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일기 107
광릉 봉선사와 춘원 이광수
수양대군 세조의 능 덕택에 잘 보존된 광릉 숲길.
요즘이야 수목원까지 단장되어 더 유명해졌지만
초입부터 가지런한 전나무 고목은 근교에서는 드물게
심산유곡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광릉숲 초입 상가촌에서 왼켠으로
불과 몇 백 미터에 봉선사 산사(山寺).
절집으로 들어가기 직전 늘어선 부도들 틈에
‘춘원 이광수 문학비’가 어울리지 못하고
낯선 모습으로 뎅그러니 서있다.
장방형의 검은 대리석에 꾸밈도 없이
그저 밋밋한 모양의 돌비 하나.
대문호의 비석이라기엔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긴 이곳에 춘원의 비(碑)가 있는 줄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고,
광릉과 봉선사를 찾아드는 수많은 발길 중에
여기 잠깐이나마 눈길을 주는 이가 얼마나 있으랴.
춘원은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1917년)’을 발표하여
한국 현대 문학의 첫 손가락 꼽히는 개척자임에 틀림없으나
만년의 친일 행적으로 세상의 돌팔매질을 당해야 했다.
짤막한 생애를 그나마 훼절한 지식인이란
오명을 남긴 채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까마득한
전설로 묻혀버린 불운한 선구자여.
광복 직후의 반민족 배신자로 몰리는 소용돌이 속에서
사릉(思陵)과 봉선사를 오가며 고뇌와 번민,
그리고 피를 말리는 회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시 봉선사 주지로 있던 팔촌 동갑나기 아우
운허(耘許) 스님 이학수의 배려로
여기서 머무르며 은거의 세월을 보냈다.
6.25로 납북될 때까지 봉선사 다경향실에 은거하면서
집필도 하고 절에서 운영하는 광동중학교에 나가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다경향실(茶經香室)은 노스님이나 주지스님이 머무는
요사채를 이르는 당호로서, 경전과 더불어
차의 향기가 함께한다는 의미다.
봉선사의 다경향실은 춘원으로 하여 더욱 유명해졌지만,
그가 머물던 건물은 전쟁에 잿더미가 되고
지금은 ‘다경향실터’ 다섯 글자를 새긴 자연석 작은
돌만이 지키고 있을 뿐이다.
춘원은 큰법당 뒤 등성이 너머
옹달샘물을 길어다 차 끓여 마시기를 즐겼다.
화로에 불 불어라 차 그릇도 닦았어라
바위샘 길어다가 차 달일 물 끓일 때다
산중에 외로 있으니 차 맛인가 하노라
내 여기 숨은 줄을 알릴 곳도 없건마는
듣고 찾아오는 벗님네들 황송해라
구태여 숨음 아니라 이러거러 왔노라
찬바람 불어오니 서리인들 멀다 하리
풀잎에 우는 벌레 긔 더욱 무상코나
저절로 되는 일이니 슬퍼 무삼하리오
출처: 재경청주중고4042동기회 원문보기 글쓴이: 浪山이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