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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도립공원주차장→1.4km→금오산성→0.5km→대혜폭포→1.5km →내성→1.6km →정상(2시)
금오산도립공원주차장→1.4km→금오산성→0.5km→대혜폭포→1.9km →성안→0.6km정상 (2시간)
금오산도립공원주차장→1.8km →법성사 →2.7km →정상 (3시간)
금오산도립공원주차장→1.3km→자연환경연수→1.7km→칼달봉→1.7km→성안→0.6km→정상(3시)
금오산도립공원주차장→1.4km-금오산성→0.5km→대혜폭포→1.5km→내성-1.6km→정상→
2.7km→법성사 →1.8km →금오산도립공원 주차장 (5시간)
금오산 입구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보통 2시간 30분 소요.
지경마을-대원사-금오산성-성안-약사암-마애보살-할딱고개-대혜폭포-도선굴-해운사-주치장4시간)
1코스 : 관리사무소 - 케이블카시점 - 금오산성 - 대혜폭포 - 정상 -약사암 - 법성사(4시간)
2코스 : 대혜폭포 - 등산로교차점 - 성안 - 정상(1시간30분)
3코스 : 관리사무소 - 자연환경연수원 - 등산로교차점 - 칼다봉 - 성안 - 정상(3시간30)
4코스 : 호텔 - 등산로교차점 - 칼다봉 - 성안 - 정상(3시간)
빠른 산행을 선택하려면 등산로는 대혜폭포에서 금오산성 내성을 지나 정상으로 오르는 가장 짧은 코스. 공원관리사무
소에서 대혜폭포까지는 케이블카를 이용했다.
걸어서 30분 남짓 걸리는 시간이 케이블카로는 단 5분. 정상은 꼭 가보고 싶은데 시간이 넉넉치 않은 등산객에게 케이
블카를 추천한다.
하지만 해발 976m의 금오산을 정복하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다.
금오산은 기암괴석이 산세와 조화를 이루며 계곡이 발달한 산. 해발고도(현월봉 976m)는 그리 높지 않지만 오랜 침식
작용에도 깎이지 않는 아주 단단한 유문암과 안산암 등 화산암류로 이뤄져 있다.
산의 높낮이 차가 심해 멀리서도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기 때문에 평지나 여느 산길과는 비교가 안된다.
남성적 기상이 넘치는 금오산은 골짜기마다 힘과 기백이 서려 산행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지만 등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조금은 '고생스러운' 거친 산이다.
관리사무소~대혜폭포
관리사무소를 지나 케이블카에 오르면 금오산성 외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성터로, 조선시대에 4차례에 걸쳐 새로 쌓은 산성이다.
영조 때에는 총 병력이 3천 500여명에 달했다고 전해질 만큼 국방의 요충지로 이름높았다.
내성은 정상부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0리나 되며, 험한 절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내·외성벽의 전체 길이는 무려 6.3㎞에 달한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하면 곧 해운사다.
근세에 세워진 사찰이긴 하지만 대혜폭포 왼쪽 아래 웅장한 기암절벽을 등져 경관이 빼어나고 불기 2992년에 봉안된
칠성탱화가 유명하다.
해운사를 지나면 도선굴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등산로를 비켜나 낭떠러지 바위길로 쇠난간을 잡고 올라가야 이를 수 있는 도선굴은 금오산의 빼어난 산세를 감상하
기에 제격인 곳. 대혈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신라말 풍수대가로 유명한 도선선사가 도를 얻었다고 전해지는 천연동굴
이며 고려시대엔 야은 길재 선생이 수도처로 삼기도 했다.
도선굴을 돌아나오면 해발 400m 지점에 28m의 거대한 폭포가 장관이다.
대혜폭포다.
가뭄 때문에 물길은 볼 수 없었지만 폭포가 떨어지는 기암절벽만 해도 눈을 뗄 수 없는 절경이다.
떨어지는 물소리가 산을 울린다
해 명금폭포라 부르기도 하는 대혜폭포는 금오산의 유일한 수자원으로 큰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이 떨어지면서 이룬 연못과 주변 경관이 하도 아름다워 소금강이라 불리워지기도 한다.
대혜폭포~정상
금오산 등산은 대혜폭포부터 시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만하던 지형이 갑자기 급경사로 바뀌기 때문. 여기서부터 철기둥을 쇠줄로 이어놓은 난간까지 길은 할딱고개
라는 별칭이 있다.
정상까지 가는 1단계 고비로, 등산로 가운데 가장 힘들고 숨이 차다는 악명 높은 고개지만 '할딱고개' 푯말 바로 위로
너른 바위가 펼쳐지고, 그 바위 위에 서면 금오산 저수지와 구미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가슴 속까지 탁 트이는
시원함을 맛볼 수 있다.
이곳까지 왔다면 꼭 바위 위로 올라가 보길 권한다.
정상까지 가는 2단계 고비는 금오산성 내성부터 다시 시작된다.
잠시 이어지는 평평한 흙길이 다시 급경사의 바위 길로 바뀌면서 약사암까지 험난한 등산로가 계속되는 것. 하지만 산
을 오르는 묘미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인생의 진리 때문이 아닐까.
약사암 일주문을 통과해 계단을 내려가면 수십미터의 기암괴석이 뒤를 바치고 있는 암자와 바위 산에 핀 단풍나무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천혜의 비경을 연출한다.
약사암에서 산을 내려다 보면 멀리 구미시가지와 낙동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오고 맞은편 계곡 너머 나무 다리로 연
결된 범종각에 절로 감탄사가 절로난다.
약사암을 빠져나오면 바로 산 정상이다.
길을 따라 70,80m쯤 올라가면 초생달이 걸려 있는 모습과 닮았다 해 '현월봉(976m)'이라는 비석을 볼 수 있다.
금오산에 올라 산세를 감상하기 좋은 곳은 도선굴, '할딱고개' 너른바위, 약사암과 함께 이곳 현월봉을 꼽을 수 있다.
이야기 따라 전설 따라
한반도의 진산(鎭山)은 백두산이다. 백두산에서 태백산이 이뤄졌고 다시 소백산이 됐다.
소백산은 죽령과 조령 그리고 추풍령을 지나 무주의 덕유산을 만들어 남으로 힘차게 내치다가 한지맥이 동북으로
거슬러 김천 대덕의 수도산이 되더니 여기서 세 갈래로 나눠져 하나는 동남으로 내치어 합천의 가야산이 되고, 또
한줄기는 서북으로 뻗어 충청, 전라, 경상 세 도(道)의 경계점에 솟아 삼도봉이 됐다.
나머지 한줄기가 북으로 내치다가 땅속으로 스미듯이 하면서 간직했던 기백을 구미, 김천, 칠곡의 경계점에서 크게 내
뿜었으니 그 높이가 사람이 오르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해발 976m의 금오산(金烏山)이다.
금오산이란 이름은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金烏)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름 지었다 한다.
태양의 상징인 금까마귀의 정기를 받은 명산(名山)이라 한데서 비롯됐다고ㅛ 전해진다.
옛날 사람들은 태양 안에 금까마귀가 산다고 믿었다.
그 금까마귀는 발이 셋 달린 삼족조(三足鳥)로 기이한 형상의 까마귀이나 태양의 핵이요 상징이었다.
태양은 원시시대부터 인류의 가장 숭고하고 위대한 존재로 여겨지면서, 어느 민족이던 원시종교의 형태로
신앙의 자체라 믿어왔다.
태양의 정기를 받은 금까마귀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도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금오산 자락에는 중국 명나라의 건국 시조 주원장이 태어난 전설도 전해진다.
떠돌이 중 출신인 주원장의 출생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무튼 금오산의 ‘유명세’가 낳은 전설임에는 틀림이 없다.
조선 초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는 금오산의 형국을 보고 ‘임금이 날 산’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금오산 남동쪽 기슭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다.
구미 선산에는 예부터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의 인재 반은 선산에 있다"는 말이 전해져 왔는데 정말
선비가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금오산에는 다사배출(多士排出)과 관련한 설화도 전해진다.
택리지와 팔도총론에 따르면 한 번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사신 이여송이 이곳을 지나게 됐다.
“조선에 이러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곳이 있어서는 안 된다.
” 하며 술사에게 명해 병졸로 하여금 선산읍 뒤에 있는 산맥을 끊었다.
그리고 그 위에 숯불을 태워 달구어 큰 쇠못을 박아 넣어서 그 왕기(旺氣)를 눌렀다고 한다.
금오산의 별칭들
금오산은 다양한 산세만큼이나 그 이름 또한 다양하게 불린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고려시대에는 ‘남숭산(南嵩山)’이라고 했다.
중국의 황하강 유역 하남성에 중국 오악(五嶽) 중의 하나로 유명한 숭산이 있다.
이와 생김새가 비슷하며, 남쪽에 있다 해서 남숭산이라 부른 것이다.
황해도 해주에 북숭산을 두어 남북으로 대칭이 되기도 했다.
고려시대 문종은 왕자를 출가시켜 이 남숭산에서 수도하게 했다.
그 왕자는 훗날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봉해져 호국불교의 포교와 국정 자문에 임하며 남숭산으로서 금오산의 품격과
위상을 드높였다.
금오산이 1,000m를 넘지 않는 산이지만 굳이 숭자(嵩字)를 붙여 중국의 유명한 숭산에 비겨 말하는 것은 이처럼
그 위용과 품격이 비범한 데서 기인되었다고 여겨진다.
금오산은 암석으로 골짜기마다 남성적인 기상이 넘친다.
기암괴석이 많아 곳곳에 힘과 기백이 서려 있고, 빼어난 경관을 갖추고 있어 옛 선현들은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중국의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 이야기와 끝까지 충절을 지킨 선산 태생 야은 길재(吉再)선생의 이야기가 같다해
‘수양산(首陽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순국의사 만송 유병헌 선생의 문집에 따르면 "선비들이 다 사모하는 수양산 기슭에다 내 시신을 묻어다오"라고 유언
을 남길 정도로 선비들 사이에서는 수양산으로 통용돼 왔다고 전한다.
금오산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그에 따른 풍수상의 이야기도 다양하다.
선산 방면에서 보면 상봉이 붓끝과 비슷해 '필봉(筆峯)‘이라 한다.
문인과 학자가 그 기운을 받아 많이 배출됐다고 한다.
안동 방면에서 보면 귀인이 관을 쓰고 있는 모습 같다고 해 ’귀봉(貴峯)‘이라 한다. 이 영향으로 귀인과 대작(大爵)이
많이 배출됐다고 전해진다.
영산이 만들어낸 위대한 인물들
‘영산에 인물 난다’는 말처럼 금오산기슭에는 뛰어난 인물의 자취가 많다.
야은 길재 선생, 율정 박서생, 구암 김취문, 의병장 김종무, 의병대장 왕산 허위, 애국지사 박희광 등을 기억할 수
있는 유물과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채미정은 국가지정문화재 제52호로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768년 건립한 정자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란 시조
로 고려 왕조 망국의 한을 노래했던 야은 길재는 조선 왕조를 오롯이 거부하고 고향 금오산 기슭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채미정의 채미(採薇)는 길재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이 중국의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
으며 절의를 지킨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야은의 제자 율정 박서생은 스승에 대한 예우가 남달랐다.
그의 정신은 기적비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는 구미시 도량동 밤실에 살면서 늙은 스승을 모시고 학문에 몰두했다.
그러나 스승은 “벼슬길에 나가 나라에 충성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간곡하게 출사를 권했다.
“우리 임금에게 향하던 나의 마음으로 너의 임금께 향하는 너의 정성을 다하라”는 유명한 말은 이 때 나왔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박서생은 태종 1년 30세에 증광문과에, 태종 7년 문과중시에 급제했으며 사간원 정언을 거쳐
병조좌랑이 됐다.
이후 사헌부 집의, 대사성, 집현전 부제학, 공조. 병조 참의를 지내고 안동부사로 나갔다.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두 번이나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새 문물을 접했다.
이를 통해 수차와 물레방아, 탄광의 개발 등을 건의하여 농사와 관개를 혁신하기도 한 실학의 초기 인물이다.
길재의 영향으로 청빈함과 강직함을 잃지 않아 태종 때 청백리에 뽑히기도 했다.
구한말에 와서는 왕산 허위 선생이 있다.
왕산 허위는 고종 22년 현 임오동의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전통 성리학을 공부해 성균관박사를 거쳐 의정부참판을 역임했다.
을사조약에 항거, 경상도 의병 300명을 비롯해 전국의 의병들과 함께 일본통감부를 쳐부수려 하다 1908년 6월에
체포된 후 같은 해 10월 21일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를 기리고자 순국기념비가 세워지고 금오산에는 유허비가 세워졌다.
금오산이 간직한 명소들
·태양 아래 첫 바위서 중생 품은 약사암
금오산 정상 아래에는 깍아지른 절벽의 바위 틈바구니에 간신히 발붙일 길이 있다.
그 아래 자리 잡은 약사암(藥師庵)은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625~702)가 초년에 천하비경을 찾아 들었던 곳이다.
현재 약사암 자리 뒤 큰 바위 하나로 이루어진 천애절벽 아래에서 의상대사가 참선할 때 하늘의 선녀가 하루 한 끼의
주먹밥을 내려주어 하루하루 요기했다 한다.
또 약사여래가 내려와 시중을 들어줌으로써 사바의 번뇌를 끊고 득도하여 고승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전설이 깃들어 붙여진 이름이 약사봉이며 그 약사봉에 걸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암자가 약사암이다.
달이 걸린 봉우리, 현월봉
현월봉(懸月峯)은 금오산의 최정상으로서 달이 걸려있는 봉이라는 뜻처럼 과거 선인들이 낭만적인 시상을 자아내던
봉우리이다.
해발 976m의 높이에 있으며 현재 미군통신대가 점유하고 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설치된 이 시설은 지난 1991년부터 사용되지 않고 있어 구미시가 지난 2004년부터 금오산
정상 반환을 위해 노력해 왔다.
10여 차례의 협상 끝에 2011년 3월 합의를 이끌어 낸 후 2013년부터 일부 미군시설 철거가 시작되었다.
올해 상반기부터 현월봉에 자리한 미군 시설물 철거 공사가 시작될 예정이며, 머지않아 정상 정비 사업이 마무리되면
멋지게 옛 모습을 되찾은 금오산을 만나게 될 것이다.
신선계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대혜폭포
해발 400여m지점에 위치하는 폭포로 높이가 28m에 달한다.
높은 곳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의 위력은 금오산을 진동시키고도 남는다.
금오산을 소금강이라 하는 것도 폭포 주변경관이 크게 한 몫을 차지한다.
주변 기암괴석의 벼랑이 병풍처럼 에워싼 유곡에 짚동같이 쏟아지는 물소리며 물보라에 일곱빛깔 무지개가 하늘높이
솟아오르곤 해 보는 이로 하여금 신선세계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삼복더위에 폭포 물을 맞으면 땀띠가 싹 가신다고 해 견비통(어깨통증)이나 요통이 있으면 물을 맞아 치유했다고 한다
. 30~40년 전에는 부녀자들의 물리치료장으로 유명해져 남정네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겨울에는 대혜골에서 흐르던 물이 폭포에 얼어붙어 고드름이 되는데 초봄까지 벼랑에는 옥색 수정 발을 친 듯 신비로운
경관을 연출해 천상 궁궐을 연상케 하여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다.
수억만 년의 세월이 만든 도선굴
대혜폭포에서 펼쳐지는 벼랑을 끼고 북으로 따라 가다보면 쇠사슬로 만든 난간을 잡고 간신히 발을 내딛을 수 있는 길
이 나온다.
몇 번이고 숨을 가다듬으며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수억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천연동굴을 만날 수 있다.
이따금씩 박쥐나 새들이 쉬어가는 곳을 신라 말 도선(道詵)이라는 고승이 찾아와 참선해 도를 깨우쳐 우리나라 최초의
풍수지리설의 창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언제부터 도선굴이라 불렸는지 알 수 없으나 내부 넓이가 30평은 됨직하고 임진왜란 때는 인동, 개령 지역의 수령
과 향민 500~600명이 피난을 했던 곳이다.
고려 때는 대혈(大穴), 즉 큰 구멍이란 뜻으로 불렸는데, 굴 아래 대혈사(大穴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자연암벽에 조각된 마애보살입상
금오산 정상으로 가는 길 중봉 지점(해발 800m)에서 동남쪽으로 꺾어 돌아가면 약사암이 바라보이는 제법 널찍한
터가 있다.
주위에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보봉사(普峰寺)’의 옛 터로 추정되고 있다.
그 뒤편에 각을 이룬 암벽에 남향으로 조각된 마애보살입상이 있다.
금오산의 마애보살입상은 깎아지른 듯한 화강암 자연암벽 바위를 이용하여 조각한 특이한 구도이다.
얼굴은 갸름하고 풍만한 인상인데다 이목구비의 윤각이 매우 수려하다.
각 부의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보아 조성연대는 10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이처럼 암벽의 모서리 합각면에 불상이 조각된 예는 아직 발견되거나 조사된 바가 없을 정도로 특이하다.
전체 높이 5.5m이며 1968년 보물 제490호로 지정됐다.
산행의 묘미 살릴 등산 코스
금오산은 접근이 쉽다. 경부고속도로와 근접해 전국 어디서나 당일 코스로 등산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바위산이라 등산로의 높낮이 차가 심해 등산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겐 다소 고생스럽고 거친 산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남성적인 힘과 기백이 서려 산행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산 정상 등산로는 네 갈래로 나뉜다.
산불조심 기간(11월~5월15일)엔 공원관리사무소~케이블카~금오산성~대혜폭포~정상~약사암~법성사를 되돌아오는
1개 코스만 개방된다.
주 등산로인 이 코스는 왕복 6.7㎞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옛 매표소에서 산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금오산성 외성을 만난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성으로, 조선시대에 4차례에 걸쳐 새로 쌓은 성이다.
영조 때에는 총 병력이 3500여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질 만큼 국방의 요충지로 이름 높았다.
산성을 지나면 도선굴이 나온다. 금오산의 빼어난 산세를 감상하기에 제격이다.
굴을 돌아 거대한 대혜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그 아래로는 대혜골의 경치에 반한 선녀들이 목욕을 즐겼다는 선녀탕도 있다.
금오산 등산은 등산로 가운데 가장 힘들고 숨이 차다는 악명 높은 ‘할딱고개’를 넘어야 비로소 정상에 선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구미 시가지와 낙동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면서 가슴까지 탁 트이는 시원함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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