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이수(易往易修)
<2001. 5. 8 성륜사 하안거결제 법회>
[1]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의 근거를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제가 간단히 우선 설명을 좀 합니다.
보리방편문은 근래에 와서 어느 분이 갑자기 만든
그러한 수행법문(修行法門)은 아닙니다.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은 참선(參禪)으로 해서는
참선의 모든 성과를 모조리 다 합해 가지고서
아주 보배 같은 경전을 만든 그런 어른이고
또 참선에 있어서 참선의 완성자(完成者)같은 입장에 계시는
그런 분입니다.
달마(達磨)스님께서 참선으로 해서는
이쪽 중국(中國)에 가서 초조, 1조가 되어 계시지만은
육조스님같이 참선의 가지가지의 모든
구체적인 수행법(修行法)을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달마스님께서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적당한 법문은 좀 하셨어도 체계 있게
참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
그런데 까지 깊은 말씀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육조단경(六祖壇經)은
마치 참선의 교과서 같은 보배로운 경전(經典)입니다.
우리 인간성이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인간성이라는 문제에 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리방편문은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께서 하신 법문을 골자로 하고서,
그리고 지금으로 부터서 한 50년 전에 입적(入寂)하신
금타(金陀)스님께서
그것을 보다 더 윤택하게
이런 윤문(潤文)식으로 해서 내놓으신 법문입니다.
따라서 그 내용에 있어서는
여러분들이 지금 읽으셔서 대체로 짐작이 되시겠지만
우리 인간의 성품이 본래로 부처다,
이런 소식은 대체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조금 더 구체화시켜 가지고서
인간의 성품이 부처인데
그 부처란 것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그런 것이 또 우리가 의문이 가지 않습니까.
헌데 부처라는 속성, 부처에 들어 있는 공덕(功德)상,
이런 것을 더 깊이 말씀하신 것이
이른바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단순히 부처 그러면은
부처란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부처의 공덕을 우리가 또 의심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에도 삼위일체(三位一體)하면은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 아닙니까.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그냥 하나님 그래 버리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하나님 속에 들어있는 모든 만공덕은 어떠한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이 의심을 품을 수가 있는 것이고,
또 그 공덕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맨 처음 초기에 예수님이 나오실 때는
삼위일체란 그런 말이 안 나왔겠지만
그 뒤에 체계를 세우다보니까
하나님 가운데 속성이 다만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도 있고 성령도 있어야 되겠구나,
그래서 서기 325년 니케아 공회에서
비로소 삼위일체의 학설이 정립이 되었어요.
그런데 불교의 삼신일불(三身一佛),
이른바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遮那佛),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
삼신이 원래 세 부처님이 아니고서 본래 하나의 부처님이라,
진리라 하는 것이
부처님 따로 계시고 인간 따로 있고
자연 따로 있고 그래 버리면 진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를 하나의 체계로 포괄해야 진리가 된단 말입니다.
진리에 무엇이 빠져 버리면
이것은 완벽한 진리가 될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삼신일불에는
청정법신, 원만보신, 천백억화신,
이런 부처님뿐만 아니라
이 자연계라든가 모든 존재가
그 속에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불교를 아는 분들은 삼신(三身) 사지(四智)라,
삼신사지라는 정도를 좀 알아야
불교의 윤곽을 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신사지란 것은
부처님한테 들어있는 만공덕상(萬功德像)이란 말입니다.
대원경지(大圓鏡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성소작지(成所作智),
이것은 풀이하자고 들면 굉장히 난해해집니다.
다만 네 가지 공덕이
부처님의 한도 끝도 없는,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다 대표해 있다, 이렇게 생각 하시고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신사지에 대한 윤곽만 잡으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영생불멸하는 영생의 자리,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한도 끝도 없는 자리가
이른바 청정법신비로자나불, 그런 자리란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법신(法身)자리란 말입니다.
그와 같이 시공을 초월하고 인과율을 초월한
영원의 생명자리가
청정법신비로자나불, 즉 법신 자리인 것이고,
또 원만보신노사나불은 어떠한 자리인가?
이것은 끝도 갓도 없는 생명의 본체인 법신에 들어있는,
법신이라 할 때는 일체 존재가 거기에 다 포함이 됩니다.
우리 인간이 포함이 안 되면
그때는 부처님의 완벽성에 흠이 간단 말입니다.
부처님 그러면은 다른 것이 조금도 거기에 빠짐이 없이
모두가 다 거기에 함장(含藏)이 되어야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심리학적으로 우리 마음이 부처다,
이런 말씀을 많이 듣지 않습니까.
헌데 사실은 우리가 쓰는 이 마음이 전부
마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잠재의식, 우리가 안 쓰고 있는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우리는 이것을 짐작을 못하지만은
우리 마음의 밑에 숨어 있는 잠재해 있는 의식은
끝도 갓도 없이 한량이 없습니다.
우선은 지금 쓰고 있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식(六識)을
우리 인간은 지금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6식 밑에는 또 7식(七識) 말라식(末那識)이라고 그래서
식(識) 보다 깊은 의식(意識)이 있어요.
그러면 말라식 이것이 또 전부인가 하면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지금 현대심리학이 자꾸 발달되어 있어도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유식설(唯識說)이라,
의식에 대한 말씀을 다 못했어요.
그러니까 심리학을 공부하는 칼융 이라든가
모다 그런 위대한 심리학자도
다 부처님 가르침을 숭상(崇尙)하지 않습니까.
헌데 우리의식 밑에 숨어 있는 것은 제7 말라식이고,
말라식 이것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의식일 것인가?
그도 아닙니다.
말라식 보다 더 깊은 식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이란 식이 있단 말입니다.
그럼 아뢰야식이 마지막 의식의 끄트머리인가 하면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여래장(如來藏)이라,
여래란 것은 부처 아닙니까.
우리 의식의 저 밑창에는 사실 부처가 숨어 있습니다.
부처가 숨어 있다하면 좀 어폐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심리학적으로 파고 들어가서
우리 마음의 저 밑에는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참 놀랄 일이고
한편으로는 또 그야말로 희망에 부풀어있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잘나고, 못나고
현상적으로 의식차원에서는 천차만별이 된다 하더라도
저 깊이 차근차근 들어가서 보면
제7 말나식이라, 제8 아뢰야식이라,
그 다음은 결국 여래장(如來藏)이라,
부처님이 숨어 있단 말입니다.
제9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아홉 번째는 암마라식인데
여래장(如來藏)의 청정무비(淸淨無非)한 공덕을 암마라식 그런 것이고,
또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다음에 또 열까지를 보태서
그 속에다 불식(佛識)이라,
이렇게도 말씀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학자 분들이라든가 불교 도인들도
그때그때 중생의 그릇이 다르니까
거기에 맞추어서 복잡하게 말씀을 많이 하신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중생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우리 마음의 본체는 바로 부처인 것이고
또 그 부처 가운데는
부처의 공덕상이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遮那佛),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이,
삼신일불에 우리 인간의 본성뿐만 아니라
우주 모두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여러 가지 가능성도
모두가 다 부처님이라는
하나의 생명체에 다 들어있는 것이고,
또는 산하대지 삼라만상이라,
산이요, 내요, 하늘에 있는 천체요, 이런 것도
모두가 다 부처님 화신공덕(化身功德)으로 나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 보신, 화신, 이것은
바로 일체존재,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는
산이요, 내요, 천체요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생명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은
또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을 떠나서 다른 존재,
물질이라든가, 고정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성립이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다른 물질(物質)이란 것은 다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허망하게 간주한단 말입니다.
허망하게 억지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허망한 것입니다.
허망한 것인데 우리 중생이 잘못 본단 말입니다.
과거에 도인들이나 또는 우리들 부처님 제자가
부처님 법문을 한다고 생각할 때에
제일 어렵게 걸리는 것이 뭣 인고 하면은
우리 중생들은 중생의 지각(知覺) 따라서
이렇게 대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은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실지로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있지가 않은 것인데 우리 중생들의 소박한 생각으로 해서
저 산은 푸르게 저렇게 있고
미운 것은 미운 것대로 해서 별도로 미운 존재가 있는 것이고
또 예쁜 것은 예쁜 대로 별도로 예쁜 존재가 있는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중생의 업으로 비추어진 것을
본연(本然)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실지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물질은 사실은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몽환포영(夢幻泡影)이란 말입니다.
다행이도 현대물리학이
물질이 원래 있지 않다고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증명하고 있는가?
물질은 분석하고 들어 가면은 저 끄트머리 알갱이가
전자(電子)요, 양자(陽子)요, 중성자(中性子)요, 모다 그래요.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것이
항시 그대로 고유하게 있으면 물질이 있다고 보겠지요.
물질을 쪼갠 것이 알갱이가 그런 것이니까
물질이 있다고 보겠지요.
그러나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은
시시각각 변화무상합니다.
생겨나면 곧 소멸됩니다.
평균 수명이 백만분의 일초도 못 됩니다.
이런 것은 물리학자가 다 말한 것입니다.
이런 꽃은 이대로 이렇게 보일 때 있는 것인가?
우리 중생의 때 묻은 눈으로 봐서
이와 같이 있는 것이지
물리학자가 분석적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보일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주에 충만해 있는 장 에너지가
소립자화(素粒子化)되어 가지고서
그것이 적당히 모여서 이와 같이 보일 뿐입니다.
우리 몸뚱이가 과거의 업장 따라서 금생에 잠시간
이와 같은 존재가 있지 않습니까.
내생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다행히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해서
금생에 해탈해 버리면 좋겠지만
윤회(輪廻)를 벗어나지 못하면은
또 우리가 지은대로 가서 몸을 받습니다.
우리 생명이란 것은
무시이래(無始以來) 끝도 갓도 없이
과거로부터서 몇 천생, 몇 만생
태어나고 죽고 해오는 것이고
미래도 마찬가집니다.
그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의 근본인 부처님,
부처님을 법신, 보신, 화신으로 속성을 나누어서 본 것이고,
끝도 갓도 없이 시간 공간을 떠나 있는
부처님의 바른 생명자리가 법신(法身)인 것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자비나 지혜나 능력이나
모든 공덕이 보신(報身)인 것이고,
또 그 자리를 근거로 해가지고서 이루어지는 일체존재,
산하대지 삼라만상 자연계 모두가 다 화신(化身)입니다.
불교란 것은 일체생명(一切生命)을
다 하나의 진리(眞理)로 포괄한단 말입니다.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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