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라!(출15:22-27)
201710.8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유대인들 고대문헌인 미드라쉬(Midrash)에 ‘다윗왕의 반지’라는 우화가 있다.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던 다윗왕이 신하들에게 자신이 교만해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절망에 빠졌을 때는 용기를 낼 수 있는 문구를 반지에 새겨서 가져 오도록 명령했다. 신하들은 보석 세공사를 시켜서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기는 했는데, 왕이 요구한 적당한 문구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솔로몬 왕자에게 찾아가서 지혜를 구했다. 그랬더니 솔로몬 왕자가 이런 대답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 hoc quoque transibit, 호크 쿼케 트란시비트)”
우리들이 한 평생 동안 순례자의 길을 가다보면, 마치 바다 물결의 곡선처럼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의 때를 만날 때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들은 또한 지나갈 때가 온다. 그러므로 무슨 일든지 섣불리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아야 한다. 설령 지금의 상황이 내가 기대했던 것이 아닐지라도, 오히려 조만간에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실 것이다.
출애굽기 1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직후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홍해를 건넌 후 그들은 수르광야 쪽으로 사흘 길을 걸어서 마라(Marah)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먹을 수 없는 물이 있었다.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출15:22-23)
마라에서 식수를 기대했던 백성들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원망의 화살을 모세에게 돌렸다. 그랬더니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쓴물이 단물로 바뀌었다. 그때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여호와 라파)라는 유명한 말씀을 주셨다(출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15:26)
그리고 그곳을 출발해서 불과 얼마가지 않아서 오아시스가 있는 엘림(Elim)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마라에서 엘림까지 거리는 불과 11km 정도 밖에 안된다. 그러니까 아무리 늦어도 한 나절이면 넉넉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하나님은 마라 뒤에 곧 바로 엘림을 대기 시켜 놓으셨던 것이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출15:27)
이 모든 과정들을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나 모세가 기도했을 때, 예정에 없던 기적을 갑자기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마라에 가면 쓴물이 있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면서도 그곳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치료하는 여호와이심”을 깨닫게 하시고, 그 후에는 엘림으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으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마라의 고난은 죽이기 위한 고난이 아니라, 더 큰 축복을 위한 고난이었다. 이 점이 이 시간 우리들에게 주시는 깨달음의 문(門)이다.
그런데 쓴물이 단물 되는 과정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적인 패턴(불평을 통해 얻어내는 방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오히려 어려움이 왔을 때, “기도를 통해 응답받는 방식”을 보였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과거나 지금이나 불평하는 방식을 통해 뭔가를 얻어내는 것은 가정에서나 동네에서 또는 교회 안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분열을 일으키기 쉽다. 자칫하면 하나님의 마음까지 아프게 할 수 있다. 신앙이 성숙해 진다는 것은 불평보다 기도로, 상황보다 하나님을 먼저 보는 습관으로 삶의 패턴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반복해서 훈련시킨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들이 잘 아는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라는 찬송에 이런 가사가 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정말 그렇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의 뒤편에는 반드시 은혜의 엘림이 있다. 하나님은 과거나 지금이나 우리들 각 사람의 상황을 다 알고, 다 보고, 다 듣고 계시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3:16)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오랜만에 본 손주들이 너무 사랑스러울 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종종 하시는 행동이 있다.
“우리 아기 너무 예쁘네……. 할머니 볼에 뽀뽀 한번만 해줘봐”
그래서 할머니의 볼에 아이가 ‘쪽~’하고 뽀뽀해 주면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신다. 거기에 앙증맞은 소리로 “하므니 따랑해요”라고 하면서 품에 안기면, 할머니는 거의 실신지경이 되고, 집안에는 웃음꽃이 활짝 핀다.
“아이쿠 내 새끼 이뻐라! 뭐 먹고 싶어? 말해봐. 뭐 필요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들이 마라같은 상황 속에서 입술을 열어 간구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볼에 뽀뽀하면서 ‘하나님 따랑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화려한 수식어를 사용해서 유창하게 기도하지 못했다고 야단치지 않으신다. 오히려 너무도 간절히 듣고 싶어 하셨던 우리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나님의 가슴은 찡~해 지신다. 회초리를 드시려고 하다가도 마음이 약해지신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마라같은 고난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고, 더 지혜로운 사람은 고난이 오기 전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고난이 오기 전에는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이고, 더 어리석은 사람은 고난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이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고난이 왔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부인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마라 너머에 엘림이 있다. 마라의 고난은 백성들을 죽이기 위한 고난이 아니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게 하는 축복의 고난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힘을 내자. 어떤 상황에 있다할지라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들을 내 것으로 취하는 삶의 방식’을 택하자. 이 시간 이러한 우리의 결심과 믿음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