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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들뢰즈와 가타리, 최명관, 민음사, 1994(원 1972) 608쪽.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1972, p. 494.
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Les machines désirantes 7-59 [몸의 기능] [의식의 역량]
제2장 정신분석학과 가족주의: 신성가족 Psychanalyse et familialisme : La Sainte famille 60-162.
1절 외디푸스 제국주의
2절 프로이트의 세 원문들
3절 생산의 연결적 종합 [참조, 1장 1절] 편집증 기계 – 과정, ...과 ...과
4절 등록의 이접적 종합 [참조, 1장 2절] 기적 기계 – 전유, 이거나 이거나
5절 소비의 연접적 종합 [참조, 1장 3절]독신 기계–적용, 그러므로 ..이다
6절 세 종합의 요약
* 외디푸스 삼각형의 활용 또는 사용에 세 가지 오류가 있다. (이 다음에 7절과 8절에서 정신분석학의 다른 오류 둘을 보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2장 9절에서 저자들의 드라마 같은 방법, 과정을 제시할 것이다.)
생산의 연결적 종합의 오류는 외삽법의 오류라고 하는데, 절대권이 모든 대상들에게 사용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데아가 아페이론에 사용가능 한 부분은 코라의 평면 정도이고 아페이론의 내부는 불가능하다. 내재의식의 생성에는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재의식은 자연과 같아서 자발성이며, 흐르고 생성하며, 자기 변화를 겪는다.
등록의 이접적 종합은 겉으로는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성하는 내재의식은 상층이 실재라고 여기는 한에서, 권세(상상계)와 권력(상징계)에 부딪히는 이중구속에 갇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은 내재의식 자체를 허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서도, 권력은 자기 자체의 유지를 위하여 터전의 안전과 유용성을 이용하여 허상을 체제로서 받아들이고, 상부들도 그 체제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그럼에도 종교적 권세가 인민의 권리를 인정하고서 인민의 편에 서는 척할 때는 권력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권력의 힘이 강할 때는 [종교적] 권세가 권력의 힘에 빌붙어서 거꾸로 인민의 저항을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용한다. 내재의식은 즐겁고 상쾌함이 없이, 습관적이어서 고착적이고 무기력한 삶을 이어간다. 이접의 양자를 부정하면서 성립하는 상부도 무능하고 생산없는 불모가 된다.
소비의 연접적 종합은 유목적 다의적 사용이다. 이것을 분리차별적 일대일 대응적 사용에 적용하면 오류가 생긴다. 이런 오류에는 인종주의적(raciste) 찰나에 또는 가족적(familial) 찰나에 적용에서 생긴 오류이다. 여기서 셋째 오류인 일치[적용]의 오류추리가 생긴다.
우리는 아직 모든 오류추론들을 다 길어 올리지 않았다. 오류추론들은 실천적으로 치료함에 있어서 미치광이 같은 외디푸스화의 방향으로 잡아간다. 이 외디푸스는 생산의 경우에서 욕망에 대한 배반, 즉 상층이 인민에 대한 배반이며, 무의식을 탁아소에 맡기듯이 내팽개치는 것이며 탐만치에서 탐에 빠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 방향(양식)만을 맞다고 여겨 한쪽만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광기에 빠지는 것인데(표상의 근대성), 탐만치에 만에 빠진 것이다. 자본주의의 잉여가치를 영속적으로 흡수하여 돈의 흐름에 맞추어서 말투의 흐름으로 대하여 논리적 귀결을 선전제로 사용하는 것이 맞다고 여긴다. 이때에는 탐만치의 치에 빠진다. (56VMH)
6. 세 종합의 요약 Récapitulation des trois synthèses 126, 164
세가지란, 제1장의 1절, 2절, 3절, 그리고 제2장의 3절, 4절, 5절의 복습이다.
2.6.1. 오이디푸스의 소화집(笑話集) Le sottisier d'Oedipe 126 -
외디푸스 소화집은 무궁무진하고 여전히 현실적이다. 아버지들은 “수천 년 내내” 죽어왔고(저런, 저런), 아버지 이미지에 대응하는 “내재화”(intériorisation)는 “약 8000천년 전”, 신석기가 시작될 때까지 구석기시대 내내 있어왔다고 우리는 듣고 있다. (126)
니체는 아버지의 죽음, 신의 죽음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모든 이야기(역사)에 아주 싫증이 나서, 이 주제에 관한 끝없는 논의, 그가 살던 헤겔적인 시대에 이미 유행하고 있던 그런 논의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126)
니체는 신의 죽음에 관하여 열두 가지 내지 열세 가지 해석을 내놓는다. 이것은 여러 가지 해석을 넉넉하게 내놓아서 사람들이 거기에 관하여 더 이상 말하지 않게 하고, 또 그 사건을 우스운 것(comique)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는 (신의 죽음이란) 사건이 엄밀하게 말해서, 아무 중요성도 지닌바 없고, 그야말로 마지막 교황만이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126)
신의 죽음은 무의식에서어떠한 중요성도 없다는 것이 새소식이다. (127)
신의 죽음은 아무런 결과도 생기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 다른 소식이다. ... 신이나 아버지는 한번도 [현실적으로] 현존한 적이 없다. (그런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오랜 옛날에, 아마 구석기 시대 동안이었다.) 신이 죽었다고 떠들지만, 사람들이 죽인 것은 옛날부터 언제나 죽어 있는 자들 죽였을 따름이다. (127)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바호펜(J. J. Bachofen 1815-1887)이 신화 속에서 모권과 부권의 여러 모순, 이것들의 투쟁과 이것들의 관계들이 있음을 확인한데 대해 그의 천재를 찬양한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비난을 슬쩍 비쳐 사태를 일변시킨다: 바호펜은 신화들을, 에리뉘에스를, 아폴론을, 아테네를 믿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127)
[에리니에스(Erynnies): 바호펜은 애쉴로스 오레스테이아를 몰락해 가는 모권과 영웅시대에 발생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는 부권간의 투쟁의 극적 묘사로 보고 있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자기 정부 아이기스토스 때문에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오는 자기 남편 아가멤논을 죽였다. 그러나 그 여자와 아가멤논 사이에 낳은 아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 이 때문에 모권을 수호하는 신들인 에리니에스는 그를 고소한다. (20) ... 투표 결과 무죄와 유죄는 동수였다. 여기서 아테나는 재판장으로서 오레스테스를 지지하여 투표하고 그에게 무죄를 판결을 내린다. 부권은 모권에 승리하였다. 에리니에스 자신들이 말하듯이 “젊은 세대의 신들”이 에리니에스를 이겼고, 마침내 에리니에스도 새 질서를 복무할 직책을 지니는데 동의한다. (21) 엥겔스, 가족..기원, 1884, 최인호 번역, 20-21.]
정신분석학은 신념을 괄호 속에 넣어야만, 즉 이데올로기적 형태로서 외디푸스를 유물론적으로 환원시켜야만 엄밀한 학문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외디푸스가 하나의 그릇된 신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이란 것이 필연적으로 그릇된 어떤 것이요, 실재의 생산을 빗나가게 하고 질식하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투시력 있는 자(voyants)는 가장 덜 믿는 자이다.(127)
이점에 관해서 니체는 맑스와 엥겔스가 한 말과 아주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인간과 세계가 이웃하면서 과(et)라고 하는 작은 낱말의 숭고한 특권에 의해서 갈라져 있음을 보기만 해도 우리는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128)
[인간과 세계가 이웃하면서 과(et) ...] 인간과 자연의 동연성/공연(coextensivité) 즉 동연/공연성(coextension)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동연이란)] 순환운동이다. 이 순환운동 때문에 무의식은 여전히 주체로 남아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생산하고 또 재생산하는 것이다. (128)
무의식은 언제나 고아였다. 즉 무의식은 자연과 인간, 세계와 자연의 일체화(identité) 속에서 스스로 출생하였다. 이제 아버지의 문제, 신의 문제는 불가능한 것,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다.(128)
2.6.2. 오이디푸스와 ‘신념(믿음)’ Oedipe et la croyance 129 -
그러나, 정신분석가는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으로 문화를 위하여 인간을 생산하는데 집착한다. 이렇게 인간을 생산하고 무한한 전진 또는 후퇴의 거짓 운동에다가 하나의 구조를 주는 것이 외디푸스이다. (128-129)
외디푸스의 제국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사회와 경찰의 억압에 맡겨야 할 위험한 이단자들이요 좌익분자들이다. 이들은 너무 많이 말하고 항문성을 결여하고 있다. (망델 박사와 스테판 박사) 말장난을 얼마나 불안스럽게 한 다음에야 정신분석가는 항문성의 추진자가 되는가? (129)
정신분석가는 사제-정신분석가이거나 ... 기술자-정신분석가이거나이다: 전자는 경건한 정신분석가... 성스런 신앙의 어머니(뽀이에)... 후자는 개혁주의자 ... “... 외디푸스의 근본적 구조는 시간 속에서어린이가 그 부모와 더불어 갖는 모든 삼각형적 경험에 일반화되어야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공간 속에서부모-어린이의 관계들 아닌 다른 삼각형적 관계들에 대해서도 일반화되지 않으면 안된다.”[오슈만] (129) - [우리 느낌으로 전자는 루터, 후자는 히틀러이다. - 이들은 혁명가가 아니다. 사민주의자는 개혁주의에 가깝다는 점이다.(42MLB)]
2.6.3. 의미란 용법에 달려있다. Le sens, c'est l'usage. 129 -
무의식[내재의식]은 의미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으나, 사용에 관한 문제들만을 제기한다. 욕망의 문제는 “그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가 아니고, 그것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comment ça marche)이다. 네 것이고 내 것이고 간에, 욕망하는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129) [세상은 인간이 무어라고 설명하거나 해설하는 의미론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것이 작동되고 있고(생성하고 사건을 일으키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서 기호론(징후론)의 문제이다. 인민은 대상이 아니라 징후의 존재들이다. 앵글로 색슨의 의미론(the semantic)과 프랑스의 기호론(le sémiotique)의 관점의 차이일 것이다. 이것이 갖는 사회 정치적 함의는 하나는 지도(계몽)인데, 비해 후자는 발산(합의)에 있을 것이다.]
그게(Ça)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지만, 생산한다. 그게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지만 작동한다(fonctionner). (130)
맬콤 로리(Malcolm Lowry, 1909-1957)는 자기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게 기능하는 찰나부터, 당신이 원하는 것 모두이다. “그리고 작품은 기능하고 있고, 틀림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그것에 대해 경험했어요.” - 하나의 기계기구(une machinerie)이다. (130)
소위 선험적 분석이란, 초월적 연습에 반대되는 한, 무의식[내재의시]의 영역에 내재하는, 기준을 규정하는 것이다. 분열분석이란 선험적인 동시에 유물론적 분석이다. 그것은 외디푸스 비평을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또는 외디푸스를 인도하여 그 자신의 자기비판에까지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비판적 분석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무의식 대신에 선험적 무의식[내재의식]을, 이데올로기적 인 것 대신에 물질적인 것을, 외디푸스적인 것 대신에 정신분열적인 무의식을, ... 표현적인 것 대신에 생산적인 무의식을 탐험하려 한다.(130)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치료의 방향들로서 실천적 원리들이다. (130)
2.6.4. 욕망하는 생산의 내재적 기준들
- Critères immanents de la production désirante. 130-
그러므로 우리는 앞서 어떻게 욕망하는 생산의 내재적 기준들이, 외디푸스적 사용들과는 전혀 다른 종합들의 정당한 사용들을 정의할 수 있게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130)
첫째로 연결적 종합들의 부분적이고 비특수적 사용은 전체적이고 특수적인 외디푸스적 사용에 대립하는 것이었다. ... 그것은 외삽법(l’extrapolation)의 오류추리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 부분적 비특수적 사용 대 전반적이고 특수적인 사용, ... 전반적-특수적 사용에는 두 측면(aspects), 부모(parental)와 혼인(conjugal), ...내재적인 것을 초월적으로 사용하는 오류 [외삽법의 오류추리]. (131)
둘째로 이접적 종합들의 포함적 내재 무제한적 사용은 이 종합들의 외디푸스적, 배타택일적, 제한적 사용에 대립된다. 이 제한적 사용은 이번에는 두 극, 즉 상상적인 극과 상징적인 극을 가지고 있다. ...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이중구속의 오류추리, 이중의 막다른 골목(l’impasse double)의 오류추리이다. (131) - [양도논법]
(무의식의 두 극에 옭아매어 꼼짝 못하게 하는 취급을 더 잘 나타내기 위해서는 앙리 고바르(Henri Gobard)의 시사를 따라 ‘double bind(이중구속)’을 ‘prise double(이중 조이기)’라고 불어로 옮기는 것이 나을 듯 싶다. ...) (131)
[무의식이 표출되어 두 개의 방식으로 등록된다. 하나는 신체에 상상으로(상상계) 다른 하나는 정신에 환영으로(상징계) 등록된다. 전자를 경험론 후자를 관념론이라 칭하는 것은 근대 철학의 경우이다. 이 둘은 상호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거울 마주보는 상호공동보조이다. 둘 다 외적 불가사의한 힘이 없이는 상대를 수용할 수 없다. 이 불가사의한 힘의 도움을 deus ex macnina라고 한다. 그러나 둘 다 극한에서 막혀있다. 하나는 시초에서 다른 하나는 종말에서 폐쇄되어 있다. 결국 무의식을 한 축으로 다른 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양식이 필요하다. 벩송식으로 말하면, 무의식은 이마쥬의 총체로서 일반성이며, 인간 경험 또는 생명 경험의 총체이다. 이 총체는 변화하는 총체로서 열려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이 아니고 일반성이다. 일반성이나 과거와 동일반복이 아니라는 점에서 생성일반이다. 이 점에서 합의 변증법과 달리, 들뢰즈가 생성의 개념을 발명하는 것이다.]
셋째로 연접적 종합들의 유목적 다의적 사용은 분리차별적 일대일 대응적 사용에 대립된다. 여기서도 무의식 자체의 시점에서 보아, 부당한 일대일 대응적 사용은 두 계기들(moments)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인종주의적(raciste), 국가주의적, 종교적 등의 계기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적(familial) 계기이다. .. 여기서 셋째 오류인 일치[적용]의 오류추리가 생긴다. (131-132)
- [오류추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넷째 오류 추론은 제2장 7절에서, 다섯째 오류추론은 2장 8절에 곧 등장할 것이다.]
이 외디푸스화는 욕망에 대한 배반이요, 무의식을 탁아소에 맡기는 것이요, [;] 지껄이기를 좋아하며 교만한 작은 자아를 위한 자기 도취적인 기계요, [;] 자본주의의 잉여가치를 부단히 흡수하는 것이요, 돈의 흐름에 말[기표]의 흐름으로 대하는 것이요, [;] 끝없는 이야기요, 정신분석이다. (132)
[라깡의 정신분석은 자본에 대한 기표의 방식을 설명한 것으로, 자본의 찌꺼기를 얻어먹을 수 있는 방법이다. (40QKJ)]
2.6.5. 욕망은 법, 결여, 시니피앙을 모른다
- Le désir ignore la loi, le manque et le signifiant. 132-
욕망에 대한 세 가지 오류를 결여, 법, 시니피앙(le signifiant, 기표)이라 불린다. 이 세 가지는 하나의 같은 오류, 즉 관념론이다. 이 관념론은 무의식의 경건한 개념을 형성한다.그래서 결여는 공허한 자리이지 더 이상 결핍이 아니며, 법은 놀이의 규칙이지 더 이상 명령이 아니며, 기표는 분배자이지 의미가 아니라고 조합이 항들로 개념을 해석해봐야 소용없다. (132) - [의미의 논리 10장 놀이의 규칙의 두 종류, 하나(명제)는 규칙이 있고 행위하고 다른 하나(무의식)는 원래 규칙은 없다. 생성 이후에 규칙을 표시할 수 있다.]
- [상징의 세 가지 오류는 빈 것을 충만으로 생각하는 것, 법이 모든 사실을 재단(자를)할 수 있는 권한으로 생각하는 것, 음성(목소리가 아니라도, 기표)이 곧 개념일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권위 있는 자의 음성에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정감이 들어있다. 내용은 정감에 비추어서 받아들이거나 안 받아들이거나 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듣는 자(억압받는 자)에게 이중 구속이다. 시니피앙은 시니피에와 연관이 없다는 것은 지시자와 피지시자 사이의 내용의 차이는 그 본성상 차이이다. 자연(본성, nature)은 차이를 생산한다. 차이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은 인간의 조직화이다. 이 조직화를 건전하게 하는 것은 금욕주의이며 이것을 실행하는 것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로서 칸트의 경건주의이다. 어찌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경건주의가 될 수 있겠나. 자본주의는 경건주의를 가장하여 근면을 도덕의 전면으로 띄운 것이다. 자본주의 근면은 인간들 사이의 노력의 조직화가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투쟁 사이에서 떨어지는 피를 먹고사는 것이다. 경건주의의 관념의 허구에 인간성의 목적을 두는 것은 허무 속에 행복과 목적을 두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 니체이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인민의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욕정(voluptas)을 말하는 것이다. 이 욕정은 결여이며 무의식의 욕망만큼이나 무한정하다. 그러나 무의식은 결여가 아니라, 이질적 권능의 조합으로서, 아직 만들어보지 않은 것을 만들어보는 생성이다. 이 생성에 환희가 있으며 기쁨과 행복이 있다. (40QKJ)]
2.6.6. “그대는 햄릿으로 태어났는가.... ?” "Etes-vous né Hamlet ... ?"
무의식은 검다고 흔히들 말한다. 라이히(Reich 1897-1957),와 마르쿠제(Marcuse, 1898-1979)는 그들이 “루소주의”, 즉 그들의 자연주의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133)
- [무의식(내재의식)은 붉다고 해야 한다. 검다는 것은 법과 시니피앙의 건전하고 경건함을 믿는(좀 더 나아가면 신앙하는) 자들이 무의식을 폄하하는 것이다. 그들이 백색인데 비해 무의식은 흑색이다. 그런데 그들이 청색인데 비해 무의식은 적색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적색에는 불과 열기이외에도 중요하게 심장(하트 사랑)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적색에 대해 말할 경우에 그들은 조심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착각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검을 현(玄)이다.]
무의식은 자연-인간인 한에서 루소주의자이다. 그리고 루소 속에는 악의(malice)와 술책(ruse)이 있다. (133)
외디푸스적 분석은 무의식의 모든 종합[세 가지 종합]에다가 하나의 초월적사용을 강요하여 이 종합들을 확실하게 개종(conversion)시킨다. 따라서 분열-분석의 실천적 과제는 반대로 역전(réversion)시키는 것이다. (133)
물론, “베르테르가 당신 속에 살아있는 것 같이, 햄릿이 당신 속에 살아있어요.” 그리고 또한 외디푸스도,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도 살아있었어요, 그러나 “당신은 아비다른 팔과 다리, 아비다른 입술, 아비다른 수염을 나게 하고 있소, 회상되는 죽음을 다시 살고 체험함으로써, 당신의 자아는 생명의 허무함을 부단히 증명하는 일종의 광물적 정리(théorem)가 되어요‥… 당신은 햄릿으로 태어났오? 그러게 아니라 햄릿을 당신 속에 출생시킨 것이 아니오? 왜 신화로 돌아가려는 거요?”여기서 신화를 포기함으로써 정신분석 속에 약간의 기쁨, 약간의 발견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134)
만일 정신분석가를 강요하여 생산적 무의식의 영역들에 들어가게 한다면, 거기서 그는 코메니 프랑세즈의 여배우가 공장속에, 중세의 사제가 연쇄적 작업장에 옮겨졌을 때처럼, 그의 극장과 함께 옮겨졌다고 느낄 것이다. (134)
생산의 단위들(unités)을 조립하고, 욕망하는 기계들을 연결시켜야 한다. 이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 거기서 과정, 그 고민과 그 영광, 그 고통과 그 환희, 이런 것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 (134) [욕망하는 기계들(부분대상)은 무의식 속에서 아직 잘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아직 외디푸스의 영향을 안 받고 있는 덜 분화된 실체이다. 여기에 있는 이야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이다. 그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는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의도이다.] (옮 5:20, 56VMB)
(7:17, 56VMH)
*
1712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스위스 제네바 출신, 작가, 철학자, 음악가.
1815 바호펜(Johann Jakob Bachofen, 1815-1887), 스위스 법률가, 문헌학자, 사회학자. 모권(gynocratie) 이론가.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독일 공산주의 혁명가, 혁명적 사회주의자, 철학자, 언론인, 역사가. 자본론 제1권: 자본의 생산방식(Das Kapital. Buch I: Der Produktionsprocess des Kapitals, 1867)
1820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독일 철학자. L'Origine de la famille, de la propriété privée et de l'État, 1844.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쉰여섯] 독일의 철학자.
1891 밀러(Henry Miller, 1891-1980) 미국 소설가 Hamlet (1956)(Hamlet, a philosophical Correspondence with Michael Fraenkel)[en.Wiki 속에 ‘밀러’ 항에는 햄릿이 없다. 왜?]
1897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 유대계 오스트리아-헝거리 의사,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 1933년에 정신분석학회에서 제명. 덴마크에서 공산당으로부터 제명당했다.
1898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 부유한 유대계 출신.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철학자, 맑스주의 사회학자. 이성과 혁명(Reason and Revolution, 1941), 일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 1964)
1909 로리(Malcolm Lowry 1909-1957) 영국 소설가, 그는 알콜중독과 싸우는 환자였다. Selected Poems of Malcolm Lowry (1962)[Choix de lettres. 1968]
1926 뽀이에(Jacques Pohier, 1926-2007) 프랑스 신학자, 도미니크 수도사(1989년까지), 1979년에 카톨릭으로부터 단죄. 프랑스 안락사 권리에 참여하고 존엄사 권리 연합회 회장이다(1992-1995).
1930 망델(Gérard Mendel, 1930-2004) 프랑스 정신과 의사, 사회심리학자, 인류학자. Révolte contre le père, 1968.
1934 오쉬만(Jacques Hochmann, 1934-) 프랑스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 오띠즘(자폐증) 전문가.Pour une psychiatrie communautaire, 1971
앙리 고바르(Henri Gobard, ?-?), 벵센 대학에서 영국-미국학과 교사. (AO 131) R2x, Fr.Wiki x, L’aliénation linguistique, 1976
(8:07, 56VM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