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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영성 축사사역 스크랩 제6장 분별력이 주어지는 중요한 자세
복음의키 추천 0 조회 108 10.02.09 14: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6장
분별력이 주어지는 중요한 자세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하든지 분별력이 참 중요하다. 특별히 영적전쟁에 있어서의 분별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치유사역에 있어서도 분별력은 필수적이다. 왜냐면 원인이 올바로 분별되어야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알게 되고, 그럴 때 훨씬 더 효과가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가 분별을 잘못하면 기도해도 효과가 적게 나타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적인 분별력이 매우 필요하다.

분별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13-23)

베드로의 이 놀라운 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 예수님은 기뻐하신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셨다. (메시야 되신 것과 십자가가 연결 되어있다.) 그러자 조금 전에 그 놀라운 고백을 한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절대로 안된다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정색을 하시면서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말은 아니다. 베드로의 그 말 뒤에 사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분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다. 베드로는 매우 헌신적이며 누구보다 열심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불과 몇 분 차이로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입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사단의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은 분별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얼마나 분별력이 필요한가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보면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상황에서 가룟 유다라면 몰라도 어떻게 베드로를 통해 사단의 말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베드로 자신도 몰랐다. 이와 같이 분별력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에게 쓰임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넘어진 이유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베드로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생각해서 한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서 하는 말과 행동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성령께서 비춰주지 않으면 모른다. 그래서 겸손한 자세가 중요하다. 이런 일이 사도 베드로에게 나타났다면 악한 세력들은 얼마든지 지금도 우리 모두를 통해서 역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깨어서 분별력을 가지고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분별력이 중요한데, 반면에 이 부분에 있어서 오늘날 많은 혼동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여러 가지 명확하지 않고, 선명하지 않고, 혼동되어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기 원한다.

1. 분별력을 갖게 되는 데는 크게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는 것이 중요하고, 둘째는 영분별의 은사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다윗은 하나님께 구하기를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길을 구했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은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누어진 마음은 우상숭배다. 그리고 나누어진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성경이 거듭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너희가 온 마음을 다하여 주를 찾으라. 그리하면 만나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것이 필수이다. 나누어진 마음은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내가 60%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60만큼 알 수 있고, 30%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30만큼 알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여러분이 90%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도 모른다. 주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여러분이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알 수 있다. 그럼 어떤 사람이 30%만큼 주님을 알고, 60%만큼 주님을 아는가? 그것은 여러분이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찾되 30%만큼 주님을 지속적으로 찾을 때 30%만큼 주님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온 마음으로 주님을 찾되 60%만큼 주님을 찾는 사람은 60%만큼 주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분이 주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을 알기를 원하고, 주님의 은혜받기를 사모해서 집회에 계속 어느 정도 참석했는데, 어느 날 기도하는데 뭔가 그림도 보이고, 하나님 음성도 들리고, 은사도 임해서 기도하면 사람들의 치유가 일어났다. 그러니까 인제 됐다 싶어서 주님을 찾는 것을 중단하고, 자기의 사역을 확장시켜 가는 사람은 그 이상은 절대로 하나님을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 있는 만큼도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왜냐면 주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면 분별력은 점점 사라지고 영은 서서히 죽어가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주님을 찾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나는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모세를 생각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영광 가운데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며,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친구와 같이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했다. 그런데도 모세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기를 원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도 포기했다. 우리가 이러한 자세로 끝까지 주님을 찾게 될 때, 주님을 만나게 될 줄로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림에 있어서도 우리 자신을 돌이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이 바꿔지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떠난다. 그래서 온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주님을 찾는 것이 필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데도 분별력이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는 미혹되기 쉽다. 그래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 다윗이 온 마음으로 주님을 구하는 반면에 하나님의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던 이유도 그래서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분별력을 갖추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진리로 무장하는 것이다.

옛날에 박태경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다. 예를 들면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서 선별작업을 할 때, 자동화시설이 되어 있어서 과일이 자동 라인을 따라 돌아갈 때, 그 앞에 서 있다가 자기 앞으로 과일이 지나갈 때, 상품가치가 없는 것들(썩고, 상처 난 것들)을 숙련된 솜씨로 여지없이 골라내는데, 그렇게 나에게 쏙 잡아 빼는 것 같은 은사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소명이다. 사역하고도 관련이 있다. 또 어떤 분은 이런 얘기도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다고 하면서 나보고 고속도로 티켓을 나눠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고속도로를 타시는 분이고 나는 티켓 나눠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두 얘기가 같은 내용인데 무슨 얘기냐면, 이정도면 됐다 싶으면 달려도 된다는 얘기다.

2.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아닌 것이 보인다.
많은 경우에 어떤 부분들이 있으면, 아닌 부분은 금방 보인다. 그냥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한편으로는 은사로 주어진 것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아닌 것은 보인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로 무장하면 무장할수록 아닌 것이 보이는 것이다. 영적인 분별이나 다른 것에서 참 중요한 것이 뭐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로 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로 무장한다는 것이 항상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면 우리가 날마다 당하는 일들에 성경을 다 인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기록한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모세오경 어디에도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며, 여리고성은 어떻게 무너뜨리며, 가나안 땅은 어떻게 점령하라는 말씀은 없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위에 세워지게 되면 그 부분에 대해서 인용할 수 있는 부분은 없을지라도 그러한 부분들이 깨달아지게 된다.

3.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에게 분별력이 주어진다.

그래서 분별력이 필수인데, 이 분별력을 갖기 위해서 아주 중요한 것은 뭐냐면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별력이 안생긴다. 많이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안된다.

요한복음 7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고 하셨다. 예수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단으로 취급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오순절 등 복음적인 기성교단에서 예수님은 이단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전통에 전혀 안맞기 때문이다. 자기들은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날 일하지 말라고 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일도 안하는데, 그들의 눈에 보기에는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나온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물론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기에 틀린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내 말이 하나님께로 나온 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하셨다.

4. 아무리 마음이 순전해도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미혹된다.

어떠한 자에게 분별력이 주어지느냐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에게 분별력이 주어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리로 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서 말한 대로, 마음이 순전한 것이 중요하다. 왜냐면 나눠진 마음은 우상숭배이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마음이 순수해도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미혹되기 쉽다. 이길수 목사님이 자주 “고무다리 피나게 긁는다.”라는 말을 하는데, 고무다리 아무리 긁어도 피 나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아무리 사모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고무다리 피나게 긁는 것과 똑같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미혹되기 쉽고 그 모든 노력은 허사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을 구해야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아는 분별력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행하는 자세가 있어야 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분별력이 생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가 없으면 분별력이 생기지 않게 된다.

새물결선교회 지하 예배 처소가 마련되는 과정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광고 했었는데, 한분 목사님이 옆에서 지켜보면서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설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져가는 것을 보면서 참 은혜가 되고,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 일이 되어지는 것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은 포도나무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새물결선교회에 오시는 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뭔가 가르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는 우리의 방법대로 어떤 계산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일을 했다면 이제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실제로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이심으로써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부분을 가르치신 것 같았다.

여러분이 만약 모세라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들을 나타냄으로 바로가 항복하자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홍해 앞에 장막을 쳤는데 갑자기 뒤에서 바로의 군대가 쫓아왔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살 길이 없고 솟아날 방법이 없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기 시작하고, 폭동이 일어날 기세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난리가 났다. 그 상황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말고 그 상황에 실제로 처해 있다면 말이다. 참고로 하나님은 전례 없는 일을 하신다. 왜 이 말을 하냐면 우리가 주님을 따라감에 있어서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못가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는데, 믿음의 성격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럼 모세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리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여러분이 모세라면 가능했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 눈으로 보고 행할 수 있는 여건들이 있기 때문에 믿는다고 한다. 그런데 보는 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전혀 길이 없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하셔도 그만, 안하셔도 그만이면 문제가 안되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안하시면 엄청난 피해가 닥친다면 이건 다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심에 있어서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그럼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이것은 분별력과도 같은 것인데, 믿음을 갖는 것은 절대로 이론적으로 배워서 되지 않는다. 여러분이 새물결 선교회에 일년, 이년, 오년, 십년을 다녀도 되지 않는다. 여러분이 실제로 그 삶을 살아야만 믿음을 갖게 되고, 그 삶을 살아야만 분별력이 생기게 된다. 절대로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하루 아침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처음부터 모세와 같은 자리로 인도하지 않는다. 왜냐면 아무도 그렇게 할 사람이 없으니까. 모세는 처음 시내산에서 지팡이 던지는 것부터 시작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서 지팡이 던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순종의 과정을 통해서 그가 자기의 삶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모세가 애굽에 내려갔을 때 하나님이 제일 처음 시키신 일은 바로 앞에서 지팡이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과거와는 달랐다. 왜냐면 이제는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 그 엄청난 바로 왕과 고관대작들 앞에서 큰소리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서 히브리인을 해방시키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했을 때, 모두가 미친놈이라고 크게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실제적으로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분별력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하나님의 길을 배웠으면 그것을 실천해야 된다. 그런데 믿음으로 실천하는 데는 많은 경우 여러분의 그때까지의 모든 것이 달려있다. 지난 주 영광교회 집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참 함께 하셨다. 그 교회는 큰 평수는 아니라도 지하 본당과 지상 3층으로 건물이 지어져 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예전에는 잘 나가다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부터 갑자기 교회에 찬양과 경배를 도입하게 되고, 기도사역을 하게 되고, 또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기존의 메시지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니까 일부 성도들이 싫어했다. 특별히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전도사들이었다. 어느 날은 네 명의 전도사들이 한꺼번에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은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을 믿습니까? 하고 대들었다. 그런 일을 참고 인내하시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한 목사님이다.  그래서 하루는 결심하고 그 전도사들을 불러놓고 나는 이 길을 가기로 결정했으니까 당신들은 같이 따라오려면 오고, 아니면 다른 길을 찾으라고 하셨다. 그 뒤로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거의 100여명이 교회를 떠났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그 목사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길을 발견했으면 어떠한 대가와 희생을 치루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리라 그 각오로 실천해 나갔다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목사님은 그만큼 하나님을 안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따르되 어떤 때는 우리의 모든 것이 다 걸려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합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가는 이러한 실제적인 신앙을 통해서만 분별력이 생긴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분별력이 안생긴다. 이론적으로 아무리 많이 듣고 배워도 그것은 판단하는 것만 생기지 실제는 안된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새물결 선교회에 와서 십자가의 복음이나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설교를 여러 번 듣고 본 교회로 돌아가서 설교를 들으면서 ‘왜 우리 목사님은 율법주의만 설교하시지,’ 그러면서 그 삶을 살지 않으면 판단하는 것만 생기지, 실제는 아무것도 모른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을 걸고, 여러분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함으로 서는 것이 없으면 절대로 분별력이 안생긴다. 그러면 귀만 커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른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판단의 눈만 생기지 실제는 모르게 되어있다. 선교회에 일년, 삼년, 오년와도 속은 안타고 겉만 탄다. 영성사역 다닌다고 하는 많은 분들을 보면 기도하는 모양만 바뀌었지 그 속이 변하지 않아서 겉만 타고 속은 전혀 타지 않았다. 그런 분들은 분별력이 없어서 하나님의 길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얘기하면 엉뚱한 얘기만 하고 있다. 부지런히 전국적으로 좇아다니고 사모함도 있다. 그러나 전혀 하나님의 길에서 행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길에 행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되 여러분의 삶을 걸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분별력이 생긴다.

영분별의 은사가 중요하다. 영분별의 은사란 지금 역사하고 있는 영이 하나님의 영인지 다른 영인지 분별되어지는 것을 말하다. 그러나 우리가 영분별의 은사에 앞서 전반적인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많은 부분들이 분별된다.

5. 분별력은 실제적인 삶을 통해서 주어진다.

전에 내가 포도나무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 되어졌던 일들을 얘기를 한적 있다. 이 얘기는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분별력과 하나님의 실제적인 지식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전에 섬기던 교회를 사임할 때까지, 그 교회에서 사례비로 일백만원 받았다. 개인 제산은 지금도 없지만 그때도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사표를 내면 살고 있는 집을 비워줘야 했다. 그런데 사표내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분당으로 가라고 그러셨는데, 분당은 그 당시 일반 단독주택 방 2개짜리가 삼천만원 이었다. 돈이 많은 분들은 삼천만원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단돈 한 푼도 없는 가운데서 목회자에게 삼천만원은 작은 돈이 아니다. 그런데 그때 내가 할일은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그때 내 입장이었다면 대부분의 분들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왜 못하느냐면, 여러분이 실제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시되 전혀 없는 것 가운데서도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시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면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실 줄로 믿고 여러분의 삶 전체를 드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실제로 키워가지 않으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되 여러분의 모든 삶을 걸고 그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실제로 그 삶을 하나씩 살아가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못 배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없다. 다 넘어지면서 배운다. 그러나 그 삶을 못 배우면 분별력은 없다. 이론적으로 알아도 실제로는 모른다. 그러니까 말하는 것 보면 전혀 엉뚱한 얘기하고, 행하는 것 보면 전혀 엉뚱하게 한다. 자기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틀려도 그 틀린 자체를 모른다. 왜냐면 분별력이 없으니까. 안보이니까 모르는 것이다. 분별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이 없이는 분별력은 있을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신학교 교수들이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알아도 분별력이 많은 것이 아니다.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교 교수가 초신자보다 더 못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왜냐면 분별력은 학문가지고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경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 분별력이 있다는 말도 아니다. 성경을 얼마만큼 알든 그 말씀을 따라 행하되 자신의 삶을 걸고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분별력은 안생기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있어야만 믿음의 삶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에 의한 삶이 안된다. 옆에서 말하기는 쉽다. 예를 들면 어느 목사님이 교회 건축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여기 저기 은행들을 알아보고 다닌다. 그러면 옆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채우시지, 왜 저렇게 믿음 없이 행동할까.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다리면 될 텐데, 그런 말은 누구나 말하기 쉽다. 그러나 막상 자기에게 그 일이 닥치면 절대로 못한다. 다른 사람 판단해서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그 삶을 살지 않으면 절대로 그 삶은 배워지지 않는다.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몇 번 들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절대로 분별력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의 길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 안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배워야 한다. 배운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듯이 주님의 주권아래 들어가서 그분으로부터 배우는 삶이 우리들에게 있어져야 분별력이 있게 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사역을 해도 분별이 안되기 때문에 전혀 하나님의 길과는 상관없이 할 수 있다.

6.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떤다는 말이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를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신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고 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안다는 말이 뭐냐면 거기에는 이런 자세가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여호수아나 사무엘처럼 “여호와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자세다. 그리고 그런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적인 분별력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면 진짜를 알게 되면 가짜는 그냥 식별이 되니까.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9단원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다. “캐나다의 왕립 기마경찰은 위조지폐를 방지하는 훈련을 한다. 경찰국에서는 경관들에게 절대로 위조지폐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한 종류의 진짜 10불짜리 지폐가 존재함을 알 따름이다. 그들은 너무나 철저하게 진짜 지폐에 대해서 연구하기 때문에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구별해 낸다. 당신은 사람들이 위조지폐를 만드는 방법을 다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기마경찰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위조지폐를 만드는지를 연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진짜만을 공부한다. 진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느 것이든지 가짜인 것이다.” 이같이 진짜를 알면 분별력이 생겨서 진짜가 아닌 것은 그냥 식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생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방법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길을 알게 되면, 거짓된 것은 금방 안다. 왜냐면 뭔가 다르기 때문이다. 때로는 정확하게 그것을 설명할 수 없어도 아닌 것을 안다.

7. 말하고 분별력은 다르다.

하나님 말씀 앞에 떤다는 말은 예를 들면, 한번은 직장에서 쉬는 시간에 기도하는데, 전혀 예상치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유학을 가도록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뒤로 그 기도를 할 때마다 환경은 불가능한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yes라고 하셨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절박해졌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을 미국 병 한번 들으면 별일 있어도 미국 가야 되는데, 사실 나는 미국 병이 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만약에 유학을 못 간다면 나는 목회자가 될 수는 없었다. 왜 될 수 없냐면, 목회자가 되면 설교를 해야 될 텐데, 어떻게 성도들에게 “여러분 환경이 불가능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믿음으로 나가세요. 모세를 보고 여호수아, 다윗을 보고 예수님을 보고 사도들을 보세요.” 이렇게 설교해야 될 텐데, 자기는 못했으면서 성경이 거짓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는 거짓말로 설교하는 것인데, 그럼 양심상 목회자는 못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잘 짜신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잘 짜셔가지고 여러분을 붙잡으시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에도 그 상황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하나님이 나를 목회자로 안부르셨다고 생각하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먹어야 하는 것인지 정말 고통만 없지 지옥 같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유학을 가고 안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유학 문이 안열리면 나는 목회자는 못된다는 것이고, 목회자가 못된다는 것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나에게는 그 사건이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 결론적으로 나중에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인도하셔서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돌아왔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왜 하나님 말씀대로 못 순종하느냐면 대가 때문에 못한다. 그러니까 자기 편리 할대로 한다. 나에게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에게 부담되는 것은 안한다. 이 상태로는 절대로 영적인 분별력이 없고, 하나님을 절대로 모른다. 중요한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면 내 삶을 걸고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것을 배워야 된다. 그것을 실천해야 된다. 이건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성도는 성도대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똑같다. 이 삶을 배워가야 하나님께서 더 높은 단계로 인도할 때 그때에도 순종할 수 있게 되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삶을 살아가지 않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야말로 소위 세상이 말하는 위대한 종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셔서 여러분을 사용할 수 없다. 준비가 안돼 있는데 절대로 사용 못하신다.

자기는 안살면서 말은 할 수 있다. 목회자 같은 경우는 설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처럼 실제는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의 삶을 거는 그러한 자세가 없이, 그래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없으면 우리는 있는 분별력도 없어진다. 그러면 말만 남는다. 말하고 분별력은 다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절대로 이론적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는 환경이 좋을 때는 되어진다. 남의 일을 보고 애기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자기가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서야 할 상황이 닥치면 절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왜! 그것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에 의한 삶을 살지 못하면 이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다. 이 말씀이 왜 강조 되냐면, 새물결선교회는 일반성도뿐 아니라 목사님들도 많이 오시는데, 여러분들이 여기 오셔서 여태까지 일반적으로 듣지 못했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길을 발견했어도 여러분이 돌아가셔서 여러분의 삶을 걸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실제를 모르게 되어 있다. 그러면 판단하고 비판하는 눈만 생기게 되어 있다. 안되게 되어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라고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실 때, 자신의 삶을 다 걸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가야 한다. 그래야 분별력이 생기게 된다.

8. 행동하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다.

우리 교회가 처음 개척시기에 성도들도 몇 명 되지 않는데, 교회재정이 한달에 삼백 만원씩 적자가 났다. 그렇다고 목사가 어디 가서 돈을 빌릴 데도 없지만 돈을 꾸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조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주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채우실 때만 기다렸지 할 수가 없었다. 그 상황에 찬양과 경배를 드리면, 많은 사람들이 방문 왔다가 그냥 나갔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가고, 심지어 남아있는 성도들까지도 왜 꼭 그렇게 해야 되냐고, 빨리 교회가 성장해야 적자도 채워질 텐데, 언제까지 그렇게 할 거냐고 압력이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어떻게 주님을 의지함으로 나갈 수 있었는가? 만약에 여기 있는 목사님들이나 성도님들이 그때 내 입장이었다면 대부분 많은 분들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왜 이 얘기를 하냐면 그것이 이론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다. 이게 어느 날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안다고 해서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주시면 전혀 못하는 일을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험을 통해서 자라나야만 가능하다.

나도 전에 많이 넘어졌다. 물론 지금도 넘어진다. 예를 들면 유학을 갈 때 전혀 길이 없었는데, 그때 내 믿음이 하루밖에 못 갔다. 왜냐면 기도하면 하나님은 yes하시니까 믿음이 생기고, 그리고 다시 환경을 보면 낙심되니까. 그러나 그런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깨닫게 하셨다. 그런 과정이 쌓여져 오면서 지금도 전혀 가능하지 않을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생긴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또 나 같은 경우는 이런 것이 있다. 환경이 좋을 때는 상관없는데, 환경이 어려우면 모든 것을 차단하는 습성이 있다. 만약 문이 있다면 모든 문을 닫는다. 그리고 하나님만 쳐다본다. 고집이 생기는데, 그때는 모든 문을 다 닫는다. 친척이건 친구건 그 누구든지 사람이면 다 닫아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한다. 어려움이 닥치면 더 그런 것이 있다.

그런데 때로는 실수하고 넘어질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나도 하나님 말씀을 알고 따라가면서 많이 넘어 졌다. 지금까지 성공한 것을 다섯 가지 얘기했다면 그거에 비해 열배도 더 많이 넘어졌다. 그러나 넘어질지 모르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는 그 삶이 쌓여져야 나중에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전혀 환경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때, 전혀 구원의 여망이 없을 때,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을 때,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의지함으로 그분을 따라가는 삶이 생기지 이론적으로 들었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삶을 배워야 하다. 이 삶이 되어지지 않으면 모든 게 이론에 불과하다. 분별력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진짜 너무 쓸모없게 된다. 쓸모없이 된다는 말은 들었기 때문에 말은 잘 하는데, 자신의 삶에는 행동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사람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있는데 많이 들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권면도 한다. 그런데 자신이 그 삶을 살지 않으면 한사람도 못 변화시킨다. 그리고 교회에서 유익을 끼치기 보다 오히려 많은 해를 끼친다. 사람들을 오히려 판단하게 만들고, 정죄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자기는 아는 것처럼 교만하고, 다른 사람 깔보고 그런 것이 옮겨지게 만든다. 그럼 절대로 변화가 없다. 만약 그런 분들이 교회에서 구역장이 되면 그 구역전체가 옆으로 나간다. 만약 그런 분들이 리더로 세워지면 그 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인다.

9. 정직해야 된다.

우리가 못 따라가더라도 하나님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에 따라 가려고 아등바등 하면서 때로는 눈물 흘리면서 자기가 못하는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는 사람은 소망이 있다. 그러면 그만큼 옆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러면 자기가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변화시킨다. 물론 우리가 하루아침에 안된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이론적으로 백을 안다면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여러분은 10도 모를 수 있다. 그게 정상이다. 10이 아니라 어떤 때는 5도 모를 수도 있다. 이론적으로는 100을 안다고 아무리 떠들지 모르지만 삶이 없기 때문에 절대 변화시키지 못하고, 사람도 망친다.

그런데 자기는 이제 초보라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따라가려고 하는데 안된다. 옛 습관이 남아있고, 옛날 삶의 자세가 남아있고, 또 세상적인 욕심도 남아있고, 옛날 방법이 나오고, 그냥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그냥 아등바등하며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울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낙심도 하면서 하나님 의지하고 서려고 한다. 이렇게 되어지면 5밖에 안될지 몰라도 그 주위에서 보고 있는 사람은 5만큼은 변화된다. 그리고 자기도 5만큼은 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10에 해당하는 일을 맡기실 때, 또 똑같은 자세로 하나님을 찾으면 그만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백을 알아도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은 5를 맡겨도 절대로 못하게 되어 있다. 이론적으로 아는데 자기는 전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고 비방은 많이 할지 모르지만 자기는 그거에 십분의 일도 안되는 일을 당하게 될 때 자기가 비방하는 그대로 하게 된다. 왜냐면 그렇게 하는 삶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분별력이다. 분별력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가운데 배워진다. 안살면 절대로 분별력이 없다. 이건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다르다. 우리 가운데 오늘날 분별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을 리더로 세워야 된다. 그래야 올바로 인도해 간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 소경은 분별력이 없는 자를 말한다. 이론적으로 모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이론적으로 박사들이었다. 신학박사인 그들에게 너희가 소경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모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별력은 하나님 말씀에 자신의 삶을 거는 그 자세를 통해서만 생긴다. 지금 우리에게 그게 필요하다. 그 자세를 가지고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대로 순종하기 시작하면 놀라웁게 변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되어져야 실제적인 믿음이 5가 되기도 하고, 10이 되기도 한다. 그래야 비로소 여러분들은 리더가 된다.

10. 은사만 보고 세우지 말라

최근에 하나님께서 예언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주셨다.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목회철학이기도 한데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나타나는 은사만 보고 일군을 세우지 말고 열매를 보고 세우라” 이런 부분이 되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은사가 나타나더라도 절대로 좋은 영향을 못 미친다. 예를 들면 한 구역을 맡겨도 절대로 그들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왜냐면, 자신이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인도하겠는가? 자기가 먼저 실천하지 않으면 절대로 못보게 되어 있다. 자기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로 순종하여 동행하는 삶을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분별력은 없게 되어 있다. 그것이 필수다. 너무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에게 지금 이 부분을 말씀하고 계신 것 같다. 요즘 들어와서 여러 가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이시면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다. 죠지 뮬러 목사님은 오만 번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분이 오만 번 기도응답 받은 내용과 그분의 설교와 그분의 자서전을 달달달 외운다고 해서 그 삶이 여러분에게 이뤄질까? 물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쓰시는 방법은 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똑같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시냐는 것이다. 왜 우리는 안되냐면, 그분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이론이 아니었다. 그분은 실제로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을 배운 사람이다. 고아가 많을 때는 이천 명이나 되었다. 그 많은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했겠는가? 그런데 그분은 필요를 위해서 단 한번도 사람에게 도움을 구한 적이 없었다. 때로는 10년 동안 하나님께서 하루치 먹을 양식만 채워주시기도 하셨다. 여러분들은 그 말을 들을 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 상황이 닥치면 믿음이 없이는 피 말리는 것이다.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의지하고서야 그 다음 날 양식이 채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이론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죠지 뮬러 목사님이 고아들의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실제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삶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 일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배웠기 때문에 오만 번 기도응답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리고 특별히 말씀에 자신의 삶을 거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여러분들에게 죠지 뮬러에게 주셨던 은혜, 허드슨 테일러에게 주셨던 은혜, 혹은 사도들이나 그 외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셨던 은혜, 그 은혜보다 더 크신 은혜들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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