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관은 관계가 아니다. 기억이 추억이 아니듯이 ... 차히가 차이가 아니듯이. > ,
제3장 이미지의 잔존 - 기억과 정신 [정신 -> 영혼]
Ch. 3 De la survivance des images - La mémoire et l'esprit 147.
§01 순수 추억 (Le souvenir pur 147-152)
§02 현재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En quoi consiste le présent 152-156)
§03 무의식에 대해(De l'inconscient, 156-165)
***
§04 과거에서 현재로 연관 (Rapport du passé au présent 165-173)
그러나 우리는 커다란 실천의 장점 때문에 사실들의 실재적 순서를 역전시키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으며, 공간에서 이끌어낸 이미지들에 어느 정도로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어디에추억이 보존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물리-화학적인 현상들이 뇌 속에서일어났고, 뇌는 신체 속에있고, 신체는 그것이 잠겨있는 공기 속에있다는 등등을 생각한다.그러나 일단 완성된 과거는, 만일 그 과거가 보존된다면, 과거는 어디에 있는가?그 과거를 뇌수질 속에 분자적인 변양의 상태로 놓는 것은 단순하고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때 현실적으로 주어진 저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잠재적 이미지들이 의식 속으로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문을 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뇌가 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될 수 없다면, 우리는 축적된 이미지들을 어떤 창고에다 놓을 것인가?
포함하는 것과 포함되는 것의 연관이 외견상 명백하고 보편성을 필연성에서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데, 그 필연성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공간을 항상 열어 놓고 있고, 우리 뒤에 지속을 항상 다시 닫아버리는 것이다.왜냐하면 사람들은 한 사물이 다른 사물 속에있다는 것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제시에 따라서 한 사물의 [과거의 자체적] 보존의 현상을 전혀 밝히지 못했다. 게다가 과거가 뇌 속에 축적된 추억의 상태로 잔존되어 있다 것을 한 순간 인정해보자. 그 때 뇌는 추억을 보존하기 위하여 적어도 뇌 자체를 스스로 보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뇌는 공간속에 너비로 된 이미지인 한에서는 결코 현재적 찰나 이상을 점유하지 못한다. 뇌는 그 나머지의 물질적 우주의 나머지 전체와 더불어 끊임없이 갱신되는(renouvelée) 우주적 생성의 한 절단면을 구성한다. 따라서 한편 당신들은 이 우주가 지속의 매 찰나에 소멸하고, 또 전정한 기적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166] 아니면 다른 한편 당신들은 당신들이 의식에게 거부한 현존의 연속성을 우주에게 이전해야만하고, 의식의 과거를 실재성으로 만들어서 그 실재성이 의식의 현재 속에서 잔존하며 이어지게 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당신들은 물질 속에 추억을 축적함에서는 아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반대로 당신들이 심리학적 상태들에게 거부했던 이 과거의 독립적이고 총체적인 잔존을 물질적 세계의 상태들 전체성으로 넓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거의 자기 잔존(survivance en soi)은 하나의 형식으로든 또는 다른 형식으로든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잔존을 생각하기에 겪는 난점은 시간 속에서 기억들의 계열에게, 공간 속에서 순간적으로(instantanément) 자각된 물체들의 일체에만 진실하다고 하는 포섭관계[포함하는 것과 포함된 것의 관계]의 이런 필연성(cette necéssité)을, 우리가 부가한다는 사실로부터 단순히 오는 것이다. 근본적인 착각은 흐름의 과정 중에 있는 지속 자체에게 우리가 지속 안에서 실행하는 순간적인 절단면들의 형식을 지속 자체에 이전하는 데 있다.
그러나 가정상 있기를 그친 과거가 어떻게 스스로에 의해 보존될 수 있겠는가? 거기에 진정한 모순이 있지는 않는가?문제는 정확히 과거가 있기를 그쳤는지 아니면 단순히 유용하게 되기를 그쳤는지를 아는 일이라고 우리는 대답한다. 현재란 단순히 만들어지는 무엇(ce qui se fait)인데, 당신들은 현재를있는 무엇(ce qui est)이라고 임의적으로 정의한다. [그러면] 현재적 찰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있지않으며, 그 경우에 당신들은 미래로부터 과거를 분리하는 이런 불가분적인 한계를 이해한다. 우리가 이 현재를 마치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 그 현재는 아직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를 마치 현존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 그 현재는 이미 지나갔다. 반대로 만일 당신들이 의식에 의해 구체적이고 실재적으로 체험된 현재를 생각한다면, 이 현재는 대부분 무매개적 과거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빛에 대한 가능한 가장 짧은 지각작용이 지속하는 일초의 분할 속에는 수조의 파동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167] 그것의 첫째 파동은 마지막 파동으로부터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누어진 간격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당신들의 지각작용은 아무리 순간이라 하더라도,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회고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지각작용 전체는 이미 기억이다.우리는 실천적으로 단지 과거만을 지각하고,순수 현재는 미래를 잠식하는(ronger) 과거로부터, 포착할 수 없는 진행이다.
따라서 의식은 미래를 실현하려고 또 미래에 결합되려고 미래에 기대어 작업하는 과거의 무매개적인 부분을 매 찰나에 자신의 미광으로 밝힌다. 이처럼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결정하는 데만 오로지 사로잡혀 있으면서, 의식은 우리의 현재적 상태와 함께, 즉 우리의 무매개적 과거와 함께, 유용하게 조직화될지도 모를 과거 속으로 더 멀리 후퇴한 우리 상태들의 추억들 위에 자신의 빛의 약간을 퍼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호함(obscure)속에 머문다.
우리가 위치해 있는 곳은 바로 우리 역사의 밝혀진 부분이며, 그것은 행동의 법칙이라고 하는 삶의 근본적인 법칙 덕분이다. 이로부터 그림자 속에 보존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추억들을 생각하는 데서 우리가 겪는 난점은 나온다. 따라서 과거가 총체적 존속(survivance intégrale)을 인정하기를 우리가 혐오하는 것은 우리의 심리학적 삶의 방향(l’orientation) 자체에 기인한다. 우리의 심리학적 삶은 상태들의 진정한 펼침이며, 그 펼침에서 우리는 완전히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펼쳐지는(se dérouler) 것을 바라보는데 관심이 있다. (167)
우리는 이렇게 해서 오랜 우회로를 거쳐서 출발점으로 되돌아 왔다.우리는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두 기억들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하나의 형식은] 유기체 속에 고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가능한 다양한 질문들에 적합한 대응을 보장하는데 영리하게 장착된 [신체]기제의 일체와 다르지 않다.이것은[기억의 한 형식은] 우리를 현재적 상황에 적응하게 하고 우리가 감당하는 행동들은, 때로는 완수하고 때로는 단순히 시발적인 반작용들로, 그러나 항상 다소간 알맞은 반작용들로 이어지게 한다. 기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습관이므로, 이것은[기억의 한 형식은] 우리 과거 경험을 연기하게(jouer)시키는 것이지, 경험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진정한 기억이다. 이것은 의식과 공연적(coextensive)이어서 우리의 모든 상태들이 스스로 생겨남에 따라 차례로 유지하고 정렬하며, 각 사실(fait)에게 자기의 위치를 남기면서, 따라서 기억에게 사실의 날짜를 표시하며, 첫째 종류의 기억처럼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현재 속에서가 아니라, 결정적인 과거 속에서 매우 실재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기억의 두 형식들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면서도, 우리는 이것들의 연결(lien)을 제시하지 못한다.신체 그 위에서, 과거 행동들의 축적된 노력을 상징하는 신체의 기제와 더불어, 상상하고 반복하는 [둘째] 기억이 허공에 매달린 채로 떠다닌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무매개적 과거만을 지각한다면, 만일 현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이미 기억이라면,우리가 처음에 분리했던 두 항들은내밀하게일체를 이루어 접합될 것이다.
이 새로운 관점에서 고려할 경우, 실로 우리의 신체는 우리의 표상을 변함없이 다시 태어는 부분이자, 항상 현재적 부분, 또는 오히려 매 찰나에 막 지나간 부분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이미지 그 자체인 신체는 이미지들을 축적할 수 없다.왜냐하면 신체는 이미지들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간 지각작용들을 또는 심지어 현재하는 지각작용들까지도 뇌 속에 위치화시키려고 하는 기획은 가공적(chimérique, 허구적)이다. 이미지들은 뇌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뇌가 이미지들 안에 있다. 그러나 이 개별적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들 가운데 영속하며, 내가 그 이미지를 나의 신체라고 부른다. 그 개별적 이미지는, 우리가 말했듯이, 매 순간 우주적 생성의 한 횡단면(une coupe transversale)을 구성한다. 따라서 그것[뇌, 신체]은 받아들인 운동과 내보내는 운동의 통행 장소(lieu de passage)이며, [169] 즉 나에게 작동하는 사물들과 내가 작동을 행사하는 사물들 사이의 연결선(le trait d'union), 한마디로 감각-운동적인 현상들의 자리(le siège)이다.
<그림 4>(p. 169) [‘의식의 삼차원적 공간도표’]
평면 P
원뿔(고깔)이 마나는 점 S
고깔의 밑면(원)의 양쪽 AB
[* 우리는 내재의식으로서 고깔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을 거꾸로 놓고 설명할 것이다.]
원뿔 SAB로 나의 기억(mémoire) 속에 축적된 추억들(souvenirs)의 전체성을 나타낸다고 하면, 밑면 AB는 과거 속에 자리잡아 부동적으로 머물러 있는 반면, 꼭지점 S는 매 찰나 나의 현재를 그리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서, 또한 끊임없이 우주에 대한 나의 현실적 표상의 움직이는 평면 P에 접하고 있다. 신체의 이미지는 S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평면 P의 일부를 이루면서, 그 평면을 구성하는 모든 이미지들로부터 발산되는 작용들을 받아들이고 되돌려 보내는 데 그친다.
신체의 기억[첫째 기억 형식]은, 습관이 조직한 감각-운동 체계들의 전체로 구성되므로, 과거의 진솔한 기억 [둘째 기억 형식]이 기초로서 사용하는 거의 순간적인 기억이다. 이 두 기억들은 분리된 두 가지 사물들을 구성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말했듯이, 신체의 기억은 단지 경험의 움직이는 평면 속에 [둘째] 기억에 의해 삽입된 움직이는 첨점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두 기능들은 상호 지지점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한편 과거의 기억은 감각-운동 기제들에게 모든 추억들을 제시하는데, 이 추억들이 그 기제들의 임무 속으로 기제들을 인도할 수 있고, 경험의 가르침에 의해 암시된 의미 속으로 [신체]운동적 반응들을 이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인접성과 상사성에 의한[관념]연합작용들이 정확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감각-운동적 장치[신체 기제]들은 무력한 추억들에게 즉 무의식적 추억들에게 신체를 취할 수단을, 즉 물질화될 수단을, 결국에는 현재들로 될 수단을 제공한다. 실재로 하나의 추억(un souvenir)이 의식에 다시 나타나기 위해서, [170] 순수 기억(la mémoire pure)의 높이[깊이]로부터 행동이 완수되는 정확한 지점에까지 내려가야[올라가야]만 한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로부터 호출(l’appel)이 출발하며, 추억은 호출에 응답한다. 현재 행동의 감각-운동의 요소들에게서 그 추억은 생명을 주는 열기(chaleur)를 빌려온다.(170)
우리가 “잘 균형 잡힌 정신들[정령들, 일반인들]”을, 다시 말하면, 삶에 완전하게 적응한 사람들을 알아보는 것은, 이 두 상보적인 기억들[기억의 두 형식들]이 서로의 안에 정확하게 삽입되고, 견고하게 일치한다는 것이 아닌가?행동인을 특징짓는 것은 그가 어떤 주어진 상황의 도움의 요청에서 거기에 연관된 모든 추억들을 불러내는데 있어서 신속함에 있다. 그러나 그에게 무용하거나 무차별적인 추억들은 의식의 문턱(le seuil)에서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을 만난다. 아주 순수한 현재 속에 산다는 것은 자극에 대해 그것을 이어가는 무매개적 반응에 의해 응답하는 것이고, 그 산다는 것은 하등 동물에게 고유한 것[본능]이다. 이렇게 처신하는 인간은 충동자(un implusif)이다. 그러나그 인간은 과거 속에서 사는 즐거움을 위하여 과거 속에 사는 그런 행동에 그다지 잘 적응하지 못한다.그리고그에게서 추억들은 현재 상황에 대해 별 이득도 없이 의식의 빛으로 출현한다. 그는 더 이상 충동인이 아니라 몽상자(un réveur)이다. 이 두 극단들 사이에서, 현재 상황의 윤곽들을 정확히 따르기에 충분히 유연한, 그러나 모든 다른 호출에 저항하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가진, 기억의 행복한 성향이 스스로 자리를 차지한다. 양식 또는 실천적 의미도 그럴듯해도 다른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에게서 자발적 기억의 비범한 발달은 바로 그들이 기억을 아직 행동과 연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정확히 기인한다. 그들은 보통 찰나의 인상을 습관적으로 따르며, 그들에게서 행동이 추억의 지시들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거꾸로 그들의 추억들은 행동의 필연성들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덜 분별력을 가지고 상기하기 때문에, 더 용이하게 [추억들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지성이 발달함에 따라, 외견상 기억의 감소는 추억들을 작동들(les actes)과 함께 증가하는 조직화에 기인한다. 이처럼 의식적 기억은 침투작용의 힘으로 얻은 것을 부피로(en étendue, 신체로) 상실한다.의식적 기억은 처음에는 꿈들로부터 기억의 용이함을 가졌으나, 그러나 [귀결로서] 그것은 분명히 실재적으로 의식적 기억이 꿈꿨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적 발달이 어린 시절의 발달을 그다지 넘어서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사람들은 자발적 기억에 대한 동일한 과장을 관찰한다.한 선교사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길게 설교한 후, 그들 중 한사람이 그 설교를 원문 그대로, 동일한 몸짓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과거가, 우리에게 현재적 행동의 필연성에 의해 억제되었기(inhibé) 때문에, 거의 전적으로 감쳐져 있는 경우라면, 우리 과거는 이런 모든 경우들에서, 즉 우리가 꿈의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다시 위치하기 위해 효과적 행동에 무관심해지는(désintéresser) 경우에서, 의식의 문턱을 넘어설 힘을 회복할 것이다. 자연적이건 인위적이건, 수면은 바로 이런 종류의 분리(un détachement)를 야기 한다. 사람들은 최근에 우리에게 수면 중에 감각적 신경 요소들과 운동적 신경요소들 사이에 접촉의 중단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비록 이 기발한 가설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면에서는 신경계의 긴장의 이완을, 적어도 기능적인 이완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신경계는 각성시에는 항상 받은 자극을 적절한 반응으로 이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몇몇 꿈들에서도 몇몇 몽유병적인 상태들에서도 기억이 “고양(exaltation)”이 있다는 것은 평범한 관찰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폐기되었다고 믿었던 추억들이 그 때 놀라운 정확성을 가지고 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추억들 속에서는] 우리는 완전히 망각한 어린 시절의 장면들을 그 모든 세부사항 속에서 다시 산다. 우리는 언제 배웠는지 더 이상 회고하지 못하는 입말들을 말하기도 한다.그러나 이점에 관해서, 익사자들과 교수형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갑작스런 질식의 사례들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더 교훈적인 것은 없다. 다시 살아나게 된 주체는 짧은 시간에 자신 앞에 자기 삶의 역사에서 망각되었던 모든 사건들이 그 가장 사소한 사건들의 상황들과 더불어, 이 사건들이 일어났었던 순서 고대로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한 인간 존재가 자신의 현존을 살아가는 대신에 자신의 현존을 꿈꾸었으리라고 여길 때, 그는 아마도 이렇게 자신의 시선 아래 매순간 자신의 과거 역사의 무한히 많은 세부사항들을 간직 하리라. 그리고 반대로 [다른] 한 인간 존재가 이 기억[과거 역사]을 이런 기억이 생성한 모든 것과 함께 더불어 몰아냈으리라고 여길 때, 그 자는 자신의 현존을 진정으로 표상하는 대신에 끊임없이 자기의 현존을 연기[놀이]하고 있었을 것이다.의식적 자동인형과 같은, 그는 자극을 적절한 반응으로 이어가는 유용한 습관들의 경사를 따를 것이다.
첫째 인간은 개별적인 것으로부터도 심지어는 불가분적인 것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각 이미지에다 시간 속에서 날짜와 공간 속에서 위치를 남기면서, 그는 그것이 다른 이미지들과 어디서 닮았는지 보다는, 한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가 어디서 차이가 나는지를볼 것이다. 반대로 둘째 인간은 항상 습관에 끌려서, 한 상황이 앞선 상황과 실천적으로 닮아있는 측면만을, 한 상황에서 분간해내리라. 아마도 보편자를 사유할 수 없으면서도, 왜냐하면 일반관념은 회고된 많은 이미지들의 적어도 잠재적 표상을 가정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 인간이 진화하게 될지 모를 것은 보편자 속에서 이다. 따라서 습관과 행동의 관계는 일반성과 사유의 관계와 같다.
그러나 이 두 극단적인 상태들은, 한편 모든 관조적 기억이 자신의 관점(sa vision)에서 특이성[단일한 것]만을 포착하는 극단적 상태와, 다른 한편 모든 운동적 기억이 자신의 행동(sa action)에게 맞는 일반성의 표시를 각인하는 상태인데,단지 예외적인 경우들에서만고립되어 충만하게 스스로 드러낸다. 정상적인 삶에서, 이 상태들은 각자가 자신들의 원본적인 순수성의 어떤 것을 서로서로 포기하면서 내밀하게 서로 침투한다. 첫째 상태는 추억들에 의해 차이들로부터 번역되고, 둘째 상태는 닮음(유사)의 지각작용에 의해 [차이들로부터] 번역된다.이 두 흐름의 합류점에서 일반관념이 생겨난다.
***
1810 포브스 윈슬로우(Forbes Winslow, 1810-1874), 영국 정신과의사. 뇌와 마음의 모호한 질병들Obscure diseases of the brain and mind, 1860).
1817 모리(Alfred Maury, 1817-1892) 프랑스 박학다식자(un érudit français), 수면과 꿈들(Le Sommeil et les rêves, 1861).(벩송 1878판을 읽다.)
1834 발(Benjamin Ball, 1834-1893) 영국인 아버지와 스위스인 어머니 사이. 파리 의과 대학 교수. 의사, 신경학자. 대마에 의한 환각 전문가. 모로 드 투르와 같이 작업.
1839 리보(Théodule Ribot 1839-1916) 프랑스 철학자, 심리학자. 리보는 실험심리학의 연구로 유명하다. 기억의 질병들(Les Maladies de la mémoire, 1881), 의지의 질병들(Les Maladies de la volonté 1882), 인격성의 질병들(Les Maladies de la personnalité, 1885), 주의의 심리학(La Psychologie de l'attention, 1888), 일반관념의 진화(L'Evolution des idées générales, 1897), 감각들의 논리(La Logique des sentiments, 1904)
1840 레핀(Raphaël Lépine, 1840-1919), 프랑스 생리학자(physiologiste français), 파리 의대 출신, 리용의대 교수. 실험의학.
1844 뒤발(Mathias-Marie Duval, 1844-1907) 프랑스 해부학, 조직학 교수, 수면에 관한 조직학적 이론(Theorie histologique du sommeil)(C. R. de la Soc. de Biologie, 1895 p.74)
1848 에게르(Victor Egger, Victor Émile Egger 1848-1909) 프랑스 심리학자, 인식론자. 죽어가는 자들의 자아(Le moi des mourants, Revue Philosophique, 1896) Revue philosophique, juillet 1895, p. 55
1858 루이야르(Amédée-Marie-Paulin Rouillard 1858-??) 파리의대 박사, 의사. 발 교수의 지도로 학위? = Essai sur les amnésies, principalement du point de vue étiologique (Thèse pour le doctorat en médecine, Faculté de médecine de Paris, 1885), 출판 Essai sur les amnésies : étiologie des troubles de la mémoire 1885.
케이(David Kay, s.d.), 기억 그리고 그것을 증진하는 방법(memory and how to improve it), New York. 1888, / David Kay, s.d.) / David Kay Moffat (1811–1885) / Robert Moffat, 1795–1883) 아프리카 선교사 a Scottish Congregationalist
퓌팽(Charles Pupin, s.d.), Le Neurone et les hypothèses histologiques sur son mode de fonctionnement, théorie histologique du sommeil, par le Dr Charles Pupin [édition 1896] ...
(옮 3:20, 56NME) (8:15, 56NMEF) (9:31, 56NMI)
첫댓글 연관은 관계가 아니다. 기억이 추억이 아니듯이 ... 차히가 차이가 아니듯이
심층과 상층이 똑 같은 실재성이 아니듯이 ... 부일파가 친일파가 아니듯이....
표면 세계의 과거로서 지층이 현존하듯이, 내재의식(무의식)에 과거가 DNA로 존속한다>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카페, 블로그, 유투버로 남아있듯이, 유전자 속에 긴시간의의 압축으로 남아있다.
이 압축을 풀어서 현시대를 남기려 하는 것이 빅 데이터이다.
논리실증주의자는 무한이 주어지면, 모든 데이터를 정리할 수 있다고 했었다. 파라독스가 넘칠 것이다. (56NM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