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10. 인도불교의 쇠멸
민중과 멀어지고 차별성 없어 힌두교에 ‘흡수’
인도불교란 일반적으로 부처님 이후 이슬람교의 침입 이전까지 인도에 존재했던 불교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인다.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받은 이후 인도에서는 불교의 승가교단이 소멸하여 이미 종교로서의 독립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도에서 불교가 쇠멸한 원인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슬람교도의 침입에서 원인을 찾는다. 물론 그것은 인도불교를 멸망시킨 결정적인 외적 요인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불교와 같은 처지였던 힌두교나 자이나교가 지금도 살아남아 있는 역사적인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해서만 170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진 인도불교가 쇠멸했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인도불교 안에는 자기 붕괴를 초래할 다양한 내적 요인을 이미 간직하고 있었지 않을까. 그래서 인도불교가 쇠멸하게 되는 내적 원인들을 찾는 데에 주력하고자 한다.
<사진설명> 대중과 격리된 불교는 점차 인도에서 자취를 잃어갔다. 사진은 산치대탑 주변 승원이 부서진채로 전해오는 모습
부처님은 주력(呪力, mantra)을 배척했다. 주력은 악마를 퇴치하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본질은 악마를 퇴치할 수 있는 신에 대한 기도와 찬송에 있기 때문에 불교는 악마와 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도불교는 초창기부터 왕족 계급과 자산가인 상인 계급(長者)들의 후원과 보호 아래서 성장 발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불교의 발전과 쇠멸의 양날의 칼로 작용하여 불교쇠퇴를 가져오는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게 된다. 왕족 계급과 새로이 등장한 상인 계급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농민들은 여전히 베다 이래 주력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부처님이 입멸한 뒤에 더욱 강렬해졌다. 불교의 후원세력이던 왕족의 세력이 확대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불교 승려들이 불교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주력과 각종 의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불교의 성격을 부처님 당시의 무신(無神) 사상에서 유신(有神) 사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였겠지만, 부처님의 사리를 지키고 불탑을 세운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한 대승사상은 마침내 우상으로 불상을 숭배하는 사상과 관습을 낳게 된다. 이것은 2세기 초에 일어난 간다라 미술의 불상 제작으로 더욱 조장되었다. 이러한 불상의 제작을 배경으로 우상 숭배에 따르는 유신 사상이 주력을 중시하고 각종 의례를 배태시켰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력 전 3세기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까 왕, 서력 전후의 꾸샤나 왕조의 까니쉬까 왕 때 인도불교는 나름대로 꽃을 피웠다. 아쇼까 왕은 전국 각지에 불교를 전파하고 탑을 세웠다. 그런데 이렇게 전파된 불교는 이미 민중 사이에 깊이 침투해 있던 주력과 각종 의례와 습합함으로써 도리어 불교 자체가 브라흐만화(brahmanization)로 촉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꾸샤나 왕조 때 불교를 지탱해 온 주된 기반은 서방과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었는데, 그들이 사용한 화폐에 부처님의 이름이나 불상이 들어 있는 것은 거의 없고, 그리스와 로마, 이란 그리고 힌두교의 신격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당시 불교가 ‘부처님’ 중심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슬람교도 침탈이 승가교단 소멸 결정적 요인
굽타왕조 힌두교를 국교로…사회 기반 더 약화
이러한 사실들이 인도불교가 쇠멸하는 원인(遠因)이라면, 좀 더 근인(近因)은 굽타 왕조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력 후 320년에 건국한 인도의 굽타 왕조는 서방의 서로마제국과 활발한 무역활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상인 계급의 세력이 강성해졌다. 이는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굽타 왕조는 힌두교를 국교로 하여 브라흐만 문화를 부흥시킨 왕조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힌두 문화가 융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힌두교의 성장이 불교의 사회적인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불교교단에서는 중관, 유식학파와 불교논리학파 등의 학문적 성과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인도의 중심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이 사건은 불교의 후원 세력이던 상인계급의 몰락과 함께 국가재정의 빈곤을 가져 왔다. 다른 한편으로 농촌에 기반을 둔 브라흐만 세력이 부활하게 된다. 이는 주력에 바탕을 둔 브라흐만 사상, 즉 힌두교 사상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힌두교는 샥띠(akti, 性力) 숭배가 활발해져서 쉬바 신을 숭배하는 쉬바파(aiva)에 속하는 힌두 딴뜨리즘(tantrism)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흔적은 인도의 대표적인 석굴사원으로 일컫는 아잔따, 엘로라, 카주라호 등에 새겨진 무수한 성교상(性交像, maithuna)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불교미술이 그리스적 사고에 기반한 간다라 양식에서 벗어나서 순수한 인도적인 사고에 의한 굽타 양식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불교의 힌두화를 촉진시킨다. 굽타양식의 불상에는 여러 가지 무드라(mudra-, 印契)를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밀교 사상에 따라 주력을 주장하는 우상숭배가 은밀하게 승원의 깊은 곳에서 행해졌다는 증거이다.
굽타 시대 힌두교의 지배적 위치는 불교를 비롯한 다른 인도 종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로 말미암아 인도불교의 교단도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대승을 따르던 재가자들도 인도 일반의 민간신앙과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다라니(dha-ran.1-), 무드라(mudra-), 만다라(man.d.ala) 등을 신앙방식으로 채용하여 여러 의식을 통해서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인도불교의 다른 발전 양상인 밀교의 성립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주력을 중심으로 한 다라니 경전이 제작되게 된다.
지배층 후원은 ‘대중지지 상실’ 부메랑 작용도
출가자 중심-교의 전문화 등 민중 생활과 괴리
힌두 딴뜨리즘의 의례와 교의 내용을 많은 부분에서 채용한 밀교의 교의는 불교 고유의 특징을 상실하게 됐고, 동시에 불교가 힌두교에 동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밀교가 성립되는 계기를 단순히 힌두교와의 습합에서만 찾는 것은 옳지 않다. 이미 대승경전에서 강조되기 시작했던 다라니 등의 주력은 밀교의 뿌리로서 인정되며, 더 나아가 인도사상의 일반적 토양에서 기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밀교의 성립은 인도불교의 쇠멸을 앞당기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역사적 실체가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부파시대와 대승불교를 거치면서 성립된 다불(多佛) 사상, 삼신불설(三身佛說) 등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역사적인 인물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불보살들이 등장함으로써 힌두교의 신격들에게 접근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급기야 석가모니 부처님이 힌두교의 만신전 속으로 편입되어, 현재 인도에서 부처님은 힌두교의 한 신격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로, 출가의식을 거친 승려들도 다시 재가자와 같은 위치로 돌아갈 만큼 교단의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이는 교단의 지적 활동을 쇠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셋째로, 밀교교단에서 출가비구는 주술사 내지 마법사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힌두교의 쉬바교(aivism) 또는 비슈누교(vais.n.avism)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한편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 이전에 조성된 석굴사원의 많은 조각품에서도 불교가 힌두세계로 흡수되어 가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잔따의 석굴사원에 있는 보살상처럼 7세기 이후의 많은 보살상들에게 브라흐만의 권위를 부여하려 했다. 또한 이 시대의 대승불전은 ‘부처님은 고귀한 가문의 출신이다’라고 단언하며, 계급제도를 당연한 것으로서 수용되기에 이른다.
이론적으로는 대승을 표방했음에도 보살수행보다는 불법(佛法)에 대한 논의 자체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재가자 중심에서 다시 출가자 중심으로 전환되고, 또한 교의가 전문화됨으로써 사실상 민중의 생활과 괴리되고 말았다. 실천적으로는 유신론적 경향의 타력신앙을 강조했던 대승의 입장이 갈수록 세속화되어, 마침내 힌두교의 사회체제 속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고, 쇠멸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마지막 보루였던 승원들이 11~13세기에 걸쳐 침입해온 이슬람교도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고 수많은 승려들이 학살됨으로써 불교는 더 이상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기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후 인도불교는 힌두교의 세계 속으로 흡수되어 그 모습을 감추기에 이른다.
불교가 쇠멸하는 데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이슬람교도의 잔혹한 침탈이지만, 그 이전에 인도불교는 힌두교의 여러 종파들과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어, 이미 불교가 힌두교 속으로 매몰되어 버렸던 것이 인도불교를 쇠멸케 한 근본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도의 근현대 사상가인 라다끄리쉬난(1888~1975년)의 “인도에서 불교가 쇠멸하게 되는 근본원인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비슈누교, 쉬바교, 딴뜨라 신앙 등과 같은 힌두교의 여러 종파들과 불교가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라고 한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문 을 식/ 인도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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