이크는 나만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샴” 쌍둥이처럼 한 몸이라 여겼으나,(5연) 태어남에 대한 이 감동(생일 축하)은 죽지 않아서 유감스러운 것과 한 몸이다. “생일 축하합니다”라는 노래를 “왜 태어났니?”로 개사해서 부를 때처럼 초를 끄고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는 발을 떤다. 그만큼 진지하지 않은 거다.(6연) 노래가 총알이라면 케이크를 자르는 나이프는 “칼”이다. 그 모든 걸 좋은 것이라 부르겠다. “너”를 포함해서, “오늘은 나의 날”, 내 생일이기 때문이다.(7연) 생각해보면 “축하”(/추카/)와 “총구”와 “총칼”은 의미로도 소리로도 서로 닮았다. 축하하는 일과 가르는 일이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고 초를 끈 후에 케이크를 반으로, 네 등분으로, 여덟 등분으로 토막이 난다. “모호한 축하를/반씩 나누는 나의 샴”처럼 . 축하 속에 이별이 , 삶 속에 죽음이, 박수 속에 총칼이 들어 있었던 셈이다. 이 시의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은유지만, 그 은유들을 떠받치는 것은 환유적인 관습이다. “총과 칼”을 노래와 케이크 커팅용 갈이라고 본다면 은유겠지만, 그것들이 케이크에 부대된 것들로 케이크라는 선물을 지시한다면 환유로 간주될 수도 있는 것이다. 환유가 가진 상투성이 은유와 결합하면서 새롭게 개신改新되었다고 하겠다.
나 거기 내 눈과 귀를 두고 왔네
내가 두고 온 눈이 바라를 보고
내가 두고 온 귀가 파도를 듣고 있다니
그것들은 아직 내게 매달려 있는데
나는 거의 그날 해변가에 서 있던 펜션이 되어가네
지금은 새벽이고
그토록 가시적이고 전면적이 해무라니
수평선 너머 어디 불이라도 난 줄 알았어
바다가 자신을 공중으로 띄워 올려 바람에 날려 보낸 것들이
말 그대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
그날
양양의 하조대
바위위에 붙어있던
수령 200년 된 소나무 한 구루
파도 소린 저녁부터 들려왔고
새벽에도 들려왔고
아침에도 들려왔네
자꾸 뭘 두고 온 것만 같았는데
두고 오길 잘했지
핸드폰 충전기는 안 들고 가길 잘했네
핸드폰이 꺼지자 며칠째 바다와 너와 나…… 그리고 파도 소리만이 남았지
나는 이곳에 다른 남자와 온 적이 있지만
이제는 우리 둘이 이곳에 온 적도 있게 된다
1층이었던 우리는
잠시 2층이 되었다가
붕괴되는 건물처럼
다시1층으로 나란해졌고
네 엉덩이에 치던 물결도 모두 멎었지만
기억은 엉덩이 같군
엉덩이라면 누구의 엉덩이라도 푹신할 것이다
첩첩산중 속
하나의 기억
몇 개의 연합된 기억처럼
그 안으로 쑥, 빠져나올 것이다
손으로 갈기면 철썩철썩 소리를 내고
붉은 손자국을 가질 것이다
강원도의 첩첩산중 끝에서 만나 철대수평
첩첩산중은 참 좋은 말이야
중첩될수록 더욱 깊어지고
고요해지고 있었으므로
첩첩산중으로 기어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네가 내 어깨에 고개를 얹을 때마다
거기 놓이는 건 삶의 무게였고
삶이 널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네가 두고 온 눈과 귀가 삶의 무게로 흔들리고
네 눈과 귀가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삶의 무게로 바다는 흔들리겠지
첩첩산중에서 기어 나올 때 차창 밖 어두운 산맥이 하늘로 높이
치켜든 엉덩이가 하릴없이 내뱉던 하품
구멍 주변에 난 털을 하염없이 쓰다듬어주는 기분으로
하나는 또 하나로 이어지고
어차피 다 들고 올 수도 없는 거
두고 오길 잘했지
들고 온 것도 마저 여기 두고
다시 더 많은 걸 두러 가야만 하고
더 많은 곳에 더 많은 걸 두고온다 보면
결국 모든 걸 두고 가야 할 때가 오는 거겠지
그러니 너무 아끼지 마
나를
빈 나뭇가지 위에서 놀다 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해
―황유원, 「첩첩산중」 전문
어떤 꾸밈도 없이 지나간 사랑을 노래하는 이 처연한 시에서, 나는 “해변가에 서있던 펜션”이 되었다가, “바위 위에 붙어 있던/수령 200년 된 소나무”가 되었다가, 끝내 “너”와 함께 “붕괴되는 건물”이 된다. 이 은유(사람은 집이거나 나무다)를 지탱하는 것을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집짓기’다. 우리는 “1층”이었다가, “잠시 2층이 되었다가” “붕괴되는 건물처럼 /다시 1층으로 나란”해졌다. 체위를 암시하는 이 관용어 덕택에 우리는 단순한 집이 아니라 서로 포개진 하나의 집이었다가 떨어져 나온(=붕괴한) 집의 한 층 한 층이 된다. 육체적인 사랑의 끝에 둘의 헤어짐이 있었는데. 실은 이곳에 우리는 각자의 전 애인을 데리고 온 적이 있다. 우리의 만남 역시 저런 세속화된 수많은 이합집산이나 회자정리의 일부였다는 얘기다. 이제 “첩첩산중”은 엎드린 엉덩이가 되고, “연합된 기억”은 뒤섞인 몸과 마음을 각각 품고, “철썩철썩” 소리는 내는 “붉은 손자국”은 파도였다가 사랑의 동작이 되고, “첩첩산중 끝에서 만난 절대수평”은 동해의 수평선이었다가 떨어져 나온 두 사람이었다가 헤어진 두 마음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은유들을 떠받치는 것은 한 몸(=2층)이 되었다가 두 몸(=무너진 1층)이 되는 이상한 산수다. 이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집 한 채가 한 사람이거나(사람은 집이다), 한 층이 한 사람이라면(2층은 포개진 두 사람이다)은유가 되지만, 우리는 각자가 한 집이었다가 무너진 각 층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집은 한 사람이자 두 사람인 셈이다(과거의 사람들을 포함하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한 사람을 집으로 표현하는 것은 은유다. 1층이나 2층을 겹쳐 누운 두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은유다(이때 집은 연인의 은유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한 층으로 집 전체를 혹은 한 사람으로 연인 두 사람을 대신하면 제유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둘의 엮임에서 환유가 생긴다.
집 ⊃ 1층 + 2층 + 3층 + ……
∥ ∥ ∥ ∥
연인 ⊃ 나 + 너 + 옛 애인 + ……
이 책의 각주 11을 다시 상기하자. 떨어져 나온 나는 한 층이었다가(은유)홀로 남은 집 한 채가 되었다(환유). 나와 너(연인)는 집 한 채였다가(은유), 2층이 되었다(환유). 이처럼 환유는 은유와 제유가 결합된 지평(이를 유비라고 부른다)이 전제된 후에, 이 유비의 지평을 외적인 문맥이나 배경으로 삼아서 비스듬히 출현한다.(‘나→집’ 혹은 ‘연인(나와 너)→2층)
안개에 빠져죽은 여자
그 시신을 건져 올리기 위해
전 세계 포클레인 기사들이 출동했다
기자들은 신이 나서 카메라를 들이댔다
여자의 머리카락 사이에선
30년 동안 자라고 있던 칼이 발견됐다
사람들은 그녀의 머릿속 근사한 어둠을
서로 뽑아 갖겠다고 아우성이었고
안개에 빠져 죽은 여자
죽은 후에도 나를 벗겨먹는군!
머리통을 통째로 뽑아 던졌다
개들이 달려가 물어뜯었다
목 위가 허전해진 여자,
점선으로 그려진 얼굴을 달고
비로소 잠이 들었다
―박연준, 「매스미디어―부드러운 살인」 전문
마릴린 먼로를 염두에 둔 시로 보인다(그렇다면 이 시의 기본적인 틀은 알레고리가 될 것이다). “안개에 빠져죽은 여자”는 사인死因이 미궁에 빠진 여자다. 여자는 죽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죽음이 원인을 두고 소문(=안개)만 무성했던 모양이다. “포클레인 기사들”은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다. 약물 중독이라며? 아냐, 살해당한 거래. 워낙 유력자들과 많이 사귀었잖아. 근데 왜 누드로 발견되었대? 하하, 죽어서도 섹시했겠군 이런 식의 말들이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고 또 파헤쳤을 것이다. 그러나 “30년 동안” 머릿속에서 자라던 칼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칼이야말로 여자가 건네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죽은 여자는 안개 혹은 “어둠”을 헤집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머리통”을 뽑아서 던진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여자는 여전히 내면이나 본심이 아니라 얼굴로 대표되는 존재였던 까닭이다. 어쩌면 그녀의 몸 전체가 그런 미디어의 눈이 보기에는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잘라서 던졌으니 “개들”(아까 그 기자들이다)이 달려들었고, 여자는 그 없는 얼굴로 드디어 잠을 잤다. 얼굴로 표현되는 정체성을 잃고 나자 그녀는 비로소 편안해졌다. 대중에게 노출된 표면이 그녀의 진짜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어들은 대개 은유적으로 명명(전체적으로는 알레고리적으로 지시)될 수 있다. “포클레인, 칼, 안개, 개, 점선” 등이 모두 명확한 대상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 머리통으로 그녀를 대표한다면 이것은 (신체이 일부로 사람 전체를 대신하는)제유다. 이 둘의 결합에서 특별한 환유가 생겨난다. 옜다, 여기 머리통이 있다. 이렇게 머리를 던지고 났더니, 그녀는 머리가 없는 채로(“점선으로 그려진 얼굴을 달고”)편안해졌다. 그녀를 대표하는 것은 그 없는 머리 혹은 머리 없는 몸이다. 제유로서는 이렇다.
그 여자 ⊃ 얼굴(머리) + 몸 + ……
은유로서는 이렇다.
안개=사인이 밝혀지지 않음
굴착=그녀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기사를 써댐
개=마구 물어뜯는 호사가(혹은 기자)들
제유와 은유가 결합되어 특별한 문맥이 생겨나면서, 그녀는 저 안개(=얼굴 없음) 속에서 혹은 머리 없음(=얼굴이 안개에 쌓임)의 상태에 놓인 다음에야 비로소 편안해졌다. 여기에는 내면으로 제 존재를 보장받지 못하는 이 시대 여성의 운명이 아로새겨져 있다. 이 얼굴 없음이야말로 이 시의 사회적, 역사적 문맥이 만들어낸 환유다.
당신이 툭, 깨뜨리기 전에
난 이미 깨질 만큼 깨졌다.
껍데기 안에 멍든 살이 고여 있지만
난 감각이 빠르다.
당신이 나를 지목하기 전에
내가 이미 당신의 손가락은 타고 흘러내렸다
번들번들 때에 찌든 미끄럼틀.
당신이 이리저리 퍼뜨리기 전에
난 이미 퍼질 만큼 퍼졌다.
껍데기를 빼앗기고 바닥에 감염되었지만
난 용서가 빠르다.
허기진 새벽 프라이팬을 꺼내놓고 부산을 떨더니
기념품 가게를 지나 드라마 촬영장을 기웃, 새로 산 접시에 눈물을 촛농처럼 쏟고
계절의 네거리에 겨우 당도하지만
아래로 굳은 손가락,
너는 포크로 진호하지 못한 시간의 갈팡질팡.
휴지통에 버려진 상반신과 하반신을 용접하고
난 변신이 빠르다.
진짜 내 몸을 껍. 데. 기. 털갈이를 하듯
비워낸 내장을 새로 끼우기 위해
당신이 잘근잘근 씹기 전에
난 이미 씹을 만큼 씹었다.
땡볕에 익은 반숙의 살덩이를
개랑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두 개의 혀.
당신이 지글지글 지지기 전에
내가 먼저 지질만큼 지졌다. 짖을 만큼 짖었다.
―이민하, 「개랑 푸라이」 전문
이 시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틀은 소리 은유다. ‘계란 프라이=개랑 프라이.’ 시는 이 두 가지 문맥을 오가며 관계의 잔혹성을 시화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계란 프라이를 하는 과정이 있다. 한 사람이 계란을 지목하고 톡, 깨뜨렸다. 계란은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흘렀는데 알고 보니 상한 계란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비유된 당신과 내가 있다. 당신은 나를 지목하고 나를 깨뜨렸다. 난 멍이 들었고 당신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내가 퍼진 것(노른자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터진 것)은 반드시 당신 탓만은 아니다. 나는 껍데기(당신에게 나는 해제되었다)를 잃고 더러워졌지만 그건 용서할 수 있다.(1~5연)그 다음은 당신과의 만남이 하루 동안의 일로 개괄된다. 처음에는 계란 프라이처럼 엉기고 기념일도 챙기더니(“기념품 가게”)결국 드라마를 찍고 눈물도 흘렸다. 이제는 네거리, 헤어지기 좋은 곳이다.(6연)그 다음의 후일담은 씁쓸하다. 버려진 나는 껍데기를 회복했다. 진짜 낸 몸은 껍데기다 계란 프라이를 하듯 나를 털어버렸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이 나를 씹기 전에 나도 씹었다. 우리는 “개랑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두 개의 혀”를 가졌다. 상대를 욕하고 씹어댔다는 얘기다. 이 얘기는 개랑 프라이를 해먹은 체험이기도 하고 그런 잘못된 만남 이후에 자유로워진(‘fre’는 독일어로 ‘자유로운’이라는 뜻이다)상태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당신이 나를 지지듯 나 역시 짖어댄 적이 있다.
당신은 개 같았다. 하는 짓이 그랬다. 나를 지져댔으니까. 나도 개 같았다. 개랑 프라이를 부쳐 먹느라 깨지고 흐르고 멍들고 짖었으니까. 이 은유(너도 나도 개다)가 ‘계란 프라이’라는 또다른 은유와 얽힌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탐닉하거나 고문하는 관계의 엇갈림 속에 놓인다. 나를 지지하는 프라이팬은 관계의 깨짐(계란 프라이는 이렇게 깨져야만 가능한 요리다)을 통해 자유의 터전이 된다. 따라서 프라이팬은 이중 삼중의 은유(너랑 나는 개이고, 우리는 프라이를 해먹고, 서로를 망가뜨린 후에 자유로웠다) 덕분에 생겨난 환유(너와 나의 삶의 터전)가 된다. 그리고 이 환유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서로를 괴롭히는 상투적인 연인을 그 무대에 올린다.
보은 공단 공휴지 한 켠에
녹슬고 고장난 채
비를 맞고 서 있는 기계를 보았네
아니, 자네 왜 거지 못을 입고 여기 있나
한때, 쇠를 씹어먹고
이빨로 철판을 철컥 철컥 자르던
노동의 왕자 아니었나?
기계와 나는 가까운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네
우리는 웃고 마시고 노래도 불렀지
기계는 소리쳤네
두고 보게나
앞으로 기계들이 세상인 미래가 오면 이래가 오면……
정말 미래는 어떻게 다가올까
아마 미래의 그때에도
모닥불 앞에
추운 기계들이 두러앉아
저처럼 이영의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그러니 기계여,
너무 멀리서 미래를 기다리지 말게
벌써 기계와 키스하고
기계끼리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내가 아는 좋은 2차 술집이 있다네
―송찬호, 「왕자와 거지」 전문
공단 한쪽 구석 공휴지에 “녹슬고 고장 난” 기계가 하나 버려져 있었다. 그는 한때 “노동의 왕자”였으나 지금은 “거지” 신세다. 1~2연에서 왕년의 기계는 왕자로, 지금 기계는 거지로 평행이동하였다. 따라서 이 시의 착상에는 활유가 있다(활유는 무생물을 생물에 빗대는 것으로 은유의 일종이다). 그런데 3~4연에 이르면 이 기계는 버림받은 노동자로 전환된다. 두고 봐, 언젠가 우리들 세상이 오면…… 그는 술상 앞 혁명가이자 노동 시장에서 퇴출된 잉여 인력이다. 여기에 오면 “기계”는 그 기계를 조작하여 일을 하던 노동자가 되며, 이로써 생산수단(기계)를 조작하여 일을 하던 노동자가 되며, 이로써 생상수단(기계)으로 생산자(노동자)를 대신하는 환유가 된다. 따라서 5연의 마지막 청유(“너무 멀리서 미래를 기다리지 말게”)는 인간과 기계의 이종교배를 예언하는 묵시록이 아니라, 버림받은 노동자도 인간으로 대우하는 따뜻한 세상에 대한 소망이 된다. “왕자=가동 중인 기계=전성기 노동자”, “거지=고장 난 기계=은퇴 노동자”라는 은유적 체계와 “공장⊃기계”, “시장⊃노동자”라는 제유적 체계의 결합에서 기계→노동자라는 환유가 출현한 셈이다.
가면은 쓴 아이가 뛰었지
아니 어른인지도 모르고
사람이 아닌지도 몰라.
눈 코 입은 있나?
나는 아직 당신의 이목구비를 말투를 걷는 모습을
좋아한다고 믿는다
당신의 오장 육부를
당신의 기생충을
당신의 악몽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위치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다다다 달리는 아이의 두 발 사이 같은 것
발가락들의 방향 같은 것
거리에서 툭 튀어나오는 혼잣말처럼
정확한 것
당신은 나를 뒤집어쓴 것이 아니다.
울고 있는 인형이 아니다.
웃고 있는 악령이 아니다.
아이가 뛰어가다가 문득
정지했지
이쪽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얼굴을 벗었어.
아주 깊고 오래된
가면을 쓴 아이가
―이장옥, 「가면을 쓴 아이가」 전문
한 아이가 가면을 쓰고 뛰어간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으므로 그 아이가 누군지 알 수 없다. 어른일 수도 있고, 눈 코 입이 없을 수도 있고,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1연)우리가 누군가를 알아보는 건 대개 “이목구비” 때문이고, 드물게 “말투”나 “걷는 모습” 때문이다. 당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이를테면 ‘오장육부, 기생충, 악몽’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올바로 알고 있는 것인가?(2연)“달리는 아이의 두 발 사이”, “발가락들의 방향”, “혼잣말”, 이런 것들만이 정확하다. 알 수 없는 것들이 거기에 있고, 그것들만이 아이의 실재를, 당신의 내면을 담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바로 그것만이 정확하다.(3연)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생각한다고 해도 “당신은 나를 뒤집어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겨울 가면과 같은 껍질로 대표되는 인형이거나 그 속에서 형체 없이 웃고 있는 악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하자면 그 사이에, 가면과 얼굴 사이에 있다.(4연)마침내 아이가 “얼굴”을 벗는다. 가장 오래된 “가면”을.(5연)
이 시에서 아이의 ‘얼굴’은 그 아이를 대표하는 제유이고, 가면은 그 얼굴의 비본질적이거나 한갓 외면적인 모습을 재현한 은유다. 그런데 1연에서 아이는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5연에서는 가면이 아니라 얼굴을 벗는다. 결국 1연의 은유(얼굴도 가면의 일종이다. 얼굴=가면)와 제유(아이⊃아이의 얼굴)라는 이중적인 다리(유비체계)를 거쳐서 성립되었다. 다음 시에서는 은유와 환유가 만난다.
니코틴 때문이 아닐지 몰라
내가 재떨이를 해집는 이유
뜨겁던 몸들
퀴퀴하다
생살에 비벼 끄던
간절한 말들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인다
입술까지 닿는 꽁초의
뜨거움
―허은실, 「마흔」 전문
내가 꽁초를 찾는 이유는 니코틴 중독 때문이 아니다. 꽁초에서 동병상련의 내 자신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마흔이 되었고, 한 때 뜨겁던 청춘의 몸은 이제 식어서 퀴퀴해졌으며, 생살을 지지는 것처럼 아프고 간절한 말들은 이제 눌러 끈 꽁초처럼 아픈 흔적으로만 남았다. 그래도 마흔은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일 수 있는 나이, 마지막 뜨거움을 발산할 수 있는 나이다. 저 꽁초에 남은 여분의 담뱃잎들이 그렇듯, 이 시에서 꽁초는 마음의 나를 은유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피우는 담배로 나를 비유하고 있으니, 이 은유는 나와 인접한 사물이 나를 대신하는 환유이기도 하다.
1974년 6월 5일 不見.
1974년 6월 8일 不見.
1974년 6월 9일 不見.
1974년 6월 11일 不見.
1974년 6월 15일 不見.
1974년 6월 18일 不見.
1974년 6월 22일 不見.
포경선의 어둠을 이렇게 기록한 이가 있다
한 줄의 기록에 막막하게 펼쳐진
수평선과 안개
1974년 6월 24일 밍크 3구 드디어 발견.
한 줄의 기록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비린내와 핏물
不見과 發見 사이에 닻을 내린
어선의 불빛으로 밤바다는 더 깊어지고
항구로 오래 돌아가지 못한 이의
낡은 남방이 벽에 걸려 있다
빛바랜 항해일지에는
見자의 마지막 획이 길게 들려 있다
―나희덕, 「불견 不見과 발견 發見 사이」 전문
등장인물은 아무도등장하지 않으나, 이미 한 사연이 시에 가득하다. 1연을 가득 채우는 “不見”의 기록은 외로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1974년 6월 5일에서 22일까지, 그렇게 외로움이 “막막하게 펼쳐”졌다. 마침내 6월 24일, 고래를 발견했다. “見자의 마지막 획이 길게 들려 있다.” 저 들림은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른 고래의 동선이자. 그 고래를 발견했을 사내의 심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한 줄의 기록” 너머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포획의 기록도 없고 만선의 기쁨도 없으며, 심지어 놓쳐버린 아쉬움마저 없다. 사내가 “항구로 돌아가지 못한 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선 여러 “不見”과 한 줄의 “發見” 뒤에는 적을 수 없던 글자, ‘불귀不歸가 있었을 것이다. 이 시에서 “낡은 남방”은 불귀의 객이 된 사내의 부재 부재를 증명하는 환유(소유물로 소유자를 증명하는 환유)이며, “빛바랜 항해일지”는 그 사내의 행적 혹은 알리바이를 증언하는 환유다.
당신을 바라보는 마음이, 내 옛 첫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알을 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복사꽃 그늘에서 바다로 걸어 내려간 일이거나
흐려진 바다 상회들의 거리를 배회하며
노가리 코다리 명태 동태 황태 북어로 따로 이름 불리며
뜯기거나, 얼리거나, 바람에 실리거나,
얼어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일이거나,
가끔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일만큼이나
횟집 수족관 유리에 비치는 것이었는데
당신이 아는 사랑을 나에게만 얘기해 주길
나는 속앓이도 접고 바랐었는데
오늘은 첫 마음 같은 이름 그대로 남고 싶어
불러보는 명태
―성윤석, 「명태」 전문
당신을 바라보는 마음이 “내 옛 첫 마음”일 때가, 이를테면 “명태”와 같은 때가 있었다. 그 사이 세월은 흘려 복사꽃은 지고, 마음은 뜯기고 얼고 바람에 날리고 바닥에 내팽개쳐져서, 마침내 당신은 나를 “횟집 수족관 유리” 너머로 보듯 쳐다보고, 나는 “속앓이도 접고” 당신이 내게 솔직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는데, 그래도 그 첫 마음 같은 이름은 남거나 남기고 싶어서, 이제 나는 나지막이 불러보는 것이다. 명태라는 이름을.
이 시를 끌고 가는 비유는 당연히 은유다. 당신을 향한 나의 모든 마음은 명태를 부르는 수많은 이칭異稱들에 대응한다. 첫 마음은 명태, 뜯겨나간 마음은 노가리, 얼어붙은 마음은 동태, 얼어 바닥에 내팽개쳐진 마음은 황태, 그러다 바짝 마른 마음은 북어…… 이렇게 일대일로 대응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물고기의 이름을 통칭하는 이름이 명태다. 그러니까 “명태”는 나의 “첫 마음”을 일컫는 이름이면서, 내 모든 마음이 상태를 통칭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명태(A) ⊃ 명태(Aa) + 노가리(Ab) + 동태(Ac) + 황태(Ad) + 북어(Ae) + ……
나의 마음(B) ⊃ 첫사랑(Ba) + 다친 마음(Bb) + 얼어붙은 마음(Bc) + 얼었다가 얻어맞음(Bd) + 말라붙은 마음(Be) + ……
명태(A)는 다름 모든 이름들, 곧 명태(Aa)와 노가리(Ab)와 동태(Ac)와 황태(Ad)와 북어(Ae)……를 통칭하는 제유이며, 나의 마음(B) 역시 첫사랑의 마음(Ba)에서 말라붙은 마음(Be)……까지 여러 마음을 전부 거느린 제유적인 이름이다. 두 체계사이에 은유적인 명명이 생겨난다. 명태란 총칭(A)은 내 마음(B)이고, 다른 이름과 구별되어 불리는 명태(Aa) 첫사랑을 대표하는 마음(Ba)이며, 노가리(Ab)는 얻어 맞아서 다친 마음(Bb)이고 동태(Ac)는 얼어붙은 마음(Bc)이다…… 이렇게 은유도 계속된다. 환유가 은유아 제유의 결합에서, 다시 말해서 은유를 이루는 두 체계(A와 B) 사이에서 한쪽의 제유적인 유개념(A 혹은 B)과 다른 족의 제유적인 종개념(Ba 혹은 Aa) 사이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제 저 모든 읾을 통칭하는 물고기 이름으로서의 명태(A)는 내 첫 마음(Ba)을, 저 여러 이름 가운데 특별한 이름 명태(Aa)는 내 모든 마음(B)을 대표하는 환유가 된다.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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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름 모를
사람이 없네
뉘신지 당신이
당최 궁금치 않네
이름 모를 거리가 없네
어디에서건 그곳이
대강 어딘지, 무슨 동洞인지
절로 알만큼 한 도시에
오래도 살았기에
맹랑하지도 허무하지도
간질간질하지도 않은
하루, 또 하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흘러간 가요
‘버들잎 따다가 쓸쓸히 바라보는’
가슴 저미네
알 수 없는 것 투성이고
매사 서툴렀던
흘러가버린 시절
아뜩히 밀려 오네
―황인숙, 「이름 모를 소녀」 전문
지금 나에게는 “이름 모를/사람”도 “이름 모를/거리”도 없다.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아는 곳만 갈 뿐이다. 젊었을 적에는 그러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것투성이고/매사 서툴렀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아는 게 많아져서 모든 게 익숙해지자, “맹랑하지도 허무하지도/간질간질하지도 않은” 그래서 그날이 그날인 지루하고 권태로운 맹탕의 날들이 내게 도래했다. 처음에는 ‘앎(현재)/무지(과거)’의 대립이었던 것이 ‘더 이상 알고 싶은 게 없음=권태(현재)/모든 것이 궁금했음=호기심(과거)’의 대립으로 전환된 셈이다. ‘이름 모를 소녀’는 “흘러간 가요” 제목이다. 그 노래 속의 소녀가 무명無名이라는 것은 내 간절한 호기심의 대상이라는 뜻일텐네, 이제 내게는 그 호기심이 증발해버렸다. 이로써 흘러간 옛노래 하나가 젊었던 시절 전부를 상기하는 환유가 되었다. 노래는 한 시절을 증언할 뿐 내 젊은 시절의 사랑을 은유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 자체는 나의 청춘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은 거기에 속했던 젊은 나를 노래의 힘으로 불러낸다. 나는 그 시절, 누군가에게 “이름 모를 소녀”로서 두근거림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삶은 계란 먹다가
목이 맑혀 가슴을 치네
아무래도 내가
삶은 계란을 삶은 계란이다
잘못 읽은 것 같네
이해할 수 없어도
계속되는 것이 삶이이라면
목에 걸린 건
삶은 계란이 아니라 그것이었나
문득 목이 메어
누구나 슬프면
저녁노을을 좋아한다는 말 생각해보네
말은 내뱉은 것이 아니라
먹어치우는 것이 하네
그래서 나는
아침인데도 저녁노을을 먹어치우네
얼굴에
그늘질 일은 없을 것이네
―천양희, 「아침에」 전문
제목과 시의 첫줄이 이어진다. 아침에 삶은 계란을 먹다가 목이 메었다. 잘 아는 관용어가 둘 나온다. “삶은계란”은 “삶은 계란”life is egg이고, 목이 맨 것은 슬퍼서다. 그래서 나는 삶은계란을 먹다가 이 삶이 얼마나 슬픈가를 느끼게 되었다. 슬픈 사람은 저녁노을을 좋아한다. 어떤 장려함 내지 감상이 슬픔을 아름답게 장식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저녁노을을 생각하고 깊이 탐닉하고, 마침내 먹어치운다. 결론은? 아침인데 나는 저녁노을(=삶은계란)을 먹는다는 것. 앞으로 내 얼굴에 그늘 질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얼굴은 여전히 말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삶은계란”은 ‘목이 메다’라는 인접성을 따라서 슬픔을 불러오고 슬픔은 저녁 노을을 연상하게 했으며,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일은 저녁을 먹는 일이 되고, 그래서 끝내 삶은계란 자체가 저녁노을이 되었다. 이 연상을 환유적이다.
계란을 먹다 | → | (퍽퍽한 것을) 먹어서 목이 매다 | ||||
∥ | ∥ | |||||
삶은 ……이다 | → | 목이 맨 것은 슬픔 때문이다 | = | 저녁노을이 펼쳐지다 |
처음부터 삶은계란이 노을을 비유할 수는 없다. 그랬다면 이 비유는 은유가 되었을 것이다. 삶은계란은 목이 멘다는 관념을 경유하여(목이 멘다는 관념이 이중화됨으로써)노을로 전환되며(노을 역시 슬픔의 은유가 아니다. 슬픔 사람이 노을을 좋아한다는 관념이 이를 매개하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또다시 ‘탐닉하다=먹다’는 은유를 매개로)삶은계란이 노을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비유적으로 전혀 무관한 계란과 노을이 서로의 자리를 비스듬히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조카학비 몇 푼 거드니 아이들 등록금이 빠듯하다
마을금고 이자는 이쪽 카드로 빌려 내고
이쪽은 저쪽 카드로 돌려 막는다. 막자
시골 노인들 팔순 오고 며칠 지나
관절염으로 장모 입원하신다. 다시
자동차세와 통신요금내고
은행카드로 대출할부금 막고 있는데
오래 고생하던 고모 부고 온다. 문상
마치고 막 들어서자
처남 부도나서 집 넘어갔다고
아내 운다
‘젓가락은 두 자루, 펜은 한 자루…… 중과부적!’*
이라고 적고 마치려는데,
다시 주차공간미확보 과태료 날아오고
치과 다녀온 딸아이가 이를 세 개나 빼야 한다며 울상이다.
철렁하여 또 얼마냐 물으니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 성을 낸다.
―김사인, 「중과부적衆寡不敵」(*마루야마 노보루 『뤼쉰』에서 빌려옴.)
이 땅의 서민들 가계부는 이렇게 늘 적자다. 생화비만으로도 빠듯한데 부고, 기념일, 사건, 사고가 줄을 지어 온다. 1연의 사연들을 넘고 오늘이 일기를 적고 나자. 다시 2연의 사연들이 줄을 이어온다. 시인은 책에서 읽은 한 구절로 일기를 대신한다. “젓가락은 두 자루, 펜은 한 자루.” 젓가락을 먹고사는 일을 통칭하는 환유이며, 펜은 문필업을 대신하는 환유다. 두 개의 전통적인 대신하는 환유다. 두 개의 전통적인 환유가 나란히 놓이자, ‘생계에 드는 비용이 둘이라면, 글을 써서 버는 수입은 하나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은유가 추가도 생겨났다. 이 은유는 사물을 직접 눈앞에 가져다놓는, 그래서 숫자로 압박을 효과적으로 전시하는 은유다. 환유가 은유의 생산성을 지탱하고 있는 시인 셈이다.
맨 처음 들판 위로 돌멩이 하나를 앉힌 사람과 돌멩이처럼 단단한 기도를 생각한다. 그 사람은 알았을까 큰 산이 쪼개져 오듯 저 들판에서 이 들판으로 수많은 돌들이 와서 이리 거대한 탑이 될 줄, 이리 질긴 목숨이 될 줄, 맨 처음 내게 심장을 던져준 이여 저문 저녁이 오고 긴 비마저 오면 어미 잃은 짐승처럼 느릿느릿 집이 젖고 살이 젖고 마침내 그 속의 심장이 젖나니 오늘은 비가 돌들이 이마와 돌들이 사타구니로 스며들어 나는 그가 늦가을 찌르레기처럼 우는 소리를 들었다 이는 밖을 잃고 안으로 쫓겨 들어간 것들이 동병상련이란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문성해, 「돌탑」 전문
돌탑을 이룬 하나하나의 돌은 누군가의 염원이다. 간절한 마음이 저렇게 형체를 얻어 “돌멩이처럼 단단한 기도”가 되었다. 이 마음은 당연히 심장으로 전환된다. 둘은 형제로서도 닮았다. 돌탑을 쌓은 마음을 보고 누군가의 간절함이 내게 전달되어다는 뜻이다. 그런데 후반부에 가면 돌탑은 “이마”와 “사타구니”와 “심장”을 가진 한 사람. “그”가 된다. 돌들이 모여 한 사람의 형체를 이룬 셈이다. 여기에서는 은유와 제유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하나하나의 돌들이 모여 돌탑이 되듯, 사람이 지체(이마, 사타구니, 심장……)가 모여 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돌탑을 한 사람과 유비된다.
돌탑 | ⊃ | 돌(a) | + | 돌(b) | 돌(c) | + | …… | ||
∥ | ∥ | + | ∥ | ∥ | |||||
사람(B) | ⊃ | 심장(a) | + | 이마(b) | = | 사타구니(c) | + | …… |
돌탑이 한 사람과, 낱낱의 돌이 그 사람의 신체 일부와 유비되는 것은 은유이며, 낱낱의 돌이 돌탑 전체를 나타내거나, 심장이 그 사람 전부를 대신하는 것은 제유다. 그런데 저 돌탑의 돌멩이 하나하나가 실은 그 누군가의 심장(=염원)이었다. 따라서 이 유비체계의 교차를 통해 “돌멩이 하나”가 “그”를 대신하게 되며, 바로 여기서 환유가 출현한다. 내가 가져다 놓은 돌멩이가 간절한 내 자신을 대신하므로, 이 역시 인접성의 길을 따라 생겨난 환유인 것이다.
마른 땅, 마감하는 비 내린다
꼬리뼈를 흘러 작열감으로 부서지고
방울방울 쏟던 것이 마른 개짐 위에 흥건히 젖어든다
이젠 유적이 된 내 어미의 집
세상은 잠 속에서라도
녹슨 사슬 글러멘 틈서리로 빗방울 스미게 하고
당신을 한껏 꽃멍을 부풀게 품는다
태몽으로 나를 품던 자가 화원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나니
꿈은 어미의 젖무덤에 도드라진 파꽃 한 단 올려주고
물기 머금은 이끼로 실팍한 가랑이 덮어주었나보다
폐경을 더듬고 길한 숲길 우거져 나오시게
악몽을 꾸고 나면 대수롭잖은 해몽으로 넘겨주던
이젠 엄마의 맘으로 내가 이르노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내 어미, 살풋잠에서 깨어 아래께가 가렵다 가렵다 한다
―김윤이, 「사랑의 근원」 전문
“유적이 된 내 어미의 집”은 생산을 끝내고 “폐경”에 든 어머니의 자궁이다. 마른 땅에 비 내리듯, 어미의 몸에 내리는 꿈의 비는 어미의 몸과 마음을 적신다.“마른 개짐 위에 흥건히 젖어”드는 비는 당신의 “꽃멍울”을 부풀게 하고, “젖무덤에 도드라진 파꽃 한 단”을 올리기도 하고, “이끼로 실팍한 가랑이 덮어”주기도 한다. 악몽에서 해몽으로 넘어오면서 어미는 비가 대지의 생명을 되살리듯, 새롭게 피어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1연의 “마른 땅” 역시 (‘대지모신’이라는 자연 상징의 전통에 충실하게)어머니의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목(‘사랑의 근원’)은(쿠베르의 유명한 그림이 암시하듯)저 자궁, 사람으로 우리를 낳은 근원을 뜻한다. 은유가 이렇게 펼쳐져 있다.
어머니의 몸(⊃자궁) = 마른 땅 = (어머니가 사는) 집
내리는 비 = 사랑의 꿈
어머니의 자궁이 몸 전체를 대표했으니 이것은 제유이며, 자궁이 집이 되었으니 이것은 은유다. 이 둘을 결합하면 환유가 탄생한다. “유적이 된 내 어미의 집”은 “화원”과 “무덤”(젖무덤)과 “숲길”을 품으면서 어머니가 사는 장소로서의 집이라는 함의를 갖게 되며, 이것은 이미 환유다. 어머니의 몸과 자궁의 관계는 제유인데, 저 집은 자궁(‘子宮’은 처음부터 집이다)이자 몸(자궁을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는 전체)이므로 집은 은유적인 부분(=자궁)으로 다른 은유적인 전체(=몸)을 대신하는 환유이기도 하다.
박스를 열어
귤을 꺼내보고 싶을 때가 있지
뒤적거리던 얼굴 같은
울컥하고 싶을 때가 있지
귤 같은 엄마와
귤 같은 애인과
소풍을 갔지
엄마는 글러브를 끼고
애인은 방망이를 들고
귤 한쪽이 파래서 울컥했어
귤 같은 얼굴
밤마다 귤을 까먹으며
우아하게 발을 들었지
발레리나처럼
얼굴에 이르기 위해
세상의 모든 발은
곡선으로 시작해?
어마는 글러브를 끼고
애인은 방망이를 들고
피카소의 얼굴들이 늘어져 있는
풀밭 위의 식사
배열이 괜찮았어
이별을 내놓기 위해
절단면으로 눕는 얼굴들
귤의 단면 같았어
실밥을 쥐듯
표정의 반만 쥐고
숲의 아주 미학적인 곳을 향해
강속구를 던질 때
그늘 속으로 날아가는
귤, 얼굴처럼
커브로
애인이 귤 같아서 좋았어
―이성만, 「얼굴처럼」 전문
평이해 보이는 은유가 겹쳐 놓이자 대단히 풍요로워진다. 시작은 단순하다. 귤 박스에서 귤 박스에서 귤을 꺼낼 때, 하나하나의 귤은 사람의 얼굴 같다. 그런 엄마와 애인을 데리고 소풍을 가서 야구를 하고 놀았다. 엄마는 공을 받고 애인은 방망이를 휘둘렀으며 나는 공을 던졌다. 그 공이 또한 귤이다. 휘두른 방망이에 맞은 귤은 “한쪽이 파래서 울컥”했다. 귤을 까먹으며 흉내 낸 발레리나의 동작은 발끝에서 시작해서 얼굴(=귤)에 가서야 멈추고 풀밭 위의 식사는 온통 귤이다. 피크닉 상자에 든 과일도 귤이고, 그렇게 둘러앉은 사람들도 귤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는 은유가 두 번 사용되었다. ‘귤=사람의 얼굴=야구공’ 저 얼굴(귤)은 시가 전개되어 가면서 방망이에 맞은 얼굴, 피크닉 자리에서 늘어진 얼굴(귤을 까먹고 펼쳐진 상태이거나 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다). 어떤 표정에 사로잡힌 얼굴 등으로 변주된다. 얼굴은 한 사람을 나타내는 제유이므로, 마침내 저 귤은 한 사람(엄마이거나 애인인)을 대신하는 환유가 된다.
나는 자주 자리를 비운다
의자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나와
멀리 빈자리를 바라보면
그 자리에 누군가 또 앉아 있다
목이 쉰 채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나로부터 결국 버림받을 것이다
그것도아니라면
나는 누군가를 불러 세울 것이다
의자는 한동안 비어 있다
나는 자주 자리를 비운다
나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나온 지금,
그러니 거기 앉은 나여
이제는 제발 나를 부르지 알아다오
―류경무, 「의자」 전문
내가 의자를 비우고 의자에서 떨어져 나오자 그 자리에 누군가, 말하자면 “거기 앉은 나”가 앉아 있다. 빈 의자에 ‘부재하는 나’가 앉은 셈이다. “나는 나로부터 결국 버림받은 것이다”라는 문장이 그래서 나왔다. 빈 의자가 그와 인접한 사람(의자에 앉은 사람)을 대신하고 있으니 환유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의자는 사람을 앉히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앉아 있는 사람의 자세를 하고 있기도 하다. 의자는 앉아서 의자의 주인을 앉히는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의자는 앉아 있는 사람을 유사성으로 대신하는 은유다.
의자 = 의자에 앉은 사람 > 은유(앉은 자세가 비슷함, 유사성)
의자 → 의자에 앉은 사람 > 환유(의자와 인접한 대상으로 의자를 대신함, 인접성)
결국 이 시에서도 은유와 환유가 결합해 있다. 이 시의 효과는 이런 이중성(의자는 나를 흉내 내면서 나를 기다린다)에서 생겨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