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빌 2장 16-18절
설교제목 : 네가 있어 기쁘다
보궐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재보궐선거가 마무리되고, 시끄러운 선동의 소리와 현수막들이 사라져 조용해진 듯합니다. 닳아빠진 후보와 10년 전에 오명으로 물러난 후보를 두고 선택해야 하는 한국 정치가 못내 씁쓸하기만 했습니다. 보궐이란 빈자리를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빈자리에 낡은 것들이 들어오면 시대는 퇴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코로나로 생긴 우리 삶의 빈 자리에 이전의 삶, 닳아버리고 구태의연한 것, 익숙했던 방식들을 놓으려 한다면 뻔히 정해진 미래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전의 삶과 영화를 복원하려는 그리움은 우리의 삶을 과거에 부착시킬 것입니다.
스위스 화가인 외젠트 뷔르낭(Eugène Burnand, 1850~1921)이 그린 <부활의 새벽에 무덤으로 달려가는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시면 어떤 것이 느껴지시나요? 노랗게 떠오르는 여명과 대지를 배경으로 두 제자는 그리움에 사무친 눈빛으로 무덤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손을 심장에 손을 대고 있고, 요한은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두고 있습니다. 왼쪽을 향해 가며, 기울어진 그들의 몸은 다급함과 갈망의 깊이를 느끼게 합니다. 요한과 베드로의 옷의 색깔은 두 제자의 인격적 면모를 읽을 수 있게 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비어버린 마음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리움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어디를 향해, 누구에게로 달려고 가고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그 빈자리에 가짜 신이 들어오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횃불을 든 자처럼
오늘 봉독한 빌립보서의 본문은 개인적으로 부담이 되고 도전을 주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결이 너무나 결연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바랬던 것은 무엇일까요? 횃불을 든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새번역)” “생명의 말씀을 밝혀(개역개정)”
원어의 의미를 생생하게 담고 있는 단어는 ‘밝힌다’입니다. ‘밝혀’는 두 가지 동작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굳게 붙잡다’이고, 또 하나는 ‘앞으로 내민다’입니다. 질흙같이 어둔 밤에 횃불을 움켜 잡고 앞으로 내미는 상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횃불을 든 자처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말씀’이라는 이 횃불을 굳게 붙들고 사는 자입니다. 성경(정경)이란 말은 라틴어로 ‘canon’입니다. 캐논은 ‘자’입니다. 일종의 기준이며 가름대입니다. 말씀을 인생의 자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을 표준으로 삼고 살아가기에 길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생명이고, 말씀인 로고스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지럽고 어수선한 것은 생명의 말씀을 꽉 붙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자꾸 불안과 어둠에 휩싸이는 것은 말씀의 불이 내 인생을 비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자꾸 혼탁해지고 오염되는 것은 말씀의 잣대가 기준점과 분별력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과 인생에 불을 밝히고 안내하는 것이 생명이자 그리스도인 말씀임을 굳게 붙들고 인생 여정 살아갔으면 합니다.
더 나아가 ‘밝혀’에는 불을 내민다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횃불을 내미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생명의 말씀이 나로 인하여 드러나고 빛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가는 말씀이 삶으로 번역될 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가 내 삶에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생명이 나를 통하여 흘러가는 삶입니다. 나의 내면의 불이 누군가에게 등불이 되는 삶입니다. 무의식이 의식으로 번역되어 현실에 구체화되는 삶입니다.
밝힌다라는 이 말씀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생명의 말씀 들고 횃불처럼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생명을 담보하지 않고서는, 죽기를 결단하지 않고서는 횃불 들고 세상에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 그 횃불이 들려진 자는 누가 뭐라 해도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만드는 삶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집단의 가치가 삶을 질식하게 하는 세상 한복판에서도 십자가 희생과 사랑으로, 정직함과 온유함, 따뜻함으로 세상을 물들이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8-19절에서 바울은 빌립도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을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2000여전 년 세상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내 자신의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나의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고자 애쓰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집착하며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있지만 예수는 없고, 기독교인이지만 진짜 그리스도가 아니라 실상은 자기 욕망과 욕심, 돈을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들고 있는 횃불은 무엇인가요? 주위를 찡그리게 만드는 스포트라이트 같은 허영과 욕심의 빛을 내고 있다면 그 불빛을 낮추어야 합니다. 내 자랑과 영광의 횃불을 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면 나의 내면의 꺼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횃불을 들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횃불, 어둠 밤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횃불, 추운 밤 가슴 따뜻하게 해 주는 횃불, 불의한 세상에 평화의 횃불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랑할 것이 있는 삶
바울이 바라는 것은 주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자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자랑거리가 바로 성도들이기를 소원했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달음질한 것과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여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16b)”
인생의 마지막 앞에서,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성도들이 자랑이 되고, 보람이요 기쁨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의 전반기 삶은 세상의 자랑과 영광을 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배경과 학력, 업적 등을 오히려 배설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향점,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향은 늘 주님 앞에 선 자의 모습이었고, 그의 시선은 주님의 오시는 결정적인 날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나이 50이 되어가면서 점점 분명해지고 선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결정적인 날이 있고, 그 날에 인생은 누구나 죽음과 심판대 앞에 서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날에 우리가 살아온 인생은 반드시 저울질을 당합니다. 지금 여기의 삶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15절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고전3:12-15a)
우리는 각자 인생의 집과 작품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과 작품은 불로 검증이 될 것입니다. 자아의 욕망의 터 위에 집을 세운 자는 반드시 불에 타 버릴 것입니다. 자아를 위해 쌓아 올린 욕망의 구조물은 허물어질 것입니다. 오직 자아의 인격이 그리스도와 진정한 관계 속에서 세워진 건물만이 굳건히 남을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하고 열등한 것을 보듬으며 살아간 삶, 부족하지만 내 손을 펴서 사랑하며 산 삶, 섬기며 충직하게 살아온 삶, 길잃은 이들에게 친구가 되어준 삶, 불의한 세상에서 소금되어 맛을 내는 삶이야말로 타지 않을 것이며,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결정적인 날, 주님 앞에 서는 날 자랑거리가 있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물이 되는 삶
바울이 바라던 삶은 무엇인가요? 제물이 되는 삶이었습니다(17절).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개정개정에는 “너희를 위하여 전제로”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제물 위에 포도주를 쏟아붓는 의식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염두해 두고 한 말입니다. 자신의 피를 다 쏟아 희생의 제물이 된다 할지라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아!~ 탄식이 나오는 말씀입니다. 감히 따라갈 수 없는 크기의 사랑입니다. 한없이 작아지고 부끄럽게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크든 작든 이런 제물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희생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생을 시키며, 희생당하며 살고 있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제물이 되는 삶은 인간존재가 걸어가야 할 생의 명령입니다. 어머니가 제물되지 않으면 아이는 자랄 수 없고, 아버지가 제물 되지 않으면 가정은 세워져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바울처럼 거창하게 인류 혹은 커다란 공동체의 과업을 위해 희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발적 희생의 태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런 제물되는 삶을 위해 저는 ‘우분투’라고 말하며 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우분투’라는 말은 남아프리카 줄루족의 인사말입니다. ‘우분투’는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너의 숨이 곧 나의 숨이다)”란 뜻입니다. 넬슨 만델라를 통하여 굉장히 유명해진 말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파르트 헤이트’라고 불리는 지독한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수많은 흑인이 모멸을 경험했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이 심각한 인종차별정책이 1994년 피흘림없이 철폐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우분투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말합니다.(보스의 옷을 벗고 리더의 눈물로 서라_ 조성의/생명의 삶2016년 6월호에서)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우분투를 새기면 우리는 자발적 희생의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네가 있어 기쁘다 할 수 있다면 내 삶은 넉넉해질 것이고, 내가 디디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의 평화가 깃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있어 기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