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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산초수[釣山樵水]시비를 따지지 않음을 말한 것. 조산은 산에 가서 낚시질함을 말하며, 초수(樵水)는 물에 가서 나무한다는 뜻으로 이치에 맞지 않음을 말한다. 옛날 노(魯) 나라에 올자인 왕태(王駘)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만물과 혼동(混同)하여 가불가(可不可)가 없었다 한다. 《莊子 德充符》
♣ 조삼[朝三]옛날 저공(狙公)이 원숭이들에게 상수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을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다 성을 냈다는 고사.
♣ 조삼구[嘲三韭]남조(南朝) 제(齊) 나라 유고지(庾杲之)의 밥상에는 늘 부추로 만든 반찬 세 가지[三韭]만이 놓였는데, 삼구(三韭)가 삼구(三九)와 음이 같은 것에 착안하여 “유랑이 어디 청빈하던가, 어채 반찬이 이십칠이나 되는걸.[誰謂庾郞貧 食鮭常有二十七種]”이라고 놀린 고사가 있다. 《南齊書 庾杲之傳》
♣ 조삼모사[朝三募四]송(宋)나라의 저공(狙公)이 원숭이를 많이 길렀었는데, 살림이 빈궁해지자 원숭이의 식량을 줄이려고 고민하다가 ‘아침엔 4개 저녁엔 3개를 주면 어떻겠냐’고 원숭이들에게 물었다. 예상한대로 원숭이들이 화를 내자 ‘아침엔 3개 저녁엔 4개를 주면 되겠냐고’ 하자 원숭이들이 좋아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간사한 꾀로 사람을 속여 희롱함, 눈앞에 당장 나타나는 차이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조상[條桑]뽕잎을 따기 위해 뽕나무 가지를 치는 일. 시경(詩經)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잠월이라 뽕나무 가지를 친다.[蠶月條桑]" 하였다.
♣ 조상[糟床]술을 거르는 기구 이름으로, 쳇다리 혹은 술주자라고도 한다.
♣ 조상[弔湘]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상강을 지나가면서 억울하게 조정에서 쫓겨난 초(楚) 나라 굴원(屈原)을 생각하며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은 고사가 있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 조생죽선[曹生竹扇]진(晋) 나라 원굉(袁宏)이 동양태수(東陽太守)로 나가는데 여러 사람이 전송하였다. 사안(謝安)이 갑자기 옆 사람에게서 부채 한 자루를 받아서 원굉에게 주며, “이것을 전송하는 선물로 삼는다.” 하니, 원굉이 곧 그것을 받으며 답하기를, “마땅히 인풍(仁風)을 받들어 드날려서 저 백성들을 위로하겠소.” 하였다.
♣ 조생지편[祖生之鞭]진(晉) 나라 조적(祖逖)을 말한 것으로 남보다 앞서도록 격려하는 말로 쓰임. 《晉書 劉琨傳》
♣ 조생청계[祖生聽雞]조생(祖生)은 진(晉) 나라 때의 조적(祖逖)을 가리키는데, 조적은 본디 강개한 지절이 있었던 바, 일찍이 유곤(劉琨)과 함께 사주 주부(司州主簿)가 되어 한 이불을 덮고 같이 자다가 때아닌 밤중에 닭우는 소리를 듣고는 일어나 춤을 추며 비장한 기색을 보였던 데서 온 말인데, 밤중에 닭이 우는 것은 사변(事變)의 전조(前兆)라고 하기 때문이었다. 《晉書 卷六十二》
♣ 조생편[祖生鞭]조생은 진(晉) 나라의 조적(祖逖)을 말한다. 유곤(劉琨)은 조적과 친구 사이로 조적이 조정에 발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내가 창을 베고 자면서 역로(逆虜)의 목을 효시(梟示)할 뜻이 있는데, 항상 조적(祖逖)이 나보다 먼저 채찍을 잡을까 두렵다.”고 하였는데, 후세에 남을 권면하는 고사로 사용하였다. 《晉書 卷 62 劉琨傳》
♣ 조서[照犀]옛날 온교(溫嶠)가 우저기(牛渚磯)란 곳에 이르니, 그 곳 물이 깊어서 밑을 볼 수가 없는데, 사람들은 그 속에 괴물이 많다고 하므로, 온교가 물소뿔을 태워서 비추자 그 괴물들이 환히 보였다고 한다.
♣ 조서[曹徐]조는 위(魏) 나라의 조식(曹植), 서는 후한(後漢) 건안 칠자(建安七子)의 하나인 서간(徐幹)을 가리킨다.
♣ 조서[徂署]죄인 김처선(金處善)을 미워해서 처서(處署)를 고쳐 부르던 말.
♣ 조서모동[朝西暮東]지조 없이 이익만 쫓아다니는 위인을 비유하여 풍자한 말이다.
♣ 조서산미궐[祖西山薇蕨]서산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는 수양산(首陽山)으로, 곧 백이ㆍ숙제의 충절(忠節)을 조종(祖宗)으로 삼았음을 말한 것이다.
♣ 조서흑두[曹蜍黑頭]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근근이 목숨만 유지해 나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품조(品藻)에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 같은 인물은 천 년 전에 죽었어도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늠름한데, 조여(曹蜍)와 이지(李志) 같은 무리는 지금 살아 있어도 땅속에 묻힌 사람처럼 어둡기만 하다.”라는 말이 있다.
♣ 조석[祖席]송별연을 베푸는 자리. 한유(韓愈) 조석시(祖席詩)에 “낙교(洛橋)에 송별연을 베푸니, 다정한 친구 서로 슬퍼하네.” 하였다.
♣ 조석오[朝夕烏]한서(漢書) 주박전(朱博傳) 에 “어사부(御史府) 안에 잣나무가 열을 지어 있어 항상 들까마귀 수천 마리가 그 위에서 깃들어 자며 새벽에 날아갔다가 저녁이면 돌아오므로 조석오(朝夕烏)라 이름했다.” 하였다.
♣ 조선대고[朝鮮大賈]선조(宣祖) 당시 부경(赴京)하는 사신 일행 가운데 몰래 인삼 등을 소지하고 중국에 가 밀무역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중국사람들이 우리나라 사신 일행을 장사치에 비유하여 기롱한 말.
♣ 조선술[趙善述]선술은 조찬한(趙纘韓)의 자(字)이다.
♣ 조소[鳥巢]조과(鳥窠)와 같다. 당(唐) 나라 고승(高僧)에 조과선사(鳥窠禪師)가 있다.
♣ 조소[嘲笑]조롱하며 비웃는 웃음.
♣ 조송곡이빈[曹松哭李頻]당(唐) 나라 시인 조송(曹松)이 건주 자사(建州刺史) 이빈(李頻)에게 후은(厚恩)을 입고서 그가 죽은 뒤에 ‘곡이빈원외(哭李頻員外)’라는 시를 지었는데, 참고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방 장관으로 건주에 부임했다가, 관소에서 그만 세상을 뜨셨는가. 괴로운 시절 그 시문들 펼쳐보지 말지어다, 맑은 자질 파직되어 낭관으로 옮겨졌네. 장수(瘴水)가 술잔 올릴 아들도 하나 없이, 고개 너머 청상 과부 아내 있을 뿐. 정녕 묻힌 뼈 향기 감돌아, 동쪽으로 고향 찾아 돌아오리라.[出麾臨建水 下世在公堂 苦集休開篋 淸資罷轉郞 瘴中無子奠 嶺外一妻孀 定是浮香骨 東歸就故鄕]” 《全唐詩 卷716》
♣ 조송설[趙松雪]송설은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의 호이다.
♣ 조수[曹隨]전임자(前任者)의 법규를 그대로 준수하여 성사(成事)시키는 것. 한(漢) 나라 때 소하(蕭何)를 이어 조참(曹參)이 정승이 되었으나 조참은 소하가 세운 법규를 고치지 않고 준행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조수련급직[操修憐汲直]한 무제(漢武帝)의 직신(直臣)인 급암(汲黯)을 가리킨다. 한서(漢書) 가연지전(賈捐之傳)에 “가연지의 간하는 성격은 급암의 정직함과 똑같다.” 하였다.
♣ 조수은[鳥酬恩]까마귀는 새끼를 다 키워 놓으면 새끼들이 어미에게 먹이를 갖다 준다 하여 반포조(反哺鳥)라 하므로 한 말이다. 《小爾雅 廣鳥》
♣ 조수해[嘲誰解]한 나라 시대 사람인 양웅(楊雄)이 해조부(解嘲賦)라는 글을 지은 일이 있다.
♣ 조숙온[趙叔溫]숙온은 조박(趙璞)의 자(字)이다.
♣ 조술[操術]조술은 곧 자신을 바르게 잘 지키는 방술을 뜻함.
♣ 조슬[操瑟]전국시대 때 거문고를 잘 타는 사람이 제 나라에서 벼슬을 하기 위해 거문고를 들고 제 나라 왕을 찾아가 3년 동안이나 왕을 만나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어떤 자가 꾸짖기를 “왕은 피리를 좋아하시는데 그대는 비파를 두드리니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왕이 좋아하지 않는 판에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十八 答陳商書》
♣ 조슬제문[操瑟齊門]자신의 재능이 시속의 숭상함과 서로 다름을 비유한 말. 제문은 제왕(齊王)의 문이란 뜻으로, 옛날 제왕이 피리[竽]를 좋아했는데, 제 나라에 벼슬을 구하는 자가 비파를 가지고 가서 제왕의 문에 3년이나 서있었지만 들어가지 못하자, 어떤 이가 그에게 말하기를 “왕은 피리를 좋아하는데 그대는 비파를 타니, 비파를 아무리 잘 탄들 왕이 좋아하지 않음에 어찌하랴.”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答陳商書》
♣ 조슬진부[趙瑟秦缶]진왕(秦王)과 조왕(趙王)이 우호를 다지기 위해 민지(澠池)에서 회동했을 때 술이 거나하자 진왕이 일부러 조왕의 입장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하여 조왕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직접 퉁기게 했다. 이때 조왕을 배종했던 인상여(藺相如)가 역시 진왕으로 하여금 진의 고유 악기인 장군[缶]을 치게 하여 보복하였음. 《史記 卷八十一》
♣ 조습[燥濕]마르고 젖음.
♣ 조승[趙勝]전국 시대(戰國時代) 조 혜문왕(趙惠文王)의 아우로서 평원군(平原君)이라 부르는데, 천하의 인재를 받아들여 식객(食客)이 항상 수천 명에 이르렀다. 《史記 卷七十六 趙勝傳》
♣ 조승명주[照乘明珠]위 나라 혜왕(惠王)이 자기 나라에는 앞뒤 수레 열두 채를 환하게 비출 수 있는 명주(明珠)가 있다고 제(齊) 나라 위왕(威王)에게 자랑했다는 고사.
♣ 조시[朝市]조정과 시장이니 곧 서울이란 말이다.
♣ 조시[朝市]조정과 시정(市井). 즉 명리(名利)와 경쟁이 심한 곳.
♣ 조시구[釣詩鉤]술의 별칭이다. 술이 시를 짓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므로 이렇게 칭한다. 소식(蘇軾)의 시 ‘동정춘색(洞庭春色)’에, “응당 시를 낚는 낚시를 부르고, 또한 시름을 쓰는 비도 부르리라.[應呼釣詩鉤 亦號掃愁帚]”하였다.
♣ 조식[調息]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인데, 즉 고요히 앉아서 숨을 쉬는 것을 말함. 복기(服氣)ㆍ태식(胎息)이라고도 한다. 정신을 평안하게 하는 일종의 호흡법인데, 이것은 천지간에 널리 퍼져 있는 원기를 흡입, 체내에 저장하여 신체가 늙지 않게 하는 수행법이다. 동파지림(東坡志林)에, “바로 앉아서 눈을 감고 조식을 하는데, 이는 오래 하는 것으로써 공(功)을 삼는다.” 하였음. 주자(朱子)가 지은 조식잠(調息箴)이 유명함.
♣ 조식[曹植]조조(曹操)의 셋째 아들. 뛰어난 시재(詩才)를 시기하는 형 문제(文帝)의 명을 받고 지은 칠보시(七步詩)는 특히 유명함.
♣ 조신[鳥申]도가(道家)에서 장생불사(長生不死)하기 위해 수련하는 도인법(導引法)의 한 가지, 마치 새가 목을 쭉 빼고 있는 것같이 하여 호흡을 단련하는 것이다. 《莊子 刻意》
♣ 조신[竈神]부엌 귀신으로, 권신(權臣)을 말한다.
♣ 조심전속백등광[祖心傳續百燈光]불법(佛法)의 깨달은 묘리(妙理)를 등불에 비유한 것, 즉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경지를 말한 것이다.
♣ 조씨[趙氏]송 나라 휘종(徽宗)을 말한 것인데 성이 조씨(趙氏)다.
♣ 조아[爪牙]맹수(猛獸)가 어금니와 발톱[爪牙]으로 몸을 보호하므로 무장(武將)을 임금의 어금니와 발톱이라 한다.
♣ 조아지사[爪牙之士]손톱과 이빨은 새나 짐승이 자기를 보호하는 무기. 즉, 국가를 보필하는 신하를 일컫는다.
♣ 조악[潮鱷]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불골표(佛骨表)를 올렸다가 좌천되어 조주 자사(潮州刺史)가 되었는데, 그때 악계(惡谿)의 악어가 사람과 가축을 해치자, 한유가 악어문(鱷魚文)을 지어 물리쳤다고 한다.
♣ 조야백[照夜白]조야백은 당 현종(唐玄宗) 때 서역(西域) 대완(大宛)에서 들여온 준마(駿馬)의 이름이다.
♣ 조양[朝陽]아침해가 뜨는 동산으로, 오동나무가 이곳에서 자라 봉황새가 산다고 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니, 저 높은 산에서 우는도다. 오동이 자라니, 저 조양에서 자라는도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이라 하였는데, 그 주에 “산의 동쪽을 조양이라 한다.” 하였다.
♣ 조양[潮陽]조양은 당 나라 한유(韓愈)가 불골표(佛骨表)를 올리고 나서 귀양을 간 조주(潮州)를 가리킨다. 이때 무지한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향교를 세우고 수업을 받게 하였는데, 이 교육을 담당한 사람이 조덕(趙德)이었다는 내용이 소식(蘇軾)의 조주 한 문공 묘비(潮州韓文公墓碑)에 나온다.
♣ 조양[朝陽]주나라의 문왕 때에 기산(箕山)이라는 산에서 아침 해가 돋을 때 봉황(鳳凰)새가 울었다 한다. 그 후로 조정에서 바른 말하는 것은 아침 볕에 봉황이 운다고 말하여 왔다.
♣ 조양봉[朝陽鳳]조양은 산 동쪽 볕바른 곳. 시경(詩經) 대아 권아(卷阿)에 “봉황새 훨훨 날아 높은 뫼에 앉아 우네. 오동나무는 동녘 산에 볕바른 데 우뚝 섰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兮 于彼朝陽]" 한 데서 온 말이다.
♣ 조양봉명[朝陽鳳鳴]당(唐) 나라 저수량(褚遂良) 등의 간신(諫臣)이 죽은 뒤로 감히 직간하는 신하가 없었는데, 이선감(李善感)이 어느 날 직간을 하므로 사람들이 ‘조양에서 붕새가 우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는 고사.《唐書 李善感傳》 ‘조양에서 붕새가 운다.[鳳鳴朝陽]’함은 원래 시경(詩經) 권아(卷阿)의 “鳳凰鳴矣于彼高岡 梧桐生兮于彼朝陽"에서 나온 말로, 태평 성세의 상징으로 쓰이는 문자다.
♣ 조양실봉황[朝陽失鳳凰]조정에서 인재들이 쫓겨난 것을 말한다. 조양(朝陽)은 햇빛이 비취는 산의 동쪽으로서,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나니 저 높은 산 언덕, 오동나무 서 있나니 저기 산 동쪽[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이라고 하였다.
♣ 조어산성[釣魚山城]송(宋) 나라 여개(余玠)가 사천성(四川省)의 조어산에 쌓은 성 이름이다. 몽고(蒙古)의 몽가한(蒙哥汗)이 군대를 총 동원하여 침공하였으나 몇 개월 동안이나 함락되지 않았다. 《讀史方輿紀要 四川 重慶府 合州》
♣ 조업[祖業]신하의 조상들이 임금의 선왕을 받들어 왕업을 창건한 것을 말한다.
♣ 조업[曹鄴]조업은 당(唐) 나라 사람. 자는 업지(鄴之). 태상박사(太常博士)와 양주 자사(洋州刺史)를 역임하였음. 저서에는 조사부집(曹祠部集)이 있음.
♣ 조여[曺蜍]진(晉) 나라 팽성(彭城) 사람 조무(曹茂)의 소자(小字)로 이지(李志)와 함께 변변찮은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글씨를 잘 썼지만 남들의 눈에 보일 만한 기개가 없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하찮게 여겼다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품조(品藻)에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는 천 년 전에 죽었어도 아직 늠름하게 생기(生氣)를 발하고 있는 반면, 조여(曹蜍)와 이지(李志) 같은 무리들은 비록 살아 있다 하더라도 구천(九泉) 아래에 있는 자들이나 다름이 없다. 사람들이 모두 그들과 같다면 결승(結繩)의 시대에 썼던 방법으로도 다스릴 수 있겠지만, 그들이 죽고 나면 뒤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이 여우나 오소리가 그 육신을 모조리 먹어 치워 버릴 따름이다.”라는 말이 있다.
♣ 조여[曺呂]설정(雪江) 조문수(曺文秀)와 동강(東江) 여이징(呂爾徵)을 가리킨다.
♣ 조여이지[曹蜍李志]조여와 이지는 모두 진(晉) 나라 때 사람들로 글씨를 대단히 잘 썼으나 인품이 워낙 부족하여 글씨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뜻에서, 전하여 소인의 무리에 비유한 것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품조(品藻)에 의하면 “염파(廉頗)ㆍ인상여(藺相如)는 죽었지만 늠름하여 생기가 있고, 조여ㆍ이지는 살아 있어도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 하였고, 황정견(黃庭堅)이 우군첩(右軍帖) 뒤에 쓴 글에는 “조여ㆍ이지 무리가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와 겨룰 만했지만 전하기에는 부족하다. 편지 한 장의 글씨라도 수백 세를 전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인품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조연[조然]일본 중의 이름인데, 송(宋)나라 때에 송나라에 와서 금문(今文)인 정현(鄭玄)의 주석한 효경(孝經)을 헌상하였다 한다.
♣ 조염매[調鹽梅]염매는 소금과 매실. 소금은 아주 짜고 매실은 아주 시기 때문에 두 맛을 잘 조화하여 알맞도록 한다는 뜻으로, 곧 신하가 임금을 잘 보좌하여 올바른 정사를 하게 한 데 비유한 말인데, 서경(書經) 열명 중(說命中)에 “만약 맛있는 국을 만들려거든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 주오.” 한 데서 온 말이다.
♣ 조영인[趙永仁]본관은 횡성(橫城), 시호는 문경이다.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에 올라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 조영청담혹자익[照影淸潭或自溺]꿩이 물속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계속 춤을 추다가 탈진되어 빠져 죽는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異苑 3》
♣ 조예[鑿枘]조예는 사기(史記) 맹순전(孟荀傳)에, “持方枘欲內圓鑿 其能入乎”라 하였고, 장자(莊子) 재유편(在宥篇)에, “吾未知仁義之不爲桎梏鑿枘也”라 하였고, 색은(索隱)에, ‘方枘是筍也 圓鑿其空也 謂工人斲木以方筍而內之圓 空不可入也’라 하였다. 이상의 설로 미루어 보면, 서로 용납되지 않음을 말함.
♣ 조오[釣鰲]이백이 어느 재상을 찾아갔는데 명함에, ‘해상조오객 이백(海上釣鰲客 李白)’이라 하였다. 주인이 묻기를, “새우[鰲]를 낚는 데는 무엇을 미끼로 하는가.” 하니, 이백은 “천하에 무의(無義)한 사람으로써 미끼를 삼는다.” 하였다.
♣ 조오[釣鰲]장자(莊子)에 나오는 임공자(任公子)를 가리킨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임공자가 큰 낚시와 굵은 줄을 준비한 다음 50마리의 황소를 미끼로 하여 회계산(會稽山)에 걸터앉아 동해에다 낚시를 던졌다.” 하였다.
♣ 조오창명[釣鰲滄溟]옛날에 용백국(龍伯國)의 거인이 다섯 선산(仙山)을 떠받치고 있는 여섯 마리의 큰 자라를 낚시질하여 한꺼번에 다 낚아서 이를 짊어지고 그 나라로 돌아가자, 두 산이 북극으로 흘러가서 큰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 조옥수[曹玉水]조강(曹江)의 자인데 호는 석계(石谿)임.
♣ 조와[爪蜑]조와는 지금의 자바섬임.
♣ 조용[租庸]지세(地稅)와 부역(賦役).
♣ 조우도[操牛刀]공자(孔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공자가 들렀더니, 글 읽고 거문고 타는 소리가 들렸다. 공자는 자유를 보고 웃으며,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이것은 이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는 데 나라를 다스릴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을 쓰는 것을 희롱 섞어 칭찬한 말이다.
♣ 조욱[朝旭]아침 해.
♣ 조운[朝雲]송옥(宋玉) 고당부(高唐賦) 서(序)에 “초 양왕(楚襄王)이 운몽대(雲夢臺)에서 놀다가 고당(高唐)의 묘(廟)에 운기(雲氣)의 변화가 무궁함을 바라보고 송옥(宋玉)에게 ‘저것이 무슨 기운이냐?’고 묻자 ‘이른바 조운(朝雲)입니다. 옛날 선왕(先王)이 고당에 유람왔다가 피곤하여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여인이 「저는 무산(巫山)에 있는 계집으로, 침석(枕席)을 받들기 원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정을 나누고 떠날 적에 「저는 무산 남쪽에 사는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늘 양대(陽臺) 아래 있습니다.」 했습니다.’고 하였다.” 하였다.
♣ 조운[朝雲]조운(朝雲)은 소식(蘇軾)의 애첩(愛妾) 이름이다.
♣ 조운[朝雲]조운(朝雲)은 후위(後魏) 때 하간왕(河間王)의 기녀(妓女) 이름인데, 그녀는 매우 총민하여 가무에 능하였다.
♣ 조운모우[朝雲暮雨]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 남녀간의 애정이 깊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조원수[調元手]음양(陰陽)의 원기(元氣)를 조화시키는 솜씨, 즉 국가의 대정(大政)을 주관하는 정승의 경륜을 말한다.
♣ 조월천[趙月川]월천은 조목(趙穆)의 호이다.
♣ 조위구억손[曹衛久抑損]춘추 전국 시대의 약소국인 조(曹) 나라나 위(衛) 나라처럼, 사이에 끼어 괜히 몸을 움츠리는 신세가 되었다는 뜻의 겸사(謙辭)이다.
♣ 조위우[趙魏優]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맹공작(孟公綽)은 조위(趙魏)의 원로가 되기에 넉넉하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맹공작은 염정 과욕(廉靜寡欲)하여 인망이 높으므로, 대가(大家)의 원로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뜻이다. 《論語 憲問》
♣ 조유[曹劉]위(魏) 나라의 조식(曹植)과 유정(劉楨)을 가리킴인데, 이들은 모두 당대의 문장가로서 독특한 문체를 이루어 조유체(曹劉體)가 생기게 되었다.
♣ 조유도사[曹劉陶謝]조류는 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의 재자(才子)인 조식(曹植)과 유정(劉楨)을 말하고, 도사는 진(晉) 나라 때의 고사인 도잠(陶潛)과 남조(南朝) 송(宋) 나라의 사영운(謝靈運)을 말한다.
♣ 조육[糟肉]조육은 술과 고기라는 뜻이다.
♣ 조읍[漕邑]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식량을 조운(漕運)하는 고을을 말한다.
♣ 조의[朝儀]조정(朝廷)의 의식(儀式). 사기(史記) 숙손통전(叔孫通傳)에, “叔孫通說上曰 臣願徵魯諸生 共起朝儀 上曰可”라고 보임.
♣ 조의루[趙倚樓]당(唐) 나라의 시인 조하(趙嘏)를 가리킨다. 두목(杜牧)이 조하가 지은 조추시(早秋詩)에 “잔별 몇 개 사이로 기러기 하늘을 날고, 긴 젓대 한 소리에 사람은 누에 기대네.[殘星幾點鴈橫塞 長笛一聲人倚樓]”란 시구를 몹시 좋아하였는데, 여기에서 의루(倚樓) 두 자를 따서 조의루라고 불렀다 한다.
♣ 조의자대[皁衣頳帶]조의는 관복(官服)이고 자대는 붉은 띠로서 높은 벼슬을 뜻한다.
♣ 조이[趙李]한(漢) 나라 때 미모(美貌)와 가무(歌舞)가 뛰어났던 성제(成帝)의 황후 조비연(趙飛燕)과 무제(武帝)의 이 부인(李夫人)을 합칭한 말이다.
♣ 조이불망[釣而不網]이 말은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는 낚시는 하되 그물질은 않고, 자는 새는 잡지 않았다.”란 말을 인용한 것.
♣ 조이숙[趙怡叔]이숙(怡叔)은 조희일(趙希逸)의 자(字)이다.
♣ 조익[蜩翼]익(翼)은 갑(甲)을 이름.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의 “蜩翼"의 주(註)에 보임. 이는 대개 옛일을 그리워한다는 뜻임.
♣ 조인[祖印]조인은 조사(祖師)의 법인(法印)을 뜻하는 말이다. 송(宋) 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시 ‘차운지명입청원산구(次韻知命入靑原山口)’에 “산세와 조인, 드높기 서로 비슷[山形與祖印 岑絶兩相當]”이라는 구절이 있다.
♣ 조인보[趙仁甫]인보(仁甫)는 조정호(趙廷虎)의 자(字)이다.
♣ 조일[朝日]아침
♣ 조일온[趙日溫]춘추 시대 진(晉) 나라 대부인 조최(趙衰)는 겨울철의 태양빛과 같이 다수웠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백성들에게 은애(恩愛)가 미쳤음을 비유한 말이다. 《左傳 文公七年》
♣ 조일장[趙日章]일장은 조경(趙絅)의 자(字)이다.
♣ 조일포[朝日袍]천자가 청정(聽政)하는 날에 입는 옷을 말한다.
♣ 조자건[曺子建]조조(曹操)의 차자 조식(曹植)의 자(字)이다.
♣ 조자고[趙子固]자고는 송 나라 조맹견(趙孟堅)의 자. 호는 의재(毅齋).
♣ 조자실[曺子實]자실은 조문수(曺文秀)의 자(字)이다.
♣ 조장[祖帳]전별(餞別)을 고하는 자리.
♣ 조장[助長]좋지 않은 일을 부추김. 싹이 쉬 자라지 않음을 걱정하여 싹을 억지로 뽑아내는 것같이 억지로 도와 키우는 것. 성질 급한 농부가 아직 나오지도 않은 싹을 빨리 나오라고 잡아당겨 놓는다(助長)는 우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 조장군[祖將軍]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강을 건너면서 중류(中流)에서 돛대를 치며 맹세하기를, “조적이 중원(中原)을 숙청하지 않고는 다시 이 강을 건너지 않으리라.” 하였다.
♣ 조장준우[雕墻峻宇]서경(書經)에, “임금이 높은 궁궐담을 아로새기면 망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말이 있다.
♣ 조적[鳥跡]설문(說文) 서(序)에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었던 창힐(倉頡)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서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창조하였다.” 하였는데, 모양이 올챙이와 같다 하여 과두문자(蝌蚪文字) 또는 과두조전(蝌蚪鳥篆)이라 한다.
♣ 조적문계[祖逖聞鷄]조적은 진(晉) 나라의 장군인데, 유곤(劉琨)과 함께 사주(司州) 주부(主簿)가 되어 같은 이불에 자다가 밤중에 닭의 울음을 듣고는 유곤을 차서 깨우고 일어나 춤을 추면서, “닭이 일찍 울면 난리가 난다. 대장부 난세를 만나 공을 세우자.” 하면서 원제(元帝) 때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북벌(北伐)했고, 석륵(石勒)을 격파하고 황하 이남 땅을 회복하였다.
♣ 조적즙[祖逖楫]조적은 진(晉)의 명신. 일찍이 예주 자사(豫州刺史)가 되어 황하를 건너면서 돛대를 치고 중국 본토를 수복할 것을 맹세하였다.
♣ 조적편[祖逖鞭]진(晉) 나라 때 조적(祖逖)이 평소 강개(慷慨)한 기질이 있었는데, 그가 조정에 등용되자, 그의 친구인 유곤(劉琨)이 그 소식을 듣고는 다른 친구에게 준 편지에 “내가 창을 베고 아침을 기다리며 역로(逆虜)를 효시하는 데에 뜻을 두고서 항상 조생(祖生)이 나보다 먼저 채찍을 잡을까 염려해 온 바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먼저 채찍을 잡는다는 것은, 곧 남보다 앞서 공(功)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 조전[彫篆]기소유(紀少瑜)가 일찍이 꿈에 육수(陸倕)에게 푸르게 아로새긴 붓 한 묶음을 받았더니, 그 때부터 필력(筆力)을 얻어 문장이 되었다. 《南史》
♣ 조절[藻梲]동자기둥에다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것. 왕공귀인(王公貴人)의 거소.
♣ 조정[朝正]정월에 제후(諸侯)가 천자(天子)에게 조회하여 정교(政敎)를 받는 것을 말한다.
♣ 조정[調鼎]조갱(調羹)과 같은 뜻이다. 서경(書經) 열명 하(說命下)에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내가 국을 요리하거든 네가 소금과 매실이 되라.” 하였는데, 여기서 소금과 매실은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의 역할을 의미한다.
♣ 조정[調鼎]조정은 음식물을 조리하는 것으로, 재상이 국가의 일을 다스리는 것을 비유한 말이며, 맛을 조절하는 데에는 소금과 매실을 가지고 간을 맞춘다. 한시외전(韓詩外傳) 제7권에, “이윤(伊尹)은 유신씨(有莘氏)의 후손으로, 정(鼎)을 지고 조(俎)를 잡고 오미(五味)를 조절(調)하다가 조정에 들어가서 재상이 되었다.” 하였다.
♣ 조정침[朝政沈]고려 때 개성(開城) 동쪽 동파역(東坡驛) 20리 지점에 있던 초현원(招賢院)의 속칭. 의종(毅宗) 24년, 정중부(鄭仲夫) 등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한 왕을 따라갔다가 난을 일으켜, 배향한 조정의 문ㆍ무관을 모조리 죽여 근처에 있는 호수에 던졌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조정이 가라앉았다.’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 한다.
♣ 조제[雕題]먹실로 이마에 문신을 새기는 것으로, 남만의 풍속이다.
♣ 조제[雕題]오랑캐를 가리킨다. 조제는 이마에 문신을 하는 서융(西戎)의 풍습을 말한다.
♣ 조제모염[朝薺暮鹽]냉이와 소금만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몹시 빈곤한 생활을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조조[懆懆]근심하여 마음이 편하지 못한 모양
♣ 조조[調刁]나뭇가지가 바람에 부대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흔들거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사나운 바람이 한차례 지나고 나면 나무의 뭇 구멍들이 텅 비게 되는데, 그럴 때에도 그대는 나뭇가지들이 여전히 크고 작게 간들거리는 모습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厲風濟則衆竅爲虛 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라는 구절이 있다.
♣ 조조[慥慥]독실한 모양, 성의있는 모양
♣ 조조[朝朝]매일 아침
♣ 조조[刁刁]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모양, 가볍게 흔들리는 모양
♣ 조조[嘈嘈]소리의 시끄러운 모양
♣ 조조[嬥嬥]오가는 모양, 홀로 걸어가는 모양, 아리따운 모양
♣ 조조[早早]일찍, 빨리
♣ 조조[條條]조리가 서 있는 모양, 헝클어지는 모양, 슬기가 있는 일
♣ 조조[佻佻]혼자가는 모양, 경박하고 노고를 헤아리지 않는 모양, 근심과 괴로움이 절박한 모양
♣ 조조[嘲嘲]희롱하는 모양
♣ 조조간상기[朝朝看爽氣]시답지 않은 세상일에 대해서는 아예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 참군(騎兵參軍)으로 있으면서 전혀 업무를 볼 생각을 하지 않자, 환충이 이를 질책하니 왕휘지가 수판(手版)으로 턱을 괴고 먼 산을 쳐다보면서 “서산의 아침 공기가 참으로 상쾌하기만 하구나.[西山朝來 致有爽氣]”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簡傲》
♣ 조족[絛鏃]사냥매의 부리와 발톱을 비유한 말이다.
♣ 조족지혈[鳥足之血]새발의 피. 아주 보잘 것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 조존[操存] 선심을 잡아 간직함을 뜻한다. 마음을 미발(未發) 상태로 잘 유지하여 본성(本性)을 함양(涵養)하는 것으로 정(靜) 공부에 해당한다.
♣ 조종[朝宗]물이 바다로 모이는 것처럼 제후(諸侯)들이 천자(天子)에게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강수와 한수 흘러흘러 바다에 인사드린다.[江漢朝宗于海]”하였고, 시경(詩經) 소아(小雅) 면수(沔水)에, “沔彼流水 朝宗于海”라고 하여 천하의 모든 물이 바다로 모이는 것을 말했는데 뒤에는 이를 빌어 제후가 천자를 봄에 뵙는 것을 조(朝), 여름에 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였다.
♣ 조주[趙州]조주화상(趙州和尙). 당(唐) 나라의 선승(禪僧) 종심(從諗)을 가리킨다. 본성(本姓)은 학(郝)씨임. 남천보원(南泉普願)의 법제자로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 주석하면서 법화(法化)가 크게 떨쳐 조주고불(趙州古佛)의 명호를 얻었다. 승려 하나가 조주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이 무엇이냐.”고 묻자, “뜰 앞에 있는 잣나무[庭前栢樹子]”라고 대답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 조주곡[朝晝梏]사람의 마음이 사물을 접하기 전인 평조(平朝)의 즈음에는 선량한 마음이 발현되었다가도 낮[朝晝]에 온갖 사물을 접함에 이르러서는 그 선량한 마음을 어지럽히어 없어지게 된다는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告子上》
♣ 조주다[趙州茶]조주의 차[茶]. 조주는 당(唐) 고승(高僧) 종심(從諗)의 법호(法號)로, 그 문하(門下)에서 도화(道化)가 크게 일어났는데, 조주와 곡천선사(谷泉禪師) 사이의 선문답(禪問答) 가운데 차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五燈會元》
♣ 조주무[趙州無]중이 조주(趙州)에게 묻기를, “구자(狗子)는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는, “없다”[無]고 하였다. 이 무(無)라는 답은 곧 참선하는 이가 많이 쓰는 화두(話頭)이다.
♣ 조주인[釣周人]강 태공(姜太公)을 가리킨다. 주(周) 나라 때 강 태공이 위천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다가 문왕(文王)을 만나서 세상에 나왔고, 또 무왕(武王)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다.
♣ 조중봉[趙重峯]중봉은 조헌(趙憲)의 자(字)이다.
♣ 조중유증삼[鳥中有曾參]효조(孝鳥)로 알려진 까마귀를 말한다. 증삼은 효성스럽기로 이름났었다.
♣ 조지[棗芰]증자(曾子)의 아버지 증석(曾晳)은 양조(羊棗)를 즐겨 먹었으며, 굴도(屈到)는 지(芰)를 좋아하였는데 모두 춘추 시대 사람임.
♣ 조직[釣直]사기(史記) 권32에 “강태공(姜太公)이 문왕(文王)을 만나기 전 숨어살며 낚시로 소일할 때 곧은 낚시를 사용했는데, 이는 때를 기다리는 데에 뜻이 있지 고기를 잡으려 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 조진궁필장[鳥盡弓必藏]한신이 한고제(漢高帝)에게 속아서 잡힐 적에, “높은 새를 다 잡고 나면 좋은 활이 감추어지고 토끼를 다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천하가 평정되고 나니 내가 죽게 되는구나.” 하였다.
♣ 조진여[趙陳予]조진여는 조경황(趙景貺)과 진이상(陳履常)과 동파(東坡) 자신을 가리킨다. 동파의 시에 “꿈길에서 돌아오자 발소리 들려오며, 누군가 조진여를 불러 대누나.[夢回聞剝啄 誰呼趙陳予]”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4 與趙陳同過歐陽叔弼新治小齋戲作》
♣ 조착동시변[鼂錯東市邊]조조는 한 경제(漢景帝) 때에 특히 재변(才辯)으로 총애를 받아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영진(榮進)하였으나, 제후들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그 봉지(封地)들을 삭감하려 하다가 오초(吳楚)를 비롯한 칠국(七國)이 들고 일어나자, 그 사건을 진압하기 위한 명분에 몰리어 동시(東市)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漢書 卷四十九》
♣ 조찰[啁哳]새가 연달아 우는 모양.
♣ 조참[篠驂]죽마(竹馬)와 같은 뜻으로, 아이들이 장난할 때 말처럼 두 다리로 걸터타고 다니는 대막대기를 말한다.
♣ 조참[朝參]매달 네 차례씩 문무 백관이 검은 조복(朝服)을 입고 정전(正殿)에 나가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를 아뢰는 것을 말한다.
♣ 조참[曹參]한(漢)의 조참이 소하(蕭何)를 대신해 승상이 되어 밤낮 술만 마시고 일을 돌보지 않았다. 경대부(卿大夫) 및 빈객(賓客)이 이를 말하려고 찾아가면 조참이 순주(醇酒)를 먹여 취하게 하므로 끝내 입을 열지 못하곤 하였다. 《史記 曹相國世家》
♣ 조창[趙昌]송(宋) 나라 때의 화가(畫家)로 특히 화과(花果)를 잘 그렸다.
♣ 조처사[趙處士]조연귀(趙衍龜)를 가리킨다.
♣ 조천관[朝天館]제주도 세 고을을 경유하여 육지로 나가는 자는 모두 여기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전라도를 경유하여 세 고을로 들어오는 자도 모두 이 곳과 애월포(涯月浦)에 배를 댄다고 한다.
♣ 조천기린석[朝天麒麟石]기린굴(麒麟窟)의 조천석을 말함. 평양 부벽루(浮碧樓) 아래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왕(東明王)이 기린마를 타고 이 굴로 들어가 땅속으로부터 조천석으로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 하는데 그 말굽자국이 지금도 돌 위에 있음.
♣ 조천대[朝天臺]부벽루 아래 있는 기린굴(麒麟窟) 남쪽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되 동명왕이 기린말을 타고 이 굴에 들어갔다가 땅속에서 조천석이 되어 솟아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하며, 그 말발굽 자국이 돌 위에 있다고 한다. 《輿覽》
♣ 조천부미약[朝天鳧未躍]서울로 오는 수령이 출발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후한(後漢) 현종(顯宗) 때 하동(河東) 사람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영(令)이 되었는데, 매달 삭망(朔望)에 대궐에 나와 조회에 참석하였다. 황제가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태사(太史)로 하여금 몰래 엿보게 하였다. 그러자 태사가 그가 올 때에는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온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오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펴서 잡으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 《後漢書 卷82 方術列傳 王喬》
♣ 조천촉[照天燭]옛날 밝은 관원을 조천촉(照天燭)이라 칭도한 고사가 있다.
♣ 조철[助徹]조세법의 일종인 조법(助法)과 철법(徹法).
♣ 조청[朝請]제후(諸侯)가 천자(天子)를 조회하는 것인데, 봄에 하는 것을 조(朝), 가을에 하는 것을 청(請)이라 한다. 여기서는 백관의 조회 받는 것을 말한다.
♣ 조청려[照靑藜]유향(劉向)이 천록각(天祿閣)에서 교서(校書)를 하면서 전심치지로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었는데, 밤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 청려장(靑藜杖)을 꽂아 두고 문을 두드렸다가 유향이 어둠 속에서 혼자 앉아 글 외우는 것을 보고는 그 노인이 청려장 꽂아둔 데로 다시 가서 그 지팡이 끝을 입으로 부니 거기에서 환한 빛이 발하여 유향에게로 비추어 주었다고 함. 《拾遺記》
♣ 조체행상면[棗蔕幸相免]삼국 시대 위(魏) 나라 조식(曹植)이 형인 문제(文帝)로부터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위 문제가 동생인 임성왕(任城王) 조창(曹彰)을 시기하여, 대추 꼭지에 몰래 독(毒)을 발라 놓고는 함께 바둑을 두면서, 자기는 먹어도 좋은 것만을 골라서 먹고 조창에게 먹을 것을 권하여 교묘하게 독살시킨 고사가 있다. 그 뒤에 조식(曹植)도 치죄(治罪)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태후(太后)가 이를 알아차리고 진노하는 바람에 폄작(貶爵)하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世說新語 尤悔》
♣ 조최[漕漼]철벅철벅. 의성어로 물을 건너갈 때 나는 소리.
♣ 조축[釣築]때를 만나지 못해 큰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조(釣)는 주(周) 나라 여상(呂尙)이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한 것을 가리키고, 축(築)은 은(殷) 나라 부열(傅說)이 공사장에서 막노동한 것을 가리킨다. 강태공(姜太公)은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주 문왕(周文王)에게 발탁되어 재상이 되었고, 부열(傅說)은 부암(傅巖)에 은거하면서 죄인들과 함께 무너진 도로를 수축(修築)하다가 은 고종(殷高宗)에게 발탁되어 재상이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 조충[雕蟲]조충소기(雕虫小技)의 준말로,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조각하듯이 미사여구(美詞麗句)로 문장을 꾸미는 조그마한 기교라는 뜻인데, 즉 자기의 문장이 하찮다는 겸사이다.
♣ 조충[彫蟲]조충전각(彫蟲篆刻), 조충소기(彫虫小技)니 하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시문(詩文)ㆍ사부(詞賦) 등의 문예(文藝)를 도덕이나 사업에 비하면 조충의 조그만 기교(技巧)란 말이다.
♣ 조충국[趙充國]조충국은 전한 무제(武帝) 때 후장군(後將軍)으로 자는 옹손(翁孫)인데 무예가 뛰어나 흉노와 서강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漢書 趙充國傳》
♣ 조충소기[雕虫小技]미사여구(美辭麗句)로 문장만을 꾸미는 조그마한 기교. 문장을 비하(卑下)한 겸사(謙辭)이다.
♣ 조충수호[雕蟲繡虎]벌레를 새기고 범을 수놓는다는 말로, 아름다운 문장을 가리킨다.
♣ 조충장부치[雕虫壯夫恥]양웅(揚雄)의 글에, “벌레를 아로새기는 잔재주는 대장부가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문장(文章)의 기교(技巧)를 일삼는 것을 비웃는 말이다.
♣ 조침상[弔沈湘]가의가 장사로 가는 길에 상수(湘水)를 건너면서 초 나라의 충신으로 상수에 빠져 죽은 굴원(屈原)을 조상(吊喪)하였다.
♣ 조태위지안오비어창읍[條太尉之按吳濞於昌邑]한 고조(漢高祖)의 조카인 오왕 비(吳王濞)가 반란을 획책하자 천자가 태위(太尉)인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를 보내 대처하게 했는데, 조후는 회양(淮陽)에 이르러 자기 아버지 주발(周勃)의 옛 문객인 등 도위(鄧都尉) 말을 듣고, 창읍(昌邑) 남쪽에다 벽을 쌓고 들어앉아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고 오병(吳兵)의 예봉이 꺾이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출동하여 전승을 거두었음. 《史記 吳王濞傳》
♣ 조태허[曺太虛]태허는 조위(曺偉)의 자이다.
♣ 조택목[鳥擇木]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저 새들을 보라. 저들도 벗을 찾고 있지 않은가.[相彼鳥矣猶求友聲]”하였음.
♣ 조토[胙土]국가에 공로가 있어 그 대가로 국가로부터 받은 땅.
♣ 조편[祖鞭]조생지편(祖生之鞭)의 준말로, 남보다 먼저 착수함. 또는 선편(先鞭)을 잡는다는 뜻.
♣ 조포[朝飽]잠시동안의 정의 만족. 순간의 만족. 하루 아침의 배부름. 남녀간의 정사를 가리키는 은어.
♣ 조하[漕河]대운하처럼 조운(漕運)하는 강물이란 뜻으로, 한강을 가리킨다.
♣ 조하[鳥下]아주 쏘아 떨어뜨리기 어려운 수리[雕]를 쏘아 잡은 명사수를 이름. 이광(李廣)이 흉노와 싸울 적에 수리를 떨어뜨릴 만한 흉노의 장사 3인을 만나서 한군(漢軍)도 많은 사상자가 나왔는데, 이광은 끝내 그들을 다 쏘아 죽였었다.
♣ 조하원호[鳥下猿號]춘추 때에 초(楚)나라에 활 잘 쏘는 양유기(養由基)가 활에다 화살을 메우면 새와 원숭이가 놀래고 두려워하였다 한다.
♣ 조해[朝海]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제후가 마치 천자를 뵙듯 강한의 물이 바다로 흘러든다.[江漢朝宗于海]”라는 말이 있다.
♣ 조해[調諧]조화(調和)와 같음.
♣ 조해소경[鳥駭巢傾]가족 전체가 화를 당할까 염려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공융(孔融)이 조조(曹操)에게 체포당했을 때, 7세 된 딸과 9세 된 아들이 태연히 바둑을 두면서 “둥지가 부서졌는데 새 알이 깨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安有巢毁而卵不破乎]”하고 스스로 각오했다는 소경란파(巢傾卵破)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孔融傳》
♣ 조핵요기[棗核療飢]대추씨로 요기한다는 말은 곧 후한(後漢) 때 방술사(方術士)인 학맹절(郝孟節)이 대추씨만 입에 머금은 채, 밥을 먹지 않고도 5년, 10년을 지낼 수 있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八十二》
♣ 조혁금액[革金厄]조혁은 고삐의 머리를 가죽으로 꾸민 것이요, 액(厄)은 액(軛)과 통하는데, 수레 횡목(衡木)의 두 끝을 이름. 금으로 액한다는 것은 즉 그것을 금으로 장식한다는 말임. 주자 집주에는, “革 轡首也 金厄 以金爲環 纑搤轡首也”라 하였음.
♣ 조현백[嘲玄白]시류(時流)에 영합하지 않고 담백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문필 작업에 열정을 쏟겠다는 뜻이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집필하면서 담백한 생활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권세에 아부하여 출세한 자들이 “아직도 완전히 검어지지 않고 흰 부분이 있어서 출세하지 못한다.[玄尙白]”고 조롱하자, 해조(解嘲)를 지어 스스로 해명했다고 한다. 《漢書 揚雄傳下》
♣ 조협명리[兆協明离]황태자의 책봉을 칭송한 말이다. 주역(周易) 이괘(離卦)의 상(象)에 “밝음 두 개가 이괘를 이루나니, 대인이 이로써 밝음을 이어 받아 사방을 비추느니라.[明兩作离 大人以繼明 照于四方]”하였는데, 여기에서 명리(明离)가 황태자를 뜻하는 말로 되었다.
♣ 조호[雕胡]줄[菰]의 열매인 고미(菰米)를 말하는데, 식용(食用)으로 쓴다.
♣ 조호미[雕胡米]구황(救荒) 식물로 많이 먹었던 고미(苽米) 즉 줄풀의 열매를 말한다.
♣ 조화소아[造化小兒]고칠 수 없는 중한 병을 말한다. 아이란 곧 병마(病魔)의 뜻이다. 춘추 시대 진 경공(晉景公)이 병들었을 때, 두 아이[二豎子]가 고황(膏肓)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 후 의원을 데려왔으나 의원은 병이 고황에 들어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左傳 成公 十年》
♣ 조화입노추[造化入爐槌]노추는 쇠붙이를 달구고 두들기는 기구로 곧 인간의 만사가 도야(陶冶)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말한 것이다.
♣ 조황옹[釣璜翁]강태공이 반계(磻溪; 璜河)에서 낚시질하고 있었는데, 뒤에 무왕(武王)에게 발탁되었다. 《呂氏春秋》
♣ 조황후[趙皇后]요여조황후(腰如趙皇后). 전한(前漢) 때 효성제(孝成帝)의 황후(皇后)이던 조비연(趙飛燕)을 이름이니, 그는 몸이 가볍고 가무(歌舞)를 잘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나는 제비[飛燕] 같았다고 한다. 그는 귀풍송원곡(歸風送遠曲)을 손수 지어서 노래하고 춤춘 것으로 더욱 유명한데, 귀풍송원이란 회오리바람을 멀리 보낸다는 뜻이다.
♣ 조회[曹鄶]조(曹)와 회(鄶)는 주 나라 초기에 봉해진 나라들로서 춘추 시대 제후국 중 가장 빈약한 나라들임. 시경에 조풍(曹風)ㆍ회풍(鄶風)이 남아 있다. 좌전(左傳) 양공(襄公) 29에 “계찰(季札)이 회(鄶)ㆍ조(曹) 두 나라의 가요에 대해서는 평론이 없었다.” 한 주에 “계찰이 두 나라의 가요를 듣고 너무나도 미약하고 보잘것이 없어서 평론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였다.
♣ 조회[藻繪]조회(藻繪)는 문채(文彩)이다.
♣ 조후[條侯]한 문제(漢文帝) 때의 명장 주아부(周亞夫)의 봉호이다.
♣ 조후견벽야래경[條候堅壁夜來驚]조후(條侯)는 한(漢) 나라 문제(文帝)ㆍ경제(景帝) 때의 장군 주아부(周亞夫)의 봉호이다. 경제 때에 앞서 제왕(諸王)들로 봉해진 오(吳)ㆍ초(楚)ㆍ조(趙)ㆍ교서(膠西)ㆍ교동(膠東)ㆍ치천(菑川)ㆍ제남(濟南) 등 7개국이 강력한 군대로써 서로 연합하여 모반하자, 주아부가 태위(太尉)로서 명을 받고 그들을 정벌하러 나갔는데, 이 때 주아부는 그들에게 먼저 싸움을 걸지 않고 성벽(城壁)을 견고히 하여 지키고만 있던 가운데, 어느 날 밤에 주아부의 군중(軍中)이 경동(驚動)하여 내란(內亂)이 일어났던 데서 온 말이다. 그런데 그 내란은 이내 진정되었고, 끝내 주아부의 군사가 7개국을 크게 격파하여 평정했었다. 《史記卷 五十七》
♣ 조훈[祖訓]조훈은 조사(祖師)의 교훈.
♣ 조흘강[照訖講]조흘강은 과거시험에 응하는 유생에 대하여 성균관에서 먼저 그의 호적을 대조한 뒤에 유교 경전의 하나인 소학(小學)을 외워바치게 하는 시험이다.
♣ 조희[曹喜]후한(後漢) 때 사람. 전서(篆書)를 잘 썼으며 비서랑(秘書郞)을 지냈음.
♣ 족[族]뼈와 근육 등이 모여서 얽혀 있는 곳.
♣ 족기성명[足記姓名]항우(項羽)가 일찍이 글을 배웠으나 되지 않자, 말하기를 “글은 성명이나 기록할 정도면 된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項羽本記》
♣ 족매태[簇莓苔]이끼가 파릇파릇 돋아남.
♣ 족모찬삼[足暮餐三]송(宋) 나라 저공(狙公)이 원숭이에게, 상수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주겠다고 하니 노여워하므로,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가 만족해하였다 한다.
♣ 족어양[足於良]한(漢) 나라 장량(張良)이 고조(高祖)를 도와서 천하를 평정한 뒤에 말하기를, “세 치[三寸]되는 혀로써 제왕(帝王)의 스승이 되고, 만호후(萬戶侯)를 봉하였으니 양(良)에게 만족하다. 이제는 인간사를 버리고 신선을 배우겠다.” 하였다.
♣ 족일녕순의봉착[足逸寧循蟻封窄]재능이 훌륭하여 곧 출세하리라는 뜻. 진서(晉書) 권75에 “왕잠(王湛)이 조카 제(濟)와 같이 말을 시험할 때 의봉(蟻封)으로 가서 말을 달려 돌았는데, 그가 지적한 말은 까딱 없었고 제가 타던 말은 지쳐 넘어졌다.”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 족자[族子]겨레붙이로서 유복친(有服親)이 아닌 조카뻘 되는 사람.
♣ 족포[族庖]일반적인 소잡이.
♣ 존당[尊堂]살아 계신 남의 아버지를 일컬음.
♣ 존로[尊盧]태고(太古) 시대의 제호(帝號)이다.
♣ 존로마[存老馬]자신을 동정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전자방(田子方)이 길을 가다가 집에서 버림받은 늙은 말을 보고는 “힘 좋을 때 써먹다가 늙었다고 내버리다니, 이런 짓을 인자(仁者)는 차마 하지 못하는 법이다.” 하고, 속백(束帛)으로 대속(代贖)해 주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韓詩外傳 卷8 第32章》
♣ 존몰애영[存沒哀榮]논어(論語) 자장(子張)에 “살아 계실 때에는 모두 영광스럽게 여기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애통해 한다.[其生也榮 其死也哀]”는 말이 있다.
♣ 존방불[存髣髴]한때 희미해서 보이지 않는 수도 있다. 그러다가 마음이 뛰놀아 마치 물이 끓는 것과 같다.
♣ 존백[尊伯]상대방의 형님을 말함.
♣ 존상서[尊尙書]상서인 남의 부친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 존숙[尊宿]관경(觀經)에 “덕이 높는 것을 존, 나이가 높은 것을 숙이라 한다.” 하였다.
♣ 존순몰녕[存順沒寧]장횡거(張橫渠)의 서명(西銘) 말미에 “살아서는 내가 순리에 따라 섬기다가, 죽어서는 내가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라는 말이 나온다.
♣ 존신혹장칩[存身或藏蟄]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하(下)에 “용사(龍蛇)가 칩거하는 것은 존신(存身)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 존심양성[存心養性]본심을 보존하고 정성(正性)을 배양한다는 뜻이다. 맹자(孟子) 진심장(盡心章) 상편에 “본심을 보존하고 정성을 배양하는 것은 하늘을 섬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 존양[存養]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심을 보존하고 정성(正性)을 배양한다는 뜻이다. 맹자(孟子) 진심장(盡心章) 상편에 “본심을 보존하고 정성을 배양하는 것은 하늘을 섬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 존왕필[尊王筆]왕 높이는 붓은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달리 이르는 말임. 곧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미 멸망한 명 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 존인자막량어모[存人者莫良於眸]맹자(孟子) 이루 상(離婁 上)에 “사람에게는 눈동자 만한 것이 없다. 마음이 바르면 눈동자가 밝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눈동자가 흐리멍덩하다.” 하였다.
♣ 존자[尊者]존자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불제자에 대한 칭호이다. 나한(羅漢)을 존자(尊者)라 칭하는데, 소승(小乘)의 성도자(成道者)로서 불(佛)ㆍ보살(菩薩)과 구별된다.
♣ 존장[尊章]시부모를 말한다.
♣ 존존[存存]존재함, 보존함
♣ 존주[尊周]주(周) 나라를 높인다는 뜻으로 공자(孔子)의 춘추대의(春秋大義)에서 나온 말이다.
♣ 존지도어목격[存至道於目擊]공자가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서 말을 하지 않으니, 자로(子路)가 묻기를, “온백설자를 만나기를 오랫동안 원하시더니 만나서는 왜 말을 하지 않습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그 사람은 목격(目擊)만 하여도 도(道)를 알겠으니 말할 필요도 없다.” 하였다.
♣ 졸간칙유여[拙艱則有餘]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도가 있는 세상에는 내가 벼슬 못하고, 도가 없는 세상에는 내가 어리석지 못했나니, 어쩌면 그렇게도 교활한 꾀는 부족하면서, 졸렬하고 힘들기는 남보다 앞섰는고.[有道吾不仕 無道吾不愚 何巧智之不足 拙艱之有餘也]”라는 구절이 나온다.
♣ 졸무장사[拙舞長沙]지역이 좁음을 뜻함.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인 장사왕 발(長沙王發)은 신분이 미천한 당희(唐姬)의 소생이라 하여 애당초 비습(卑濕)하고 가난한 나라인 장사에 봉해졌는데, 일찍이 제왕(諸王)들이 천자에게 내조(來朝)하여 헌수(獻壽)하고 가무(歌舞)할 적에 유독 장사왕은 옷자락을 벌리고 약간 손을 들기만 하므로, 좌우에서 모두 그의 춤이 졸렬함을 비웃자, 상(上)이 괴이하게 여겨 그렇게 춤추는 까닭을 물으니, 장사왕이 대답하기를 “신(臣)은 나라가 작고 땅이 좁아서 회선(回旋)할 수가 없습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五十三》
♣ 졸박[拙薄]재능이 모자라고 운명이 기박함을 말함.
♣ 졸수[卒壽]90세. ‘卒’은 약자를 위에서부터 보면‘九 十 ’이기 때문이다.
♣ 졸옹[拙翁]졸옹은 최해(崔瀣)의 호이다.
♣ 졸졸[卒卒]당황하여 침착하지 못한 모양
♣ 종각가장풍[宗慤駕長風]장쾌한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남조(南朝) 송(宋) 나라 때 종각의 숙부(叔父) 종병(宗炳)이 고상한 뜻을 가져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종각이 어렸을 적에 종병이 그의 뜻을 물으니, 종각이 답하기를, “저는 큰 바람을 타고 만 리의 큰 파도를 깨뜨리고 싶습니다.” 하였다. 《宋書 卷76 宗慤列傳》
♣ 종각지[宗慤志]종각은 남조(南朝) 때 송(宋) 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원간(元幹). 어릴 적에 그의 숙부가 뜻을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헤치고 싶습니다.[願從乘長風 破萬里浪]" 하였다.
♣ 종각초승파랑풍[宗慤初乘破浪風]웅혼한 기백과 원대한 뜻을 지니고 용맹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남조(南朝) 송(宋)의 종각(宗慤)이 소년 시절에 “장풍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부수고 싶다.[願承長風破萬里浪]”고 포부를 밝힌 고사가 있다. 《宋書 卷76》
♣ 종개[悰愷]당(唐)의 두종(杜悰)과 진(晉)의 왕개(王愷)를 가리킴.
♣ 종거삼유재[鍾簴森猶在]허(簴)는 종(鍾)을 받치는 기구이니 종 받침대가 수북하다는 말은 예악이 예전과 같이 태평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 종경릉[鐘竟陵]종경릉은 명나라 경릉(竟陵) 사람 종성(鍾惺)인데 자는 백경(伯敬)임. 만력 연간에 진사(進士)로 벼슬은 복건제학(福建提學)에 이르렀으며, 그 시가 유심(幽深)하고 고초(古峭)하여 담원춘(譚元春)과 제명(齊名)하여 경릉체(竟陵體)라 불렀음.
♣ 종고비양조[鐘鼓非養鳥]종고는 종과 북 등의 악기를 이름. 옛날에 해조(海鳥)가 노(魯) 나라 교외에 날아와 앉자, 노 나라 임금은 그를 모셔다가 종묘에서 잔치를 베풀어 순(舜) 임금의 음악을 연주하고 소ㆍ양ㆍ돼지고기 등의 요리로 대접하니, 그 눈이 부시고 근심 걱정이 생기어 한 점의 고기와 한 잔의 술도 먹지 못한 채로 3일만에 죽어 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至樂》
♣ 종고향[鍾鼓饗]종고는 쇠북과 가죽북으로, 풍악을 울리며 호사한 생활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 종공[宗工]존관(尊官)을 말한다. 서경(書經) 주고(酒誥)에 “백료와 서윤과 아복과 종공이다[百僚庶尹惟亞惟服宗工].”이라 보인다.
♣ 종과[種瓜]진(秦) 나라 소평(邵平)이 동릉후(東陵候)가 되었다가 전 나라가 망하자 청문(靑門)에 참외를 심어 생활하였다.
♣ 종군[終軍]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자운(子雲), 18세에 무제(武帝)에게 상소하여 알자급사중(謁者給事中)이 되었고, 문학과 언변이 매우 뛰어나서 약관(弱冠)의 나이로 간의대부(諫議大夫)에 발탁되었고, 나중에는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서 남월왕(南越王)을 설득하여 한(漢)의 내속(內屬)이 되기를 허락받음으로써 천자로부터 큰 은총을 받고 명성이 천하에 떨쳤으나, 이윽고 남월왕의 재상인 여가(呂嘉)의 반란으로 그곳에서 죽고 말았는데, 그때 나이 20세였다. 《漢書 卷六十四》
♣ 종군소[終軍少]한 나라 무제 때 종군이 약관(弱冠)의 나이에 상소를 올려서 “갓끈 하나를 주면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서 남월왕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하였다. 《漢書 卷64下 終軍傳》
♣ 종군소다기[終軍少多氣]한 무제(漢武帝)때에 종군은 나이 18세로 박사제자(博士弟子)에 선발되었고, 20여 세에는 간대부(諫大夫)에 발탁되었는데, 이 때 한 나라에서 남월(南越)과 화친하기 위해 남월에 사신을 보내려고 하자, 종군이 천자에게 긴 밧줄을 내려주면 반드시 남월왕(南越王)을 묶어서 궐하(闕下)에 끌어오겠다며 사신 가기를 자청하여, 마침내 그것에 사신으로 가서는 남월왕을 잘 설득하여 한 나라에 내속(內屬)하겠다는 허락까지 받아냈으나, 결국 남월의 정승 여가(呂嘉)의 반역에 의하여 그 곳에서 남월왕와 함께 살해되고 말았다. 《漢書 卷六十四》
♣ 종군약관청장영[終軍弱冠請長纓]한(漢)나라 종군(終軍)이 20세의 나이에 무제(武帝)에게 글을 올리기를, “긴 올가미 하나를 주면 흉노(匈奴)의 선우(單于)와 남월왕(南越王)의 머리를 베어다가 바치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 종금시부고[從今矢不告]시골에 내려와 사는 즐거움을 혼자서 온전히 간직하겠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그릇 두드리며 언덕에서 노래하니 대인이 은거하여 사는 곳이로다. 혼자 잠들고 일어나는 생활이지만 길이 맹세코 남에게 알리지 않으리라[考槃在陸 碩人之軸 獨寐寤宿 永矢弗告]”라고 하였다.
♣ 종기[鍾期]종자기(鍾子期)인데 백아(伯牙)와 종자기의 고사를 말한다. 《列子 湯問》
♣ 종기[鍾期]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유백아(兪伯牙)의 지음(知音)인 종자기(鍾子期)를 말한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더 이상 세상에 지음이 없다고 하면서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린 고사가 있다. 《呂氏春秋 本味》
♣ 종기사[鍾期死]종자기와 백아(伯牙)는 모두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인데,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그 소리를 듣고서 백아의 심정을 환히 알았으므로, 종자기가 죽은 뒤에는 백아가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 타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종남경[終南逕]종남첩경(終南捷逕)의 준말로, 당(唐) 나라 때 노장용(盧藏用)이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하자 세상 사람들이 그를 경모(敬慕)하여 그의 이름이 높이 알려져서 벼슬길이 열리게 되었으므로, 종남산 속에 있는 것이 벼슬길의 첩경이 된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唐書 盧藏用傳》
♣ 종남산[終南山]당나라 서울의 종남산이므로 한양의 남산도 종남산이라 쓴다.
♣ 종남산[終南山]목멱산(木覓山) 즉 서울의 남산을 가리킨다.
♣ 종남산[終南山]장안(長安)의 남산이다.
♣ 종남엄로[終南儼老]당나라 종남산에 지엄(智儼)이란 고승(高僧)이 있었다.
♣ 종남첩경[終南捷徑]출세(出世)와 영달(榮達)의 지름길. 목적 달성의 지름길을 일컫는 고사성어.
♣ 종남홍동[終南澒洞]근심이 끝없이 많음을 비유한 말. 종남은 종남산을 이른 말이고, 홍동(鴻洞)은 연속된다는 뜻으로, 두보(杜甫)의 자경부봉선현영회(自京赴奉先縣詠懷) 시에 “근심의 끝이 종남산과 가지런하여, 연속되는 근심을 걷을 수가 없네.[憂端齊終南 鴻洞不可掇]"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陸詩集 卷四》
♣ 종담[鍾譚]종성(鍾惺)과 담원춘(譚元春)을 말하는데, 다같이 명(明) 나라 경릉(竟陵) 사람으로, 시(詩)에 조예가 깊어 고시귀(古詩歸)ㆍ당시선(唐詩選) 등을 평선(評選)하였다.
♣ 종대사분[宗岱祠汾]한 무제(漢武帝) 때 분음에서 보정(寶鼎)을 얻고 나서는 감천궁(甘泉宮)에 분음사(汾陰祠)를 세워 제사를 지낸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천자의 의식을 뜻한다.
♣ 종동기수거[終童棄繻去]한(漢)나라 종군(終軍)이 시골서 서울로 가는데 관(關)에 들어갈 때에 지키는 관원이 백부(帛符)를 주면서, “이것을 가져야 뒷날 관에 나올 때에 증명이 된다.” 하였다. 종군은 그것을 집어 던지며, “내가 나올 때에 임금의 명령으로 절(節)을 가지고 올 터인데 이것은 필요 없다.” 하였다.
♣ 종두득두[種豆得豆]콩을 심으면 콩을 얻음. 원인에 따라 그에 맞는 결과가 생김
♣ 종랑[縱浪]방랑(放浪)과 같음. 도잠(陶潛)의 신석시(神釋詩)에, “縱浪大化中 不喜亦不懼”라고 보임.
♣ 종래분욕폐양지[從來忿欲蔽良知]원래 위징(魏徵)은 태자 건성(建成)을 섬겨 태종을 제거하려 하다가 도리어 태종의 세력에게 패하여 건성은 살해되고 위징은 잡혔었는데, 태종이 그의 어짊을 알고 신하로 삼았다. 그러나 위징에 대한 구원(舊冤)이 남아 있다가 지혜가 가려져 만년에 위징을 의심하게 됐다는 뜻이다.
♣ 종려[種蠡]춘추 시대 월(越)의 대부 문종(文種)과 범려(范蠡). 월 나라 왕 구천(句踐)을 도와 오(吳)를 정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자들임.
♣ 종령초격문[鍾靈草檄文]일단 은둔생활을 끝내고 산을 나간 사람은 그 산의 신령이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 옛날 주언륜(周彦倫)이 북산(北山)에 숨어 있다가 천자의 부름을 받고 산을 나가 해염 현령(海鹽縣令)이 되었는데, 뒤에 그 산을 또 찾으려하자 공치규(孔稚珪)가 북산 신령의 뜻을 빌려 주언륜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각 역로에다 공문을 발송했다는 뜻의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쓰면서 그리 말하였음. 《文選 孔稚珪 北山移文》
♣ 종뢰[宗雷]남조 송(南朝宋) 때에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각각 형산(衡山)과 여산(廬山)에 은거하였던 은사 종병(宗炳)과 뇌차종(雷次宗)을 합칭한 말이다.
♣ 종률[鍾律]황종(黃鍾)의 율(律)을 말함. 명(明) 나라 사람 예복(倪復)의 종률통고(鍾律通考)가 있음.
♣ 종리춘[鍾離春]제 선왕(齊宣王)의 부인인 무염읍의 여자. 그는 둘도 없는 추녀(醜女)였다고 한다. 《列女傳 鍾離春傳》
♣ 종맹[宗盟]천자와 제후(諸侯)와의 회맹(會盟).
♣ 종명정식[鐘鳴鼎食]종을 울려 가족을 모으고 솥을 늘어놓고 음식을 해먹는 집. 즉 부하고 귀한 사람들의 생활을 말한 것.
♣ 종백[宗伯]예조 판서(禮曹判書)의 별칭이다.
♣ 종변객관어[縱辯客觀魚]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다리 위에 놀면서 “한가롭게 노는 고기, 이것은 고기의 즐거움이다.” 하니, 혜자가 “그대가 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인가.” 하자, 장자가 “그대가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고기의 즐거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단 말인가.” 하였다.
♣ 종병[宗炳]남조 송(南朝宋)의 은자(隱者)로 서(書), 화(畫), 금(琴)의 명인이었으며 노장학(老莊學)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연사(蓮社)의 고현(高賢) 중의 한 사람으로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고승(高僧) 혜원(慧遠)과 노닐면서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는데, 만년에는 형산(衡山)에다 초막을 짓고 살다가 병이 들어 강릉(江陵)으로 돌아온 뒤, 그동안 다녔던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 방 안에 가득 걸어 놓고 감상했던 고사가 있다. 《宋書 卷93 宗炳傳》
♣ 종병사[宗炳社]남조(南朝) 송(宋) 나라 종병이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은거하여 산수를 찾아 유람하기를 좋아했는데, 일찍이 여산(盧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뇌차종(雷次宗)ㆍ혜원(慧遠)ㆍ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 등 18인과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함께 염불하였다. 곧 은거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풍월을 즐기는 청아한 모임을 뜻한다.
♣ 종부[鍾阜]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에 있는 금릉산(金陵山). 일명 종산(鍾山)이라고도 한다.
♣ 종부[鍾阜]전설 속의 산으로 북쪽의 추운 지방에 있으며 종산(鍾山)이라고 한다.
♣ 종사[從事]술의 별명이다. 진(晉) 나라 환온(桓溫)의 주부(主簿)가 술을 잘 분별했는데, 좋은 술을 청주종사(靑州從事)라 하고, 나쁜 술을 평원독우(平原督郵)라 하였다 한다. 《事文類聚 燕飮部》
♣ 종사도청제[從事到靑齊]좋은 술을 먹고 취해서 울적한 기분을 달래 보라는 말이다. 진(晉) 나라 환온(桓溫)이 술을 마실 때마다 품평을 잘 하는 주부(主簿)가 먼저 술을 맛보고는, 좋은 술에 대해서는 “靑州從事”라 하고 시원찮은 술에 대해서는 “平原督郵”라고 했다 하는데, 그 이유는 청주(靑州)에 제군(齊郡)이 있고 평원(平原)에 격현(隔縣)이 있는 것에 빗대어, 좋은 술은 배꼽 아래[臍下]에까지 이르고 나쁜 술은 그저 격막(膈膜) 근처까지만 간다는 뜻에서였다 한다. 《世說新語 術解》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更向靑齊覓消息 要知從事是何人”이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7 和錢穆父送別 幷求頓遞酒》
♣ 종사복[螽斯福]종사는 메뚜기인데 한번에 99개의 알을 낳는다 하여, 왕후(王后)가 궁녀들과 화목하여 자손이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詩經 國風 周南》
♣ 종산[鍾山]종산은 곤륜산(崑崙山)의 별칭. 중국 섬서(陝西)에 위치한 높은 산으로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아 설산(雪山)이라고도 함. 신선 서왕모(西王母)가 그곳에서 산다고 하여 신선 세계의 대명사로도 씀.
♣ 종산[鍾山]종산은 중국 강소(江蘇) 남경시(南京市) 동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육조(六朝) 송(宋)나라 때 주옹(周顒)과 공치규(孔稚圭)가 은거하던 곳이다. 주옹은 나중에 세상에 나가 회계군(會稽郡)의 해염현령(海鹽縣令)으로 있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도성으로 가는 길에 종산에 들르려고 하자 공치규가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 종산괴유령[鍾山愧有靈]남조 제(齊)의 주옹(周顒)이 북산(北山), 즉 종산에 잠깐 은거했다가 다시 벼슬길에 나서자 산신령이 노했다는 내용으로 풍자한 공치규(孔稚珪)의 ‘북산이문(北山移文)’이 있다.
♣ 종산이문[鍾山移文]종산은 남경(南京)에 있는 북산(北山)으로, 은자(隱者)가 은거하여 사는 산을 말한다. 육조(六朝) 때 송(宋) 나라의 공치규(孔穉圭)가 주옹(周顒)이 자신과 함께 종산에 은거하다가 벼슬길에 나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종산에다가 이문을 새겨 주옹으로 하여금 다시는 종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 종삼[從三]의례(儀禮) 상복(喪服) 편에, “부인(婦人)은 삼종(三從)의 의(義)가 있고 전제(專制)의 도(道)가 없으므로, 출가(出嫁)하지 않았을 때는 아비를 따르고, 출가하면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 하였음.
♣ 종생계로[終生繫虜]한(漢) 나라 때 사람인 종군(終軍)을 가리킨다. 무제(武帝) 때 종군이 약관(弱冠)의 나이에 상소를 올려 “갓끈 하나를 주면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서 남월왕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하였다. 《漢書 卷64下 終軍傳》
♣ 종서[粽黍]갈대 잎에다 쌀가루를 싸서 쪄 만든 떡. 음력 5월 5일이면 만들어 먹었음. 초(楚)의 사람들이 굴원(屈原)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대통에다 쌀을 담아 멱라수(汨羅水)에 던졌던 데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함. 《續齊諧記. 荊楚歲時記》
♣ 종서[終徐]종서(終徐)는 한 무제(漢武帝)에게 직간(直諫)을 올린 종군(終軍)과 서악(徐樂)을 가리킨다. 흰 기린[白麟]이 잡혔을 때 종군이 상소한 글과, 토붕 와해(土崩瓦解)의 위험성을 논한 서악의 상소문이 한서(漢書) 65권 하(下)와 상(上)에 각각 실려 있다.
♣ 종선여등[從善如登]착한 일을 쫓아 하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말.
♣ 종선여류[從善如流]선(善)을 쫓는 태도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서슴지 않음. 서슴지 않고 착한 일을 하는 태도를 말한다.
♣ 종성우풍[從星雨風]서경(書經) 홍범(洪範)에 “서민은 별과 같다. 별은 바람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비를 좋아하는 것도 있다.” 했는데, 그 주에 “기성(箕星)은 바람을 좋아하고 필성(畢星)은 비를 좋아한다.” 하였다.
♣ 종소[終宵]밤새도록.
♣ 종소문[宗少文]남조 송 때의 은사 종소문(宗少文)은 본디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일찍이 서쪽으로 형산(荊山)ㆍ무산(巫山)을 다 올라 구경하고, 남쪽으로 형산(衡山)에 올랐다가 인하여 형산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뒤에 병이 들자 강릉(江陵)으로 돌아와 탄식하기를 “늙고 병들어서 명산(名山)을 두루 구경하기 어려울 듯하니, 오직 누워서 유람을 하리라.” 하고는, 자신이 일찍이 유람했던 산들을 모두 방 안에 그려놓고 구경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南史 卷七十五》
♣ 종수[嵕岫]장안(長安) 가까이 있는 명산인 구종산(九嵕山)인데, 광릉(光陵)이 있는 양주(楊州) 주엽산(注葉山)을 말하기도 한다.
♣ 종수탁타전[種樹槖駝傳]유자후(柳子厚)가 지은 종수탁타전(種樹槖駝傳)에, “곽탁타라는 사람이 나무를 잘 가꿔 그 이치를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옮겨 심을 때에 뿌리를 펴고 본 땅의 흙을 가져오고 깊지도 얕지도 않게 적당하게 심어놓은 뒤에는 손대지 않아서 식물의 천성(天性)을 그대로 보존시킨다. 다른 사람들은 이와 반대이므로 옮겨 심은 나무가 잘 살고 번성하지 못하는데, 이 이치를 정치에 옮긴다면 관리가 백성을 사랑하는 척 하면서 자주 나와 간섭하니 백성이 관리의 명령을 전하고 접대하기에도 바쁜데 어느 겨를에 농사짓고 일하겠는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종신국륜[宗臣國倫]종신은 명(明) 나라 때 문장가(文章家)이고 오국륜도 명 나라 때의 시인으로, 이들은 다 가정(嘉靖) 연간의 칠자(七子)로 유명하다.
♣ 종신모[終身慕]맹자(孟子)의 말에, “종신토록 부모를 생각하는 이는 오직 순(舜)이다.” 하였다.
♣ 종심[從心]70세. 마음을 따르다.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른 70세의 나이에는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도 결코 정도(正道, 법도, 도덕적 규범)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 종씨시품[鍾氏詩品]종씨는 양(梁) 나라 사람 종영(鍾嶸), 자는 중위(仲偉). 시품(詩品)은 그가 한(漢)ㆍ위(魏) 이래의 시인 1백 3인의 작품을 상ㆍ중ㆍ하로 우열을 논해 놓은 것. 《梁書 卷四十九ㆍ南史 卷七十二》
♣ 종아채[從我蔡]논어(論語) 선진(先進)에 “진채(陳蔡)의 땅에서 나를 따르던 이들이 다 문하(門下)에 있지 않다.” 하였다.
♣ 종야[終夜]“밤을 마치다”는 뜻으로 “밤을 지새우다”는 의미.
♣ 종어[鍾魚]풍경(風磬)을 말함.
♣ 종얼[宗孽]종자는 큰아들의 뜻으로 학문의 정통에 비하고 얼자는 서자라는 뜻으로 학문의 분열된 가지를 비한 것임.
♣ 종영[宗英]본디 종실(宗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의 뜻으로 쓰인다.
♣ 종영륵이[鍾英勒移]종산은 남경(南京) 동쪽에 있는 북산(北山)을 달리 이른 것이고, 이문(移文)은 공문(公文)의 일종이다. 남조 송(南朝宋) 때 주옹(周顒)이 처음 북산에 은거하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해염령(海鹽令)이 되었는데, 뒤에 임기를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다시 북산을 들르려고 하자, 그의 친구인 공치규(孔稚圭)가 그의 벼슬길에 나간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북산 신령의 이름을 가탁하여 그를 거절하는 뜻으로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종산의 영령과 초당의 신령은 역로에 연기를 달려 보내서 산정에 이문을 새기게 하였다.[鍾山之英 草堂之靈 馳煙驛路 勒移山庭]” 한 데서 온 말이다.
♣ 종옥[種玉]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함.
♣ 종옥[種玉]양백옹(楊伯雍)이라는 사람이 3년 동안 목마른 행인들에게 물을 길어다 마시게 해 준 결과, 선인(仙人)으로부터 한 말의 옥 씨를 받아 수많은 옥나무를 길러 부유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搜神記 卷11》
♣ 종왕[鍾王]위(魏) 나라의 종요(鍾繇)와 진(晉) 나라의 왕희지(王羲之)를 말하는데, 두 사람은 모두 서예(書藝)에 능한 사람이다. 진서(晉書) 왕희지전(王羲之傳)에 “희지의 자(字)는 일소(逸少)인데, 그는 늘 자칭하기를 ‘내 글씨를 종요에게 비기면 항행(抗行)이 될 만하고, 장지초(張芝草)에게 비기면 안항(雁行)이 될 만하다.’ 하였다.” 한다.
♣ 종왕[鍾王]중국의 명필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
♣ 종요[鍾繇]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자는 원상(元常). 서예가이자 정치가. 벼슬이 태부(太傅)에 이르렀고 조비(曹丕)가 황제가 된 다음 정릉후(定陵侯)에 봉해졌음. 팔분체(八分體)에 능했음. 호소(胡昭)와 함께 유덕승(劉德升)에게 글씨를 배웠다. 특이한 필체를 구사한 그는 특히 초서(草書)와 행서(行書)에 능하였으며, 예세(隸勢)라는 글을 지어 예서(隸書)를 쓰는 방법과 자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晉書 卷三十六 衛瓘列傳》
♣ 종용[從容]유희. 노닐다. 즐기다. 조용한 모양, 말이나 또는 하는 것이 왁자지껄하지 않고 매우 얌전한 모양.
♣ 종용유상[從容有常]안색, 행동 등을 바꾸지 않고 소신대로 행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종우방[鍾于房]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방성(房星)의 네 별을 천사(天駟)라고 하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종유[鍾繇]삼국 때 위나라 사람. 예서(隸書)의 명가(名家)
♣ 종유금채[鐘乳金釵]설원(說苑)에 “우승유(牛僧孺)가 ‘1천금을 주고 종유를 사서 복용하였더니 힘이 샘솟고, 또 노래 부르며 춤추는 기생이 많다.’고 자랑하므로 백거이(白居易)가 ‘종유는 삼천 냥이요 금비녀가 열두 줄이라[鐘乳三千兩 金釵十二行]’ 한 시를 지어 보냈다.” 하였는데, 금비녀가 열두 줄이란 처첩(妻妾)이 많다는 뜻이다.
♣ 종응래대하[種應來大夏]한(漢) 나라 장건(張鶱)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갔다가 대하국(大夏國)에서 처음으로 포도 씨앗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다.
♣ 종입수문[縱入脩門]부고(訃告)를 받고 황급히 조정으로 달려가는 것을 말한다. 종종(縱縱)은 총총(摠摠)과 같은 말로,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상사(喪事)에는 종종히 하고 길사(吉事)에는 절절(折折)히 한다.” 하였다. 수문(脩門)은 도성 문 혹은 대궐 문을 뜻한다.
♣ 종자[宗子]왕자를 말함.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대군(大君)은 우리 부모의 종자이다.”라는 말이 있다.
♣ 종자[鍾子]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의 연주를 가장 잘 이해했던 종자기(鍾子期)를 말한다. 《列子 湯問》
♣ 종자가남음[鍾子歌南音]이 말은 좌전(左傳)에, “진후(晉侯)가 군부(軍府)를 시찰하다가 종의(鍾儀)를 보고서, 유사(有司)에게 묻되, ‘남관을 쓰고서 얽매어 있는 자는 누구냐’ 하니, 대답이, 정(鄭) 나라에서 바친 초(楚) 나라 죄수입니다.’ 하였다.” 한 데 보임. 종의는 진(晉)에 있으면서 남음(南音)을 노래하였음.
♣ 종자기[鍾子期]음률(音律)을 잘 아는 사람. 전하여 상대의 심정을 잘 이해하는 지기지우(知己之友). 종자기와 백아(伯牙)는 모두 춘추 시대 사람으로,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들었는데, 백아가 일찍이 거문고를 타면서 높은 산에 뜻을 두자, 종자기가 듣고 말하기를 “좋다! 험준함[峩峩]이 마치 태산(泰山) 같구나.” 하였고, 백아가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는 또 말하기를 “좋다! 양양(洋洋)함이 마치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여 백아의 생각을 종자기가 다 알아들었다. 그리하여 종자기가 죽은 뒤에는 백아가 자기 거문고 소리를 알아줄 이가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 타지 않았다고 한다.
♣ 종장[宗匠]경학에 밝고 글 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급제를 뜻한다.
♣ 종장[鍾張]삼국 때 위나라 종유(鍾繇)와 한(漢) 나라 장지(張芝). 종(鍾)은 예서(隸書)의 명가(名家), 장(張)은 비백(飛白),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써 초성(草聖)이라 일컬었다.
♣ 종장[宗丈]집안 어른이라는 말이다.
♣ 종재번[種梓樊]번중(樊重)은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온후한 천성에 법도가 있었다. 기물(器物)을 만들기 위하여 가래나무와 옻나무를 심으니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으나 세월이 흐르자 그것을 이용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後漢書 樊重傳》
♣ 종적[蹤迹]발자취.
♣ 종정[鐘鼎]종명정식(鐘鳴鼎食), 종을 울려 가족을 모으고 솥을 늘어놓고 음식을 해먹는 집.
♣ 종정[鐘鼎]종정은 곧 종정문자의 준말로 은(殷)ㆍ주(周) 시대의 종정의 명(銘)에 쓰인 대전(大篆) 등의 자체(字體)를 말한다.
♣ 종정고문[鍾鼎古文]중국의 은ㆍ주(殷周) 때 종(鐘)과 솥 등의 철기(鐵器)에 씌어진 고문ㆍ주문(籒文)을 말함.
♣ 종정기[鍾鼎紀]공신의 기록
♣ 종정불증귀두소[鐘鼎不曾歸斗筲]종정(鐘鼎)은 옛날 큰 종(鐘)이나 솥[鼎]을 만들어, 거기에다 국가에 큰 공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므로 훈공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그런 국가의 큰 훈공이 두소(斗筲)처럼 그릇이 작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탄식한 말이다.
♣ 종정운림[鍾鼎雲林]종정은 벼슬아치이고 운림은 산림처사. 두보의 시에 “鐘鼎山林各天性 濁醪麤飯任吾年"이라고 한 것에서 따온 것임.
♣ 종종[樅樅]무뭇잎이 우거진 모양. 톱니처럼 깔쭉갈쭉한 모양
♣ 종종[淙淙]물이 흐르는 모양, 금석의 소리
♣ 종종[從從]수레의 방울소리, 여섯발 달린 개, 총총(從從) 총총이(從從爾)
♣ 종종상[種種相]불교에서 쓰는 말인데 세상의 온갖 가지가지의 사물(事物)을 말한다.
♣ 종주[宗周]주 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데, 처음에는 호경(鎬京)이었으나 평왕(平王)이 천도(遷都)한 뒤에는 낙읍(洛邑)으로 바뀌었다.
♣ 종죽의속[種竹醫俗]소식(蘇軾)의 녹균헌시(綠筠軒詩)에 “고기 없이 밥은 먹을 수 있으나 집에 대가 없게 할 수는 없네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파리하게 하고 대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하나니 파리한 사람은 살찌울 수 있으나 선비의 속됨을 다스릴 수 없다오[可使食無肉 不可使居無竹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九》
♣ 종지[宗之]종지는 정도전(鄭道傳)의 자이다.
♣ 종직[從直]성은 구(丘), 자는 정보(正甫), 본관은 평해(平海), 양선(揚善)의 아들이다. 세종 때 식년 문과에 급제, 세조 때 공조 판서 등을 지냈고 성종 때 좌찬성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는데, 문장이 뛰어나고 역학(易學)ㆍ경학(經學)에 밝았다.
♣ 종체[終遞]벼슬아치가 관직에서 죽음으로써 벼슬이 갈리는 일.
♣ 종축[宗祝]종묘(宗廟)의 제사를 맡은 관원인데, 전하여 예관(禮官)을 뜻한다.
♣ 종출[種秫]고량(高粱) 씨를 뿌려 가꾼다는 말로, 술을 담가 먹는 것을 뜻한다. 도연명(陶淵明)의 시 ‘화곽주부(和郭主簿)’에 “舂秫作美酒 酒熟吾自斟”이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 종출요도무[種秫饒陶畝]도연명(陶淵明)이 팽택 현령(彭澤縣令)으로 나가서 술을 담글 수 있도록 공전(公田)에다 모두 기장을 심도록 했던 유명한 고사가 있다. 《宋書 卷93 隱逸傳 陶潛》
♣ 종출흥[種秫興]술을 담아 먹는 흥취를 말한다.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이 교관(敎官)에 취임하여 술을 담기 위하여 차조를 심었던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의 ‘화곽주부시(和郭主簿詩)’에도 “舂秫作美酒 酒熟吾自斟”이라는 구절이 있다.
♣ 종치장후등[種致將侯等]사기(史記) 권129 화식전(貨殖傳)에 “촉(蜀)ㆍ한(漢)ㆍ강릉(江陵) 지방의 귤나무 천 그루를 가진 사람은 천호후(千戶侯)와 맞먹는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천호후는 천호나 있는 넓은 땅을 영유한 제후를 말한다.
♣ 종파도[宗派圖]황정견(黃庭堅)의 시파인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말한다.
♣ 종팽[宗祊]나라 사당
♣ 종편거처[從便居處]죄지은 사람을 사면(赦免)하여 주고 서울 밖의 편리한 곳에 가서 살게 하던 일.
♣ 종풍[宗風]종풍은 선종(禪宗)의 교리. 불가의 용어로 일종(一宗)의 특유한 풍을 말하는데 선종(禪宗)에서 흔히 이 말을 씀. 이를테면 임제종풍(臨濟宗風), 조동종풍(曹洞宗風)이라 하는 것이 이것임.
♣ 종형제[從兄弟]사촌 형제.
♣ 종혜[棕鞵]은사(隱士)가 신는 종려나무 껍질로 만든 신을 말한다.
♣ 종혜[椶鞵]종려나무 껍질로 만든 신을 이르는데, 옛날 은자(隱者)가 착용했다고 한다.
♣ 종회[鍾會]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위말(魏末)에 진서 장군(鎭西將軍)이 되어 등애(鄧艾)와 함께 촉(蜀) 나라를 멸(滅)하는 데 공이 커서 사도(司徒)가 되었으나, 등애를 모함하여 가둔 다음, 촉 나라에서 반란(叛亂)을 일으켰다가 부하의 손에 죽었음.
♣ 종횡가[縱橫家]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제국(諸國)의 군주(君主)들을 찾아다니며 독자적인 정책을 유세(遊說)하여 그들 여러 나라를 종(縱)‧횡(橫)으로 묶어서 경륜(經綸)하려던 외교가(外交家)‧책사(策士)‧모사(謀士)의 총칭. 합종책을 설(說)한 소진(蘇秦)과, 소진이 피살된 후 합종책을 깨기 위한 연횡책(蓮衡策)을 펴 성공한 장의(張儀)가 그 대표로 꼽힘.
♣ 좌각[左角]좌각의 다툼은 장자(莊子) 칙양(則陽)의 “달팽이의 왼쪽 뿔에 있는 나라는 촉씨(觸氏)라 하고 오른쪽 뿔에 있는 나라는 만씨(蠻氏)라 하는데, 서로 땅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벌여 수만 명의 군사가 죽고 진격한 지 15일 만에 돌아왔다.” 한 데서 나온 것으로, 극히 하찮은 일로 서로 다투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인용된다. 곧 세상의 온갖 영고 성쇠는 다 허무하다는 것이다.
♣ 좌간[坐慳]중국 속담에 “간탐하면 바람을 만나고, 인색하면 비를 만난다.[慳値風 嗇値雨]”는 말이 있으므로, 소식(蘇軾)의 약공택음시일대풍시(約公擇飮是日大風詩)에 “새벽의 거센 바람에 먼지가 하늘에 가득해라 그 까닭 생각하니 어찌 간에 저촉된 게 아니랴[曉來顚風塵暗天 我思其由豈坐慳]”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十六》
♣ 좌객[座客]좌중에 있던 손님.
♣ 좌견우방[左牽右防]가축을 다룰 때 뜻밖의 사고를 방지하는 사전의 준비를 뜻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말과 양을 바치는 자는 오른손으로 몰고 가고, 개를 바치는 자는 왼손으로 몰고 간다.[效馬效羊者 右牽之 效犬者 左犬之]”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이 해설하기를 “개가 사람을 물 경우 오른손으로 방어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 좌계[左契]좌권(左券)과 같은 말로, 즉 계약(契約)이란 뜻인데 나누어 좌우(左右)를 만들어 각기 한 쪽씩 가지고서 신(信)을 삼음. 노자(老子)에, “성인(聖人)은 좌계(左契)를 가지며 사람에게 책하지 아니한다.” 하였음.
♣ 좌고우면[左顧右眄]좌우를 자주 둘러본다. 무슨 일에 얼른 결정을 짓지 못함을 비유함
♣ 좌관천리[坐觀千里]앉아서 천리 밖을 봄. 멀리 앞을 내다봄.
♣ 좌단[左袒]웃옷의 왼쪽 어깨를 벗는다는 뜻으로, 남에게 편들어 동의함을 이르는 말.
♣ 좌당[左璫]환관(宦官)의 관(冠)의 장식품인데, 전하여 환관의 뜻으로 쓰인다.
♣ 좌대신[坐待晨]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주공은 세 왕을 겸하여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시되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우러러 생각하여 밤으로 낮을 잇고 다행히 터득하면 앉아서 새벽을 기다리셨다.” 하였다.
♣ 좌도[左徒]좌도는 전국시대 초(楚) 나라의 벼슬 이름인데, 굴원(屈原)이 그 벼슬을 지냈다 하여 굴원을 가리킨다.
♣ 좌도소[左徒騷]좌도는 전국 시대 초(楚)의 관직 이름. 굴원(屈原)이 초의 회왕(懷王) 때 좌도였었음. 《史記 屈原傳》
♣ 좌도수[左徒愁]좌도(左徒)는 관명으로 즉 좌도를 지낸 굴원을 가리키는데, 굴원이 소인의 참소에 의해 쫓겨난 후 근심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면서 이소(離騷)를 지었고, 또 그가 지은 어부사(漁父辭)에는 “뭇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혼자만 깨었다[衆人皆醉我獨醒].” 하였다.
♣ 좌도편[左徒篇]좌도는 전국시대 초(楚) 나라의 벼슬 이름인데, 굴원(屈原)이 그 벼슬을 지냈다 하여 굴원을 가리킨다. 좌도의 글은 굴원이 소인의 참소로 인해 조정에서 쫓겨나 귀양살이하면서 자신의 불우함을 노래한 이소경(離騷經)을 비롯한 초사(楚辭)를 말한다.
♣ 좌두[莝豆]좌두는 말에게 먹이는 여물. 사기(史記) 범휴전(范睢傳)에 “수가(須賈)를 당(堂) 아래 앉히고 그 앞에다 좌두를 놓은 다음 두 자자당한 죄인을 시켜 말처럼 좌두를 먹게 했다.” 하였다.
♣ 좌리[座梨]놓아두기만 하고 먹지 않는 배로, 진귀(珍貴)함을 뜻한다. 《唐書 崔澹傳》
♣ 좌마[左馬]좌전(左傳)과 국어(國語)의 저자인 좌구명(左丘明)과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司馬遷)을 말한다.
♣ 좌막[佐幕]좌막은 장수의 막부(幕府) 안에서 직무를 담당하는 것.
♣ 좌망[坐忘]도가에서 추구하는 것으로,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있는 말인데 수양(修養)으로 앉아서 상대와 나에 대한 존재를 의식(意識)하지 않고 현실의 모든 것을 잊는다는 것이다. 사물과 자기의 존재를 다 잊어버리고 담담하게 아무런 상념이 없는 정신세계를 말함.
♣ 좌명공[佐命功]조선 정종(定宗) 2년, 제2차 왕자(王子)의 난(亂) 때에 박포(朴苞) 등의 무리를 평정한 공으로 이저(李佇) 등 38명에게 내린 훈명(勳名).
♣ 좌발[髽髮]좌발은 복머리로, 상중(喪中)에 부인들이 머리를 묶는 것을 말한다. 촉나라의 제갈량(諸葛亮)이 죽었을 때 촉나라 부인네들이 모두 머리를 묶어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제4권 시일지하마적시(是日至下馬磧詩)에, “하루 아침에 별이 떨어져서, 마침내 촉나라 부인들 좌발하게 하였네[一朝長星落 竟使蜀婦髽].” 하였다.
♣ 좌발문도[坐發門桃]훌륭한 문생(門生)을 내었다는 말. 과거(科擧)의 시관(試官)으로서 인재(人材)를 뽑는 것을 말한다.
♣ 좌보[左輔]경도(京都)의 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 좌보명주[左輔名州]좌보(左輔)는 한(漢) 나라 삼보(三輔)의 하나인 풍익군(馮翊郡)이다.
♣ 좌부[左符]좌부(左符)는 지방관에게 지급하는 어부(魚符)의 좌측 반분(半分)을 말한다.
♣ 좌불수당[坐不垂堂]마루 끝에 앉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앉지 않는다. 위험한 일에 가까이 하지 않음을 뜻한다.
♣ 좌불안석[坐不安席]앉기에 편안한 자리가 아님. 마음에 불안이나 근심 등이 있어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함
♣ 좌사[左史]주(周) 나라 때의 사관(史官)에 좌사와 우사가 있었는바, 사관을 가리킨다. 좌사와 우사(右史)는 각각 언론과 행위의 기록을 맡았었는데, 나중에 기거랑(起居郞)과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바뀌었다.
♣ 좌사[左思]진(晉) 나라 임치(臨淄) 사람으로 자는 태충(太沖)임. 사조(辭藻)가 워낙 뛰어났었다. 박학능문(博學能文)하여 촉도(蜀都)ㆍ오도(吳都)ㆍ위도(魏都)에 대한 삼도부(三都賦)를 지었으며 그의 시에 “山水有淸音"이라는 글귀가 있음. 《 晉書 左思傳》
♣ 좌사군룡세갑병[坐使群龍洗甲兵]두보(杜甫)의 병거행(兵車行)에, “어떻게 하면 장사(壯士)를 시켜 은하수(銀河水)의 물을 당겨 갑옷과 칼날을 깨끗이 씻어 영원히 쓰지 않게 할꼬.” 하였다. 군룡(群龍)은 비를 내리는 용을 말한 것이다.
♣ 좌상객[座上客]후한(後漢)의 공융(孔融)이 후진(後進)들을 잘 이끌어 주었으므로, 한직(閑職)에 물러나 있을 때에도 늘 빈객이 끊이지 않았는데, 공융이 이에 “늘상 좌상객이 집안에 가득하고, 술동이에 술이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내가 걱정할 것이 뭐가 있으랴.[坐上客恒滿 樽中酒不空 吾無憂矣]”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蒙求 下 孔融坐滿》
♣ 좌상춘[座上春]상대방의 덕을 미화하는 말로, 덕이 봄날처럼 온화하다는 뜻이다.
♣ 좌서공[坐書空]진(晉) 나라 은호(殷浩)가 파면되자 온종일 공중에 글자를 쓰고 앉아 있었는데, 누가 엿보니, ‘돌돌괴사(咄咄怪事)’ 넉 자만 자꾸 쓸 뿐이었다.
♣ 좌소[坐嘯]본디는 한가하게 앉아서 퉁소를 분다는 뜻인데, 정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 좌승양대[左丞涼臺]좌승은 중서성(中書省) 벼슬 이름으로 당 나라 때 중서령을 지낸 배도(裵度)를 가리킨다. 배도가 벼슬에서 물러나 낙양(洛陽) 남쪽의 오교(午橋)에 꽃나무 만 그루를 심고서 그 중앙에 여름에 더위를 식힐 누대와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집을 짓고 녹야당(綠野堂)이라 이름을 붙인 뒤에 백거이(白居易)ㆍ유우석(劉禹錫)등 문인들과 모여 시주(詩酒)로 소일하였다. 《新唐書 卷一百七十三 裵度傳》
♣ 좌씨화[左氏禍]좌씨는 국어(國語)와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지은 좌구명(左丘明).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태사공 자서(太史公自序)에 “좌씨는 눈이 멀고는 국어(國語)를 지었다.” 한 말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말한 화(禍)란 곧 봉사가 되는 것을 말한다.
♣ 좌액문[左掖門]궁궐 정문의 왼편에 있는 소문(小門)을 말한다.
♣ 좌어[左魚]좌어부(左魚符)의 약칭으로, 즉 동어부(銅魚符)를 말함. 당서(唐書) 거복지(車服志)에 보임. 말단 관리인 지방관을 가리킨다. 물고기모양으로 된 부계(符契)의 왼쪽인데 당나라 때 어부(魚符)를 두 조각으로 갈라 왼쪽은 부임하는 군수에게 주고 오른쪽은 그 군의 창고에 보관해 두어 군수가 당도하면 왼쪽의 것을 창고의 오른쪽 것과 맞추어보아 진짜 군수임을 증명하는 자료로 삼는다고 한다.
♣ 좌어부[左魚符]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부계(符契)의 좌측 반쪽이라는 뜻으로, 지방 장관이 부임할 때 가지고 가서 임지(任地)에 있는 우측의 반쪽과 맞추어 징험(徵驗)하게 되어 있었다.
♣ 좌우명[座右銘]자리의 오른쪽에 새긴 말. 늘 자리 옆에 두고 반성의 재료로 삼는 격언. 늘 가까이 두거나 맘에 새겨 두고 생활의 경계로 삼는 문구
♣ 좌우이봉원[左右而逢原]맹자(孟子)의 말에, “학문이 깊이 쌓이면 좌로 가나 우로 가나 도(道)의 근원에 합치된다.” 하였다.
♣ 좌유혜경우유확[左有惠卿右有確]혜경은 송(宋) 나라 여혜경(呂惠卿)을 말하고, 확은 곧 채확(蔡確)을 말하는데, 이들은 모두 승상 왕안석에게 아부하여 왕안석의 크고 작은 모사(謀事)에 참여했었다.
♣ 좌은[坐隱]바둑을 좌은(坐隱)이라 하는데, 그것은 앉아서 세상일을 잊는다는 뜻이다.
♣ 좌임[左袵]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관중(管仲)이 아니었으며 나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게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 좌전[左傳]좌전은 편년체 사서이다. 전하기로는 노나라 사관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것이라 하는데, 또한 어떤 이는 전국초 혹은 약간 후대 사람이 편찬한 것이라고도 한다. 서한 사람들은 이를 좌씨춘추(左氏春秋)라 했고, 동한의 반고는 좌씨춘추전(左氏春秋傳)이라 했으며, 후대 사람들은 좌전(左傳)이라 일컬었다.
♣ 좌접래의채[座接萊衣彩]어버이를 위한 수연(壽宴)이 벌어진 것을 가리킨다.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은사(隱士)인 노래자(老萊子)가 70의 나이에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初學記 卷17 引 孝子傳》
♣ 좌정관천[坐井觀天]우물에 앉아서 하늘을 봄. 즉, 식견이 좁은 것 또는 식견이 좁아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뜻함
♣ 좌조우사[左祖右社]도성을 만드는 법에 왼쪽에는 종묘를 두고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두었다.
♣ 좌주[座主]은문(恩門)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때 국자감 시험에 합격한 자가 자기를 과거에 합격시킨 시관(試官)을 일컫는 말로, 평생 문생(門生)의 예를 다하였다.
♣ 좌주수양[左肘垂楊]장자(莊子) 지락(至樂)에 “얼마 뒤 골개숙(滑介叔)의 왼쪽 팔에 버드나무 가지가 나왔다.[俄而柳生其左肘]”는 말이 있는데, 부스럼 혹은 혹이 생겼다는 풀이와 노쇠하여 죽음에 이르는 상서롭지 못한 징조 등으로 풀이하는 등 여러 가지 주석이 있다.
♣ 좌지우지[左之右之]제 마음대로 자유롭게 처리함. 어떤 일이나 사람을 마음대로 지휘함.
♣ 좌참[左驂]왼쪽 말.
♣ 좌척우평[左▣右平]반고(班固)의 서도부(西都賦)에 “左▣右平"이라는 구가 있는데 그 주(注)에 척이란 것은 폐(陛)의 계단이요, 평은 문전(文塼)이 서로 아차(亞次)하게 놓였다는 것이다.” 하였음.
♣ 좌충우돌[左衝右突]왼쪽으로 부딪치고 오른쪽으로 부딪침. 이리저리 마구 치고 받음 또는 분별없이 아무에게나 함부로 맞닥뜨림
♣ 좌태충[左太冲]태충은 진(晉) 나라 시인 좌사(左思)의 자(字). 그는 사부(詞賦)에 능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제도부(齊都賦)와 삼도부(三都賦)가 유명함. 《晉書左思傳》
♣ 좌해주첨상불취[左海籌添桑拂翠]장수(長壽)를 비는 말. 동파노림(東坡老林)에 “세 노인이 서로 만나 나이를 물으니 한 노인이 말하기를 ‘바다가 상전(桑田)으로 변할 때마다 나는 산가지를 하나씩 놓았는데 지금 10개가 된다.’ 하였다.” 한 데서 나온 것이다.
♣ 좌현왕[左賢王]흉노(匈奴)의 귀족(貴族)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로서 항상 태자(太子)나 혹은 선우(單于)의 후계자가 될 사람에게 봉해주는 봉호(封號)이다.
♣ 좌혈관녕상[坐穴管寧床]관녕은 한말(漢末)의 명사(名士)로 그가 요동에 살면서 수십 년을 한 평상에 꿇어앉아 글을 읽어 무릎 닿은 상이 다 뚫어졌다.
♣ 좌화승[坐化僧]승려가 단정히 앉아 열반에 든 것 같은 바위 모습을 가리킨다.
♣ 주[株]괴수(魁首)라는 뜻. 사기(史記) 평준서(平準書)에, “富人 或鬪鷄走狗馬……株送徒”라 하고, 사마정(司馬貞)의 색은(索隱)에, ‘先至者 爲魁株’라 하였음.
♣ 주[株]나무 그루터기
♣ 주[麈]주는 고라니의 꼬리털로서 먼지털이나 지휘봉으로 사용됨.
♣ 주[晝]주는 제 나라 고을 이름으로 지금 산동성임치현(臨淄縣)의 서북쪽에 있다. (晝의 음을 유희(劉熙)의 주에는 ‘획’이라 하였다)
♣ 주가[朱家]주가(朱家)는 한 고조(漢高祖) 때 의협가로 이름난 노현(魯縣) 사람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숨겨 살린 수효가 백여 명에 이르렀지만, 평생에 그것을 전혀 생색내지 않았고, 특히 자신의 생활은 매우 검소했다고 한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쫓겨다니는 계포(季布)를 자기 집에 숨겨주었고 그의 계책으로 계포가 사면을 받아 존귀해진 뒤로는 단 한 번도 그를 만나지 않았다 한다. 《史記 卷一百二十四 朱家傳》
♣ 주가[註家]주해(注解)하는 사람. 여기서는 두시(杜詩)를 주해한 원(元)의 우집(虞集), 명(明)의 양덕주(楊德周), 청(淸)의 장원(張遠) 같은 사람들을 말함.
♣ 주가[朱柯]줄기가 붉은 지초(芝草)를 말한다.
♣ 주가도부도[周家陶復陶]주 문왕(周文王)의 조부(祖父)인 고공단보(古公亶父) 즉 태왕(太王)이 맨 처음 빈(豳) 땅에 살 적에 집도 없어 토굴을 파서 움집을 만들어 살았던 것을 말한다. 《詩經 大雅 綿》
♣ 주가동도[周家東都]현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이다. 주 나라가 호경(鎬京)을 서도(西都)라 하기 때문에 왕성(王城)을 동도라 했는데, 왕성은 바로 낙읍(洛邑)이다. 《詩經 王風 譜疏》
♣ 주각우금한호씨[注脚于今恨胡氏]호씨(胡氏)의 주석이란 곧 송(宋) 나라 호안국(胡安國)의 춘추전(春秋傳)을 말하는데, 호안국의 춘추전에서는 특히 난신적자(亂臣賊子)에 대하여 매우 엄격히 처벌할 것을 강조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곧 그 이론이 당시에 시행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 말이다.
♣ 주객[珠客]연객(淵客), 즉 수중(水中)에 사는 교인(鮫人)이 인가(人家)에 와서 같이 살다가 주인과 헤어질 적에 슬피 울어 구슬 눈물을 흘려서 주인에게 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고기잡이하는 사람들을 비유하기도 한다.
♣ 주객도[主客圖]당시기사(唐詩紀事)에 “장위(張爲)가 시인주객도(詩人主客圖)를 만들었는데 그 서(序)에 “以白居易爲廣大敎化主 孟雲卿爲高古奧逸主 李益爲淸奇雅正主 孟郊爲淸奇僻苦主 鮑溶爲博解宏拔主 武元衡爲瑰奇美麗主 客附以上入室 入室升堂及門若而人焉"이라 하였음.
♣ 주객전도[主客顚倒]주인과 손님이 뒤바뀜. 주인은 손님처럼 손님은 주인처럼 각각 행동을 바꾸어 한다는 것으로 입장이 뒤바뀐 것을 나타냄. 즉, 주가 되는 것과 부차적인 것이 뒤바뀌었다는 뜻으로, 사물의 선후(先後), 완급(緩急), 경중(輕重)이 서로 뒤바뀜, 또는 일의 일반적인 경우가 뒤바뀜을 이름
♣ 주거[邾莒]춘추 시대 때의 두 나라로, 아주 작은 나라를 뜻한다.
♣ 주거양자택[酒車楊子宅]양웅(揚雄)이 현정에서 글을 저술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가끔 술을 싣고 찾아와 기자(奇字)를 물었음.
♣ 주거제로[邾莒齊魯]물고기는 싫다 하고 양고기를 찾는다는 뜻.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성남정각사(城南正覺寺)에 “왕숙(王肅)이 고조(高祖)와 함께 대궐에서의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왕숙이 양고기를 많이 먹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양고기와 물고기 중 어느 것이 맛있는가?’하니, 왕숙이 ‘양을 큰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에 비긴다면 물고기는 작은 주(邾) 나라와 거(莒) 나라에 비길 수 있는데, 저는 양고기를 좋아합니다.’ 했다.” 하였다.
♣ 주검[舟劍]처신이 융통성 없이 고지식한 것을 일컫는다. 옛날에 배를 타고 가다가 칼을 물속에 떨어뜨린 사람이 칼이 떨어진 뱃전에 표시를 해 두고는 배가 정박한 뒤에 칼을 찾으려 했다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고사가 전한다. 《呂氏春秋 察今》
♣ 주경[周京]주 나라 서울.
♣ 주경[酒經]주경은 술 만드는 법과 예로부터 술을 잘 만든 사람 등을 기록한 책으로, 당 나라 때 왕적(王績)이 지었다.
♣ 주경야독[晝耕夜讀]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책을 읽는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 주경유[周景遊]경유는 주세붕(周世鵬)의 자이다.
♣ 주경투암[珠驚投暗]추양(鄒陽)의 글에, “야광주(夜光珠)를 밤에 갑작스레 남의 앞에 던지면 보배인 줄 모르고 놀래어 칼을 뺀다.” 하였다.
♣ 주계군[朱溪君]조선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증손으로 이름은 심원(深源)인데, 성품이 본디 엄정 충직하여 임사홍(任士洪)은 바로 그의 고모부(姑母夫)였으나 그의 간사함을 알고, 성종(成宗)을 면대하여, 사홍은 후일에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사람이니 중용하지 말라고 간곡하게 청하여 그를 귀양보내게 했었다. 이로 인하여 연산군 10년 임사홍이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킬 때 그의 모함을 받아 아들 형제와 함께 피살되었다.
♣ 주고[酒誥]주왕(紂王)에게 물이 들어 술을 좋아하는 은(殷) 나라 백성들을 경계시키기 위해 주(周) 나라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명하여 반포토록 한 글로, 서경(書經) 속에 들어 있다.
♣ 주공몽[周公夢]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지라 내가 꿈에 주공을 보지 못한 지 오래구나.” 하였다.
♣ 주공몽견[周公夢見]공자는 주공처럼 도를 펴고자 하여 비록 시대는 근 천년의 차이가 있었지만, 꿈속에 보고 하여 반려(伴侶)가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공자는 “심하다 나의 쇠함이여, 내가 다시 꿈에 주공을 보지 못한 지 오래다.[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하였다.《論語 述而》 공자가 장년기에는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였으므로 가끔 꿈에 주공을 보았었는데, 이제는 늙어서 뜻도 꿈도 모두 없어졌음을 말한다.
♣ 주공삼태[周公三笞]자식들을 엄하게 교육시킨다는 뜻의 고사성어.
♣ 주공지부[周公之富]논어(論語)에, “계씨(季氏) 노국(魯國)의 권신(權臣)이 주공보다도 부(富)하다.”는 말이 있다.
♣ 주공질유술[周孔迭有術]주역(周易)의 상(象)은 주공(周公)이 짓고, 계사(繫辭)는 공자(孔子)가 지었다고 한다.
♣ 주공하재[周公遐哉]공자가, “전대(前代)의 주공(周公)을 사모하여 간간이 꿈에 보았으나, 만년(晩年)에는 내가 심히 노쇠하여서 다시는 꿈에 주공을 볼 수 없구나.” 하였다.
♣ 주관[周官]주례(周禮)의 별칭
♣ 주관육익[周官六翼]고려(高麗) 말년에 김구용(金九容)이 지은 글의 이름이다. 전리(典理)ㆍ군부(軍簿)ㆍ판도(版圖)ㆍ전법(典法)ㆍ의례(儀禮)ㆍ전공(典工)의 육전(六典)을 기술하였다. 《高麗史》
♣ 주괴리[朱槐里]주운이 괴리 영(槐里令)을 지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주교년[朱喬年]주교년은 주자(朱子)의 아버지. 이름은 송(松), 교년은 그의 자임. 그는 사훈이부랑(司勳吏部郞)을 지냈음. 학자들이 위재 선생(韋齋先生)이라 칭했음. 저서에는 위재집(韋齋集)이 있음.
♣ 주구[誅求]가렴주구(苛斂誅求)의 준말로, 조세 따위를 가혹하게 거두어 들여 백성을 못살게 들볶는 것을 말한다.
♣ 주구[周耈]주 나라의 늙은이란 바로 태공 망(太公望)을 가리킨 것이다.
♣ 주구[珠丘]주구는 왕릉을 가리키는 말로 순(舜) 임금을 창오(蒼梧)에 장사 지냈을 때에 참새와 같은 빙소(憑霄)라는 새들이 입에 청사주(靑砂珠)를 물고 와 떨어뜨려 구슬 언덕[珠丘]을 만들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拾遺記 虞舜》
♣ 주구[州鳩]주구는 주 경왕(周景王)의 악관(樂官) 이름.
♣ 주구무사설[州鳩無射說]주 경왕이 무역종(無射鐘)을 만들면서 악관 주구에게 율려(律呂)에 대하여 물으니, 주구가 대답하기를 “옛날 신고(神瞽)가 중화(中和)의 성음을 합하여 이를 헤아려서 음악을 만들어, 율려의 장단(長短)을 재서[度] 종소리를 화평하게 골라 백관(百官)의 법칙으로 삼고, 삼(三; 천신(天神)ㆍ지기(地祇)ㆍ인귀(人鬼))으로써 회합시키고 육(六; 육률)으로써 균형있게 하였으며 십이율에서 완성하였으니,[紀之以三 平之以六 成於十二] 이것이 곧 천도(天道)이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國語 周語》
♣ 주국[酒國]술에 취한 세계로 취향(醉鄕)과 같다.
♣ 주궁[珠宮]바다에 수신(水神)이 산다는 궁정(宮殿)을 말한다.
♣ 주규[周圭]주 나라 때 옥으로 만든, 해 그림자를 재는 기구이다.
♣ 주금[晝錦]주금은 비단옷을 입고 낮에 다닌다는 뜻으로 출세하여 고향에 돌아옴을 말한다.
♣ 주금용약[鑄金踊躍]금(金)을 주조(鑄造)하려고 풀무에 넣었을 때에 그 안에서 금(金)이 뛰며, “나는 좋은 금이다 한다면 사람이 해괴히 여길 것이다.” 하는 옛말이 있는데, 이것은 제가 재주를 자랑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 주금용약[鑄金踴躍]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지금 훌륭한 대장장이가 쇠(金)를 녹여 틀에 부어 기물(器物)을 만들려 할 때 쇠붙이가 뛰어 나오면서 ‘나는 반드시 막야(鏌鎁)가 될 것이다.’ 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주금혼[注金昏]장자(莊子) 달생(達生)에 “질그릇을 내기로 걸고서 활을 쏘면 잘 맞히고, 은갈고리를 내기로 걸고서 쏘면 마음이 두근거리고, 황금을 내기로 걸고서 쏘면 정신이 혼미하게 된다.” 하였다.
♣ 주기[奏記]문서(文書)를 기록해서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일을 말함.
♣ 주기[酒旗]별 이름.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주관(酒官)의 기(旗)이니, 5성(星)이 와서 지키고 있으면 임금이 온 백성에게 주식(酒食)을 나누어주는 은전이 내린다.” 하였다.
♣ 주기[酒旗]술 파는 집에서는 푸른 깃발을 문 앞에 세워 둔다.
♣ 주기[珠璣]주옥(珠玉)과 같은 시문. 좋은 시문(詩文)이나 그림, 글씨 등을 말한다.
♣ 주낙시찬구[周洛始鑽龜]주 성왕(周成王)이 낙읍(洛邑)으로 천도하기 위하여 주공(周公)에게 명하여 동도(東都)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에 주공이 낙읍을 완성한 다음 낙고(洛誥)를 지어 바쳤는데, 여기에 “나는 간수(澗水)의 동쪽과 전수(瀍水)의 서쪽에 대하여 거북점을 쳤더니 낙읍이 길하다.” 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 주난우[朱蘭嵎]난우는 명(明) 주지번(朱之蕃)의 호. 서화(書畫)에 능하고, 관(官)은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냄. 조선에 사절로 옴.
♣ 주난학저장[舟難壑底藏]배를 구렁에 감추고, 산을 못에 감추면 든든하다 이를 것이다. 그러나 밤중에 힘센 자가 지고 달아난다.《莊子 大宗師》 차마 옥체(玉體)를 묻기 어려움을 뜻한다.
♣ 주남[周南]주남은 낙양(洛陽)을 가리키는데, 한 무제(漢武帝) 초기에 태사공(太史公) 사마담(司馬談)이 낙양에 유체(留滯)하여 봉선(封禪)의 일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데서 온 말로, 즉 지방에 있음을 의미한다. 사기(史記) 태사공 자서(太史公自序)에 “太史公留滯周南 不得與從事”라 하였다.
♣ 주남류체[周南留滯]한 무제(漢武帝)가 태산(泰山)에 봉선(封禪)을 할 적에, 사마천(司馬遷)의 부친인 태사공(太史公) 사마담(司馬談)이 주남(周南)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을 유감으로 여긴 고사가 있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 주남문사[周南文史]태사공(太史公)과 같은 뛰어난 문학과 역사 실력을 말한다. 사마천(司馬遷)의 부친인 태사공 담(談)이 주남 땅에 유체(留滯)되어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고사가 있으며,《史記 太史公自序》 사마천 자신이 부친에 대해 문사(文史)에 뛰어났다고 평한 기록이 또한 전한다.《漢書 司馬遷傳》
♣ 주남체[周南滯]한무제(漢武帝) 때에 사마담(司馬談)이 주남(周南)에 유체(留滯)되어 봉선(封禪)하는 성전(成典)에 참예하지 못하였다.
♣ 주남태사[周南舊史]중국 주남(周南) 지방에 유체(留滯)된 탓으로 황제를 수행하지 못해 끝내는 분기(憤氣)가 치솟아 죽었던 태사공(太史公) 사마담(史馬談)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옛날에 사관(史官)으로 있다가 지금은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는 계곡 자신을 은연 중에 비유하고 있다. 《史記 卷130》
♣ 주남태사공[周南太史公]주남은 낙양(洛陽)의 땅을 말하고, 태사공은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킨다. 사마천의 자서(自序)에 “태사공이 주남에 유체(留滯)했다.” 하였다.
♣ 주노완생[朱老阮生]두보 시에 “梅熟許同朱老喫 松高擬對院生論"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서는 고사를 빌려 주야운(朱野雲)과 완사경(阮賜卿)을 뜻한 것임.
♣ 주담[麈談]승려의 수준이 높아 훌륭한 법문을 펼친다는 말이다.
♣ 주덕송[酒德頌]술을 찬미한 노래로 진(晉) 나라 유영(劉伶)이 지음. 유영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노장학(老莊學)을 숭상했음.
♣ 주덕윤[朱德潤]원(元) 나라 사람으로 시(詩)에 능하였으며, 산수화ㆍ인물화를 잘 그렸다. 《四庫提要 卷一百七十四》
♣ 주도[周圖]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는 공자의 학문을 공부하였다는 뜻.
♣ 주도[奏刀]칼을 쓰다.
♣ 주도기이동[周道旣已東]주 나라의 도가 동으로 갔다는 것은 곧 주 나라가 쇠미해져서 평왕(平王)이 동쪽 낙읍(洛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 주도면밀[周到綿密]마음 씀이나 생각이 두루 미치고 자세하여 빈틈이 없음.
♣ 주도추[朱桃椎]당 나라 때 거사(居士). 그는 천성이 담박하여 산 속 오막살이에 살면서 항상 미투리를 만들어 길가에 놓아두면, 지나는 사람들이 “주 거사의 신이다.” 하고 쌀을 대신 그 자리에 갖다 놓고 신을 가져갔다 한다. 《新唐書 卷一百九十六 朱桃椎傳》
♣ 주독[酒禿]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술독으로 인해 머리털이 다 빠지는 것을 말한다.
♣ 주두[周豆]주두는 주(周) 나라 왕실의 기물(器物)로 대궐의 그릇을 뜻한다.
♣ 주등해[朱登蟹]주등은 한 선제(漢宣帝) 때 동해상(東海相)을 지낸 인물인데, 그가 동해상이 되자 그 지방의 특산물인 게장을 장창(張敞)에게 선물한 일이 있었다.
♣ 주랑[周郞]주랑은 오(吳) 나라 주유(周瑜)를 가리킨다.
♣ 주랑렬거분적벽[周郞列炬焚赤壁]오(吳) 나라의 장수 주유(周瑜)가 화공법(火攻法)으로 조조(曹操)의 전선(戰船)을 적벽강(赤壁江)에서 모조리 태웠다.
♣ 주랑분위[周郞焚葦]삼국시대 오(吳) 나라 장수 주유가 조조(曹操)와 싸울 적에, 전함(戰艦) 수십 척에다 섶[薪]을 가득 싣고 기름을 그 속에 간직한 다음, 조조에게 거짓 항복하겠다고 속이고는 조조의 진영(陣營)에 다가가서 그 섶을 실은 배에다 불을 지르자, 불길이 강풍(强風)을 타고 만연(蔓延)하여 조조의 군마(軍馬)가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죽은 자가 매우 많아, 조조를 대패시킨 일을 말한다. 《三國志 卷五十四 周瑜傳》
♣ 주량[周梁]배로 만든 다리를 말한다. 문왕(文王)이 그의 비(妃) 태사(太姒)를 맞이해 올 때 위수(渭水)에다가 배로 다리를 만들고서 맞이해 왔다. 《詩經 大雅 大明》
♣ 주량[舟梁]시경(詩經) 대명(大明) 편에, “친히 위수(渭水)에 나가 맞이하려고 배를 지어서 다리를 만든다네.” 하였는데, 문왕(文王)이 왕비를 맞이하기 위하여 만든 배다리로서, 친영 또는 혼인을 뜻한다.
♣ 주려[周廬]진한(秦漢) 시대에 황궁의 사방 주위를 호위하기 위하여 설치한 군막(軍幕)이다.
♣ 주력[呪力]기도할 때 주문(呪文)을 외우는 힘
♣ 주력[周曆]주 나라는 38왕(王) 867년 만에 진(秦) 나라에게 망하였다.
♣ 주련[朱輦]주련은 임금의 수레다.
♣ 주련벽합[珠聯璧合]뭇 아름다움이 한데 모인 것을 말한다. “해와 달이 옥을 합치듯 하고 다섯 별이 구슬을 꿰듯 한다.”는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의 글에서 나온 것이다.
♣ 주령[酒令]술을 마실 때에 즐겁게 놀기 위하여 규칙을 만들어서 이를 어기면 벌주(罰酒)를 마시게 한 것을 말한다.
♣ 주례[周禮]주공 단(周公旦)이 찬한 책으로, 모든 관직을 육관(六官)으로 나누고 그에 따른 직장(職掌)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 주로[朱鷺]일명 홍학(紅鶴)이라고 하는 새 이름인데, 즉 이 새의 형상을 그려서 북[鼓]에 장식하고 이로써 곡명(曲名)을 삼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고악부가사(古樂府歌辭)에는 “朱鷺魚以鳥路訾邪鷺何食食茄下不之食不以吐將以問誅者”라 하였는데,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 주류[肘柳]주류(肘柳)라는 말은 늙어서 쇠퇴되었다는 말이다.
♣ 주륜[朱輪]바퀴에 붉은 칠을 한 수레로 한(漢) 나라 때에 2천 석(石) 이상의 관원은 양쪽의 두 바퀴를 모두 붉게 칠한 수레[朱輪]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한서(漢書) 이심전(李尋傳)에 “장군(將軍)의 한 가문에서만 후(侯)와 20대의 주륜을 보유했으니, 한 나라가 일어난 이래로 이렇게 귀했던 신자(臣子)는 일찍이 없었다.” 하였음.
♣ 주륜취개[朱輪翠蓋]붉은 칠을 한 수레바퀴와 아름답게 꾸민 양산으로, 왕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 주륜화불[朱輪華紱]붉은 칠을 바른 수레바퀴와 화려한 인끈으로, 고관의 영화로움을 뜻한다.
♣ 주리[珠履]전국(戰國) 시대에 조(趙) 나라 평원군(平原君)이 초(楚) 나라 춘신군(春申君)에게 객(客)을 보내면서 화려하게 꾸며서 자랑하려고 대모(玳瑁)로 잠(簪)을 만들어 꽂고 칼집을 주옥(珠玉)으로 꾸몄더니 춘신군의 상객(上客)들은 구슬[珠]로 만든 신을 신고 있었으므로 평원군의 객(客)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史記 春申君傳》
♣ 주리삼천객[珠履三千客]주리(珠履)는 구슬로 꾸민 신. 사기(史記) 춘신군전(春申君傳)에 “문객(門客)이 3천 명이었는데 상객(上客)은 모두 구슬로 꾸민 신을 신었다.” 했으므로 호화로운 집의 문객을 말한다.
♣ 주마가편[走馬加鞭]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한다. 잘하는 사람에게 더 잘하도록 질책하는 것을 일컬는 말이다.
♣ 주마간산[走馬看山]말을 달리면서 산을 본다는 말로 바빠서 자세히 보지 못하고 건성으로 지나침을 뜻한다.
♣ 주마등[走馬燈]사물이 덧없이 빨리 돌아간다는 뜻의 고사성어.
♣ 주마백령주[走馬白翎洲]백령은 화살 말미의 깃털인 만큼 활을 쏘아야 할 텐데 말을 치달렸다는 말이다.
♣ 주맹[主孟]진(晉) 나라 대부 이극(里克)의 처인 맹(孟)을 ‘주맹(主孟)’이라고 부른 고사에서 기인하여, 주인의 처를 뜻하는 말로 쓰게 되었다. 《國語 晉語二》
♣ 주명[朱明]여름의 별칭. 여름을 맡은 신(神). 여름은 불[火]에 해당하며 빛깔은 붉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참고로 봄은 청양(靑陽), 가을은 백장(白藏), 겨울은 현영(玄英)이라고 한다.
♣ 주명절[朱明節]하절기를 말한다. 한(漢) 나라 황제가 입하일(立夏日)에 남교(南郊)에서 여름 귀신을 맞이하면서 주명가(朱明歌)를 불렀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 주몽[朱蒙]고구려왕을 말함.
♣ 주무[周武]주무는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풍악이다.
♣ 주무경지주옥[走無脛之珠玉]보통 어진 인재는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어진 이를 사랑하는 사람의 문 앞으로 모여든다는 뜻으로 쓰인다.
♣ 주무릉[周武陵]무릉은 주세붕(周世鵬)의 호이다.
♣ 주무비음우[綢繆備陰雨]왜적이 또다시 침략해 올 것에 대비해서 미리 계책을 세워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빈풍(豳風) 치효편(鴟鴞篇)의 “하늘에서 아직 장맛비가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 놓는다면, 지금 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혹시라도 감히 우리 새들을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此下民 或敢侮予]”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 주무종[珠無踵]좋은 구슬을 발이 없어도 사람들이 가지고 멀리 돌아다닐 수 있다는 뜻이다.
♣ 주묵[朱墨]붉은 먹과 검은 먹으로, 서책에 비점(批點)을 찍거나 혹은 첨삭을 하는 데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실록을 편찬하면서 사초(史草)의 문장을 첨삭하고 다듬는다는 뜻이다.
♣ 주묵[朱墨]주필(朱筆)과 묵필(墨筆)을 가지고 장부를 정리하는 것으로서, 보통 관청의 사무를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 주묵사[朱墨史]송 나라 때 범충(范沖)이 찬한 신종실록(神宗實錄)을 말한다. 처음에 범조우(范祖禹)가 신종실록을 찬수하면서 왕안석(王安石)의 잘못에 대해 극론하였는데, 왕안석의 사위 채변(蔡卞)이 이를 미워해서 신종실록을 중수하여 뜯어고치고는 범조우를 유배 보내어 죽게 하였다. 그 뒤 범조우의 아들인 범충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신종실록을 찬수하면서는 왕안석이 법도를 뜯어고친 잘못과 채경(蔡京)이 나라를 망친 죄를 극론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고이(考異)란 책을 만들어서 거취(去取)를 분명하게 밝혔는데, 구문(舊文)은 묵서(墨書)하고, 삭제한 것은 황서(黃書)하고, 새로 찬수한 글은 주서(朱書)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이를 주묵사라고 한다. 《宋史 卷435 儒林列傳 范沖》
♣ 주묵필[朱墨筆]주묵필은 공문을 처리할 때 쓰는 주필(朱筆)과 묵필(墨筆)을 가리킨다.
♣ 주문[籒文]고대(古代)에 사주(史籒)가 만들어낸 자체(字體)이다.
♣ 주문[朱門]왕공(王公) 귀족의 대문으로, 고관 대작의 집을 말한다. 상고 때에 왕공 귀족은 그 존귀함을 표시하기 위해 대문을 붉게 칠하였다 한다. 영번로(演繁露)에 “후세의 후왕(侯王)과 달관(達官)들이 사는 집은 다 붉게 꾸몄으므로 주문 또는 주저(朱邸)라고 한다.” 했다.
♣ 주문[籒文]종정(鐘鼎) 문자로서 대전(大篆)이라고도 함.
♣ 주문[朱門]주문은 주자(朱子)를 가리킨다.
♣ 주문[朱文]주자(朱子)의 글을 말한다.
♣ 주문객[朱門客]대문을 붉게 칠한 귀족과 부호의 집을 드나들며 친교를 맺는 사람을 말한다.
♣ 주문연[主文硏]문장을 주관하는 문형(文衡), 즉 홍문관 대제학이 쓰는 벼루이다. 이 벼루는 문형이 옥당(玉堂) 과차(科次)에 들어가서 학사(學士)의 글을 시험 보일 때에만 사용하였는데, 문형을 사임할 때에는 이 벼루와 함께 시를 지어 후임자에게 전하는 관례가 있었다.
♣ 주문욱욱[周文郁郁]공자의 말에, “주(周) 나라는 2대[夏商]의 예(禮)를 보고 만들었으니, 욱욱(郁郁)히 문채롭다.” 하였다.
♣ 주미[麈尾]고라니의 꼬리털로 만든 먼지떨이. 육조(六朝) 시대에 명사들이 청담(淸談)을 나눌 적에는 주미를 손에 들고 휘두르며 이야기를 하였다 한다.
♣ 주미[酒謎]술에 대한 은어(隱語).
♣ 주미[麈尾]주미는 고라니 꼬리로 만든 불자(拂子)로, 위진(魏晉) 시대 때 청담을 즐기던 사람들이 많이 가지고 다녔으며, 나중에는 선종(禪宗)의 승려들도 애용하였다.
♣ 주방[肘方]주방(肘方)은 시해(尸解)의 현상을 보이며 신선이 되어 떠났다는 진(晉) 나라 갈홍(葛洪)이 지은 의서(醫書) 주후요급방(肘後要急方)의 준말로, 선방(仙方) 혹은 선도(仙道)를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晉書 卷72 葛洪傳》
♣ 주번[朱轓]중국 고대에는 군수(郡守)가 수레에 붉은 깃발을 달았던 것이다.
♣ 주보언[主父偃]한 무제(漢武帝) 때 제국(齊國) 사람.[暮召偃]
♣ 주복[疇福]홍범구주(洪範九疇)에 나오는 다섯 가지 복, 즉 오래 사는 것[壽], 부유함[富], 안락함[康寧], 미덕을 닦는 것[攸好德], 늙어서 죽는 것[考終命]을 말한다.
♣ 주복문자[拄腹文字]소식(蘇軾)의 시원전다시(試院煎茶詩)에 “창자와 배를 채울 만한 문자 오천권은 필요없고 항상 충분히 자고 해 높이 올랐을 때 차 한잔만을 바라노라[不用撑腸拄腹文字五千卷 但願一甌常及睡足日高時]”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주부공[主簿公]자는 요수(堯叟), 정지상(丁志尙)의 아들로 음직으로 벼슬하여 예산 현감(禮山縣監)까지 지냈다.
♣ 주부단참군장[主簿短參軍長]주부와 참군은 진(晉) 나라의 왕순(王珣)과 치초(郗超)를 가리킨다. 왕순이 주부(主簿)가 되고 치초가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는데, 왕순은 키가 작고 치초는 수염이 길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수염이 긴 치초와 키가 작은 왕순은 능히 영공(令公)을 기쁘게도 하고 노하게도 한다.” 하였다. 《世說新語》
♣ 주불도유령분상토[酒不到劉伶墳上土]술을 매우 좋아한 유영(劉伶)이었지만 한번 죽은 후에는 술을 마실 수 없다는 뜻이다. 유영은 완적(阮籍)ㆍ혜강(嵇康)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였는데, 진(晉) 나라 사람으로 술을 좋아하여 항시 술병을 휴대하고 다녔으며, 사람을 시켜 삽을 메고 따라다니게 하면서 “내가 죽으면 묻어달라.” 하였다. 《晉書 卷四十九 劉伶傳》
♣ 주불차전[籌不借前]당 현종(唐玄宗) 때의 재상 송경(宋璟)의 경륜이 장량(張良) 보다 훌륭하다는 뜻이다. 젓가락을 빌린다는 말은 한 고조(漢高祖)의 밥상에 놓인 젓가락을 빌려서 일의 가부를 주결(籌決)하겠다던 장량(張良)에게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四十 張良傳》
♣ 주사[主司]장시관(掌試官)을 가리킨다.
♣ 주사[柱史]주사(柱史)는 주하사(柱下史)의 약칭으로 즉 주하사 벼슬을 지낸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 주사단조[柱史丹竈]주사는 주하사(柱下史)라는 벼슬 이름의 약칭으로 도교(道敎)의 원조(元祖)인 노자(老子)를 가리킨 말이고, 연단(鍊丹)은 도교에서 말하는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인 단약(丹藥)을 굽는 것을 말하는데, 노자가 청우(靑牛)를 타고 파촉(巴蜀)에 가서 단약을 구웠다 한다.
♣ 주사소단조[柱史燒丹竈]주사는 주하사(柱下史)의 약칭으로 이 벼슬을 한 도교(道敎)의 원조(元祖)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연단(煉丹)은 도교에서 말하는 장생 불사약(長生不死藥)인 단약(丹藥)을 굽는 것을 말하는데, 노자는 청우(靑牛)를 타고 파촉(巴蜀)에 이르러 단약을 구웠다 한다.
♣ 주사예[周史裔]주사의 후예. 춘추시대 때 주(周)나라 장서실(藏書室)사관(史官)을 지낸 노자(老子)의 후예인 이응(李膺)을 가리킨다.
♣ 주사직[朱絲直]아첨함이 없이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남조 송(宋) 포조(鮑照)의 ‘백두음(白頭吟)’에 “곧기는 붉은 가야금 줄과 같고, 맑기는 옥호의 얼음 같아라.[直如朱絲繩 淸如玉壺氷]”라는 표현에서 나온 것이다. 《文選 卷28》
♣ 주산자해[鑄山煮海]소식(蘇軾)의 ‘표충관비(表忠觀碑)’에 “산에서 채굴한 광석을 녹여 동을 만들고, 바다의 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등, …… 자원이 풍부하기가 천하에 으뜸이었다.[鑄山煮海 …… 甲於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 주산지측[周山之側]시전(詩傳)에 “우르릉 저 천둥 소리가 남산 옆에서 나네.[殷其雷 在南山之側]”하는 시가 있다. 이 시는 출정한 남편이 고생함을 민망히 여겨 어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여인의 노래이나, 구설(舊說)은 뭇 선비들이 주문왕(周文王)의 어진 정사를 천둥에 비겨 주(周) 나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시로 해석한다.
♣ 주생[周生]주생은 당(唐)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도술(道術)이 있어 ‘구름을 타고 달을 취했다.[梯雲取月]’는 전설이 있으므로 한 말이다.
♣ 주서초모[誅鋤草茅]띠풀을 호미질하여 없애다.
♣ 주선왕[周宣王]주(周) 나라를 중흥한 왕으로 노(魯) 나라의 난리를 평정하였다.
♣ 주성[酒聖]술 가운데 성인(聖人)으로, 맑은 술[淸酒]을 말한다. 탁주(濁酒)는 현인(賢人)이라 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서막전(徐邈傳)에, “평소에 술에 취한 사람이 술 가운데 맑은 것을 일러 성인이라고 하고, 탁한 것을 일러 현인(賢人)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 주성[酒星]술을 맡았다는 별, 곧 주기성(酒旗星)을 가리킨다.
♣ 주성강[周成康]주나라의 성왕(成王)과 그 아들 강왕(康王)은 선대에서 받은 왕업을 잘 계승하여 천하의 태평을 이룩하니 형벌을 쓸 일이 없어서 옥(獄)이 40년이나 비어 있었다.
♣ 주성치백[周成褫魄]주성왕(周成王) 때에 큰 바람이 불고 폭우(暴雨)가 쏟아지고 우레가 쳐서 큰 나무가 뿌리 채 뽑아지고 들에 벼가 모두 쓰러지니, 성왕이 놀래어 쫓겨 나가 있던 주공(周公)을 도로 맞아 들였다 한다.
♣ 주송[朱松]주희(朱熹)의 부친.
♣ 주송남양[主送南陽]주는 남편이고 남양은 남양천(南陽阡)으로 무덤을 말함.
♣ 주송심[周宋鐔]제왕의 칼, 즉 상방검(尙方劍)을 가리킨다. 천자의 칼로 말하면, 칼날과 손잡이 사이의 공간을 주 나라와 송 나라로 삼는다.[天子之劍 周宋爲鐔]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莊子 說劍》
♣ 주수[晝繡]주금(晝錦)과 같은 뜻으로, 출세하여 고향에 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주수명송[周受命頌]주(周) 나라의 수명송(受命頌). 당 고종(唐高宗)의 후비(后妃)인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예종(睿宗)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주(周)라 참칭했는데, 이때 진자앙(陳子昻)이 주 나라가 천명(天命)을 받았다는 내용과 송(頌)을 지었음.
♣ 주수수구[走獸首丘]회남자(淮南子) 설림(說林)에 “새는 날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토끼는 뛰어 굴로 돌아가며, 여우는 죽을 때 언덕으로 머리 둔다[狐死首丘].” 하였다. 본래 고향을 지향하는 뜻이나, 여기서는 그저 ‘죽다’의 뜻이다.
♣ 주숙진[朱淑眞]송(宋) 나라 때의 여류 시인으로서 학식이 뛰어났으나, 불행히 시정(市井)의 민가(民家)에 시집을 가서 뜻을 얻지 못해 우울함 속에서 특히 우원(憂怨)의 시를 많이 읊었다 한다.
♣ 주승[朱勝]승(勝)은 수식(首飾)인데 맨드라미꽃이 붉으므로 한 말임.
♣ 주시[周詩]시경(詩經) 대아(大雅) 숭고(崧高)를 말한다.
♣ 주시응적[周詩膺狄]시경(詩經) 노송(魯頌)의 비궁(閟宮)을 가리킨다. 비궁은 천자가 군대를 출동하여 융적을 정벌하는 것을 읊은 시로, 그 시에 “융적을 이에 막으며, 형서를 이에 징계하도다.[戎狄是膺 荊舒是懲]”하였다.
♣ 주시풍아[周詩風雅]주시는 시경(詩經)이며, 풍은 국풍(國風)이고, 아는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를 말한다.
♣ 주신재[周愼齋]신재는 주세붕(周世鵬)의 호(號)이다.
♣ 주실[朱實]신목(神木)에 열린다는 붉은 색 열매.
♣ 주아[周雅]주공(周公)이 대아(大雅)를 지어 선왕(先王)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 주안[鑄顔]양자(揚子) 법언(法言) 학행(學行)에 “人可鑄歟 曰孔子鑄顔淵矣"라 하였음.
♣ 주안[奏案]주안은 상주문(上奏文)을 올려놓는 궤(几)를 이른다.
♣ 주애[朱崖]주애는 애주(崖州)의 고친 이름이다. 선종(宣宗) 즉위 후 이덕유(李德裕)가 참소를 받아 애주사호참군사(崖州司戶參軍事)로 폄척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 주애수결신[朱崖受玦辰]당(唐) 나라의 명장이며 명재상인 이덕유(李德裕)가 참소를 받고 애주 사호참군사(崖州司戶參軍事)로 폄적(貶謫)되어 가서 죽은 고사가 있다.《新唐書 李德裕傳》 주애는 이덕유의 별칭이다.
♣ 주야장천[晝夜長川]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 시냇물과 같이 늘 잇따름.
♣ 주언륜[周彦綸]언륜(彦綸)은 언륜(彦倫)으로, 육조(六朝) 때 송(宋) 나라 사람인 주옹(周顒)의 자이다. 주옹이 북산(北山)에 은거하다가 벼슬길에 나서자 공치규(孔穉圭)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북산이문(北山移文)이란 글을 지어 다시는 북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 주여[朱呂]절친했던 송유(宋儒)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을 말한다. 둘이 한천정사(寒泉精舍)에 모여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정자(程子) 형제의 글을 보며 근사록(近思錄)을 엮었다는 고사가 있다.
♣ 주여장천[晝夜長川]밤낮으로 쉬지 않고 늘 잇달음
♣ 주연[胄筵]왕세자(王世子)가 공부하는 서연(書筵)의 이칭.
♣ 주염계[周濂溪]염계는 송(宋) 나라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의 호.
♣ 주옥[珠玉]주옥은 남의 시문(詩文)을 높여 일컫는 말이다.
♣ 주옥기무경[珠玉豈無脛]시문(詩文) 등이 일시(一時)를 풍미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 발[足]이 없이도 잘 유행한다는 뜻이다. 열자(列子)에 “주(珠)는 다리가 없어도 다니고, 옥(玉)은 날개가 없어도 난다.” 하였다.
♣ 주옹주금유[朱翁晝錦遊]주옹은 한(漢) 나라 주매신(朱買臣)의 자(字)가 옹자(翁子)였으므로 그를 가리키며, 주금(晝錦)은 비단옷을 입고 낮에 다닌다는 뜻으로 출세하여 고향에 돌아옴을 말한다. 매신은 집이 무척 가난했으나 책 읽기를 좋아했었는데 뒤에 엄조(嚴助)의 추천으로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무제(武帝)는 그를 그의 고향인 회계 태수(會稽太守)에 임명하고는 “부귀하고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 옷을 입고 밤에 다니는 것과 같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옛말을 인용한 데서 나온 것이다. 《漢書 朱買臣傳》
♣ 주왕[周王]팔준마(八駿馬)를 타고 천하를 유력했던 주 목왕(周穆王)을 말한다.
♣ 주왕부결[周王俯結]주 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각각 전쟁을 하던 중 대님이 풀렸을 때에 모두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자신이 친히 몸을 구부리고 대님을 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주왕수[周王不復狩]주왕(周王)은 주(周) 나라 문왕(文王)을 말한다. 문왕은 사냥을 나가는데 점을 쳐보니 “짐승을 얻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보필(輔弼)을 얻는다.” 하였다. 이때 강 태공(姜太公)은 나이가 80이 넘어 위수(渭水)에서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마침내 만나 스승으로 삼고 통일 천하의 꿈을 이룩하였다. 《史記 卷四 周本紀, 卷三十二 太公世家》
♣ 주왕연호[周王宴鎬]호(鎬)는 주(周) 나라의 서울이다. 주 나라 선왕(宣王) 때에 흉노(匈奴)족을 정벌하여 성공하고 돌아온 장병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 주왕팔준구[周王八駿驅]팔준마는 춘추 시대 주목왕(周穆王)이 타던 여덟 필의 준마. 주 목왕이 이 팔준마를 어거하고 서쪽으로 순수(巡狩)하여 곤륜산(崑崙山)에 올라가 선녀(仙女)인 서왕모(西王母)를 보고는 즐거워서 돌아갈 것을 잊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五 秦本紀注》
♣ 주우[周牛]전쟁이 그쳐서 방목하는 소를 말한다.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상(尙) 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와 군마(軍馬)를 화산(華山)의 남쪽으로 돌려보내고 소를 도림(桃林)의 들판에 방목하였다. 《書經 武成》
♣ 주운[朱雲]한 성제(漢成帝) 때의 직신(直臣). 그가 한 성제에게 아첨한 장우(張禹)의 머리를 잘라야만 백성이 편히 살 수 있다고 하자, 성제가 어사(御史)에게 주운을 끌어내어 하옥(下獄)시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그가 마루 난간을 부여잡고 버티며 간하다 그만 난간이 부러지기까지 했는데 성제가 그 부러진 난간을 그대로 보수하여 직신의 자취를 남겨 두었다 한다. 《漢書 朱雲傳》
♣ 주운선[酒運船]상(商) 나라 주왕이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걸어서 숲을 만들어 놓고는 밤새도록 잔치를 벌이면서 즐겼으며, 이를 비방하는 자에 대해서는 구리 기둥에다 기름을 바르고 이를 숯불로 달군 다음 거기를 기어올라가게 하고는 달기와 함께 이를 보면서 즐겼다고 한다. 《史略 卷一 殷成湯》
♣ 주운참녕[朱雲斬佞]한(漢) 나라 성제(成帝) 때 주운이 괴리 영(槐里令)이 되었는데, 상방검(尙方劍)을 빌려 주어 간사한 자인 장우(張禹)의 목을 칠 수 있게 해 달라고 상서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노하여 주운을 끌어내리게 하니, 주운이 어전의 난간을 잡고 버티어 난간이 부러지고 말았다. 《漢書 卷67 朱雲傳》
♣ 주위[周衛]주밀(周密)하게 숙위(宿衛)하는 곳으로, 즉 한림(翰林) 등 시종신(侍從臣)을 의미한다.
♣ 주유[珠襦]옛날 제왕과 후비(后妃)가 입었던 염복(殮服)이다.
♣ 주유[朱鮪]주유는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 사람.
♣ 주유[珠襦匣]주유는 황금실로 구슬을 꿰어서 만든 단의(短衣)를 말하는데, 한(漢) 나라 때 황제 및 제후왕의 장례(葬禮)에 쓰이던 물품이다.
♣ 주유하호맹가기[酒有何好孟嘉嗜]진(晉) 나라 맹가(孟嘉)가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이 되었을 때, 어찌 그리 술을 좋아하는지 환온이 묻자, 대답하기를 “공이 술 속에 담긴 멋을 아직 몰라서 그런 것일 따름이다.”고 하였다 한다. 《晉書 卷98 孟嘉傳》
♣ 주읍동향[朱邑桐鄕]주읍이 동향의 향관(鄕官)인 색부(嗇夫)로 재직하면서 은혜를 많이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공경하였는데, 동향에 묻어 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곳에 장사를 지내자, 백성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향(祭享)을 올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傳》
♣ 주의목언[周疑木偃]무왕(武王)이 죽은 뒤에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숙부인 주공(周公)이 섭정하였는데, 성왕을 위시한 주위 사람들이 주공이 혹시 왕위를 탐내고 있지 않나 의심하자 가을에 폭풍이 불어 다 익은 곡식과 거목들이 쓰러졌다 한다. 《書經 金縢》
♣ 주의투약[朱衣投藥]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어머니 진씨(陳氏)가 막 임신하였을 때 꿈 속에서 붉은 옷을 입은 신인(神人)이 나타나 약 한 알을 주자 이를 삼키고서 꿈을 깼는데, 깬 뒤에도 입 속에는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태어날 때 붉은 광채가 온 방 안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明史 卷一 本紀一太祖一》
♣ 주이불비[周而不比]두루 포용하고 편당하지 않는다.
♣ 주이존[朱彝尊]청대의 시문가. 자는 석창(錫鬯), 호는 죽타(竹坨). 당시 문단을 대표하였다.
♣ 주이학[舟移壑]임금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비유한 것이다.
♣ 주익공[周益公]송(宋) 나라 학자 주필대(周必大)를 말함.
♣ 주인옹[主人翁]사람의 몸을 총지휘하는 주인 어른이라는 뜻이다.
♣ 주인옹[主人翁]주인옹은 주인공과 같은 말이다.
♣ 주일삼접[晝日三接]하루에 3번이나 접견할 정도로 임금의 극진한 총애를 받는 것을 표현한 말로, 주역(周易) 진괘(晉卦) 단사(彖辭)에 나온다.
♣ 주자[冑子]옛날에는 천자(天子)ㆍ경(卿)ㆍ대부(大夫)의 적자(適子)를 다 주자(冑子)라 했는데, 뒤에는 국자학생(國子學生)의 범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 주자[朱紫]주는 정색(正色)으로 정(正)을, 자는 간색(間色)으로 사(邪)를 표현한다. 맹자(孟子) 진심 하(盡心下)에 “자가 주를 혼동시키는 것을 미워한다.” 하였다.
♣ 주자[冑子]주자는 맏아들을 말한다.
♣ 주작[朱雀]육조(六朝)의 도성인 건강(建康)의 남쪽 성문 이름으로, 도성을 가리킨다.
♣ 주작[朱雀]주작은 남방에 있는 일곱 별로서 여름에 해당하는데, 여름은 불 기운이 성하고 또 불은 붉은 것이다.
♣ 주작항[朱雀桁]도성의 화려한 저택을 말한다. 주작항은 동진(東晉)의 도성 건강(建康)의 남쪽 성문인 주작문(朱雀門) 밖의 부교(浮橋)를 말하는데, 이 근처에 왕도(王導)와 사안(謝安) 등 호귀(豪貴)한 이들의 저택이 많았다.
♣ 주잠[州箴]한(漢) 나라 때 양웅(楊雄)이 중국 구주(九州) 지방의 특성을 술(述)하여 각각 잠(箴)을 지었다.
♣ 주잠원출초현양[酒箴元出草玄揚]양웅(揚雄)이 지은 주잠(酒箴)의 내용이 한서(漢書) 권93 진준전(陳遵傳)에 나오는데,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도 “忽然載酒從陋巷 爲愛揚雄作酒箴”이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20 陳季常自岐亭見訪 …… 戲作陳孟公之詩》
♣ 주장산[晝長山]주장산은 남한산(南漢山)의 고호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백제를 내쫓고 이곳에 맨 처음 산성(山城)을 쌓았던 것이다.
♣ 주장함하양잠려[珠藏頷下養潛驪]숨어서 덕을 닦으며 때를 기다림을 비유한 말. 흑룡(黑龍)은 턱 밑에 여의주(如意珠)를 기른다 한다.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에 “천금의 여의주는 반드시 깊은 못 긴 여룡(驪龍)의 턱 밑에 있다.” 하였다.
♣ 주저[躊躇]머뭇대며 떠나지 않는 모양.
♣ 주저[洲渚]물섬가.
♣ 주저[朱邸]주문(朱門)과 같다. 대문을 붉게 칠한 집으로, 황족이나 귀관(貴官)의 저택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때 그 집의 대문을 주홍색으로 칠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 주전[廚傳]음식(飮食)과 역사(驛舍)를 이르는데, 한 선제(漢宣帝) 원강(元康) 2년의 조서(詔書)에 “간혹 지방 관리가 제멋대로 요역(繇役)을 일으켜 주전을 잘 꾸며서 과객(過客)들을 후히 대접하고 있는데, 이것은 직무를 초월하고 국법을 벗어나서 명예를 취하는 일이다.”고 경계한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八》
♣ 주전경명[周典冏命]경명(冏命)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으로, 주(周) 나라 목왕(穆王)이 백경(伯冏)을 태복정(太僕正)에 임명하면서 내린 조서(詔書)이다.
♣ 주전학[州錢鶴]양(梁) 나라 은운(殷芸)이 지은 소설에 나온 이야기로, 함께 어울려 노는 자들이 각자 소원을 말하기로 했는데, 한 사람은 양주(揚州) 자사가 되고 싶다 하고, 한 사람은 돈이 많으면 좋겠다 하고, 한 사람은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 “나는 허리에 돈 10만 냥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로 가고 싶다.” 하였다 함. 인간 욕심의 지나침과 그것을 다 채울 수는 없음을 뜻한다.
♣ 주접[周蝶]옛날에 장주(莊周)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자신이 장주인 줄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깨어나니 바로 장주였다. 이에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호접이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莊子 齊物論》
♣ 주접접위주[周蝶蝶爲周]옛날에 장주(莊周)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자신이 장주인 줄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깨어나니 바로 장주였다. 이에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 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莊子 齊物論》
♣ 주정[周程]송(宋)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ㆍ정이(程頤).
♣ 주정[主靜]육구연(陸九淵) 자정(子靜)의 주정설을 말함.
♣ 주정[周鼎]전국(傳國)의 상징인 구정(九鼎). 우(禹)가 수토(水土)를 평정한 후 구주(九州)에서 바쳐 온 쇠붙이를 한 데 모아 주조한 하나의 큰 솥으로 삼대(三代)시절 그것을 전국의 보물로 삼았었는데, 무왕(武王)이 상(商)나라와 싸워 이긴 후 그 솥을 낙읍(洛邑)으로 옮겨 왔기 때문에 주 나라 솥[周鼎]이 된 것임. 《左傳 桓公 二年》
♣ 주정공사[周情孔思]주공(周公)의 뜻과 공자(孔子)의 사상이란 말로, 성현의 고상한 정조(情操)를 뜻한다.
♣ 주정상물[鑄鼎象物]고대(古代)의 하우씨(夏禹氏)가 구주(九州)의 금붙이를 수합하여 구정(九鼎)을 만들고서 거기에다 온갖 물건을 상징한 것을 이름. 좌전(左傳) 선공(宣公) 3년 조(條)에, “夏禹之方有德也 鑄鼎 象百物而爲之備 使民知神姦”이라 하였음.
♣ 주제[主第]공주의 저택. 보통 왕가(王家)의 귀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 주제[朱提]질이 좋은 은(銀)의 이명(異名). 좋은 은이 주제현(朱提縣)에서 나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주조[朱鳥]남방(南方)을 맡은 신인 적제(赤帝)를 말한다.
♣ 주조[鴸鳥]새 이름. 솔개처럼 생긴 새로 얼굴이 사람 모양이고 발도 사람 손같이 생겼다고 함. 《山海經 南山經》
♣ 주조[朱鳥]이십팔 수(二十八宿) 가운데 남방(南方)의 일곱 별. 즉 정(井)ㆍ귀(鬼)ㆍ유(柳)ㆍ성(星)ㆍ장(張)ㆍ익(翼)ㆍ진(軫)의 총칭으로 남방을 지키는 신(神)이다. 일명 주작(朱雀).
♣ 주졸지[走卒知]소동파(蘇東坡)가 사마광(司馬光)을 두고 지은 시에, “심부름하는 군사도 사마(司馬)를 알고, 아동들도 군실(君實 광의 자)을 외운다.” 하였다.
♣ 주주[朱朱]닭을 부르는 소리, 또는 닭의 별명. 풍속통(風俗通)에 “닭을 부를 때 주주하는데, 속설(俗說)에 ‘옛날 주공(朱公)이란 사람이 변하여 닭이 되었기 때문에 주주하고 부른다.’ 한다.” 하였다.
♣ 주주[姝姝]아름다움, 순순히 뒤따르는 모양, 유약한 모양
♣ 주주함우[周周銜羽]주주(周周)는 새의 이름인데, 이 새는 머리가 무겁기 때문에 하수(河水)에서 물을 마시려면 반드시 넘어지므로, 언제나 깃을 입에 물고 물을 마신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주죽타[朱竹垞]죽타는 청초(淸初)의 학자 주이준(朱彝尊)의 호. 경사(經史)를 널리 읽어 통하였고 고문(古文)과 시사(詩詞)에 능하여, 신성(新城)의 왕사진(王士禛)과 함께 남북(南北)의 두 대가(大家)로 칭해졌다. 저서로는 폭서정집(曝書亭集)ㆍ경의고(經義考)ㆍ사종(詞宗) 등이 있다. 《淸史稿 卷四百八十九》
♣ 주준[廚俊]팔주(八廚)와 팔준(八俊)으로 후한 때의 명사들을 말한다. 걸출하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을 가리킴.
♣ 주중선[酒中仙]주성(酒聖)으로 일컬어지는 이태백(李太白)을 가리킨다.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여양(汝陽王 李璡)은 서 말 술 마시고야 조정에 나갔는데 주천현령에 옮겨지지 않은 걸 한하였네 종지(崔宗之)는 소쇄한 기상에 아름다운 소년인데 술잔 들고 백안으로 푸른 하늘 바라보았지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백편을 쓰면서 장안의 시장 술집에서 잠을 자기도 하는데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못하고 신은 바로 술 가운데 신선이라 자칭을 하네[汝陽三斗始朝天 恨不移封向酒泉 宗之瀟灑美少年 擧觴白眼望靑天 李白一斗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集 卷二》
♣ 주중인지개적[舟中人之皆敵]사기(史記) 제65권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무후(武侯)가 서하(西河)에서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중간에서 오기(吳起)를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아름답구나, 산하의 튼튼함이여. 이는 우리 위(魏) 나라의 보배이다.’ 하니, 오기가 대답하기를, ‘나라가 튼튼한 것은 덕(德)에 있지 험함에 있지 않습니다. 임금께서 만약 덕을 닦지 않는다면 이 배 안에 탄 사람이 모두 적국 사람일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 주즙[舟楫]주즙은 배와 노로서 세상을 건지는 재상과 대신을 비유한 것임. 서경(書經) 열명 상(說命上)에 “큰 냇물을 건널 때는 너로써 주즙을 삼겠다.[若濟巨川 用汝作舟楫]" 하였음.
♣ 주즙재[舟楫才]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삼으면, “큰 내를 건넌다면 너로써 배와 돛대를 삼으리라.” 하였다.
♣ 주지육림[酒池肉林]술로 못[池)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주연(酒宴)을 일컫는 고사성어, 걸왕, 주왕에서 유래.
♣ 주진[주盡]다 지나가다.
♣ 주진[朱陳]옛날 중국 서주(徐州)의 주진촌에는 주씨와 진씨만이 살면서 대대로 통혼(通婚)을 하며 서로 의좋게 살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주진가취[朱陳嫁娶]옛날 서주(徐州)의 주진촌(朱陳村)에는 주씨와 진씨(陳氏)만이 살면서 대대로 자기들끼리 혼인을 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 주진지호[朱陳之好]주씨(朱氏)와 진씨(陳氏) 두 성만 살아서 마을 이름이 되었는데, 이들은 대대로 서로 혼인했다 한다. 한편 무릉도원에도 진씨와 주씨 두 성이 피난 가서 살았다고 하는데, 두 집안의 연인(聯姻)의 정분을 주진지호(朱陳之好)라 한다.
♣ 주진촌[朱陳村]주씨 진씨는 당 나라 때 서주(徐州) 풍현(豐縣)의 한 마을에 대대로 통혼(通婚)을 하며 함께 살았던 두 종족으로, 그들이 사는 마을을 주진촌(朱陳村)이라 하였다. 《長慶集 卷十 朱陳村》
♣ 주진풍물[朱陳風物]당 나라 백락천(白樂天)이 주진촌(朱陳村)을 두고 지은 시(詩)가 있는데, ‘깊숙한 산중에서 세상과 통하지 않고 안락하게 살아가는 마을이 있는데, 그 촌에는 주씨(朱氏)와 진씨(陳氏) 두 성만이 살고 있어 대대로 서로 혼인하고 살아간다.’ 하였다.
♣ 주진혼[朱陳婚]두 성씨가 계속해서 혼인하는 것. 중국 강소성(江蘇省) 풍현(豐縣) 동남쪽에 주진(朱陳)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은 주(朱)와 진(陳) 두 성만이 살고 있으면서 계속 자기들끼리만 혼인을 하였다고 함.
♣ 주착[鑄錯]착오를 저지름.
♣ 주창[周昌]한 고조의 공신으로 고조가 태자를 폐하지 못하게 어사대부(御史大夫)로서 간쟁하였다.
♣ 주처[周妻]주처는 남제(南齊) 때 노(老)ㆍ불(佛)의 학문에 밝았던 고사(高士) 주옹(周顒)의 아내를 가리킨다. 주옹은 자신이 도교와 불교를 좋아하였지만 끝내 아내를 거느리고 살았다는 뜻이다.
♣ 주천[酒泉]주천은 샘물 맛이 술맛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漢) 나라 때 그 샘이 있는 고을을 주천군(酒泉郡)이라 하였음. 《漢書 地理志 下》
♣ 주천[朱川]주천은 시내 이름이다.
♣ 주천리[珠千履]전국시대 때 춘신군(春申君)의 문객들 중에 상객(上客)들은 모두 구슬로 장식한 신을 신었다.
♣ 주천초산수[周遷▣山隧]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아버지 왕계(王季)의 무덤을 옮긴 것을 말한다. 와수(渦水) 가에 있던 왕계의 무덤이 홍수로 인해 관(棺) 머리가 보이자, 신하와 백성들을 보고 싶어하는 뜻이라고 여겨 문왕이 옮겨왔던 고사를 말한다. 《呂氏春秋 卷21 開春》
♣ 주체[湊砌]주체의 주는 취(聚)의 뜻이고 체는 첩(疊)의 뜻으로 첩첩이 모인 것을 이름.
♣ 주초[朱草]곧 지초(芝草)인데, 그것을 영초(靈草)ㆍ서초(瑞草)라고도 한다.
♣ 주초[朱艸]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상서로운 풀.
♣ 주초[朱草]서초(瑞草)의 이름인데, 마치 명협(蓂莢)과 같이 매월 초하루부터 15일까지는 매일 한 잎씩 나오고, 16일부터 그믐까지는 매일 한 잎씩 떨어졌다고 한다.
♣ 주초림[朱艸林]나양봉을 말함.
♣ 주촉[晝燭]대낮에 촛불을 켜도 그 불빛이 희미하듯 인생의 의미가 전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 주충어[註蟲魚]미세한 동식물의 주해(註解)를 낸다는 뜻으로 번쇄(繁琑)한 훈고(訓詁)의 작업을 가리킨다. 참고로 한유(韓愈)의 시 ‘독황보식공안원지시서기후(讀皇甫湜公安園池詩書其後)’에 “爾雅注蟲魚 定非磊落人”이라는 표현이 있다.
♣ 주충어[註蟲魚]벌레 이름이나 새 이름 같은 자잘구레한 것을 주석한다는 뜻이다. 본디 이아(爾雅)에서 충어에 대하여 주석한 것을 이른 말인데, 전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고증하는 일을 비유한 것이다.
♣ 주취[珠翠]구슬과 비취(翡翠). 이것은 모두 여인(女人)의 발식(髮飾)에 쓰이는 것이기 때문에 전하여 여인의 머리 꾸미개를 말하는데, 여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 주취유[珠翠襦]비취옥으로 장식한 단의(短衣)를 말한다.
♣ 주타[珠唾]아름다운 시구(詩句) 등을 형용한 말이다. 진서(晋書)에, “기침과 침은 주옥(珠玉)을 이룬다.”는 말이 있다. 말이나 글이 입만 떼면 아름다운 주옥이 된다는 뜻이다.
♣ 주태[珠胎]합중(蛤中)에 들어 있는 진주를 가리킨 말로, 전하여 임신(妊娠)의 뜻으로 쓰인다.
♣ 주태사[周太史]천문(天文)을 맡은 태사관(太史官)이 역서(曆書)를 만들어 올려서 백성에게 시절을 알리게 한다.
♣ 주태상[周太常]후한(後漢) 사람 주택(周澤)으로 태상은 벼슬이다.
♣ 주택[周澤]후한(後漢) 사람. 어려서 공양춘추(公羊春秋)와 엄씨춘추(嚴氏春秋)를 익혔다. 벼슬이 태상(太常)이 되자 직언(直言)을 잘하고 종묘(宗廟)를 극진히 공경하였다.
♣ 주토[州土]향읍
♣ 주팔[周八]옛날 주 목왕(周穆王)이 사랑하던 여덟 마리의 준마(駿馬)를 이른 말이다.
♣ 주평만[朱泙漫]주(周) 나라 사람. 천금 가산을 탕진해가면서 지리익(支離益)에게서 도룡(屠龍) 솜씨를 배워 3년 만에 기법을 다 익혔으나 결국 그 기술을 써먹을 곳이 없었음. 《莊子 列御寇》
♣ 주평학재룡[朱泙學宰龍]쓸데없는 기예를 배운 것을 비유한 말. 옛날 주평만(朱泙漫)이란 사람이 천금의 가산(家産)을 기울여 지리익(支離益)이란 사람에게서 용(龍) 잡는 기술을 배운 결과, 3년 만에 그 기술을 습득하였으나 그 기술을 쓸 데가 없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列禦寇》
♣ 주포[珠浦]주포는 구슬이 생산되던 합포(合浦)를 가리킨 말로, 후한 때 맹상(孟嘗)이 합포 태수(合浦太守)로 나가서, 앞서 그 고을에서 생산되던 진주(眞珠)가 탐오한 전 태수들이 마구 캐냄으로써 모두 다른 고을로 옮겨가 버려서 백성들이 모두 생업을 잃게 되었던 폐단을 이내 바로잡음으로써 그 옮겨갔던 진주가 되돌아와 백성들이 다시 잘 살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주필[周弼]송 나라 시인. 자는 백강(伯强). 시화에 능했으며, 저서에 문양단평시준(汶陽端平詩雋)ㆍ삼체당시(三體唐詩)가 있음.
♣ 주필간시재[籌筆幹時材]붓을 잡고 어려운 시대의 계책을 세우는 등 뛰어난 경륜(經綸)을 선보였다는 말이다.
♣ 주하사[柱下史]주하사는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노자는 일찍이 주(周) 나라의 주하사 벼슬을 하다가 주 나라가 쇠망함을 보고 은둔하였는데, 공자가 그를 만나고는 “용과 같다.” 칭찬하였다. 《史記 卷六十三 老子列傳》
♣ 주하수[柱下叟]주하사(柱下史) 늙은이란 곧 춘추 시대에 주하사 벼슬을 지낸 노자(老子)를 말함.
♣ 주해추[朱亥椎]주해는 전국 시대 위(魏) 나라의 용사(勇士)로서 공자(公子) 무기(無忌)를 위해, 공자의 말을 듣지 않던 위장(魏將) 진비(晉鄙)를 40근 되는 철퇴로 격살하고 그의 군대를 탈취하여 마침내 진(秦) 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조(趙) 나라를 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七十七》
♣ 주현[朱弦]붉은 색의 거문고 줄. 예기 악기(樂記)에, “청묘를 노래할 때의 큰 거문고는 붉은 연사를 드린 줄에다 밑에 구멍을 드문드문 뚫는다.[淸廟之瑟 朱弦而疏越]”하였음.
♣ 주현[朱絃]붉은 색의 현(絃). 또는 물에 빨아서 부드럽게 된 주사(朱絲)로 만든 현.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청묘(淸廟)에 쓰는 악기는 주현으로 하고 또 소리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악기 밑에 큰 구멍을 뚫는다.” 하였다.
♣ 주현백설[朱絃白雪]주현은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을 가리키고, 백설은 양춘곡(陽春曲)과 함께 따라 부르기 힘든 고아(高雅)한 가곡을 말한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종묘의 제사에 청묘에 시가 연주될 때 그 악기의 현은 붉은색이요 바닥에 실 구멍이 있어 기(氣)를 서로 통하게 한다.[淸廟之瑟 朱絃而疏越]”라는 말이 나온다.
♣ 주현성[酒賢聖]청주(淸酒)를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이라고 하며, 《三國志 魏志 徐邈傳》
♣ 주현위군절[朱絃爲君絶]친구를 만날 수 없음을 탄식한 말이다. 주현(朱絃)은 거문고 줄을 말하는데, 옛날 백아(伯牙)가 자기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주던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이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 타지 않았다 한다.
♣ 주협홀[拄頰笏]진(晉)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환충(桓沖)의 기병 참군(騎兵參軍)으로 있을 적에 환충이 왕휘지에게 요즘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애당초 대답은 하지 않고 곧바로 산을 쳐다보면서 홀(笏)로 뺨을 고이면서 말하기를, “서산(西山)에 아침이 되면 상쾌한 기운이 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
♣ 주호[珠戶]진주(眞珠)를 채취하는 백성들을 말한다.
♣ 주호은악[周灝殷噩]법언(法言) 문신(問神)에 “상서는 넓고 평탄하며, 주서는 명백하고 곧다[商書爾 周書爾].” 한 데서 온 말이다.
♣ 주홀[拄笏]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환충(桓沖)의 참군(參軍)으로 있을 때 환충이 그에게 요즘 무슨 직무를 보았느냐고 묻자, 홀(笏)을 턱에 괴고 말하기를 “서산(西山)에 아침이 찾아오면 상쾌한 기운이 감돈다.”고 대답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로 관직에 있는 몸으로서 여유롭고 청아한 정취가 있는 것을 말한다. 《世說新語 簡傲》
♣ 주홀[拄笏]청고(淸高)한 관리의 기풍을 말한다. 진서(晉書) 왕희지전(王徽之傳)에 “환충(桓沖)이 왕휘지에게 ‘경이 오래 부중(府中)에 있더니 요즈음에는 일을 잘한다.’하니 왕휘지가 처음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올려다보기만 하다가 홀(笏)로 턱을 괴며 ‘아침에 서산(西山)에서 오니 시원한 기운이 있더라.’고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관사(官事)에 구애되지 않고 자연을 즐길 줄 아는 청고한 관리의 한가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 주홀간서산[拄笏看西山]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猷)가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이 되었을 때, 환온이 “경은 부(府)에 오래도록 있었으니 일을 잘 처리할 줄로 믿는다.”고 하니, 자유가 업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판(手板) 즉 홀(笏)을 턱에 괴고는 “서산의 아침 기운이 삽상하다.[西山朝來 致有爽氣]”고 응대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簡傲》
♣ 주홀의[柱笏意]진(晉)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는 성품이 몹시 호방하여 구애되는 바가 없었다. 일찍이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참군(參軍)이 되었을 적에 정무를 처리하지 않고 있었는데, 환충이 이에 대해 말하자, 왕휘지는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두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다가, 턱에 홀을 괴고 말하기를, “서산(西山)에 새벽이 오니 기운이 맑고 상쾌하다.” 하였다. 《世說新語 簡傲》
♣ 주홍구석[呪虹驅石]무지개를 부르고 돌을 몰아온다는 뜻임.
♣ 주홍양[周弘讓]진(陳) 나라 사람. 후경(侯景)에게 벼슬하였음.
♣ 주화[疇華]주화는 남방의 수택(水澤) 이름.
♣ 주화모록지[朱華冒綠池]조식의 공연시(公宴詩)에 “가을 난초는 긴 비탈 뒤덮었고, 붉은 꽃은 초록 못 위를 떠다니네.[秋蘭被長坂 朱華冒綠池]”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붉은 꽃 즉 주화는 바로 연꽃을 가리킨다. 일설에 의하면, 조식이 형인 조비에게 화를 당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평범한 표현을 써서 이 시를 지었다고도 한다. 《文選 卷20》
♣ 주환[珠還]청렴한 데 대한 반응이 있다는 말. 후한서(後漢書) 순이(循吏) 맹상전(孟嘗傳)에 “합포(合浦)의 바다에는 구슬이 많았는데 태수(太守)가 너무 탐욕이 많으므로 이웃 고을 교지(交趾)로 옮겨 갔다. 그 후 맹상(孟嘗)이 부임해서 폐단을 없애니 구슬이 다시 돌아왔다.” 하였다.
♣ 주환용호[珠還龍戶]용호는 곧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는 어민(漁民)들의 집을 이름. 후한(後漢) 때 맹상(孟嘗)이 합포태수(合浦太守)가 되었는데, 합포는 본디 곡식이 나지 않아 백성들이 바다에서 주보(珠寶)를 캐서 생활을 영위했던 바, 앞서의 태수들이 모두 탐오한 까닭으로 그 구슬들이 합포를 떠나 이웃 교지(交趾)의 군계(郡界)로 옮겨 가버림으로써 백성들이 모두 굶어죽는 지경에 이르렀다가, 맹상이 태수가 되고부터는 이전의 폐단을 개혁하고 선정을 베풀자, 그 구슬들이 합포로 다시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즉 지방관의 훌륭한 정사를 칭찬한 말이다. 《後漢書 卷七十六》
♣ 주회[晝晦]낮에도 어둡다.
♣ 주회암[朱晦菴]회암은 주희(朱熹)의 호. 본래는 강학(講學)하던 서실 이름.
♣ 주후[肘後]의서(醫書)의 이름인 주후방(肘後方)의 약칭으로, 명의(名醫)인 편작(扁鵲)의 주후방 3권과, 갈홍(葛洪)의 주후방 6권, 유항(劉貥)의 주후방 등이 있다. 《隋書經籍志, 唐書 藝文志》
♣ 주후[柱後]주후는 법관(法官)이 쓰는 주후혜문관(柱後惠文冠)의 약칭이다.
♣ 주후[肘後]진(晉)나라의 갈홍(葛洪)이 찬한 의서(醫書)인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으로, 권질(卷帙)이 많지 않아서 겨드랑이에 끼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간편하게 가지고 다닐 수 있어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후대에는 간편하게 가지고 다니는 의서나 몸을 보양하는 약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였다.
♣ 주후결[肘後訣]진(晉) 나라의 갈홍(葛洪)이 찬한 의서(醫書)인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으로, 권질(卷帙)이 많지 않아서 간편하게 가지고 다닐 수 있어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후대에는 간편하게 가지고 다니는 의서나 몸을 보양하는 약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였다.
♣ 주후관[柱後冠]옛날에 법관이 쓰던 주후혜문관(柱後惠文冠)의 준말로, 즉 법관을 뜻한다. 보통 해치관(獬豸冠)으로 많이 쓴다.
♣ 주후방[肘後方]의서(醫書)의 이름.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편작(扁鵲)의 주후방 권과 갈홍(葛洪)의 주후방 6권을 실었고,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유황(劉貺)의 주후방 3권을 기록하였는데, 모두 신선이 되는 비방(祕方)이라 한다.
♣ 주후방[肘後方]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의 준말로, 진(晉) 나라 갈홍(葛洪)이 지은 의서(醫書)이다.
♣ 주후혜문[柱後惠文]법관(法官)과 무관(武官)이 쓰는 모자이다. 장창(張敞)의 동생 장무(張武)가 양국(梁國)의 상(相)으로 나가면서 “양국은 대도(大都)로서 이민(吏民)이 조폐(凋敝)한 상태이니, 마땅히 주후혜문(柱後惠文)으로 탄치(彈治)해야 한다.”고 말하자, 장창이 이를 듣고서 웃으며 안심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張敞傳》
♣ 주후혜문관[柱後惠文冠]옛날 법관(法官)이 쓰던 관이다.
♣ 주휘[麈麾]일명 주미(麈尾)라고도 하는데, 가늘고 기다란 나무 끝에 사슴의 꼬리털을 달아 부채 비슷하게 만든 것. 처음에는 먼지떨이ㆍ파리채로 썼으나 뒤에는 불도(佛徒)들의 위의를 정돈하는 기구가 되었다.
♣ 주휘[朱暉]후한 명제(後漢明帝) 때 남양(南陽) 원현(宛縣) 사람으로 자는 문계(文季)이다. 임회 태수(臨淮太守)로 있으면서 정사를 잘하여 그곳 관리와 백성들이 존경하고 사랑한 나머지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강직으로 이룬 사람 남양 땅의 주계로세, 관리 위엄 존경하고 백성 은혜 기린다네[彊直自遂 南陽朱季 吏畏其威 人懷其惠]"하였다 한다. 주계라고 한 것은 그의 자가 문계이기 때문이다. 《後漢書 卷四十三 朱暉傳》
♣ 주흘산[主屹山]문경(聞慶)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 이름이다.
♣ 죽가[竹柯]예기(禮記)에 “竹貫四時而不改柯易葉"이라 하였음.
♣ 죽각[竹閣]절[寺]의 별칭으로 죽원(竹園) 또는 죽림정사(竹林精舍)라고도 한다.
♣ 죽계[竹溪]중국 산동성(山東省) 태안현(泰安縣)에 있는 지명. 이곳에 당(唐)의 일류 문장이었던 이백 (李白)ㆍ공소보(孔巢父)ㆍ한준(韓準)ㆍ배정(裵政)ㆍ장숙명(張叔明)ㆍ도면(陶沔) 등이 시사(詩社)를 결성했었다.
♣ 죽계육일[竹溪六逸]당 나라 문장 이백(李白)이 소시적에 공소보(孔巢父)ㆍ한준(韓準)ㆍ배정(裵亭)ㆍ장숙명(張叔明)ㆍ도면(陶沔)과 함께 조래산(徂徠山)에 있으면서 날마다 침취(沈醉)하며 호를 죽계육일이라 하였음.
♣ 죽계일사[竹溪逸士]죽계는 지명. 당 현종(唐玄宗) 때 죽계의 여섯 일사(逸士)들이 모임을 만들고 날마다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겼던 고사인데, 여섯 일사는 공소보(孔巢父)ㆍ이백(李白)ㆍ한준(韓準)ㆍ배정(裵政)ㆍ장숙명(張叔明)ㆍ도면(陶沔)이었다.
♣ 죽고[粥鼓]절에서 불경(佛經)을 읽을 때에 두드리는 제구. 나무를 가지고 물고기 모양으로 만드는데, 이를 두드려서 승려들에게 식사 시간을 알리기도 한다. 목어(木魚).
♣ 죽군[竹君]대나무의 시어(詩語).
♣ 죽궁[竹宮]한 무제가 감천(甘泉) 환구(圜丘)의 사단(祠壇)에 모여드는 유성(流星)과 같은 귀신의 불빛들을 보고 망배(望拜)했다는 궁실 이름이다.《漢書 禮樂志》 두보(杜甫)의 시에 “죽궁에서 때때로 망배를 하고, 계관에서 간혹 신선 찾누나.[竹宮時望拜 桂館或求仙]”라는 구절이 있다.《杜少陵詩集 卷18 覆舟》
♣ 죽궁망배[竹宮望拜]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에, “천자(天子)가 죽궁(竹宮)에서 망배(望拜)하는데, 모시고 제사 받드는 백관(百官)들이 모두 숙연하여 마음이 동했다.”는 것이 보임.
♣ 죽남[竹南]죽남은 오준(吳竣)의 호이고, 여완(汝完)은 그의 자이다.
♣ 죽년[竹碾]대나무 맷돌
♣ 죽당[竹堂]조정을 가리킨다. 위서(魏書) 정도소전(鄭道昭傳)에 “고조(高祖)가 시위하는 신하들에게 현호방장죽당(懸瓠方丈竹堂)에서 향연(饗宴)을 베풀었을 때, 도소와 그 형 의(懿)가 함께 모시고 앉았다.” 하였다.
♣ 죽력[竹瀝]대나무를 불에 구워 받아낸 대나무 진액으로, 담(痰)을 녹이고 열을 내리는 약으로 쓰인다.
♣ 죽력의이[竹瀝薏苡]죽력은 푸른 대쪽을 구워서 받아 낸 진액(津液)을 말하고, 의이는 율무를 말한다.
♣ 죽루[竹樓]죽루는 기와 대신 대나무를 쪼개어 지붕을 덮은 누각을 이름. 황주(黃州)의 황강군에는 서까래 만씩한 대나무가 많아서 집집마다 그것으로 지붕을 이었다고 하는데, 송(宋) 나라 왕우칭(王禹偁)이 일찍이 황주태수로 있을 적에 누각을 지으면서 기와 대신 대나무로 지붕을 덮고 이를 죽루라 이름하여 황강죽루기(黃岡竹樓記)를 지었다.
♣ 죽림[竹林]죽림칠현(竹林七賢). 진(晉) 나라 때 세상을 피하여 노장(老莊)의 허무(虛無)를 숭상한 완적(阮籍), 혜강(嵇康),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령(劉伶), 왕융(王戎), 완함(阮咸) 등 일곱 사람을 가리킨 말. 죽림에서 청담(淸談)을 나누며 놀았던 데서 온 말이다.
♣ 죽림우[竹林友]진(晉) 나라 초기에 노장학(老莊學)을 숭상하면서 죽림에서 노닐었던 완적(阮籍)ㆍ혜강(嵇康)ㆍ산도(山濤)ㆍ상수(向戍)ㆍ유령(劉伶)ㆍ왕융(王戎)ㆍ완함(阮咸) 등 죽림칠현(竹林七賢)을 가리킨다.
♣ 죽림유[竹林遊]숙질(叔姪)간의 회합(會合)을 말한다.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숙부인 완적(阮籍)과 조카인 완함(阮咸)이 있었던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 죽림지유[竹林之遊]숙질(叔姪)간의 정다운 만남을 뜻한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인 완적(阮籍)과 완함(阮咸)이 숙부와 조카의 관계였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 죽림칠현[竹林七賢]완적(阮籍) 산도(出濤)ㆍ상수(尙秀)ㆍ혜강(嵇康)ㆍ유영(劉伶)ㆍ완함(阮咸)ㆍ왕융(王戎). 이들은 난세를 피해 죽림에 은둔하였음.
♣ 죽림현[竹林賢]진(晉) 나라 때 노장 사상(老莊思想)을 숭상하던 사람들. 곧 혜강(嵇康)ㆍ완적(阮籍)ㆍ산도(山濤)ㆍ왕융(王戎)ㆍ상수(向秀)ㆍ완함(阮咸)ㆍ유령(劉伶) 등 일곱 사람을 가리킨다.
♣ 죽림환[竹林歡]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완적(阮籍)과 완함(阮咸)이 숙부와 조카 사이였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晉書 卷49 阮籍傳 附 阮咸傳》
♣ 죽마고우[竹馬故友]어릴 때 대나무 말을 타고 놀던 옛 친구. 아주 어릴 때부터 같이 놀던 친한 친구
♣ 죽마래영[竹馬來迎]후한(後漢)의 양리(良吏) 곽급(郭伋)이 부임하니 어린 아이들 몇 백이 각기 대말[竹馬]을 타고 길 가에 나와 맞으며 절하였다.
♣ 죽마정경성[竹馬定傾城]백성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곽급(郭伋)이 재차 병주 목사(幷州牧使)로 부임하여 고을을 순행(巡行)하다가 미직(美稷)이라는 마을에 이르렀을 때, 100여 명의 아동이 죽마(竹馬)를 타고 와서 환성을 울리며 영접했던 고사가 전한다. 《東觀漢記 郭伋》
♣ 죽마환영[竹馬歡迎]안악 군수(安岳郡守)로 있을 때 혜정(惠政)을 베풀었기 때문에, 이번에 황해도 관찰사로 순력(巡歷)할 때에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후한(後漢) 곽급(郭伋)이 전임(前任) 병주목(幷州牧)으로서 다시 그 지방에 부임하여 서하(西河) 미직(美稷)에 이르렀을 때, 수백 명의 아동들이 죽마(竹馬)를 타고 그를 환영하러 나왔던 고사가 전한다. 《東觀漢記 郭伋ㆍ後漢書 郭伋列傳》
♣ 죽반승[粥飯僧]죽만 먹고 지내는 중. 많이 먹기만 하고 능력이 없는 중을 이르는데, 전하여 무능한 사람을 흉보는 말로 쓰인다.
♣ 죽백[竹柏]대나무와 잣나무가 겨울에도 푸르르듯 지조가 굳은 사람을 가리킨다.
♣ 죽백[竹帛]옛날에는 종이가 없어 대쪽과 비단에 글을 썼는데, 죽백(竹帛)은 역사를 기록한 책을 말한다.
♣ 죽부[竹符]죽사부(竹使符)의 약칭으로, 지방관으로 나가는 사람이 차는 부절(符節)이다.
♣ 죽부인[竹夫人]대오리로 길고 둥글게 만든 것. 여름에 더위를 덜기 위하여 끼고 잔다.
♣ 죽사부[竹使符]지방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는 뜻이다. 죽사부는 한 나라 때 지방관이 차던 신부(信符)로, 대나무로 신부를 만들어서 오른쪽은 경사(京師)에 두고 왼쪽은 군국(郡國)에 주어 군사를 출동하는 데에는 동호부(銅虎符)를 쓰고 그 나머지 일에는 죽사부를 썼다. 한서(漢書) 제4권 문제기(文帝紀)에, “처음에 군수(郡守)에게 동호부와 죽사부를 주었다.” 하였다.
♣ 죽상루[竹上淚]순(舜) 임금이 창오(蒼梧)의 들판에서 죽은 뒤 그의 두 왕비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사모하는 정을 억누르지 못해 서로 통곡하면서 상강(湘江)에 빠져 죽었는데, 그때 흘린 눈물이 대나무 위에 떨어지면서 얼룩이 져 소상반죽(瀟湘班竹)이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述異記》
♣ 죽서[竹西]심종직(沈宗直)의 호가 죽서(竹西)이다.
♣ 죽서[竹西]지금 강도현(江都縣) 북쪽에 있는 정자 이름. 구양수(歐陽脩)의 죽서정(竹西亭) 시에 “십리나 이어진 누대(樓坮)에 노래 소리 번화로우니, 저 양주(楊州)는 다시 전날 같지 못해" 했다.
♣ 죽석[竹石]죽석은 대와 돌로서 고고 정개(孤高貞介)한 것을 말함.
♣ 죽소[竹所]죽소는 김광욱(金光煜)의 호이고, 회이(晦而)는 그의 자이다.
♣ 죽실담계무[竹實談鷄騖]한시외전(韓詩外傳)에 “황제(黃帝) 때에 봉황이 오동에 깃들면서 죽실을 먹었다.” 했는데, 여기서는 이 죽실을 닭과 오리는 무엇인지 모른다는 비유이다.
♣ 죽엽주[竹葉酒]대나무의 잎을 삶은 물에 빚은 술. 죽엽청(竹葉淸) 또는 죽엽청(竹葉靑)이 라고도 함.
♣ 죽엽청[竹葉靑]술 이름이니 3년 묵은 소흥주(紹興酒)로서 일명 죽엽청(竹葉靑)이라고도 한다. 장화(張華) 경박편(輕薄篇)에 “창오(蒼梧)에 죽엽청이요 의성(宜城)에 구온차(九醞醝)이다.” 하였다.
♣ 죽영사성남[竹影似城南]당나라 한유(韓愈)와 맹교(孟郊)가 성남(城南)에서 연구(聯句)를 짓는데, 첫 머리에, “대 그림자는 육(六)이 반짝.”이란 구(句)가 있다.
♣ 죽음[竹陰]죽음(竹陰)은 조희일(趙希逸)의 호이다.
♣ 죽이표세한[竹以表歲寒]예로부터 대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사시사철 색깔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험한 역경 속에서도 절조를 변치 않는 고상한 인품을 표상해 왔는데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죽장망혜[竹杖芒鞋]대지팡이와 짚신. 가장 간단한 보행이나 여행의 차림을 비유하는 말.
♣ 죽장화룡[竹杖化龍]신선(神仙) 호공(壺公)이 비장방(費長房)을 돌려보내면서 죽장(竹杖)을 주어 타고 가게 하였다. 비장방이 그것을 타니 자는 듯하다가 문득 집에 도착되었는데 죽장은 칡덩굴 언덕에 던지니 변하여 용이 되었다. 또 술사(術士) 진련(陳憐)이 밤에 용을 타고 집에 왔는데 용이 변하여 청죽장(靑竹杖)이 되었다.
♣ 죽전[竹箭]죽(竹)은 대죽(大竹), 전(箭)은 소죽(小竹)이다.
♣ 죽지[竹枝]악부(樂府) 이름. 죽지사(竹枝詞). 당 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낭주(朗州)에 귀양가서 그 지방의 풍속을 읊은 악부로서 후세에 지방 토속의 잗단 일을 읊은 것을 흔히 말한다. 일설에는 남녀의 정사(情事)를 노래한 것이라고도 함.
♣ 죽지가[竹枝歌]악부(樂府) 가운데 하나로, 본디 사천(四川) 일대의 민가(民歌)인데, 당(唐) 나라 유우석(劉禹錫)이 낭주(郞州)로 유배되었을 때 지은 신사(新詞) 9수(首)를 효시로 함. 주로 삼협(三峽)의 풍광과 남녀간의 연정(戀情)을 읊었다.
♣ 죽지곡[竹枝曲]죽지곡은 맨 처음 당(唐) 나라 때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창작한 악부(樂府)의 한 체(體)로서 그 내용은 대략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 죽지사[竹枝詞]주로 지방의 풍속이나 여인의 정서를 읊는 가사(歌詞)의 일종. 소식(蘇軾)의 죽지가(竹枝歌) 자서(自序)에 의하면, 죽지사는 본래 초 나라에서 발생한 노래로 회왕(懷王), 굴원(屈原), 항우(項羽) 등의 슬픈 이야기가 전승되어 원통하고 애달픈 곡조를 띠게 되었다고 하였다.
♣ 죽지애[竹枝哀]죽지(竹枝)는 당(唐)의 유우석(劉禹錫)이 새로 지은 죽지사(竹枝辭)를 의미하는데, 상대방의 시가 강개 처절하다는 뜻이다.
♣ 죽참순속[竹驂淳俗]죽마 타고 노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처럼 순후한 풍속. 이백(李白)의 시에 “나의 소녀 머리 이마를 덮을 무렵, 나는야 꽃을 꺾어 문 앞에서 놀았었고, 우리 낭군 어릴 적에 죽마 타고 집에 와서, 청매 꺾어 손에 들고 상을 빙빙 돌았었지. 이렇게 장간 마을 함께 살면서, 어린 우리 소년 소녀 간격이 전혀 없었다오.[妾髮初覆額 折花門前劇 郞騎竹馬來 遶牀弄靑梅 同居長干里 兩小無嫌猜]”라는 표현이 있다. 《李太白詩集 卷3 長干行》
♣ 죽취일[竹醉日]음력 5월 13일을 말하는데, 이날 대나무를 심으면 잘 산다고 한다. 일명 죽미일(竹迷日)이라고도 한다. 악양풍토기(岳陽風土記) 5월 13일이 아니고 8월 8일이라는 설도 있다.
♣ 죽피관[竹皮冠]죽순 껍질로 만든 관으로,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정장(亭長)으로 있을 때 만들어 썼다 하여, 유씨관(劉氏冠)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작미관(鵲尾冠)이다. 《漢書 高祖記》
♣ 죽헌[竹軒]김륜(金倫)의 호. 자(字)는 무기(無己)이며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 죽화불성자[竹花不成子]봉황새는 죽실(竹實)을 먹는다 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대나무 꽃 결실을 맺지 못했으니, 봉황새 그대여 배고픔 참아내야 하리.[竹花不結實 念子忍朝饑]”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2 述古》
♣ 준강하[遵江夏]한대(漢代)의 군(郡)이름,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운몽현(雲夢縣)의 동남
♣ 준개[僎介]개준(介僎). 향음주례(鄕飮酒禮) 때 행사를 도와 주선하는 자. 주인을 돕는 자를 준(僎), 빈(賓)을 돕는 자를 개(介)라 한다.
♣ 준골[駿骨]준골은 준마의 뜻으로 즉 뛰어난 선비를 비유한 말이다.
♣ 준법[皴法]화법(畫法)의 일종. 산악ㆍ암석 굴곡ㆍ중첩(重疊)등을 그리는 법.
♣ 준벽화[皴碧畫]준법(皴法)으로 그린 그림. 준법은 화법(畫法)의 일종으로 산악ㆍ암벽 등의 굴곡 중첩 또는 옷의 주름 등을 나타내는 화법.
♣ 준순주[逡巡酒]전설에 있어, 신선(神仙)이 빚는다는 잠깐 사이에 만드는 술을 말한다.
♣ 준시[蹲柹]껍질을 벗겨 꼬챙이에 꿰지 않은 채 납작하게 말린 감.
♣ 준양시회[遵養時晦]현재의 상황에 순응하며 역량을 축적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실력을 발휘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시경(詩經) 주송(周頌) 작(酌)에 나온다
♣ 준여[準旟]송골매를 그린 기(旗)인데, 특히 행군(行軍) 때에 일을 급속히 함을 상징한 기이다.
♣ 준오[踆烏]태양(太陽)에서 산다는 삼족오(三足烏)를 말한다. 《淮南子 精神訓》
♣ 준우조장[峻宇雕牆]준우는 집을 높다랗게 짓는다는 뜻이고 조장은 담장을 단청으로 꾸민다는 뜻으로, 사치를 뜻하는 말이다. 서경(書經) 오자지가에 “주색(酒色)을 즐기거나 집을 높다랗게 짓고 담장을 꾸미면 망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였다.
♣ 준원전[濬源殿]함경남도 영흥(永興)에 있는 전각으로, 조선조의 발상(發祥)을 기념하기 위해 이 태조(李太祖)의 태(胎)를 묻었던 곳에 세운 것이다.
♣ 준의[鵔鸃]준의는 한대(漢代)에 시랑(侍郞)들이 쓰던 관(冠)이다.
♣ 준의관[鵔鸃冠]한(漢) 나라 때 시중(侍中) 벼슬에 있는 사람들이 썼던 꿩깃으로 장식한 관이다. 곧 고관 대작을 뜻한다.
♣ 준의한재하탑빈[准擬寒齋下榻頻]최고의 손님으로 모실 테니 자주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후한(後漢)의 진번(陳蕃)이 특별한 걸상을 준비해 두고는, 서치(徐穉)가 찾아올 때에만 그 걸상을 내려서 그를 앉게 하고, 그가 떠나고 나면 다시 올려 두어 다른 사람은 앉지 못하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53 徐穉傳》
♣ 준점[遵占]서경(書經)에 있는 기자의 홍범구주(洪範九疇)에, 점으로 의심을 결정하라는 계의(稽疑)가 일곱째에 들어 있다.
♣ 준조[樽俎]준조는 연회석상으로, 무력을 쓰지 않고 연회석상에서 외교적으로 담판을 벌여 적을 제압하는 것을 말한다.
♣ 준조간[樽俎間]‘술통과 도마 사이’란 뜻으로, 술자리(연회석)를 가리키는 말.
♣ 준조절충[樽俎折衝]술자리[樽俎]에서 유연한 담소(談笑)로 적의 창끝을 꺾어 막는다[折衝]는 뜻으로, 외교를 비롯하여 그 밖의 교섭에서 유리하게 담판하거나 흥정함을 이르는 말.
♣ 준주풍유요북해[樽酒風流邀北海]북해(北海)는 동한(東漢) 말엽 북해에 피난하여 살았던 공융(孔融)을 가리킨다. 공융은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있으면서 풍류를 좋아하여 빈객들이 언제나 문정(門庭)에 가득하였는데 한번은 탄식하기를 “자리에 손님들 가득하고 동이에 술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하였다. 《後漢書 卷一百三 孔融傳》
♣ 준준[旽旽]정중한 모양이다
♣ 준준[僔僔]많은 모양
♣ 준준[撙撙]많이 모이는 모양, 많은 모양
♣ 준준[惷惷]벌레의 꿈틀거리는 모양, 흔들리는 모양
♣ 준준[嶟嶟]산이 높게 우뚝 선 모양
♣ 준준[浚浚]엎드려 안음
♣ 준철문명[濬哲文明]신중하고 어질고 덕이 높고 광명하다는 뜻인데, 본디 순(舜) 임금을 가리켜 이른 말이다. 《書經 舜典》
♣ 준치[蹲鴟]토란을 말하는데, 토란인 줄 모르고 악조(惡鳥)인 줄 알았다는 고사. 해갹록(諧噱錄)에 “장구령(張九齡)이 소경(蕭炅)의 무식함을 알고 토란을 보내면서 준치라 썼더니, 소경이 ‘보내준 토란은 받았으나 준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집에도 괴이한 것이 많으므로 그와 같은 악조는 원치 않는다.’ 하였는데, 구령이 이 답서를 사람들에게 보이니 모두 한바탕 웃었다.” 하였다.
♣ 준치[蹲鴟]토란의 별명으로, 그 모양이 마치 올빼미가 웅크린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史記 貨殖列傳 注》
♣ 줄줄[崒崒]산이 험한 모양, 물건이 서로 스치는 소리
♣ 중[重]깊이 생각하다, 심히 생각하다, 중히 여기다.
♣ 중간[仲幹]중간은 변사정(邊士貞)의 자임.
♣ 중경[重卿]성임(成任)의 자. 그가 본도(本道)의 감사(監司)로 있을 적에 일찍이 영광군(靈光郡)의 기생 부춘화(富春花)와 관계를 갖고 나서 함평의 객사(客舍)에 있는 그림 병풍에 쓰기를 “남쪽에 오니 세월은 물결처럼 빠른데 국사에 분주하느라 집안 생각 못하고 간 곳마다 번화한 것은 마음 두기도 어려워 한 병풍 앞에 부춘화와 서로 마주하였네[南來歲月逝如波 王事驅馳不戀家 在處繁華難着意 一屛相對富春花]”하였다.
♣ 중경[仲卿]중경은 한(漢) 나라 왕장(王章)의 자(字)이다. 젊어서 제생(諸生)으로 장안(長安)에서 공부할 때, 가난한 생활에 병이 들어 덮을 것이 없자 덕석으로 몸을 가리고 누워 울면서 처와 영결(永訣)을 하자, 그 처가 “중경이여, 현재 조정의 고관들 중에 누가 중경보다 낫다 하겠는가. 그럼에도 지금 병이 들어 조금 고달파졌다고 하여 스스로 분발하지 못한 채 그만 거꾸로 눈물을 흘리다니, 얼마나 옹졸한 짓인가.” 하고 꾸짖었던 고사가 있다. 《漢書 王章傳》
♣ 중경[仲景]후한(後漢) 조양(棗陽) 사람. 장기(張機)의 자(字)인데 영제(靈帝) 때에 벼슬이 장사 태수(長沙太守)에 이르렀으며 의술을 장백조(張伯祖)에게 배웠고 상한론(傷寒論)을 저술하였다. 화타(華陀)는 그 논을 읽고서, 참으로 사람 살릴 글이라고 하였음. 한위(漢魏) 이래로 의술을 익히는 자는 그를 추대하여 의중(醫中)의 아성(亞聖)으로 삼았음.
♣ 중계약훈호[仲季若塤箎]훈(塤)과 호(箎)는 모두 악기(樂器)의 이름인데, 시경에 “백씨(伯氏)는 훈을 불고 중씨(仲氏)는 호를 분다.”라는 말이 있다.
♣ 중곡퇴[中谷蓷]시경(詩經) 왕풍(王風) 중곡유퇴(中谷有蓷)에 가뭄을 노래하여 ‘골짜기에 익모초가 말라간다’고 하였다.
♣ 중과부적[衆寡不敵]많은 무리와 적은 무리는 서로 대적하지 못함. 적은 수효로 많은 수효를 감당하지 못함.
♣ 중관[中官]내시(內侍)의 별칭.
♣ 중광[重光]고갑자(古甲子)에서 중광은 신(辛)을 말한다. 양월은 10월이다.
♣ 중구[中垢]시경(詩經)의 주에, ‘중(中)은 은암(隱暗)의 뜻이요, 구(垢)는 오예(汚穢)의 뜻이라’고 하였음.
♣ 중구[重九]음력 9월 9일로 곧 중양절(重陽節).
♣ 중구난방[衆口難防]뭇사람의 말을 이루 다 막기는 어렵다.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저마다의 소견을 펼치기만 하는 상황을 말한다.
♣ 중구삭금[衆口鑠金]여러 사람이 합해 말하면 굳은 쇠도 녹인다. 참언(讒言)의 두려움을 말함.
♣ 중구액[重九厄]9월 9일에 당하는 화라는 뜻으로, 뜻밖의 재앙을 가리키는 말이다. 선인(仙人) 비장방(費長房)이 제자 환경(桓景)에게 “9월 9일에 너의 집에 재앙이 닥칠 것이니, 빨리 가서 사람마다 붉은 보따리에 수유(茱萸)를 담아 어깨에 메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국화술을 먹도록 하라. 그러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환경이 그 말대로 하고서 저녁에 내려와 보니 가축들이 사람 대신에 폭사(暴死)했더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續齊諧記 重陽登高》
♣ 중구일[重九日]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말한다.
♣ 중권[中權]중권은 삼군(三軍) 중에 주장(主將)이 있는 중군(中軍)을 말한다.
♣ 중궤[中饋]주방(廚房)에서 음식을 맡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 중규[中逵]아홉 갈래로 통하는 길. 익주부자묘비 원문에는, “중계(中階)”라고 하였음.
♣ 중규조조개자기[衆竅調刁皆自己]각종 다양한 바람 소리는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구멍의 다양한 형태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원래 바람 자체가 틀려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역시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맹렬한 바람이 일단 지나가고 나면 뭇 구멍이 다시 텅 비게 되는데, 그대는 그때에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아직도 간들거리는 모습을 유독 보지 못하였느냐.[厲風濟則衆竅爲虛 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하였고, 또 “하늘의 피리 소리라고 하는 것은 바람이 불어올 때 다양하게 반응하며 소리를 내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가 원인이 되어 스스로 자초하는 것들이니, 어떤 존재가 따로 있어 그렇게 하도록 발동시키는 것이겠는가.[夫天籟者吹萬不同 而使其自己也 咸其自取 怒者其誰邪]”하였다.
♣ 중규지조조[衆竅之刁刁]장자 제물론 제이에 “모진 바람이 그치면 모든 구멍이 텅 빈 듯하나 그대는 산들거리고 휙휙거리는 바람소리를 모르는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간만사는 모든 물체에 부딪쳐 발하는 바람 소리처럼 천태만상이 있으나, 그 본래는 고요한 데서 발단하였다는 것이다.
♣ 중금[重金]금대(金帶)에 패어(佩魚)까지 차는 고관의 복식(服飾)을 말한다.
♣ 중금[中金]은(銀)의 별칭으로 백금(白金)이라고도 한다.
♣ 중기[衆氣]조하, 정양 항해 등 여러 천지의 기.
♣ 중녀괘[中女卦]팔괘(八卦) 중의 이괘(離卦)를 말함.
♣ 중농주의[重農主義]국가의 부의 기초는 농업에 있다는 경제 사상.
♣ 중니[仲尼]중니는 공자의 자(字). 공자는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했고 바다로 떠가고 싶다고도 하였는데, 구이를 우리나라로 여기기도 한다.
♣ 중니감려인[仲尼甘旅人]중니(仲尼)는 공자(孔子)의 자(字)이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는 동서남북으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고, 주자어류(朱子語類) 59권에 “공자 같은 성인께서도 …… 종신토록 쓸쓸하게 여인(旅人)의 생으로 일관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 중니곤계맹[仲尼困季孟]중니는 공자의 자. 계맹은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대부(大夫)였던 계손씨(季孫氏)와 맹손씨(孟孫氏)를 합칭한 말인데, 즉 공자는 성인으로서 노 나라에 벼슬할 적에 이 권신들에 의해 곤욕을 당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 중니광야[仲尼曠野]공자가 위(衛)를 떠나 진(陳)으로 가던 중 들녘에서 식량이 떨어지고 시종하는 자가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하는 곤란을 겪었던 일을 말한다. 이때 공자가 자로(子路)에게 “시경(詩經)에 ‘들소도 아니며 호랑이도 아니거늘 저 허허벌판에 따라다니게 하느냐’ 하였는데, 우리 도(道)가 그른 것인가, 우리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詩云 匪兕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 吾何爲於此]"라고 물었다. 《史記 孔子世家》
♣ 중니욕거이[仲尼欲居夷]구이(九夷)는 아홉 종류가 있는 동방(東方)의 오랑캐를 말함.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자 하자, 혹자가 “그 비루한 곳에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사는데 무슨 비루함이 있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 중니칭기과[仲尼稱其果]공자가 위(衛) 나라에 있을 때 경쇠[磬]를 치자, 삼태기를 메고 그 문앞을 지나던 은자(隱者)가 “마음이 있도다, 경쇠를 침이여!”하더니, 이윽고 다시 말하기를 “비루하도다, 세상을 잊지 못하는 굳은 생각이여! 자신을 알아줄 이가 없거든 그만둘 뿐이니라.” 하므로, 공자는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세상을 잊는 데에 과감하도다. 그렇게 살려면 어려울 것이 없으리라.”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憲問》
♣ 중니탄서수[仲尼嘆逝水]공자[仲尼]가 내[川] 위에서 흐르는 물을 보고 말하기를,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주야로 쉬지 않으니.” 하였다.
♣ 중달[仲達]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장수 사마의(司馬懿)의 자(字). 제갈공명의 적수로 지략이 뛰어났다.
♣ 중당[中唐]당(唐) 나라의 시체(詩體)를 초당ㆍ중당ㆍ만당(晩唐)으로 구분하는데, 중당은 대력(大曆) 때부터 태화(太和) 때까지를 일컬으며, 여기에 해당한 시인은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 등이다.
♣ 중대[中臺]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이다.
♣ 중동[重瞳]순(舜) 임금의 눈에 동자가 둘씩 있었다 한다. 그러므로 임금의 눈을 중동이라 한 것이다.
♣ 중동[仲冬]중동은 곧 11월이다.
♣ 중동[重瞳]항우(項羽)의 눈에 동자(瞳子)가 둘씩이었다 한다.
♣ 중동갱유중양재[仲冬更有重陽在]11월 9일을 말함.
♣ 중랑[中郞]문인 학사를 일컫는 말이다. 한(漢) 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채옹(蔡邕)이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던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채옹의 딸 채담(蔡琰)이 그 아버지를 이어 글을 잘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 중랑녀[中郞女]아들을 보지 못하고 문재(文才)가 뛰어난 딸 하나만 남겼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채옹(蔡邕)의 딸 문희(文姬)가 선친으로부터 4천여 권의 책을 물려받고 상란(喪亂)의 시대에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서적을 모두 망실했으나 그래도 40여 편을 암송하여 다시 복구시켰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後漢書 列女傳》
♣ 중랑아대[中郞阿大]숙부(叔父)를 가리킨 말. 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의 형인 혁(奕)의 딸 도운(道韞)이 왕응지(王凝之)에게 시집을 간 처음 친정에 와서 매우 불쾌하게 여기자, 사안이 이르기를 “왕랑(王郞; 왕응지를 가리킴)은 일소(逸少; 王羲之의 자)의 아들인데 네가 무엇을 한하느냐?”하니, 사도운이 대답하기를 “우리 일문(一門)의 숙부로는 아대(阿大)와 중랑(中郞)이 있고, 뭇 종형제들로는 또 봉(封)ㆍ호(胡)ㆍ갈(羯)ㆍ말(末)이 있는데, 뜻밖에도 천지 사이에 왕랑 같은 자가 있었습니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아대는 곧 사안을 가리킨 말이고, 중랑은 곧 사안의 아우로서 역시 문재(文才)가 뛰어나서 간문제(簡文帝)로부터 특별히 종사중랑(從事中郞)에 발탁되었던 사만(謝萬)을 가리킨 말이다. 《晋書 卷九十六》
♣ 중랑원[中郞願]한(漢) 나라 때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된 채옹(蔡邕)처럼 내직(內職)에서 학사(學士)로 계속 근무하고 싶어하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中郞石經後 八分蓋憔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2 送顧八分文學適洪吉州》
♣ 중랑지절[中郞持節]깃대 지닌 중랑이란 한(漢)나라 때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가 무제(武帝) 천한(天漢) 원년에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나갔다가 선우(單于)에게 강제로 붙잡혀 19년 동안 양치기 노릇을 하면서도 사신의 징표로 가지고 간 깃대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존함으로써 한 나라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五十四 蘇武傳》
♣ 중랑초미금[中郞焦尾琴]중랑은 후한(後漢) 때 중랑 벼슬을 지낸 채옹(蔡邕)을 이름. 초미금은 곧 거문고를 가리킨 말로, 채옹이 일찍이 이웃 집에서 밥을 짓느라고 때는 오동나무가 타는 소리를 듣고는,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 줄을 알고 그 타다 남은 오동나무를 얻어 거문고를 만들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중랑해모금[中郞解摸金]중랑은 곧 발구중랑(發邱中郞)인데, 조조(曹操)의 명을 받고 가는 곳마다 고분(古墳)을 파헤쳐 금은보화(金銀寶貨)를 취하였다 한다.
♣ 중랭[中冷]양자강(揚子江) 중랭천(中冷泉)의 물이 점다(點茶)를 하는 데 있어 천하의 으뜸이라는 고사가 있다.
♣ 중력황감경절물[中曆黃柑驚節物]중력(中曆)은 궁중(宮中)의 역서(曆書)이고, 황감(黃柑; 익어서 누렇게 된 귤)은 동짓달의 절물(節物)인데, 예로부터 동짓날에는 궁중에서 근신(近臣)들에게 이 두 가지 물건을 하사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 중련[仲連]중련은 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을 말한다. 당시 진(秦)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제후(諸侯)들이 진을 천자(天子) 나라로 받들려 하므로, 반대하면서 “진 나라를 천자 나라로 섬기느니 동해(東海)에 빠져 죽겠다.” 하였다. 《史記 卷八十三 魯仲連傳》
♣ 중련지도해[仲連之蹈海]전국 시대에 진(秦)이 조(趙)를 호되게 공격하고 있을 때 위(魏)의 신원연(新垣衍)이 조 나라로 가서, 진 나라가 군대를 철수하는 조건으로 진 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높여주도록 하자고 제의하자, 당시 조 나라에 와 있던 제(齊) 나라 사람 노중련(魯仲連)이 그것은 안 될 일이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진 나라가 만약 방자하게 황제를 자칭한다면 이 중련은 동해로 달려가 빠져죽고 말 것이다.” 하였음. 《史記 卷83》
♣ 중령군[中領軍]관직명으로 한(漢)나라 말에 만들어졌다. 위진(魏晉)에서 남북조(南北朝)에 이르기까지, 측근 대신들이 그 직위에 임명되었다. 중호군(中護軍)과 함께 군대를 통솔하는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 중루점괴후[中壘占乖候]중루는 한대(漢代)에 집금오(執金吾)의 속관(屬官)인 관명(官名)으로, 유 중루는 곧 중루교위(中壘校尉)를 지낸 유향(劉向)을 가리키며 괴후(乖候)는 곧 괴이(乖異)한 징후라는 뜻으로 유향이 일찍이 상고(上古) 이래 역대에 걸쳐 부서(符瑞)와 재이(災異)에 대한 기록을 모아서 그 행사(行事)를 추적(追跡)하여 점험(占驗)을 나타냈는데 이것이 바로 홍범오행전론(洪範五行傳論)이다. 《漢書 卷三十六》
♣ 중류격즙[中流擊楫]진(晉) 조적(狙逖)이 원제(元帝)에게 청하여 군사를 통합해서 북벌(北伐)할 때 양자강을 건너며 돛대를 치면서 맹세하기를, “중원을 밝히지 못하고 다시 건너면 이 강과 같으리라.” 했다. 드디어 그가 석륵(石勒)을 격파하고 황하 이남의 땅을 회복했다.
♣ 중류격즙[中流擊楫]진서(晉書) 조적전(祖逖傳)에 “예주 자사(豫州刺史) 조적(祖逖)은 유사(流徙) 부곡(部曲) 백여 가호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다가 중류에서 돛대를 치며 맹세하기를 ‘내가 중원(中原)을 깨끗이 소탕하지 못한다면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겠다.’ 하여 기상이 장렬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 하였다.
♣ 중류공석위산하[中流空惜魏山河]전국 시대에 위 무후(魏武侯)가 하수(河水)에서 배를 타고 내려 가다가 중류(中流)에서 좌우의 산천을 돌아보고, “산천이 장(壯)하구나 이것은 위국(魏國)의 보배로다.” 하니, 오기(吳起)가 대답하기를, “국가가 오래 가는 것은 덕(德)에 있는 것이요, 산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 중맹유상[衆盲喩象]코끼리를 불성(佛性)에 비유하고 소경을 무명(無明)의 중생에 비유하여 중맹상(衆盲象)의 지체(肢體)를 더듬어서 여러 가지를 풀이해주는 것을 말한 것임.
♣ 중묘[衆妙]오만 가지 묘리(妙理)로서 즉 도(道)를 의미한 것이다.
♣ 중방제결[衆芳鶗鴂]온갖 꽃이 시드는 처량한 시절이라는 말이다. 제결(鶗鴂)은 두견새로 이 새가 울면 꽃이 시든다고 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恐鶗鴂之先鳴兮 使百草爲之不芳”이라 하였고, 백거이(白居易)와 소식(蘇軾)의 시에도 각각 “殘芳悲鶗鴂”과 “只恐先春鶗鴂鳴”이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6 東南行 一百韻ㆍ蘇東坡詩集 卷8 和致仕張郞中春晝》
♣ 중봉[重峯]중봉은 조헌(趙憲)의 호이다.
♣ 중부[仲孚]고려 때의 문신인 정포(鄭誧)의 자임. 정포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있으면서 악정(惡政)을 상소했다가 울산(蔚山)에 유배된 적이 있었고, 그는 특히 시문(詩文)ㆍ서예(書藝)에 모두 뛰어났었다.
♣ 중부[重夫]중부는 이후여(李厚輿)의 자(字)이다.
♣ 중부잠모교탈진[仲父潛謀巧奪秦]진(秦) 나라 여불위(呂不韋)가 저의 아이를 밴 첩을 진왕(秦王)에게 바쳐서 낳은 아들이 곧 진시황(秦始皇)이란 말이 있다. 진 나라에서 여불위를 높여서 중보(仲父)라 하였다.
♣ 중산[中山]술 이름임. 수신기(搜神記)에 “적희(狄希)는 중산(中山) 사람인데 천일주(千日酒)를 만들어 그것을 마시면 천 일을 취한다.” 하였음.
♣ 중산[仲山]중산은 한 고조(漢高祖)의 형 중(仲)이 살았던 곳임.
♣ 중산[中散]진(晉) 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을 가리킨다. 한때 위(魏) 나라에 벼슬하여 중산대부(中散大夫)가 되었으나 그만둔 뒤로는 죽림 속에서 청담(淸談)을 즐기며 벼슬하지 않았다. 그는 대장장이의 풀무질을 좋아하여 벗 향수(向秀)와 더불어 마주앉아 풀무질을 하며 방약무인(傍若無人)했다.
♣ 중산[中山]한 잔만 마시면 1천일 동안을 취한다는 중산에서 나는 술을 가리킨 말이다. 박물지(博物志)에 “유현석(劉玄石)이라는 사람이 중산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취해서 죽은 듯이 쓰러지자 가족들은 그가 죽은 줄만 알고 장례를 치러버렸는데, 3년 만에 그 술집에서 그 집을 찾아가 무덤을 파보니, 그제야 술이 깨었다.” 하였다.
♣ 중산방만락양서[中山謗滿樂羊書]전국 시대 위(魏) 나라 악양(樂羊)이 중산을 쳐서 3년 만에 그를 함락시키고 돌아와 문후(文侯)에게 보고하자, 문후가 상자에 가득찬 방서(謗書)를 보이니, 악양이 재배(再拜)하면서 “중산을 격파한 것은 신(臣)의 공이 아니라 임금의 공입니다.” 하며, 그 많은 중상의 투서를 받고도 임금이 끝내 자신을 의심하지 않은 것을 감사하였다. 《史記 卷七十一 甘茂傳》
♣ 중산의갈부[中山衣褐夫]중산은 지명으로 품질 좋은 붓을 생산하던 곳이고, 의갈부란 털옷을 입었다는 뜻으로 즉 토끼를 의인화(擬人化)하여 이른 말이다.
♣ 중산참방[中山讒謗]터무니없이 날조하여 참소하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에 위(魏) 나라 악양(樂羊)이 중산(中山)을 정벌하러 나간 지 3년 만에 승리를 거두고 돌아와서 보고를 하니, 위 문후(魏文侯)가 그동안 신하들이 그에 대해서 참소한 글 한 상자를 꺼내 보여 준 고사가 있다. 《呂氏春秋 樂成》
♣ 중상모략[中傷謀略]상대방의 속이 상하도록 하는 갖은 꾀와 책략. 권모술수가 상대에 대한 광범위하고 다양한 타격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중상모략은 주로 상대의 명예를 손상시켜 정신적으로 충격을 입히고자 하는 것이다
♣ 중상지기[仲翔知己]중상은 삼국 시대 오(吳) 나라 우번(虞翻)의 자(字)인데, 그가 강직하게 감히 바른 소리를 하다가 조정에서 쫓겨난 뒤에 “나의 골상(骨相)이 원래 아첨을 떨지 못하게 되어 있다.[骨體不媚]”고 한탄하면서, 천하에 한 사람이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使天下一人知己者 足以不恨]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卷57 吳書 虞翻傳》
♣ 중서[中書]대궐의 문서와 조칙 등을 맡아본 한대(漢代)의 관직 이름으로, 승지(承旨)를 뜻한다.
♣ 중서[中書]붓의 이칭(異稱)이다.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에, “모영이 여러 차례 중서령(中書令)에 제수되어 상(上)과 더욱 친하게 지내자, 상이 일찍이 중서군(中書君)이라고 불렀다.” 하였다.
♣ 중서군[中書君]붓[筆]의 별칭인데, 특히 토끼털로 만든 붓을 말한다.
♣ 중서삼책[仲舒三策]한 무제(漢武帝) 때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가 현량으로 올린 대책(對策)을 말한다. 무제 초기에 현량과(賢良科)의 대책(對策)을 왕명에 의해 연거푸 세 번 올리고 바로 강도상(江都相)에 임명되었다. 그 대책이 3조항으로 되었기 때문에 3책이라 한다. 《漢書 卷五十六 董仲舒傳》
♣ 중석[重席]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대빙(戴憑)이 경학(經學)에 아주 밝았었다. 한번은 정조조하(正朝朝賀)차 백관(百官)이 모두 모였을 적에 임금이 군신(群臣)에게 명하여, 경(經)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경의(經義)를 묻게 하되, 만일 뜻이 잘 통하지 못한 곳이 있을 경우에는 문득 그 사람의 자리[席]를 빼앗아서 뜻이 잘 통하게 설명한 사람에게 보태어 주도록 하였다. 그러자 대빙이 경의에 제일 능통하여 50여 석(席)을 거듭 빼앗아 앉게 되었다는 고사이다. 《後漢書 卷七十九 戴憑傳》
♣ 중석몰촉[中石沒鏃]쏜 화살이 돌에 깊이 박혔다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전력을 다하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의 고사성어.
♣ 중선[仲宣]중선은 동한(東漢) 말기의 문장가 왕찬(王粲)의 자(字)이다. 난리를 피해 장안(長安)을 떠나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탁하였을 때, 실의에 잠겨 타향을 떠돌면서 고향을 생각하는 절절한 심경을 담아, 그 유명한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그 부(賦)에, “강산이 아름다우나, 내 고향이 아니로세.”라는 구절이 있다.
♣ 중선금[仲宣襟]중선은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왕찬(王粲)의 자인데, 그가 일찍이 동탁(董卓)의 난리를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탁해 있으면서 늘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중선등루[仲宣登樓]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왕찬(王粲)은 자가 중선(仲宣)으로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데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 의지해 있으면서 뜻을 펴지 못하여 당양성(當陽城)의 누대에 올라 등루부(登樓賦)를 읊었다 함. 《三國志 魏志 王粲傳》
♣ 중선루[仲宣樓]중선은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왕찬(王粲)의 자. 왕찬이 동탁(董卓)의 난(亂)에 형주(荊州)로 피란하여 유표(劉表)에게 의지해 있을 때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서 진퇴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하여 등루부(登樓賦)를 지은 데서 온 말이다. 《文選 卷十一》
♣ 중성[中星]이십 팔수(二十八宿)를 사방으로 분배하여 방(方) 마다 칠수(七宿) 씩이 되는데, 그 칠수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별을 가리킨다.
♣ 중성[中聖]중주(中酒)와 같은 말인데 술의 청(淸)은 성(聖)이고 탁(濁)은 현(賢)이라 칭함. 두보의 음중팔선가(飮中八僊歌)에 “含杯樂聖稱避賢"의 글귀가 있는데 그 주에 보임.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서막(徐邈)이 상서랑(尙書郞)으로 있을 때 금주령(禁酒令)이 있었는데, 막이 술을 마음껏 마시고 취하여 “중성(中聖)이다.” 했다. 조조(曹操)가 듣고 성을 내자, 선우보(鮮于輔)가 “취객들이 술이 맑은 것을 성인(聖人)이라 하고 술이 탁한 것을 현인이라 한다.” 했다는 고사가 있다.
♣ 중소운망서[重霄霣望舒]망서(望舒)는 달을 모는 사람인데 보통 달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참고로 한유(韓愈)의 시에 “霜風侵梧桐 衆葉著樹乾 空堦一片下 琤若摧琅玕 謂是夜氣滅 望舒霣其團 靑冥無依倚 飛轍危難安”라는 구절이 있는데, 구슬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오동잎에 가려져 어두워진 달빛을 보며 혹시 잘못해서 달이 떨어진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韓昌藜集 卷1 秋懷詩 第九首》
♣ 중수[中壽]70세. 회남자(淮南子) 원도(原道)에 “보통사람의 중수는 70세이다.[凡人中壽七十歲]" 하였음.
♣ 중수[中手]손에 잡히다. 손에 들어오다.
♣ 중순[仲醇]중순은 명 나라 진계유(陳繼儒)의 자이다.
♣ 중승[中丞]중승은 어사대(御史臺) 즉 사헌부 관원의 별칭이다.
♣ 중신[重身]임신했다는 뜻.
♣ 중심[仲深]명대(明代)의 문신이며 대학자인 구준(丘濬)의 자(字).
♣ 중심동소락[衆心同所樂]맹자(孟子)에, “혼자 즐거움을 즐김이 뭇 사람과 즐거움을 즐김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임금은 뭇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같이해야 한다는 뜻이다.
♣ 중씨[仲氏]남의 둘째 형의 높임말. 중형(仲兄; 자기의 둘째 형)
♣ 중아시[中阿詩]중아시는 어진 사람이 언덕에서 은둔해 있음을 읊은 것으로 시경(詩經)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둔할 집을 이룬 것이 언덕에 있으니 훌륭한 분이 편히 쉬는 곳이네, 홀로 자고 깨어 노래하지만 영원히 이대로 할 것을 맹세하네.[考槃在阿 碩人之薖 獨寐寤歌 永矢弗過]"라고 하였다.
♣ 중앙[重陽]하늘.
♣ 중앙정색[中央正色]황색(黃色)을 말한다. 오행(五行) 가운데 토(土)는 중앙에 속하며 그 색깔은 바로 황색이다.
♣ 중양[重陽]9월 9일을 말한다. 9의 숫자는 양(陽)에 속하기 때문에 양이 중복되었다는 뜻으로 중양이라고 한 것이다.
♣ 중양절[重陽節]음력 9월 9일이다. 오행에서 9의 수를 양수(陽數)로 보는데 9월에다 9일이 겹쳤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중언부언[重言復言]거듭한 말을 또 말한다. 똑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 함.
♣ 중언축록[中原逐鹿]중원은 중국 또는 천하를 말하며 축록은 서로 경쟁한다는 말. 영웅들이 다투어 천하는 얻고자 함을 뜻함
♣ 중역[重譯]여러 번 통역을 거침. 지역이 워낙 멀면 여러 지방의 통역을 거쳐야만 의사가 소통되기 때문임. 문선(文選) 사마상여(司馬相如) 유파촉격(喩巴蜀檄)에, “강거(康居)ㆍ서역(西域)이 중역(重譯)을 거쳐서 조회를 청했다.” 하였음.
♣ 중연[仲淵]박미(朴瀰)의 자(字)이다.
♣ 중연[重淵]아주 깊은 곳을 이름. 심연(深淵)과 같은 말. 땅 밑에 구연(九淵)이 있다 해서 중연이라 칭한다.
♣ 중영[重英]시경(詩經) 청인편(淸人篇)은 군사가 국경(國境)에서 오래 돌아오지 못한 것을 읊은 시인데, 그 시에 ‘이모중영(二矛重英)’이란 구절이 있다.
♣ 중오[重五]음력 5월 5일 즉 단오(端午)를 말함. 중오(重午)라고도 하는데, 중은 겹친다는 뜻.
♣ 중오일[重午日]5월 5일 단오절(端午節)을 말한다.
♣ 중왈[重曰]한이 다하지 못해 진술하는 경우에 쓰이는 악절의 이름.
♣ 중용[中庸]주자(朱子; 朱熹)는 ‘中’은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일이 없는 것’을 이르고, ‘庸’은 ‘평상(平常; 항상 변하지 않고 일정한 항구성)’을 말로, [中者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 庸平常也.] 곧,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고 항구성을 지니고 변함이 없는 성인(聖人)의 도가 곧 중용이라는 것이다. 중용의 ‘中’은 무조건 중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이건 그때그때 누구에게나 가장 알맞고 모든 일에 가장 적절한 도리. 그것이 곧 ‘中’이다. ‘庸’은 언제 어디에나 있고 영원 불변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용’은 순간적인 진리인 듯하면서도 우주의 근본이 되는 영원무궁한 진리인 것이다. 곧 ‘중용’의 도는 가장 쉬운 길인 듯하면서도 상당한 덕(德)의 수양이 없이는 근처에도 가기 힘든 도인 것이다.
♣ 중용[中庸]중은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이고 용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유가에서 최고의 도덕 표준으로 여김.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중용의 도덕은 바로 가장 높은 것이다.[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하였음.
♣ 중용[仲容]진(晉) 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함(院咸)의 자인데, 완적(院籍)의 조카로 재주가 뛰어나고 호쾌하여 완씨 집안의 중심 인물로 칭송받았다.
♣ 중용수구[中庸首句]중용 제일장의 첫 구절인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는 것을 가리킨 말이다.
♣ 중용지도[中庸之道]마땅하고 떳떳한 도리.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평범함.
♣ 중울거[仲蔚居]사람 키를 넘을 정도로 쑥대가 우거져 있으리라는 말이다. 후한(後漢) 장중울(張仲蔚)이 쑥대가 우거진 집에 몸을 숨기고 가난하게 살면서 수양했던 고사가 있다. 《高士傳 中 張仲蔚》
♣ 중원[中元]백중절(百中節)인 음력 7월 15일을 가리킨다.
♣ 중원[中原]충주(忠州)의 옛 이름이다.
♣ 중원록[中原鹿]진(秦)나라 간신(姦臣) 조고(趙高)가 임금에게 사슴을 몰고 와서 말[馬]이라 속였다. 그 뒤에 변사(辯士) 괴철(蒯徹)이, “진나라가 사슴을 놓쳤으매 여러 사람들이 쫓는데 발이 날랜 자가 먼저 얻는다.” 하였다. 이것은 조고(趙高)의 사슴에 관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진나라가 나라를 잃은 데에 비유하였다.
♣ 중원축록[中原逐鹿]중원(中原)은 중국(中國) 또는 천하(天下)를 말하며 축록(逐鹿)은 한 마리 사슴을 잡으려고 서로 경쟁한다는 말로 영웅들이 서로 다투어 제왕의 자리나 어떤 지위를 얻고자 함을 뜻한다.
♣ 중유[仲由]중유(仲由)의 자는 자로(子路)인데 공자의 제자이다. 중유는 경솔한 한편 충직하였다.
♣ 중유재[仲由材]중유는 공자(孔子)의 제자로 자(字)는 자로(子路), 취재는 취할 만한 재질을 말한다. 공자는 “내가 뗏목을 타고 바다로 가려고 하는데 나를 따를 자는 중유일 것이다.” 하였다. 자로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자, 공자는 “중유는 용맹을 좋아하는 것은 나보다 낫지만 취재할 것이 없다.” 하였다. 《論語 公冶長》
♣ 중윤[仲胤]김기종(金起宗)의 자(字)이다.
♣ 중융[中庸]치우침이나 과부족이 없이 떳떳하며 알맞은 상태나 정도
♣ 중은[中隱]대은(大隱)은 도회지에 숨고 중은은 한산한 관직 속에 숨고 소은(小隱)은 산속에 숨는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하급 관직에 있는 것을 뜻한다. 《長慶集 卷五十二 中隱詩》
♣ 중인[中人]권세 있는 귀행자(貴幸者)를 말한다. 진서(晉書) 이밀전(李密傳)에 “이밀이 조정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마침내 한중태수(漢中太守)로 좌천되어 동당(東堂)에서 전별연(餞別宴)을 벌였는데, 무제(武帝)가 부(賦)를 짓게 하였다. 그 부의 끝부분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연줄이 있어야 한다. 관(官)에 잘 아는 귀행자[中人]가 없으면 초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하나, 훌륭한 임금이 위에 있으니 이 말이 어찌 사실이랴’ 하였다.” 했다.
♣ 중인환시[衆人環視]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봄.
♣ 중일[中日]사흘 중의 ‘가운데 날’의 뜻이다. 간지(干支)에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가 드는 날을 초일(初日)이라 하고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가 드는 날을 중일이라 하고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未)가 드는 날을 종일(終日)이라 하며, 군문(軍門)에서 초일에는 연습하고 중일에는 시사(試射)한다는 등 규례를 둔다. 또, 중일시사(中日試射) 등에서 입격(入格)한 자에게는 직부전시(直赴殿試) 등 상주는 규례가 있다.
♣ 중임석[重任石]큰 돌을 지다.
♣ 중자아[仲子鵝]중자는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청렴하기로 이름난 진중자(陳仲子)인데 그의 형님 집에서 거위 고기를 먹다가 그것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예물로 받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가 토해 버렸다 한다.
♣ 중장원[仲長園]후한(後漢)의 명사(名士) 중장통(仲長統)의 원림(園林)으로, 오준(吳竣)의 정원을 가리킨다. 중장통이 자기의 원림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심경을 읊은 ‘낙지론(樂志論)’이라는 짧은 글이 유명하다. 벼슬로 부를 때마다 병을 핑계대곤 하였는데, 일찍이 그의 뜻을 밝히기를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시내를 굽어보는 곳, 도랑을 파 주위를 두르고 대숲이 에워싼 그곳이면 사체(四體)를 편히 쉬면서 우주 밖으로 나가 노닐 수가 있으니, 어찌 제왕의 문에 들어가는 것을 부러워하랴.” 하였다. 《後漢書 仲長統傳》
♣ 중정인의공[中正仁義功]중(中)은 도리에 알맞게 하는 것으로 예(禮)를 바꾸어 쓴 것이며, 정(正)은 바르게 하는 것으로 지(智)를 바꾸어 쓴 것이며, 사람의 극(極)은 인간의 도리에 가장 알맞은 법칙으로 지선(至善)과 같은 뜻이라 한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성인은 중정과 인의로 정하되 정 공부(靜工夫)를 주장하여 사람의 극을 세웠다.[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 立人極焉]”하였으므로 이 글을 인용한 것이다.
♣ 중조[仲詔]명 나라 미만종(米萬鍾)의 자. 돌을 몹시 좋아하여 별호(別號)를 우석(友石)이라 하였음.
♣ 중주[中州]물 속에 있는 작은 섬이라고도 함
♣ 중주[中酒]술이 반쯤 취함. 사기(史記) 번쾌전(樊噲傳)에, “項羽旣饗軍士 中酒 亞父謀欲殺沛公”이라고 한 데 보임.
♣ 중주[中州]중주(中州)는 송 나라를 가리킨다.
♣ 중지완재목[中坻宛在目]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진풍(秦風) 겸가(蒹葭)에 “……저기 저 사람이 물가에 분명 있도다. 물길 따라 좇아가려 하나 모래톱에 완연히 보이네.[所謂伊人 在水之湄 遡游從之 宛在水中坻]" 한 데서 온 말이다.
♣ 중채현주록[衆綵絢朱綠]당(唐) 나라 때 4, 5품의 벼슬아치는 주색(朱色)의 관복을, 6품 이하는 녹색의 관복을 입은 데서 연유한 것으로 벼슬아치를 뜻함.
♣ 중천[重泉]지명. 걸이 탕왕을 잡아둔 곳.
♣ 중천뢰[中天籟]천둥소리는 크게 깨우침을 뜻한다.
♣ 중천액[中天厄]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과 같은 전성기(全盛期)를 지나면 일단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필연적인 운명.
♣ 중초탁고계[衆草擢孤桂]진(晉) 나라 극선(郤詵)이 천하 제일의 대책문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계수나무 숲 속의 가지 하나요, 곤륜산의 한 조각 옥돌이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자칭한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 중추[中樞]중추원을 말한다. 중추원은 고려 때 왕명(王命)의 출납과 숙위(宿衛)ㆍ군기(軍機) 등의 일을 맡던 관아. 밀직사(密直司) 혹은 추밀원(樞密院)으로 고친 때도 있었다.
♣ 중춘[仲春]음력 2월
♣ 중충좌[重虫坐]충사(虫絲)가 겹겹이 쌓인 누추한 자리를 말함. 당(唐) 나라 유장경(劉長卿)의 숙쌍봉사시(宿雙峯寺詩)에 “적막한 선송의 자리엔 방 가득히 충사가 얽혀 있네[寥寥禪誦處 滿室虫絲結]”하였고, 유신(庾信)의 시에는 “충사가 정히 몇 겹이던고[虫絲定幾重]”하였다.
♣ 중취군혼[衆醉群昏]중취군혼은 세상이 온통 술에 취한 듯 혼탁하기 그지없다는 말로, 세상을 굳이 탓할 게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초(楚) 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혼탁한 세상 속에서 나 홀로 깨끗하고 취한 세상 사람 속에서 나 홀로 깨어 있기 때문에 쫓겨났다.”는 굴원의 말에 대해, “세상이 모두 혼탁하면 왜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고,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으면 왜 술지게미를 먹고 박주(薄酒)를 마시려 하지 않는 것인가.” 하고 어부(漁父)가 힐책하고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면 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되리.”라는 노래를 뱃전을 치고 부르면서 떠나갔다는 내용이 전한다.
♣ 중취독성[衆醉獨醒]세상의 모든 사람이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고 있지만 혼자 깨끗한 삶을 산다는 뜻의 고사성어.
♣ 중표[中表]내외종(內外從) 사촌을 말한다.
♣ 중행[重行]자꾸 가다.
♣ 중향성[衆香城]유마힐경(維摩詰經) 하(下) 향적불품(香積佛品) 권10의 “이름이 중향이란 나라가 있는데 불호(佛號)는 향적(香積)이라 한다.”에서 나온 것으로 흔히 온갖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곳을 비유하는데, 여기서는 그 뜻이 자세치 않다.
♣ 중현[重玄]도(道)의 차원을 말한다. 도덕경(道德經) 1장에 “도는 현묘한 중에서도 더욱 현묘하여 만물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玄之又玄 衆妙之門]”라고 하였다. 이것을 중현(重玄)이라 한다. 현묘(玄妙)한 이치란 말이다.
♣ 중형[仲兄]자기의 둘째 형. 중씨(仲氏; 남의 둘째 형)
♣ 중화[重華]순(舜) 임금의 이름인데, 전하여 성왕(聖王)의 뜻으로 쓴다.
♣ 중화[中和]중은 희로애락이 발동하지 않은 것이고, 화는 그것이 발동하여 모두 절조에 맞는 것임. 《中庸 首章》
♣ 중화[中和]중화는 성정(性情)의 덕(德)으로, 마음이 정(靜)했을 때 존양(存養) 공부를 잘하는 것을 중(中), 마음이 동(動)했을 때 성찰(省察) 공부를 잘하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용(中庸)에 “중화를 극진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고 만물이 생육된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주자(朱子)는 “내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발라지고 내 기(氣)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순해진다.” 하였다.
♣ 중화[中和]중화는 성정(性情)의 덕(德)으로, 정(靜) 공부를 잘하여 마음을 미발(未發) 상태로 유지해서 성(性)의 덕을 함양(涵養)하는 것을 중(中), 마음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하며, 위육(位育)은 ‘천지위언 만물육언(天地位焉 萬物育焉)’의 준말로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게 되고 만물이 화육된다.’는 뜻인데 이것은 곧 중화를 어김없이 잘 해나간 데서 오는 공효이다.
♣ 중화[中和]천지 만물이 각자 제 살 곳을 얻어 서로 화합하는 경지를 말한다.
♣ 중화계방훈[重華繼放勳]중화는 순(舜) 임금의 이름이고, 방훈(放勳)은 요(堯) 임금을 일컫는 말. 순 임금이 요 임금을 이어 천자가 되어서,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 어진이들을 항상 들어오게 하고, 사방으로 눈을 밝혀 견식을 넓혔다는 고사이다. 《書經 舜典》
♣ 중화대지[重華大智]맹자(孟子)는, “순(舜)은 큰 지혜[大智]이다.” 하였다. 서경(書經)
♣ 중화송[中和頌]중화는 정치가 화평하게 됨을 뜻한 것이고, 왕포(王褒)가 일찍이 중화송을 지었다.
♣ 중화악[中和樂]당(唐) 나라 때 소의군 절도사(昭義軍節度使) 왕건휴(王虔休)가 지은 악곡(樂曲)이다.
♣ 중화오현[重華五絃]중화는 순 임금의 이름이고 오현금은 다섯 줄짜리 거문고이다. 순 임금이 오현금을 타며 남풍의 시를 노래하니 천하가 다스려졌다고 한다. 《史略 卷 1 帝舜有虞氏》
♣ 중화요제여[重華堯帝如]순(舜) 임금의 훌륭한 덕이 요와 같았으므로 요의 선위(禪位)를 받아 천자가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서경(書經) 순전(舜傳)에 “옛 제순(帝舜)을 상고해 보니 중화(重華)가 요 임금에 합하시니, 깊고 지혜로우며 문채롭고 밝으시며 온순하고 공손하며 미덥고 독실하여 그윽한 덕이 위에 있는 요 임금에게 들리자, 이에 천자의 지위를 명하셨다.[曰若稽古帝舜 曰重華協于帝 濬哲文明 溫恭允塞 玄德升聞 乃命以位]"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 중화절[中和節]중화절은 본디 1월 그믐날이었는데 당 덕종(唐德宗)때 재상 이필(李泌)의 건의에 따라 2월 초하루로 정해졌으며, 이날 민간에서는 푸른 주머니에 오곡백과의 종자를 담아 서로 주고받았고 농촌에서는 의춘주(宜春酒)를 빚어 구망신(句芒神)에 제사를 지내 풍년을 기원하였으며 백관은 천자에게 농서(農書)를 바쳤다고 한다.
♣ 중화척[中和尺]중화척은 본디 중국 조정에서 중화절인 음력 2월 초하룻날 천자가 대신과 외척들에게 내려주었던 잣대이다.
♣ 중훼[仲虺]상서(商書)에 중훼지고(仲虺之誥)란 편(篇)이 있다.
♣ 중흥사[中興寺]서울 삼각산 노적봉 남쪽에 있던 절인데, 본디 중흥사(重興寺)라 표기한다.
♣ 즉묵성외소미우[卽墨城外燒尾牛]전국 시대 제(齊) 나라 전단(田單)이 외로이 즉묵성을 지키고 있다가, 천여 마리의 소에 붉은 옷을 입히고 뿔에 칼날을 매단 뒤, 소 꼬리에 갈대를 묶어 불을 붙여서 성 밖으로 내몰아 연(燕) 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한 고사가 있다. 《史記 田單傳》
♣ 즉어맹[鰂魚盟]강동(江東) 사람들은 속임수로 오적어의 뱃속에 든 먹물로 증서(證書)를 써 주고 남에게서 재물을 꾸어 가곤 하는데, 시일이 오래 가면 그 먹물이 다 지워져 버린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즉즉[卽卽]충실한 모양, 봉황의 수컷이 우는 소리
♣ 즐즐[櫛櫛]죽 잇닿아 늘어선 모양
♣ 즐즐[喞喞]탄식하는 소리, 낮고 작게 두런거리는 소리, 벌레 소리, 새 소리, 쥐의 소리
♣ 즐풍목우[櫛風沐雨]바람으로 빗을 삼아 머리를 빗고 빗물로 머리를 감는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어려움과 고생을 참고 견디며 일에 골몰한다는 말.
♣ 즙[葺]짚으로 지붕을 잇다
♣ 즙린[葺鱗]비늘을 기우듯이 가지런히 한다.
♣ 즙즙[戠戠]모여드는 모양
♣ 증[曾]일찍이.
♣ 증[矰]화살의 일종으로, 오늬에 줄을 매어서 쏘게 되어 있다.
♣ 증거[曾據]높이 날아오르다.
♣ 증격[增擊]더욱 세게 친다.
♣ 증계리[曾季貍]송(宋) 나라 학자. 자는 구보(裘甫). 누차 천거를 받았으나 끝내 출사(出仕)치 않았음.
♣ 증고[增估]상사의 공문에 의해 환곡을 돈으로 받을 때 백성들에게서는 시가대로 받아 상사에는 상정가(詳定價)대로만 바치고 그 차액을 착복하는 일.
♣ 증굉보[曾宏父]송 나라 여릉(盧陵) 사람. 저서에는 우각포서(右刻鋪敍)가 있음.
♣ 증균[蒸菌]축축한 땅에서 버섯이 생기는 것을 이른 말로,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사람에게는 기쁨과 노여움 따위가 있어 그것이 마치 음악이 피리의 구멍에서 나오듯, 버섯이 축축한 땅에서 나오듯이 밤낮을 번갈아 나오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모른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증답영신형[贈答影神形]도연명 시에 형증영(形贈影)ㆍ영답형(影答形)ㆍ신석(神釋) 등의 편이 있음.
♣ 증도시[贈盜詩]도둑에게 준 시.
♣ 증리생진[甑裏生塵]대단히 가난함을 비유한 말. 후한(後漢) 때 범염(范冉)이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를 위해 노래하기를 “시루 속에 먼지 쌓인 범사운이다[甑中生塵范史雲]”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사운은 곧 범염의 자이다. 《後漢書 卷八十一》
♣ 증모[烝髦]증은 나아간다는 뜻이고, 모는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여 풍년이 들게 한 농부들을 높여 이른 말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포전(甫田)에……“우리 훌륭한 농부들을 찾아가 위로하네[烝我髦士]" 한 데서 온 말이다. 공경(公卿)이 자기 채지(采地)의 백성들을 이렇게 위로했던 것이다.
♣ 증모애[曾母愛]증자가 비읍(費邑)에 있을 때 그와 성명이 같은 사람이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어떤 자가 베를 짜고 있던 증자 어머니에게 “증삼(曾參)이 사람을 죽였답니다.”라고 알리자, 내 자식이 그럴 리가 없다고 믿지 않고 계속 베틀에 앉아 있다가 세 번째 딴 사람이 또 와서 똑같은 말을 하니, 진짜로 믿고 겁이 나 도망갔다고 한다. 《戰國策 秦 卷二》
♣ 증모혹[曾母惑]증모는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의 어머니를 말한다. 증삼이 비(費) 땅에서 살 때 그와 이름이 같은 자가 사람을 죽여 옆사람이 잘못 알고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알렸다. 처음에는 믿지 않고 변함없이 베를 짜고 있다가 나중에 또 두 사람이 계속 와서 알리자 겁이 난 나머지 북을 던져버리고 담을 넘어 도망갔다 한다. 흔히 거짓말이라도 여러번 들으면 그 영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비유로 쓰인다. 《戰國策 秦二》
♣ 증민[曾閔]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을 합칭한 말인데, 모두 효행(孝行)이 뛰어났다.
♣ 증민[蒸民]시경(詩經) 대아(大雅) 중의 편(篇) 이름으로 주(周)의 시조(始祖) 후직(后稷)의 공덕을 칭송한 글인데, 후직은 농사를 발달시켰으므로 후세에 곡식의 신[穀神]으로 받든다.
♣ 증부[曾敷]겹겹이 피다.
♣ 증빙[增冰]겹친 얼음.
♣ 증사[蒸砂]“만일 음욕(淫慾)을 끊지 않고 선정(禪定)을 닦으려는 자는, 마치 모래ㆍ돌을 쪄 밥을 이루려 함과 같으니라.” 《楞嚴經》
♣ 증사[曾思]증자와 자사.
♣ 증삼[曾參]증삼은 공자의 제자로 증자(曾子)라 존칭한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증석(曾晳)을 잘 섬겼다. 《孟子 離婁上》
♣ 증삼덕[曾參德]신체를 조금도 훼상함이 없이 죽을 때까지 온전하게 간직함을 이른 말. 증자(曾子)가 임종시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르기를, “내 손발을 열어 보아라. …… 지금에야 내가 내 신체의 훼상을 면했음을 알았노라.”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泰伯》
♣ 증삼살인[曾參殺人]터무니없는 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되풀이하면 믿지 않을 수 없다란 뜻의 고사성어.
♣ 증삼유주육[曾參有酒肉]부모님을 봉양할 만한 재력이 생겼다는 뜻이다. 증삼은 부모에게 몹시 효성스러웠다.
♣ 증삼투저[曾參投杼]증삼(曾參)같은 현인이 사람을 죽일 리가 결코 없건마는, 계속 세 차례에 걸쳐 그런 말이 증삼의 어미에게 들려 오자, 베를 짜다가 북을 내던지고 도망쳤다는 고사가 전한다. 《戰國策 秦策 2》
♣ 증상[增傷]더욱 마음 아프다.
♣ 증상[烝嘗]증(烝)은 겨울에 올리는 제사이고, 상(嘗)은 가을에 올리는 제사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봄 제사, 여름 제사, 가을 제사, 겨울 제사를 선공과 선왕에게 올리니.[禴祠烝嘗 于公于先]”하였다.
♣ 증생진[甑生塵]워낙 가난하여 밥을 끊일 것이 없어서 시루에 먼지가 쌓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증석[曾晳]증석은 공자(孔子)의 제자. 사생(死生)을 달관하여 계무자(季武子)가 병이 위독한데도 그 문에 기대어 서서 노래를 불렀다 함. 《禮記 檀弓下》
♣ 증성[曾城]전설 속에 나오는, 곤륜산(崑崙山)에 있다고 하는 선향(仙鄕)이다.
♣ 증성구중[增城九重]아홉 겹의 큰성. 우임금이 곤륜산을 헐어 홍수를 막고서 그 헌산에 성을 쌓았다는 설.
♣ 증소[橧巢]증(橧)은 섶[薪]을 쌓아 놓고 그 위에서 자는 것을 이름. 상고의 임금은 궁실(宮室)이 없어서 여름이면 신시(薪柴)를 모아놓고 그 위에서 살았는데, 마치 조소(鳥巢)와 같았다.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옛날 선왕이 집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에는, 겨울엔 동굴에서 살고 여름엔 나뭇가지를 모아 만든 보금자리 위에 누워서 지냈다.[冬則居營窟 夏則居橧巢]”라는 말이 있다.
♣ 증약[曾若]윤가기(尹可基)의 자이다.
♣ 증언[贈言]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의 “노자가 전송하면서, ‘나는 들으니 부귀한 자는 사람을 보낼 때 재물을 주고, 어진 사람은 사람을 보낼 때 말을 준다.’라고 했다[老子送之曰 吾聞富貴者送人以財 仁人者送人以言].” 한 데 보임.
♣ 증예[烝乂]증예는 차츰차츰 선하게 한다는 뜻으로 순 임금의 덕화를 말함. 서경(書經) 우서(虞書) 요전(堯典)에 “홀아비가 있으니 우순(虞舜)입니다. 아버지는 완악하고 어머니도 사나우며 이복 동생 상(象)도 거만하였는데, 차츰차츰 선하게 해서 간사한 데 이르지 않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음.
♣ 증요[增撓]더욱 매다.
♣ 증유진[甑有塵]양식이 떨어져서 여러 날 솥에 밥을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먼지가 난다는 것이다.
♣ 증자[曾子]춘추 시대의 유학자(儒學者). 이름은 삼(參), 자(字)는 자여(子與). 높이어 증자(曾子)라고 함.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으나 효성이 지극하고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온후 독실(溫厚篤實)해서 죽을 때까지 몸에 작은 상처 하나 남기지 않았다고 함. 공자의 덕행과 학설을 정통으로 주술(祖述)하여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 孔汲)에게 전했음. 맹자는 자사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 알려짐. 효경(孝經)의 저자라고 알려짐.
♣ 증점[曾點]공자(孔子)의 앞에서 여러 제자들이 각기 뜻을 말[言志]할 때, 끝으로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 옷이 이미 이루어지거든 관자(冠者) 5, 6명과 동자(童子) 6, 7명과 더불어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쐬며 읊조리고 돌아오리이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 말하여 공자를 감탄하게 하였다.
♣ 증점사슬[曾點捨瑟]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각자의 뜻을 묻자, 증점이 타던 비파를 놓고 일어나서 “늦은 봄에 봄옷이 다 지어지면 대여섯 명의 어른과 예닐곱 명의 아이들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서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공자가 감탄하였다. 《論語 先進》
♣ 증점사슬장[曾點舍瑟章]소망(所望)을 말해보라는 공자(孔子)의 물음에 증점(曾點)은 타던 비파[瑟]를 내려놓고 “늦은 봄에 동자(童子)와 관자(冠者)를 데리고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쏘이고 시를 읊고 돌아오겠습니다.” 한 장(章)을 말한다. 《論語 先進》
♣ 증점슬[曾點瑟]높은 기상을 상징한 말이다. 논어(論語) 선진에 “’점(點)아 너는 어떠냐?’ 하자, 비파를 타다가 비파를 놓고 대답하기를 ‘저문 봄에 봄옷이 다 이뤄지거든 관자(冠者) 5~6인, 동자(童子) 6~7인과 함께 기수[沂]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렵니다.’ 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증제[烝祭]겨울 제사 이름. 봄 제사를 약(禴), 여름 제사를 사(祠), 가을 제사를 상(嘗), 겨울 제사를 증(烝)이라 한다.
♣ 증제[贈綈]제포는 두꺼운 명주 솜옷을 이름. 전국 시대 위(魏) 나라 수가(須賈)가 진(秦) 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어 보이는 옛 친구 범수(范睢)를 만나서 그를 몹시 애처롭게 여긴 나머지 옛날의 우정(友情)을 생각하여 그에게 제포 한 벌을 주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范睢傳》
♣ 증증[丞丞]나아가는 모양
♣ 증증[增增]수효가 많은 모양
♣ 증증효[烝烝孝]임금이 부모에게 차츰차츰 선도(善道)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지극한 효성을 말한다.
♣ 증지[曾枝]겹겹이 덮인 가지.
♣ 증참[曾參]증삼은 공자의 제자로 효도로 이름난 사람이다.
♣ 증창승부[憎蒼蠅賦]송(宋)의 구양수(歐陽脩)가 증창승부(憎蒼蠅賦)를 써 파리의 구차하고 얄미운 몰골을 역력히 그려 놓았음.
♣ 증책거역[曾簀遽易]증자가 임종시에 침석(寢席)이 지나치게 화려해서 당시의 예법에 맞지 않다고 하여 다른 자리로 바꾸어 누운 뒤 죽은 일. 《禮記 檀弓上》
♣ 증처회유[贈處回由]성문(聖門)의 뛰어난 제자들처럼 법도에 맞는 교우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안회(顔回)와 자로(子路; 이름은 由)가 작별을 할 때, 안회가 전별 선물로 좋은 말을 해 주고[贈] 자로가 다시 안회에게 처신하는 방도[處]를 일러 주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禮記 檀弓下》
♣ 증타[甑墮]후한(後漢) 때 맹민(孟敏)이 시루[甑]를 짊어지고 가다가 시루 한 개가 땅에 떨어져 깨졌는데, 돌아보지 않고 그냥 갔다. 마침 곽태(郭泰)가 보고 그 까닭을 묻자 “시루가 이미 깨졌는데 돌아보면 무얼 하겠느냐.” 대답하자 곽태가 기이하게 여겨 유학(遊學)하기를 권했던 고사이다.
♣ 증행언[贈行言]“부귀한 자는 재물(노자)로써 사람을 작별하고, 어진 자는 말로써 사람을 보낸다.”는 옛말이 있다.
♣ 증형승[證衡僧]선업(禪業) 닦는 사람의 심정을 알겠다는 뜻.
♣ 증화[曾華]겹겹이 핀 꽃.
♣ 증희[增欷]거듭 탄식하다
♣ 지[只]다만.
♣ 지각[地角]가장 먼 곳은 하늘의 가요, 땅의 모퉁이[天之涯之地角]라 한다.
♣ 지각[池閣]지각은 물가의 정자.
♣ 지각[芝閣]지각은 지초(芝草)를 저장한 집을 말하기도 하고 조정의 대각(臺閣)을 말하기도 한다.
♣ 지간[芝玕]지초ㆍ낭간. 지초는 신선이 먹는 영지(靈芝)를 말한 것이고, 낭간은 곤륜산(崑崙山) 신선의 사는 곳에 있는 구슬 나무. 안평대군의 또 한 호(號)가 낭간거사(琅玕居士)이다.
♣ 지강급미[舐糠及米]겨를 핥다가 마침내 쌀까지 먹어치운다는 뜻으로, 외부의 침범이 마침내 내부에까지 미침을 비유하거나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음. 사기(史記) 오왕비전(吳王濞傳)에 “겨 핥다 쌀에 미친다는 속담이 있다.[俚語有之舐糠及米]" 하였는데, 그 주에는 “겨를 핥다 쌀에 미친다는 말은 즉 토지를 조금씩 빼앗기다 보면 끝내는 나라를 망치는 데까지 이른다는 뜻이다.” 하였다.
♣ 지개[芝蓋]버섯 모양의 일산(日傘)이라는 뜻으로, 태액지의 금경(金莖)을 받는 말이다.
♣ 지거[芝車]선인(仙人)의 수레를 일컫는 말이다.
♣ 지견향[知見香]불법(佛法)의 공부를 향(香)에 비유하여 정향(定香)・계향(戒香) 등으로 말한다. 지견(知見)은 불법에 대한 지견이란 말이다.
♣ 지계매존명패옥[至戒每存鳴佩玉]예기(禮記) 옥조(玉藻)에 “수레를 타면 말방울 소리를 듣고 걸을 때는 패옥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을 단속한다.” 하였다.
♣ 지고불윤[脂膏不潤]청백리(淸白吏)를 표현하는 말이다. 동한(東漢)의 공분(孔奮)이 부유한 고장(姑臧) 고을에 4년 동안 수령으로 있으면서 재물을 탐하지 않고 청렴한 자세로 일관하자, 어떤 이가 조롱하기를 “기름덩어리 속에 놔두었건만 제 몸 하나도 윤기가 흐르게 하지 못한다.[置脂膏中 亦不能自潤]”고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東漢觀記 孔奮傳》
♣ 지고증불염[脂膏曾不染]후한(後漢) 공분(孔奮)의 행동이 너무 심할 정도로 깨끗하자, 사람들이 “기름덩어리 속에 넣어 두어도 자신을 윤택하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置脂膏中 不能自潤]”고 조롱했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31 孔奮傳ㆍ東觀漢記》
♣ 지고포천리[脂膏飽千里]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나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다. 선진(先秦) 때 임공자(任公子)라는 사람이 50필의 거세한 소를 미끼로 매달아 회계산(會稽山)에 걸터앉아서 동해 바다로 낚시줄을 던졌는데, 1년 뒤에 큰 고기를 낚아 이를 건육(乾肉)으로 만든 뒤 절하(浙河) 이동, 창오(蒼梧) 이북의 사람들을 질리도록 먹여주었다는 내용이다.
♣ 지공[支公]진(晉)의 고승(高僧)인 지둔(支遁). 사안(謝安), 왕희지(王羲之)등과 함께 가까이 지냈으며, 애제(哀帝)의 명을 받고 금중(禁中)에 와 설법을 했는데, 그 명성이 당대를 풍미하였음. 《梁高僧傳 四》
♣ 지공제결선아명[只恐鵜鴂先我鳴]풀이 시들어서 꽃이 피지 않을까 두렵다는 뜻이다. 이소경(離騷經)에, “두견새가 먼저 울어 풀들로 하여금 꽃피지 못하게 할까 두렵다.” 하였다.
♣ 지과[止戈]간과(干戈)를 지식(止息)시킨다는 뜻으로, 전쟁이 없는 태평 세대를 말한다. ‘무(武)’자를 풀이하면 지과(止戈)가 되는데 이것은 무(武)의 목표가 간과(干戈; 전쟁)를 그치게 하는 데 있다는 뜻이다.
♣ 지과경[止戈經]지과(止戈)는 무(武)의 파자(破字)로서 곧 무경(武經)을 의미한 것임. 좌전(左傳) 선공(宣公) 12년 조(條)에 “夫文止戈爲經”이라 하였음.
♣ 지과필개[知過必改]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쳐라.
♣ 지관[止觀]불교(佛敎)의 중요한 수도 방법으로서 지(止)는 곧 망념(妄念)을 제지하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말하고, 관(觀)은 곧 사리(事理)를 관조(觀照)하여 제법(諸法)을 식별(識別)하는 것을 말함.
♣ 지관[止觀]지관은 불교에서 정(定)ㆍ혜(慧)를 닦는 중요한 두 가지 방법인데, 지는 정적(靜的)으로 망념을 거두어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고 관은 동적(動的)으로 지혜를 내어 진여(眞如)에 계합하는 것을 말한다.
♣ 지광[摯曠]노(魯)의 태사(太師) 사지(師摯)와 진(晉)의 악사(樂師) 사광(師曠).
♣ 지구우[止邱隅]시경(詩經) 소아(小雅) 면만(綿蠻)에 “綿蠻黃鳥 止于丘隅"가 있음.
♣ 지귀[至貴]지극히 오묘한 말.
♣ 지균[指囷]쌀 창고를 손으로 가리켜 보임. 삼국 시대 오(吳) 나라 노숙(魯肅)이 주유(周瑜)에게 쌀 창고를 가리켜 보이면서 그것을 주유에게 준 고사에서 온 말인데, 후세에는 일반적으로 친구 간에 서로 도와주는 것을 비유하여 말한다.
♣ 지극[止棘]파리 떼를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청승(靑蠅)에 참소하는 사람들을 파리로 비유하여 경계시키면서 “윙윙대는 파리 떼 가시나무에 앉아 있네[營營靑蠅 止于棘]”라고 하였다.
♣ 지극지승[止棘之蠅]시경(詩經) 청승(靑蠅)에 “앵앵거리는 쉬파리 가시나무에 앉았도다. 참소하는 사람 못 할 짓 없이 사방의 나라 교란하도다.” 하였다.
♣ 지금[秪今]다만 이제.
♣ 지기[支祈]우(禹)가 치수하면서 세 번이나 동백산(桐柏山)에 가 만난 회와(淮渦)의 수신(水神)으로 우는 그 수신을 경진(庚辰)이라는 신에 맡겨 제어하게 했던 바, 경진이 그를 귀산(龜山)의 발에다 묶어두고 꼼짝 못하게 하여 회수(淮水)가 비로소 제 길을 찾아 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지기(巫支祈). 《繹史 夏禹紀注》
♣ 지기[知己]자기를 참으로 알아주는 이를 말한다. 옛날에, “선비는 지기(知己)를 위하여 죽어 준다.”는 말이 있다.
♣ 지기[支祈]지기는 보통 지기(支祁)라고 하는데 물귀신인 무지기(无支祁)의 약칭이다. 하우씨(夏禹氏)가 홍수를 다스릴 때 그의 목을 굵은 쇠사슬로 묶어 바다 속에 가두었다는 전설이 태평광기(太平廣記) 권467 인용 주석에 나온다.
♣ 지기[支機]직녀성(織女星)의 베틀 고인돌. 집림(集林)에, “有人尋河源 見婦人浣紗 問之 曰此天河也 乃與一石而歸 問嚴君平 君平曰 此織女支機石也”라고 보임.
♣ 지기괴[支祈怪]지기는 괴신(怪神)의 이름으로 지기(支祁), 또는 지기(支奇)ㆍ무지기(無支奇)ㆍ무지기(巫支祁)라고도 한다. 옛날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동백산(桐柏山)에서 회수(淮水)를 빙빙 돌게 하는 물귀신을 잡아 회양(淮陽)의 귀산(龜山) 밑에다 가두어 두었더니, 회수가 그제야 순히 흘렀다 한다.《太平御覽 八百八十二 神鬼部二》 지기를 가두었던 곳에 우물이 있는데 지기정(支祈井)이라 한다. 《鳳陽府志》
♣ 지기석[支機石]지기석은 베틀을 고인 돌. 전설에, 한 무제(漢武帝)가 장건(張騫)으로 하여금 하수(河水)의 근원을 찾아보도록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천하(天河)에 당도하니 어떤 부인이 비단을 빨고 있다가 그에게 돌 하나를 줬다. 장건은 돌아와 그 돌을 가지고 성도의 점장이 엄군평(嚴君平)에게 물어보자 그 돌은 직녀의 베틀을 고인 돌이라 했다 한다.
♣ 지기석[支機石]직녀(織女)가 베틀을 괴었다는 돌. 옛날 어떤 사람이 하원(河源)을 찾아 올라가다가 빨래하는 부인(婦人)을 만나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그 부인이, 여기는 천하(天河)라고 하면서 돌 하나를 주었다. 그래서 가지고 돌아와 엄군평(嚴君平)에게 물으니, 군평이 “이것이 바로 직녀의 지기석이다.” 하였다.
♣ 지기정[支祁井]우(禹) 임금이 물난리를 평정시키고, 수신(水神) 무지기(巫支祈)를 진압했던 고사로서 그 지역에 있는 우물 이름을 지기정(支祁井)이라고 한다고 한다.
♣ 지기지우[知己之友]서로 뜻이 통하는 친한 벗.
♣ 지긴지요[至緊至要]더할 나위 없이 긴요함.
♣ 지난이퇴[知難而退]사정이 좋음을 보고 진격하고,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물러남.
♣ 지남거[指南車]지남거는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탁록(涿鹿)에서 싸울 때 만들었다고 전하는 수레로, 일정한 방향을 향하여서 나아가도록 만들어진 수레이다.
♣ 지남거[指南車]남쪽을 가리켜 보이는 기계가 설치된 수레. 고금 주(古今注) 여복(輿服)에 “주(周) 나라 때 월상국의 사신이 백치(白雉)와 흑치(黑雉) 각 한 마리, 상아(象牙) 한 개를 바치고 돌아갈 때 주공이 지남거를 만들어 주었는데, 1년 만에 무사히 귀국했다.” 하였다.
♣ 지니[芝泥]인주(印朱)를 가리키는 말인데, 또는 자분(紫粉)이라고도 한다.
♣ 지당대신[至當大臣]간언 없이 무조건 당연하다는 간신.
♣ 지당몽[池塘夢]남조(南朝) 송(宋) 나라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집안의 아우 사혜련(謝惠連)의 시를 늘 칭찬했는데, 하루는 뜨락의 연못 가에서 종일 신음만 하며 시를 짓지를 못하다가, 깜박 잠이 들어 혜련을 보고 깨어나서는, “연못가에 봄풀이 돋는구나.[池塘生春草]”를 얻어 뛰어난 시구라고 감탄했다 한다. 멀리 있는 아우를 그릴 때 인용하는 말이다.
♣ 지당생초[池塘生草]남조 송(南朝宋) 때 사영운(謝靈運)이 시 한 구절을 채우지 못해 애를 쓰다가 갑자기 꿈에 아우인 사혜련(謝惠連)을 만나 그에게서 ‘못둑에 봄풀이 나다.[池塘生春草]’라는 구절을 얻었던 데서 온 말이다.
♣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동진(東晉)의 시인 사령운(謝靈運)이 말하기를, “매양 시를 지을 때에 혜련(惠連)을 대하면 문득 아름다운 귀절을 이루었다. 일찍 영가(永嘉)가 서당(西堂)에서 시를 생각하다가 온종일 못 지었는데, 문득 혜련을 꿈에 보고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라는 구를 얻었는데, 그것은 신공(神功)이지, 내 말이 아니다.” 하였다.
♣ 지당춘초구[池塘春草句]지당춘초(池塘春草)의 구절이란 곧 깜짝 놀랄 만한 시구의 일컬음이다. 남조 송 때 사혜련(謝惠連)이 어릴 적부터 글을 잘하여, 족형인 사영운이 그를 매우 대견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한번은 사영운이 하루종일 어떤 시구를 생각하였으나 얻지 못하다가 문득 꿈에 혜련을 만나 그에게서 “지당에 봄풀이 난다.[池塘生春草]"는 시구를 얻고는 이 구절을 대단히 잘된 것으로 여겨, 항상 이르기를 “이 말이야말로 신공(神功)이 들어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였다. 《南史 卷十九 謝惠連傳》
♣ 지덕[至德]숙종(肅宗)의 연호
♣ 지도[至道]송(宋)나라 태종(太宗)의 연호(年號). 서기 995년
♣ 지도[軹道]지도(軹道)는 장안(長安)의 동쪽 30리 되는 곳에 있는 정(亭) 이름으로, 진왕(秦王) 자영(子嬰)이 패공(沛公)유방(劉邦)에게 항복한 곳이다. 사기(史記) 제6권 진 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이세(二世) 3년에 패공이 패상(覇上)에 이르러서 사람을 시켜서 자영(子嬰)에게 항복하게 하니, 자영이 즉시 목에 새끼줄을 걸고 백마에 소거(素車)를 타고 천자의 새부(璽符)를 받들고서 지도 곁으로 나와서 항복하였다.” 하였다.
♣ 지도난문[至道難聞]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성(性)과 천도(天道)는 듣지 못했다.” 한 데서 인용된 말인 듯하다.
♣ 지도림[支道林]도림은 진(晉) 나라의 승려 지둔(支遁)의 자(字)로, 시에 능해 지둔집(支遁集)이라는 시집을 남겼다. 《梁高僧傳 4》
♣ 지도선종내[志道先從內]중용(中庸)에 “군자의 도는 제일 먼저 부부 사이에서부터 시작된다.[君子之道 造端乎夫婦]”는 말이 있다.
♣ 지도인시[至道因是]각기 저는 옳고 남은 그르다 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하여 저것이 있고 저것으로 인하여 이것이 있어’ 인하여 옳은 것도 있고 인하여 그른 것도 있다 하였다. 《莊子》
♣ 지도편달[指導鞭撻]편달(鞭撻)이란 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뜻함.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면서 길이 아닌 곳으로 가거나 비뚜로 나가는 것을 경계하고 격려해 달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 지독지애[舐犢之愛]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으며 사랑한다는 뜻.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에 비유하나 그 방법이 지나쳐 좋지 못함을 말한다.
♣ 지독지정[舐犢之情]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서 귀여워 함. 어버이의 사랑이 맹목적이고 깊음을 일컫는 말이다.
♣ 지동상갱[指動嘗羹]음식이 생길 조짐으로 음식을 먹게 된다는 뜻. 초(楚) 나라 사람이 큰 자라를 정 영공(鄭靈公)에게 바쳤다. 그때 공자 송(公子宋)과 공자 가(公子家)는 어전에 들어가 영공을 뵈려고 하였는데, 공자 송의 식지(食指)가 움직이므로 그 식지를 공자 가에게 보이며 “지금까지 나에게 이와 같은 일이 생기면 반드시 진귀한 음식을 맛보게 되었다.” 하였다. 어전에 들어갔을 때 마침 재부(宰夫)가 자라를 요리하고 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웃었는데, 대부들에게 자라를 먹일 때에 영공은 공자 송을 불렀으나 그에게는 주지 않았다. 공자 송은 노하여 자라가 들어 있는 국 솥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빨면서 나가버렸다. 《左傳 宣公 四年》
♣ 지동지서[之東之西]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함. 곧, 어떤 일에 주관이 없이 갈팡질팡함을 이르는 말.
♣ 지두[指頭]지두화(指頭畫)를 말함.
♣ 지두화[指頭畫]지두화란 손가락 끝이나 손톱에 먹을 칠해서 그리는 그림, 또는 그러한 기법(技法)을 말한다. 이 법은 청 나라 고기패(高基佩)가 창시했다고 한다.
♣ 지둔[支遁]진(晉) 나라 고승(高僧). 진류(陳留)사람으로 자는 도림(道林), 본성은 관씨(關氏). 지둔이 일찍이 지형산(支硎山)에 은거하여 수도(修道)하였고, 뒤에는 여항산(餘杭山)에 은거하다가 애제(哀帝)로부터 부름을 받고 금중(禁中)에서 불법(佛法)을 강론하기도 했는데, 그는 누가 말[馬]을 보내주자 “내가 뛰어난 준마(駿馬)를 사랑한다.”며 기르더니, 또 누가 학(鶴)을 보내주자 “하늘 높이 나는 새를 어찌 가까이 두고 볼 수 있느냐.”며 놓아주었다 한다. 《梁高僧傳 卷四》
♣ 지둔[支遁]진(晉) 나라 진류(陳留), 또는 하동(河東) 임려(林慮) 사람이라 하는데, 자는 도림(道林)이고 원래의 성은 관씨(關氏)이다. 여항산(餘杭山)에 은거하며 도행(道行)을 깊이 생각하다가 25세에 출가하였다. 장자(莊子)와 유마경(維摩經) 등에 통달하였고 세상에서 지공(支公) 또는 임공(林公)이라고 일컬었다. 《世說新語 言語》
♣ 지란옥수[芝蘭玉樹]남의 집안의 우수한 자제(子弟)를 예찬하는 말임.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비유하자면 지란옥수가 뜰안에 자라게 하고 싶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 하였음.
♣ 지란임하방[芝蘭林下芳]공자의 말에, “지초[芝]와 난초는 깊은 숲에 나서 보아주는 이 없음으로써 향기롭지 아니하지 않는다.” 하였다.
♣ 지란지교[芝蘭之交]지초와 난초처럼 향기로운 사귐. 벗끼리 좋은 감화를 주고 받으며 서로 이끌어 나가는 고상한 사귐
♣ 지랑[支郞]중[僧]의 별칭.
♣ 지랑[支郞]지둔을 가리킴. 지둔은 동진(東晉) 때의 중으로 섬(剡) 땅의 앙산ㆍ석성산에서 수도하면서 즉심유현론(卽心遊玄論)ㆍ성불변지론(聖不辨知論)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高僧傳 梁高僧傳 卷四》
♣ 지령[地靈]토지 산천의 신령스러운 기운이다.
♣ 지록[指鹿]조고가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한 고사이다. 사기(史記) 제6권 진 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조고가 난을 일으키려고 하면서 여러 신하들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을까 염려하여 먼저 신하들의 뜻을 시험해 볼 생각으로 이세(二世)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하자, 이세가 웃으면서 ‘승상은 잘 모르는가?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하다니.’ 하면서 좌우에 있던 신하들에게 물으니, 신하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혹은 말이라고 하면서 조고의 뜻에 아부하는 자도 있었다. 혹 사슴이라고 말을 한 자도 있었는데, 조고는 이들을 모두 법으로 얽어 죽였다. 그 뒤에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조고를 두려워하였다.” 하였다.
♣ 지록[芝麓]지록은 청 나라 공정자(龔鼎孶)의 호이다.
♣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함. 간사한 꾀로 윗사람을 농락하고 아랫사람을 겁주어 멋대로 권세를 휘두름. 위압적으로 남에게 잘못을 밀어붙여 끝까지 속이려 함. 중국 진(秦)나라의 환관(宦官) 조고(趙高)가 이세 황제(二世皇帝)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속인 고사에서 유래한 말.
♣ 지뢰[地籟]땅 구멍에서 들리는 소리.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지뢰란 여러 구멍에서 나는 소리이다.[地籟 則衆竅穴是已]" 하였다.
♣ 지뢰[地雷]주역(周易) 복괘(復卦) 상사(象辭)에 “우레가 땅속에 있는 것이 복이다.[雷在地中復]” 한 데서 온 말이다.
♣ 지뢰[地籟]천뢰(地籟)는 자연의 소리이고, 지뢰(地籟)는 땅 위에 있는 물건의 소리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네가 지뢰는 들었으나 천뢰는 듣지 못했다.[女聞地籟未聞天籟矣]" 하였다.
♣ 지륜[芝綸]지륜은 왕의 글에 대한 미칭이다.
♣ 지름주공근[指廩周公瑾]공근은 오(吳) 나라 주유(周瑜)의 자다. 주유가 대도독(大都督)이 되어 조조(曹操)와 대치할 때, 조조가 세객(說客)으로 보낸 장간(蔣幹)을 데리고 창고를 보여 주면서 군량이 많다는 것을 과시한 데서 온 말이다. 《資治通鑑 卷六十六》
♣ 지릉[智陵]태조(太祖)의 선조인 익조 성익대왕(翼祖聖翼大王)의 능이다.
♣ 지리[指李]이씨(李氏)임을 말한 것이다. 옛날 노자(老子)는 성이 이씨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임신한 지 81년 만에 거닐면서 오얏나무 아래에 이르자 왼쪽 겨드랑을 뚫고 나와서 오얏나무를 가리켰기[指李] 때문에 이씨로 성을 삼았다 한다. 《史記 老子列傳 注》
♣ 지리멸렬[支離滅裂]갈가리 흩어지고 찢어져 없어짐. 뿔뿔이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
♣ 지리소[支離疏]장자(莊子)가 꾸며 낸 인물로, 몸은 비록 불편해도 정신은 충실하게 유지하면서 국가의 명에 시달림을 받지 않는 자유인의 비유로 쓰인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꼽추인 지리소는, 국가에서 무사를 동원할 적에도 활개를 치고 다니며, 큰 공사를 일으킬 적에도 병신이라고 치지도외(置之度外)되는데, 병자에게 곡식을 나눠 줄 때면 으레 3종(鍾)의 곡식과 열 다발의 땔나무를 받곤 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 지리연숙대견오[支離連叔對肩吾]지리소ㆍ연숙(連叔)ㆍ견오(肩吾)는 모두 상고 시대 전설적인 도인(道人)들로서, 그들이 서로 만나 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들이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ㆍ인간세(人間世)에 나타나 있다.
♣ 지리자[支離子]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꼽추 지리소(支離疏)처럼 세상의 해침을 받지 않고 자신의 덕을 온전하게 보존하며 사는 사람을 말한다.
♣ 지림[祗林]중인도(中印度) 사위성(舍衛城) 남쪽에 있던 기타 태자(祗陀太子)의 동산. 수달장자(須達長者)가 이 땅을 사서 절을 지어 부처님께 바쳤다.
♣ 지마분운[指馬紛紜]세상의 시비(是非)가 혼동된 것을 말한 것으로,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이것이 곧 저것이요 저것이 곧 이것이다. 저것에도 하나의 시비가 있고 이것에도 하나의 시비가 있다.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의 손가락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의 손가락 아님을 깨우치는 것만 못하고, 말[馬]로써 말의 말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 말 아닌 것으로써 말의 말 아님을 깨우치는 것만 못하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지망[地望]문벌
♣ 지면[知面]새로 상번(上番)하여 올라온 군졸에게 고참자들이 상면(相面)한다는 명목으로 음식을 빼앗아 먹던 퇴폐적인 준례였다.
♣ 지명[知命]50세를 말한다. 명년(命年)이라고도 하며 51세부터 59세까지를 命一, 命二, 命九와 같은 식으로 쓰기도 한다.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나는 50세에 천명(天命)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하였다.
♣ 지명자불원천지기자불원인[知命者不怨天知己者不怨人]하늘이 준 자기의 명을 아는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 지목관[枝木冠]마치 번성한 나뭇가지처럼 화려하게 장식한 관(冠)을 말한다. 장자(莊子) 도척(盜跖)에 “지목관을 쓰고 죽은 소의 가죽을 띠었다.[冠之木之冠 帶牛死之脅]" 하였다.
♣ 지무친이여선[知無親而與善]노자(老子) 79장에 “천도(天道)는 친함이 없이 늘 선인(善人)과 함께 한다.” 하였다.
♣ 지미[芝眉]남의 용안(容顔)을 경칭하는 말임. 제왕세기(帝王世紀)에 “呂望芝眉"라 하였음.
♣ 지반[知班]지(知)는 주관한다는 뜻으로 반열(班列)의 정리나 또는 그 관원을 말함.
♣ 지백[支伯]순(舜)이 자주지백(子州支伯)에게 천하를 사양하니, 자주지백이 받지 않았다. 장자(莊子)
♣ 지백망구유[智伯亡仇猶]지백은 지백(知伯)으로 춘추 시대 때 진(晉) 나라 사람이며, 구유(仇猶)는 구유(仇由)로,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일대에 있었던 춘추 시대 때의 소국(小國)인데, 지백에 의해 멸망되었다. 《史記 卷71 樗里子甘茂列傳》
♣ 지벽도무수하혜[地僻都無樹下蹊]복사꽃과 오얏꽃이 비록 말이 없어도 그 아래에 저절로 길이 이루어진다[桃李不言 下自成蹊]는 옛 속담이 있는데,《史記 李將軍列傳論》 이곳은 너무나 외진 곳이라서 찾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다.
♣ 지벽장자거[地僻丈者車]한(漢) 나라 진평(陳平)은 집이 가난하여 거적으로 문을 만들었으나 문밖에 점잖은 이의 수레바퀴 자국이 많았다.
♣ 지보[支父]옛날 현자의 이름.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요 임금이 자주지보(子州支父)에게 천하를 물려주려고 하니, 자주지보가 ‘나를 천자(天子)로 삼으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마침 우울병이 있어서 지금 막 그것을 치료하려 합니다. 그래서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없습니다.’ 하고 사양했다.” 하였다.
♣ 지보족[智輔族]자기들 가까운 쪽만 찾음. 지씨(智氏)와 보씨(輔氏)는 전국(戰國) 시대 진(晉)의 공족(公族)이었음. 《尙友錄》
♣ 지봉[芝峯]이수광(李睟光)의 호이다.
♣ 지부[之罘]지부는 당(唐) 나라 한유(韓愈)에게서 배운 양지부(揚之罘)로서 맹동야(孟東野)와 같은 부류의 인물인데, ‘초양지부(招揚之罘)’라는 제목의 한유의 오언 고시(五言古詩)가 전해 온다. 《韓昌黎集 卷5》
♣ 지사[支使]절도사ㆍ관찰사 등의 속관(屬官), 그에 준하는 지방 파견 관원의 호칭이다.
♣ 지사[地師]지술(地術)을 알아서 집터나 묏자리 등을 잡는 사람을 말한다.
♣ 지사마[知司馬]송 나라 소식(蘇軾)이 지은 사마온공독락원시(司馬溫公獨樂園詩)의 “항간의 아이들도 군실 외우고 미천한 하인들도 사마를 아네[兒童誦君實 走卒知司馬]”에서 나온 말이다.
♣ 지사불망재구학[志士不忘在溝壑]지사는 구렁에 있음을 잊지 않음. 공자의 말로 맹자가 인용하였다. 언제나 몸이 곤궁하다가 죽어서 구렁에 던져질 것을 각오하고 지조를 지킨다는 뜻이다.
♣ 지산[芝山]지산은 조호익(曺好益)의 호이다.
♣ 지상담병[紙上談兵]종이 위에서 병법을 말한다는 뜻으로, 이론에만 밝을 뿐 실제적인 지식은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
♣ 지생[脂生]공융이 조조(曹操)에게 죽음을 당했을 때 아무도 그 시신(屍身)을 수습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일찍이 친하게 지내던 지습(脂習)이 시체를 어루만지며 “문거(文擧 공융의 자(字)임)가 나를 버리고 죽었으니, 내가 살아서 무엇하랴.[文擧舍我死 吾何用生焉]”라고 애도를 하다가 조조에게 죽을 뻔했던 고사가 있다. 《漢書 孔融傳》
♣ 지생모[紙生毛]고관(高官)의 집에 명자(名刺)를 자주 들여서 종이에 털이 났다는 말이다.
♣ 지서[至曙]새벽이 되다. 날이 밝다.
♣ 지석조우[智昔曹愚]논어 공야장에 “영무자(甯武子)는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는 지혜롭고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는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는 미칠 수 있지만 그 어리석음은 미치기 어렵다.” 했다.
♣ 지선[地仙]지행선(地行仙)의 준말로, 신선처럼 한가하게 은거 생활을 하는 노인을 뜻하는 말이다.
♣ 지성[芝城]봉래산(蓬萊山)에 있다는 신선 궁전.
♣ 지성감천[至誠感天]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킴. 지극한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한다.
♣ 지성설적상[至誠說狄相]적상은 당(唐)의 명재상 적인걸(狄仁傑)을 가리킨다. 당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아들 중종(中宗)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나라를 다스렸는데, 적인걸이 자주 모자간의 은정을 말하자, 측천무후는 깨닫고 방주(房州)에 쫒겨가 있던 중종을 소환하여 다시 임금을 삼았다. 《新唐書 狄仁傑傳》
♣ 지소적[枝掃迹]공치규(孔稚圭)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혹은 나뭇가지를 날려 수레를 부수기도 하고 혹은 나뭇가지를 낮게 드리워 속인(俗人)의 자취를 쓸어버린다.[或飛柯以折輪 或低枝而掃迹]”는 내용이 있다.
♣ 지수[祗樹]지수는 불가의 말로 지수급고독원(祗樹給孤獨園)의 약칭인데 이 동산의 정사(精舍)에서 부처가 설법(說法)하였다.
♣ 지수[芝髓]지초(芝草)의 골수를 이름.
♣ 지시긍균고[知時矜菌蛄]하잘것없는 존재들은 무슨 물정을 알지 못함.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아침에 난 버섯은 초하루 그믐을 알 수 없고, 씽씽 매미는 봄 가을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였음.
♣ 지심돈교[指心頓敎]지심의 교(敎)는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돈오법(頓悟法)을 가리킨다.
♣ 지아포[知我鮑]춘추 때 제(齊)의 관중(管仲)이 그를 알아주는 지극한 벗 포숙아(鮑叔牙)에게 이른 말. “나를 낳은 이는 부모여니와, 나를 알아 준 이는 포숙이다.” 하였다.
♣ 지어[知魚]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호량(濠梁)에서 노닐 적에 물속에 고기가 노는 것을 보다가 장자가 “물고기가 매우 즐겁구나.” 하니,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가 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고기의 낙을 안단 말인가?”하니, 장자가 대답하기를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고기의 낙을 모를 줄을 아는가?”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秋水》
♣ 지어구[志於彀]맹자(孟子) 고자 상편(告子上篇)에 “남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구(彀)에도 뜻을 두나니, 배우는 사람도 또한 반드시 구(彀)에다 뜻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 있음.
♣ 지어지앙[池魚之殃]연못의 물고기에게 닥친 재앙. 성에 불이나 성 밖에 있는 연못의 물로 불을 끄느라고 연못의 물이 다 없어져 물고기가 죽게 된 고사에서 비롯된 말. 죄도 없고 아무 관계도 없는데 재앙이 닥치는 것을 말한다.
♣ 지역[祗役]임금의 명을 받들어 지방에 나가 일을 보는 것을 말함.
♣ 지연[紙鳶]정월달에 아이들이 띄워 올리는 종이로 만든 연.
♣ 지영초[指佞草]제요(帝堯)의 뜰에 난 풀이름. 아첨하는 사람이 들어오면 꼭 그를 가리켜 주었다 하여 이름을 지영초라 했다 한다.
♣ 지오광흥[持螯狂興]진(晉) 나라 때 필탁(畢卓)이 일찍이 말하기를 “술 수백 섬을 배에 가득 싣고 사시(四時)의 감미(甘味)를 비치하고서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고 왼손에는 게의 앞다리를 쥐고 주선(酒船) 안에 떠서 노닌다면 일생을 마치기에 만족하겠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지오흥[持螯興]주흥(酒興)을 말한다. 진(晉) 나라 필탁(畢卓)이 끔찍이도 술을 좋아하면서 “한 손엔 집게 발 안주, 한 손엔 술 한 잔, 이만하면 일생을 보낼 만하지 않나.[一手拿着蟹螯 一手捧着酒杯 便足以了一生]”라고 말했던 ‘지오파주(持螯把酒)’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任誕》
♣ 지온[地媼]대지(大地)의 여신. 즉 땅의 신을 가리키는데, 원각(袁桷)의 합문령(閤門嶺) 시에 “지온이 신기한 공이 있어, 여기 제존을 모셨네.[地媼神功奇 玆焉奉帝尊]" 하였다.
♣ 지용[地用]“하늘에 쓰이는 데는 용(龍)이 제일이고, 땅에 쓰이는 데는 말[馬]이 제일이다[天用莫如龍 地用莫如馬].” 하였다. 《史記》
♣ 지웅수자[知雄守雌]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태도로 처신하는 것을 말한다. 노자(老子) 28장(章)의 “수컷의 강함을 알고서 암컷의 연약함을 지키면 천하 만물이 귀착하는 골짜기 같은 존재가 된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지원[至元]원 세조(元世祖)의 연호.
♣ 지월[指月]능엄경(楞嚴經)에 “如人以手指月示人 彼人因指 當應看月 若復觀指 以月爲體"라 하였음.
♣ 지월양동[至月陽動]11월의 동짓날부터 양(陽)의 기운이 처음 싹트기 시작한다.
♣ 지월양복생[至月陽復生]동짓달은 주역(周易)의 괘(卦)로 따지면 지뢰복괘(地雷復卦)에 해당하여 위에 있는 다섯 효(爻)는 모두 음획(陰畫)이고 아래에 있는 한 효는 양획(陽畫)인데, 이의 전달인 10월은 중지곤괘(重地坤卦)로서 모두 음획이었다가 동지가 되면 비로소 양획 하나가 생긴다 한다. 그리하여 두보(杜甫)의 소지시(小至詩)에 “천시와 인사는 날마다 재촉하여 동지에 양이 생기니 봄이 다시 오네.[天時人事日相催 冬至陽生春又來]" 하였다.
♣ 지위[脂韋]비계와 다룬 가죽처럼 윤이 나고 부드러움을 말하는데, 전하여 굳은 지조가 없이 남에게 아첨을 잘하는 데에 비유한다.
♣ 지위계[脂韋戒]양(梁) 나라 사람 유준(劉峻)이 지은 광절교론(廣絶交論)에 “지위와 같이 편벽하여 남의 성심을 끌어낸다.[脂韋便辟導其誠]" 하였는데, 지위는 곧 기름과 가죽으로서 모두 매우 유연한 물질이고, 편벽은 곧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을 뜻함이니, 즉 처세하는 데 있어 유연한 태도로써 권세 있는 사람들로부터 성심을 끌어내는 것을 뜻한다.
♣ 지유이락궁수사[志由伊洛窮洙泗]이락(伊洛)과 수사(洙泗)는 모두 물 이름인데,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은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사이에 살았고 공자(孔子)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부근에 살았으므로 곧 정주(程朱)를 따라 공맹(孔孟)을 연구함을 말한 것이다.
♣ 지음[知音]자기를 알아주는 것을 말함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鍾子期)가 백아의 생각하는 대로 반드시 알았다. 그런데 종자기가 죽은 뒤에는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은 것은 지음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 지음유삼익[知音有三益]세 가지 보탬이란 정직한 친구로부터 자신의 허물을 듣고 성실한 친구로부터 참됨을 배우고 견문이 많은 친구로부터 물정을 알게 됨을 말한다.《論語 季氏》 지음(知音)은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고사에서 비롯된 성어(成語)로 자기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구를 의미한다.《列子 湯問》
♣ 지음인[知音人]자신을 알아주는 지기지우(知己之友)를 말한다. 옛날에 백아(伯牙)가 금(琴)을 타면서 높은 산을 생각하면서 타면 종자기(鍾子期)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가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고, 흐르는 물을 생각하면서 타면, “좋구나, 양양(洋洋)하기가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 지이[支頣]턱을 고이고 사색에 잠기는 것.
♣ 지이간산[支頤看山]관리(官吏)의 무능함을 비유한 말. 진(晉)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환충(桓沖)의 기병참군(騎兵參軍)이 되었을 때, 직무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던 관계로, 환충이 그에게 묻기를 “경(卿)이 어느 조(曹)에 근무하는가?”하자, 대답하기를 “마조(馬曹)인 듯하다.” 하므로, 다시 “말을 몇 마리나 관장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말도 모르는데 말의 숫자를 어떻게 알겠는가”하였고, 또 환충이 그에게, 부(府)에 근무한 지 오래이니 의당 직무를 잘 수행하리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아예 대답도 않다가 한참 뒤에야 산을 쳐다보면서 수판(手版)으로 턱을 괴고 “서산(西山)이 아침에는 상쾌한 기운이 있다.”는 엉뚱한 말을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
♣ 지익손[知益損]인간 세상의 흥망성쇠는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리라는 뜻이다. 주역 64괘 가운데 익괘(益卦)가 손괘(損卦) 바로 다음에 위치하는데, “손(損)이 극(極)에 이르면 반드시 익(益)의 결과가 나온다.”는 정자(程子)의 해석이 있다. 《周易 益卦》
♣ 지인[至人]범속함을 초탈하여 무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가리킨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지인이란 신묘한 것이다. 큰 연못을 말릴 만한 뜨거운 불로도 뜨겁게 할 수 없고, 큰 강물을 얼어 붙게 하는 추위로도 그를 춥게 할 수 없다.” 하였다.
♣ 지인지감[知人之鑑]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음.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는 지혜.
♣ 지자불언언자부지[知者不言言者不知]진정 아는 사람은 떠들어 대지 않고 떠들어 대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仁者樂山]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 지자요수[智者樂水]지식이 있는 사람은 막히는 데가 없으므로 거침없이 흐르는 물을 좋아함.
♣ 지자호반[地字號飯]군에서 지급해 주던 중간급의 밥상. 고깃국ㆍ두부ㆍ소채 각각 한 그릇, 밥 한 그릇임.
♣ 지작[鳷鵲]후한 장제(後漢章帝) 때 조지국(條支國)에서 바쳐 온 서조(瑞鳥)의 이름인데, 이 새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특히 나라가 태평하면 떼지어 날아다닌다고 한다.
♣ 지작루[鳷鵲樓]한 무제(漢武帝)가 금원(禁苑) 안에 지은 누관(樓觀)의 이름이다.
♣ 지장[紙帳]종이로 만든 모기장.
♣ 지장[地漿]해독(解毒)하는 데 쓰는 물. 황토땅을 석 자쯤 파서 구덩이를 만든 다음 그 구덩이에다 깨끗한 물을 부어 휘저어서 황토수를 만들었다가 황토가 가라앉은 뒤의 물. 《本草 地漿》
♣ 지장기마[知章騎馬]당(唐) 하지장(賀知章). 두보(杜甫)가 노래한 음중팔선(飮中八仙) 중의 첫째 사람. “지장은 말 타기를 배 타듯 하여, 눈이 아찔 우물에 떨어져도 물 속에서 그대로 시를 지었다.”는 고사가 있다.
♣ 지재[持齋]불교 용어로, 불교의 계율(戒律)을 지키기 위해 소식(蔬食)하는 것을 말한다.
♣ 지재춘추[志在春秋]춘추는 공자가 노(魯) 나라 사(史)에 의거(依據)하여 지은 경(經). 필법(筆法)이 엄정(嚴正)하여 공자 자신도, “후세에 나를 알아줄 것도 그 춘추(春秋)며, 나를 죄 줄 것도 그 춘추(春秋)이다.”고 술회(述懷)했다 한다.
♣ 지저뢰[地底雷]순음(純陰)의 달인 10월을 지나 동지(冬至)가 되면 일양(一陽)이 시생(始生)하는 지뢰 복괘(地雷復卦)를 이루게 되는데, 그 괘상(卦象)이 땅 밑에서 우레가 치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지저비회관[地底飛灰管]동지(冬至)가 지나갔다는 말이다.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절후(節候)를 살피는 법이 수록되어 있는데, 갈대 속의 얇은 막을 태워 재로 만든 뒤 그것을 각각 율려(律呂)에 해당되는 여섯 개의 옥관(玉琯) 내단(內端)에다 넣어 두면 그 절후에 맞춰 재가 날아가는데, 동지에는 황종(黃鍾) 율관(律管)의 재가 비동(飛動)한다고 한다.
♣ 지적위산[塵積爲山]티끌이 모여 태산을 이룸
♣ 지전[箈錢]서물(書物)에 핀 돈 모양의 곰팡이를 이름.
♣ 지전[芝田]선인(仙人)이 지초(芝草)를 심어 놓은 밭이라는 뜻이다. 곤륜산(崑崙山) 제9층(層)은 산형(山形)이 점점 협소(狹小)해지는데, 그 아래에 지전이 있다고 하였다.
♣ 지전[紙錢]옛날 송장(送葬)할 때에 귀신에게 바치기 위해 종이로 만든 돈으로서, 일을 마친 뒤에는 이를 묻거나 불태웠는데, 후세에는 한식(寒食) 때에 묘제(墓祭)를 지내고 나서 이 지전을 불태웠다고 한다.
♣ 지전[紙錢]중국 고대부터 장사를 지내거나 귀신에게 제사할 때는 반드시 폐백이 있었으며 구슬이나 비단을 사용했는데, 행사가 끝나면 함께 묻곤 하였다. 한대(漢代)에 와서는 돈[錢]을 사용했고, 위(魏)ㆍ진(晉) 이후에는 종이돈[紙錢]을 썼다고 한다. 《封氏聞見記 紙錢》
♣ 지전[芝箭]청지(靑芝)와 적전(赤箭). ☞ 적전청지(赤箭靑芝)
♣ 지전간[紙田墾]문필(文筆)로 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 지절사[持節使]지절사는 명 나라 사신을 말함.
♣ 지정우[池淨友]연꽃을 말한다.
♣ 지제[質劑]무역의 권계(勸戒)를 말함. 주례(周禮) 지관(地官)에 보임.
♣ 지제오치진[芝製汚緇塵]도성에서의 고달픈 벼슬살이를 비유한 말이다. 진(晉) 나라 육기(陸機)의 시 ‘위고언선증부(爲顧彦先贈婦)’에 “고향 떠나 멀리 떠도는 생활, 유유하여라 삼천 리 길이로세. 서울엔 풍진도 어찌 그리 많은지, 하얀 옷이 새까맣게 금새 변하누나.[辭家遠行游 悠悠三千里 京洛多風塵 素衣化爲緇]”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 지제장[指諸掌]논어(論語) 팔일(八佾)에 “체(禘)에 대한 설(說)을 안다면 이것을 보는 것처럼 쉽다면서, 손바닥을 가리켰다.” 하였다.
♣ 지조나여악[鷙鳥那如鶚]새매는 약한 새들을 쳐서 맹금(猛禽)이니, 그것은 조정에서 악덕 관리를 탄핵하는 법관에 비유한다. 그러나 같은 맹금으로는 악(鶚)이라는 새만 못하다고 한다.
♣ 지족[止足]모든 일에 족함을 알아 그칠 줄 알아서 끝없이 욕심부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도덕경(道德經)에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도록 누릴 수 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라고 하였으며 한서(漢書) 권71 찬(贊)에 “疏廣行止足之計 免辱殆之絫”라고 하였다.
♣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알맞은 정도에 만족할 줄 알면 모욕을 당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욕심을 그칠 줄 알면 내 몸이 위태롭게 되지 않는다. 《道德經 第44章》
♣ 지족불욕[知足不辱]모든 일에 분수를 알고 만족하게 생각하면 모욕을 받지 않는다.
♣ 지족지부[知足知富]족한 것을 알고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부자라는 뜻.
♣ 지족지지[知足知止]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知足不辱 知止不殆].”란 말이 있다.
♣ 지종인[指蹤人]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 “직접 나서서 짐승을 잡는 것은 사냥개이니 그 공로가 적고 짐승의 소재를 지시하는 것은 사람이니 그 공로가 크다.” 하였다.
♣ 지주[地主]본 고을 원을 지주(地主)라 한다.
♣ 지주[砥柱]삼문협(三門峽)을 통해 흐르는 황하의 한 복판에 있는 산 이름으로, 황하의 거센 물결에도 쓸려나가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다고 한다. 흔히 어려움에 임해 굳건하게 버티는 것을 형용하는 말로 쓰인다.
♣ 지주[支柱]지주(砥柱)와 같은 말로, 황하(黃河)의 급류 속에 우뚝 버티고 서서 거센 물결을 혼자 감당하고 있다는 지주 중류(砥柱中流)의 고사가 전한다.
♣ 지주[砥柱]황하(黃河)가 물이 맹진(孟津)이라는 곳에서 급류로 흐르는데, 거기 강 한복판에 돌기둥이 서 있어서 그 급류에도 끄덕 없이 버티고 서 있다 한다. 한 몸에 중책을 지고 위태로운 상황을 붙들어 일으키는 능력의 소유자에 대해서 보통 지주중류(砥柱中流)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 지주단[砥柱湍]지주산(砥柱山) 계곡 물. 봉황이 그 물을 마신다는 기록이 회남자(淮南子) 현명훈(賢冥訓)에 보인다.
♣ 지주비[砥柱碑]야은(冶隱) 길재(吉再)를 모신 오산서원(吳山書院)의 ‘지주중류(砥柱中流)’라고 새긴 비석을 가리킨다. 지주중류는 황하(黃河)의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돌산이란 뜻인데, 지절(志節)이 뛰어남을 비유한다. 이 때문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사당에 이 네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길재가 고려가 망할 때에 지절을 지켰으므로 백이ㆍ숙제와 같다 하여 그의 위패를 모신 오산서원에도 이것을 새겨 놓았다.
♣ 지주비[砥柱碑]조선 선조(宣祖) 14년(1586) 인동 현감(仁同縣監) 유운룡(柳雲龍)이 감사(監司) 이산보(李山甫)와 선산 부사(善山府使) 유덕수(柳德粹)의 도움을 받아 선산(善山)에 세운 고려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유적비(遺蹟碑). 전면(前面)은 중국 사람 양청천(楊晴天)이 ‘지주중류(砥柱中流)’라 쓰고, 음기(陰記)는 유성룡(柳成龍)이 썼다.
♣ 지주산[砥柱山]지주산은 하남(河南) 삼문협(三門峽)에서 동북쪽으로 황하(黃河) 중앙에 있는 산 이름인데, 황하의 물이 그 지점에 이르러 갈라져서 산을 싸고 지나간다. 흔히 역경 속에서 잘 견뎌내는 것을 비유할 때 인용한다.
♣ 지주시[止酒詩]도연명(陶淵明)이 술을 끊겠다고 지은 시를 소개하면 대략 “ …… 평생 술을 끊지 못했나니, 술 없으면 즐거움이 없기 때문일세. 저녁에 들어가도 잠 못 이루고, 아침해 솟아도 일어날 생각 없네. …… 이제야 금주가 좋다는 걸 알고서, 오늘 아침 진짜로 끊어 버렸어라. 이대로 계속 술 끊는다면, 장차 부상에도 올라가리라[平生不止酒 止酒情無喜 暮止不能寢 晨止不能起 …… 始覺止爲善 今朝眞止矣 從此一止去 將止扶桑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陶淵明集 卷3 止酒》
♣ 지중[摯仲]부덕(婦德)이 뛰어났던 문왕(文王)의 모후(母后)를 가리킴. 그가 지(摯) 나라 임씨(任氏)의 중녀(仲女)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지중물[池中物]승천(升天)하지 못하고 못에 처박혀 있는 용(龍)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오래도록 뜻을 펴지 못하는 영웅(英雄)을 비유한 말이다.
♣ 지중지란[自中之亂]같은 패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
♣ 지지[泜泜]가지런한 모양
♣ 지지[汦汦]가지런한 모양, 정체되어 있는 모양
♣ 지지[知止]대학(大學)에, “마음의 동함을 그칠 줄 알라[知止].” 하였다.
♣ 지지[持志]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호연지기는 의리가 모아져서 생겨나는 것이니 의리를 갑자기 취해오는 것이 아니다.” 하고, 또 “뜻은 기운의 장수이고 기운은 몸에 채운 것이다. 그런 때문에 뜻을 지키면서도 기운도 잘 길러야 한다.” 하였음.
♣ 지지[枝指]지지는 엄지손가락 옆에 손가락 하나가 따로 생긴 육손이를 말한다. 《莊子 騈拇》
♣ 지지거노[遲遲去魯]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노 나라를 떠나려면서 이르기를 ‘더디고 더디어라, 나의 감이여.[遲遲吾行也]’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곧 부모의 나라를 떠나는 도리였다.”고 한 데서 온 말인데, 곧 부모가 있는 고향을 선뜻 떠나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다. 《孟子 萬章下》
♣ 지지불태[知止不殆]적당한 선에서 욕심을 그칠 줄 알면 (내 몸이) 위태롭게 되지 않는다. 《道德經 第44章》
♣ 지진[知津]자주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공자가 채(蔡) 나라로 갈 적에 자로가 주위에서 밭을 갈고 있던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에게 나루터로 가는 길을 묻자, 장저가 공자를 가리키며, “저 사람은 나루터를 잘 알 것이다.” 하면서 공자가 자주 떠돌아다니는 것을 비꼬았다. 《論語 微子》
♣ 지척[咫尺]매우 가까운 거리
♣ 지척지지[咫尺之地]매우 가까운 곳.
♣ 지천[芝川]조선 시대 문신인 황정욱(黃廷彧)의 호이다.
♣ 지천명[知天命]50세. 하늘이 부여한(맡긴) 사명을 알다
♣ 지천사어[指天射魚]하늘을 가리키며 물고기를 쏨. 즉,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함
♣ 지청[至淸]왕일은 ‘천정에 오르다’ 또는 ‘청허(淸虛)의 지경에 들다.’
♣ 지초리국[池草籬菊]못가의 풀과 울타리가의 국화.
♣ 지초몽[池草夢]형이 사랑하는 아우를 그리워하는 것을 뜻함.
♣ 지초북행[至楚北行]생각과 행동이 상반되는 것 혹은 방향이 틀리다는 뜻의 고사성어.
♣ 지초사씨시[池草謝氏詩]사씨는 남조(南朝) 송(宋) 나라의 시인 사령운(謝靈運)을 가리킨다. 못풀[池草]은 그가 종제(從弟) 혜련(惠連)을 꿈속에서 본 뒤에 지은 등지상루시(登池上樓詩)의 “못가에는 봄풀이 돋아났다네.[池塘生春草]”의 준말이다.
♣ 지치득거[舐痔得車]비열한 수단으로 부귀를 얻는 것을 조롱한 말이다. 옛날 진왕(秦王)이 병이 들어 의원을 불렀는데, 치질을 핥아서 낫게 해준 자가 다섯 대의 수레를 얻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列禦寇》
♣ 지탁잠필[持橐簪筆]시종신이 왕의 고문(顧問)에 응하기 위하여 서책과 필기 도구를 휴대하는 것을 말한다.
♣ 지통재종팽[至痛在宗祊]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상이 명(明) 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고려조의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말한다. 이것을 고치고자 하여 여러 차례 주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가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수정되었다.
♣ 지투기방[止鬪箕邦]옛 조선의 풍속에,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갓을 던지면 갓을 다칠까 염려하여 싸우던 사람이 싸움을 그쳤다 한다.
♣ 지편옥검[芝編玉檢]보배로운 글들이라는 말이다.
♣ 지평[砥平]도로가 평평하다는 뜻으로, 시경(詩經) 소아 대동(大東)에 “주 나라 길이 숫돌 같으니, 곧기가 화살 같도다.[周道如砥 其直如矢]" 하였다.
♣ 지폐[地肺]남산의 이명(異名).
♣ 지폐산[地肺山]지폐산은 중국 종남산(終南山)의 이칭임. 또한 구곡산(句曲山)이라고도 함.
♣ 지피삼성어[持被三省語]한유(韓愈)의 송은원외랑서(送殷員外郞序)에 “지금 사람은 백 리 밖에만 나가려도 문을 나가면서 이별에 대한 가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불을 갖고 삼성(三省)에 입직(入直)할 적에도 비자(婢子)들을 돌아보고 정녕스레 당부의 말을 하여 마지않는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지피어자[持被語刺]한유(韓愈)의 글에, “지금 벼슬하는 자들은 밤에 숙직하려고 이불을 가지고 들어가면서도 계집종을 돌아보며 잔소리를 쉬지 않는데, 은원외(殷員外)는 멀고 먼 회골(回鶻)에 사신으로 떠나면서도 늠름하게 간다.”는 말이 있다.
♣ 지피자자[持被刺刺]공무를 수행하면서 집안일을 염려하는 것을 말한다. 한유(韓愈)의 송은원외 서(送殷員外序)에, “이불을 가지고 삼성에 입직을 함에 계집종을 돌아보며 정녕하게 말이 많아 그치지를 못한다.[持被入直三省 丁寧顧婢子語刺刺不能休]”하였다.
♣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상대방과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알아보고 승산(勝算)이 있을 때 싸워야 이길 수 있다.
♣ 지피지기[知彼知己]상대를 알고 나를 앎. 손자병법에 나온 말로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는 말.
♣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음. 상대방의 속사정과 나의 정황을 소상히 알면 모든 싸움에 이길 수 있음.
♣ 지필화연[舐筆和鉛]붓을 핥고 먹을 타다[舐筆和墨]. 이 말은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 편에 보임.
♣ 지필화연기가마[舐筆和鉛欺賈馬]붓을 핥고 연을 타서 가의ㆍ사마천 업신여긴다. 이 시구는, 두목(杜牧)의 장안잡제장구(長安雜題長句)에, “舐筆和鉛欺賈馬 讚功論道鄙蕭曹”라 보임.
♣ 지하랑[地下郞]지하수문랑(地下修文郞)의 준말로, 염라 대왕의 보좌관이라는 뜻이다. 진(晉) 나라 소소(蘇韶)가 명부(冥府)에 내려가서, 염라 대왕의 수문랑이 된 안연(顔淵)과 자하(子夏)를 보고 왔다는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太平廣記》
♣ 지하의[芰荷衣]마름과 연꽃 잎으로 만든 옷으로, 조촐하게 사는 은자(隱者)를 뜻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연꽃 잎새로 웃옷 해 입고, 부용으로 아랫바지 만들어 입네.[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라 하였다.
♣ 지학[志學]15세. 학문에 뜻을 두다. 옛날에 남자는 15세에 태학(太學)에 입학하였고, 여자는 15 살만 먹으면 쪽을 올리고 비녀를 꽂았다. 그래서 계年(계년)이라면 여자 나이 15세를 가리킨다. 논어(論語)에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라 하였다.
♣ 지함[芝函]국서(國書)를 담은 함을 말한다.
♣ 지해[至醢]소금에 절이다. 고대 중국의 나라들에 있던 형벌의 일조.
♣ 지행선[地行仙]지상에서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사람을 뜻한다. 불가(佛家)의 능엄경(楞嚴經)에 나오는 신선 이름으로, 대개 장수하면서 한가하게 사는 노인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 지행일치[知行一致]아는 것과 행함이 같아야 함. 지행합일(知行合一)
♣ 지행합일[知行合一]앎과 실천이 하나로 합해짐. 앎과 실천을 함께 힘써야 함
♣ 지허[支許]승인(僧人)과 문사(文士)가 교유하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의 승려 지둔(支遁)과 학자 허순(許詢)을 가리킨다. 두 사람이 함께 회계왕(會稽王)의 집에 있었을 적에 지둔은 법사(法師)가 되고 허순은 도강(都講)이 되었다고 한다.《世說新語》 참고로 백낙천(白樂天)의 시에 “支許徒思遊白月 夔龍未放下淸天”의 구절이 있다.
♣ 지허[支許]요(堯) 임금 때 고사(高士)인 지보(支父)와 허유(許由)이다.
♣ 지허[支許]지백(支伯)과 허유(許由). 모두 순(舜) 임금 때의 고사(高士). 순 임금이 이 두 사람에게 각기 천하를 양여(讓與)하였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한다.
♣ 지혐기기[地嫌忌器]한(漢) 나라 가의(價誼)의 글에, “무엇을 던져서 쥐를 잡으려해도 쥐 옆에 있는 그릇을 깰까 염려된다는 속담이 있다.” 하였다.
♣ 지호지간[指呼之間]가리켜 부를 수 있는 사이. 손짓하여 부르면 곧 대답할 만한 가까운 거리. 매우 가까움
♣ 지호지간[指呼之間]손짓하여 부를만한 아주 가까운 거리.
♣ 지화사[志和簑]당(唐) 나라 장지화(張志和)가 연파조도(煙波釣徒)로 자처하면서 부가범택(浮家泛宅)하는 생활을 즐겼던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96》
♣ 지환몽[持環夢]지환몽(持環夢)은 환(環)을 가진 꿈으로 환(環)은 환(還)과 음이 같아, 이 꿈을 꾸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에서 온 것이다.
♣ 지훈[箎壎]지(箎)는 대[竹]피리, 훈(壎)은 흙으로 만든 악기. “백씨(伯氏)는 흙피리 불고, 중씨(仲氏)는 대피리 부네.”《詩經》
♣ 지휘과무례[指揮過無禮]친한 친구나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처자식에게 술을 가져오라는 등 두서 없이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 지희당[至喜堂]지희당은 송 인종(宋仁宗) 때 상서(尙書) 우부낭중(虞部郞中) 주공(周公)이란 사람이 이릉현(夷陵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 세운 정자로, 오늘날의 호북성(湖北省) 의창현(宜昌縣) 남쪽 형강(荊江)의 강가에 있었다 한다. 이릉현은 서촉(西蜀)의 험난하기로 이름난 삼협(三峽)을 따라 흘러오던 강물이 비로소 잔잔해지는 곳으로서 서촉에서 뱃길로 그곳에 당도하는 뱃사공들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하였다 하는데, 주공이 강가에 정자를 지어 지극히 기쁘다는 뜻인 지희(至喜)로 이름을 붙이고 뱃사람들이 쉬었다가 가는 장소로 삼았다 한다. 곧 지방 수령으로서 치적(治績)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歐陽文忠公集 卷三十九 峽州至喜亭記》
♣ 직[稷]후직(后稷)으로서 제곡(帝嚳)의 아들. 순 임금의 신하. 옛적에 농사를 맡은 벼슬. 주(周) 나라 시조(始祖) 기(棄)의 별명. 그가 농사를 맡았으므로 이름. 서경(書經) 순전에, “帝曰 棄 黎民阻飢 汝后稷 播時百▣”이라고 보임.
♣ 직각[直閣]직각은 비서각(祕書閣)에 입직(入直)한 편수관(編修官)을 말한다.
♣ 직계고기[稷契皐夔]후직과 설과 고요와 기. 순(舜)임금을 섬긴 네 명신(名臣)임.
♣ 직공[職貢]제후국(諸侯國)에서 상국(上國)에 바치는 공부(貢賦).
♣ 직구[直鉤]직구는 고기가 걸리지 않도록 낚시바늘을 곧게 한 것을 이르는데, 즉 강태공이 주(周) 나라에 등용되기 전에 위수(渭水)에서 항상 곧은 낚시바늘로 낚시질을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직구자모[織屨慈母]어머님이 고생한다는 뜻이다. 한서(漢書) 책방진전(翟方進傳)에 “그 어머니를 하직하고 서울로 올라오자, 그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이 안타까워서 서울로 따라와 신을 삼아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하였다.
♣ 직궁[直躬]몸을 곧게 가진다는 뜻. 논어(論語)에, 어느 사람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 직궁(直窮)하는 자가 있는데, 그 아버지가 양(羊)을 훔쳤는데 아들이 증거를 섰다.” 하였다.
♣ 직금천손교[織錦天孫巧]직녀가 짠 아름다운 비단. 아름다운 시문(詩文)을 말한다.
♣ 직금체[織錦體]회문(廻文)이라고도 하는데, 거꾸로 읽어도 뜻이 다 통하게 되어 있는 글. 진(晉) 나라 두도(竇滔)의 처가 귀양간 남편에게 비단으로 짜서 보낸 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직금체 또는 직금회문 또는 회문 등으로 불린다. 《晉書 竇滔妻蘇氏傳》
♣ 직녀지기[織女支機]직녀가 베틀을 고였던 돌. 구하기 힘든 것을 구한 것에 대한 비유. 집림(集林)에 “어떤 사람이 하원(河源)을 찾아가 실을 빨고 있는 부인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이곳은 천하(天河; 은하수)라고 말하면서 돌 하나를 주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엄군평(嚴君平)에게 물어보니 군평이 말하기를 ‘이것은 직녀가 베틀을 고였던 돌이다.’ 했다.” 하였다.
♣ 직도삼출[直道三黜]바른 도리로 임금을 섬기다 임금의 뜻에 거슬리어 자주 쫓겨남을 뜻함. 춘추 시대에 유하혜(柳下惠)가 옥관(獄官)이 되었다가 세 번이나 쫓겨나자, 어떤 이가 “그대는 떠나버릴 수 없는가?”라고 물으니, 유하혜가 대답하기를 ”바른 도리로 임금을 섬기자면 어디를 간들 세 번 쫓겨나지 않으며, 도를 굽혀서 임금을 섬기자면 어찌 부모의 나라를 떠날 필요가 있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微子》
♣ 직도연삼출[直道連三黜]춘추 때 유하혜(柳下惠)가 곧기 때문에 세 번이나 벼슬에서 쫓겨 났으나, 버리고 가지 않으므로, 사람이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곧은 도(道)로써 사람을 섬기면 어디간들 세 번 쫓겨나지 않으리오. 굽은 도(道)로써 사람을 섬기어 하필 부모의 나라를 버릴 것이냐.” 하였다.
♣ 직려[直廬]직려는 직숙(直宿)하는 집.
♣ 직막여구[直莫如鉤]후한서(後漢書) 오행지(五行志)에 “시위처럼 곧으면 길가에서 죽게 되고, 갈고리처럼 굽으면 도리어 후에 봉해진다.[直如弦死道邊 曲如鉤反封侯]”하였다.
♣ 직묵불구예[卽墨不求譽]전국(戰國) 때에 제 위왕(齊威王)이 직묵대부(卽墨大夫)를 불러서 말하기를, “네가 직묵(卽墨)에 부임한 뒤에 헐뜯는 말이 날로 들어오기에 내가 사람을 시켜 가 보게 했더니 치적(治績)이 대단히 좋았다. 이것은 네가 나의 측근자에게 뇌물을 쓰지 않은 까닭이다.” 하고 직묵대부를 표창하였다.
♣ 직방[直方]경(敬)을 위주로 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義)를 지켜서 바깥을 방정하게 한다는 것으로서 유가의 학문을 하는 방법임. 《易 坤卦 文言》
♣ 직방[職方]벼슬 이름. 주례(周禮) 천관(天官)의 하나. 천하의 지도(地圖)를 맡아보고 사방의 조공을 주장했다.
♣ 직방[職方]주례(周禮)의 편명인 직방씨(職方氏)의 준말이다.
♣ 직방대리[直方大利]직방대는 곧고 모나고 크다는 뜻으로, 지도(地道)가 갖추어진 것을 의미한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육이(六二)에, “곧고 모나고 크다. 학습하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直方大 不習 無不利]”하였다.
♣ 직방씨[職方氏]주대(周代)의 관명(官名)으로 천하의 지도와 사방의 공부(貢賦)를 맡았다.
♣ 직봉[稷蜂]직봉은 사직단(社稷壇)에 집 짓는 벌이란 뜻으로 곧 간신의 비유한다.
♣ 직설[稷契]직(稷)과 설(契)은 모두 옛날 요순(堯舜) 시대의 유명한 신하들인데, 후세 사람들의 숭배하는 목표로 되어 있다.
♣ 직설[稷卨]순(舜) 임금의 명신(名臣)인 후직(后稷)과 설(卨)을 합칭한 말이다.
♣ 직설삭고[稷契朔皐]직설은 순임금의 신하인 후직(后稷)과 설(契)로서 후직은 농관(農官), 설은 사도(司徒)가 되어 성군의 정치를 보좌하였고, 삭고는 한 무제(漢武帝) 때 문장과 재치있는 해학으로 이름난 동방삭(東方朔)과 매고(枚皐)임.
♣ 직성금자[織成錦字]전진(前秦) 두도(竇滔)가 양양(襄陽)을 진수(鎭守)할 때 총희(寵姬)를 데리고 부임하여 그 처 소씨(蘇氏)와는 소식을 끊었더니, 소씨가 설워하여 비단에 회문시(回文詩) 2백여 수를 짜넣어 도에게 부치니, 도가 그 비단 글자를 보고 감동되어 수레를 갖추어 소씨를 맞아갔다.
♣ 직신추금저[直臣抽金箸]곧음을 비유한 말. 개천유사(開天遺事)에 “임금이 재상 송경에게 쓰던 금젓가락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에게 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젓가락을 주어 경의 곧음을 표상하는 것이다.’ 했다.” 하였다.
♣ 직여금시[直如金矢]곧기가 활줄 같으면 길가에 죽고, 굽기가 갈퀴 같으면 도리어 봉후(封侯)한다. 《漢書》
♣ 직원[直院]홍문관 등 학사(學士)가 근무하는 관아를 말한다.
♣ 직재[直齋]김종후(金鍾厚)의 호이다.
♣ 직지사자[直指使者]한 나라 때 조정에서 직접 지방에 파견하여 문제를 처리하게 했던 벼슬로 우리나라의 암행어사와 같다.
♣ 직하[稷下]전국시대 제(齊)나라 도성 임치(臨菑)의 직문(稷門)에 있던 땅 이름. 제 선왕(齊宣王)이 학사와 유세하는 선비를 좋아하여 직문에 학관(學館)을 지어놓고 추연(騶衍)ㆍ순우곤(淳于髡)ㆍ전병(田騈)ㆍ접자(接子)ㆍ신도(愼到)ㆍ환연(環淵)등 76인을 초빙하여 집을 주고 상대부(上大夫)로 삼아 직무는 없이 토론만 하게 하였다. 맹자 또한 제 선왕을 찾아가 왕도정치를 권한 적이 있다. 《史記 卷七十四 孟子荀卿列傳》
♣ 직하[稷下]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제 선왕(齊宣王)이 학자를 우대하자 당대의 학자들이 모두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던 제 나라의 도시 이름이다.
♣ 직하유속[稷下遺俗]학자의 기풍을 뜻함. 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직하에는 추연(騶衍)ㆍ순우곤(淳于髡)ㆍ신도(愼到)ㆍ환연(環淵)ㆍ접자(接子)ㆍ전변(田騈) 등의 학자들이 각각 치란(治亂)에 관한 일을 담론하였다 한다. 《史記 卷七十四》
♣ 직하풍류[稷下風流]직하는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지명인데, 전국 시대 제 선왕(齊宣王)이 학자를 크게 우대함으로써 당시에 천하의 학자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었던 데서 온 말이다.
♣ 직하현[稷下賢]직하는 제(齊)나라에 있는 지명. 제의 선왕(宣王)이 문학에 능하고 말 잘하는 선비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당시 많은 쟁쟁한 문사들이 제 나라로 몰려들어 제 나라에서는 직하관(稷下館)을 두고 거기에다 수용하였음. 《史記 田敬仲世家》
♣ 진[陣]권세가들이 사사로이 설치한 농장의 일종임. 광해군 때 유희분(柳希奮), 박승종(朴承宗)등의 권세가들이 전토를 광점(廣占)하고, 역(役)을 피하여 도망한 무리들을 많이 모아 의방에 사사로이 설치한 농장으로서, 그 폐단이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 진[塵]불교에서는 겁(劫)이라 하고, 도가(道家)에서는 진(塵)이라 하는데, 천지(天地)의 시종(始終)을 말한다.
♣ 진[嗔]성내다. 화내다.
♣ 진가[秦家]혼란스러웠던 진(秦) 나라 궁가(宮家)라는 뜻이다.
♣ 진가도적[秦家圖籍]소하(蕭何)가 한 패공(漢沛公)을 따라 함양(咸陽)에 들어가서 율령도서(律令圖書)를 먼저 보관하였는데, 이것이 후일에 한 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자료가 되어 큰 공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史記 卷五十三 蕭相國世家》
♣ 진가병[陳家餠]진가는 곧 당(唐) 나라 때 진경선(陳敬瑄)을 이름. 그가 젊어서 떡장사를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 진갈[秦碣]진갈은 진 나라 시대에 세운 수많은 석갈(石碣)에 새겨진 옛 서체(書體)를 가리킨 말이다.
♣ 진갑[進甲]62세 환갑(還甲)보다 한 해 더 나아간[進] 나이라는 뜻.
♣ 진강초도마[晉江初渡馬]동진(東晉)이 강동(江東)으로 천도(遷都)했음을 말한다. 말[馬]은 진 나라의 성이 사마(司馬)였으므로 한 말인데, 진 나라는 오호(五胡) 십육국(十六國)의 난에 시달려 원제(元帝) 때에 결국 강을 건너 강동으로 천도한 때문에 동진이라 불리게 되었다.
♣ 진강후[晉康侯]최충헌(崔忠獻)이니, 고려 때 권신(權臣)으로서 진강군개국후(晉康郡開國侯)에 봉해졌다.
♣ 진갱지사[秦硎之士]갱(硎)은 갱(阬)과 같은 뜻으로, 진갱의 선비란 곧 진 시황(秦始皇) 때 함양(咸陽)에 생매장된 3백 60여 인의 선비를 말한다. 《史記 秦始皇本紀》
♣ 진갱한고[秦坑漢錮]진(秦) 나라에서는 선비들이 소용없이 떠들기만 한다 하여 큰 구덩이를 파고 460여 명의 선비들을 산채로 쓸어 묻었었다. 한 나라 말년에는 선비들이 나라의 정치를 논평한다고 수백명의 명사들을 모두 금고형(禁錮刑)에 처하였었다.
♣ 진건[震愆]두려움과 허물
♣ 진경[秦瓊]수(隋) 나라 말기에 당 고조(唐高祖)에 귀부(歸附)한 뒤 진왕(秦王; 太宗)을 도와 왕세충(王世充) 등을 토벌한 공로로 익국공(翼國公)에 봉해졌다. 《舊唐書 卷68》
♣ 진경[晉卿]원(元) 나라 때의 문신인 황진(黃溍)의 호.
♣ 진경[秦京]진 나라 서울 장안(長安).
♣ 진경[眞經]진경은 노자(老子)ㆍ장자(莊子)ㆍ열자(列子) 등 도교(道敎)의 책을 가리킨다.
♣ 진경외일[晉卿畏日]진경은 춘추 시대 진(晋) 나라의 정경(正卿)이었던 조순(趙盾)을 가리키는데, 좌전(左傳) 문공(文公) 7년에 “조최(趙衰)는 겨울날의 태양이요, 조순은 여름날의 태양이다.” 한 주에 “겨울의 태양은 사랑스럽고, 여름의 태양은 두렵다.[冬日可愛 夏日可畏]” 한 데서 온 말이다.
♣ 진계경[陳季卿]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이문실록(異聞實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강남(江南) 지방에 살았던 진계경이 일찍이 진사(進士)에 응시했으나 낙제하고는 10년 동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청룡사(靑龍寺)에서 종남산옹(終南山翁)을 만났다. 그런데 마침 동각(東閣)의 벽(壁)에 환영도(寰瀛圖)가 있는 것을 보고 진계경이 자기 고향 강남 길을 찾으면서 길게 탄식하며, “어떻게 하면 배를 타고 집에 돌아갈 수 있을꼬.” 하자, 종남산옹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집에 가기는 어렵지 않다.” 하고, 즉시 댓잎[竹葉]으로 배를 만들어 환영도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진계경이 이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점차 위수(渭水)에 물결이 일고 그 죽엽선(竹葉船)이 점점 커지므로, 이에 그 배를 타고 10여 일 만에 자기 집에 당도하였다. 그랬다가 하룻밤에는 다시 그 배를 타고 옛 길을 따라 가서 다시 청룡사에 들르니, 종남산옹이 아직껏 그대로 앉아 있으므로, 진계경이 종남산옹에게 이것이 꿈이 아니냐고 묻자, 종남산옹이 말하기를, “60일 뒤에 절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후 과연 진계경의 처자(妻子)가 강남에서 달려와 진계경이 세상을 싫어한다고 말하고, 또 “아무 날 밤에 집에 돌아와서 서재(西齋)에 시(詩)를 써 놓았다.”고 하므로, 진계경이 그제서야 비로소 꿈이 아닌 줄을 알았다고 한다.
♣ 진계유[陳繼儒]명(明) 나라 사람. 호는 미공(眉公)은. 어려서부터 영오하고 문장에 능하여 그 명성이 동기창(董其昌)과 막상막하였고, 왕세정(王世貞)으로부터도 매우 인정을 받았다. 후에는 오직 저술에만 몰두하여 경사제자(經史諸子)는 물론, 술기(術伎)ㆍ패관(稗官)과 노ㆍ불(老佛)의 설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비교 핵실하였으며, 심지어 쇄언(瑣言) 벽사(僻事)에 이르러서도 그를 모두 추려 기록으로 남겨 이른바 진미공정정비급(陳眉公訂正祕笈)이라는 총서(叢書)를 내놓기에 이르렀음. 《明史 卷二百九十八》
♣ 진공[晉公]당 헌종(唐憲宗) 때 현상(賢相) 배도(裵度)의 봉호(封號).
♣ 진공[眞空]불교 용어로서 일체의 실상(實相)은 다 공허(空虛)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진공[眞空]불교의 용어로, 일체의 색상(色相)과 의식을 초월한 진실된 경지를 가리킨다.
♣ 진공자[晉公子]진 공자는 춘추 시대 오패(五霸)의 하나인 문공(文公)을 가리킨다.
♣ 진공차락장송고[陳公差樂張竦苦]진공은 한(漢)나라 때 진준(陳遵)을 말하고, 장송(張竦)은 곧 진준의 친구이다. 이들은 친구 사이였지만, 진준은 무척 호방한 성격으로 술을 매우 좋아하였고, 장송은 매우 법도 있는 선비였으므로, 진준이 장송에게 “자네는 몸을 괴롭게 해가며 조신을 하지만, 나는 예법에 구애하지 않고 마음대로 술 마시고 놀며 즐기니, 내가 낫지 않는가.”고 조롱한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九十二 陳遵傳》
♣ 진과자미[秦瓜自美]진과는 진 나라 소평(邵平)이 장안(長安) 동쪽에 심었던 오이를 말한 것이다.
♣ 진관[眞官]선인(仙人)으로서 관직을 가진 자로, 도사(道士)를 뜻하는 말이다.
♣ 진관[陳瓘]송(宋) 나라 사람. 그는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당시 소인배였던 채경(蔡京)을 써서는 안 된다고 극력 주장했다가 뒤에 채경의 미움을 사 자주 귀양살이를 하였음. 《宋史 卷345》
♣ 진관[秦關]진(秦) 나라 때 설치한 관소(關所)를 말한다.
♣ 진관[秦觀]진관은 송(宋) 나라 사람. 자는 소유(少游) 또는 태허(太虛). 소식(蘇軾)의 추천으로 태학박사(太學博士)가 되었음. 문사(文詞)에 능하여 소식이 굴송지재(屈宋之才)가 있다고 칭찬했음.
♣ 진광[眞光]도가(道家)의 문자로 타고난 본성과 지혜를 말한다.
♣ 진교봉왕[陳橋奉王]송(宋) 나라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이 황제가 되기 전인 후주(後周) 현덕(顯德) 7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契丹)을 막으러 가다가 군사가 진교역(陳橋驛)에 주둔하였는데, 그날 점성가(占星家)인 묘훈(苗訓)이 해를 보니, 해 아래에 다른 해가 또 하나 있으면서 검은 광채가 들끓었다. 그날 밤 조광윤이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군사들이 병란을 일으켜서 조광윤을 옹립해 황제로 삼고는 송(宋)이라고 국호를 고쳤다. 《宋史 卷1 太祖本紀》
♣ 진교일석서일승[陳橋一夕瑞日昇]송(宋) 나라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즉위하였다는 뜻이다. 후주(後周) 현덕(顯德) 7년에 거란(契丹)이 침입해 오자 조광윤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으러 가다가 군사가 진교역(陳橋驛)에 주둔하였는데, 그날 밤 부하들이 병란을 일으켜서 조광윤을 옹립해 황제로 삼고는 송(宋)이라고 국호를 고쳤다. 《宋史 卷1 太祖本紀》
♣ 진교편석[秦橋鞭石]진 시황이 돌다리를 만들어 그것을 디디고 바다를 건너 해 뜨는 곳을 가 보려 하니, 신인(神人)이 나타나 돌을 몰아 바다로 내려가는데, 돌이 빨리 가지 않으면 신(神)이 채찍으로 갈겨 돌에 피가 났다 한다.
♣ 진구[秦篝]진(秦) 나라에서 만든 배롱(焙籠)이라는 말인데, 배롱은 화로 위에 씌워 놓고 젖은 옷 등을 말리는 기구로, 보통 대나 쇠붙이로 만들었다. 옛날에 초혼(招魂)할 때, 망자(亡者)의 옷을 배롱 위에 얹어 놓아 그의 혼이 그 속에 들어가도록 유도했던 풍속이 초사(楚辭) 초혼(招魂)에 실려 있다.
♣ 진국[殄國]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瞻仰)의 “사람이 없어지니 나라가 시들었네[人之云亡 邦國殄瘁]"를 말함.
♣ 진군[眞君]도교에서 말하는 신선(神仙)들의 존칭(尊稱)이다.
♣ 진군[眞君]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말로, 나의 진짜 주인이라는 뜻이다.
♣ 진군[陳君]후한(後漢) 때의 순리(循吏)인 진림(陳臨)을 말함.
♣ 진궁[秦宮]후한(後漢) 때 왕실의 외척인 양기(梁冀)의 집 감노(監奴)의 이름인데, 그는 양기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태창령(太倉令)에 이르렀고, 위권(威權)을 크게 휘둘렀다. 《後漢書 卷三十四》
♣ 진궁록위마[秦宮鹿爲馬]진 나라의 승상(丞相) 조고(趙高)가 국정(國政)을 제맘대로 하고자 하나 군신(羣臣)들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자신의 위권(威權)을 보이기 위해, 이세황제(二世皇帝)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이것이 말입니다.” 하자, 이세황제가 웃으면서 “승상이 잘못 안 게 아닌가?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니.” 하고,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혹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혹자는 ‘말’이라고 말하여 조고의 뜻에 아종(阿從)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秦始皇本紀》
♣ 진궁삼월홍염렬[秦宮三月紅焰烈]아방궁은 진시황(秦始皇)이 지은 큰 궁궐이다. 항우(項羽)가 진 나라를 멸한 뒤 아방궁을 불살랐다는데 두 달 동안이나 불이 꺼지지 않았다.
♣ 진근[塵根]불가의 말로 육진(六塵)ㆍ육근(六根)을 말한다. 육진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으로 육근을 통하여 의식을 일으키는 육경(六境)을 말하며, 육근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여섯 가지 기관을 말한다.
♣ 진기[眞機]우주의 근본 기틀. 현묘(玄妙)한 도리. 우주의 가장 본래적인 근본 도리는 워낙 은미하여 잘 알 수도 없고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고 한다. 또 마음이나 사물의 진정한 모습.
♣ 진길료[秦吉了]새 이름.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능력이 있는 새로 일명 구관조(九官鳥)라고도 함.
♣ 진낙선옹[眞樂禪翁]진락은 고려 이자현(李資玄)의 시호(諡號)이다. 벼슬을 그만두고 전국의 명산을 유람하던 중에 춘천(春川)의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가 선학(禪學)을 연구하며 여생을 보냈다.
♣ 진남[秦男]진시황(秦始皇)이 서복(徐福)에게 불로초(不老草)를 캐 오라고 보내면서 함께 보낸 동남동녀(童男童女)를 가리킨다. 시황이 서복을 시켜 동남동녀 수천 명을 배에 싣고 바다로 들어가서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캐 오게 하였는데, 불사약은 캐 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았다고 한다.
♣ 진녀학소[秦女學簫]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음악을 좋아하여, 퉁소를 잘 부는 소사(蕭史)에게 시집을 가서 소사에게 퉁소를 배웠는데, 두 사람이 함께 퉁소를 불자 봉황(鳳凰)이 내려오므로, 마침내 함께 봉황을 타고 신선이 되어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진녀를 곧 기녀(妓女)의 뜻으로 쓴 것이다.
♣ 진뇌[陳雷]진ㆍ뇌는 후한(後漢) 때에 우의가 두텁기로 유명한 진중(陳重)과 뇌의(雷義)임. 뇌의가 무재과(茂才科)에 급제하여 그 자격을 진중에게 양보하였으나 자사(刺使)가 들어주지 않자, 거짓으로 미쳐서 벼슬을 받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그들을 두고 “아교와 옻칠이 굳다고 하나 뇌의와 진중만은 못하리.[膠漆自謂堅 不如雷與陳]"라고 하였다 함. 《後漢書 卷八十一 雷義傳》
♣ 진누[秦樓]진 목공(秦穆公)이 딸 농옥(弄玉)과 사위 소사(蕭史)를 위해서 지어 준 화려한 저택 이름이다.
♣ 진단[陳摶]송(宋)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도남(圖南)임. 그는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화산(華山)에 가 살면서 도(道)를 닦고 벽곡(辟穀)의 술을 익혀 몇 백 날이고 계속 잠을 잤으며 송 태조(宋太祖)가 등극(登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제 세상이 안정을 되찾았다고 하면서 웃었다고 함. 《宋史 卷四百五十七》
♣ 진단[震旦]진단은 인도(印度)가 고대 중국(古代中國)을 이르던 말임. 《翻譯名義集》
♣ 진대[賑貸]봄철 보리고개 때나 흉년에 나라의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꾸어주는 일.
♣ 진대[秦臺]진대경(秦臺鏡)의 준말이다. 진(秦) 나라 때 광(廣) 4척(尺), 고(高) 5척 9촌(寸)의 네모난 거울이 있었는데, 오장 육부까지도 환하게 비췄다고 한다.
♣ 진대난봉성[秦臺鸞鳳聲]진(秦)나라 때 왕자진(王子晋)과 소사(簫史)의 옥적(玉笛)이다.
♣ 진동[秦童]진시황(秦始皇)이 서복(徐福)에게 동해 바다 삼신산(三神山)에 있다고 하는 불로초(不老草)를 캐 오라고 하면서 함께 보낸 수천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가리킨다.
♣ 진락[眞樂]고려의 학자 이자현(李資玄)의 시호. 고려조 선종(宣宗) 때 대악서승(大樂署丞)을 사직하고 전국의 명산을 유람 중 춘천 청평산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선학(禪學)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 진량[진良]진량은 전국 시대 문명이 미개한 초 나라 태생이었으나, 주공(周公)ㆍ중니(仲尼)의 도를 좋아하여 북으로 중국(中國)에 가서 유학하였는데, 중국의 선비들이 그보다 나은 이가 없을 정도로 대유(大儒)가 되었다. 《孟子 滕文公上》
♣ 진량[秦梁]진시황(秦始皇)이 해 뜨는 곳을 보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는 돌다리를 가리킨다. 진시황(秦始皇)이 해 돋는 곳을 보고자 하여 돌다리를 놓으려고 하였는데, 해신(海神)이 나타나서 다리 기둥을 세워 주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이를 고맙게 여겨 만나 보려고 하니, 해신이 말하기를, “내 모습이 추하니 내 모습을 그리지 않기로 약속한다면 만나겠다.” 하였다. 이에 진시황(秦始皇)이 들어가 해신과 만났는데,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몰래 해신의 발을 그렸다. 그러자 해신이 성을 내면서 빨리 나가라고 하여 진시황(秦始皇)이 말을 타고 곧장 나왔는데, 말 뒷다리가 석교에서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석교가 무너졌다. 《藝文類聚 卷79》
♣ 진령사[榛苓思]시경 패풍 간혜(簡兮)의 “산에는 개암나무 진펄엔 감초, 그 누가 그리운가 서쪽의 미인이로세[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에서 나온 것으로, 저물어가는 때에 서울에 계신 임금이 한결 더 그립다는 것이다.
♣ 진로[振鷺]시경(詩經)에 진로(振鷺)편이 있는데, 그것은 주(周)나라 종묘(宗廟)의 제사에 하(夏)나라의 후손과 상(商)의 후손이 와서 참예하였으므로, 그것이 마치 깨끗한 해오리가 다른 곳에서 날아오는 것과 같다 하였다.
♣ 진로영옹[眞老靈翁]진로는 김윤겸(金允謙), 영옹은 이인상(李麟祥)을 가리킨다. 김윤겸의 자는 진재(眞宰)이며, 이인상의 자는 원령(元靈)이므로 각각 높여서 칭한 것이다.
♣ 진로장[塵勞障]불가의 말로 번뇌가 앞길을 막고 있는 것. 《金剛經 註주》
♣ 진뢰[陳雷]동한(東漢)의 뇌의(雷義)와 진중(陳重)의 병칭(幷稱)이다. 뇌의와 진중은 같은 고향 사람으로 두 사람은 우의가 돈독하여 고향 사람들이 이들 둘을 보고는 “아교풀이 스스로 잘 붙는다 말하지만 뇌의와 진중만은 못하리라.” 하였는데, 후대에는 이를 인해서 교의(交誼)가 아주 깊은 친구 사이를 이르게 되었다. 《後漢書 卷八十一 篤行傳》
♣ 진뢰[陳雷]한(漢) 나라 진중(陳重)이 한 고을에 사는 뇌의(雷義)와 친하게 지내었는데, 뇌의가 무재(茂才)에 천거되자 진중에게 양여(讓與)하니, 자사(刺史)가 듣지 아니 하였다. 뇌의는 진중을 위하여 거짓 미쳐 도망해 숨었다.
♣ 진루[秦樓]왕의 부마가 사는 화려한 저택을 말한다. 진 목공(秦穆公)이 딸 농옥(弄玉)과 사위 소사(蕭史)를 위해 멋진 누대를 지어 주었는데, 그 이름을 봉루(鳳樓) 혹은 진루(秦樓)라고 하였다. 진 나라 목공의 딸 농옥이 음악을 좋아하였는데, 소사(蕭史)가 퉁소를 잘 불어서 봉새가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이에 목공이 농옥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누각을 지어 주었는데, 이들 두 사람이 퉁소를 불면 봉황이 날아와서 모였으며, 이들 두 사람은 그 뒤에 봉황을 타고 날아갔다고 한다. 《列仙傳》
♣ 진루[秦樓]춘추 시대 진(秦) 나라의 봉대(鳳台)를 지칭한다. 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피리의 명인 소사(蕭史)에게 시집을 가서 열심히 배운 결과 봉명곡(鳳鳴曲)을 지어 부르게 되자, 목공이 그들을 위해 봉대(鳳臺)를 지어 주고 거하게 하였는데, 뒤에 부부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後漢書 矯愼傳 注》
♣ 진루[秦樓]기생집[妓館]을 뜻함.
♣ 진루객[秦樓客]진루의 나그네란, 바로 진 목공(秦穆公) 때 퉁소를 잘 불던 사람으로, 진 목공의 딸 농옥(弄玉)과 결혼하여 봉루(鳳樓)에서 함께 살다가 뒤에 부부가 함께 봉황(鳳凰)을 타고 신선이 되어 갔다는 소사(蕭史)를 가리키는데, 당(唐)나라 이상은(李商隱)의 무제시(無題詩)에 “어찌 알았으랴 하룻밤에 진루의 나그네가, 오왕의 원내의 꽃을 훔쳐 볼 줄을[豈知一夜秦樓客 偸看吳王苑內花].” 한 데서 온 말이다.
♣ 진루월[秦樓月]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달 아래서 퉁소를 불다가 자봉(紫鳳)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임.
♣ 진루취봉[秦樓吹鳳]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악(樂)을 좋아하였는데, 소사(蕭史)가 퉁소를 잘 불므로 목공이 소사에게 농옥을 아내로 삼아주고 봉루(鳳樓)를 지어 주었던 바 봉루에서 두 사람이 퉁소를 불자 봉황새가 모여들었다고 한다.
♣ 진류은[陳留隱]진류는 어느 지명(地名)인데 진류 사람 장승(張升)이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붕당 싸움을 피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진류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친구를 만나 풀을 깔고 앉아서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때 한 늙은이가 그 곳을 지나다가 지팡이를 짚고 서서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용이 비늘을 감추지 못하고 봉황이 날개를 감추지 못했으니 이 높이 쳐진 그물 속에서 가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비록 울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하였다고 함. 진류노부(陳留老父). 《後漢書 陳留老父傳》
♣ 진리[津吏]나루터의 선박과 교량을 주관하는 아전을 말한다.
♣ 진린[陳璘]정유 재란(丁酉再亂) 때 우리나라에 파견되었던 명(明)의 수군 제독.
♣ 진림[陳琳]동한 광릉(廣陵) 석양(射陽) 사람으로 자는 공장(孔璋)이다. 문장이 뛰어나 일찍이 원소(袁紹)를 위해 조조(曹操)의 죄상을 문책하는 격문을 지었는데, 원소가 패하여 조조에게 돌아가니 조조는 그 재주가 아까워 죄를 주지 않고 기실(記室)을 삼았다 한다. 《三國志 卷二十一 陳琳傳》
♣ 진림[陳臨]후한(後漢) 때의 순리(循吏). 진림이 창오 태수(蒼梧太守)로 있으면서 정성을 다해 효제(孝悌)로써 백성을 잘 다스렸고, 심지어는 살인한 사람이 자식이 없음을 알고는 그의 아내를 감옥으로 불러들여 남편과 동침을 하게 해서 끝내 자식을 얻게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뒤, 그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5월 5일이면 동성문(東城門) 위에서 그를 제사지냈다고 한다.
♣ 진마표륜[陣馬飆輪]진마는 풍장진마(風牆陣馬)의 준말이고 표륜은 표거(飆車)인데 문장의 기세가 웅후(雄厚)함을 비유한 것임. 두목의 이하시 서(李賀詩序)에 “風飆陣厚不足爲其勇也" 라 하였음.
♣ 진망[塵網]진망은 세속의 그물로, 주로 벼슬살이를 가리킨다.
♣ 진망[蓁莽]초목이 무성하다.
♣ 진맹공[陳孟公]맹공은 한(漢) 나라 진준(陳遵)의 자(字). 벼슬이 가위후(嘉威侯)에 이르렀으며 술을 즐겨하여 늘 손님들이 집에 꽉 찼었는데, 그때마다 대문의 열쇠를 잠그고 손님 수레의 비녀장을 샘에 던져 넣었으므로 손님이 아무리 급한 사정이 있어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한다.
♣ 진맹투할[陳孟投轄]맹공(孟公)은 서한(西漢) 진준(陳遵)의 자(字)이다. 진준이 술을 좋아하여 주연을 곧잘 열곤 하였는데, 빈객이 모여들면 그들이 타고 온 수레의 비녀장(수레바퀴가 굴대에서 빠지지 않도록 굴대머리에 지르는 큰 못)을 우물 속에 던져 놓고는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가지 못하게 했던 고사가 있다. 《漢書 游俠傳 陳遵》
♣ 진목[瞋目]진목은 ‘눈을 부라리다’의 뜻.
♣ 진목공[秦穆公]진목공(秦穆公)은 춘추 때 오패(五霸)의 하나. 그는 훌륭한 신하 백리해(百里奚)를 얻어 옹주(雍州) 지방을 차지하고 패업(霸業)을 이룩하였다.
♣ 진목루[秦穆樓]진 목공의 딸 농옥(弄玉)이 음악을 좋아했는데, 소사(簫史)는 퉁소를 잘 불었으므로, 진 목공이 농옥을 소사에게 시집보내어 둘이서 거처하도록 지어 준 봉루(鳳樓)를 가리킨다.
♣ 진목창창계우개[震木蒼蒼桂又開]진괘(震卦)는 목(木)과 장남(長男)에 해당하므로, 즉 큰아들이 과거에 급제했음을 이른 말이다.
♣ 진무[眞武]진무는 한(漢) 나라 때 정락국왕(淨樂國王)의 태자이다. 동해를 건너다 천신(天神)을 만나 보검을 수여받고 무당산(武當山)에 들어가 수련한 끝에 42년만에 공을 이루어 백일승천(白日昇天)하였으며 상제의 명을 받들고 북방을 진압하였다 한다.
♣ 진무기[陳無己]무기는 진사도(陳師道)의 자이다. 진사도는 호가 후산(后山)이며, 송(宋) 나라의 시인이다.
♣ 진문[晉門]당 나라 유종원(柳宗元)이 매승의 칠발을 모방하여 지은 문체의 명칭.
♣ 진물[鎭物]진물은 모든 사물이 다 안정되게 하는 것.
♣ 진미공[陳眉公]명(明) 나라 진계유(陳繼儒). 미공(眉公)은 그의 호임.
♣ 진번[陳蕃]동한(東漢) 때 사람. 그의 친구 서치(徐穉)가 찾아오면 평상을 내려앉게 하고 그가 떠나면 달아매어 다른 사람에게는 앉게 하지 않았다 함.
♣ 진번일실무[陳蕃一室蕪]후한서(後漢書) 권 16에 “진번이 15세 때 집에서 한가히 지내고 있었는데 풀이 무성하여도 그대로 두었었다. 아버지의 벗 설근(薛勤)이 찾아왔다가 진번에게 ‘그대는 어째서 뜰을 깨끗이 청소해 놓고 손님을 맞지 않는가?’ 하니, 답하기를 ‘대장부가 세상을 살면서 마땅히 천하를 청소하여야지 한 집의 청소에 마음을 써서야 되겠습니까?’ 했다.” 하였다.
♣ 진번일탑[陳蕃一榻]후한(後漢) 때 진번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 남주(南州)의 고사(高士) 서치(徐穉)가 오면 특별히 한 탑(榻)을 마련하여 대접했던 고사이다.
♣ 진번탑[陳蕃榻]동한(東漢)의 진번(陳蕃)이 예장태수(豫章太守)가 되었을 때, 서치(徐穉)가 찾아오면 특별히 자리 하나를 깔아 놓고 접대하였다가 서치가 돌아가면 그 자리를 다시 걸어 놓았다. 후세에 특별히 손님을 대우하는 것을 하탑(下榻)이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 53 徐穉傳》
♣ 진번탑[陳蕃榻]자신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진번(陳蕃)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 서치(徐穉)가 찾아올 때만 탑상을 내려놓았다가 그가 가고 나면 다시 올려놓고는 다른 사람은 무시했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陳蕃傳》
♣ 진번하탑[陳蕃下榻]현자를 특별 예우한 일. 후한(後漢) 시절 남창 태수(南昌太守) 진번(陳蕃)이, 별로 손님을 접대하지 않다가도 그 고을에서 가난하게 지내는 서치(徐穉)라는 선비만 오면 특별히 자리를 내려 깔아주고 그가 가면 즉시 말아서 다시 제자리에다 매달았다고 함. 《後漢書 高士傳》
♣ 진벌자능통[津筏自能通]직언(直言)을 하여 임금을 바른길로 유도하였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열명 상(說命上)에 “만약 큰 강을 건널 때에는 그대가 배가 되어 나를 건너게 하라.”고 은 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부탁하는 말이 나온다.
♣ 진법[秦法]진(秦) 나라의 법은 가혹하고 각박하고 번다하기로 유명하였다.
♣ 진변[辰弁]옛날 경상도 지방에 위치했던 나라로서 진한(辰韓)ㆍ변한(弁韓)을 합칭한 말.
♣ 진변문[晉卞門]부자와 형제들이 모두 국가에 충성을 바치다 순절한 진나라 변호(卞壺)의 집안을 말함.
♣ 진부[眞符]도참(圖讖)을 가리킨다.
♣ 진부귀정통[眞符歸正統]제왕(帝王)이 처음에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는데 이것을 부명(符命)이라 한다. 여기서는 진부[참부명]가 정통의 임금에게 돌아왔다는 뜻이다.
♣ 진부조슬[秦缶趙瑟]진왕(秦王)과 조왕(趙王)이 우호를 다지기 위해 민지(澠池)에서 회동했을 때 술이 거나하자 진왕이 일부러 조왕의 입장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하여 조왕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직접 퉁기게 했다. 이때 조왕을 배종했던 인상여(藺相如)가 역시 진왕으로 하여금 진의 고유 악기인 장군[缶]을 치게 하여 보복하였음. 《史記 卷八十一》
♣ 진북계[陳北溪]송(宋) 나라 때 주자(朱子)의 문인이며 도학자인 진순(陳淳)의 호가 북계(北溪)인데, 주자가 일찍이 이르기를 “오도(吾道)에 진순을 얻은 것이 기쁘다.”고 하였다. 《宋史 卷四百三十》
♣ 진사왕[陳思王]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조식(曹植)이 진왕(陳王)에 봉해지고 시호(諡號)가 사(思)이므로 그를 가리킨 말이다.
♣ 진사차[辰巳嗟]현인(賢人)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후한(後漢) 정현(鄭玄)이 꿈속에서 공자(孔子)가 “일어나라, 일어나라, 올해는 진년이고 내년은 사년이다.[起起 今年歲在辰 來年歲在巳]”라고 일러 주는 말을 듣고는, ‘용사의 해에 현인이 탄식한다.[歲至龍蛇賢人嗟]’는 참어(讖語)에 비추어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았는데, 과연 얼마 뒤에 병에 걸려 죽은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 진삼[陳三]진삼은 송 나라 때의 문인 학자이자 절의가 높았던 진사도(陳師道)의 별칭인데, 매우 가난하였으나 그의 재주를 탐낸 권세가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였고 끝내는 매우 추운 겨울에 솜옷이 없어 얇은 옷을 입고 교제사[郊祀]에 참여하였다가 병이 들어 49세로 죽었다. 문(文)은 증공(曾鞏)을, 시는 황정견(黃庭堅)을 스승으로 삼았다. 《宋史 卷四百四十四 陳師道傳》
♣ 진상[眞常]진상은 진실되고 항상 존재한다는 말로 여여와 그 의미가 비슷하다.
♣ 진상곶천인정만태[進上串穿人情滿駄]진상품이 겨우 산적 궤미에 꿸 만하면 이에 따르는 인정물(人情物)은 말바리에 가득하다는 속담. 정식으로 바치는 물건보다 뇌물이 휠씬 많음을 풍자하는 말.
♣ 진상자존녕사송[晉相自尊寧仕宋]도연명(陶淵明)은 진(晋) 나라 재상 도간(陶侃)의 자손으로서 진(晋)을 빼앗은 송(宋)에 몸을 굽히기를 부끄러워하였다.
♣ 진색[震索]주역(周易)에 진괘(震卦)는 장남(長男)인데, 곤(坤)이 건(乾)에서 양효(陽爻)를 하니 빌려오면 진괘가 된다.
♣ 진서[趁瑞]연산군 때 악인(樂人)의 의복을 일컫던 말.
♣ 진서[陳徐]진번(陳蕃) 서치(徐穉). 동한(東漢) 때 예장 태수(豫章太守) 진번이 다른 빈객들은 일절 접대하지 않았는데, 오직 남주(南州)의 고사(高士) 서치가 올 때만 매달아 놓았던 의자를 내려놓았다가 서치가 떠난 뒤에는 도로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後漢書 卷66 陳蕃列傳》
♣ 진서루[鎭西樓]장연(長淵) 객관(客館) 동쪽에 있던 정자 이름이다.
♣ 진서산[眞西山]서산은 송 나라 때 학자 진덕수(眞德秀)의 호. 자는 경원(景元).
♣ 진선[晉宣]진선은 진(晉) 나라 선제(宣帝)로 추존(追尊)된 사마의(司馬懿)를 가리킨다.
♣ 진선[眞仙]진선은 참다운 신선으로, 이원익을 찬미하는 말이다.
♣ 진선진미[盡善盡美]지극히 착하고 지극히 아름다움. 완전 무결함.
♣ 진성[辰星]진성은 곧 수성(水星)이어서, 오행설로 보아 흑(黑)에 해당한다. 《天官占》
♣ 진성[秦城]혼란했던 진(秦) 나라의 궁중처럼 권력의 암투가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당시의 조정을 비유해서 표현한 것이다.
♣ 진성운조차어린[陣成雲鳥次魚鱗]고대의 진법(陣法)에 의하면 운문진(雲門陣), 조상진(鳥翔陣), 어린진(魚鱗陣) 등이 있다.
♣ 진소[秦蕭]진 나라 소사(蕭史)의 피리 소리라는 뜻이다.
♣ 진소경[陳少卿]소경은 벼슬 이름. 진 소경은 곧 진화(陳澕)를 가리키는데,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우사간(右司諫) 등을 지냈고 시와 문장에 뛰어나 이규보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 진소유[秦少游]소식(蘇軾)의 제자인 송(宋) 나라의 문인 진관(秦觀)으로, 소유는 그의 자(字)이다. 시문에 능했으며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짐. 저서에는 회해집(淮海集)이 있음.
♣ 진수미인정[溱水美人情]시경(詩經) 정풍(鄭風) 진유(溱洧)에 “진수와 유수 한창 넘실넘실 …… 남정네와 여인네 서로들 노닥이며 작약을 선물로 주고 받는구나[溱與洧方渙渙 …… 維士與女 伊其相謔 贈之以勺藥]”라고 하였다.
♣ 진수성찬[珍羞盛饌]진귀한 맛있는 음식[羞]이 성대하게[盛] 차려짐[饌]. 맛이 좋은 음식을 푸짐하게 잘 차림. 보기 드물게 맛이 좋고 푸짐하게 잘 차린 음식
♣ 진수숭운[秦樹嵩雲]서로 멀리 떨어저 있음을 이름. 이상은(李商隱) 시에, “숭산 구름 진 나라 나무로 오래도록 떨어져 사네[嵩雲秦樹久離居]”라는 구절이 있음.
♣ 진수옹[陳壽翁]수옹은 원(元) 나라 학자인 진역(陳櫟)의 자. 그는 송(宋) 나라가 망하자 은거하여 출사치 않았음. 저서에 정우집(定宇集)ㆍ상서전찬소(尙書傳纂疏)ㆍ근유당수록(勤有堂隨錄) 등이 있음.
♣ 진승[眞乘]불교(佛敎)의 용어로, 즉 진실한 교법(敎法)을 말한다.
♣ 진승[陳勝]진(秦)나라 양성(陽城) 사람. 이세(二世) 원년에 양하(陽夏) 사람 오광(吳廣)과 함께 어양(漁陽)에서 수자리살면서 제 기간을 대지 못해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곳 도위(都尉)를 죽이고 함께 수자리살던 졸도들과 기치를 들고 진(秦)과 맞서 싸우면서 공자(公子) 부소(扶蘇)와 초장(楚將) 항연(項燕)을 사칭하니 여러 군현(郡縣)이 진(秦)의 가혹한 법을 괴롭게 여겨 모두 귀부(歸附)하였다. 이윽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초왕(楚王)이라 하고 형세가 매우 성했는데, 뒤에 어자(御者) 장가(莊賈)에게 살해되었음. 《史記 陳涉世家》
♣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사기(史記) 편명으로, 진평(陳平)의 열전임.
♣ 진시화중귀[秦時火中歸]진 시황(秦始皇)은 천하를 통일한 뒤에 이사(李斯)의 우민(愚民) 정책을 따라, 천하의 시서(詩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찾아내어 함양(咸陽)에 모아 놓고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卷八十七 李斯列傳》
♣ 진식위[陳寔位]동한(東漢)의 진식이 성덕 군자(盛德君子)로서 벼슬이 태구장(太丘長)에 머물렀으므로, 태위(太尉) 양사(楊賜)와 사도(司徒) 진탐(陳耽) 등이 공경(公卿) 지위에 오르고는 늘 탄식하기를 “그분이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는데 우리가 먼저 차지하다니 부끄럽다.[寔大位未登 愧于先之]”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陳寔傳》
♣ 진신아[縉紳衙]온 조정을 통털어 진신아라고 말하고, 이것을 거느렸다고 함은 수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 진신월[眞身月]하늘에 있는 달[月]은 진신(眞身)이요, 여러 군데 물 속에 비치는 달 그림자는 달의 분신(分身) 또는 환신(幻身)・화신(化身)이 된다.
♣ 진신처사[搢紳處士]높은 벼슬아치를 말함.
♣ 진안[眞贋]진짜와 가짜.
♣ 진암[晋菴]영조(英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천보(李天輔)의 호이다.
♣ 진양[辰陽]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진주(辰州) 부근의 지명.
♣ 진양[晉陽]진양은 진주(晉州)의 옛 이름이다.
♣ 진양공[晉羊公]진(晉) 나라 양호(羊祜)가 형주(荊州)의 자사로 있을 때, 가벼운 갖옷 느슨한 띠[輕裘緩帶]로 현산(峴山)에서 놀았다.
♣ 진양공[晉陽公]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우(瑀), 고친 이름은 이(怡). 강화 천도 뒤 고종(高宗) 21년 진양후(晉陽後)에 봉하였다.
♣ 진양공자[晉陽公子]당 태종 이세민(李世民). 진양은 고을 이름. 현 산서성 태원현(太原縣) 치(治). 옛날의 당국(唐國) 뒤에 진(晉)으로 고침.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이 진 양공(晉陽公)이므로 그 아들 태종이 진양공자이다.
♣ 진양사[秦良死]시경(詩經) 진풍(秦風) 황조장(黃鳥章)에 의하면 진(秦)의 목공(穆公)이 죽었을 때 그의 유명(遺命)에 의하여 자거씨(子車氏)의 세 아들인 엄식(奄息)ㆍ중항(仲行)ㆍ침호(鍼虎)가 본의 아니게 순사(殉死)하였는데, 그때 나라 사람들은 그 세 양인(良人)이 까닭 없이 죽은 것이 슬퍼서, “만약 그들 목숨을 구제할 수만 있다면 딴 사람 백 명과도 그 목숨을 바꾸겠다.”라는 시를 썼던 것이다.
♣ 진양절도사[晉陽節度使]진양은 진주(晉州)의 옛 이름으로 진양절도사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별칭이다.
♣ 진여[眞如]대승 불교(大乘佛敎)의 이상 개념의 하나인데, 우주 만유에 퍼져 있는 상주 불변하는 본체이다. 이것은 우리의 사상 개념으로 미칠 수 없는 진실한 경계로서 오직 성품을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거짓이 아닌 진실, 변천하지 않아 여상(如常)함을 뜻한다.
♣ 진여[眞如]불교 철학(佛敎哲學)에서 본체를 진여(眞如)라 하는데, 진(眞)은 허망(虛妄)하지 않다는 것이요, 여(如)는 평등(平等)인데.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는 말이다. 본체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자심(自心)이라 한다. 《起信論》
♣ 진여[眞如]진여는 우리의 이지(理智)로는 파악할 수 없으므로, 일체가 모두 실체와 자성이 없다는 공(空)한 이치를 체득할 때에 나타나는 것. 그러나 이는 공에 의하여 나타나는 실성(實性)이므로 공성이라 하는 것이요 진여 자체가 공이라는 것은 아니다.
♣ 진여삼매[眞如三昧]일체의 번뇌 망상을 제거한 본연(本然)의 경지를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 진역[陳櫟]원(元) 나라 학자. 자는 수옹(壽翁), 호는 정우(定宇). 저서에는 상서집전찬소(尙書集傳纂疏)ㆍ정우집(定宇集)ㆍ역사통략(歷史通略) 등이 있음. 《元史 陳櫟傳》
♣ 진역[秦譯]불경(佛經)을 뜻함. 후진(後秦) 때에 서역(西域)의 중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장안(長安)에 들어와 경론(經論) 380여 권을 한문(漢文)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진영탁[塵纓濯]“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만하네.” 하는 노래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있다.
♣ 진완[陳完]진완은 진 공자 완(陳公子完)으로서 처음 제(齊) 나라에 망명하여 환공(桓公)을 섬겨 경(卿)이 되고 뒤에 전(田)으로 성을 바꾸었는데, 그의 11세손인 전화(田和)가 끝내 제 나라를 찬탈하였다. 《資治通鑑綱目 卷一》
♣ 진왕[陳王]진왕(陳王)에 봉해졌던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문장가 조식(曹植)의 봉호(封號)이다.
♣ 진왕지부[秦王之缶]조(趙) 나라 혜문왕(惠文王)이 진왕과 민지(澠池)에서 모였을 때 인상여가 왕을 따라갔더니, 오만한 진왕이 조왕에게 비파를 타게 하였다. 상여는 진왕을 꺾어 장구를 치게 하였다.
♣ 진왕철경거[陳王輟耕耟]진왕은 진승(陳勝)을 가리킨다. 그는 품팔이꾼으로 농사일을 하다가 “이 다음 부귀하게 되면 잊지 않겠다.” 하니 사람들은 품팔이 주제에 무슨 부귀냐고 비웃었다. 진승은 “작은 새야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알겠는가.” 하며 농사일을 걷어치웠다. 뒤에 오광(吳廣)과 함께 군중을 모아 폭정을 자행하던 진(秦)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史記 陳涉世家》
♣ 진용양[晉龍驤]진 나라의 장군인 용양대장(龍驤大將) 왕준(王濬)을 가리킨다. 왕준이 큰 누선(樓船)을 만들어 타고 오(吳) 나라를 정벌하러 갔는데, 오 나라 군사들이 철쇄(鐵鎖)를 설치해 가로막았다. 그러자 다시 큰 뗏목을 만들어 불에 태워 철쇄를 녹인 다음 진격하여 오 나라를 멸망시켰다. 《晉書 卷42》
♣ 진운[秦雲]진(秦) 나라 서울 장안(長安)의 하늘에 뜬 구름.
♣ 진운[縉雲]황제(黃帝) 때의 관명(官名)인데, 하관(夏官) 즉 병부(兵部)에 해당한다.
♣ 진원[眞源]선도(仙道)의 본원(本源)을 이른 말이다.
♣ 진원룡[陳元龍]원룡은 진등(陳登)의 자(字)이다.
♣ 진월[秦粵]월(粤)은 월(越)로도 쓰는데 진(秦)은 중국의 서북쪽에 있고 월은 동남쪽에 있어서 거리가 멀므로 떨어져 관계가 없는 것을 말한다.
♣ 진유근리사[鎭幽謹理使]연산군이 죄인을 절도(絶島)에 정배시키고 그들을 감독하도록 보내던 서신을 말한다.
♣ 진유아곡[溱洧雅曲]연인끼리 음란하게 희희덕거리며 작약꽃을 꺾어서 주고받는 것을 읊은 시 역시 품위 있는 노래가 못 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진유(溱洧)에 “사내와 계집이 희희덕거리며 장난치고, 작약을 꺾어 주며 서로들 헤어지네.[維士與女 伊其將謔 贈之以芍藥]”라는 말이 나온다. 상장(相將)은 서로 전송한다는 말이다.
♣ 진유풍정[溱洧風情]청춘 남녀가 작약을 꺾어 주며 장난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진유(溱洧)에 “남녀 히히거리며 장난치다 작약을 꺾어 주며 헤어지네.[維士與女 伊其相謔 贈之以勺藥]”라는 구절이 있다.
♣ 진유화표[眞遊華表]한(漢) 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일찍이 영허산(靈虛山)에 도를 닦고, 뒤에 학(鶴)으로 화(化)하여 고향을 떠난 지 천 년 만에 고향인 요동 성문(城門)의 화표주(華表柱)에 날아와 앉았다가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진의[振衣]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새로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자는 반드시 옷의 먼지를 털어 입는다.[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는 말이 나온다.
♣ 진이세[秦二世]진시황의 둘째 아들 호해(胡亥)를 말한다. 진 시황이 죽자 이사(李斯)와 조고(趙高)가 유조(遺詔)를 위조하여 장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호해를 세웠고, 조고가 정사를 마음대로 하여 관동(關東)에서 도적이 일어나게 되매 이세가 조고를 책망하자, 조고가 시해(弑害)하였다. 《史記 卷六》
♣ 진인[眞人]도득(道得)한 사람.
♣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사람의 일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림.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그 후는 천명에 맡김
♣ 진인설언[秦人設言]까마귀 머리가 희어지고 말이 뿔이 났다는 말. 진왕(秦王)이 연(燕)의 태자(太子) 단(丹)을 옥에 가두어 놓았는데, 그가 보내달라고 하자, 진왕이 그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까마귀 머리통이 희어지고 말이 뿔이 나면 그때 보내주리라.” 하였다. 단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더니 그 후 까마귀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말도 뿔이 나서 진왕이 깜짝 놀라 그를 풀어줬다고 함. 《事文類聚》
♣ 진인종식[眞人踵息]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진인(眞人)의 호흡(呼吸)은 대지를 딛고 서서 발뒤꿈치로부터 쉬어 나오고, 보통 사람의 호흡은 목구멍으로부터 나온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진인책[秦人策]진(晉) 나라 대부(大夫) 사회(士會)가 진(秦) 나라에 도망가 있을 적에, 진(晉) 나라에서 진(秦) 나라가 사회를 등용할까 염려한 나머지, 위(魏)의 수여(壽餘)를 시켜 사회를 꾀어서 진(秦) 나라를 탈출시킬 때에 진(秦) 나라 대부 요조(繞朝)가 사회에게 자기 말채찍을 주면서 말하기를 “진(秦)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의 꾀를 마침 쓰지 않았을 뿐이다.”고 하여, 사람을 속일 수 없음을 주의시킨 데서 온 말이다. 《左傳 文公十三年》
♣ 진인척[秦人瘠]월(越) 나라는 진(秦) 나라와 워낙 거리가 멀기 때문에 월 나라 사람이 진 나라 사람의 살찌고 파리함을 하등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서로 소원하여 전혀 상관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 진일[眞逸]도홍경(陶弘景)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말릉(秣陵) 사람으로 자는 통명(通明)인데 구용현(句容縣)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여 스스로 화양은거(華陽隱居)라 호하였다가 뒤에 화양진일이라 호하였음.
♣ 진일주[眞一酒]진일주(眞一酒)는 술 이름. 송(宋)의 소식(蘇軾)이 만든 술. 《酒史》
♣ 진자앙[陳子昂]초당(初唐)의 시인. 자는 백옥(伯玉). 형식에 치우친 제ㆍ양(齊梁)의 귀족적 시풍(詩風)을 일소하고, 한ㆍ위(漢魏)의 고아(高雅)한 시풍으로 복고할 것을 주창, 성당(盛唐) 시인의 선구가 됨. 저서에는 진습유집(陳拾遺集)이 있음.
♣ 진재[眞宰]우주 만물의 주재자(主宰者)로서 우리를 웃고 울게 만드는 참 주인을 말한다. 하늘은 만물의 주재(主宰)이기 때문에 진재라고 한 것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필시 진재가 있을 터인데 다만 그 단서를 얻지 못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 진쟁[秦箏]진(秦) 나라 사람들이 타던 쟁을 말하는데, 이 가락은 매우 강개(慷慨)하다고 한다.
♣ 진적위산[塵積爲山]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다.
♣ 진전[眞殿]승하한 왕과 왕후의 어진(御眞)을 모셔 놓은 곳. 진전이 곧 선원전의 별칭은 아니다.
♣ 진전[眞詮]진전은 속제(俗諦)에 대한 진제(眞諦) 즉 불교 최상의 경지를 가리킨다.
♣ 진전전[秦前殿]진시황(秦始皇)의 전전(前殿)인 아방궁(阿房宮)은 그 규모가 동서로 5백 보(步)가 되고, 남북은 50장(丈)이나 되어 그 위에 사람 1만 명이 앉을 수가 있었고, 두루 복도를 놓아 궁전 아래서 곧바로 남산(南山)에 다다를 수 있게 꾸몄음. 《史記 秦始皇本紀》
♣ 진정계사[晉亭禊事]진정은 진(晉) 나라 때 회계(會稽)의 산음(山陰)에 있었던 난정(蘭亭)을 이르는데, 당시 명사(名士)들로 왕희지(王羲之)ㆍ사안(謝安) 등 41인이 3월 3일에 이곳에 모여 계사(禊事)를 치르고 시부(詩賦)를 지으면서 풍류를 즐겼었다.
♣ 진정곡[秦庭哭]춘추 때 오(吳) 나라의 군사가 초 나라를 쳐 수도(首都)에 들어오자, 신포서(申包胥)가 진(秦)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여 뜰에서 7일 동안 울음소리를 끊지 않으니, 진 나라에서 그 정성에 감동되어 군사를 내어 초 나라를 구하였다.
♣ 진정리[眞定梨]진정은 지명. 이 지방에는 배[梨]가 특산물인데 크고 맛 좋기로도 유명하다. 위 문제(魏文帝)의 조서(詔書)에 “진정의 배는 크기가 마치 주먹만하고 달기는 마치 꿀과 같다.” 하였다.
♣ 진정민우[秦政民愚]진시황(秦始皇)의 이름은 정(政)인데, 책을 모두 불살라서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었다.
♣ 진정수사[秦政收司]진정은 이름이 정(政)인 진시황(秦始皇)을 가리키는데, 이에 앞서 진 효공(秦孝公) 때에 상앙(商鞅)이 백성들 사이에 서로 규찰하게 하고 연좌시키는 수사연좌법(收司連坐法)을 만들었던바, 이 법이 진시황 때에 이르러서는 결국 천하의 서적(書籍)을 다 불태우고, 협서율(狹書律)을 만들어 민간에서 시서(詩書)를 논하거나 또는 의약(醫藥)ㆍ복서(卜筮) 이외의 서적을 소장한 자가 있으면 극형에 처하게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진정표[陳情表]권근(權近) 자신이 새 왕조의 원종공신(原從功臣) 대열에서 빠지자 자기도 문장으로서 이씨 개국에 일익을 담당한 공로가 있음을 밝힌 진정전(陳情箋)과, 83세인 자기 아버지에게 봉작(封爵)을 해달라고 간청한 진정차자(陳情箚子)가 있음. 《陽村集》
♣ 진제[振祭]옛사람이 음식을 대할 적에 반드시 제(祭)하는데 그것을 진제라 이름. 주례(周禮) 변구제(辨九祭)의 제5제임.
♣ 진제[眞諦]불교 용어로서 현상계의 미(迷)한 세계를 말하는 속제(俗諦)에 대해, 진지(眞智)에 의하여 터득하는 궁극적인 진여(眞如)의 세계를 진제(眞諦)라 한다.
♣ 진제궁송[秦帝宮松]진제는 곧 진시황(秦始皇)을 가리킨 말인데, 진시황이 태산(泰山)에 올라가 봉선(封禪)할 적에 폭풍우(暴風雨)가 몰아치자 다섯 그루의 소나무 밑에서 이를 피하였으므로 뒤에 이 소나무들을 다섯 대부(大夫)로 봉(封)한 고사이다.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 진조여[陳趙予]진조여는 진이상(陳履常)과 조경황(趙景貺)과 동파(東坡) 자신을 가리킨다. 동파의 시에 “꿈길에서 돌아오자 발소리 들려오며, 누군가 조진여를 불러 대누나.[夢回聞剝啄 誰呼趙陳予]”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4 與趙陳同過歐陽叔弼新治小齋戲作》
♣ 진종욕도자응미[塵蹤欲到自應迷]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무릉(武陵) 땅의 어부가 시내를 따라 올라가며 고기를 잡다가 홀연히 복사꽃이 만발한 별천지(別天地)에 들어가서 노닐었는데, 그곳을 나와 고향으로 돌아온 뒤 다시 찾아가 보려 했으나 결국 길을 잃고 헤매기만 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 진주[晉晝]주역(周易) 진괘(晋卦)에, “낮에 세 번 접함이라[畫日三接].”는 구절이 있다. 소(疏)에 “이 괘(卦)는 신하의 승진(昇進)을 밝히는 것이므로, ‘晋’이라 이른다. 천자(天子)가 의(義)롭게 여겨 거마(車馬)를 줌이 번다(蕃多)하고 숱하며, 또 자주 총애를 입어 하루 낮 사이에 세 번 접견함이라.” 하였다.
♣ 진주[眞珠]진주는 강원도 삼척의 별호이다. 삼척이 예로부터 선향(仙鄕)으로 이름이 났다.
♣ 진주결사[陳朱結社]주씨(朱氏)와 진씨(陳氏) 두 성만 살아서 마을 이름이 되었는데, 이들은 대대로 서로 혼인했다 한다. 한편 무릉도원에도 진씨와 주씨 두 성이 피난 가서 살았다고 하는데, 두 집안의 연인(聯姻)의 정분을 주진지호(朱陳之好)라 한다.
♣ 진주삼장사[晉州三壯士]선조 26년(1593) 6월 진주성에서 왜적과 대항하여 9주야를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은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황진(黃進)을 가리킨다.
♣ 진주성[眞珠城]강원도 삼척(三陟)의 옛 이름이 진주(眞珠)이다.
♣ 진준[陳隼]공자가 진(陳) 나라에 있을 때 새매가 진후(陳侯)의 뜨락에 날아와서 죽었는데 돌촉의 싸리나무 화살에 관통된 것이 길이가 한 자가 넘었다. 진후가 사람을 시켜 새매를 가지고 공자에게 가서 물으니 공자가 이르기를 “이 새매가 멀리 왔다. 이 화살은 숙신씨(肅愼氏)의 화살이다.” 했다 함.《國語 魯語》 숙신씨는 동이족(東夷族)으로서 공자가 관심을 두었음을 말함.
♣ 진중[秦中]섬서(陝西) 중부의 평원, 즉 관중(關中) 땅을 말하는데, 춘추 전국 시대에 진(秦) 나라의 영토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 진중[秦中]진중은 중국의 함곡관(函谷關)을 말한 것이다.
♣ 진중자[陳仲子]제(齊) 나라의 청렴한 처사(處士). 귀족의 자제로 지나치게 청렴결백하여 자기 형이 받은 녹을 의롭지 않은 것이라 하여 먹지 않으며 자기 어머니가 만든 음식도 먹지 않고, 국왕(國王)이 백금(百金)의 폐백으로 초청(招請)하였으나 그의 처(妻) 또한 진중자와 뜻이 같아서 그것을 한 말로 사절하였다. 아내와 함께 오릉현으로 가서 자기는 신을 삼고 아내는 길쌈을 하면서 살아갔다. 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에 “진중자는 어찌 청렴한 선비가 아니리오. 오릉(於陵) 땅에 있을 때 3일 동안 굶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다가 굼벵이가 반이나 먹은 우물 위의 오얏을 기어가서 주워 먹으니 세 번 삼킨 후에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에 물건이 보였다.”는 말이 있다.
♣ 진지[秦地]진지는 장안, 즉 서울을 가리킨다.
♣ 진진[津津]넘칠 정도로 가득 차 있는 모양, 악한 모양, 맛 또는 재미가 썩 좋은 모양
♣ 진진[眞眞]당나라 조안(趙顔)이 화공(畵工)에게서 미인(美人)의 화상을 한 폭 얻으면서 말하기를, “세상에 이런 미인(美人)이 없다. 만일 있다면 내가 아내로 삼겠다.” 하니, 화공이 답하기를, “나의 그림은 신화(神畵)인데 이 미인의 이름은 진진(眞眞)이라 한다. 그 이름을 백일(百日) 동안 밤낮으로 부르면 반드시 대답이 있을 것이니 술에다 백가(百家)의 채회(綵灰)를 타서 부으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하므로 조안은 그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미인이 살아나서 1년 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 뒤에 조안의 친구가 알고, “이것은 요물(妖物)이다. 내가 신검(神劍)이 있으니 요물을 죽이라.” 하고 칼을 주었다. 조안이 방에 들어가니 미인이 울면서, “나는 남악(男岳)의 신선인데 지금 그대가 나를 의심하니 더 머물 수 없다.” 하고는 아이를 안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술을 토해 내니 본 그림에 어린이 하나가 더 그려져 있었다.
♣ 진진[塵塵]대대로, 누그러지는 모양
♣ 진진[振振]마음이 인후한 모양, 성대한 모양, 신의심이 두터운 모양, 떼지어 나는 모양, 혼자 잘난 체하여 우쭐거리는 모양.
♣ 진진[溱溱]많은 모양, 성한 모양, 펴지는 모양, 미한이 계속되는 모양
♣ 진진[振振]문왕 후비(后妃)의 덕을 기렸다는 시경(詩經) 주남(周南) 인지지(麟之趾)에 “아, 기린의 발이여, 무럭무럭 자라난 뛰어난 공자들은 모두가 바로 기린이로세.[麟之趾 振振公子 于嗟麟兮]”라는 말이 있는데, 기린은 성격이 인후(仁厚)해서 발로 벌레나 풀을 밟지 않는다고 한다.
♣ 진진[蓁蓁]적취(積聚)된 모양이다.
♣ 진진[榛榛]초목이 무성한 모양
♣ 진진약[秦晉約]춘추 시대 때 진(秦)나라와 진(晉)나라 두 나라가 대대로 혼인한 것을 말하는데, 후대에는 두 집안이 연혼(聯婚)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 진진찰[塵塵刹]불경(佛經)에 많은 세계를 한 티끌[塵] 중에 각각 한 세계가 있다고 하였다.
♣ 진착[珍錯]산진해착(山珍海錯)을 말하는데 찬의 아름답고 귀한 것을 말함. 위응물(韋應物)의 시에 “山珍海錯棄藩籬"의 구가 있음.
♣ 진천[秦川]섬서성(陝西省)과 감숙성(甘肅省)의 진령(秦嶺) 이북에 있는 평원지대로, 옛날에 진 나라가 있던 곳이다. 여기서는 들판을 가리킨다.
♣ 진천[秦川]진천은 청수현에 있는 강 이름이다.
♣ 진첩[晉帖]진(晉) 나라 서예가들의 글씨를 탁본하거나 모사한 서첩(書帖).
♣ 진청[秦靑]옛날에 노래를 잘하던 사람의 이름이다.
♣ 진체[眞諦]불가의 용어로 진실무망(眞實無妄)을 말함. 이를테면 세간법(世間法)은 속체(俗諦)라 하고 출세간법(出世間法)은 진체라 함. 불교에서 말하는 최상(最上) 구경(究竟)의 진리를 뜻한다.
♣ 진초[眞草]해서(楷書)와 초서(草書).
♣ 진초경[晉楚卿]국가 운명에 관하여 무관심하고 무책임함. 진(晉)과 초(楚)는 전국 시대 칠국(七國)중에서 가장 부강(富强)한 나라였으므로 각국의 유환자(遊宦者)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가 자기의 영달(榮達)을 추구하는 객경(客卿)들이었기에 그들의 출처 거취는 그 나라 국익(國益)에 관계없이 매우 임의적이었기 때문에 한 말임.
♣ 진초대흥[晉楚代興]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는 모두 패업(霸業)을 이룩한 강대국들인데, 국어(國語) 정어(鄭語)에 “평왕 말년에 이르러 진, 진, 제, 초가 교대로 일어났다.[及平王之末 而秦晉齊楚代興]”라는 말이 나온다.
♣ 진초불납[秦初不臘]진 혜문군(秦惠文君) 12년에 처음으로 납제(臘祭)를 거행하여 그 후로 여러 대(代)를 이어 오다가 진 시황(秦始皇) 31년 12월에 이르러서는 이름을 가평(嘉平)으로 바꾸었다. 《史記 秦本記, 秦始皇本記》
♣ 진춘추[晋春秋]진(晋) 나라 때 손성(孫盛)이 찬(撰)한 진양추(晋陽秋)를 이르는데, 말이 바르고 사리가 정당하여 대단히 양사(良史)로 일컬어졌다 한다. 《晋書 卷八十二》
♣ 진췌[秦贅]가난한 남자가 데릴사위로 처가살이하는 것을 이름. 이 풍속이 진(秦) 나라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이른 말인데, 한서(漢書) 가의전(賈誼傳)에 “진 나라 사람들은 가난한 집 자식이 장성하면 데릴사위로 나간다.” 하였다.
♣ 진췌[殄瘁]병들고 시달리어 망함. 시경(詩經) 대아 첨앙(瞻卬)에 “어진 신하가 가고 없으니, 나라는 망하겠네.[人之云亡 邦國殄瘁]" 한 데서 온 말이다.
♣ 진췌시[殄瘁詩]아까운 인물의 죽음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瞻卬)에 “현인이 사라짐이여, 나라가 병들어 야위게 되었도다.[人之云亡 邦國殄瘁]”라는 구절이 있다.
♣ 진췌탄[殄瘁歎]훌륭한 사람이 죽어서 나라가 병들 것을 탄식하는 것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瞻仰)에, “훌륭한 사람이 없으매 나라가 끊기고 병이 들리라[人之云亡 邦國殄瘁].” 하였다.
♣ 진췌한[殄瘁恨]현인이 사라지면서 나라의 형세 또한 기울어지는 한스러움을 말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瞻卬)에 “人之云亡 邦國殄瘁”라 하였다.
♣ 진침난위제[陳諶難爲弟]진침은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형 기(紀)와 함께 명망이 높았다. 기의 아들 군(群)과 그의 아들 충(忠)이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덕이 더 높다고 우기다가 결정을 짓지 못하고 조부 식(寔)에게 묻자, “원방(元方 기의 자)은 형 되기 어렵고 계방(季方; 침의 자)은 아우 되기 어렵다.” 대답하였다.
♣ 진탑[陳榻]진번(陳蕃)이 마련했던 자리를 말한다. 후한(後漢) 때 진번은 예장태수(豫章太守)로 있으면서 빈객(賓客)을 접견하지 않았는데, 오직 서치(徐穉)가 찾아오면 특별히 자리 하나를 마련했다가 깔아주고 그가 떠나면 자리를 걷어 벽에 매달아 두었는데, 서치가 오지 않으면 먼지가 수북히 쌓이도록 그냥 놔 두었다는[穉不至則灰塵積于榻] 고사가 전해 온다. 후세에 특별히 손님을 대우하는 것을 하탑(下榻)이라고 하였다. 《後漢書 徐穉傳》
♣ 진탑불요현[陳榻不要懸]빈객을 공경히 대우함을 비유한 말. 후한 때 진번이 예장태수(豫章太守)로 있으면서 다른 빈객은 전혀 접대하지 않았고, 오직 서치(徐穉)가 오면 특별히 걸상 하나를 비치하여 접대하고 그가 간 뒤에는 그 걸상을 걸어놓았던 데서 온 말이다.
♣ 진탕[震盪]떨리고 울렁거림.
♣ 진택선[震澤仙]술 좋아하는 호걸. 진택(震澤)은 태호(太湖)를 말하는데, 당(唐)의 장욱(張旭)이 술을 좋아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일러, 태호정(太湖精)이라고 하였음. 《이기(李頎)의 증장욱(贈張旭)》
♣ 진퇴격[進退格]일종의 율시 격식으로 진퇴운(進退韻)이라고도 한다. 한 수의 시에 두 개의 서로 비슷한 운부(韻部)인 운자(韻字)를 가지고 격구(隔句)로 압운하여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예컨대 1구(句)와 3구에서는 우운(虞韻)을 쓰고 2구와 4구에서는 어운(魚韻)을 쓰는 식이다.
♣ 진퇴체[進退體]율시(律詩)에서 운자(韻字)를 쓰는 격식 가운데 하나로, 한 수의 시에서 두 개의 비슷한 운자를 압운(押韻)으로 하여 격구(隔句)마다 운자를 전환하는 시체(詩體)를 말한다.
♣ 진편석혈[秦鞭石血]진시황(秦始皇)이 바다를 건너서 해 돋는 곳을 보고자 하여 돌다리를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바다로 돌을 내몰자 돌들이 저절로 바다로 달려갔다. 돌이 빨리 가지 않자 신인이 돌을 채찍질을 하니 돌에서 피가 흘렀는데, 지금도 그 돌들은 모두 붉다고 한다. 《藝文類聚 卷79》
♣ 진평[陳平]전한(前漢)의 양무(陽武)사람으로 고조(高祖)를 도와 한(漢)나라 왕실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고, 혜제(惠帝)때는 우승상(右丞相)으로서 주발(周勃)과 함께 여씨(呂氏)의 난을 미연에 진압하고 한 나라 왕실을 안정시켰음. 일찍이 이중사(里中社)에 재(宰; 고기를 썰어 나누어주는 사람)가 되어 분배하기를 매우 고르게 하며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재(宰; 재상)가 되어도 이 고기처럼 고루 나눌 수 있다.” 하였다. 《史記 陳丞相世家》
♣ 진평육출기[陳平六出奇]한(漢) 나라 진평(陳平)이 평생에 국가와 전쟁에 대해서 여섯 가지 기특한 꾀를 내었다.
♣ 진평재육균[陳平宰肉均]한(漢) 나라 진평이 미천했을 때에 향리(鄕里)의 요리인(料理人)이 되어 손들에게 고기를 골고루 나누어주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陳丞相世家》
♣ 진평화태[眞平禍胎]신라(新羅) 제26대 왕인 진평왕(眞平王)이 자기 딸인 선덕여왕(善德女王)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을 가리켜 한 말이다.
♣ 진함불출가[陳咸不出家]한(漢) 나라의 진함(陳咸)이 율령에 밝았는데, 왕망(王莽)이 왕권을 찬탈한 뒤 그에게 제도를 새로 고칠 것을 명하자, 이에 격분한 그는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율령에 관한 문서들을 벽장 속에 봉함하고는 다시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 진해제척공분분[秦奚齊戚空紛紛]백리해는 춘추 시대 우(虞) 나라 사람으로 우 나라가 망하게 되자, 망명하여 초(楚) 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진 목공(秦穆公)이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오고양피(五羖羊皮)를 그의 몸값으로 주고 그를 신하로 삼아 국정(國政)을 맡겼던 인물인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곧 만장(萬章)이 맹자(孟子)에게 “혹자의 말에 의하면, 백리해가 진(秦) 나라 목축업자(牧畜業者)에게 오양(五羊)의 가죽을 받기로 고용(雇傭)이 되어 소를 먹여주고 오양의 가죽을 받아서 이것을 진 목공에게 바치고 쓰이기를 요구했다고 하니, 그 말이 사실입니까?”하고 물은 데서 온 말이다. 그러나 맹자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영척은 춘추시대 위(衛) 나라 사람으로 집이 가난하여 남에게 품팔이를 해서 먹고 살다가, 제(齊) 나라에 가서는 남의 소를 기르면서, 환공(桓公)이 자신을 등용해주기를 바라는 뜻으로 쇠뿔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자, 환공이 그 노래를 듣고 끝내 그를 등용했다고 한다. 《孟子 萬章上, 淮南子 道應訓》
♣ 진향원[진香院]연산군이 견성군(甄城君; 성종 제7남 惇)의 집에 가흥청(假興淸)을 처하게 하고 부르던 이름이다.
♣ 진현[陳玄]먹[墨]의 이칭(異稱). 고사성어고(故事成語考) 기용(器用)에 “먹을 진현 또는 용제(龍劑)라 한다.” 하였다.
♣ 진현[晋賢]죽림칠현(竹林七賢)
♣ 진현관[進賢冠]한(漢) 나라 때 문관(文官) 또는 유자(儒子)가 쓰던 관 이름이다.
♣ 진현례[陳玄禮]당 현종(唐玄宗) 때 좌용무대장군(左龍武大將軍)으로 안녹산(安祿山)과 양귀비(楊貴妃)를 죽일 것을 주창(主唱)하였다. 그 공으로 채국공(蔡國公)에 봉해졌음. 《新ㆍ舊唐書 陳玄禮傳》
♣ 진홍[眞紅]옛 제도에 4품(品)은 홍정(紅鞓)을 띠나 가홍(假紅)이라 이르고, 3품을 진홍이라 이른다.
♣ 진홍멱부처[眞汞覓夫妻]도가에서 심신을 수련하는 한 방법임. 진홍(眞汞)은 주사(硃砂)에서 나오는 수은으로 단약(丹藥)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라고 하며, 부처는 남편과 아내로 곧 음양을 뜻한 듯함. 참동계(參同契) 주(注)에 “납과 수은이 서로 교제하여 부부를 맺는다.” 하였다.
♣ 진화[秦火]진(秦) 나라 때 책을 불태운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을 말한다. 진시황(秦始皇) 때 사람들이 정치에 대하여 비평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천하의 시서(詩書) 및 백가(百家)의 서책들을 모두 모아 불태웠으며, 선비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 진화[陳澕]호는 매호(梅湖)로 뛰어난 문장가인데, 이규보(李奎報)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벼슬은 지공주사(知公州事)에 이르렀다.
♣ 진황[秦黃]황정견(黃庭堅)과 진관(秦觀)은 북송(北宋) 말의 시인인데, 황은 이른바 강서시파(江西詩派)를 개창한 자이며 진관, 장뢰(張耒), 조보지(晁補之), 진사도(陳師道)와 더불어 소동파의 시법을 이었다 하여 소문(蘇門)이라 불렸다.
♣ 진회[軫懷]애통하다. 가슴아프다.
♣ 진회[秦灰]진 시황(秦始皇)이 시서(詩書)와 백가어(百家語)들의 책을 모두 불살랐으므로, 그 재[灰]를 말한 것이다.
♣ 진효부[陳孝婦]진효부의 남편은 전장으로 나가게 되자, 효부에게 부탁하기를,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내가 만약 못 돌아오는 날이면 그대가 내 어머니를 잘 봉양해 달라.’ 하니, 효부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 남편이 과연 죽으니, 효부는 시어머니를 더욱 잘 봉양하였다. 효부의 친정 부모가 민망히 여기어 개가(改嫁)하기를 권하니, 효부는 자살하려고 하므로 두려워서 감히 권하지 못했다.
♣ 진후유비[陳后幽悲]한 무제(漢武帝)의 비(妃) 진황후(陳皇后)인데, 무제의 사랑을 잃어 장문궁(長門宮)에 별거하였다.
♣ 진훤[陳暄]진훤은 진 후주(陳後主) 때 사람으로 아주 술을 좋아하여 절제 없이 많이 마셨는데 한번은 그의 조카가 진훤의 친구를 통해 그의 무절제한 음주를 풍간하자 진훤이 자기 조카에게 “너는 간섭하지 말라. 나는 술이나 먹으면서 늙으리라.”고까지 하였다. 《南史 卷六十一 陳暄傳》
♣ 진희[陳狶]한 고조(漢高祖) 때 낭중(郞中)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졌음.
♣ 질관상[垤鸛翔]비 올 징조를 말한 것. 비가 오려고 하면 땅 속에서 서식하는 개미들이 먼저 알고 집 단속을 하고, 황새는 원래 물을 좋아하여 즐거운 표시로 길게 운다고 함. 시경 빈풍(豳風)에, “황새는 개밋둑에서 울고[鸛鳴于垤]" 하였음.
♣ 질도[郅都]한(漢) 나라의 혹리(酷吏). 경제(景帝) 때의 직신(直臣)으로 직간(直諫)을 잘하였고 법(法)을 엄혹(嚴酷)하게 시행하였으므로, 당시에 창응(蒼鷹)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질도가 안문 태수로 부임을 하자 흉노가 그의 풍도(風度)를 듣고는 변방에서 떠나갔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안문 가까이 오지 못했다고 한다. 《史記 卷122ㆍ漢書 卷90》
♣ 질발[叱撥]명마(名馬)의 이름이다. 당(唐) 나라 천보(天寶) 연간에 서역(西域)에서 여섯 필의 한혈마(汗血馬)를 바쳤는데, 그 이름을 각각 홍질발(紅叱撥), 자질발(紫叱撥), 청질발(靑叱撥), 황질발(黃叱撥), 정향질발(丁香叱撥), 도화질발(桃花叱撥)이라고 하였다 한다. 《續博物志 卷4》
♣ 질병가[疾病家]질병이 든 궁인(宮人)들을 격리하여 두는 곳.
♣ 질상담[迭相擔]번갈아 가면서 서로 업어주다.
♣ 질석제형[叱石弟兄]갈홍(葛洪)이 지은 신선전(神仙傳)에, “황초평(黃初平)이 양을 기르고 있었는데, 어떤 도사(道士)에게 이끌려서 금화산(金華山) 석실(石室) 안으로 들어가 40여 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형 황초기(黃初起)가 동생을 찾아 산에 이르러서 양이 있는 곳을 물으니, 답하기를, ‘산의 동쪽에 있다.’ 하였다. 형이 가서 보니, 단지 흰 돌만 보이고 양은 보이지 않았다. 황초평이, ‘양이 있는데, 형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고는, 그곳으로 가서 ‘이놈, 이놈, 양아 일어나라.’ 하니, 흰 돌이 모두 일어나 몇만 마리의 양으로 변하였다.” 하였다.
♣ 질어경험조[叱馭經險阻]한(漢)나라 왕량(王良)이 익주 자사(刺史)로 가다가 검각산(釰閣山) 험한 곳에 이르러 말을 돌리며, “어찌 부모의 끼쳐 준 몸으로 이 험한 곳을 지나랴.” 하였다. 그 뒤에 왕존(王尊)이 익주 자사로 가다가 그 곳에 이르자 어자(御者)가 말하기를, “여기가 왕량이 말을 돌린 곳이요.” 하니, 왕존이 어자를 꾸짖으며, “왕량은 부모를 위한 효자(孝子)가 되었는데, 왕존은 나라를 위한 충신(忠臣)이 될 수 없으랴.” 하고, 그 곳을 통과하여 부임(赴任)하였다.
♣ 질어심[叱馭心]충신의 마음을 말한다. 국은(國恩)에 보답하기 위해 험한 길도 주저하지 않고 내닫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왕양(王陽)이 험난한 구절판(九折阪)을 넘으면서 혹시 몸을 상해 어버이에게 누를 끼칠까 염려하여 그냥 돌아왔는데, 뒤에 왕존(王尊)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마부를 꾸짖어[叱馭] 말하기를 “빨리 몰아라. 왕양은 효자요, 왕존은 충신이니라.”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漢書 王尊傳》
♣ 질전[疾顚]국어(國語) 주어 하(周語下)에, 지위가 높으면 순식간에 엎어진다[高位寔疾顚]는 말이 있다.
♣ 질종[秩宗]예부(禮部)의 별칭이다.
♣ 질지[郅支]흉노 선우(匈奴單于)의 명호인데, 그는 한 원제(漢元帝) 때 한 나라 사신(使臣)을 죽이고 반항하다가 장탕(張湯) 등에 의해 참살(斬殺)당하였다.
♣ 질질[挃挃]거두어들이기 위하여 곡식을 베는 소리
♣ 질질[叱叱]꾸짖는 소리, 혀를 차는 소리, 소나 말을 모는 소리, 사십 구
♣ 질청[秩廳]아전들이 모여서 사무를 보는 곳인데 성청(星廳)의 별칭임.
♣ 질출배척[嫉逐排斥]시기하고 미워하여 물리침.
♣ 질풍노도[疾風怒濤]세차게 부는 빠른 바람(폭풍暴風)과 성난 파도. 이유 없는 반항기의 불안정한 상태의 청소년기를 비유하기도 함
♣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바람이 세게 불어야 강한 풀임을 안다. 위급하거나 곤란한 경우를 당해봐야 의지과 지조가 굳은 사람을 알 수 있게 됨을 비유하는 말. 세한연후지송백(歲寒然後知松栢).
♣ 짐심[斟尋]나라이름. 한착의 아들 포악한 요(澆)가 폭력으로써 짐심과 싸워 그 배를 뒤집어 이를 패하고 천하를 얻었다.
♣ 짐치[斟雉]꿩국을 잘 요리하다.
♣ 집간[執簡]간책(簡冊)을 잡는다는 뜻으로, 사관(史官)이나 어사(御史)의 직책을 맡은 사람을 가리킨다.
♣ 집고록[集古錄]송 나라 구양수(歐陽脩)의 찬으로 총 10권. 내용은 금석문(金石文)을 집록하고 고증ㆍ해설한 것임,
♣ 집고사[集古辭]자기의 글을 새로 짓지 아니하고 옛사람의 글귀를 따 모아서 그 때의 사실에 적합하도록 연결하여 한 편(篇)의 문장을 만든 것이다.
♣ 집구[集句]집구(集句)는 자기가 지은 시(詩)가 아니고 여러 시인의 작품에서 한 구(句)씩 떼어 모아서 적당하게 맞추어 만든 것이다.
♣ 집구시[縶駒詩]시경(詩經) 소아(小雅)의 백구장(白駒章)을 말한 것으로 여기서는 다만 가려는 자를 못 가도록 붙든다는 뜻만을 취한 것임.
♣ 집금오[執金吾]관명(官名). 천자(天子)의 호위병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음황후기(陰皇后紀)에 “벼슬을 하려면 마땅히 집금오가 되어야 하고, 장가는 마땅히 음여화에게 들어야 한다.[仕官當作執金吾 娶妻當得陰麗華]”라는 말이 있으며, 당(唐) 나라 왕한(王翰)의 시 ‘고장성음(古長城吟)’에 “장안의 소년들 원대한 계획 없이, 그저 평생 바라나니 오직 집금오.[長安少年無遠圖 一生惟羨執金吾]”라는 구절이 있다. 집금오(執金吾)는 천자가 순행(巡行)할 때 앞에서 인도하며 비상 사태에 대처하고, 평상시에는 장안을 순찰하는 책임을 맡은 관직 이름인데, 구리에 금을 입힌 금오(金吾)라는 곤봉을 손에 들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 집낭작유[集囊作帷]옛날 주 나라의 명왕(明王)들은 신하의 상서 주머니를 모아 대궐의 휘장을 삼았다 한다. 《漢書 東方朔 傳》
♣ 집법[執法]법령 집행(法令執行)을 관장한다는 별 이름.
♣ 집불[執紼]장송(葬送)할 때 절친한 조객(弔客)들이 상여나 관에 끈을 달아 끄는 것을 말한다.
♣ 집서세[執徐歲]집서는 고간지(古干支)로서 십이지(十二支)의 진(辰)에 해당하므로 곧 진년(辰年)을 가리킨다.
♣ 집양[執壤]토산물(土産物)을 천자에게 조공(朝貢)하는 일. 서경(書經) 강왕지고(康王之誥)에 “감히 토산물을 가져다 바치옵니다.[敢執壤奠]" 한 데서 온 말이다.
♣ 집우이[執牛耳]옛날 제후(諸侯)가 회맹(會盟)을 할 때, 이를 주도하는 영수(領袖)가 소의 귀를 잡고[執牛耳] 그 피를 내어 맹세를 했던 고사가 있다. 《左傳 哀公 17年》
♣ 집의[集義]행사가 모두 도의에 맞음. 이 말은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상(上)에, “是集義所生者非義襲而取之也”라 보이는데, 그 주에는, “集義 猶言積善 蓋欲事事皆合於義也”라 했음.
♣ 집이[執耳]집이는 집우이(執牛耳)의 준말로, 회맹(會盟)할 때 소의 귀를 잡고 피를 받아 삽혈(歃血)하는 등 맹주(盟主)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 집재[執災]지방 수령이 농사의 풍흉(豊兇)을 알아보기 위해 아전을 관내 들에 보내 재상(災傷) 입은 전답의 결수(結數)를 조사하는 일.
♣ 집중우훈[執中虞訓]서경(書經)에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가늘다. 정하고 전일하여야 진실로 그 중을 잡으리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하였다. 《書經 大禹謨》
♣ 집집[揖揖]많이 모여 있는 모양이다
♣ 집집[湒湒]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모양, 비 내리는 소리, 뿔이 나 있는 모양이다
♣ 집파하이위의[緝破荷而爲衣]찢어진 연잎을 모아 옷 만들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서 나온 말로 그의 고결(高潔)함을 나타낸 말.
♣ 집편[執鞭]말 모는 사람. 너무도 사모한 나머지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안자(晏子)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의 마부가 되어 말채찍을 잡는 일이라도 흔쾌히 할 것이다.[假令晏子而在 余雖爲之執鞭 所忻慕焉]”는 사마천(司馬遷)의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史記 管晏列傳論》
♣ 징강여련[澄江如練]“맑은 강이 조촐하기 비단같다[登江爭如練].”는 절창구가 있다.
♣ 징갱취제[懲羹吹虀]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채를 후후 불고 먹는다는 뜻으로, 한 번 실패 한 데 데어서 모든 일에 지나치게 조심함을 말한다. 초사(楚詞)에 “뜨거운 국을 경계하다가 생채도 입으로 불게 된다.[懲於羹而吹虀兮]"란 데서 나온 말이다.
♣ 징경[徵鏡]위징(魏徵)은 당 태종(唐太宗)의 직신(直臣). 그가 임금의 허물을 잘 말하므로 그가 죽자, 태종이 말하기를, “구리[銅]를 거울로 삼으면 의관(衣冠)을 바로 할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得失)을 밝힐 수 있는데, 짐이 이제 한 거울을 잃었구나.” 하였다.
♣ 징과사[徵瓜事]송(宋) 나라 때 채유(蔡攸)가 비서성 제거(祕書省提擧)로 있을 적에 어느 여름날, 비서성 관원들을 도산(道山)에 모아 놓고 함께 오이를 먹으면서 채유가 좌상의 여러 사람에게 오이에 대한 고사를 고증하도록 하고, 고사한 조항을 고증할 때마다 오이 한 조각씩을 먹게 하였다. 이때 동유(董逌)가 연해서 여러 가지 고사를 고증하여 좌중으로부터 탄복을 받았던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 말한 과사(瓜事)는 곧 오이에 대한 고사를 뜻하는데, 전하여 다시 야채를 먹게 될 것을 의미한 말이다.
♣ 징구[徵求]새로 임관(任官)된 자에게 주효(酒肴)를 요구함을 징구(徵求)라 한다.
♣ 징군[徵君]조정(朝廷)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학덕(學德)이 높은 선비를 말한다.
♣ 징사[徵士]학문과 덕행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고 벼슬했던 사람을 말한다. 참고로 도연명(陶淵明)의 사시(私諡)가 정절징사(靖節徵士)이다.
♣ 징사[徵士]학행(學行)이 높아서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는 선비.
♣ 징서[徵書]군졸을 징발하고 군량을 조달하라는 명령서(命令書)를 말한다.
♣ 징심지관[澄心止觀]지(止)는 생각을 없애는 것이요, 관(觀)은 지혜로 본체(本體)를 관조(觀照)한다는 뜻이다.
♣ 징조[徵調]명을 내려 군대와 군량을 징발하는 것을 말함.
♣ 징청[澄淸]천하를 깨끗이 맑히려는 뜻을 이름. 후한 때 기주(冀州)에 기근이 들어 도적이 떼지어 일어났을 적에 범방(范滂)을 청조사(淸詔使)로 삼아 그 곳을 안찰(案察)하게 하니, 범방이 수레에 올라 말고삐를 잡고는 개연히 천하를 깨끗이 맑히려는 뜻이 있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六十七》
♣ 징청증안비[澄淸曾按轡]난세(亂世)에 정치를 혁신하여 천하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뜻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당고열전(黨錮列傳) 범방(范滂)에, “이때 기주(冀州)에 기근이 들어서 도적떼가 일어났는데, 범방이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안찰하게 되었다. 범방은 수레에 올라타 말고삐를 고쳐 잡고는 개연히 천하를 맑게 할 뜻을 품었다.” 하였다.
♣ 징청지[澄淸志]후한(後漢) 범방(范滂)이 환제(桓帝) 때 기주(冀州)를 안찰(按察)하러 갈 때에 천하를 맑힐 뜻이 있었다.
♣ 징칙[徵則]동한(東漢) 때 교지(交趾) 낙장(雒將)의 딸이요 시색(詩索)의 처로 매우 웅용(雄勇)스러웠다. 교지 태수(交趾太守) 소정(蘇定)이 못살게 굴자 그의 여동생 징이(徵貳)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소정을 축출하고 왕이 되어, 영남(嶺南) 65성(省)을 경략하였다. 《後漢書 卷一百六》
♣ 징파도구[澄波渡口]징파 나루는 연천군에 있음.
♣ 징하례[徵夏禮]공자(孔子)가 이르기를, “하(夏) 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는 있으나 그 후예인 기(杞) 나라를 고증할 수 없으니, 이는 문헌(文獻)이 부족한 때문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八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