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지식인이며 종교인이었던 데이비드 리빙스턴
당신이 가신 후 우리는 빛 가운데 삽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1813~1873)묘비명에서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어려서 부터 스코틀랜드의 독특한 가정황경,
즉 부모님의 동독한 신앙심과 가난, 중노동 등을 체험하며 자라났다.
그는 방적공장에서 시간제로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선교 일을 하기 위해
글래스고 대학에 들어가 2년 간 그리스어와 신학, 의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는 25세 되던 해에 1838년 드디어
런던 선교회의 인정을 받아 처음에는 중국으로 가기로 마음먹었으나,
아편전쟁 때문에 포기하고 선배 선교사인 로버트 모퍼트의 추천에 따라
아프리카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840년 11월 선교사로 임명된 리빙스턴을 그해 마지막 날 배를 타고
남아프리카로 출발해 3개월 후인 1841년 3월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1800년대만 해도 거대한 아프리카대륙은 문명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땅이었다.
리빙스턴은 애초부터 탐험을 위해서 아프리카에 간 것은 아니었다.
예정대로 그는 기독교 선교 사업을 벌이고 의료봉사를 하기 위해 그곳 에 갔다.
그러나 해가 거듭되면서 그는 여행 벽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하지만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정글과 사나운 동물, 피에 굶주린 미개인, 만연된
질병 등이 그의 탐험을 어렵게 만들었다.
검은 대륙을 탐험하기 위해 리빙스턴 일행은 때로는 걷고,
때로는 카누를 이용하거나 소를 타고 전진해야 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성경, 환등기, 나침반 등을 꼭 가지고 다녔다.
케이프타운에서 육분의(六分儀)사용하는 법을 배운바 있는 리빙스턴은 매일
자기가 있는 곳의 정확한 위치를 지도에 기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여행은 복음만을 전하려 다니는 사람들의 여행과는 달랐다.
그는 지도에 자기가 다닌 지방의 동식물, 지리, 지질학, 그리고 자기가 목격한
의학적인 실례 등에 대해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공들여 작성한 보고서를 런던에 있는 왕립지리학회에 보냈다.
리빙스턴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 못지않게 과학을 실천하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는 곳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의학적인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는 할라파의 키니네로 만든
말라리아 퇴치 약을 발명하여 말라리아에 거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다른 백인 여행자들과 달리 원주민들에게 애정과 사랑을 느꼈으며,
원주민들도 그를 자기들을 돕는 의사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찬양하고 존경했다.
리빙스턴을 함께 일한 선교사의 딸과 결혼하여 여섯 아이를 두었는데,
1850년 여행 도중 어린 딸이 죽자 가족들을 영국의 집으로 보내고
자신은 더 많은 아프리카인 가족들과 함께하기 위해 현지에서 남았다.
그는 1849년부터 5년간 지리 탐사를 계속하여 칼라하리 사막을 횡단하고
이어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 그 후 1856년에야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자신은 위대한 국민적 영웅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리빙스턴을 10년간 고국에 머문 뒤, 왕립지리학회의 요청에 따라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임무는 잔지바르에서 시작하여 나일강의 원류를 찾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든 일이 꼬이기만 했다. 짐꾼들은 앓아누웠고,
짐을 나르는 소는 병들어 죽었다. 일꾼들의 상당수는 지금의 탄자니아,
르완다, 부룬디 등의 호전적인 원주민들을 마나는 것이 두려워 줄행랑을 쳐버렸다.
리빙스턴 자신도 말라리아, 위궤양, 류머티즘 등에 걸려 매우 고생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그는 1864년까지 니야사호를 발견하고
잠베지강과 그 지류를 탐사했는데,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두 명의 짐꾼이 그의 약상자와 키니네를 ㅁ두 가지고 도망쳐버렸다.
게다가 다른 보급품도 거의 바닥나 그의 일행은 희망을 잃은 채
탕가니카호의 동쪽에 있는 우지지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
한편 문명세계에서는 유명한 탐험가이자 선교사인 리빙스턴 박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풍문은 많았지만 그의 생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중 그가 사라진지 약 5년이 지났을 때,
미국인 언론재벌 고든 베네트는 뉴욕 헤럴드지의 기자 헨리 스탠리를 보내
리빙스턴을 찾기로 했다.
1871년 스탠리는 192명을 조직된 탐사대의 대장이 되어 탄자니아로 건너가
잔지바르를 출발,
동 아프리카의 원시지역을 수색해 나가시 시작했다.
그들은 실종된 백인 의사에 관한 온갖 소문들을 추적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8개월간의 수색을 계속한 끝에 일행은 가까스로 우지지 마을 에 도착했다.
스탠리는 그 곳에서 야윌 대로 야윈 리빙스턴 박사를 만났다.
두 사람의 이 극적인 만남에서 무슨 말이 오고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도 있고 논란도 많지만, 리빙스턴을 런던으로 돌아가자는
스탠리의 제안을 끝내 거절했다. 그래서 스탠리는 발길은 돌렸고, 이제 장비를 공급받은 리빙스턴을
나일강을 탐사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어가는 사람이었다.
몇 달 후에 그는 강의 원류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콩고강의 원류였지
나일강의 원류는 아니었고 그는 자기의 오류를 끝내 알지 못했다.
1873년 5월 1일 아침,
치탐보 마을에서 짐꾼들은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리빙스턴을 발견했다.
그는 머리를 두 손에 기댄 채 영원히 잠들어 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마을에서 마을로 전해졌다.
기독교로 개종한 원주민들 수 천명이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문명사회에서 특별히 그의 유골을 고국 땅에서 묻을 수 있도록
먼 길을 운구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만리 떨어져 있는 영국에서 비빙스턴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의 유해를 가져다 매장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시신의 부패를 최소화하기 위해 심장과 다른 장기는 절단해
정중한 의식을 치른 다음 마을의 큰 나무 밑에 묻고,
그 나무에 리빙스턴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
이어 시신의 몸속에 소금을 채우고 얼굴에는 약품처리를 한 후 시신을
뜨거운 햇볕에 말린 뒤 옥양목과 질긴 삼베로 잘 싸서 시신이 습기와 더위에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 유해를 완벽한 미라로 만들고 난 그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마을에서 마을로
릴레이식 운반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운구행렬이 무려 9개월간 계속된 끝에 그의 유해는 잔지바르에 도착했고
그들 중 대표인 원주민 추마는 즉시 영국 영사관에 가서 자신들이 리빙스턴의 시신을
아홉 달 간 운구해서 여기까지 왔노라고 전했다.
놀란 영국 영사관 측은 일행으로부터 유해를 인수받아 대기하고 있던 기선에 승선시켜
본국으로 수송했다.
이렇게 해서 아프리카의 성자로 추앙 받는 리빙스턴의 심장은
그가 그토록 사랑한 아프리카 땅에 묻히고,
유해는 영국으로 옮겨져 4월 18일 스물 한 발의 예포가 울러 퍼지는 가운데
국장으로 예를 갖춘 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정중하게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아프리카의 성자. 흑인의 아버지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그의 봉사와 탐험을 끝내고 여기 잠들다.
당신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가 어둠 가운데 살았는데 , 당신이 가신 후
우리는 빛 가운데 삽니다.”
라고 새겨졌다.
리빙스턴의 최대 업적은 온갖 역경 속에서도
인류애의 그리스도 정신을 실천 했다는 점과
유럽인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데 기여했다는 점,
그리고 과학적 접근방법으로 미지의 땅을 문명세계에 알렸다는 점 등이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존경은 존경을 낳고, 복음은 빛을 낳는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리빙스턴 죽음에 대하여 표한 사랑과 존경은
마치 한 편의 장엄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리빙스턴의 뜨거운 심장이 묻히고 그의 이름이 새겨진 치탐보마을의
큰 나무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성경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이다. -180~
<당신이 가신 후 우리는 빛 가운데 삽니다>에서
출처>[인생열전] 묘비명으로 본 삶의 의미 //박영만 지음
≪후기≫ 유성 박한곤
권력자, 종교인, 예술인 기타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부를 향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틈바구니에서
인간다움을 찾아본다는 것을 어리석음의 추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어리석음은 진정한 생을 위한 촉매제라 할 것이 아닌가.
<인생열전>에 새겨진 별들의 묘비명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인간이라는 인간다운 따사로운 불꽃을 투영시켜
욕망 속 움츠린 난폭한 이기심을 치료할 수 있다.
어차피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귀향길에서
진정 어리석은 자는 소유와 명예만을 위해 몸부림치는 자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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