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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전거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국토종주를 할 때, 첫 날은 그럭저럭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날부터는 점차로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국토종주를 마친 뒤에, 엉덩이를 보니, 퍼렇게 피멍이 들어있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잘 나가지도 않는 자전거로 달렸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야말로,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면, 그늘진 곳에, 어김없이 세워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동네 주민 뿐 아니라, 나그네의 쉼터인 “정자”였습니다. 정자가 없어도, 적당한 곳에 자전거를 세우고, 길가에 앉아서 쉬어야 할 판에, 정자를 보면,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러고 보면, 언제부터인가, 마을마다 커다란 느티나무 쉼터가 사라졌습니다. 제가 청년 때까지 지냈던 화양동 주변과 능동 주변에도, 주택가에는 느티나무 쉼터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 가면, 언제나 어르신들이 모여, 부채질하면서, 장이야 멍이야 하면서, 장기를 두거나 바둑 두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곳에서 땀을 식히고 지나가곤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물이 자연정화기능을 가지듯, 자가 치료기능이 있어서, 조금씩 휴식을 취해 주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잠시 휴식을 취할 여유들이 점차 줄어갑니다. 그러다 보니, 육체적 질병보다 정신적 질병을 많이 앓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곧, 정신적 스트레스입니다. 이 스트레스를, “심리학과 생물학에서 유기체의 기능을 교란시키는 긴장이나 장애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고생하기도 하고, 심하면, 자살을 택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중국의 장자는, “마음을 고요한 늪처럼 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의 불안이, 사람의 건강을 갉아먹는 좀벌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갖고 싶은 것이 많아서 욕심을 내고, 그것을 다 가지려고 머리를 쥐어짜는데, 어찌 건강할 것이며, 오래 살기를 바랄 것인가?”라기도 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의 쉼터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피곤할 때도 쉼터가 필요하겠지만, 정신적인 갈등과 방황, 스트레스, 두려움, 허탈, 외로움, 우울함 등을 풀 수 있는 쉼터가 필요합니다. 사 40: 30 - 31을 보시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쉼터가 있습니까?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족속의 이세벨을, 아내로 둔 아합이, 이세벨을 통해 낳은 자식의 이름을 “아하시야”, “여호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붙드시다”와 “여호와는 높으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에, 이세벨이 매우 반발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명한 것을 보면, 아합에게는 조금이나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이 중시하는, 바알과 함께, 하나님을 모두 용인하는 종교관용정책을 취함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기에, 엘리야는 이에 강력한 도전장을 제시합니다. 엘리야는, 지독한 가뭄을 선포한 후, 3년이 지나서야 나타나서는, 아합과 바알선지자들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그것은, 갈멜산에 모여, 제단에 올려놓은 제물을, 불로 태우는 신이 참 신이라는 것을 밝히자는 것입니다. 이 결과는 엘리야의 승리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확인시키고, 바알 선지자 450명을 기손 시냇가로 데리고가서 사형을 집행합니다. 엘리야는 이 승리로 인해, 이스라엘에 커다란 변화, 커다란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관이 바뀔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 온 것은, 이세벨의 위협이었습니다. 24시간 내에 엘리야를 찾아서 사형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신을 다해 도망하다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쉬며, 죽기를 간청합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그는, 새롭게 회복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 도우심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쉼터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쉼터는, 삶속에 위로가 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라고 합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의 대결 후, 시원스럽게 기손 시냇가에서 마무리했지만, 이세벨로부터 섬뜻한 전갈을 받습니다. 본문 앞의 2절을 보시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는 것이었습니다. 24시간 내에 이세벨이 복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쯤되니, 갈멜산의 대결은, 잠자는 사자의 수염을 뽑은 격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실망과 허탈뿐일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분노가 따라올 때도 많습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듭니다. 엘리야가 그랬던 겁니다. 이 때, 엘리야가 취한 것이 무엇입니까? 앞장인 18장과 본문이 있는 19장을 비교해 보시면, 앞의 18장에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갈멜산 꼭대기에서, 3년 6개월동안 내리지 않던 비를 위해, 일곱 번이나 자신의 무릎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셨습니까? 이런 자세의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매우 절실하게 기도한 겁니다. 어느 때, 절실하게 합니까? 상황이야 여럿 있지만, 공통점은, 상황이 시급해서, 하나님만을 간절히 찾을 때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만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본문 4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현재의 상황을 의식합니다. 마 14: 29 - 31을 보시면,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합니다. 본문의 엘리야와 베드로의 눈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도 이러한 상황에 자주 놓입니다. 하나님께 나가야 하는 것은 알지만, 결국,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릴 때가 있잖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눈을 돌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절망이 찾아옵니다. 오늘, 우리의 눈은,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디를 보고, 한 주간을 지내셨습니까?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눈을 떼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상황 속에서,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눈을 맞추는 것입니다. 요일 4: 4을 보시면,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를 주관하는 분은 어떤 분입니까?
엘리야는 지금, 갈멜산 주변에서 브엘세바에 있는 광야까지 약 193km를 이동했습니다. 24시간 이내에, 이세벨이 찾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피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래서, 신속하게 도망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살았다는 안도감보다는, 실의와 불안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심각한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며, 죽음을 요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기도지만,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이렇게 잘못된 기도를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보는 겁니다. 그리고, 기도는,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겁니다. 곧, 내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겁니다. 시 121: 1 - 2을 보시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의 중심은,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비록 잘못된 기도를 했지만,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가 있는 자리,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주변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심으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로뎀 나무로 나가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절망에 휩싸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로뎀나무 아래입니다. 그래서, 이 로뎀 나무에 대해 정확히 알지도 않고, 매우 좋게 여김으로, 여러 곳에 사용합니다. 이를 테면, 인터넷 아이디나 카페나 미용실, 병원, 어린이 집에도 사용합니다. 명칭을 정할 때는 잘 알아보고 정해야 낭패를 당하지 않습니다. 로뎀 나무는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두 번은, 본문이 있는 왕상 19장과 시 120편이고, 또 하나는 욥 30장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대싸리”로 나옵니다. 이는, 표준어로 “댑싸리”이고, 1.5m가량 자라며, 가지가 많지만, 잎이 가늘고 길며, 끝이 뾰족하고, 줄기는 모아서 비를 만드는 싸리나무와도 같은 것입니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들판에서 쉼터를 찾는다면, 느티나무와 같이 커다란 나무 밑을 찾을 겁니다. 싸리나무나 가시덤불의 그늘을 찾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 가시덤불과 같은, 로뎀 나무의 그늘을 찾았습니다. 이는, 엘리야의 심정이 얼마나 갈급한지와 심신이 매우 지쳐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의 마음은, 갈갈이 찢기고, 지저분했기에, 더럽게 느껴지는 로뎀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 “로뎀”의 뜻이 무엇인줄 아세요? “시궁창”입니다. 인터넷 아이디가 “시궁창”, “시궁창 카페”, “시궁창 미용실”등이라고 하면, 하지 않겠죠? 이런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로뎀 나무로 나가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은, 이렇게 하찮은 곳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거나 기대하는 곳과는 다른 곳에서,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그러한 곳이, 하나님을 더 절박하게 찾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엘리야는 심신이 매우 지쳐있습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습니다. 악독한 이세벨의 감정을 건드렸으니, 이제, 자신의 목숨은, 파리 목숨입니다. 이러한 두려움 속에서, 갈갈이 찢긴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그리고는, 지친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합니다. 그의 기력을 다시, 회복시켜 줍니다. 이런 일이 한 번이었습니까? 7절을 보니, 한 번 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포기하지 않았고, 엘리야를 홀로 두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죠?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이 엘리야를 숨기고, 까마귀로 하여금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어 먹게 하는 것과 본문에서, 천사를 통해, 그의 힘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것을 알면서, 어찌, 우리가 지쳐 있을 때,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지요? 이를 보면,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동일하지만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믿지 못합니다. 복음성가 중에,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약해 질 때, 우리가 지쳐서 일어나지 못할 때, 우리를 걱정하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 계십니다. 딤전 2: 5을 보시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합니다. 또, 히 9: 15을 보시면,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의 엘리야와 같은 상황 속에 있다할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처지를 아셨고, 보셨습니다. 그렇듯, 오늘의 우리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며,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로뎀과 같을 때, 로뎀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행해진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모두에게도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가운데 있습니다.
엘리야는, 심신이 곤비한 상태에 있었지만, 로뎀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력을 회복하여, 자신이 가야할 곳으로 힘차게 갑니다. 엘리야가 40일을 밤낮으로 달려서 간 곳은, 호렙산입니다. 이 곳은 일찍이, 모세가 사명을 받았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로뎀 나무 아래서 기력을 회복한 그는, 이 곳에 와서 다시 한 번,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엘리야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진, 절망의 근원을 드러내는 겁니다. 곧,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제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잡아 죽임으로, 선지자는 자기 혼자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기독교인이라고는 오직, 나 하나뿐이고, 그나마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헤치려고 추격하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때,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엘리야가 보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7,000명을 남겼으니, 다메섹으로 돌아가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우라는 사명을 줍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큰 일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는 것과 다르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절망으로 넣었던 근원을 해결하시며, 다시금 확신을 주십니다. 인터넷을 보니까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고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함께 경외하는 자세를 가지며, 기쁨에 차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은, 세상에 매어, 인생의 가치와 기쁨을 추구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얻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막연히 하늘에 계신 분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실존을 감각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힘을 느끼고 부딪쳤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수없이 만나고 함께하면서 경험했지만, 그냥 지나쳐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이 주인 되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기꺼이 순종키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참으로,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삶이,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일주일 내내 일했으면 일요일에 쉬어야지, 쉬지도 않고, 그날 내내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니, 성가대니, 식사당번이니 하면서 봉사하면서, 한번만 예배하면 됐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몇 번씩이나 예배하고, 힘들여 번 돈에서, 십분의 일이나 교회에 바치고, 그것도 모자라 감사할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감사헌금이라며, 늘 교회에 빚진 것도 아닌데 바친다고 비아냥합니다. 또, 공부하는 자녀들에게는, 공부를 해야지, 그 시간에 예배를 드린다고 자녀들에게도 성화입니다. 하지만, 고전 1: 18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 우리가 이 땅에서 성도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그 분을 믿고, 의지하며, 그 분을 경배하며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필요와 위로를, 하나님에게서 만족하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제각기 다르지만, 우리 각 자가 있는 곳에서, 본문의 엘리야와 같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로뎀 밑에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그 곳이 “시궁창”이 아니라, “고통의 자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삶 속에서, 위로의 자리, 회복의 자리가 되는, 귀한 쉼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