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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국의 사신으로 명나라 사행(使行)길에서 >
1389년(창왕 1) 6월 양촌(陽村) 권근(權近) 선생은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신분으로 고려국의 사신이 되어 명나라 사행(使行)길에 올랐다.
당시 이성계에 의해 우왕(禑王)이 폐위되고 그의 외아들 창왕(昌王)이 뒤를 이어 즉위했는데, 새로 즉위한 창왕(昌王)이 명 황제를 직접 알현하여 조근(朝覲)의 예를 올리고자 청하는 사행(使行)이었다.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용봉참(龍鳳站)을 지나던 사신단 일행이 잠시 시냇가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수행원 중 통사(通事) 오진(吳眞)이 고기를 낚아 생선국을 끓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선생께서 시(詩)를 읊는다.
< 過龍鳳站. 溪上歇息. 通事吳眞釣得小魚數十尾. 용봉참(龍鳳站)을 지나 시냇가에서 휴식하는데 통사(通事) 오진(吳眞)이 작은 고기 수십 마리를 낚다. >
- 권근(權近) -
向午行將歇 정오 무렵이 다 되어서 잠시 쉬려고
停鏕不路傍 말을 멈추고 길가에 내렸네.
細沙憐雨霽 비 개니 가는 모래 유달리 곱고
高樹愛風涼 높은 나무 선선한 바람을 부르네.
垂釣溪流淨 낚싯대 드리우니 시냇물 맑고
烹鮮野飯香 생선국 끓이니 들밥이 향기롭다.
遠遊多少事 머나먼 여행길에 구경거리 좋은 일 많아
老去說應長 훗날 이야깃거리도 응당 길어지겠지.
머나먼 여행길에 구경거리 좋은 일 많아 먼 훗날 늙어지면 이야깃거리도 많아지겠지 하고 읊었지만, 선생은 이 여행으로 인해 엄청난 시련을 겪는다.
<명 황제가 내려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아 들고 >
긴 여정 끝에 명 황제를 알현한 선생은 새로 즉위한 창왕(昌王)의 조근(朝覲)을 정중히 청하였다.
그러나 명 황제는 선생이 요청한 창왕(昌王)의 조근(朝覲)을 불허하고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내렸다.
당시 명나라 예부의 자문에는 폐위된 우왕(禑王)을 신돈(辛旽)의 아들로 규정함으로써 우왕(禑王)의 외아들인 창왕(昌王)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실로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새로 즉위한 창왕(昌王)이 왕 씨가 아니므로 고려국 국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 아닌가.
그 문서를 받아 들고 귀국길에 오른 선생은 심장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외교 문서를 이대로 왕에게 올릴 수도 없고 안 올릴 수도 없으니 실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지 않은가.
당시 고려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 정치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 중심엔 이색을 중심으로 한 고려의 충신들이 있었고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이성계 일파가 있었다.
고려의 보루인 최영마저 이성계에 의해 주살되자 목숨을 건 세력 다툼이 그 사회를 뒤흔들었다.
더구나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가 우왕(禑王)을 폐위시키고, 이어 호시탐탐 고려 왕실의 붕괴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하필 이런 때 엄청난 파문을 불러올 문서를 몸에 지니고 있으니 참으로 두렵고 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선생께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역성혁명의 흉계가 깔린 이성계의 신 개혁 정책에 반대하고 있었지 않은가.
황천길 같은 귀국길, 시간은 가고, 도성은 가까워지고, 운명의 날은 다가오는데 대안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파구는 보이지 않고 묘책도 없으니 실로 난감한 상황이 아닌가. 폭탄을 허리에 두르고 불 속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됐으니 말이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가까스로 도성에 도착한 선생은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문제의 명나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 몰래 우왕(禑王)의 장인이며 창왕(昌王)의 외조부인 이림(李琳)에게 알려 사태에 대비토록 했다.
그 외교 문서가 불러올 참사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사태를 예방하는 데 최선의 길이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 외교문서를 왕에게 올리기 전 먼저 외부로 유출하는 것은 극형에 준하는 중대한 범죄행위다.
더구나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신분이기에 더욱더 엄격한 국법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국법의 엄중함을 선생께서 모를 리 없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를 이림(李琳)에게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선생의 고심이 읽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비밀은 오래가지 않아 결국 밝혀져 선생은 투옥되었고 중형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적에 가까운 이성계의 도움으로 간신히 극형만은 면하게 된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소문만 무성하던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 : 우왕과 창왕은 왕 씨가 아니다.)을 확대시켜 1389년(창왕 1) 12월 창왕(昌王)마저 폐위시킨다.
폐위된 창왕(昌王)은 우왕(禑王)의 뒤를 이어 9세 어린 나이에 제33대 고려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나 1년 4개월 만에 다시 폐위되어 강화도로 추방되었고 곧이어 처형되었다.
그리고 강릉으로 추방되었던 우왕(禑王) 역시 이때 처형되었다.
우왕(禑王)은 강릉에서, 창왕(昌王)은 강화에서 부자(父子)가 각각 처형된 것이다.
그리고 선생께서도 1389년 창왕(昌王)의 폐위에 맞춰 그해 12월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되었다.
이후 선생은 흥해(興海), 청주(淸州), 익주(益州) 등을 옮겨 다니며 파란만장한 유배 생활을 이어갔다.
1390년(공양왕 2) 11월 유배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된 선생께서는 충주 양촌(陽村)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저술 그리고 지방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는 일로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1391년(공양왕 3) 선생은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 유교 경전 해설서인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저술에 심혈을 쏟는다.
< 고려(高麗)의 멸망 >
서기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된 고려(高麗)는 474년 만에 이성계에 의해 멸망에 이른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비롯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충신들이 고려(高麗)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워왔던가. 그러나 쇠락한 고려는 속절 없이 무너져 내린다.
당시 정몽주의 어머니는 피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우나니
청강(淸江)에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그러나 노모(老母)의 간절한 바램과는 달리 고려를 이끌던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철퇴에 비명사(非命死) 하고 만다.
이어 고려의 충신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백설 잦아진 골짜기에 구름이 머무는구나
반겨줄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 조선의 건국 >
역성혁명의 선봉에 서 있던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드디어 조선 건국을 만방에 공표하고 스스로 용상에 오르는 대관식을 거행했다.
정몽주(鄭夢周)를 비롯한 많은 고려 충신이 도륙된 피의 숙청을 딛고 조선이 건국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474년간 이어오던 고려(高麗)의 왕업은 역사 속으로 함몰된다.
그런데 조선이 건국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는데 축제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 서로 권력을 놓고 극심한 암투가 벌어진다.
왕자들은 왕자들대로, 개국 공신들은 개국 공신들대로 서로 물고 물리는 치열한 암투가 벌어진 것이다. 전리품을 챙기려는 혈투가 벌어진 것이다.
당시 건국된 조선은 폭풍이 지나간 쑥대밭처럼 어수선한 상황으로 세상을 경영할 인재는 없고 칼잡이들의 말발굽 소리만 어지러이 들려오는 무법천지가 됐다.
용상의 태조 이성계 역시 방향을 잃고 허둥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시급히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정국을 안정시킬 묘책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강력한 통치제도를 만들어 속도감 있게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민심을 안정시켜야만 했다.
또한 새로 건국된 조선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부각해 낡은 것이 가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음을 만천하에 알려야만 했다.
당시 이성계에겐 신생 조선을 설계할 수 있는 인재가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했다.
고민하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한 권근(權近) 선생을 떠올리며 권근(權近) 선생의 부친인 권희(權僖) 옹(翁)을 통해 선생의 출사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당시 선생께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로 정몽주(鄭夢周)의 뒤를 잇는 성리학자로써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리고 선생이 저술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엔 왕권 강화와 군신(君臣) 간의 엄격한 위계질서 확립을 지지하는 선생의 입장이 피력됐는데,
선생의 이러한 국가 경영 철학이 이성계의 정치적 지향과 맥을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태조(太祖) 이성계는 권근(權近) 선생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학문적,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더욱더 선생을 중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태조 이성계에겐 혁명 동지인 정도전이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있었지만,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국가를 표방하고 있어 서로가 추구하는 목표가 달랐다.
< 조선 조정에 진출 >
1393년(태조 2) 2월에 이성계는 드디어 계룡산(鷄龍山) 행재소(行在所)에서 권근(權近) 선생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망설이던 선생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새로 건국된 조선에 등용된다.
이 일로 인해 선생께서는 패망한 고려의 유신들로부터 절개를 저버렸다는 비난과 함께 심한 공격을 받는다.
사람들은 선생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비교하며 변절(變節)이라는 잣대를 들이댔다.
"흰머리 양촌(陽村)도 의리를 말하는데, 어느 시절인들 어진 이가 나오지 않겠는가!" 당시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선생을 노골적으로 기롱(譏弄) 하며 한 말이다.
그렇다.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정치 윤리를 저버린 선비에 대해 얼마든지 변절자라 욕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는 왜 하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인지 먼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치란 첫째도 둘째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하는 것이다. 군주는 바뀌어도 나라와 백성은 바뀌지 않는다. 군주 역시 백성을 위한 존재다.
오로지 혈통을 계승한 군주에게만 목숨 걸고 충성하며 절개를 지키는 것만이 올바른 정치가의 도리인지,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선비의 길 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국 고대사를 살펴보면, 상(商)나라의 신하국인 주(周)나라가 반란을 일으켜 상(商)나라를 정벌하고 무왕(武王)이 새로이 등극하자,
백이(伯夷)는 자기가 따르는 임금이 아니면 섬길 수 없다 하여 산속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 굶어 죽었다.
반면에 이윤(伊尹)은 어느 분을 섬기던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다스리던 나의 백성이 아니겠는가 하며,
스스로 무거운 짐을 마다하지 않고 천하를 책임지려 했으며 어떠한 경우이든 인의(仁義)를 앞세워 백성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이에 맹자는 이윤(伊尹)을 높이 평가했다. 이것이 권근 선생께서 조선에 진출한 명분이기도 하다.
당시 고려의 신하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가담한 사람은 정도전을 비롯해 조준, 하륜, 남은, 이직(李稷) 등 수도 없이 많다.
그중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아오던 이직(李稷)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까지 검을쏘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여기서 까마귀는 조선 건국에 참여한 신하를 지칭하는 것이고 백로는 고려를 지키는 신하를 말한다.
병들고 수명이 다한 고려를 과감히 버리고 새 나라를 세워 세상을 바르게 하려는 까마귀가 고려를 지키는 척하며 왕을 마음대로 하고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백로를 비판한 것으로 해석된다.
<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
조선 태조 3년(1394) 5월에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조준(趙浚)과 함께 찬술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왕에게 올렸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조선 개국의 기본 강령을 논한 규범 체계서로 중국 주(周)나라의 통치제도인 주례(周禮)를 들여와 조선의 실정에 맞게 수정 편찬한 것으로 조선을 경영할 통치제도가 담겨있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정치란 올바른 선비, 즉 참된 선비만 할 수 있는 것이며 참된 선비의 으뜸인 재상이 중심이 되는 중앙집권 체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 임금은 단순히 상징적인 존재로 아무런 권력도 없이 용상에 앉아 말린 곶감이나 씹는 뒷방 늙은이 수준의 통치자일 뿐이다.
왕권 강화를 꿈꾸던 이성계의 눈에 과연 그런 정도전의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
결국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개인이 사사로이 만든 사찬(私撰)으로 공식 수용되지 않았다"라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표면상으론 개인이 만든 사찬(私撰)으로 공식 수용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혹시 차려진 밥상을 노리는 도둑고양이를 발견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조선을 설계하다 >
조선 건국 후 불안정한 정국을 고민하던 태조 이성계는 새로 등용된 권근(權近) 선생에게 강력한 통치 질서 확립을 위한 법체게 구축과 정국을 안정시킬 제도 개선안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한다.
건국 초 어수선한 환경에서 통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을 것이다.
자칫 머뭇거리다가 무력으로 쟁취한 왕업이 무식한 칼잡이의 칼춤으로 끝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도 개혁안을 요청받은 선생은 많은 학자와 관료들을 참여시켜 새로 건국된 조선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생은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다.
당연히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아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조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윤곽을 선명하게 부각 시켰다.
고려가 귀족을 중심으로 한 불교 국가였다면 조선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사대부 중심의 유교 국가를 표방한 것이다.
또한 선생이 저술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에 명시된 것처럼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게 하였으며, 관리들의 업무와 권한을 명확히 규정하여 부정부패와 권력의 남용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국왕의 권위가 바로 서고 국가의 안정과 사회의 공정성을 추구하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중앙정부와 지방행정의 역할을 명확히 하여 권한의 배분을 체계화했다.
이로써 강력한 중앙집권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백성들이 더욱 공정한 법질서 환경에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했다.
백성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한 토지제도, 조세제도, 군사제도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여 국가 운영의 전반적인 체계를 갖추고자 했다.
이는 조선의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안정성을 도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각 지방마다 향교를 확대 설치해 교수관들을 두어 유생들을 가르치고 무지한 백성들을 깨우치게 하여 많은 인재가 등용되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이로써 백성들이 더욱 공정한 기회를 얻게 하고 천민을 포함한 지방의 능력 있는 인재가 얼마든지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고려에도 과거제도가 있었으나 제한적이었고 대부분 세습을 통해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조선은 과거시험을 통해 뜻있는 인재들이 마음껏 도전할 수 있도록 등용의 문을 활짝 개방한 것이다.
이토록 선생은 다양한 사회 제도를 만들어 정치를 안정시키고 사회질서를 확립해 단 한 사람의 억울한 백성도 발생할 수 없도록 했으며,
오직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또한 엄격한 제도의 정착을 통해 아래로는 땅끝 산간마을에서 밭을 매는 촌노부터 위로는 용상에 앉아 있는 국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도의 틀 안에서 각자 맡은 바 임무를 다하도록 했다.
이로써 군주의 권한과 신하들의 의무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권리와 의무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통치 질서를 확립했다.
칼로 통치하는 국가에서 제도에 의해 경영이 되는 국가를 설계한 것이다.
또한 제도를 다듬고 다듬어 국가 영토 안에 있는 나뭇잎 하나, 풀 한 포기, 돌 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조선의 정신이 깃들도록 설계했다.
이로써 조선 초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법적 기반 등을 마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생의 개혁안은 대부분 수용되어 새로운 왕조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고 조선 초기의 혼란을 종식 시키고 정상적인 통치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 되었다.
또한 선생의 개혁안은 국가 운영의 기본서가 되었고 국왕의 통치 원칙과 백성들의 생활 규범을 담고 있어 1485(성종 16)년에 완성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기까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종루종명서문(鐘樓鐘銘序文) >
1395년(태조 4) 조선 조정은 인정과 파루를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지금의 종로 사거리에 종루(鐘樓)를 짓고 인경종을 주조하여 설치했다.
당시 인경종을 설치하며 양촌(陽村) 권근(權近) 선생은 종루종명서문(鐘樓鐘銘序文)에서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종을 쳐서 조선이 건국되었음을 세상에 알리고
이 종을 쳐서 후세인들의 이목을 깨우치게 함이며
이 종을 쳐서 백성들이 일하는 시각과 마치는 시각을 알게 함이로다.
종루종명서문(鐘樓鐘銘序文)에서 보듯이 새로운 세상이 열렸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후세인을 일깨우며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을 설계한 선생의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 표전문 사건 >
표전문이란 당시 명나라에 대한 사대문서(事大文書)로 국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표문, 황태후, 황후 또는 황태자에게 올리는 글을 전문이라 하였다.
1395년(태조 4) 11월 조선 국왕 임명장인 고명(誥命)과 국왕이 사용할 직인인 인신(印信)을 청하러 예문춘추관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 정총(鄭摠)을 명나라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정총(鄭摠)이 가지고 간 표문의 언사(言辭)가 불손하다고 명 황제에게 트집을 잡혀 정총이 현지에서 억류되었다.
이어서 이듬해 정월 정당문학 판문하부사(政堂文學判門下府事) 유구(柳玽)와 한성부윤 정신의(鄭臣義)를 신년 축하 사절인 하정사(賀正使)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때에도 예부에 올린 표전문이 경박희모(輕薄戱侮)하다 하여 두 사신을 억류하고 문초하였는데 유구(柳玽)가 표전문은 정도전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실토하자 명나라는 표전문 작성에 관여한 자들을 보내라고 통보하였다.
표문은 대사성 정탁(鄭擢)이 작성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교정했으며, 전문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김약항(金若恒)이 작성하였다.
이때 정탁은 칭병(稱病), 정도전은 신변 위협을 느껴 가지 않고 김약항 혼자 갔다가 그 역시 억류되고, 재차 정탁과 정도전의 압송을 통보했으나 이에 불응하자 명나라에서 다시 사신까지 보내와 정탁과 정도전의 압송을 강하게 재촉하였다.
이렇게 되자 표문 사건이 단순한 황제의 몽니가 아닌 정도전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해석됨에 따라 태조 이성계는 더욱더 난감한 처지에 빠져든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공신을 넘어 혁명의 동지로써 조선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던 태조 이성계는 특단의 조치로 1396년(태조 5) 7월 한성부윤 하륜(河崙)을 지금의 대통령 특사 자격인 계품사(啓稟使)로 임명하고 사역원(司譯院) 판사 이을수(李乙修)를 시켜 정도전 대신 표문을 작성한 정탁과 교정을 본 노인도를 명나라로 압송토록 조치했다.
이때 권근(權近) 선생께서 본인도 표전문 작성에 관여한 사실이 있음을 스스로 자백해 압송자 대상에 합류되었다.
명에 도착한 하륜은 표전문 사건의 전말을 명 황제에게 해명하고 그해 11월 정탁과 함께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돌아왔으나, 정총, 권근, 김약항, 노인도 등은 여전히 명에 억류되었다.
당시 하륜이 들고 온 예부의 자문에는 "죄 없는 자는 돌려보낸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396년(태조 5) 9월 명 황제는 억류 중인 권근 선생을 불러 24개의 시제(詩題)를 내리고 그 시제에 따라 응제시를 지어 올리도록 했다.
선생은 9월 15일에 "왕경작고(王京作古)" 등 8수, 9월 22일에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 등 10수, 10월 27일에 "청고가어내빈(聽高歌於來賓)" 등 6수를 지어 총 24수의 응제시(應製詩)를 지어 올렸다.
응제시(應製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8수에서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그리고 사행길에 지나온 서경, 압록강, 요동, 바닷길 등을 읊었다. 다음 10수에서는 동이, 삼한, 신라, 탐라 등 역대 국가의 흥망과 금강산, 대동강 등 명승지를 노래했다. 마지막 6수에서는 명 황제가 베풀어 준 잔치에서의 흥취를 읊었다. 조선과 명나라에 대한 사대적 입장에서 명과 명제의 덕을 칭송하고, 우리나라 역사의 유구함과 독자성을 시(詩)로 표현한 것이다.
선생이 지어 올린 시(詩)를 받아본 명 황제가 크게 감동하여 “학문이 노련하고 성숙하다.”고 극찬했으며 더불어 명 태조가 답례로 어제시(御製詩) 3편을 지어 하사했다. 또한 신하들에게 선생을 죄인이 아닌 사신의 예우로 대할 것을 명하고 3일 동안 수도 남경(南京)을 유람하도록 했다. 선생은 남경(南京)을 돌아보며 명나라의 태학(太學)인 문연각(文淵閣)에서 유삼오(劉三吾)와 허관(許觀) 등 당시 명나라를 대표하는 학자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이는 선생의 학문이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 한편으로 응제시(應製詩)를 짓고 어제시(御製詩)를 받은 일로 인해 선생의 학문적 명성은 국내뿐만 아니라 명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은 명 황제가 선생께 하사한 어제시(御製詩) 3수다.
태조고황제어제시(太祖高皇帝御製詩)
題鴨綠江(제압록강) 제 압록강
鴨綠江淸界古封 압록강 맑고 지경은 옛 정한 대로,
强無詐息樂時雄 강했어도 거짓 없이 시대의 영웅이라 즐겨한다.
逋逃不納千年祚 도망친 죄인을 들이지 않는 1천 년의 복지,
禮義咸修百世功 예절과 의리 모두 백 세의 공적 이루었네.
漢代可稽明在冊 한나라 정벌은 분명히 책에 있어 상고하겠고,
遼征須考照遺蹤 요나라 정벌한 것 남긴 자취 살펴야 할 것일세.
情懷造到天心處 정회(情懷)는 하늘 중심에 성취된 듯,
水勢無波戍不攻 물에는 파도 없고 수 자리도 변동 없다.
高麗古京(고려고경) 고려의 옛 수도
遷遺井邑巿荒涼 우물과 동네 옮겨 가서 저자가 황량하여,
莽蒼盈眸過客傷 우거진 풀 눈에 가득 길손이 상심한다.
園苑有花蜂釀蜜 비원(園苑)의 꽃에서 벌이 꿀 모아가고,
殿臺無主兔爲鄕 주인 없는 궁전과 누대(樓臺)엔 토끼의 고장 되었네.
行商枉道從新郭 행상(行商)은 길을 돌아 새 성으로 가고,
坐賈移居慕舊坊 좌판은 옮겨 살며 옛 동네 그리워한다.
此是昔時王氏業 이것이 옛날 왕 씨의 기업(基業),
檀君逝久幾更張 단군 가신 지 오래인데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가.
使經遼左(사경요좌) 사신이 요좌 땅을 지나며
入境聞耕滿野謳 지경에 들어서면 들에 가득 농사하는 노래 들린다.
罷兵耨種幾春秋 군사를 파하고 김매고 심은 지 몇 춘추(春秋)인가.
樓懸邊鐸生銅綠 수루(戍樓)에 달린 변탁(邊鐸)이 녹슬고,
堠集煙薪化土丘 망보(望堡)에는 재와 낙엽 몰려서 흙더미 되었네.
驛吏喜迎安遠至 역리(驛吏)는 먼 길 편히 온 것 기쁘게 마중하고,
馹夫忻送穩長遊 일부(馹夫)들 기쁘게 놀라고 좋아서 전송한다.
際天極地中華界 하늘 끝 땅끝까지 닿은 중화(中華)의 경계,
禾黍盈疇歲歲收 벼와 기장 밭에 가득하여 해마다 거둔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두 번째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檀君逝久幾更張 단군 가신 지 오래인데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가." 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구다.
요즈음 중국 역사학자들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에 의하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지 않았고 고려는 한국사에 해당하지만,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한다.
조선도 이성계가 한반도에 세운 조선은 한국사지만 고조선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동북 공정이다.
그런데 명 황제가 선생께 하사한 시 구절에 의하면 명 황제 스스로 우리의 고대 단군 조선을 한국사로 명확히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밀직사사(密直司事) 한상질(韓尙質)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조선(朝鮮)과 화녕(和寧) 두 개의 국호 중 어느 하나를 재가해 주기를 요청했다.
그러자 명 황제는 "동이의 국호 가운데 오직 조선(朝鮮)이란 명칭이 아름답고 또 그 역사도 오래되었으니, 본래의 옛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東夷之號 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矣 可以本其名以仍之)"라고 말하였다.
이 두 사실이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지 않은가. 이 자료를 동북공정의 반박 자료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권근 선생의 응제시에 크게 감동한 명 황제는 표전문 사건으로 억류 중인 조선의 신하들을 모두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특별히 붉은 관복을 한 벌씩 하사하였다.
그 후 조선의 신하들이 하직 인사차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권근 선생은 황제가 내려준 붉은 관복을 입고 있었으나 정총(鄭摠)은 현비(顯妃)의 상 때문에 상복인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황제가 정총을 향해 진노하여 말하였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내가 내려준 옷을 입지 않고 흰옷을 입었느냐?”
그러고는 금의위(錦衣衛)에게 지시해 정총 등을 국문하게 했다. 정총은 두려워 도망가다가 잡혀 투옥되었고 김약항과 노인도 역시 이 사건에 휩쓸려 함께 투옥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1397년(태조 6) 3월 권근 선생은 하정사로 명에 머물고 있던 안익(安翊), 김희선(金希善)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홍무제의 성지(聖旨)에는 권근이 노성하고 진실 된 인물이라서 귀국시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태조실록에는 황제가 내린 어제시(御製詩)와 이에 대해 권근 선생이 화답한 응제시(應製詩)가 실려 있다.
당시 명에서는 조선 왕실과의 혼인을 거론하거나 신덕왕후 강 씨의 죽음에 조문하는 내용을 담은 칙위조서(勅慰詔書) 등을 보내기도 했다.
권근 선생께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하자 정도전은 곧바로 선생을 탄핵했다.
탄핵의 근거는 함께 파견된 정총(鄭摠), 노인도 등은 모두 억류된 상태에서 권근만 무사 귀환했고, 귀국 후 황금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권근과 명나라 황제 사이에 모종의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었다.
정도전이 직접 탄핵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것을 받아본 태조 이성계가 그 상소문을 정도전 면전에 내동댕이치며 "이게 무슨 짓이야! 그 황금 내가 준 거야! 내가, 노자로!" 하고 버럭 화를 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표전문 사건으로 온 나라가 곤욕을 치르던 와중에, 명에 억류되었던 권근 선생께서 황제의 융숭한 대접까지 받고 돌아오자, 정도전의 심기가 몹시 불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께서 귀국한 후에도 명나라는 정도전을 화의 근원(禍源)으로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도전의 압송을 재차 요구하였다.
한편, 1397년(태조 6) 11월에는 명에 억류되어 있던 정총, 김약항, 노인도가 처형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해져 왔다.
이에 격분한 조선은 정도전과 남은(南誾)을 중심으로 태조의 호응을 받아 군량미를 비축하고 병력을 증강해 진도강습(陣圖講習)을 강화하는 등 일련의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다.
명분은 요동을 정벌해 동명왕(東明王)의 옛 영토를 되찾아 황제국으로 등극하자는 것이 골자다.
그러나 1398년 5월 조선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있던 명나라 태조가 죽었다.
그리고 9월에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도 죽었으며, 이듬해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함으로써 표전문 문제와 요동 정벌계획 등은 일단락 짓게 되었다.
< 오얏꽃 흩날리던 조선 땅에 별이 지다. >
1408년 6월 27일 태조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이 손수 입에 넣어 준 우황청심원을 삼키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도 세월을 뛰어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의 일생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와 암투, 그리고 혈족 간의 살생을 지켜보는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살아생전, 평소 고향인 함흥 땅에 묻히고 싶어 했던 태조 이성계는 그의 바램과는 달리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은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에 장례하고 건원릉(健元陵)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선왕의 뜻을 헤아려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에서 청완(靑薍 억새)을 가져와 릉(陵)의 봉분을 덮었다.
그리고 이듬해 비각을 세우고 선왕이신 태조 이성계의 신도비 비문을 권근(權近) 선생에게 의뢰하여 짓도록 했다.
여말의 신하였던 권근 선생께서는 한때는 이성계와 정치적 지향점이 달라 서로 견제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로 인해 이성계의 조선 창업 과정에서 요동치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려 긴 세월 유배 생활을 겪는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한때는 명나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도당에 올리기 전 이림(李琳)에게 먼저 보여줬다는 이유로 중형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이성계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또한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의 끈질긴 설득으로 개국 조선에 등용되어 명실상부한 유교 이념의 국가를 건설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한평생 인의(仁義)를 앞세워 백성들을 살피고 이 땅에 선비정신을 심는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발이 된 몸으로 격동의 세월을 함께한 이성계의 신도비 비문을 짓기 위해 필을 들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그 암울했던 시절을 되돌아보며 한자 한자 비문을 써 내려갔다. 비문이라기보단 한평생 이성계와 함께했던 시절에 대한 회고록을 썼는지도 모른다.
비문 작성이 완성되고 태조 이성계의 신도비가 세워지기도 전 1409년(태종 9) 2월 14일 선생께서 지병으로 졸(卒) 하셨다.
이렇게 해서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한 선비의 파란만장한 삶이 막을 내린다.
다음은 선생께서 귀양지에서 돌아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서글픈 심정을 읊은 시(詩)다
吾生計拙素無儲 내 평생 살림을 못 해 모은 재산이 없어
謫後歸來借屋居 귀양 뒤에 돌아와 집을 빌어 사네
欲墾荒田望秋稔 가을 추수를 바라고 거친 밭을 개간하며
空廚烟冷煑園蔬 싸늘한 부엌에서 나물을 삶는다네
글을 마치며 선생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선조의 일대기를 살펴보며 2024년 11월 18일 후손 열운(洌雲) 오헌(五憲)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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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타향살이_트럼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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