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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자유당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1960년 3월 15일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한 사건.
공권력을 동원한 다양하고 노골적인 부정 행위로 전 국민의 저항이 촉발되었다.
선거 후 경남 마산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독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되었으며,
4·19혁명을 촉발하여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요
1960년 자유당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자행한 사건. 공무원과 경찰 등을 동원한 다양한 부정선거 방법이
노골적으로 자행되면서, 경남 마산의 3·15 의거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독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되었다.
3·15 부정선거에 대한 전 국민적인 저항과 이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탄압은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배경
1948년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과,
그를 중심으로 한 자유당 정권은 이미 1952년 발췌개헌,
1954년 사사오입개헌 등을 통해 사실상 1인 장기집권을 획책하면서
자유당 조직, 경찰 및 관료조직, 반공단체 등을 동원한 이른바
'준봉(遵奉)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자유당 정권은 지속적인 독재정치·
정경유착·무리한 무력통일정책 등으로 국민의 지지를 잃었으나
불법적인 헌법개정과 부정한 선거방식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정권 말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정치조작도 거듭된 실정(失政)에 의해
국민의 지지를 거의 상실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1960년 선거에 승리하는 데는
역부족인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야당의 강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민주당의 조병옥 박사가
선거 유세 기간 중 사망하자, 대통령은 이승만 독주 체제로 예상되었다.
자유당정권은 당시 84세인 이승만 대통령의 유고가 발생할 때,
그 계승권이 있는 부통령에 자유당의 제2인자인 이기붕을
무조건 당선시켜야 할 상황이라고 보았고,
종래의 정치조작보다 더욱 노골적인 선거부정을 자행하기로 계획했다.
3·15부정선거
ⓒ Sienic/wikipedia | Public Domain
경과
자유당정권은 산업금융채권 발행 및 은행융자에 따르는 뇌물과
대기업으로부터의 강제헌금 등으로 선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선거관리부서인 내무부를 통해
첫째, 4할 사전투표,
둘째,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셋째, 완장부대 활용,
넷째, 야당참관인 축출 등 온갖 부정선거 방법을 준비했다.
이러한 사전음모에 따라 공권력과 관료조직을 총동원하여
매수·폭력 및 각종 부정개표를 자행했다. 선거 결과를 집계하자,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은 95~99%에 육박할 정도로 높게 나타났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정권은 득표율을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3,376표(85%),
이기붕 833만 7,059표(73%)를 득표한 것으로 발표했으나,
이미 부정선거의 양상은 전 국민에게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황이었다.
영향
이러한 공개적인 부정행위는 곧바로 국민의 필사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마산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되었다.
자유당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마산 시위 당시에 실종되었던 학생 김주열 군의 사체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되자 이에 흥분한 시민들의
시위가 격렬하게 발전했고, 전국의 학생들도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 실시를
주장하는 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4월 18일 시위를 마치고 귀교하던 고려대 학생들을
정치 폭력배들에게 피습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4월 19일에는 경찰이 경무대를 향한 시위대에 발포하면서
학생 뿐 아니라 전국민적인 저항으로 발전했다.
시위를 진압하라는 지시에 군부가 대응하지 않고,
4월 25일에는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며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교수들의 가두 시위가 진행되었다.
미국 정부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권유하면서 결국 26일 이승만은 대통령 직을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3·15 부정선거는 결국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자초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날 일어난 국민적 저항을 뜻하는
3·15 의거는 2010년 3월 국무회의 의결에 따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아프지만 의로웠던 기억, 4.19 혁명의 증언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의 하야성명 발표 모습
이승만의 하야로 1960년 8월 13일 제2공화국이 탄생하였습니다.
참고 : 다음백과 &
출처: https://dailyhappyday.tistory.com/1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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