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네슘을 털어 넣은 비망록
고훈실
시의 제재는 세상 모든 것들이다. 시인의 의미망에 포집되면 그때부터 사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주된다. 구광렬의 시는 낯설게 하기의 기법으로 현대시의 이런 흐름을 포착하고 있다. 즉 낯익고 관성화된 인식을 뒤흔드는 詩作을 즐겨 한다. 그것도 별 연관이 없어 보이는 오브제들을 서로 충돌시키고 왜곡해, 거기서 파생되는 생경한 이미지의 파편을 독자들에게 내보이고 있다. 그의 시가 종종 당혹스레 다가오는 이유다.
비망록과 마그네슘은 일치되는 부분이 거의 없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화자의 태도는 오히려 극단의 정서마저 보인다. 망각을 위해 또 다른 기억을 불러들이는 화자는 과감하게 자신의 트라우마를 내보이고 있다. 편리하고도 편안한 망각은 어떤 정서일까? 분열되고 찢긴 내면의 고통을 지우기 위한 최소한의 위안 내지는 상상적 체험의 극적 확장이 아닐까
1번 시를 보자 가시 박힌 나무 그림자들과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새들, 사라져갈 이름들이 새겨진 서류들, 주유소에 나부끼는 절은 깃발들..시에 형상화된 사물들은 연상 작용처럼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그러나 서로를 되비추거나 그늘을 드리우는 법이 없다. 그저 따로 또같이의 양상으로 건조하게 나열될 뿐. 첫 번째 잉크방울이 비망록 한 귀퉁이에 떨어질 때 망각은 시작됐고, 역설적이게도 잊지 않으려 준비하는, 즉 備忘은 의미를 잃는다. 화자는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 상관물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발화함으로써 시적 진술이 가져 오는 탄탄한 정서를 유발한다. 마른 동공에 윙크를 퍼부었지만(잉크를 퍼부은게 아니라) 막막했고 할로윈 호박 속 랜턴처럼 이빨만을 반짝였던 화자의 어느날 밤은 비망록으로 인해 더 불편해 졌다. 그래서 어느날 저녁 거리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으리라.
2번 시에서는 깃털 뽑힌 자리에서 불온하고 불편한 기억이 시작된다. 무작정 백과사전을 편 뒤 맨 윗줄 낱말로 시를 써보기로 한다. 시인은 이런 시작을 우연에 기댄 시창작 법이라고 사석에서 말했다. 사실 예술은 우연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뜻하지 않았는데 거기서 예술적 영감을 받는 일이 종종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神은 필연이라 하고 인간은 우연이라 한다고 했던가!
화자는 무작정 마그네슘을 만난다. 막막해서 4백년 전의 공고라를 소환한다. 스페인의 시인이자 過飾主義 즉 지나치게 문장을 꾸미고 난해하게 했던 공고라를 만난 뒤에야 한 두 줄 긁적일 수 있을 만큼 마그네슘은 막막한 단어다.
상상적 체험이 있을 법한 일을 상상해야 함은 시의 개연성과 연관된다. 칠레 포도주를 마시고 강남역 8번 출구로 뛰쳐 나갔다는 구체적 행위가 개연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시 속으로 독자를 몰입시킨다. 이런 생생한 현장성이 상상적 체험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고 있다. 아치볼트 맥클리쉬(Archibald Macleish)는 詩法이란 시에서 -시는 추상과 관념이 아니라 구형의 과일처럼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광렬 시인은 현상과 상상적 체험의 두 영역을 능란하게 오가며 독자를 시로 끌어들인다. 누군가와 막네슘 막시발눔이라고 설전을 하는 대목은 슬핏 실소를 머금게 한다. 욕지기를 참을 수 없는 현실을 시인은 이렇게 에둘러 표현하고 싶었던걸까.
24시간의 하루가 마그네슘이라는 금속 맛 나는 낱말에서 그리움을 추출해 낸다. 이제 화자의 속내가 수면 위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은 그리움을 찾아 하루를 꼬박 헤맨 것. 그러나 그런 마음을 끝까지 의뭉스럽게 눙친다. 독자와의 밀당을, 마지막에서의 애조 띤 반전을 끝까지 견지하고 있다. 전원시 한 수를 긁적이며 편안한 기억과 들칠 필요 없는 비망록을 우리에게 던지는 그는 시인 자신일수도 그가 창조해 낸 시적화자의 뒷모습 일 수도 있다.
시의 깊이는 현상 너머에 깃든 것을 넌지시 암시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시가 굴광성으로 휘는 까닭도 빛 너머에 서린 그늘의 얼굴을 응시하는데 있지 않을까
구광렬의 시 비망록과 마그네슘은 현상 속에 녹아있는 너머와 이면을 암시와 확장을 통해 거울처럼 비춰 준다. 재독과 삼독 사독... 읽을 때마다 청신한 얼굴로 다가오는 시다.
2018 시산맥 겨울호
고훈실
2010 시문학 등단
시집 3과4 (2017)
동서대 사회교육원 시창작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