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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1일 월요일 <재앙과 구원의 조직신학>
[김용호] [오전 5:42] 굿모닝입니다~!! 주님 안에서 멋진 한 주간을 만듭시다~!! 화이팅~!!
세월호 사건과 부활절을 연결한 각 교단의 발표문들과 몇 편의 기고문들을 읽으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재난을 당했을 때 드려야 할 성경적인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기반한 기도이어야 하니 재난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섭리에 대한 조직신학적 개념을 기반으로 한 기도이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직접 당하는 재난과 사회적 재난의 경우 기도의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내 일과 남의 일에 차별을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낭만적인 생각일 뿐 냉철한 접근은 되지 못합니다. 며칠 전 그에 관련해서 말레이지아 항공기 실종사건과 세월호 사건에 대한 반응의 차이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바 있습니다.
오늘은 이 주제로 카톡에서 의견들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제자들의 수다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공식 토론회>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품고 있는 큰 소망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과도기여서 제가 받은 은혜와 제가 성경에서 깨달은 바를 형제자매님들과 공유하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두 잘 아시는 대로 정확한 푯대의 공유가 우리의 시급한 목표였고 그 동안의 과정은 우리가 한 마음과 한 입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예배의 설교는 치밀한 성경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설교는 성경 연구를 자신의 사명으로 받은 형제자매들이 훈련기간을 거친 후 담당하게 되겠지만 우리가 이제는 조직신학의 맥을 어느 정도 공유했기 때문에 조직신학을 세워나가는 일과 제자로서의 일상의 삶에 대해서 공식적인 토론 문화를 정착시켜나가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밟아나가다보면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공동 집필진의 진용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진 성경적인 꿈은 여러 번 말씀드렸던 대로 우리 내부에 집단 리더쉽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장로의 회"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더해 모든 지체가 장로가 되는 것이 당연한 성경의 약속이라고 봅니다. 큰 자와 어린 자가 지정되어 있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큰 자의 사명은 어린 자를 큰 자로 만드는 것이니 전원이 장로가 되어가는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삶으로 규정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지체가 장로가 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참으로 중요하고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이 기준을 세우는 일이 우리 앞에 놓인 큰 과제들 중 하나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는 다양한 사명을 나누어 분담하고 있는 공동체인 것은 사실이나 어떤 사명을 맡았던 간에 치밀한 조직신학에 기반을 두고 현장의 삶에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진리를 공유하고 진리를 실천해야 하는 것은 동일한 사명이고 따라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구분되어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설교의 경우는 다릅니다만 설교의 사명도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정확한 정보전달의 사명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사명들 중의 하나라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설교자가 진리를 독점하는 구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다양한 주제를 놓고 공식적인 토론회를 여는 것을 일상화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가게 될 것입니다. 토론 중심의 수다 문화지요.
이러한 토론 문화가 조심스러운 이유는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난장판이 되기 너무도 쉽기 때문이지요.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라는 사도들의 권면도 그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사후에 시작된 교부시대의 초대교회도 난장판이었고 이후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도 난장판이었지요. 심지어 무수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서구 기독교가 택한 차선책, 즉 소수가 진리를 독점하는 꼼수를 물려받을 수는 없습니다. 조심조심 한 발짝씩 발걸음을 떼어 보고자합니다. 한 몸과 한 마음과 한 입을 가진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문을 우리가 지금 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조심스레 발을 떼어봅시다.
여기서 제가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불시에 토론회를 중단시키는 호루라기를 제가 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은 우리가 과도기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모두 허락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아직 과도기임에도 불구하고 토론회를 시도하려는 데에는 합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나타난 상사병이 그 근거입니다. 물론 아직 중증 상사병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지만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후에 다음 진도를 나가는 것이 옳다면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삶을 마쳐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임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의 모든 충성스러운 시도들을 항상 인도하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물론 토론이라는 형식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시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혹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토론 형태의 수업에 참석하신다고 생각하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 공동체의 특성상 토론 수업에 참석한 학생이 목소리가 더 크니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봅니다. 왜 학생 목소리가 더 크냐 하면 우리는 서로 상사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지요. 다른 지체들이 나를 향해 모두 상사병을 앓고 있는데 서로 눈치 볼 일이 없는 거지요.
[최해준] [오전 10:17] 성격이 좀 소극적인지라 토론 자리에서는 그냥 지켜보는 타입이지만... 일단 프로필 사진부터 바꿨습니다.^^
[김용호] [오전 10:18] 오우~ 정장을 입으신 사진이군요. 분위기가 잡혀갑니다.^^
[최해준] [오전 10:18] 그렇죠? ㅎㅎ 의지의 표현입니다.
[정진호] [오전 10:20] 교수님 같아요. 해양학 박사.^^
[김용호] [오전 10:20] 토론진행자 포스가 나옵니다.^^
[최해준] [오전 10:23] 어제 터미널에서 잠깐 방송 봤는데요... 이거 사람 한 명 이상 죽일 분위기더군요. 최소한 선장은 희생 제물로 죽여야 된다는 분위기...
[김용호] [오전 10:25] 사고 책임과 구조 책임의 두 방향으로 폭발하는 듯~
[최해준] [오전 10:25] 라디오에서는 어떤 버스 기사 분 왈 '어떻게 가족 같은 승객들을 버리고 누구보다 먼저 도망갈 수 있느냐?!!'... '가족 같은 승객' 이 부분에서 속으로 헛웃음이 나오더군요... 입에 침도 안 바른 양반이...
[김용호] [오전 10:26] 말을 참 쉽게들 해요. 막상 그 자리에 데려다 놓으면 어찌 행동할지....
[최해준] [오전 10:27] 어떤 해기사 분은 태종대에서 대신 속죄의 눈물을 흘린다나 뭐라나...
[김용호] [오전 10:28] 가족들이 큰 위험에 빠질 것이 참 걱정되네요. 너무 끔찍한 기사들이 계속 나와서.... 아이가 보낸 카톡을 보는 순간 제 심장에 통증이.... 가족들의 심정은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이라고 생각되네요.
[최해준] [오전 10:30] 도로에는 상춘객들로 붐비고 방송은 서울서 안동 오가는 내내 그 얘기만 하고 있고... 요지경입니다. 희생양을 찾는 일보다는 각자 처한 상황에서 자기를 되돌아본다면 어떨까 싶더군요.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는 전도사님께서 적절한 시점에 좌표와 방향을 잘 짚어주신 듯싶어요.
[김용호] [오전 10:35] 영원한 부활을 기반으로 한 냉철한 사명감의 유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울어주는 것은 사실 아무런 실제적인 열매가 없지요. 그리고 더 잔인하게 말한다면 각자 자기 입장에서 우는 것일 뿐입니다.
[최해준] [오전 10:37] 드라마 주인공에 자기감정을 이입시킨 것처럼요.
[김용호] [오전 10:38] 그렇습니다. 기도원에서 사역할 때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가을동화가 큰 유행이었는데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제가 좀 보다가 껐습니다. 왜냐하면 불치의 암에 걸린 송혜교에게 가서 안수 기도라도 해 줄 수 있다면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도 아닌 드라마에 빠질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 말이지요. 당시 설교 듣는 분들 중 뭐 저런 몰인정하고 메마른 감성을 가진 자가 있나~하는 분들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랬던 저도 작은 아이 윤선이만 등장하면 눈물을 줄줄~~^^ 우리가 갈 길이 멉니다. 예수님처럼 냉철하고 사도 바울처럼 냉정해지려면요. 우리 모두가 먼 길을 가고 있습니다
[최해준] [오전 10:44] ^^ 갈 길이 먼 걸 안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지요.
[김용호] [오전 10:46] 그렇습니다. 권사님 말씀대로 멀리 있는 푯대를 정확히 보았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지요.
[정진호] [오전 10:48] 내가 과연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혹은 내 아이가 그 안에 있었다면 그 아이를 위해 뭐라고 기도해야 할까? 나의 반응은 또 어땠을까? 절대 장담할 일이 아니더라구요.
[김용호] [오전 10:49] 바로 그 점입니다. 부모와 처자를 미워하고 네 목숨까지 미워해야 나를 따를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 정상적인 인간들이 따를 수 있는 말씀이 아닌 것이지요.
[정진호] [오전 10:50] 실제 그 일이 일어나면 과연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겠더라구요. 내가 요즘 장례식에 가면 제일 곤혹스러운 것이 뭐냐 하면 고인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였습니다. 과거에는 고인이 크리스찬이든 아니든 쉬웠어요. 주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하도록 허락하소서. 남은 가족 위로해 주소서. 그런데 이런 기도는 지금 생각해 보면 내용도 없고 의미도 없고 그냥 식상한 멘트밖에 안 되었던 거고 이제는 진짜 우리의 조직신학에 맞는 합당한 기도를 해야겠구나 생각이 드네요.
[김용호] [오전 10:51] 그렇습니다. 치밀하고 정확한 조직신학이 세워지고 그 매뉴얼대로 우리가 실제로 움직이는 신비한 존재로 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요.
[정진호] [오전 11:09]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 보아야 할 거 같습니다. 먼저 내가 그 현장에 있을 때 내가 어떤 반응을 할지 지금은 나도 모르지만 적어도 어떤 기도나 반응을 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할지는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몇 년 전에 우리나라 군대가 외국에 파견 나가 있다가 테러에 의해 여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 누나와 동생이 한편이 되고 나는 반대편이 되서 파견나간 군인 중에 내 자식이 그 현장에 지금 가 있다면 과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로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나만 바보 되고 끝났지만....
누나와 동생의 기도는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지요. 근데 그 때 나는 확실하게 정리가 되지 않아서 버벅대다가 두 사람한테 그런 상황에서 그런 기도가 나올 수 있냐? 언제 내 자식이 죽을지 모르는데 그게 말이 되냐고 핀잔만 받고 나는 속으로 화를 삼키면서 "한심한 사람들" 하면서 끝을 낸 적이 있습니다.
내 주장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즉 그런 상황에서 내 자식이 죽음의 공포에서 떨지 않도록 기도할 것이며 설사 죽더라도 내가 휘둘리지 않도록 해달라는 뭐 이런 거였는데 그렇게 말해 놓고도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내 자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내 기도도 달라져야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두 사람이 막 웃더군요. 그게 말이 되냐구요.
내 자식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경우,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약속이 뭔지는 모르는 경우, 약속은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 약속도 알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있지만 아직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은 경우, 진도가 나가기 시작한 경우 등등.. 이 중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기도의 내용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입니다.
[김용호] [오전 11:34] 동의합니다.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에서 종말론과도 결합된 논리가 요구됩니다. 내세 구원의 기회가 오직 이 땅에서만 주어지느냐, 아니면 최후 심판의 자리에서도 주어지느냐가 심각한 변수가 되는 거지요. 이런 과정을 거쳐 치밀한 조직신학이 세워져야 그때 비로소 성경적인 기도의 내용이 정해질 수 있습니다. 무작정 기도하면 그 순간 송아지 우상 종교로 빠지게 되지요. 인간은 약하니까요.
[정진호] [오전 11:49] 정리가 안 되었다고 생각되면 차라리 기도를 안 하고 침묵하는 게 낫겠네요.
[김용호] [오전 11:50]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신학보다 신앙이 중요하다고 많이들 말하는데 어이없는 일이지요. 정작 자기들은 잡신신학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조직신학이 치밀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드리면 됩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명확하게 정리된 부분까지만 기도를 드리면 되지요.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심이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점까지만 기도를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찬송의 가사를 쓴 선교사는 전도를 다니다가 집에 돌아와서 자녀들이 불에 타 숨진 것을 본 후에 그 가사를 쓰게 되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재난 앞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1. 길흉화복을 초월한 존재이어야 하고
2.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체계를 잘 이해하고 그에 순종하는 존재이어야 하고
3. 하나님께서 형벌 체계를 변형시키시는 경우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원하시는 때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존재이어야 하고
4.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자신이 동원되어 있는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인식하고 있는 존재이어야 하며
5. 이러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기도할 때 재난의 현장에서 올바른 지정의가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즉 자신의 사명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을 때 자신의 지정의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되고 기도를 포함해 정확하게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임지웅] [오후 12:26] 요즘 들었던 생각이 '사람들은 왜 목사의 설교를 듣는 데만 집중하고 있을까? 왜 그에 대해 과연 진리일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지 생각을 못할까? 왜 스스로 고민하고 성찰함이 없이 듣기만 하는 것일까?'였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상당히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도사님의 말씀을 보고 이해가 되네요. 소수가 독점해버린 진리의 해석, 그리고 그러한 프레임 속에서 듣기만 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라는 억지논리 속에서 마비가 된 사람들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저는 아직 옛사람의 모습이라 거짓 진리에 대한 불편함보다는 '왜 목사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거지? 나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해석은 그게 아닌데?'라는 교만한 생각에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말이죠. 전도사님의 말씀처럼 설교는 사명과 훈련이 분명 필요한 영역이지만, 성경을 읽고 생각하는 것마저 통제되고 불경시 된다면 종교혁명을 앞둔 로만 카톨릭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 실제로 지금의 개신교가 로만 카톨릭을 기준으로 하지만 - 생각이 드네요.
이번 사고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걱정했던 부분이 이번 사고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이라고 말하는 미친 목사들이 없었다는 - 실제로는 있었는지 모르지만 - 점이네요. 예전에 인니 쓰나미 때 하나님한테 벌 받은 것이라고 말했던 목사들이 있었죠.
[김용호] [오후 12:28] 이번에는 자기를 보호하느라 감히 그런 말을 못하는 것이겠지. 그 때는 먼 나라 일이었으니까 할 수 있었고~^^
[임지웅] [오후 12:28] 덕분에 개독교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고 말이죠. ㅎㅎ
[정진호] [오후 12:30] 그렇게 말했다가는 세상 사람한테 매장 당할 것을 아는 정도의 머리야 있지 않겠어요? 아마 다른 나라에서 사고 났으면 그런 말 또 할 수 있었겠지요.
[김용호] [오후 12:30] 일본 쓰나미 때 조용기 목사가 에둘러 그런 발언을 했다가 비난을 받았는데 그에 대해 카페에 올린 글이 있으니 한번 읽어보게. 성경단상 26번 글이야.
[임지웅] [오후 12:31] 넵. 어제 교회에서 저희 부서(고등부)를 담당하는 전도사님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아이들과 깊은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지금은 얘기할 때가 아니라 기도할 때라고 그러더라구요. 그 때 든 생각이 ‘아 보수기독교의 프레임이 또 작동하는구나’였습니다.
[김용호] [오후 12:32] 그렇게 보이는군.
[임지웅] [오후 12:33] 생각과 고민만으로 변화가 될 수는 없겠지만 맹종으로 마비된 이성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새사람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용호] [오후 12:35] 깨달음은 정확한 문고리를 잡는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지. 물론 실제로 그 방에 들어가고 또 그 방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일이고. 따라서 치밀하고 정확한 조직신학의 수립과 그에 따른 회개와 소망이 성령의 역사에 선행해야 하는 것이지.
[임지웅] [오후 12:37]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것은 ‘아 정말 무섭구나... 인간에게 배움이라는 것이 참 중요하구나... 독자적 세계관이나 사고체계가 채 자리 잡지 못한 아이들에게 일방적 주입이 가져올 수 있는 폐해가 정말 크구나’였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마치 북쪽의 아이들이 tv에서 아바이 수령을 칭송하는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김용호] [오후 12:38] 서구 기독교가 교회의 권위를 세우고 로마 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왜곡시킨 성경해석을 가지고 사람들을 세뇌시켰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해. 그에 반발해서 나온 자유주의 신학과 진보기독교는 또 인본주의로 왜곡했지. 따라서 제3의 지점에 우리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임지웅] [오후 12:41] 그것을 지키기 위해 겁박과 거짓을 일삼고 있죠. “순종=복, 비판=불순종=화”라는 논리로 말이죠. 그 논리대로라면 저는 벼락을 맞았어도 수 만 번은 맞았어야 하지요. 그리고 저보다 새벽기도를 더 많이 하고 더 많은 봉사를 한 친구들이 시험에 붙었어야 하고요.
[김용호] [오후 12:42] 나는 화형 당했을거야.
[임지웅] [오후 12:42] ㅋㅋ 맞아요. 전도사님은 혹세무민하고 계시니까 정말 그랬겠내요.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요. ㅋㅋ
[김용호] [오후 12:44]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종교 사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우리가 모두 감사드리고 있지.
오늘 토론 주제와 연관도 있으니 여기서 기존의 내세 구원 교리들이 얼마나 인간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인가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크게 보아 제한구원론과 만인구원론으로 나뉩니다.
제한구원론에는 은총구원론과 공로구원론이 있습니다. 은총구원론에는 이중예정론이 있고, 공로구원론에는 보편속죄론이 있는데 보편속죄론에는 웨슬리아니즘과 세미 펠라기즘, 그리고 펠라기즘이 있습니다. 대개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즘만 공로 구원론으로 분류하는데 저는 이신칭의론 또한 공로 구원론에 포함시키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믿음이 인간의 종교적 확신인 이상에는 믿음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는 논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서구 기독교의 구원론은 모두 성경 구절들을 취사선택한 논리임을 우리나 먼저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구원론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구절들만 뽑아서 세운 이론인 것이지요.
만인구원론을 제외한 모든 구원론을 포함하고 있는 제한구원론은 결국 교회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해석입니다.
그에 반해 자유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만인구원론은 인본주의적 사고의 결과로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 신은 있을 수 없다는 신 개념을 동원한 것입니다. 만인구원론이 인간들이 보기에 가장 합리적인 논리로 보이지만 인간의 죽음과 고통이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에 의한 것임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기존의 모든 내세 구원론은 인간의 시각에 따른 성경의 취사선택이라는 결정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천년간 인간이 만들어온 여러 가지 내세 구원론들이 서로 싸우며 판을 쳐 왔는데 이제 공이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인간의 가치관을 개입시키지 않고 성경 구절을 취사선택하지 않고 조직신학을 세우는 것이 우리의 사명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야망도 없고 유불리도 없으며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해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기 때문에 차분히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임지웅] [오후 3:28] 전도사님. 오늘의 토론 주제와는 관련이 없지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부목사가 다른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목사가 되었는데 기존 교회의 부목사직을 겸직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총회 헌법상 노회 승인이 있다면 가능할 듯이 읽히는데요.
[김용호] [오후 3:30] 그야 그렇겠지.
[임지웅] [오후 3:31] 총회 헌법을 한 번 쭉 읽어 봤는데 법리상으로 많은 문제들이 보이네요 ㅎㅎ
[김용호] [오후 3:31] 그렇군. 교단 안에서 갈등이 생기면 왜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나 했더니 그래서였나보군.^^
[임지웅] [오후 3:32] 뭐 옛사람의 모습이니 규정이 좋더라도 세상으로 달려가긴 할 것 같습니다만 법이라는 것이 원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니 다 자기 입장에서 해석을 할 테지요. 결국 총회의 헌법이라는 것도 사람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니 태생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김용호] [오후 3:34] 세속법도 판례를 또 하나의 기준으로 삼기도 하니 끝이 없겠지. 판례도 뒤집힐 수 있으니까. 법을 자세히 만들어도 그 해석에 논란이 있으니 파고들면 어려운 일이야.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나 예수님의 계명을 놓고도 그러니 교단 헌법이나 세상 법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
[임지웅] [오후 3:36] 네. 사실 판례가 요즘은 제일 중요한 기준인데요. 엄밀히 따지면 대륙법계의 우리나라에서 판례가 마치 '법'으로 작동하는 것은 문제가 있죠. 허나 재판봉을 쥔 건 판사들이니... 그 판례도 고정된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 우스운 일이죠.
[김용호] [오후 3:39] 교단마다 헌법이 다른데 차후 우리의 연구과제야. 조직신학 비교가 중요한 것만큼이나 교단 헌법들의 비교가 중요해. 조직신학의 적용 사례 중 대표적인 경우가 교단 헌법이라 할 수 있으니까.
[임지웅] [오후 3:42] 오호. 말씀 듣고 보니 그러네요. 개인적으로 장기적 과제로 삼아 비교분석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합니다.
[김용호] [오후 3:43] 좋아. 그 성과가 우리 조직신학의 검토에 다시 사용되어야 하지. 우리의 해석만으로 끝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끝없는 비교 검토가 따라야 해. 무수한 크로스체크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마치 계룡산 도사와 같은 자아도취에 빠질 위험이 크거든. 우리가 아무리 영성이 깊어져도 육을 가진 한계는 계속되니까 말이야.
푯대를 공유하는 공동체들이 모이고 거기서 파견된 신학자와 인문학자 법학자 사회학자 정신과학자 심리학자 등등이 모여서 공동 연구를 하는 것이 내가 그리고 있는 큰 꿈 중의 하나야. 또 하나의 큰 꿈은 공동으로 운영되는 영성훈련원. 그래서 신학 연구원과 영성 훈련원이 결합해 차세대 교육을 이끌어 가는 것.
[임지웅] [오후 3:49] 아멘.^^
[김용호] [오후 3:49] 스케줄과 진도는 하나님 뜻대로 될 것이고 우리는 현재의 위치에서 현재의 여건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거지. 그리고 결과물이야 주인님 것이니 우리가 오바할 이유가 없고 또 초조할 이유도 없지. 신나게 어깨동무하고 뛰어가는 거야. 노예들의 행진~^^
[정진호] [오후 6:48] 인간의 선악관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선악관이 들어온다는 것을 죽음의 문제에 적용해 본다면 내가 또는 내 가족이 살아야 한다는 것에서 해방되어 어떠한 죽음이라도 묵묵히 받아들이게 되겠지요? 그 생명을 허락하게 하신 하나님이 그 생명의 주인이시니 주인이 그 생명을 다시 가져가시겠다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악관에서 나오는 행동일 테구요.
[김용호] [오후 6:49] 핵심입니다. 노예의 기본적인 자세지요. 그 기본이 절대 불가능한 것이 바로 인간이구요.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왜 죽게 하냐고 주인님의 멱살을 잡는 것이 잡신신학으로 무장한 육에 속한 크리스찬들이지요. 강청하는 기도라고 쓰고 멱살잡이라고 읽습니다. 육에 속한 욥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물론 욥도 자식들의 죽음 앞에서는 노예의 자세가 좀 나왔으나 자기 죽음 앞에서는 결국 하나님 멱살을 잡고 말지요. 자신이 도대체 뭘 잘못했냐고 따집니다.
[정진호] [오후 6:57] 과거 화장터에 몆 번 가본 적이 있는데 그 현장에서 울고불고하는 집은 교회 다니는 집이 아니고 그래도 교회 다니는 집은 아주 조용하게 진행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그런 정도로 절제할 수 있는 게 죽었어도 천국이 보장된다고 믿는 믿음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드네요. 실제 천국 가게 되는 지는 아무도 장담 못하는 거지만요.
[김용호] [오후 6:57] 예. 그래서 제가 “세 믿음 론”에서 첫 번째 믿음의 그 점은 인정했지요. 그 정도의 기여는 했다고요. 그런데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그 정도 기여가 어떤 것인지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각 교단의 부활절 성명서가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세뇌에 의한 절제의 한계를 넘어버린 거지요. 사람 목숨이 지상 최고의 가치라는 프레임에 사실은 서구 기독교가 완전히 함몰되어 있습니다.
[정진호] [오후 7:01] “근데 그래서 뭐?”라고 하면 별로 할 말은 없게 되지요. 예수님 믿어 겨우 장례식장에서 슬픔을 절제하고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거밖에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과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동기가 될지도 좀 생각해 봐야겠지요. 내가 전에 한번 이야기 했었는데 내 매형이 과거에 돌아가셨을 때 내가 어린 조카에게 할 수 있었던 말은 나중에 천국 가서 다시 만날 거라는 검증되지 않는 립 서비스 말고는 할 말이 없더군요.
[김용호] [오후 7:03] 서구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은 이 땅에서의 잘난 인생과 죽음 이후의 영생인데 이게 사실 꽤 잘 먹힙니다.
[임지웅] [오후 7:03] 아주 잘 먹히죠. ㅎㅎ
[김용호] [오후 7:04] 사람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조용기 목사가 설교할 때 교수, 의사, 판검사들이 밑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아멘~아멘~ 하는 것이지요. 다들 연약하니까요. 이어령 박사를 만나게 되면 꼭 묻고 싶어요. 도대체 크리스찬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요. 양화진 강의를 들어보면 복음의 논리에 도무지 관심도 없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안 보이고 있다고 느껴지거든요. 결국 내세 보장 한 마디에 그저 일단 무릎을 꿇은 것뿐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습니다.
[정진호] [오후 7:09] 우리에게 오면 눈이 확 열릴 가능성이 있는 분인데 참 안타까워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가 기독교인이 된 후 그 존재에 대한 믿음은 생긴 거 같아요. 다만 약속의 내용에 대해 무지한 거겠지요.
[임지웅] [오후 7:12] 네. 그게 맞는 말씀 같습니다.
[정진호] [오후 7:12] 그러다보니 기독교인이 된 후의 삶이 그 전과 달라질게 있겠어요? 밥 먹기 전 기도하는 정도 달라졌을까요?
[임지웅] [오후 7:12] 이어령 박사님의 최근작 제목이 “생명이 자본이다” 이던데 읽어보지 못해서 자세히 그 내뇽을 알지는 못하지만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뭔가는 좀 있네요. ㅎㅎ 지금 잠시 검색해보니 물질만능의 자본주의를 생명존중, 사랑의 자본주의로 대체하자는 내용인 듯한데 딱 기존 보수교계의 생각인 듯 보이네요. 자본주의라는 단어와 생명,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상극인 단어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정진호] [오후 7:13] 어제 도서관에 책 빌리러 갔다가 그 책 있기에 빌려왔어요. 자본주의도 이제 생명을 다했고 생명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가 가야한다는 것을 자신의 마지막 사명으로 생각하는듯해요.
[김용호] [오후 7:17] 성경에서 그것을 바벨탑이라고 부르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정진호] [오후 7:17] 그 생명이라는 말이 좀 애매하지만 결국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로 성경에서 표현하는 것이거든요. 존재의 재창조나 새로운 피조물로 보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지요. 주위에서 기독교를 권유 했던 사람들이 다 첫 번째 믿음을 가진 사람들뿐이었을 테니까요.
[김용호] [오후 7:19] 예. 신기루지요.^^
[임지웅] [오후 7:20] 저도 동감합니다. 거기서 말하는 생명은 지금의 존재 그 자체가 어떤 위협이나 공포, 핍박, 어려움 없이 소위 잘 먹고 잘 사는 고복격양의 태평성대를 살아가는 인민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정진호] [오후 7:21] 이재철 목사님과의 대화에서 보면 뭔가 옆에서 찔러만 줘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찔러주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대개 “이런 훌륭한 분도 예수 믿었다”는 홍보용으로 이용하는 거 같아요.
[임지웅] [오후 7:22] 저희 교회에서 늘상 듣던 말입니다. ㅎㅎㅎㅎㅎ “이런 사람도 예수 이렇게 잘 믿는데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안 믿는 게 말이 되냐.”
[김용호] [오후 7:23] 이어령 교수는 그 와중에 자신의 독자적인 존재감을 교묘하게 세워나가고 있다고 몇 번 느낀 적이 있습니다.
[정진호] [오후 7:23] 내가 처음에 한번 찔러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걸 못 했네요. 뭐냐 하면 아담이 만들어지고 첫째 날 저녁 깜깜한 밤이 왔을 때 아담이 얼마나 공포에 떨게 되었을까 하면서 인간의 종교는 첫째 날 밤을 지내면서 생겼을 거라는 말을 했었거든요. 그때 내가 글로 남길걸 그랬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데요. 타락 전이니 선악판단 능력이 없었을 때인데 무슨 공포를 느끼냐구요. 타락 후 맞이했던 첫째 날 밤에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겠지요.
[김용호] [오후 7:26] 오~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인간이 종교를 만든 것은 추방된 이후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임지웅] [오후 7:27] 네. 그 당연한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더 공포스럽네요.
[김용호] [오후 7:29] 이어령 박사의 그런 언급이 그분이 종교학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진호] [오후 7:29] 그러면서 아담이 자기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갈 수는 없고...
[김용호] [오후 7:29] 밤의 공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공포보다는 오히려 견디기 쉬웠던 거지요. 밤이 아무리 무섭다 해도 자존감이 사라지는 것보다는 견디기 쉬우니까요. 그리고 밤은 참고 견디면 지나가지만 하나님 앞으로 가면 끝장이지요.
[정진호] [오후 7:31] 그렇겠네요. 이미 선악판단의 주체가 되어 버린 후니까요.
[김용호] [오후 7:31] 그렇습니다. 자의식이 충만해진 거지요. 육에 속한 크리스찬은 그래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교리를 만든 겁니다. 감히 일대일로 말이지요. 그래서 이신칭의론도 공로신학에 포함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지요.
“알았어요. 믿을게요. 그럼 된 거지요? 이제 주세요. 내가 원하는 것을요.”
믿음의 공로를 기반으로 한 거래의 논리입니다.
제가 이중예정론을 은총신학에 넣은 것은 이중예정론의 믿음은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은 잘 모르는 논리입니다.^^ 그런 면에서 칼빈주의의 이중예정 논리와 우리의 이중예정 논리는 다른 것이 되지요. 칼빈주의는 첫 번째 믿음을 가진 자들의 이중예정론이고, 우리는 세 번째 믿음을 받은 또는 깨달은 자들의 이중예정론입니다. 믿음의 종류가 다른 것이지요. 칼빈의 이중예정론의 논리적 허점은 믿음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허점이지요.
[정진호] [오후 7:44] 마태복음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그게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번역해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들던데요. 다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은 자들이었거든요.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인간의 믿음은 있었는데 예수님이 주신 믿음은 없었던 게 아닐까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었다면”이라고 하실 때의 믿음이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일거구요. 영어 성경은 little of faith로 번역하고 있어요. 믿음이 없다는 말 아니에요?
[김용호] [오후 7:45] 헬라어 단어가 올리고피스티스인데 그 뜻은 “믿음이라곤 거의 없는”입니다. 겨자씨만큼도 믿음이 없다는 표현이지요.
[정진호] [오후 7:47] 그래서 예수님도 믿음을 구분해서 사용하신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어요.
[김용호] [오후 7:47] 예수님의 그 말씀을 두고 믿으라는 독촉이라고들 보지만 나중에 받게 된다는 의미의 말씀인 것이지요. 나중에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내가 한 말을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도망간 것을 책망하지 않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약속된 성령이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이유이기도 하구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으라고 욱박지르실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런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당시에 의지와 의리가 강한 제자가 하나라도 있었으면 낭패가 될 뻔했어요. 성경의 계시가 그 의리에 묻혀버렸을 테니까요. ㅎㅎ 당시 열심당원들이었던 바라바 일당들은 순교를 떡먹듯이 하는 자들이었거든요.
[정진호] [오후 7:52] 그런 자는 예수님이 알아서 제자로 뽑지 않았겠지요.
[김용호] [오후 7:52] 예. 그런 인간은 빼신 거지요.^^ 가룟 유다가 그런 타입이었는데 다른 용도로 쓰셨구요. 꼼꼼하신 하나님~^^
[정진호] [오후 7:54] 돈 맛을 안 유다를 선택하신 거지요.
[김용호] [오후 7:54] 좀 다른 접근이 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충동질해서 정치적 리더로 세우려고 로마 병정들까지 끌어들여 예수님을 코너에 몰아 움직여보려고 했다는 거지요. 물론 성경에 은전 스무 냥 이야기가 나오니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요.
[정진호] [오후 7:57] 돈이 목적이 아니고 좋은 세상 만들기를 유다가 원했다는 거네요.
[김용호] [오후 7:57] 예. 바로 그 점인데 당시의 열심당원을 돈을 밝히는 자로 보는 것은 사실 좀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목숨을 건 자들이었거든요. 나름대로 종교적 성전을 치루고 있는 자들이었지요. 그리고 유다에 대한 성경의 표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유다가 자발적으로 그랬다는 기사와 사단이 유다를 조종했다는 기사지요.
[정진호] [오후 7:59] 자발적으로 했다는 게 사단이 조종했다는 거와 같은 말로 들리는데요. 그리스도 밖에 거하는 삶이 바로 사단의 조종 안에 있는 삶이니까요.
[김용호] [오후 7:59] 예. 그렇습니다. 성경적인 표현이지요.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바울의 표현도 세상으로 출교시켰다는 포현이지요.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는 장면에서도 두 가지 설명이 똑같이 나오지요. 다윗이 했다, 사단이 시켰다. 마귀론이 빨리 정리되어야 하는데.....^^
[정진호] [오후 8:01] 빨리 천천히 하지요.^^
[김용호] [오후 8:01] ^^ 느긋하게 서둘러서~^^
빛과 어두움의 진리체계의 비교의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리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