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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계: 언제나 ‘실패의 여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
우리는 실패를 할 때마다 더욱더 독수리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고, 다섯 번씩, 여섯 번씩 실패를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언제, 어느 때나 기도를 드렸다는 유태인들의 교훈도 있다. 성공이란 그 뜻(목적)을 이룬 것을 말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 진정한 성공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학생회장, 정당의 총재, 대통령, 외교관, 국회의원, 법관, 재벌그룹의 총수 등이 그 목적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 전면적인 실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보다 낫고 보다 완전한 세상, 즉 플라톤적인 이상국가와 그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도 미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교육의 목표가 ‘전인 교육’이라면 지금까지의 교육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이며,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만을 양산해온 역사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처럼 뛰어난 두뇌와 행운의 여신의 은총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소망했던 문화제국, 즉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지 못했고, 나폴레옹 역시도 그처럼 뛰어난 두뇌와 ‘불가능은 없다’라는 영웅정신으로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소망했던 ‘유럽연방의 건설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요컨대 보들레르, 랭보, 모짜르트, 반 고호, 폴 고갱, 호머, 괴테, 셰익스피어 등도 마찬가지이다. 인류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이며, 실패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 불가능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인간에 대한 꿈과 지상낙원에 대한 꿈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동기와 그 목적이 되어준다. 모든 성공은 하나의 신기루이며 허상에 불과하지만, 그 성공으로 향한 도전의 정신은, 거꾸로, 어느 누구도 이룩할 수 없는 성공의 길인 것이다. 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언제나 ‘실패의 여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고 권해 주고 싶다. 왜냐하면 가장 아름답고 멋진 실패만이 그 주체자의 성공을 보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며, 그 어머니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들의 몫인 것이다.
아리스토클레스, 즉 플라톤(B.C. 427-347?)은 그리스의 아네테에서 태어났고, 그는 매우 부유한 명문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아테네 왕의 후손이었고, 어머니는 유명한 정치가 솔론의 후손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정치에 뜻을 두기도 했었지만, 그의 조국인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배를 하자, 곧바로 그 정치에 환멸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시인이 되기 위해서 문학공부를 했지만, 20세가 될 무렵, 우연히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나고, 그 스승 밑에서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플라톤은 그리스 최고의 중심 국가였다가, 졸지에, 스파르타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그의 조국 아테네를 재건해 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나이 28세 때, 그가 그토록 사랑했고 존경했던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해 버리자, 이집트로, 페르시아로, 그리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니면서, 그의 ‘이상국가’의 꿈을 갖게 되었던 모양이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그의 지상낙원이자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간의 꿈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들이 무리를 짓는 사회적 동물이 된 것은 무리를 지음으로써 외부의 적이나 자연의 재앙에 대처하고,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할 수 있는 최선의 생존수단을 바로 거기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은 다른 동물들에 반하여 매우 나약한 동물이며, 공동체 사회의 바깥으로 나아가서는 어떠한 생존수단도 발견하기가 힘들게 되어 있다. 중산층 이상의 안락한 가문 출신인 로빈슨 크루소의 28년 2개월 동안의 무인도의 삶을 생각해 보고, 또한 그에게는 어떻게 문명과 문화의 삶이 가능할 수 있는가를 숙고해 보기를 바란다. 그는 날이면 날마다 집을 짓거나 보수를 하고, 사다리를 만들고, 사냥을 나가거나 농사를 짓고, 또 동굴과 요새와 배를 만들고 있지만, 그의 몰골은 흡사 인간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닌, 이상하고도 괴기한 새로운 변종의 퇴화된 동물과도 같았다. 무리를 짓는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형벌은 인간 사회로부터 유리된 그것이며, 그것은 모든 불행의 표지일 뿐이었던 것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무리를 짓는 동물로서의 인간관계의 산물이며, 그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은 모든 문명과 문화의 삶으로부터 배척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로빈슨 크루소가 그의 사나이다운 의지와 용기로써 그토록 어렵고 힘든 무인도의 삶을 극복해 내면서 ‘자기 자신의 장원의 주인이자 황제가 되었다’라고 너스레를 떨고는 있지만, 요컨대 그는 단 한 번도 영국인이라는 사실과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잊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결코 ‘홀로서기’를 이룩할 수 없는 나약한 동물이며, 따라서 그 단독자의 자유를 희생시키고서야 무리를 짓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최선의 생존수단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도덕, 법, 전통, 풍습, 역사, 종교 등의 제도적 장치들은 우리 인간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고, 인간 그 자체보다도 더욱더 중요한 신앙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는 인간이 사라지고 도덕과 법과 전통과 풍습과 역사와 종교들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법 앞에서 만인평등을 외치거나 그 법을 신성시할 때에도 우리 인간들은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게 되고, 도덕을 숭배하고 도덕적 인간임을 내세울 때에도, 우리 인간들은 간신히 그 주체자의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받게 된다. 전통, 풍습, 역사, 종교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우리 인간들은 마침내 그 제도적 장치들에 의해서 사회적 동물로 입증되고, 돈과 명예와 권력을 중요시 하는 문명과 문화인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 같은 무인도 사람에게는 돈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며 명예와 권력은 너무나도 조잡하고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공동체 사회를 증오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인간 사회로부터 격리될까봐 그 무엇보다도 걱정을 하게 되고, 공동체 사회가 명령하는 그 어떤 것들마저도 ‘법률의 준수’라는 이름으로 감당해 내게 된다. 대영제국의 꿈, 아메리카 합중국의 꿈, 나치의 꿈, 로마제국의 꿈, 다국적 자본으로 지칭되는 유태인들의 꿈, 그 꿈들이 그 인간들을 거룩하고 위대하게 해준 것이다. 따라서 모든 역사가들은 국가를 형성한 민족들을 중요시하고, 그 국가를 신성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우리 인간들은 국가를 통해서 그 나약함을 극복하고 전지전능한 신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국은 부모나 조상보다 더 존귀하고 더 신성하며, 또 신들이나 뜻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더욱 가치 있는 것임을 너는 모르는가? 너는 조국에 대하여 존경하고 순종하며, 조국이 노여워할 때에는 아버지가 노여워할 때보다도 더 양보해야 해. 너는 조국을 설득하거나, 그 명하는 바를 무엇이나 행해야 해. 조국이 네게 견디고 참으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나 행해야 해. 조국이 네게 참고 견디라는 것은 무엇이나, 매질이나 투옥이나, 모두 참고 견디어야 해. 또 조국이 너더러 전쟁터로 가라 하면 부상을 당하게 되건 전사하게 되건 전쟁터로 가야 하고, 또 이것이 옳은 일일세. 너는 기피해서도 안 되며, 후퇴해서도 안 되며, 맡은 곳을 버리고 떠나도 안 되네. 전쟁터에서나 법정에서나 그밖의 어디에서나 나라와 조국이 명하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네.
----플라톤, 플라톤의 대화(종로서적, 1981)에서
인간이란 운동하고 있는 물질적 분자들의 모임이다.
국가----大레바이아탄(Leviathan)----는 하나의 人工的 인간인데, 군주는 그 영혼이고 관리는 관절이며 상과 벌은 신경이고 그것의 부는 힘이며 안전은 직무이고 고문은 기억력이며 공평과 법은 그의 이성과 의지이고 평화는 건강이며 선동은 병이고 내란은 그것의 죽음이다.
추리는 명칭을 솜씨 있게 다루는 것이고 진리는 명칭들을 정확하게 배열하는 것이다.
욕망은 어떤 대상을 향한 운동이고 혐오는 어떤 대상에서 떠나는 운동이며 선과 악은 욕망과 혐오에 대조되어 이해된다.
자연적 상태에서는 개인 대 개인의 투쟁이 있다. 평화를 보장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그의 의지에 의하여 법을 만들기 때문에 시민법에 구속을 받지 않는 최고의 권력(군주나 혹은 주권단체)을 수립하는 계약을 체결한다. 군주정치, 귀족정치, 민주정치의 세 가지 정체 중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정체는 군주정치이다.
----토마스 홉스, 「레바이아탄」,(세계사상대계제2권, 신태양사, 1971년)에서
자연의 상태에 있어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것이며 누구도 자연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지배권을 가질 수 없다. 자연법은 자연의 상태를 지배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이성은 자연법을 示現한다. 또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을 해쳐서는 아니 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해친다면 해를 입은 사람은 해친 사람을 벌할 권리를 가진다.
사람은 그의 노동에 의해서 그의 노동의 생산물인 재화를 획득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행위의 심판자라는 자연의 상태로부터 결과되는 불편을 代置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계약을 맺고 이 계약으로써 인간의 타고난 권리를 수호하며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이 부여된 시민정부를 창조한다. 만일 정부가 시민들의 안전과 권리를 침범함으로써 이러한 사회 계약을 위반하고 인민에게 반역한다면 인민들은 정부를 해산할 권리를 가진다.
----존 로크, 「시민정부론」,(세계사상대계제2권, 신태양사, 1971년)에서
즉 사회계약은 모든 인간이 동일한 조건하에 놓여져서, 동일한 권리를 향수할 수 있는 평등성을 각 공민 간에 세워준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계약의 성질상, 주권자의 모든 행위, 즉 모든 일반의지의 정당한 행위는 모든 공민으로 하여금 동등하게 의무와 이익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자는 단체로서의 국민을 인정할 따름이고,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각 개인 간에 전혀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대체 정확히 말해서, 주권의 행위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자優者와 열자劣者 간의 협약행위를 말함이 아니요, 단체와 그 각 성원간의 협약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 협약은 사회계약을 기반으로 하는 고로 합법적이요, 만인에 공통함으로 공평하며, 일반의 복지를 도모하는 외에 다른 목적이 없으므로 유익한 것이며, 공공의 힘과 지상권至上權에 의해서 보증을 받고 있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것이다. 국민이 협약만을 복종하고 있는 한, 그들은 아무에게도 복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제 자신의 의사만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자의 권리의 범위와 공민의 권리의 그것을 묻는 것은 곧 공민이 상호간에, 즉 개인은 전체에 대해서, 전체는 개인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까지 의무를 질 수가 있느냐를 물음과 마찬가지 질문이 되는 것이다.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휘문출판사, 1976)에서
나무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타국의 신화라는 나무를 성공적으로 이식移植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나무는 아마 한때, 외국적 요소를 무시무시한 싸움에 의하여 떨구어버릴 정도의 힘과 건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식된 나무는 대개 쇠약해지고 위축되거나 순간적으로 무성하기도 하다가 이내 죽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독일 본질의 강력하고 순수한 핵심을 높이 평가하여 우리가 바로 그것에 의하여 강력하게 뿌리내린 외국적 요소의 제거작업을 해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독일 정신이 자각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복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독일 정신이 라틴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그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것을 위한 외적인 준비와 격려는 이번 전쟁에서 보여준 무적의 용기와 피에 물든 영광 속에서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적인 필연성은, 이 길에 있어서의 선구적인 숭고한 투사들, 예컨대 루터 및 우리의 위대한 예술가와 시인들, 이들에게 동등하고자 하는 경쟁심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러나 독일 정신은 그런 투쟁을 자기의 수호신 없이, 자기의 신화적 고향 없이, 모든 독일적인 사물의 부흥없이 해낼 수 있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인이 고향에 돌아갈 길을 몰라 두려워하며, 자기를 오래 전에 잃어버린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줄 인도자를 찾기 위하여 두리번거린다면, 그는 단지 디오니소스의 새가 환희에 차서 유혹적으로 부르는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그 새는 그의 머리 위에서 선회하면서 그에게 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자 할 것이다.
----니체, 비극의 탄생, 청하, 1982년
소크라테스도 국가를 신성시했고, 홉스도 국가를 신성시했다. 존 로크도 국가를 신성시했고, 장 자크 루소와 초기의 니체도 국가를 신성시했다. 국가는 땅과 사람에 의해서 건설되며, 그 구성원들은 동일한 언어, 민족, 전통, 역사, 풍습, 종교 의식 등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주의 문제를 저마다 혼자서 해결해야 된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난제와도 같지만,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공동체 사회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농민들과 군인들, 관리들과 노동자들, 상인들과 학자들, 그리고 학생들과 선원들----. 이 모든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저마다의 성격과 취향에 맞는 일에 종사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이상적인 사회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본다면, 모든 국가는 공산국가라고 역설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국가의 조직은 공산주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의 공정한 분배가 그 관건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회로부터 격리되면 죽음이라는 것, 무리를 짓는데서 최선의 생존수단을 발견했다는 것이 우리 인간들을 공산주의자로 만들고, 더욱더 폭넓게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했던 오늘날의 자본주의 국가----사유재산제도를 철폐했던 공산주의 국가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들마저도 그 공산주의의 근본체제를 뿌리째 뽑아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상속세, 증여세, 양도세, 재산세, 소득세 등의 조세제도를 통하여 부의 세습을 방지하며, 다른 한편,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저생활비와 교육비와 의료보험의 혜택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이와 같은 사회보장제도 없이, 만일 무제한적인 사유재산제도만을 허용한다면, 그 국가의 정치체제는 곧바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린이들마저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양육한다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그토록 정교하고 세련되게 준비된 교육과정을 생각해 본다면, 어느 자본가 개인이 그 무리로부터 이탈된 예외자일 수가 있겠는가? 요컨대 자본주의는 사회적 동물들의 파렴치한 만행이며, 전체 인류에 반하는 대역제도일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나약하지만 무리짓는 동물로서의 인간은 더없이 강하고, 개인은 불행하지만 인간은 행복하다.
소크라테스 10세 이상의 국민은 모두 먼 고장에 보내 아직 부모들의 관습에 젖지 않는 동안에 한 곳에 수용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법규에 따라서 훈련(교육)을 실시하면, 우리가 바라던 국가와 제도는 신속히 그리고 쉽사리 이루어질 수 있네. 그렇게 하면 국가 자체가 행복하게 운영될 뿐더러 그 안에 태어난 국민들도 큰 복락을 누리게 되네.
소크라테스 15년 동안이네. 그리하여 그가 50세가 되어 맡은 임무를 무난히 마치고 실무나 학술적인 지식에 있어서 우수한 재능을 나타내면 드디어 그 최종 목표에 도달하였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일체를 비추는 빛의 근원에서 선 자체를 간취해야 하네.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본보기로 삼고 생애를 통해 나라와 동포들과 자기 자신에 대하여 행할 바 전형이기 때문이네. 이리하여 그들은 철학을 그 주요 과제로 하며 순번이 오면 지배자의 자리에 앉아 정무에 관여하는데 이것을 나라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네. 즉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결코 자기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네.
----플라톤, 플라톤의 국가론, 집문당,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공산주의이었고, 그 구성원들 모두가 다같이 행복한 사회이었다. 그의 국가론은 교육론이 주조를 이루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철인정치가’를 육성하여 그들이 통치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그 목표이었다. 이상국가에서의 어린 아이는 국가의 소유물이었고,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친족권을 가질 수가 없다. 어른들은 모든 아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이었고, 아이들은 모두가 다같이 형제자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자기 자신의 자식들과 부모형제를 따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자기 자신보다는 국가를 우선시하게 되었다. 어린 아이는 엄마의 젖을 뗄 무렵이면 탁아소에 보내지게 되고 그곳에서 10세 때까지 체육과 음악을 공부하게 된다. 음악은 어린 아이들로 하여금 성격이 온화하고 덕이 많은 아이들로 자라나게 하고, 체육은 몸의 건강 뿐만이 아니라, 불굴의 인내와 용기, 그리고 굳센 정신을 가진 아이들로 자라나게 한다. 그 아이들이 10세가 지나면 수학, 역사, 철학, 기하학 등의 청소년 교육을 20세까지 배우게 하고, 그리고 그때까지 배운 것을 가지고 시험을 보게 된다. 그 시험에 통과한 사람은 30세까지 다시 공부를 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평민계급으로서 농사를 짓거나 상업에 종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30세까지 교육을 받은 사람은 다시 시험을 보게 되고, 그 시험에 통과한 사람은 철인정치가의 공부를,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군인계급으로 남아서 국토를 방위하게 된다. 철인정치가는 30세부터 35세까지 정치와 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철인정치가의 수업을 받게 된다. 그리고 35세 이후에는 국가의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50세까지 국정운영의 경험을 쌓고, 50세 이후가 되면 철인정치가가 되어 순번제로 국정운영의 책임을 맡게 된다. 철인정치가의 교육을 받는 동안에도 철인정치가로서의 능력이 부족하면 군인계급이나 평민계급으로 내려 보내게 된다. 플라톤은 신이 사람을 만들 때, 금과 은과 동을 사용했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교육을 통하여 자기 자신들의 계급을 찾아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면 어떤 아이가 철인정치가의 계급(금)인지, 또는 군인계급(은)이나 평민계급(동)의 아이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이상국가에서 가장 타기할 만한 것은 계급의 분배와 조정이 잘못된 경우이며, 그 최종심급은 지식의 척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철인정치가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군인 계급에 속해 있다거나 군인계급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평민계급에 속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용납될 수가 없다. 또한 군주국가에서는 신분의 이동이 막혀 있지만, 이상국가에서는 그 능력과 재능을 인정받으면 평민계급출신이라고 할지라도 철인정치가가 되어 한 나라의 최고의 통치자가 될 수가 있다.
철인정치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건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며, 궁극적으로는 이상국가의 통치자이다. 그의 역할은 국가를 통치하는 일과 전쟁터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 그리고 모든 백성들을 교육시키고, 각자의 신분에 맞는 직업과 그 지위를 찾아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결혼을 할 수도 없고, 사유재산을 가질 수도 없다.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만이 그의 사명과 임무이며, 그의 통치 아래서는 모든 국민들은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리게 된다. 즉, 평민들은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고, 군인은 용기를 가지고 전쟁터로 가고, 그리고 철인정치가는 그의 지혜를 가지고 그 국가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 플라톤은 그의 이상국가를 위해서, 모든 시인과 예술가들을 추방시켜버린 바가 있다. 청소년들이나 병사들에게, 사랑 노래나 슬픈 노래를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것인데, 왜냐하면 그 노래들은 청소년들과 병사들을 더없이 나약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만든 침대도 있고, 목수가 만든 침대도 있고, 화가가 그린 침대도 있다. 신이 만든 침대는 본질적인 침대이고, 목수가 만든 침대는 실용적인 침대이며, 화가가 그린 침대는 가상적인 침대이다. 따라서 이데아(본질)의 세계에서 두 단계나 떨어진 침대(화가가 그린 침대)는 쓸모가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시인과 예술가들을 쓸모가 없는 인간들이라고 추방해 버린 것은 풀라톤의 최고의 실수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인류의 역사상, 최초로 그의 ‘이상국가’를 기획하고 연출해 냈던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나이 30대 중반 무렵, 디온의 초청을 받고 시라쿠사에 갔다고 한다. 디온은 시라쿠사의 폭군 디오니소스의 처남이었고, 플라톤으로 하여금 그 폭군 디오니소스를 바로잡아 줄 것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거꾸로 플라톤을 사로잡아 아테네와의 숙적인 스파르타의 군대에 팔아버렸고, 플라톤은 안리케리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테네로 돌아와서 최초의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후진 양성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플라톤의 나이가 60세 때, 시라쿠사의 디온이 또 한 번 그를 초청했고, 그때는 폭군 디오니소스가 죽고 그의 아들 디오니소스가 왕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디오니소스는 그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매우 어질고 온화한 성품이었지만, 또다시 그의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던 플라톤을 감옥에 가두어 버리고, 디온을 나라 밖으로 추방을 시켜버렸다고 한다. 이번에도 플라톤은 그의 제자들의 도움으로 시라쿠사를 탈출했지만, 그의 나이 77세 때, 또다시 디오니소스의 초청을 받고 시라쿠사를 방문하게 된다. 플라톤은 비록, 77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시라쿠사에다가 그의 이상국가를 건설해야겠다는 꿈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에도 디오니소스는 약속을 어기고 플라톤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고, 플라톤은 가까스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도움으로 그곳을 탈출해 나왔다고 한다. 그토록 세 번씩이나 투옥을 당하고도 이상국가의 꿈을 버릴 수가 없었던 플라톤, 그러나 그의 실패는 이 세상의 어느 승리보다도 더 아름답고 값진 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서정욱 편, 만화서양철학사, 자음과 모음 2003 참조).
다시 말해서,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꿈과 그 좌절에는 얼마나 엄청난 아픔이 배어 있었던 것일까? 세계적인 대사상가로서의 투옥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 그 죽음의 위험을 염두에 두지 않고, 두 번 씩, 세 번씩 연거푸 시라쿠사를 방문하고, 이미 이승의 생을 다한 것 같은 77세의 몸으로도 또다시 투옥되었던 그의 좌절에는 얼마나 엄청난 아픔이 배어 있었던 것일까?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에는 플라톤이 이상주의자로,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주의자로 그려져 있지만, 그러나 플라톤은 이처럼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평화로운 공산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단 하나 뿐인 그의 목숨까지도 바쳤던 것이다. 그는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그 불가능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 불가능의 꿈을 온몸으로 밀고 나갔던 것이다. 그의 실패는 그 어떤 승리보다도 더 아름답고 값진 실패일 수밖에 없다.
스티븐 호킹은 그의 시간의 역사(까치글방, 1998년)에서 “모든 물리이론은, 그것이 가설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항상 잠정적인 이론이다. 여러분은 그 가설을 결코 입증할 수 없다. 실험 결과가 어떤 이론과 아무리 여러 번씩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다음 번에도 또 그 결과가 이론과 모순되지 않으리라고는 절대로 확신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모든 물리이론은 잠정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리이론이란 자연의 참된 이치를 밝혀주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가설과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그것의 과학적인 정당성이 입증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노벨상의 역사가, 그 수상자의 이론이 오류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인간들의 사상과 이론의 역사란 오류의 역사일는지도 모른다. 그 오류의 역사는 거짓의 역사이며, 실패의 역사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위대성은 그 오류의 역사와 실패의 역사 속에서도, 오늘날의 문명과 문화를 건설하고, 진정한 인간의 삶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오류의 역사가 하나의 참된 교훈이 되어주고 우리 인간들의 삶을 일구어 내고 있다면, 실패의 역사 역시도 하나의 참된 교훈이 되어주고 우리 인간들의 삶을 일구어 내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 이상 오류를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또한 더 이상 실패를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그 오류와 실패는 우리 인간들이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 때문에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지, 우리 인간들의 오만방자함이나 나태함 때문에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실패는 아름다운 삶을 낳고, 아름다운 삶은 그의 실패를 승리보다도 더욱더 고귀하고 위대하게 만들어 준다.
나는 레오나르드 다 빈치의 전기를 읽다가 그의 스승이자 당대의 최고의 거장이었던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드가 천사의 그림을 그렸을 때, 그만 그의 붓을 꺾어버렸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이해하게 되었고, 몇날, 며칠 동안을 그 신선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던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아직도 나는 그 신선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고, 산책을 하거나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에, 그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명 장면을 떠올려 보게 된다. 베로키오에게 있어서 레오나르드의 출현은 그의 사망선고 이상이며, 레오나르드에게 있어서 그의 스승 베로키오는 그가 짓밟고 넘어가야 할 ‘인식론적 장애물’에 불과하다. 레오나르드가 천사의 그림을 그렸을 때, 붓을 꺾어야만 했던 베로키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는 틀렸다, 나는 화가로서 더 이상 존재할 가치조차도 없다’라고 탄식했을까? 아니면, 물에 빠진 어린 녀석을 구해 주었더니, 이제는 내 생명마저도 빼앗아간다라고, 벌컥 부아가 치밀어 올랐을까? 또, 그것도 아니라면, 이 세상의 진정한 그림은 레오나르드라는 천재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라고 기뻐했을까? 나는 베로키오도 인간인 이상, 그 탄식, 부아, 기쁨이 중층적으로 겹쳐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스승으로서의 베로키오는 그 탄식, 부아, 기쁨 중에서, 그 기쁨을 선택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화가, 즉 레오나르드 다 빈치의 탄생을 아주 감동적으로 맞이하게 된다. “천재란 레오나르드를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다시는 내 손에 물감을 묻히지 않겠노라!”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화가로서의 베로키오는 죽었지만, 진정한 스승으로서 그는 인류의 문화사 전체 속에 영원히 살아 남아 있다.
우리 학자들은 인간적으로는 더없이 교활하고, 학문적으로는 더없이 고루하다. 그들은 돈, 명예, 권력----, 이를테면 대학제도, 학회, 언론, 문학상, 출판제도를 이용하여, 훌륭한 제자의 출현을 가로막고, 그 제자들의 영광의 무대를 빼앗아버린다. 또한, 그의 못난 제자는 ‘아버지 살해’가, 프로이트가 역설한 대로, 모든 문화를 움직여 가는 근본적인 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스승의 권위가 두려워, 어떠한 홀로서기도 시도하지를 않는다. 그 극단적인 예가 김현과 정과리의 관계이며, 그들의 관계는 前근대적인 부자세습의 나쁜 선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천재는 ‘아버지(스승)’를 살해하고 매우 어렵고 힘들지만 가시밭길의 형극 속을 헤매다니다가, 그의 말년이나 사후에 평가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思無邪의 경지는 스승으로서의 선행조건이고, 모태이며, 토양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좋은 생활의 태도와 좋은 학습의 태도가 思無邪의 전제조건임은 두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위대한 스승으로서의 베로키오의 인간 승리가 레오나르드의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만일, 베로키오가 없었더라면, 레오나르드의 천사의 그림이 존재할 리가 없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스승으로서의 전범이 영원히 사라져 갔을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레오나르드의 천재성과 그의 예술작품만을 부각시키고, 위대한 스승 베로키오에 대해서는 그 관심조차도 보이지를 않는다. 그 역사가--호사가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쫓아다니는 판단의 어릿광대들이며,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눈 뜬 봉사들이다.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드 다 빈치----, 이 아름다운 사제 관계를 생각해볼 때, 우리가 미처 갖추지 못한 덕목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도 없이, 아름다운 사제의 관계이며(반경환, 「강준만 비판」, 비판, 비판 그리고 또 비판, 새미출판사 2002년 참조할 것), 성공보다도 더욱더 아름다운 실패의 전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승리보다도 더욱 더 아름답고 위대한 실패는,
미이내스 아닙니다. 각하, 잔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의향만 있으심 각하는 이 지상의 조우브(제우스)신이 되실 수 있습니다. 대양이 둘러싸고 하늘이 덮은 이 천하는 뭐고 다 각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가지실 의향만 있으심 말입니다.
폼피이 그 방법을 말해보게.
미이내스 세계의 세 공동 소유자, 각하의 동료 세 사람은 지금 각하의 배 안에 있습니다. 제가 닻줄을 끊어 놓겠습니다. 그리고 바깥 바다로 나가서 그분네들의 목을 자릅시다. 그러면 죄다 각하의 차지가 됩니다.
폼피이 아, 그건 자네가 실행했어야 할 것이지, 입 밖에 내지 말고! 나로선 비겁한 일이야, 자네가 하면 충성이 됐을 것이지만, 여보게 실속을 차리는 것이 내 명예는 되지 못하네. 명예가 있고서 실속이 있는 것이 아닌가. 계획을 입 밖에 낸 것을 후회하게. 나 몰래 했으면 나중에 칭찬을 받았을 것 아닌가. 그러나 이제는 안 되네. 포기하고 술이나 들게.
미이내스 (혼자말로) 그럼 이제 당신의 시들어가는 운명은 그만 따르겠어. 탐내면서도 주겠다는 데, 받지 못하는 위인이 무엇을 차지하겠느냐 말이야.
라는, 셰익스피어의 「앤토우니와 클레오파트라」(셰익스피어 전집 6, 휘문출판사, 1971)의 한 장면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주연의 자리는 폼피이와 옥타비오 시이저, 그리고 앤토우니와 레피더스가 회담을 끝낸 뒤의 자리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적대적인 발톱을 숨기고 있는 동상이몽 속의 자리이기도 하다. ‘승리냐/ 패배냐’,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의 갈림길에서 폼피이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멋진 실패의 길을 택했다고 할 수가 있다. 천하를 움켜쥐고 있는 세 사람, 즉 옥타비오 시이저와 앤토우니와 레피더스와 전쟁을 벌인다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러나 그토록 간절하게 소망했던 천하의 大權을 포기하고 ‘명예’를 택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크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 명예가 있고 大權이 있는 것이지, 大權이 있고 명예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명예와 생명은 하나이며,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은 그 명예를 더럽히고 大權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폼피이는 옥타비오 시이저에게 패배를 하여 한 줌의 재로 사라져 갔지만, 그의 성공(승리)보다도 더욱더 아름답고 멋진 실퍠(패배)는 이처럼 전 인류의 심정을 ‘감동의 장’으로 몰아 넣어가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아름답고 멋진 실패의 예는
지극히 시시한 발견이 나를 즐겁게 하는 야밤이 있다
오늘밤 우리의 現代文學史의 변명을 얻었다
이것은 위대한 힌트가 아니니만큼 좋다
또 내가 ‘시시한’ 발견의 偏執狂이라는 것도 안다
중요한 것은 야밤이다
우리는 여지껏 희생하지 않는 오늘의 문학자들에 관해서
너무나 많이 고민해왔다
金東仁, 朴勝喜같은 이들처럼 私財를 털어놓고
文化에 헌신하지 않았다
金裕貞처럼 그밖의 위대한 선배들처럼 거지짓을 하면서
소설에 골몰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덤삥出版社의 20원짜리나 20원 이하의 고료를 받고 일하는
14원이나 13원이나 12원짜리 번역일을 하는
불쌍한 나나 내 부근의 친구들을 생각할 때
이 죽은 순교자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우리의 주위에 너무나 많은 순교자들의 이 발견을
지금 나는 하고 있다
나는 광휘에 찬 新現代文學史의 詩를 깨알같은 글씨로 쓰고 있다
될 수만 있으면 독자들에게 이 깨알만한 글씨보다 더
작게 써야 할 이 고초의 時期의
보다 더 작은 나의 즐거움을 피력하고 싶다
덤삥出版社의 일을 하는 이 無意識 大衆을 웃지 마라
지극히 시시한 이 발견을 웃지 마라
비로소 충만한 이 韓國文學史를 웃지 마라
저들의 고요한 숨길을 웃지 마라
저들의 무서운 放蕩을 웃지 마라
이 무서운 浪費의 아들들을 웃지 마라
라는 김수영의 「이 韓國文學史」에도 나타나고 있고, 또한 그 아름답고 멋진 실패의 예는
돌아보면
내 인생은 실패투성이
이제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겠다고
조용히 울며 다짐하다가
아니야
지금의 난
실패로 만들어진 나인데
실패한 꿈을 밀어 여기까지 왔는데
나에게 실패보다 더 무서운 건
의미 없는 성공이고
익숙한 것에 머무름이고
실패가 두려워 도사리는 것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성공했지만 의미 없는 것들이 있고
비록 실패했지만 더 의미 있는 것도 있다
누군가는 의미 있는 실패라도 하며 쓰러져야만
그 쓰라림을 딛고 넘어 새날은 온다
이제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말고
준비에 실패함으로
실패를 준비하지 말고
실패를 정직하게 성찰하며
늘 새로운 실패를 하자
라는 박노해의 「늘 새로운 실패를 하자」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려면 언제나 목숨을 걸어야 하고, 남극이나 북극지방을 탐험할 때에도 언제나 목숨을 걸어야 한다. 자기보존본능이 모든 유기체의 근본본능이지만, 때때로 그 자기보존본능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목숨마저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단 하나 뿐인 목숨을 건다는 것은 지상 최대의 모험이며, 언제나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썩어빠진 ‘한국문학사’마저도 자기 자신들의 私財를 아낌없이 털어서 헌신했던 김동인, 박승희 같은 사람들 때문에 기록할 수가 있었던 것이고, 또한 이 썩어빠진 ‘한국문학사’마저도 김유정처럼 거지짓을 하거나 싸구려 덤삥출판사의 번역일을 하면서 피와 땀과 눈물로 시를 썼던 김수영이 있었기 때문에 기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한국문학사’는 실패한 인생들이 기록한 역사이며, 그토록 오랜 수배자의 생활과 囹圄의 생활을 했으면서도 ‘늘 새로운 실패’를 찾아나서는 박노해 시인이 있었기 때문에 영원히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역사일는지도 모른다. 실패는 성공의 징검다리이며, 문명과 문화의 전제조건이다. 부처도 떠돌이 탁발승으로 죽어갔지, 극락의 세계를 정복하지는 못했다. 예수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갔지, 하늘 나라의 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랭보도, 보들레르도, 호머도, 셰익스피어도,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데카르트도, 칸트도, 쇼펜하우어도, 마르크스도, 니체도, 헤겔도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실패를 기록하고 죽어갔지, 이 세상에서 결코 완전한 승리를 기록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꿈은 어디까지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며, 그 불가능을 먹고 자라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투쟁이 만물의 아버지’라면, 언제나 완벽한 성공만을 바란다는 것은 사기꾼들의 천박한 심보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실패의 역사이며, 그 실패의 아름다운 기록이다. 우리 인간들이 이성적인 동물인 것은 그 ‘실패의 여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줄 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태양 신의 마차를 타고 하늘 나라를 정복해 보고 싶었던 패이어손, 천마 페가수스를 타고 올림프스의 신전으로 날아 올라갔던 벨레로폰, 끝끝내 하늘 끝까지 날아 올라가 태양마저도 정복해 보고 싶었던 이카루스----. 불완전함, 나약함, 허약함, 무력함, 유한성의 한계를 전혀 의식하지 않으면서 언제, 어느 때나 도전적이고 야심만만한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 언제, 어느 때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머나 먼 이상 세계를 찾아서 그 불가능의 목표를 현실화시킨다는 것, 또 때로는 승리보다도, 어떠한 패배보다도 더욱더 아름답고 멋진 실패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삶을 완성한다는 것, 그리고 어떠한 최악의 사태나 고통마저도 비극의 주인공처럼 웅대하고 담대하게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의 행복을 연주한다는 것----, 이러한 삶들이 패이어손, 벨레로폰, 이카루스의 삶의 전모였는지도 모른다. 천재란 인식의 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사상을 완성하고, 그리고 그 모든 규칙을 옛날의 전제군주처럼 명명하는 사람이지, 칸트의 말대로, “예술에 규칙”만을 부여하는 왜소한 존재가 아니다. 학문의 천재, 예술의 천재, 정치의 천재, 도덕의 천재, 체육의 천재 등, 이 세상에는 수많은 천재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는 어느 특정 영역의 자그만 장소와 그 울타리에만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천재란 하늘이 빚어낸 존재이며, 달리 말하자면 신적인 존재(문화적 영웅)이다. 모든 영역에는 천재가 필요하고, 우리 인간들은 그들의 위대함에 경의를 표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천재의 그 위대성에 의하여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의 황야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다. 천재가 없으면 우리 인간들의 삶은 생기를 잃게 되고, 그 모든 것이 시시하고 귀찮아지게 된다. 요컨대 우리 인간들의 삶이 이처럼 아름답고 찬란한 것은 그 문화적 영웅들의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실패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公 告
오늘 講師陣
음악 部門
모리스 라벨
미술 部門
폴 세잔느
시 部門
에즈라 파운드
모두
缺講
金冠植,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持參한 막걸리를 먹음.
敎室內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金素月
金洙映 休學屆
全鳳來
金宗三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校舍.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김종삼, 「詩人學校」 전문
대한민국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탐미주의자였던 김종삼, 그 역시도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실패 속에서 비명횡사해간 시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시인학교」는 플라톤의 이상국가처럼,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도, “미술 부문/ 폴 세잔느”도,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도 언제나 “결강”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 출강할 수 없는 강사진에 지나지 않는다. 김수영도 영원히 출석할 수 없는 시인 지망생이며, 김소월도 영원히 출석할 수 없는 시인 지망생이다. 김관식, 전봉래, 김종삼은 영원히 개설되지 않을 그 「시인학교」에서 술이나 마시고 음악이나 듣는 백수건달들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실패한 인생들에 지나지 않는다. 모리스 라벨도 실패한 인생이고, 폴 세잔느도 실패한 인생이며, 에즈라 파운드도 실패한 인생이다. 김관식도 실패한 인생이고, 김수영도 실패한 인생이다. 그러나 그 실패한 인생들이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서” 이룩해낸 ‘탐미주의의 드라마’는 가히 최고급의 수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 이상의 언어의 절제가 필요없는 간결한 시행들, 그리고 그 언어들보다도 여백이 더 꽉 차 보이는 상징적이고도 함축적인 공간들----, 요컨대 김종삼의 「시인학교」는 그의 아름다운 언어들이 테니스장의 공처럼 튀어오르고, 또한 그 실패한 인생들이 저마다 독특한 개성적인 면모를 띠면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김종삼의 시인학교는 부재하는 채로 존재하고, 그 예술가들 역시도 부재하는 채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과 이념과 취향이 저마다 색다르게 돋보이면서, 아름다운 하모니----즉, ‘투쟁 속의 조화’를 이룩해 내고 있는 것이다. 김종삼은 부재하는 시인학교와 부재하는 예술가들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고 있고, 그 실패한 인생들을 어떠한 승리자보다도 더욱더 고귀하고 위대하게 재창조해 놓고 있는 것이다. 실패는 삶의 윤활유이며, 원동력이다. 실패하지 않은 삶은 무의미와 권태에 둘러싸여 있는 삶에 불과하며, 아귀지옥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실패만이 아름답고, 실패만이 더욱더 찬란하다. 그 실패가 어떤 성공과 어떤 승리보다도 더욱더 아름답고 찬란할 때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르게 된다.
꿈은 하늘 높이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고, 최고급의 전사는 한 마리의 불나비가 되어간다. 그는 승리를 원하지 않고 승리보다 더욱더 찬란한 실패를 원한다. 요컨대 그의 싸움은 승리가 아니라, 어떻게 실패할 것인가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그만 승리에 만족하거나, 아니면 아주 작은 실패에도 의기소침해 지기 마련이지만, 한 사람의 낙천주의자는 승리보다도 실패를 선택하고, 그리하여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실패에 더욱더 기뻐한다. 실패가 없다면 그의 삶이 없는 것이며, 그 잇달은 실패는 그의 삶의 원동력이 된다. 내 고난에 썩고 썩은 사람이라며 어떠한 모험도 마다하지 않던 오딧세우스, 고상하게 살 수는 없어도 고상하게 죽어갈 수는 있다고 자살해 버린 아이아스, 그리고 비겁하게 살지 않고 친구의 원수를 갚고 장렬하게 전사해간 아킬레스, 또한 부처, 예수, 보들레르, 랭보, 반 고호, 폴 고갱 등은 그들의 수없이 많은 좌절과 실패를 통하여 이 세상의 삶을 얼마나 더욱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라보았던 것인가!
꿈에서 본 몇 집밖에 안 되는 화사한 小邑을 지나면서
아름드리 나무보다도 큰 독수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來日에 나를 만날 수 없는
미래를 갔다
소리없이 출렁이는 물결을 보면서
돌뿌리가 많은 廣野를 지나
----김종삼, 「생일」 전문
실패는 성공의 징검다리이며, 실패하는 자만이 “來日에 나를 만날 수 없는/ 미래를” 갈 수가 있다. 대부분의 어중이 떠중이들은 한 두 번의 실패로 좌절을 하고 말지만, 그는 수없이 실패를 되풀이 할 때마다 더욱더 “큰 독수리”처럼 자유 자재롭게, 그의 이상적인 국가----낙천주의자만 살 수 있는 지상낙원----를 향하여 날아가게 된다. 요컨대 실패하는 자만이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생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여기 태양신의 마차를 몰았던
패이어손이 잠들었노라
너무도 위대하게
그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는 실로
용감했노라
언제나 실패의 여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 그러면 당신도, 당신도, 세계적인 대사상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들 독일 정신은 뿌리로, 이태리 정신은 잎으로 만든 월계관으로, 프랑스 정신은 꽃으로, 영국 정신은 열매로 표상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미국과 중국과 일본과 우리 대한민국의 정신은 어떻게 표상할 수가 있는 것일까? 미국과 중국은 세계적인 대제국을 꿈꾸고 있는 만큼, 그들의 정신은 이 뿌리와 왕관과 꽃과 그리고 그 열매로 표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영원한 대제국을 꿈꾸고는 있지만, 그 제국을 결코 건설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 정신은 ‘벌레먹은 낙과’로 표상되고, 우리 대한민국의 정신은, 대한민국의 國號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 어떤 목표도 없는 만큼, 그 어떤 새싹도 틔워볼 수 없는 ‘쭉정이’로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는 대한민국, 좀도둑질로 유명한 국민의 나라요!
여기는 대한민국, 사회적인 문제나 국가의 문제에 있어서 근본적인 해결책보다는 저마다의 사소한 이익 앞에 눈이 어두워 그 문제를 더욱더 악화시키는 부정부패한 국민의 나라요! 여기는 대한민국,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역사를 대한민국의 입맛에 맞게 쓰겠다고 덤벼들다가 더 큰 손해만을 보고 있는 무목표, 무책임, 무의지의 국민의 나라요!
여기는 대한민국,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과학적 발명과 그 획기적인 공갈포만을 양산해 내고, 황우석 교수처럼 논문의 조작과 표절로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도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醜韓民國의 나라요!
우리 대한민국이 ‘추한민국’의 나라가 된 것은 독일, 이태리, 프랑스, 영국, 미국, 중국, 일본과는 정반대방향에서, 너무나도 아름답고 멋진 실패를 완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요컨대 실패를 두려워하는 민족은 하루살이처럼 노예의 민족에 지나지 않으며, 그 아름답고 멋진 실패를 완성할 줄 아는 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찬란한 영원한 제국의 민족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반경환 행복의 깊이 제4권 제3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