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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 묵상글 들 ( 부활 3주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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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3주 월요일-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지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그렇게도 열성적으로, 아니
극성으로 찾는 것은 표징을 봤기 때문이 아니라 빵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사람들이 표징을 봤어야 했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진정 주님은 표징을 봐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묻는 것은 복음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사악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두 말씀이 틀린 말씀이 아니라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악한 것이지만 표징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 생각에도 표징을 주님께 요구하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표징을 청하는 것까지는 좋게 받아들이시지만
요구하는 것은 악하다고 생각하시고 노하실 겁니다.
청하는 것은 겸손한 자세지만 요구하는 것은 무례한 거지요.
사랑으로 주시고, 은총을 주시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식들이 종종 부모에게 돈 내놓으라고 떼쓰는 것과 같지요.
그때 부모들은 '너는 어찌 맡겨놓은 것처럼 내놓으라고 하느냐.'고 하지요.
그러므로 표징은 요구할 것이 아니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표징은 또한 청해야 할 뿐 아니라 봐야 할 것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표징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한탄하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빵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빵을 배불리 먹이시면서 그 빵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보게 되기를,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사랑을 빵에서 보게 되기를 바라고,
그래서 하느님 체험과 구원 체험을 하게 되기를 바라셨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빵을 주시는 하느님은 보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으며,
하느님께서 주신 빵만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은 보지 못하고 빵만 찾습니까?
우리말에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중국의 사자성어나 고사성어만 대단하게 생각하고
의미 부여하는데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얼마나 의미심장합니까?
똥은 우리가 제일 더럽게 여기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똥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 중에 없고 개뿐이며,
개는 다른 좋은 것 있어도 필요 없고 똥만 찾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보통의 인간은 똥만 보이는 개와 같기에
표징을 못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비유하니
매우 충격적이긴 하지만 사실 이런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그리고 제가 약해져서 그런 면도 있지만 겸손해진 면도 있어서
요즘은 옛날처럼 먹는 것과 관련하여 고상한 척하지 않고
개와 같이 먹는 것밖에 모르는 저 자신과 인간들을 얕잡아 보지도 않습니다.
사실 배고프고 아프면 먹는 것밖에 안 보이고 고통밖에 안 보이는 것이
우리 인간이고 그래서 하느님을 믿을지라도 배 불리시고 낫게 해주시는
하느님만 믿고 찾다가 배부르고 평안해지면 잊어버리는 우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상한 척하지 말고
이런 나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 나는 개야!'라고 하며 개에 주저앉지 않고,
빵을 찾는 나에서부터 출발하여
빵을 주시는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을 찾아 나서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으라.'는
시편 말씀처럼 주님의 좋으심을 조금이라도 맛보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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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생명의 빵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25)
군중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됩니다.
배를 타고 빵의 기적이 있던 곳에 왔다가 거기에 주님이 계시지 않자 카파르나움까지 가서 드디어 예수님을 뵙지요. 매우 적극적이고 열성가득한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기 위해 시간과 수고,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군중이 당신을 찾는 이유를 잘 아시는 예수님의 지적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 표징의 진정한 의미에로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사실 "빵"은 당장 물리적으로 배를 곯는 이들에게는 실질적 양식이 되겠지만, 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재물이나 명예, 권력까지도 의미할 겁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주님을 그토록 간절히 찾는 이유가 썩어 없어질 세속의 환영을 얻기 위함이라면 참 허무하지요. 인간에게 필요한 진정한 양식은 영원까지 이어지는 행복인데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적대자들 앞에 선 스테파노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사도 6,10).
스테파노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가 사심이나 탐욕으로 세속의 양식을 좇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인"(사도 6,15) 것도 이를 증명합니다. 부와 명예의 바벨탑을 아슬아슬 쌓는 자의 얼굴에서는 찾기 힘든 빛입니다.
"권세가들 모여 앉아 저를 헐뜯어도 이 종은 당신 법령을 묵상하나이다"(화답송).
힘 있는 자들이 함부로 자신을 도마 위에 놓고 온갖 모함과 음모로 난도질하는 순간에도 평정을 유치하며 말씀에 머무를 수 있다면 엄청난 내공이 아닐 수 없겠지요. 평소 사람의 평판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꿋꿋이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평정심일 겁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영성체송).
세상의 양식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다르듯, 세상이 주는 평화와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다릅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세상 양식으로 만족스런 상태를 평화라 착각하지만, 어떤 환난과 고통 앞에서도 우리를 지혜와 성령으로 굳건히 하며 천사의 얼굴처럼 순수하게 만드는 힘은 영원한 양식에서 옵니다. 감사하게도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말씀과 성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 말씀 묵상을 읽는 벗님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찾는 분입니다. 아니라면 재미나고 감동적인 글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굳이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두드리셨을 리 없겠지요. 벗님은 누구를 찾아서 오셨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주시기를 원하시나요? 주님을 찾아 헤매다 만난 군중이 되어 이 질문에 깊이깊이 머무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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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7)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인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원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 있는 이들이며, 그것을 누리게 하는 양식인 예수님을 믿는 이들입니다.
단순하게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성당에 나오고,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는 행위로만 그쳐서는 안되고, 믿는 것이 삶이 되어야 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독서는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의 믿음과 그의 죽음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오늘 독서는 스테파노가 은총과 능력이 충만했고,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고 전합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확고했기 때문에 스테파노는 큰 고통 앞에서도 견뎌냈고, 더 나아가 주님께 찬미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도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힘들어 하셨고, 또한 그 힘듬을 이겨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힘듬과 고통 앞에서 우리는 종종 넘어지곤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 땀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얼른 일어나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6,29)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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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 이영근 신부님.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양주 올리베따노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 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한편, “일용할 양식”마저 없어 죽어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양식을 가진 자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밥그릇만 키워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대체 어떤 양식에 허기져 있는가?
그리고 어떤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5)
그렇습니다. 군중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우리 주님”으로부터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익숙한 단어인 “하느님의 일”이란 단어를 만납니다. 여기서, ‘일’(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일’,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일’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됩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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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 부활 제3주간 월요일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은 그리 예쁠 것도 없는 일상의 나그네살이에 지친 우리에게 두 개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스테파노의 신앙 고백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게 하였습니다.
반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표징을 보이신 뒤 곧바로 이어진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어떻게 당신께서 생명의 빵이신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쉴 새 없이 주어지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과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그 일들의 좌절, 타인의 무시로 얻은 상처, 그리고 만족할 수 없는 자기 연민 속에서, 부활의 기쁨을 계속 간직하기에는 우리의 인내심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바로 이때에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을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으며,
죽음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보인 스테파노의 믿음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쁘게 살아가는 부활의 길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무거운 멍에로 비틀거리며 삶의 문제를 되새기기보다는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축복을 헤아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와 같은 믿음으로 삶의 문제에도 편안히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빵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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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 새벽을 열며.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빠다킹신부님.
작년 말에 양치질하다가 치아 하나가 부러졌습니다. 누구보다도 튼튼한 치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글쎄 양치를 하다가 부러진 것입니다. 어이없기도 했고 동시에 화도 났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병원에 갔더니 이를 뽑은 뒤에 임플란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서글픈 마음도 생깁니다. 임플란트하는 선배 신부님들을 보면서 ‘나는 치아 관리를 잘해서 임플란트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저 역시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어느 선배 신부님께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50년 넘게 썼으면 오래 쓴 거지. 가전제품도 10년 쓰면 오래 썼다고 하잖아. 그 다섯 배를 사용했는데 뭐가 불만이야?”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고, 그동안 이상 없이 자신의 역할을 했던 치아에 감사의 마음도 갖게 됩니다.
올 초, 임플란트 수술을 하는데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힘들 것이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전혀 아프지도 않고, 30분 정도에 끝났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치아 뼈가 튼튼해서 빨리 끝났고 그래서 그렇게 아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많은 세상처럼 보이지만, 다르게 바라보면 감사하고 기쁜 것들도 많은 생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쫓아서 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무엇을 얻을 생각에 그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즉, 그들의 마음은 육체의 양식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덧없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양식을 추구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육체의 양식만을 바라보면 불평불만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영원한 양식만을 바라보면 감사하고 기쁜 것들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원한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군중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분명히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 인정하신 아들을 믿는데 그분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겠습니까? 그분이 원하시고 또 말씀하신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고,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이 육체의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양식을 하느님 나라 안에서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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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포기하지 마라. 장벽에 부딪히거든, 그것이 절실함을 나에게 물어보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랜디 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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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일을 하기.
사람들은 편안함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삶에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것을 마련하려고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편안함이 반드시 좋은 것일까요?
종이에 직접 글을 쓰는 것은 꽤 불편합니다. 저의 경우는 주로 만년필로 글을 쓰는데, 이 만년필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펜촉이 굳어버려서 상하게 됩니다. 따라서 꾸준히 써야 합니다. 컴퓨터로 타이핑하는 것이 훨씬 편한 것은 분명합니다. 직접 글을 쓰는 것보다 빠르고, 프린트하면 저의 악필을 가려줄 멋진 글씨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글의 깊이가 없어집니다.
제 침대에는 매트리스가 없습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편안함을 주지만, 허리가 좋지 않은 저로서는 순간의 편안함이 오히려 독이 됩니다. 그래서 매트리스 없이 딱딱한 나무 위에서 잠을 잡니다.
경제, 경영지 ‘오너 매거진’의 발행인 크리스 브로건은 하루에 한가지씩 불편한 일을 했다고 합니다. 물건을 팔기 위해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편하지 않은 사람과 통화도 했습니다. 이렇게 불편한 일을 하면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의도적으로 편안함을 깨는 행동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주님 따르는 것도 분명히 불편함을 줍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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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사순시기가 시작되면서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부활이 되면 당연히 중단된 미사가 시작될 줄 알았습니다. 40일이면 정화의 시간으로 충분할 줄 알았습니다. 40일이면 현대의 과학과 의술이 충분히 바이러스를 이겨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부활의 시간이 되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미사가 없는 신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전례와 형식이 갖춰진 미사가 있습니다. 성전, 제단, 성가, 강론, 영성체, 친교로 이루어진 미사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이 되어서 또다시 묻는 건 아닌지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미사를 드려야 하나요? 전례와 형식을 갖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함께 모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또 다른 형태의 미사와 전례(典禮)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읽기, 묵상, 애덕의 실천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한 미사참례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느님은 영이시라 이야기하십니다. 그러기에 영은 장소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와 영에 충만하다면 비록 전례와 형식을 갖추지 못할지라도, 공적인 미사에 참례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성인과 성녀 중에는 전례와 형식,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박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진리와 영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일정표의 칸마다 빼곡하게 적혀있었습니다. 강의, 면담, 미사, 모임, 여행, 식사, 봉성체, 홍보, 피정, 운동으로 일정표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루에 몇 가지 일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오전에는 길음동 수녀원, 오후에는 해방촌 성당, 저녁에는 안양 라자로 마을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보람 있었습니다. 부족한 저를 불러주심에 감사드렸습니다. 텅 빈 일정표를 봅니다. 사순시기에 예정되었던 특강과 홍보가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부활 후에 예정되었던 성지순례가 취소되었습니다.
텅 빈 일정표를 보면서 ‘빈 무덤’을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요청과 요구에 의해서 일정표를 채웠습니다. 지금은 스스로 일정표를 채워야합니다. 십자군 이야기, 로마제국 흥망사를 읽어보려 합니다. 바쁜 일정표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책입니다. 요한복음 강의록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밤이면 핸드폰을 충전하듯이, 텅 빈 일정표에 진리와 영을 채우고 싶습니다. 외부로 향했던 시선과 생각을 성찰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도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곧 없어질 양식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나를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한모금의 물이 되어 주는 것,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쉼터가 되어 주는 것, 가난한 이웃에게 빵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 것이고,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위한 삶입니다. 이것이 진리와 영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오늘 스테파노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박해를 받기도 하고, 그 길은 모욕을 받기도하고, 그 길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길입니다. 곧 없어질 음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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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자녀들인 우리들
-삶은 선물이자 과제이다-
얼마전 프란치스코 교황님 강론중 빛과 어둠 사이의 선택에 대한 묵상 내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어둠에 익숙해진, 빛안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빛이 그들을 눈멀게 하였고 그들은 볼 수 없다. 그들은 인간 박쥐와 같다. 그들은 오직 밤 동안만 움직인다. 우리 자신도 죄의 상태에 있을 때 빛을 감당할 수 없는 이런 모습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하여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더쉽다. 빛이 얼굴을 스치면 보기 원하지 않는 것을 빛은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빛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이 비록 힘들다 할지라도 영혼의 눈이 빛에 무지하게 되면 더 나쁘다. 많은 사람들의 장애물과 부패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친다. 부패한 이들은 빛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그것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하느님 사랑의 빛이 성령을 통해 우리 삶을 비추도록 하자. 그리고 자문해보자. 나는 빛속에서 살고 있는가 혹은 어둠속에서 살고 있는가? 나는 하느님의 자녀인가 또는 박쥐처럼 살고 있는가?”-
그러니 환한 대낮에도 죄악의 어둠 속에서 영적 박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빛속에서 살고 있는 빛의 자녀인지, 혹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박쥐와 같은 어둠의 자녀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외출하여 활동한다는 자녀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도 생각납니다. 이렇게 박쥐처럼, 어둠 속의 은둔자처럼, 밤의 어둠속에 사는 것이 익숙해지다보면 빛속에서 사는 것도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코로나 사태가 무질서한 삶에 제동을 걸면서 밤을, 가정을 찾아 준 듯 하여 고마운 생각도 듭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선택의 문제입니다. 빛을 선택하여 빛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또 이와 비슷한 물음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위에 속한 사람인가 아래에 속한 사람인가? 하늘에 속한 사람인가 혹은 땅에 속한 사람인가? 참으로 우리처럼 파스카의 예수님과 하나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저절로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리하게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스테파노가 예수님처럼 지상에 살지만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사람이라면 스테파노를 박해하여 죽음에 내몰고 있는 자들은 아래의 땅에 속한 어둠의 사람들입니다. 무지에 눈먼 박쥐와 같은 어둠의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은 이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흡사 빛과 어둠의 싸움같습니다.
완전히 무지에 눈먼 사람들과 빛의 사람 스테파노의 대결같습니다. 은총과 능력이,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빛의 사람 스테파노를 당해 낼 수 없자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테파노를 사지에 몰아 넣는 악의 무리, 어둠의 무리들입니다. 마지막 말마디가 빛의 사람 스테파노를 잘 드러냅니다. 이 또한 빛으로 돌아오라는 참으로 강렬한 회개의 표징처럼 생각됩니다.
‘그러자 최고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는 스테파노는 그대로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사람임을 입증합니다. 어제 우연히 들은 억울하게 고통받고 있는 어느 분에 대해 두둔하던 어느 관상가觀相家의 말도 생각납니다.
“눈빛이 선하지 않습니까? 참 좋은 사람입니다. 전형적 선비입니다. 윗분에게 절대 누가 되지 않도록 자기가 온갖 고통을 다 감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대판 순교자와 같은 의로운 이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더라도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사도행전과 같은 대조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사람들이라면 빵의 기적을 들고 모여든 피상적 사람들은 말 그대로 아래의 땅에 속한 어둠의, 욕망의 사람들입니다.
요즘 좀비란 말이 많이 회자됩니다. 신분과 계급이 사라지고 식욕만 남은 이들을 좀비라한답니다. 그러니 아래의 땅에 속해 어둠의 욕망대로 살다 보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좀비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아래의 땅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말씀은 그대로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래의 땅에 속한 사람들은 ‘빵’을 찾지만 위의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표징’을 찾습니다. 참으로 찾아야 할 1차적 대상은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찾을 때, 이런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 때 비로소 좀비가 안되고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사람으로서 존엄한 품위의 회복일 것입니다.
정말 날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간다면 본래의 참 얼굴이 드러날 것이기에 관상觀相은 전혀 신경 안써도 될 것입니다. 화장도 성형 수술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며칠전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마음이 예쁘니
말라도/뚱뚱해도
작아도/커도
젊어도/늙어도
예쁘다/다 예쁘다”-
마음이 주님을 닮아 예뻐갈수록 저절로 모두가 예뻐질 것이니 외모는 전혀 걱정 안해도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들과 주님과의 문답 내용도 의미심장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며, 따르는 하느님의 일보다 더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며 우리 수도자들은 이미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선택의 과제입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해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이신 분’인 파스카의 예수님을 선택하는 과제입니다. 오늘 본기도와 영성체후 기도가 참 고맙게도 오늘 강론을 요약하며 우리의 소망을 그대로 대변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파스카의 영약으로 저희의 본성을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가 옛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구원을 이루는 이 양식의 힘으로, 파스카 신비의 은혜를 저희 안에 가득 채워 주소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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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6,8-15
요한 6,22-29
굳이 멀리 가실 필요 없습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바라셨던 바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 백성들 사이에 분명히 현존하신다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예표를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하느님 앞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시켜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결국 예수님을 뵙는 것이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뵙는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군중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놀랍고도 신기한 기적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한번 맛본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또 다른 기적, 더 크고 대단하고 특별한 기적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군중은 대단한 능력자 예수님으로부터 또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께서 어쩌면 이 암담하고 부조리한 이스라엘의 고통스런 현실을 순식간에 뒤엎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세속적인 기대 말입니다.
이런 군중의 심리를 잘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정곡을 찌르는 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6장 26절)
예수님께서는 육적이고 물질적인 만족 때문에 당신을 쫓아다니는 군중을 꾸짖으시며 한 단계 앞으로 더 나아가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는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는 불멸의 양식을 찾기 위해 힘쓰라고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복음 6장 27절)
오늘날에도 뭔가 특별한 것, 뭔가 신기한 현상을 쫓아 멀리까지 다니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구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특별하고 황홀한 신비 체험, 마치 거짓말처럼 이 고통스런 현실에서 한 순간에 벗어나는 것...
이런 것들은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세상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말씀입니다.
굳이 멀리까지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본당 성당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현존하십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매일 봉헌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빵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본당 고백소 안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람직한 신앙이 어떤 것일까, 묵상해봅니다.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광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믿는 그런 신앙은 점검이 좀 필요한 신앙인 듯합니다.
한 지도자가 지나치게 신격화되고 과장되게 포장되는 신앙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나 존엄성이 훼손되는 그런 신앙 역시 진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간의 이성이 잘 조화된 신앙, 인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본 상식과 예의가 존중되는 신앙,
단 한 번에 모든 것이 다 성취되기보다
돌탑 쌓듯이 오랜 세월을 두고 꾸준히 쌓아 올라가는 그런 신앙,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꾸준히 희망하며 나 자신의 비참함을 견뎌내는 신앙...
이런 신앙 어떤가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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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6,8-15
요한 6,22-2
믿음이 양식이다
방관자효과(bystander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이라고도 하고 구경꾼 효과라고도 말합니다.
1964년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s)라는 여인이 뉴욕의 자기 집 근처에서 새벽 3시 30분경 30분 동안 반항하며 강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집 주변의 40가구에서 그 소리를 들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구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라테인(Latane)과 로빈(Robin)이라는 심리학자가 이와 관련된 실험을 했습니다.
대학생들을 실험 명목으로 불러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방을 여럿 나누어서, 어떤 사람들은 혼자 있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럿이 같이 있게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문틈으로 연기가 새어들게 했습니다.
혼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75%가 2분 이내에 알렸고, 여럿이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6분 이내에 불과 13%만 알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럿이 있으면 서로 책임을 미루는 ‘책임감의 분산’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런 방관자 효과, 혹은 책임감 분산이 일어나는 이유는 ‘내가 아니어도 돼!’라는 생각이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001년 일본 신오쿠역 퇴근길로 인파가 가득 찬 지하철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이수현 신도롬’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구하려고 목숨을 바쳤는데 자신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4명이 구했고, 6명, 9명이 뛰어내려 구했다는 기사가 수도 없이 나왔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무기력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일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 저 사람과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등의 생각에 빠집니다.
이렇게 무기력증에 빠지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소라면 일을 시키는 주인 앞에서 무기력증에 빠질 수 없습니다.
제가 무기력증에 시달릴 때는 대학을 계속 다녀야 하는가, 아니면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가 고민할 때였습니다.
그 1년이 가장 힘들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사제가 되기로 하고 주님께서 불러주셨음을 믿게 되니까 다시 힘이 났습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의 주인공은 3살 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아버지가 있지만,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 자신을 낳은 것을 알아버린 것입니다.
그는 이도 저도 싫어서 사다리에서 떨어져 스스로 자라는 것을 멈추고 그저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런 무기력감으로 가족들에게 주는 것은 피해밖에 없었습니다.
카인은 “내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입니까?”라고 하느님께 대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너희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고통받은 이웃의 방관자가 되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의 혼란은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헛갈리는 데서 옵니다.
부모가 명확해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압니다.
밥만 먹어서는 힘이 나지 않습니다.
밥을 주는 이가 부모임을 믿어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고 힘도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명확히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주는 것들은 이제 ‘표징’이 됩니다.
따라서 인생을 힘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에너지를 아버지의 사랑을 믿으려고 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 믿음만이 살아갈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만 얻으려며 살다가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그러면 그런 양식들에 파묻혀
무기력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믿는 데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 나의 삶의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겉으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 젊고 예쁘고 돈 많고 명예 있는 이들이
자살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들은 모든 에너지를 육적인 양식을 얻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결말을 맞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육적 양식과 영적 양식을 대비시키며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당신을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아서가 아니라 배를 채웠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구하지 말고 표징을 통해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양식을 먹는 이유는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양식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증가하면 정체성이 확고해지고 그러면 삶의 의욕도 증가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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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6. 키엣대주교님. 엠마오로 가는 길(부활 제3주일)
제자들은 하루 만에 엠마오를 갔다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가고 오는 길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향하는 그들은 믿음을 버린 자책감과 스승을 잃은 절망과 두려움으로 비록 밝은 대낮이었지만 어둡고 끝이 보이지 않는 지치고 먼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안고 돌아오는 길은 어두운 한 밤이었지만 모든 것이 환하게 보여 한 걸음에 돌아왔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어디에도 계십니다.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실지도 모르고 바로 옆에 계실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그 분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모든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먼저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실천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혼자가 아니라 같이 떠났습니다. 비록 절망속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들은 주님을 그리워하며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라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다음은 사랑의 나눔입니다.
주님께서 더 멀리 가시려고 하시자 제자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하며 같이 머무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짧은 여정 중에 비록 허름한 여관이지만 한 지붕에 머물기를 청하고 소박한 한 끼를 나누는 것은 참으로 따뜻한 모습입니다. 만일 그들의 나눔의 사랑이 없었다면 주님께서는 그대로 가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였기에 그들은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체의 나눔입니다.
주님께서는 식탁에 앉으시어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성체 성사 모습 그대로였고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성체를 통해 주님의 현존하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스승님이 하신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성체 성사를 통해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은 만큼 저절로 믿음이 쌓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복음안에서 주님의 신비를 찾고 주님의 존재 속에 복음을 읽어야 합니다. 간절함과 사랑의 마음으로 복음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주님의 희미한 그림자만이라도 뵙기를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복음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면 ‘주님의 말씀’은 희망의 씨앗이 되어 의미와 가치를 지닌 삶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셨지만 믿음을 잃은 제자들은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뜬 그들은 비록 주님께서 옆에 계시지 않아도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성체를 모심으로써 먼 길이 가까워지고, 슬픔의 길이 기쁨의 길이 되고 성체를 모시기에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로 희망의 시작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희망의 싹을 키워주는 마음속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만큼의 거리입니다. 만일 희망이 없다면 한낮에도 깜깜한 밤과 같이 절망과 시련이 가득한 길로 아주 먼 길이 될 것입니다.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과 기쁨이 어두운 밤을 환히 밝혀주어 먼 길도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주님, 아무리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저희가 가는 길이 언제나 희망의 길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함께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마음 속에 솟구치는 열정적인 사랑을 느껴보았습니까?
2) 힘들고 지칠 때 나의 믿음과 희망은 무엇입니까?
3)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을 바꾼 것은 무엇이었는 지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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