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문화(東洋文化)의 향기<8>
<3>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
당송8대가(唐宋八大家)는 성현(聖賢)들이라기보다는 시문(詩文)에 능했던 분들로, 당(唐)나라 시인 2명과 송(宋)나라 시인 6명을 일컫는데 청(淸)의 건륭제(乾隆帝) 때 시문작가(詩文作家) 심덕잠(沈德潛)이 이들의 작품들을 편집하여 발간한 당송팔대가문독본(唐宋八大家文讀本) 총 30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문묘(文廟)나 향교(鄕校)에 배향(配享)되는 성현(聖賢)들로 꼽히는 인물들은 아니다.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구양수(歐陽脩)/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
(1) 한유(韓愈: AD 768 ~ 824<향년 56세>) 중국 당(唐)나라
자(字)는 퇴지(退之), 호(號)는 창려(昌黎), 시호(諡號)는 문공(文公).
성리학(性理學)의 원조(元祖)로 산문(散文)의 대가이며 탁월한 시인(詩人)
25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냈다.
그가 저술(著述) 원도(原道), 원성(原性) 등은 중국문학의 백미(白眉)로 꼽히며 그가 주장한 고문체문장의 대표작이 되었다.
(2) 유종원(柳宗元: AD 773 ~ 819<향년 46세>) 중국 당(唐)나라
이명(異名)은 유하동(柳河東). 자(字)는 자후(子厚)
당(唐)나라의 뛰어난 시인(詩人)이며 문장가(文章家)로, 관직(官職)에서 좌천(左遷)되자 좌절(挫折)의 우울함을 산수(山水)로 술회하며 뛰어난 자연시(自然詩)와 산문(散文)으로 남겼다.
저서(著書)로는 영주팔기(永州八記), 소석담기(小石潭記), 원가갈기(袁家渴記), 포사자설(捕蛇者說), 삼계(三戒), 부판전(蝜蝂傳), 유하동집(柳河東集),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 등이 있다.
(3) 구양수(歐陽脩: AD 1007 ~ 1071<향년 65세>) 중국 송(宋)나라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진사시험에 장원급제하여 뤄양(洛陽)의 유수추관(留守推官)을 제수되었으며 나중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재직했는데 유교원리를 통해 정계(政界)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다방면에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고고학연구에도 일조했고, 화가로서는 새로운 문인화(文人畵) 화법을 창안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著書)로는 역사서인 오대사기(五代史記), 붕당론(朋黨論), 신당서(新唐書), 취옹정기(醉翁亭記)
(4) 소순(蘇洵: AD 1009 ~ 1066<향년 53세>) 중국 북송(北宋)
자는 명윤(明允), 호는 노천(老泉)
28세 때 과거에 낙제하자 그때까지 지은 글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두문불출하며 오로지 독서에 전념했다. 그 결과 6경(六經)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두루 꿰뚫게 되었고, 단시간 내에 수천 언(言)의 글을 지을 수 있는 대문장가(大文章家)가 되었다고 한다. 소식(蘇軾), 소철(蘇轍)은 그의 두 아들로, 함께 3소(三蘇)로 불리며, 그를 노소(老蘇)라 부른다.
저서(著書)로는 권서(權書), 소로천전집(蘇老泉全集), 관중론(管仲論) 등이 있다.
*6경(六經)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5경(五經)에 악경(樂經) 추가
(5) 소식(蘇軾: AD 1037 ~ 1101<향년 64세>) 중국 송(宋)나라
자(字)는 자첨(子瞻), 본명은 식(軾), 호(號)는 동파거사(東坡居士), 소동파(蘇東坡). 소순(蘇洵)의 아들.
송(宋)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모두 능했다.
소식은 일찍 과거에 급제했으나 당시 정계는 신법(新法)과 구법(舊法)을 놓고 당파로 갈려 혼란스러웠다. 구법파(舊法波)인 소식은 당쟁에 휘말려 온갖 고초와 유배생활을 했는데 복권(復權)되어 상경하다가 병이 들어 객사(客死)한다.
저서(著書)로는 시문집(詩文集)인 동파칠집(東坡七集), 수필집(隨筆集)은 답사민사론문첩(答謝民師論文帖), 제황기도문(祭黃幾道文), 전적벽부(前赤壁賦),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그림으로는 행목괴석도(枯木怪石圖), 죽석도(竹石圖) 등이 있다.
(6) 소철(蘇轍: AD 1039 ~ 1112<향년 73세>) 중국 송(宋)나라
자(字)는 자유(子由), 호(號)는 영빈(潁濱), 난성(欒城)이고 소식(蘇軾:소동파)의 동생이다.
형 소식(蘇軾)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으나 형과 마찬가지로 신구법(新舊法) 정쟁(政爭)에 휘말려서 파직된 후 대중대부(大中大夫)로 복직이 되지만 사임하고 창작생활을 하며 말년을 보낸다.
문학 분야에서 아버지와 형의 영향을 받아 뛰어난 작품들을 쏟아내는데 황주쾌재정기(黃州快哉亭記), 무창구곡정기(武昌九曲亭記) 등은 송대(宋代)에 나온 산문(散文) 중 명작으로 꼽힌다고 한다.
그 밖에도 춘추집해(春秋集解), 노자해(老子解), 고사(古史), 난성집(欒城集) 등이 있다.
(7) 증공(曾鞏: AD 1019 ~ 1083<향년 64세>) 중국 북송(北宋)
자(字)는 子固(자고), 시호(諡號)는 文定(문정).
소식(蘇軾) 소철(蘇轍)과 함께 급제한 후 문풍(文風)을 일신해서 명성을 얻었으며 소식(蘇軾) 형제와는 달리 무난한 관료생활을 하며 명성을 얻었고, 중서사인(中書舍人)까지 올랐다.
저술활동으로는 서발(序跋), 잡기(雑記) 등에 우수한 작품이 많고 전국책목록서(戰國策目錄序)가 유명하며 시문집(詩文集)으로 방대한 분량의 원풍류고(元豊類藁), 속원풍류고(續元豊類藁), 융평집(隆平集)이 있다.
(8) 왕안석(王安石: AD 1021 ~ 1086<향년 65세>) 중국 송(宋)나라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
대송(大松)에 통례법(統例法:舊法)에 대립되는 신법(新法)이라는 혁신정책을 단행하여 대개혁을 시도(試圖)한 것으로 유명하며 신구법(新舊法) 지지자들의 대립으로 일대 혼란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왕안석은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정계에 발을 들여놓는데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오르자 그는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시역법(市易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 새로운 법령(新法)을 시도하여 공포하면서 신구법(新舊法)을 놓고 파벌(派閥)이 형성되어 혼란에 빠진다.
중국에 통일제국이 세워진 이래 전례 없는 규모로 단행된 왕안석의 개혁은 비록 항상 기대했던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었지만, 백성들의 도덕적인 수준을 향상시키고 그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며 나가서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데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정계(政界)에서 은퇴한 후 그는 어원연구(語源硏究)에 관한 저술 및 학문을 계속하였는데 유려한 시문(詩文)들, 특히 선종(禪宗)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작품들을 쏟아내어 높이 평가받고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