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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세계의 “분인(分人)”과 예술의 윤리적 책임
-한강 『몽고반점』론-
이은지(문학평론가)
1. 2015년 가을, 「ICT 인문사회융합동향 Vol.3」(미래창조과학부,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발간)에 “SNS시대, 셀카에 잡힌 21세기 존재방식(박상현)”이라는 제목의 칼럼이 게재됐다. 이 글에서 박상현은 SNS(Social Network Service)세계와 “현실”세계가 서로 다른 맥락을 가진 이질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그 두 세계가 명확한 구별이나 질서 없이 한 공간에 동시출현하게 되면 어색함과 불편함을 초래한다고 언급했다. 예를 들어 “셀카”를 찍고 있는 여고생이 입술을 내밀거나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것은 SNS에 게시될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자기 몸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 여고생은 이미 SNS세계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행인은 “거리”라는 현실의 공간에 있기 때문에 그 광경을 보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이 기고문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질적인 공간의 동시 병존이라는 상황이 우리의 감각에 어떠한 형태로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가 현대인의 삶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가상현실의 가능성이 제기된 이후,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을 통해 그 가능성을 현실에 구현하기 시작하면서 현실과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모색하던 탐색기를 거쳐, 가상현실이나 온라인 공간을 동시병행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 된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감각은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이 변화의 방향이 가상공간을 대하는 우리의 감각에 점점 현실감을 더해가는 방향으로 변화해왔기 때문에 가상공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시점에서 정보통신기술이 제공하는 가상의 공간은 뉴스의 실시간 독자 반응, 온라인 게임, 소셜 네트워크, 관심사를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웨어러블 기기를 통한 가상 체험 등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 수많은 공간으로 분화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시작부터 가상현실의 특징으로 여겨졌던 일회성과 허구성, 그리고 익명성을 여전히 지니면서도 단순히 놀이나 꿈, 일탈, 거짓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 공간은 “진짜” 사회적 공간을 제공하며 거기에서 오가는 것은 사회적 의사소통이다.
일례로 위의 글에서는 수많은 온라인 매체 중에서도 SNS를 지목하여, SNS 공간으로 들어갈 이미지와 현실이 순간적으로나마 공존하게 되는 것이 위화감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나는 이런 논의 자체가 가상과 현실을 거짓과 참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만 판단하고, 거기서 진짜로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실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존재론적·인식론적 주제만 문제 삼았던 시기를 이미 지나왔다는 방증이라고 본다. SNS 공간의 “실재성”을 전제하는 분석이기 때문이다. 이제 온라인 공간을 현실과 대비하여 가상 Vs 현실의 구도로 보는 것에도 슬슬 한계가 온 셈이다. IT기술로 만들어낸 공간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배경만 다를 뿐, 더 이상 현실세계 저 너머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은 가상현실이 아니라 “인공현실”일 것이다. 온라인 공간의 “나”는 SNS에 업로드한 나의 사진이나 동영상처럼 현실의 “나”와 아주 유사한 것부터, 게임 속에서 욕설과 학살을 일삼는 나의 “아바타”처럼 아주 이질적인 “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서 존재한다. 그런 온라인 공간의 “나”를 거짓이라고 여기든, 일탈이나 유희라고 여기든, 각자의 판단과는 별개로 온라인 공간은 이미 “진짜” 사회가 된 지 오래이다. 이 문제는 윤리적 책임의 문제로 연결될 때 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과연 우리는 인공현실의 일회성·허구성·익명성 뒤에 안전하게 숨어 거기서 있었던 일을 현실에 있는 나의 인격과 분리하는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윤리적 책임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의문에 이르러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SNS나 온라인 게임, 웨어러블 기기를 통한 가상체험 등의 인공현실을 일상에서 대하는 물리적 현실과 대비하여 위계상으로 현실보다 한 차원 낮은 공간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이 서로 다른 이질적인 공간의 동시병존 원리는 어떤 것이며 또 그러한 공간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가상이라고 생각했던 공간마저도 사실감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에 돌입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는 의외로, IT기술이 생겨나기도 전에 인간이 오랜 역사를 통해 축적해 온 경험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
2. 그 동안 우리가 현실과 인공공간의 관계를 새로 모색하던 시기에 이 관계의 모호성을 정의하던 말들이 있었다. 현실 도피, 현실 날조 등. 여기에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인간관계가 가족과 친구 같은 현실의 인간관계를 대체해 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 게임 캐릭터의 레벨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현실에서의 부와 성공을 위한 노력을 대체해 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가짜”임이 명백한 온라인 공간에서 시간과 열정을 투입하여 언어와 이미지로 자신의 “아바타”를 꾸미고, 치장하고, 업그레이드 시키는 일에 애들 같이 몰두하게 된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온라인 공간에서 체험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은 현실에서 체험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연장선이며 확장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그 때, 그 장소, 그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하위 규범이 지배하는 시공간을 펼치고 접는 데 능하다. 종교적 의식이든 소꿉놀이든 인간은 일상에서 그 자리에서만 필요로 하는 어떤 역할을 맡고 그에 따른 법칙에 의해서만 행동하라는 요구에 수시로 응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에 얼마나 잘 부응해야 하는가는 아무래도 좋을 심심풀이에서 끝날지,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가 될지 그때 직면한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이런 식으로 생성되는 시공간도 인공적인 공간이며, 여기서의 역할도 정해진 시공간을 벗어나면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인간은 이러한 인공적인 공간을 만들어 현실을 확장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래서 온라인 공간이 제공됐을 때, 허구일 게 분명한 실체 없는 상대방과 교류해야 한다는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적응의 실체가 무엇이었을까? 명절에 화투를 칠 때, 운전대를 잡을 때, 친구들과 축구를 할 때 우리는 알고 있는 사람의 사뭇 다른 면모를 목격하지만 그 면모를 우리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 적응의 대상은 어떠한 룰에 참여하는 개개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 교류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규칙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공적 공간에서 하위 규범을 따라 행한 행위는 그 공간 밖에서 묻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생겨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그 자리의 시공간적 특수성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전쟁터는 그러한 특수성이 극대화된 극단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거기서 일어난 일은 일상 공간에서 통용되는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렇듯이 인간은 원래 상황 조건에 따라서 하나의 시공간을 다른 시공간과 분리하여 구획 짓는 것에 익숙하고, 또 그러한 특수한 논리가 통하는 하위 규범의 시공간을 인공적으로 출현시키는 데도 익숙하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예술가와 예술 공간의 문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현실적 제약의 연장선에서 생겨났으며, 현실의 재료를 가져다가 구성한 인공적인 예술의 공간이 현실에 종속적인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종국에는 등가물이 되고 마는 현상은 현대의 가상현실이 제기한 문제 그 자체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예술가 소설”은 오래 전부터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결국 이러한 공간의 분리·구획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기도가 어떻게 끝날 것인지 전망해 왔다. 특히, 예술공간의 탄생에 따라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에 직면했을 때, 윤리적 책임이 어떤 형태로 적용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소설의 결말을 결정하는 중요한 주제였다. 따라서 그러한 “예술가 소설” 중 특히 이러한 주제에 대한 탐구가 돋보이는 한강의 『몽고반점』이라는 작품을 통해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 한강의 『몽고반점』이 발표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이때도 역시 비디오나 컴퓨터 같은 매체들은 세상에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가상과 현실은 진위논쟁에 따른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 상호작용에 연륜과 역사를 더해가고 있었으며 가상공간의 일상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인터넷 문화는 서브 컬처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방송이나 유행을 주도하는 주류 문화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몽고반점』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나왔으나 새롭게 탐구되고 있는 현실과 가상의 관계를 평화공존의 관계로 보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작품에서 그려진 미디어 아트를 현실의 기호와 이미지를 사용하는 예술의 한 분야로서, 현실과 예술의 모순적인 공존 속에서 예술의 가능성을 실험한다는 “예술가 소설”의 연장선에서 그렸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몽고반점』 역시 기존에 발표된 “예술가 소설”들이 보여준 비관적인 결말을 다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몽고반점』이라는 작품이 시도한 미학적 실험 결과를 정산하는 것을 통해 밝혀질 수 있다. 『몽고반점』은 육체적으로 중년에 접어든 예술가가 자신의 기존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관능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해 방황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오랫동안 금욕적이고 의식적인 내면세계를 구축한 덕분에 “의식 있는 신부” “강직한 성직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광고와 드라마, 뉴스, 정치인의 얼굴, 무너지는 다리와 백화점, 노숙자와 난치병 어린이들의 눈물을 다루면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다루고 거짓된 시뮬라크르를 폭로하는 작품을 만들던 예술가였다. 그러던 그가 아내가 무심히 내던진 “몽고반점”이라는 단어 하나로 최면에 걸린 듯이 관능적 이미지와 성적 욕망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처제의 몸에 있다는 몽고반점을 상상하는 순간, 비탈을 굴러가는 작은 눈덩이가 그것을 핵으로 하여 점점 큰 눈덩이가 되듯이, 몽고반점은 그의 상상력 안에서 그가 속한 문명화된 세계가 아닌 모든 것들의 이미지와 기호를 흡수하면서 비대해지기 시작한다. 가장 핵심에 몽고반점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 현란한 색채의 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관능적으로 구현하는 처제의 육체가 있다. 처제는 어떤 사람인가? 외부 세계에 아무 반응도 없고 호기심도 없고 욕망도 없다. 바보는 아니다. 단지 그 안에서 격정적인 것을, 엄청난 것을 억제하는 데 정신적인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예절이나 겉치레는 일절 모르고, 자신을 포장할 줄도 모르고,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기 위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거나 적극적으로 배려하는 것도 없다. 고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베트남 참전 용사 출신 아버지에게 뺨을 얻어맞은 뒤 그것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다. 심지어 옷을 벗은 채로 태연히 사람들 앞에 돌아다니기까지 한다. 사회성이 생존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물”이 아니라 스스로 우뚝 서서 광합성을 하는 태고의 “식물”을 닮았다. 이런 사람에게 주인공인 예술가는 어떤 예술적 이미지를 투사할 의지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것과 결합하기 위해서 어떤 계획을 준비했을까?
관능의 세계에 눈을 돌리기 전, 주인공 안에서 이미 리얼리즘의 붕괴는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현실의 이미지를 견딜 수 없었다.” 작품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삶이 넌더리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사회파로서의 작가 생활을 왜 지속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무방비 상태로 처제의 자살 소동을 겪은 후, 불시에 닥치는 현실이 작품 활동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무게는 아니라는 것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있다. 셔츠에서 말라붙어가는 끈끈한 피의 느낌이 생생할수록, 세상이 무판단과 무의미의 영역이라는 실감도 생생해진다. 단지 고기 때문에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여기에 대체 어떤 판단이 가능할 것인가? 삶이 작품 속에서 자유자재로 가공되는 만만한 대상이 아니라 실은 살아가는 것조차도 벅찬 대상이라는 실감은 이러한 대비에서 비롯된다. 주인공 안에서 이렇게 사회파로서의, 리얼리즘 작가로서의 불꽃이 잦아들고 있었으므로 다시 예술가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다른 에너지를 찾아 떠나는 것이 필요하다. 영감의 불모지를 과감히 떠나는 결단력이야말로 예술가의 미덕 중 하나다. 과거의 작업 스타일은 작업을 위하여 힘들게 이끌어 낸 미움과 환멸의 감정을 연료로 하여 창작욕을 불 지피는 방식이었다. 성직자적 근엄함과 인본주의의 자애로움을 동시에 파기하면서 그간 그의 내면에서 격하되고 도외시된 이미지들은 현실에서 투사될 대상을 찾아 무서운 기세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몽고반점이 처제의 육체를 통해 구체화되고, 처제의 그간 언행들을 단서로 해서 문명 이전의,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식물의 이미지와 결합하면서 존재가 점점 커지자, 주인공이 속한 세계와의 대립 구도가 점점 뚜렷해지는 장면도 연출된다. 주인공의 세계는 서로 모순되는, 공존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로 나뉘고 양자택일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된다. 그것을 알면서도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양자택일만큼은 피하려고 몸부림을 쳤다. 자신이 직접 욕망을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감했을 때, 처제를 보고 욕정을 느낄 때마다 주인공은 자신을 추하게 여기고 학대했으며 처제의 몸에 바디페인팅을 하고 촬영을 시작했을 때도 남자 후배를 처제의 상대로 밀어붙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것은 현실과 예술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남자 후배가 성교 촬영에 응해주기만 했더라면 현실과 예술이 서로의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타협점 위에 있을 수 있었다. 이 타협점을 지키지 못하면 한쪽의 세계는 무너지고, 만일 그 세계가 현실의 세계라면 윤리적 책임이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실패는 이미 우리에게 낯이 익다.
잘 알려진 김동인의 두 “예술가 소설” 『광화사』와 『광염소나타』를 보면, 이 두 작품의 예술가 주인공도 현실과의 힘겨루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예술을 탄생시키나, 타협점 위에 서는 것에는 실패한다. 『광화사』는 주인공의 못난 외모를 빌미로 구박과 설움을 준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 세상에 둘도 없는 미녀의 그림을 그린다는 설정의 작품이다. 주인공은 그림의 모델이 될 미모를 갖춘 맹인 소녀를 만나 그림의 태반을 완성하나, 소녀와 동침하여 여인의 세속적 욕망을 일깨우는 실수를 범한다. 동침한 이후 소녀의 눈에서 세속을 초월한 청정무구함을 볼 수 없게 되자, 화가 난 주인공은 실수로 소녀를 죽이게 되고, 주인공의 삶도 작품도 파괴되고 만다. 『광염소나타』의 주인공은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으나,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는 영감을 얻을 수 없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은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현실을 하나하나 파괴하고, 범죄 하나를 저지를 때마다 작품 하나를 탄생시키는 식으로 현실을 작품을 위한 불쏘시개로 사용하지만, 이내 그의 범죄는 탄로가 나고 그의 광기는 처벌 받는다.
이 두 작품에서 현실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술은 현실을 재료로 파생된 특수한 규범이 지배하는 하위의 시공간인 동시에, 한번 생성된 이후에도 그 생명의 연장을 현실에 의존하는 식으로 긴밀하게 관련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현실, 예술은 예술로 별개의 시공간으로 남는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예술로 들어간 현실의 재료는 현실에 맥락에서 거칠게 뜯겨져 나와 예술의 자기완결적인 맥락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여 하나의 세계에서 성립하는 것을 다른 세계에서 적용하려고 하면, 위의 두 주인공처럼 미학적 파멸이나 인생의 파멸을 맞게 된다. 이질적인 공간을 동시 병존하게 하면서도 하나를 파괴하지 않으려면 균형점을 찾아야 하고, 균형점을 찾는다는 것은 작품의 프레임을 구성한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작품의 프레임을 구성한다는 것은 현실의 어떤 것이 작품 속에 들어와야 하고 어떤 것을 작품 밖으로 추방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촬영에 앞서 『몽고반점』의 주인공이 작품 속 남녀의 캐스팅, 바디페인팅으로 나타낼 꽃의 이미지, 남녀의 교합 자세 등을 연구하는 장면은 예술적 프레임을 구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카메라 앞에서 바디페인팅을 한 육체는 영상 속에서 순수한 관능적 이미지로만 기능할 뿐, 현실에서 처제와 형부라는 관계는 프레임 밖으로 추방된 것이다. 한 번 프레임 밖으로 추방된 것은 절대로 예술 공간 안으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시공간의 분리·구획만 지켜진다면 앞서 말한 불문율이 발동될 수 있다. 고유한 맥락의 특수성에 의해 지배당하는 외부와 단절된 예술적 시공간은 현실에서 제기될 어떠한 책임에서도 자유롭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논리를 끝까지 지키려는 노력은 곳곳에서 목격된다. 그러나 항상 덧없는 몸부림, 궁색한 변명으로 끝나고 마는 것도 마찬가지로 목격된다. 분명 특수한 맥락을 지닌 이질적인 공간을 탄생시키는 것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예술을 독자적인 원리에 따른 것으로만 인정하지는 않는다. 이는 전적으로 예술에 쓰인 재료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어떤 재료를 가져와서 어떠한 가공을 거쳐 작품 속에서 새 맥락을 획득했는지 세상에 알려지기만 하면, 그 순간에 재료는 다시 현실로 회수되어 현실 맥락에서 심판을 받는 것이다. 어째서 현실은 종교 의식이나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를 구경할 때 그러는 것처럼 약간 이상하더라도 “원래 그런 거니까” 하는 식으로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지 않는 것일까? 서두에서 언급한 글에 셀카 찍는 광경을 목격한 것은 “거리”에 속한 행인이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리고 『몽고반점』의 작가가 어떻게 해서 두 개의 세계의 이미지와 기호를 대조적으로 구축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그걸 무너뜨렸는지 다시 생각해보자.
4. 작가가 주인공의 현모양처 아내에게 부여한 이미지들은 책임감, 이해심, 인내심, 선함, 배려, 신중함이다. 하나 같이 전부 다 인간들 사이에서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며,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미덕들이다. 아내는 사회성의 표상이다. 반면에 그 여동생인 처제-영혜는 작품 속에서 딸로도, 아내로도, 동생으로도, 처제로도 뚜렷한 역할을 하지 않고 있으며 할 생각도 없다. 작품 속에서 몽고반점이 보여주는 원시의 강렬한 이미지, 동물이자 식물이자 인간인 바디페인팅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한 탓에 가려져 있지만, 주인공이 아내를 떠나 처제를 욕망한다는 것에는 예술가가 과거의 작품 세계와 결별하여 다른 세계로 차원 이동한다는 의미 말고도, 사회조직을 통해 공고한 관계성을 이미 구축해버린 문명의 세계를 떠나 사회적 관계망이 형성되기 이전으로 역진화, 혹은 퇴화하고 싶다는 열망도 포함하고 있다. 자크 아탈리는 『호모 노마드』라는 책에서 정주 문명이 만들어낸 것은 국가와 세금과 감옥 뿐이라고 조롱조로 말한 바 있다. 국가와 세금과 감옥은 생산수단을 장악한 지배자들이 우선순위에 따라 자원을 분배하고 이동을 봉쇄당한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 낸 도구다. 정해진 구역에서 정해진 범위의 사람들과 정해진 사회적 상호작용을 반복하는 것을 통해 인간들 사이의 관계성은 하나의 패턴으로 정착되고 견고하게 구축되는데 그것이 바로 계층제다. 정주 문명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있어서의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을 제공한다. 권력의 정점에서 아래로 파생되는 수직적 질서에 순응하면, 사회적 상호작용은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이 줄어들기 때문에 단순해지고 안정적으로 될 수 있다. 아내의 이성과 절제는 놀라울 정도로 인격적으로 고양된 경지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수직적 질서에 순응하는 문명적 가치에 단단히 뿌리 내린 정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에 비해 형부와 정사를 벌일 정도로 사회적 역할에서 초연한 영혜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해체하기만 한다. 영혜가 몸에 지니고 있는 몽고반점은 유목민족의 천형(天刑)적인 기호로 작용하는데, 어른이 되면 사라지는 몽고반점이 남아있게 되는 것은 대다수 인간이 겪는 문명화라는 성장과정에서 일탈했다는 뜻이며 문명의 대항자, 문명의 낙오자라는 기호가 되어 주인공을 강하게 흡입하는 요인이 된다. 문명을 만들어 낸 농경민족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역병처럼 주기도 없이 나타나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했던 유목민족이었다. 그러한 유목민족이 처제로 육화되어 아내가 평생 일궈놓은 소중한 것들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이야기로 이 작품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작가는 두 개의 세계에 대조적인 이미지를 부여했고 주인공을 양자택일에 이를 때까지 궁지로 몰고 갔다. 주인공에게는 구원도, 행운도 없었다. 그가 갇혀버린 욕망의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그 욕망을 실현하는 길 뿐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주인공이 욕망을 실현하기 전에 주인공이 타협점을 견지할 수만 있었더라면 파멸이 닥치지 않을 수 있었다. 욕망을 실현한 후에는 약간의 운이 따랐더라면 파멸이 닥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내에게 들키지만 않았더라면, 영혜에게 다짐을 받았던 것처럼 언니에게는 비밀로 할 수만 있었더라면, 예술 공간은 현실 공간과 완전히 분리되는 데 성공하여 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시공간으로서 완전히 독자적인 생명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 아닌가? 주인공 역시 현실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하는 삶을 파괴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아내에게 들켰을 때의 충격과 자살충동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사람의 진심이었다. 주인공의 소망은 예술 공간이 특수하고 일시적인 공간으로 현실과 분리·구획되어 그 안에서 정사를 벌인 자신과 처제는 하나의 이미지로만, “꽃과 짐승과 인간의 뒤섞인 한 몸”을 보여주는 배우로서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예술가의 의도를 작가 한강은 왜 그렇게 신속하게 들통 나게 만들어서 비참하게 좌절시켜야 했을까?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예술적 프레임을 구성하고, 하위 규범이 지배하는 특수한 논리의 시공간을 현실에서 분리해내는 등의 일에서 궁극의 변수이자 유일한 변수인 인간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가 없다. 바흐찐의 말대로 우리가 쓰는 단어 하나하나는 사람들의 온갖 욕망과 권력이 투쟁하는 이데올로기 전쟁의 무대이며 언어는 이데올로기 기호이다. 기호로 구성된 세계인 예술의 시공간도 이데올로기 전쟁의 무대라는 것은 자명하다. 셀카를 찍는 여고생을 보는 행인의 위화감은 그러한 투쟁의 단면이다. 인공 공간이 아무리 하위 규범을 따르고 시공간적 특수성을 인정받으며, 심지어 일시성·허구성·익명성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일단 생성된 이후에는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가치가 넘나드는 투쟁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세계의 논리로 평가하고 심판하는 타인의 시선에 맞서 인공 공간의 고유성을 지키려면 하위 규범을 따르기로 동의한 동맹에게만 그 공간을 개방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대부분의 인공 공간이 붕괴되는 것이다. 작가는 “정상인”의 세계에 속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아내에게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주인공의 사회적 죽음까지 선고할 수 있었다. 주인공이 파멸하는 방식으로서는 아주 상식적이고 온건한 이 방법은, 보이는 것만큼 진부한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더 생각해볼만한 여지가 충분하다.
예술적 프레임을 구성하고, 하위 규범이 지배하는 특수한 논리의 시공간을 현실에서 분리해내는 일에서 인간이 궁극의 변수이자 유일한 변수인 이유는, 그러한 시공간을 권력자의 규칙 선포만으로는 탄생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 처음에는 동질이었던 어떤 생물체의 부분이 각각의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특수한 환경에 처하게 되어 그 환경에 맞게 변화하면서 종국에는 형태적·기능적으로 특수화된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는 과정을 분화(分化)라고 한다. 이러한 분화의 과정을 가상공간이나 인공공간의 출현에 대응하여 인간들이 집단으로 서로의 행동을 미묘하게 조율해 나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개성도 그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에 대입시킨 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분인(分人)주의” 이다. 이 개념은 시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정체성과, 자신과 타인에게서 일어나는 정체성의 변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겪는 인간의 심리를 잘 설명하는 개념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단일하고 위계상 가장 상위에 있는 “진정한 나”라는 것은 허상이며, 실제로 “나”의 정체성은 때와 장소·교류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는 분인들의 집합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개념으로 보면, 영혜는 주인공이 칠한 바디페인팅을 통해서 피 묻은 얼굴의 꿈, 동물의 잔인한 포식성에 쫓기는 것 같은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난 새로운 분인을 형성할 수 있었다. 주인공은 무너진 중년의 육체나 형부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바디페인팅을 했다는 이유로 영혜가 식물적 교접의 상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영상에 나올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두 사람은 오직 서로에게만 특화된 분인을 상호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어떠한 근본적인 정체성의 변화를 겪은 것이 아니라, 특수한 시공간에서 서로가 특수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게끔 공모한 것뿐이다. 온몸에 물감을 칠한 이상한 모습이었지만, 그러고 있는 것이 한쪽은 욕망이 해소되고, 한쪽은 트라우마를 벗어나는 일이었기에 가장 편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성공한 시도를 한번에 무너뜨린 “목격”과 “단죄”의 매커니즘은 무엇이었을까?
밀란 쿤데라의 『히치하이킹 게임』은 장난삼아 역할 놀이를 시작한 젊은 커플이, 점점 놀이에 가속도가 붙어 창녀와 고객이라는 역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연인의 정체성에 대한 분노와 의심으로 인해 관계가 파탄 나버린다는 내용이다. 창녀 취급을 당한 여자는 마지막에 “나는 나야”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울지만, 남자는 이전의 연인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음란한 여자 역할을 그렇게 잘 할 수 있는 이유는 실제로 음란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순결하고 여린 이미지는 자신을 현혹시킨 “거짓”에 불과하고 지금 그녀는 놀이를 빙자하여 “진짜” 자기 자신을 해방시킨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같은 놀이를 공모했으면서도 자기에게 익숙한 여자의 모습과, 역할 놀이에서 보여준 여자의 모습 사이의 간극에서 인지부조화를 느낀 남자가 어느 하나를 거짓이라고 부정하면서 여자가 단죄 당한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얼굴 없는 나체들』에서는 수수하고 평범한 여자교사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난 남자와 교제하게 되는데, 그가 촬영한 자신의 나체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 상에서 유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사진의 얼굴에는 모자이크가 걸려 있었기에 그 나체가 자신이라는 것이 알려질 리는 없었다. 그러자 오히려 여교사는 평범한 일상의 자기 모습으로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쾌락의 세계에 한 발을 걸친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는 데에서 이상한 원기를 얻어 일상을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야외에서 성행위를 촬영하다가 사람들에게 들키자, 그간에 인터넷에 유포되었던 이미지들까지도 전부 자신의 것으로 밝혀진다. 이 작품에서는 얼굴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가, 얼굴이 밝혀지자 그간에 인터넷에 무더기로 올렸던 사진과 동영상들에 대한 책임까지 한꺼번에 뒤집어쓰게 되면서 파멸하는 여자를 묘사했다.
이 두 작품의 결말과 『몽고반점』의 결말에는 명백한 유사성이 있다. 또한 인공 공간을 파괴하는 매커니즘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에 대한 원리도 잘 드러나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부터 누누이 강조했듯이, 일시성·허구성·익명성만 통하는 특수한 시공간을 펼치고 접는 일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공간은 타인과의 관계에 아주 취약하다. 『히치하이킹 게임』은 여자 친구에게서 자신에게는 낯선, 천박한 면모를 목격하게 된 남자가 참지 못하고 여자 친구의 인격 전부를 단죄하게 되며, 『얼굴 없는 나체들』에서는 여교사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에게 나체 사진이 공개되면서 영원히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돼버리고 만다. 『몽고반점』에서는 실성한 여동생에게 몹쓸 짓을 한 남편 역시 미쳤다고 판단한 아내에 의해 주인공이 정신병원에 끌려가게 된다. 이 세 작품 모두 게임이 지속되는 동안, 익명성이 보장되는 동안, 영상이 공개되지 않은 동안만큼은 특수한 시공간 속에서 안전을 보장받았으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얼굴·또 다른 나로 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자, 급속하게 타인과의 관계성 속으로 소환되면서 일탈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지게 된다.
5. 『몽고반점』을 비롯한 “예술가 소설”들이 예술 공간 안에서 성립하는 논리가 현실을 초월한 독립적 존재처럼 될 수 있다는 것에 비관적인 전망을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소설적 공간은 기본적으로 바흐찐의 “대화적인 공간”이며, “다성악적인 공간”이다. 체계 안에서만 완결성을 갖는 닫힌 체계로 구성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소설적 공간은 등장인물의 사상과 행동을 타인의 시선이라는 검증대 위를 통과하게끔 안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이미지와 상징들로 대비되는 현실과 예술이라는 두 개의 세계를 매혹적으로 구축한 다음에,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일거에 무너뜨리는 결말은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주인공은 성욕의 에너지를 동력 삼아 모든 욕망을 실행했고 자신의 예술관과 실존의 문제까지도 예술적 이미지와의 결합을 통해 해결을 보려고 했다. 이 결합은 로맨티시즘적 포장도 없고 에로티시즘도 없는, 신속하고 개방적이며 호환성을 자랑하는 노마드의 결합이다. 주인공은 처제에 대한 성욕을 사랑으로 포장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최소한의 보호도, 자기 정당화도 시도하지 않는다. 오로지 여기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다른 시공간을 열기 위한 개척과 탐색의 동인이 되는 성욕이다. 그리고 그것은 태고적 광활한 평원을 종횡하면서 정주 문명이 쌓은 모든 공고한 관계의 유적을 파괴하던 유목민들의 삶의 의지와 동일한 것이었을 것이다. 관계의 감옥을 뛰어 넘는 생명력과 관능은 인간을 매혹한 원형적 이미지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서, 잠재된 유목민성을 각성하고 그것에 동화되는 것을 통해서, 서로에게서 원하는 것을 찾아낸 두 남녀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을 감수함으로 인해서 새로운 의미의 차원을 연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몽고반점』의 영혜와 주인공처럼 새로운 의미의 차원을 열고 그 시공간 안에서만 현실에 대해서 불완전하나마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이러한 인공의 공간을 살아내는 현실의 감각은 어떤 상태가 바람직한지, 그리고 그러한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파악할 수 있을지, 나와 타인들이 촘촘하게 짜인 관계의 사슬망 안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에서 인공의 공간은 거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으며 얼마만큼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이러한 많은 의문들에 대하여 작가 한강은 10년 전, 『몽고반점』이라는 미학적 실험의 기록을 통해 그 나름대로의 해답을 보여줬던 것이다.
첫댓글 평론의 마력에 이끌려 여러번 읽다 갑니다.
전 이런 글이 좋습니다 ㅎ
오늘부로 광팬이 될 듯 싶습니다.
하하. 그랬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