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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목소리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Eduardo Galeano. 1940~2015)
「우루과이 출생으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이자 탁월한 이야기꾼. 좌파 일간지 <에포카>의 주간(1964~66)을 역임하면서 저널리스트로 두각을 나타냈다. 1973년 군사독재(1973~85)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여 <크리시스>를 창간했으며, 1976년 호르헤 비델라의 군사 구테타로 아르헨티나에서 이른바 ‘추악한 전쟁’이 시작되자 다시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1985년 우루과이에서 군사독재가 막을 내린 뒤에는 그의 출생지인 ‘몬테비데오’에 거주하며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2015년 페암으로 사망했다. 이 책 시간의 목소리(Bocas del tiempo)는 2004년에 쓰여졌다. 1962년 첫 번째 부인과 이혼, 재혼. 1976년 세 번째 부인(Helena Villagra)과 결혼하였다. 슬하에 세 자녀와 세 번째 부인은 생존해있다.」
[시간이 말하다] 우리는 시간으로 빚어졌다. 우리는 시간의 발이며 시간의 입이다. 시간의 발은 우리의 발로 걷는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조만간 시간의 바람이 흔적들을 지울 것이다. 무의 도정인가, 무명인의 발자취인가? 시간의 목소리가 여행을 이야기 한다.
[녹색식물] 바다가 이미 바다였을 때, 육지는 아직 벌거벗은 바위에 지나지 않았다. 바다에서 온 이끼가 초원을 만들었다. 그들은 돌의 왕국을 침략해 정복하고 녹색으로 만들었다.
[싸움과 말다툼] 칠레의 산티아고 시내 어느 ㄱ로목길에서 한 부랑자 농니이 밀수 담배를 팔고 있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는 잠시 환담을 나누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고, 급성 간경변증을 일을킬 것 같은 포도주를 한 모금 받아 마셨다. 그에게 담뱃값을 치르고 있을 때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다. 갑자기 파리들이 흩어졌고 포도주가 엎질러졌으며 작은 테이블이 날아갔다. 그리고 한 우악스러운 여인이 한 손으로 노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바닥에 흩어진 물건을 줍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 부인은 허약한 노인을 흔들어 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계집이나 밝히는 더러운 놈, 자기가 오입쟁이나 되는 줄 아는 놈, 철면피, 타락한 놈, 에바 년, 루시 년(노인이 그 이름을 더듬거리며 난 그 여자를 알지도 못해 라고 말했다), 파멜라 년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놈(그 여자가 날 따라 다닌 거야 라며 그가 신음을 토해냈다). 융단폭격은 계속되었다. 넌 그 암말 같은 마르티나 년과 창녀 차리토 년, 베티 년, 파티 년과 뒹굴었어.
[내세의 삶] 태양이 삼나무 뒤로 숨고 있을 때, 아우로와 멜로디가 산 안토니오 데 아레코 공동묘지에 도착한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우린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해하시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한 직원이 그녀에게 말한다. ㅂ나갑습니다. 부인. 3백 페소입니다. 받으세요. 그러고는 그녀에게 쓰레기봉투 같은 비닐봉지를 건넨다. 초대형 승용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모자부터 구두까지 온통 검정색으로 차려 입은 운전기사는 말없이 차를 몬다. 그녀는 그런 침묵에 감사한다. 차창 밖으로 세상이 흘러간다. ㄱ오터에서 아이들 몇이 축구를 하고 있다. 아우로라는 그런 기만적인 행복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돌린다. 그녀는 욵너기사의 목덜미를 바라본다. 바닥에 놓인 봉지에는 눈길을 주지않는다. 이 비닐봉지 안에는 누가 있을까? 다니엘일까? 몬테비데오 의 시장에서 그녀와 함께 수제 치즈와 밀크잼을 팔던 그 소년? 세상을 바꾸겠다고 맹세했다가 몸에 서른 여섯발의 총알을 맞고 이런 길에서 객사한 그 사람? 모든 것이 그토록 잠시만 지속될 뿐이라고 왜 아무도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말해지지 않은 말들은 어디에 있을까? 행하지 않은 것들은 어디에 있나? 총을 쏜, 제복입은 살인자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에 있나? 입술을 깨물고 바늘이 눈을 찌르는 것처럼 아파하는 이 여자가 바로 그녀인가? 이것은 자동차일까? 아니면 언젠가 그녀를 태운 채 궤도를 이탈해 어디로도 그녀를 데려가지 못한 그 유령 열차일까?
[시간의 함정] 그녀는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그를 천천히 응시했고, 그의 반점과 땀구멍을 유심히 살피듯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의 벗은 몸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유일하게 바꿀 것은 당신의 주소뿐이야.” 그때부터 그들은 함께 살았고 함께 지냈다.
[한몸] 그들은 흰 지팡이와 몇 모금의 물에 의지해 틀라케파케의 좁은 거리를 힘겹게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보였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넘어질 듯하면 그가 부축해 주었고. 그가 비틀거리면 그녀가 똑바로 세워 주었다. 그들은 이중주로 걸었고 이중창으로 노래했다. 그들은 언제나 건물 사이의 그늘진 장소에서 걸음을 멈추고, 사랑과 전쟁을 노래하는 멕시코의 옛 코리도를 애끓는 목소리로 노래했다. 장단을 맞추려고 악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기타였을 것이다. 그들은 노래와 노래 사이에 사기 그릇을 흔들었고 마음씨 좋은 관객들이 동전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나서 자리를 떴다. 지팡이를 앞세우고 뙤약볕 아래서 인파를 헤치고 멀리 사라졌다. 누더기 차림에 한 몸처럼 꼭 붙어서 흔들리는 세상 속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은 남자] 여름이었다. 몰고기 때의 철이었다. 돈 프란시스코 바리오스누에보가 그곳에 정착한 이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름이 지나갔다. 그는 세월을 먹는 사람이에요. 이웃 여자가 말했다. 거북들보다도 나이가 더 많아요. 이웃집 여자는 칼로 물고기의 비늘을 긁어냈고 파리들은 향연 앞에서 다리를 비볐으며, 돈 프란시스코는 구아바 주스를 마셨다. 먼 곳에서 온 구스타보 타티스가 그의 귀에 대고 물었다. 평온한 세계, 평온한 대기, 늪지에 묻힌 마하구알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낮잠을 자고 있었다. 구스타보는 그의 첫사랑에 대해 물었다. 똑같은 질문을 여러번 반복해야 했다. 첫사랑, 첫사랑이요, 첫사랑 말이에요. 노인은 손으로 귀를 동그랗게 감쌌다. 뭐라고 뭐라는거여? 그러고는 마침내 말한다. 아, 그려. 노인은 흔들의자에 몸을 맡긴 채 얼굴을 찡그리고 눈을 감았다. 내 첫사랑은.... 구스타보는 기다렸다. 기억이 낡은 돛단배처럼 여행하는 동안, 그리고 기억이 충돌하고 침몰하고 사라지는 동안 그는 기다렸다. 1세기가 훨씬 넘는 항해였다. 기억의 바다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돈 프란시스코는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구겨지고 오므라든 얼굴로 그의 첫사랑을 찾아갔다. 구스타보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기다렸다. 마침내 돈 프란시스코가 비밀스럽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사벨.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수탉처럼 솟아올라 울부짖었다. “이사베에에에에에에엘!”
[시간의 페이지] 언제예요? 그녀는 묻곤했다. 언제냐고요? 일주일에 한 번, 미겔 미글리오니코는 그녀의 집 앞을 지나갔다. 도냐 엘비리타는 언제나 현관 버드나무 안락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부인의 임신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예정일이 언제예요? 그리고 미켈은 되풀이 했다. 6월이요. 도냐 엘리비타는 하얀 옷차림에 언제나 희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매우 정숙한 모습으로 평화를, 시간의 위엄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충고했다. 부인의 배를 만져줘요. 행운을 가져다 준다오. 젖 잘 나오게 맥아가 든 우유나 흑맥주를 마시게 해요. 아무리 변덕을 부려도 뭐든 원하는 대로 해줘요. 여자가 하고 싶은 걸 못하면 반점이 있는 아이가 태어난다오. 금요일마다 도냐 엘비리타는 미겔이 오기를 기다렸다. 장밋빛 연기처럼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피부는 호기심으로 돌출된 실핏줄들이 투명하게 비쳐보였다. 배는 끝이 뾰족한가요? 그럼 틀림없이 사내아이예요. 차가운 남풍이 불었고. 가을은 몬테비데오의 거리에서 물러가고 있었다. 이제 곧 출산이지요? 그렇죠? 어느날 오후, 미겔이 부리나케 지나갔다. 의사 말로는 시간문제래요. 오늘내일 한다네요. 도냐 엘리비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요? 다음 금요일에 버드나무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 도냐 엘리비타는 1980년 6월 17일에 사망했다. 그 시각에 미글리오니코 씨 집에서는 마르틴이라는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생일] 미소 짓는 개미의 얼굴, 개구리의 엉덩이, 닭의 다리. 샐리는 첫돌을 맞았다. 돌잔치는 성대하게 지러졌다. 어미니 베아트리스 모넥라은 어디서 났는지 발설할 수 없는, 꽃 자수를 놓은 커다란 테이블보를 바닥에 펼쳐 좋았고, 샌드위치 상점에서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구한 케이크 위에 작은 초를 밝혔다. 금새 케이크가 동나고 춤판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 첫돌을 맞은 아기는 풀 먹인 깨끗한 옷에 싸여 장바구니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새벽 2시 45분, 포도주가 담긴 술병이 동났을 때, 베아트리스는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고 라디오를 끈 다음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 보내고는 서둘러 자신의 물건들을 챙겼다.
[표류하는 술병] 그날 아침 호르헤 페레스는 일자리를 잃었다.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고 충격을 누그려뜨려줄 어떤 조치도 없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일해 온 정유소에서 느닷없이 쫓겨났다. 그는 걷기 시작했다. 이유도 모른채 정처없이 발 길 닿는 대로 걸었다. 그의 다리는 그 자신보다는 더 활기찼다.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세상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시각에, 발길이 그를 푸에르토 로살레스의 남쪽 해안으로 데려갔다. 그는 강굽이의 골풀 사이에서 병을 발견했다. 병은 마개로 막은 다음 밀봉 되어 있었다. 그의 불행을 위로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병에서 진흙을 닦아 냈을 때 호르헤는 포도주가 아니라 종이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병을 바닥에 팽개치고 계속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던 길을 되돌아 왔다. 그는 바위에 내리쳐 병의 주둥이를 깨뜨렸다. 병 속에는 그림이 몇 점 들어 있었는데, 물이 스며들어 다소 얼룩이 번진 상태였다 태양과 갈매기를 그린 그림이었다. 태양은 날아다니고 갈매기는 빛났다. 편지도 한 통 있었다. 바다를 항해해 멀리서 온 그 편지는 이 메시지를 발견하는 사람 앞으로 쓰인 것이었다. 안녕, 내 이름은 마르틴이야. 여덟 살이야. 난 쿠키랑 달걀 프라이 그리고 초록색을 좋아해. 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난 물의 길을 통해 친구를 찾고 있어.
[물] 태초에는 개미의 허리가 가늘지 않았다. 콜롬비아의 태평양 연안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설에 따르면, 창세기에 그렇게 나와 있다. 개미는 몸통이 둥굴고 온통 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적시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하나님은 개미에세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개미가 거절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가락이 개미의 배를 쥐어짰다. 이리하여 7대양과 모든 강들이 생겨났다.
[물의 주인들] 배로 그 개미와 같은, 그러나 동치가 훨씬 더 큰 기업들이 있다. 20세기 말, 코차밤바에서 물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 기업인 벡 텔이 하룻밤 사이에 수도료를 세 배로 인상하자 원주민 공동체들은 계곡부터 행진해 나와 코차밤바를 봉쇄했다. 도시에서도 폭동이 일어나 바리케이드가 설치됐고 아르마스 광장에 큰 모닥불을 피워 요금 고지서를 불태웠다. 볼리비아 정부는 평소처럼 발포로 대응했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사망자와 수감자가 속출했지만 폭동은 밤낮 그치지 않고 2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공세에서 코차밤바 주민들은 민영화되었던 물의 권리를 되찾아 다시 몸에 물을 뿌리고 밭에 물을 댈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라파스 에서도 시위가 있었지만, 프랑스 기업인 주에즈가 물의 주인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수도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요금을 감당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럽의 전문가들과 정부 관리들은 의아해 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문화적 후진성 때문이었다. 거의 전 국민이 빈곤 계층인 볼리비아 사람들은, 유럽에서 불과 얼마 전부터 습관이 된 것처럼, 하루에 한 번 몸을 씻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 그들이 갖지 못한 자동차를 세차해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 주제 사라마구의 조부인 제로니무는 글을 몰랐지만 박식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병이 났을 때 그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말없이 과수원을 거닐며 나무들 옆에서 결음을 멈추고 일일이 껴안아 주었다. 그는 뭏롸과나무와 월계수, 석류나무, 그리고 서너 그루의 올리브 나무와 포옹했다. 집에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는 그를 리스본으로, 죽음으로 데려갔다.
[포도] 그건 불꽃놀이가 아니었다. 전쟁의 소리였다. 총격과 폭격이 예광탄으로 환해진 자그레브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한 해가 스러져 가고 있었고 유고슬라비아도 죽어 가고 있었다. 그 사이 프란 세비야는 마드리드의 국영 라디오 방송국으로 그 해의 마지막 기사를 송고했다. 프란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라이터를 켜 시계를 보았다. 그는 침을 삼켰다. 그는 텅 빈 호텔에 혼자 있었다.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와 우레와 같은 포성만 들려왔다. 새해가 바로 코앞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전쟁의 섬광이 방안의 유일한 불빛이었다. 프란은 침대에게 기대 포도송이에서 포도 열두 알을 떼어 냈다. 그리고 12시 정각에 그것을 먹었다.※ (스페인에는 새해가 시작되는 순간 종소리에 맞춰 포도 열두 알을 먹는 풍습이 있다.) 한 알 한 알 포도를 먹는 동안 프란은 포크로 스페인에서 가져온 질 좋은 라 리오하 신 포도주 병을 열두 번 가볍게 쳤다. 그는 병을 두드리는 법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그때 그의 가족은 마드리드 변두리에 있던, 종도 없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와인 바] 그곳은 라모나라는 거미가 몬테비데오 항의 이웃들에게 근면성의 모범을 보이며 천장에 쉬지 않고 거미줄을 쳐서 라스 텔리타스라고 불렀다. 라스 텔리타스는 낮에는 청과물 상점이었고 밤에는 와인 바였다. 별들 아래서 우리 올빼미족들은 마시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상값은 카운터 뒤의 벽에 적어 놓았다. 저 벽은 너무 지저분해서 금방 무너질 거야. 손님들이 술을 마시는 중에 이따금씩 말하곤 했다. 달레산드로 형제인 뚱보 리토와 홀쭉이 라파는 손님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벽에 숫자를 적을 공간이 남지 않게 되었다. 그 때 용서의 밤이 펼쳐졌고 치부장은 석회로 희게 칠해졌다. 단골들은 와인 잔으로 이마를 가볍게 쳐서 새로운 손님들에게 세례를 주며 그 행사를 기렸다.
[맥주] 이 묘약은 달팽이들을 파멸로 이끈다. 날이 어두워지면 달팽이들은 은신처에서 나와 식물들의 초록빛 살을 삼킬 태세로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간다. 채소밭 한가운데서 한 잔의 맥주가 보초를 서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달팽이들은 향기에 이끌려 맥주잔 꼭대기로 기어 올라간다.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향기로운 거품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이래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그리고 맥주의 바다에서 행복하게 술에 취해 익사한다.
[금단의 열매] 다마소 로드리게소에게는 암소들은 있었지만 목장이 없었다. 그의 암소들은 사방팔방 헤매고 다녔다. 주인인 그가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우레냐 마을에 들어가 자신들을 유혹하는 공원으로 향했다. 소들은 곧장 공원의 거대한 망고 나무 숲으로 갔다. 그곳에는 넘치도록 부풀어 오른 관목들이 있었고, 또 망고 카펫이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경찰이 그들의 연회를 중단시키곤 했다. 소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다. 다마소는 긴 기다림과 훈계를 참으며 경찰서에서 몇 시간씩 보내고서야 비로소 벌금을 물고 소들을 빼내올 수 있었다. 딸인 아우라가 이따금씩 그와 동행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채 돌아왔고, 그 사이에 아버지는 경찰들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지천으로 널린 망고가 바닥에 나뒹굴며 썩어가고 있었지만 동물들은 그런 맛의 향연을 누릴 자격이 없었다. 삶의 위안을 위해 오로지 인간에게만 허락된, 진한 즙의 황금빛 성찬을 즐길 가치가 없었다. “얘야, 울지 마라. 경찰은 경찰이고 소는 소고 인간은 인간이란다.” 다마소가 말했다. 경찰도 소도 인간도 아닌 아우라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살아 있는 역사] 베라크루스 사람들 말에 따르면, 이 집은 멕시코 땅에 있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첫 번 째 집이다. 코르테스는 아도비 벽돌과 우이칠라판 강의 돌, 그리고 그의 기함이 닻을 내렸던 곳 연안의 산호초로 집을 짓도록 했다. 아작도 서 있는 그 집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식해 죽었다. 나뭇가지와 덩굴식물과 뿌리가 벽을 으스러뜨리고 안뜰을 침범했다. 또 창문을 막아 지금은 햇볕이 전혀 들지 않는다. 무성한 나뭇잎들이 문 하나를 열어 두었지만 아무도 들락거리지 않는다. 그 사이, 이웃들의 무관심 또는 경멸 속에서 수 세기 동안 계속해 온 느린 파괴의 이식이 아직도 하루하루 진행되고 있다.
[녹색 대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숲은 숨을 쉬고 걷고 빛을 찿는다. 그리고 말을 한다. 알려진 것은 거의 없지만, 적어도 나무가 타격을 당하거나 상처를 입으면 독을 발산해 스스로를 지키고 주위의 나무들에게 경계 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나무들의 언어로 ‘위험해’, ‘조심해’라고 말하는 단어들이 공기 중에 떠다닌다. 그러면 주위의 나무들 역시 독을 내뿜으며 자신의 몸을 보호한다. 아마도 나무들이 처음으로 땅 위에 솟아나 번식하고 다람쥐가 가지에서 가지로 건너뛰며 세상을 떠돌 수 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숲이 무성해졌을 때부터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사막과 사막 사이에서, 살아남은 나무들이 서로를 돌보는 좋은 이웃의 옛 습성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외로운 짐승들] 둥지가 있던 나무가 쓰러졌을 때 마코 앵무새는 아직 어렸다. 네 개의 벽면으로 가로막힌 어느 집 새장에 같혀 평생을 보냈다. 여주인이 죽자 버려졌다. 키토 근교의 슬픈 wlatmdefm을 보호하는 시설을 운영했던 슐렝커 가족이 그를 거두었다. 이 마코 앵무새는 단 한 번도 친척을 볼 수 없었다. 지금은 다른 마코앵무새들과 잘 지낼 수 없었고, 앵무새 과의 다른 어떤 사촌들과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도 잘 지낼 수 없었다. 그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몸을 떨거나 꽥꽥 소리를 질렀다. 또 부리로 깃털을 쪼아 맨살이 드러난 살갗에서 피가 났다. 아이 가엾어라! 그 누구보다 외로운 존재였다. 그러나 나를 보호소로 데려간 압돈 우비디아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짐승을 소개했다. 마지막 남은 파카, 즉 야생 기니피그였는데, 밤에는 다람쥐 쳇바퀴를 돌리듯 걸어 다니고 낮이면 쓰러진 나무의 속 빈 몸통 속에 숨어서 시간을 보낸다. 그는 그의 종중에서 이 지역에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다. 같은 종의 친척들은 모두 몰살당했다. 그에게는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눌 상대조차 없다.
[후디니] 밀림에서 그를 사로잡았을 때, 사냥꾼들은 그의 날개 하나를 잘랐다. 키티 히쉬어가 푸에르토 바야르타 시장에서 그를 발견했다. 가엽게 여겨 놓아줄 생각으로 그를 샀다. 그러나 앵무새는 혼자 힘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었다. 날개가 잘려 나간 불구의 몸으로는 굶주린 적에게 한입에 잡아먹히기 십상이었다. 키티는 그를 트럭에 실어 몰래 국경 지역으로 데려갈 요량이었다. 미국에 불법 체류하는 수많은 멕시코인들 무리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틈만 나면 탈출하려는 습성 때문에 후디니(※탈출하는 묘기를 보여준 미국 곡예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여행 첫날에 힘센 부리로 새장 문을 들어 올렸다. 둘째 날에는 새장 바닥을 뜯어냈다. 또 셋째 날에는 철망에 구멍을 뚫었다. 넷째 날에는 지붕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제 남은 기운이 없었다. 후디니는 말하지도 먹지도 않았다. 그는 침묵의 투쟁, 단식투쟁 끝에 죽었다.
[두꺼비] 아름다운 소녀가 두꺼비에게 입을 맞추면 두꺼비는 완자로 변한다는 말이 있다. 두꺼비가 썩 키스하고 싶은 외모를 가진 건 아니지만, 몇몇 소녀들이 시도를 해보았다. 그러나 말대로 되지 않았다. 한편, 화학 살충제가 개구리들에게 입을 맞추었을 때, 그들은 괴물로 변했다. 전에는 간혹 가다 기형 개구리가 나타났지만, ㅊㅚ근 몇 년 동안 미네소타 호수와 펜실바니아 숲을 비록한 많은 곳에서 드문 현상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해마다 점점 적은 수의 개구리가 태어나는데, 눈이 없거나 다리가 하나 부족하거나 하나 더 달린 개구리들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첫 개구리의 노래가 세상의 침묵을 깨뜨린 그 아득한 옛날부터 이미 수백만 년 동안 물과 육지를 오가며 살아온 개구리들은, 이제 바람을 타고 살포된 치명적인 화학 독극물과 만나게 되었다.
[씨앗] 브라질에서 농부들이 물었다. 사람 없는 땅이 널렸는데 왜 땅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대답은 총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유일한 유산인 두려움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계속 질문하고 계속 땅을 정복했으며 일하고 싶어하는 죄를 계속 저질렀다. 이제 수백만으로 불어난 농부들이 계속 물었다. 왜 화학물질로 땅을 괴롭히게 놔두는 거죠? 또한 이렇게 묻기도 했다. 씨앗이 더 이상 씨앗이 아니라면 우린 어떻게 될까요? 2001년 초, 당 없는 농민들이 리루그란데두술 주에 위치한 몬산토 사의 유전자변형 종자 실험 농장을 숩격했다. 그들은 인공 대두를 단 한 그루도 남기지 않고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농장은 ‘낭 미 토키(포르투갈어로 ’날 만지지 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풀] 속 쓰림에는 껍질을 벗겨 구운 토마토. 과식에는 끓인 부들레야 잎. 통증에는 용설란 연고나 천연고무, 또는 삶은 선인자. 선인장 살과 사르사는 피를 맑게 하고 완두콩 깍지는 신장을 씻어주며, 잣은 장을 세척한다. 손가락 나무에서 피는 다섯 손가락 모양의 꽃은 신장에 평정과 기력을 제공한다. 정복자들은 멕시코에서 이 진기한 식물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열을 내려 주고, 기생충을 죽이고, 오줌이 잘 나오게 하고, 뱀의 독을 풀어 주는, 발음을 알아듣기 어려운 토착명을 가진 다른 약초들과 함께 이 식물들을 유럽으로 가져갔다. 아메리카의 오랜 민간요법은 유럽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몇 년 뒤에 종교재판이 사냥을 시작했다. 식물들에 대한 지식은 고문이나 화형에 처해 마땅한, 의사의 탈을 쓴 마녀들과 악마들의 도구였다. 그들의 이국적인 의복 아래로 사탄의 갈라진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묘약과 연고는 타인의 침대에서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초콜릿의 불길과 담배 연기처럼, 그리고 이단자들이 우상숭배의 악랄한 술책을 통해 공중을 떠다니려고 먹는 악마의 버섯처럼 아메리카의 지옥에서 온 것들이었다.
[말] 알토 파라나(파라과이의 열 번째 주도)의 밀림에서 트럭 운전수가 나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야만인들을 조심하시오. 그가 말했다. 아직도 일부가 이곳을 활보하고 있어요. 다행히 극소수만 남았소. 나머지는 동물원에 가둬 두었어요. 그는 나에게 스페인어로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었다. 평소에 트럭 운전수는 그가 두려워하고 경멸하는 야만인들의 언어인 파라니어를 사용했다. 이상하게도 파라과이에서는 정복당한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더 이상한 건 그들은 말이 신성하다고 믿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짖된 말은 그 말이 지칭하는 사물을 모욕하지만, 참말은 그 영혼을 드러낸다. 그들은 영혼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들 속에 산다고 믿는다. 만일 내가 나의 말을 건네면 나 자신을 건네는 것이다. 언어는 쓰레기통이 아니다.
[왕] 히혼(스페인 해안도시)의 어느 공원 나무숲에서 누군가가 소리친다. 이제 무성한 나뭇잎에서 살랑대는 산들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때, 사람의 비명처럼 들리는 이 외침이 침묵을 깨뜨린다. 공작이 내는 밤의 외침이다. 낮 동안 공작은 광채를 뽐내며 거닌다. 언제나 파티 복장에 긴 깃털 꼬리를 끌고 으스대며 걷는다. 빙글빙글 돌며 잎이 무성한 녹청색 화관 같은 꼬리를 펼칠 때, 그 눈부신 아름다움은 행인들을 매혹시키고 공원의 다른 새들을 주눅 들게 한다. 오리와 거위, 백조, 기러기, 비둘기 그리고 참새는 모두 떼 지어 날거나, 혹은 무리를 이루어 걷거나 호수 위를 떠다닌다. 또 끼리끼리 떠들고 먹고 잠잔다. 그러나 공작은 다른 공작들과 멀리 떨어져서 홀로 지낸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보이기 위해 태어난 공작은 어누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다. ㅇ;ㅣ제 밤이 찾아오고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그는 어느 빈 나무의 높은 가지로 날아가 잠을 청한다. 홀로. 그리고 그때 절규하듯 외친다.
[돌의 기억] 핀투라스 강(아르헨티나에 있는 강)의 어느 동굴 깊은 곳에 한 사냥꾼이 돌에 자신의 피묻은 손을 눌러 찍었다. 그는 두려보 긴박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잠시 쉬던 중에 그곳에 자신의 손을 남겼다. 얼마 후, 다른 사냥꾼이 그 손 옆에 숯검정 같은 손을 새겼다. 그 뒤에 다른 사냥꾼들이 계속해서 돌에 피와 숯, 흙 그리고 초목의 색이 밴 손자국을 남겼다. 1만 3천년 뒤에 핀투라스 강 가까이에 있는 페리토 모레느에서 누군가가 벽에 나 여기 왔었노라. 라고 쓴다.
[피리] 삶을 춤추고 삶을 먹는다. 오늘날 이탈리아라고 불리는 곳의 남쪽에 위치한 시바리 시는 한때 음악과 풍성한 식탁에 탐닉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전사가 되고 싶어 했고 정복을 꿈꾸었다. 그리고 시바리는 끝내 파괴되었다. 적의 도시 크로토네는 25세기 전에 시바리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타란토 만 기슭에서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음악으로 단련된 시바리인들은 패했다. 시바리의 기병대가 공격해 오자 크로토네의 병사들은 피리를 꺼내ㅔ 들었다. 멜로디를 알아들은 말들은 질주를 멈추고 뒷다리로 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말들은 평소의 습관대로 계속 춤을 추었다. 그 사이에 기수들은 달아났고 피리 소리는 계속되었다.
[춤] 엘레나는 음악상자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상자에서는 크리놀린을 입은 숙녀들과 가발을 쓴 신사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고개 숙여8 인사하고는 계속 회전했다. 그 작은 자기상(磁器像)들은 다소 우스꽝스러웠지만 상냥했고, 음악의 소용돌이에 맞춰 그들과 함께 발끝으로 빠르게 도는 게 재미있었다. 그러다 엘레나는 마침내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뼈가 부러졌다. 충격으로 인해 그녀는 잠을 깼다. 왼발이 무척 아팠다. 그녀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걸을 수가 없었다. 발목이 퉁퉁 부어 욱신거렸다. 난 탄 세상에서 다른 시간에 넘어졌어. 그녀가 나에게 고백했다. 그러나 그녀는 의사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기차] 엄청 센 놈이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마치 소 이백 마리가 끄는 것 같구나. 아들인 시몬 텔 라 파바는 지평선 위로 거대한 연기구름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 금세 힘센 야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점점 커지며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며 울부짖었다. 달려오는 것을 보았을 때 아이는 겁에 질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끼익하는 날카로운 쉿소리와 긴 탄식, 그리고 기차가 멈췄다. 시몬과 그의 아버지는 이바게 계곡부터 보고타 고원까지, 더운 곳에서 서늘한 곳으로 그리고 다시 서늘한 곳에서 추운 곳으로 달렸다. 여행을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죽도록 목이 말라 헉헉거리며 기차는 역마다 멈춰 서서 물의 강을 마셨다. 그러고는 울며, 배로 증기를 내뿜으며 굉음과 함께 계속 위쪽으로 달렸다. 승객들은 그을음과 먼지를 뒤집어쓴 채 녹초가 되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가방을 찾는 사이에 시몬은 기관차로 다가갔다. 기관차는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는 고마움의 표시로 뜨거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톡톡 쳐주었다.
[인플레이션] 그는 살아서는 말라깽이였지만 죽어서는 뚱뚱보였다. 관 뚜껑에 못질을 하기 위해 온 일가친척들이 그 위에 올라앉아야 했다. 그가 갑작스럽게 뚱뚱해진 것을 두고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다. 죽음이 부풀어 오르게 만든거야. 탄소가스야 상한 우유 때문이야 영혼이에요 미망인이 흐느꼈다. 영혼이 옷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거라고요 영국식 트위트 정장은 고인의 평생에서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그는 죽었을 때 입으려고 그 옷을 재단해서 짓도록 했다. 그때 이미 그의 주변에 올빼미들이 날아다녔고,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다. 그는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단 한 푼도, 늘 가난 속에서 살았던 가족은 차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 니콜라 디 사바토는 삼촌의 시신 발굴 작업에 참여 했다. 고인에게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뼈와 너덜너덜해진 옷이 전부 였다. 옷은 온통 돈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폐, 수천 달러의 지폐는 이미 아무 쓸모가 없었다.
[다른 여인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마흔여섯 명의 선조를 가졌고, 그중 마흔 하나는 남자고 다섯은 여자였다. 잘 알려 진대로, 다섯 여자들 중 한 명인 마리아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선조로 등장하는 다른 여인들은 다음과 같다.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기 위해 창녀로 위장한 타마르, 여리고 성에서 창녀로 몸을 팔았던 라합. 유부녀의 몸으로 다윗 왕의 침대에서 솔로몬을 낳은 밧세바, 선민에 속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섬길 만한 가치가 없었던 룻. 죄인이었던 세 여인과 멸시받았던 한 여인, 지상에서 저주받았던 이 여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할머니 들이었다.
[Review]
바다의 폭풍 속에서 생겨나는 거품은 잠시 동안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의 목소리는 이런 거품과 같다. 각자의 시대에 등장했던 다양한 인물들, 저자가 직접 경험했거나, 소문으로 알게 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353개의 간단한 소개의 글을 엮은 책이다. 신문이나 잡지 등에 흥미 본위로 다루는 기사, 가십‘gossip'과 같다. 그래서 이야기 하나하나는 한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분량으로 짧다.
우루과이 출생으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인 저자(1940~2015)는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군사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투옥, 망명 등을 겪으며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따라서 글 속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강하다.
이 책에 소개된 [맥주]에 대한 글에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지내는 은둔자들을 달팽이로 묘사하고, 밤이면 껍질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와 술에 취하는 모습도 재미있다.
“이 묘약은 달팽이들을 파멸로 이끈다. 날이 어두워지면 달팽이들은 은신처에서 나와 식물들의 초록빛 살을 삼킬 태세로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간다. 채소밭 한가운데서 한 잔의 맥주가 보초를 서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달팽이들은 향기에 이끌려 맥주잔 꼭대기로 기어 올라간다.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향기로운 거품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이래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그리고 맥주의 바다에서 행복하게 술에 취해 익사한다.“
[금단의 열매]에서는
다마소 로드리게소에게는 암소들은 있었지만 목장이 없었다. 그의 암소들은 사방팔방 헤매고 다녔다. 주인인 그가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우레냐 마을에 들어가 자신들을 유혹하는 공원으로 향했다. 소들은 곧장 공원의 거대한 망고 나무숲으로 갔다. 그곳에는 넘치도록 부풀어 오른 관목들이 있었고, 또 망고 카펫이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경찰이 그들의 연회를 중단시키곤 했다. 소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다. 다마소는 긴 기다림과 훈계를 참으며 경찰서에서 몇 시간씩 보내고서야 비로소 벌금을 물고 소들을 빼내올 수 있었다. 딸인 아우라가 이따금씩 그와 동행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돌아왔고, 그 사이에 아버지는 경찰들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지천으로 널린 망고가 바닥에 나뒹굴며 썩어가고 있었지만 동물들은 그런 맛의 향연을 누릴 자격이 없었다. 삶의 위안을 위해 오로지 인간에게만 허락된, 진한 즙의 황금빛 성찬을 즐길 가치가 없었다. ‘얘야, 울지 마라. 경찰은 경찰이고 소는 소고 인간은 인간이란다.’ 다마소가 말했다. 경찰도 소도 인간도 아닌 아우라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라틴아메리카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장황한 문체, 약간 모호한 표현으로 자세히 집중하지 않으면 식상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문화적 특성이 다른데서 오는 감각적 이해의 불일치도 있다. 그에 비하면 이 책은 비교적 간결한 문체로 쓰여 있으며 작가는 그런 부분을 고려해서 세심하게 주석을 달아놓았다. 이 책은 2004년에 출판되었는데 저자는 7년 동안 준비한 작품이며 작은 아이콘(이미지)을 곁들이는 치밀함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산물이다. 우리는 시간을 볼 수 없지만 그것이 만들어낸 형상을 보고 시간을 본다. 그럼으로 시간을 보기 위해서는 그것이 만들어낸 형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시간의 목소리는 이 형상을 뜻한다. 이 책에는 우리를 향해 말하는 크고 작은 시간의 소리가 있다. 이야기의 소재는 끝이 없다. 동물과 식물, 사람들, 배우, 코미디, 재단사,..등 시간의 목소리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책을 읽게 되는 동기는 다른 책을 읽다가 책속에서 알게 되는 경우가 많고, 이때는 책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을 받는다. 이 책도 그렇게 보게 된 책이다. 저자 인물에 대한 관심이 없는 분이라면 크게 재미있는 책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일반적인 문학작품들 속에서 보여 주는 화려한 문체와 미사여구에 조금 식상한 독자라면 이 책은 분명 독특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