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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4-18
결단(Decision)
미국의 40대 대통령 레이건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구두를 사려고 구둣가게에 갔습니다. 주인 아저씨가 “앞이 둥근 것과 각진 것 중 어떤 구두가 마음에 드느냐?” 물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레이건은 계속 구두를 살펴보기만 할 뿐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그날 구두를 맞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다음 날 다시 부모님과 함께 구둣가게를 찾았지만, 어린 레이건은 여전히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내가 알아서 멋진 신발을 맞춰 줄테니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레이건이 설레이는 마음으로 구두를 찾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아저씨가 내민 구두는 한쪽 코는 둥글고, 다른 한쪽은 네모진 짝짝이 구두였습니다. 울상을 짓고 있는 레이건에게 구둣가게 아저씨가 말합니다. “결정할 줄 모르는 아이는 이런 신발을 신어야 하는 거야.” 어린 레이건은 매우 창피했지만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주어진 기회에 결정하지 못하면 짝짝이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레이건은 어떤 결정을 하거나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는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정치가로 성공하게 됐습니다.
우리 인생은 계속되는 선택과 결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어쩌면 선택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그 인생을 좌우합니다. 선택에는 언제나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단해야 할 때 신중하게 결단하지 못하면 중요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술을 끊겠다고 결단하지 못해 알콜 중독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담배를 끊겠다고 결단하지 못해 폐암에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박을 끊겠다고 결단하지 못해 모든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쁜 습관과 버릇을 끊겠다고 결단하지 못해서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보겠다고 결단하지만 세상일에 바빠서 주님을 멀리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새해에 여러분은 어떤 결단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향하여, 가정을 향하여, 여러분의 일터와 사업을 향하여 어떤 결단을 하셨습니까? 이 주가 지난 지금 벌써 작심삼일(作心三日) 되지는 않았는지요?
‘결단(決斷)’의 사전적 의미는 ‘결정적인 판단을 하거나 단정을 내림. 또는 그런 판단이나 단정’ 입니다. 한문으로는 ‘결심할 결(決)’에 ‘끊을 단(斷)’자를 씁니다. 무엇인가 의미있고, 중요한 것을 위해 끊기로 결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목숨을 건 결단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사생결단(死生決斷)’이라고 합니다.
실재로 사생결단을 통해 목숨을 건진 예가 있습니다. 2003년 4월 탐험가이며, 엔지니어인 26세의 아론 랠스턴(Aron Ralston)이란 사람이 유타주의 블루 존 협곡을 등반하다가 바위가 내려앉는 바람에 오른팔이 끼었습니다.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팔이 바위틈에 끼어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로 3일을 버텼습니다. 배낭 안의 물과 빵은 떨어져 갔고, 그가 조난당한 사실을 아무도 몰라 구조대가 올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살아 돌아갈 유일한 방법은 손을 잘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5달러짜리 랜턴을 살 때, 함께 달려왔던 다용도 칼로 손목 주변을 찔러봤습니다. 날이 너무 무뎌 손목을 자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나흘이 지나자 마침내 마지막 한 방울의 물도 떨어졌습니다. 절망과 공포 속에서 번민하는 사이 다시 하루가 흘러 다섯째 되는 날, 랠스턴은 마침내 결심했습니다. 팔을 잘라낼 힘이 남아 있을 때, 그리고 다시 구조를 받을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갈 힘이 있을 때 결정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먼저 배낭에서 옷가지를 꺼내 상처를 동여맬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있는 힘껏 팔을 비틀었습니다. 바위틈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팔목을 잘라내기 시작했습니다. 칼이 무뎌서 완전히 잘라내는 데 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옥 같은 통증이 엄습했지만, 그는 주저앉을 여유도 없이 상처를 싸매고는 한 손으로 바위산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피를 흘리면서 6마일을 걸어간 끝에 네덜란드 등산객을 만나게 무사히 구조됐습니다.
랠스턴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팔목을 잘라내는 결단을 했습니다. 만약 그가 아픔과 고통 때문에 결단하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결단을 통해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유부단함 때문에 결단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 할 때가 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결단하는데 실행하지 못해 언제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를 맴돌 때가 있습니다.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머뭇거리다가 아까운 인생을 허비하고,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향하여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모든 이스라엘의 리더십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설교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기억하라(remember)와 결단하라(decide)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내용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던 땅에 거주하던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번성케 하셨습니다.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사백년 동안 종노릇 하던 자들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비록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걸었지만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무기나 군대도 없었지만 가나안의 족속과의 전쟁에서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 땅과 집과 성읍을 주셨습니다. 심지 아니한 포도와 감람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의 결과입니다.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힘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충성스런 신앙심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너희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헨'이라는 단어는 '구부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호의를 말합니다. 신학적인 의미로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발적인 호의’를 말합니다. 영어로는 'Grace'입니다. 이 말을 우리의 삶과 연관시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신 신학자가 있습니다. 작고하신 도날드 반 하우스입니다.
“위를 향한 사랑, 그것은 예배이다. 바깥을 향한 사랑, 그것은 자비이다. 아래로 향한 사랑,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우리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것이 은혜의 원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조건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처럼 우리 주님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마지막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 모두 쏟으셨습니다. 나의 죄 값을 모두 지불하시려고 온갖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행위대로 보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천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노예상인이었던 뉴턴 경이 이 사실을 깨닫고 지은 곡이 바로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 라는 찬양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사는 삶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거룩하신 주님의 보좌 앞에 나와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는 예배는 더 이상 예배가 아닙니다. 지난 한 주간동안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드릴 때 더 큰 은혜가 임하고, 감격이 넘칩니다. 은혜를 깨닫고 기억하지 못하면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의식이요 형식일 뿐입니다.
은혜의 삶, 이것이 신앙생활이요 축복의 삶입니다. 여기에 삶의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태양이 있는 곳에 빛이 있습니다. 바람이 부는 곳에는 나뭇가지가 흔들립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아름다운 은혜의 삶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발적인 헌신입니다. 자기의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나누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모습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라고 강조한 여호수아는 결단하라고 촉구합니다. 왜 오늘 여호수아가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설교를 하면서 결단을 촉구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삶의 놀라운 변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40여년 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10여년이 넘는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을 마치고, 이제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정착하는 단계입니다. 그들은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편안한 삶을 살게 됩니다. 더 이상 천막을 치고, 거친 모래바람 부는 광야를 이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면 됩니다.
여기에 여호수아의 고민이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며 살았는데 과연 이 백성들이 좋은 집에 거주하고,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배부르게 호의호식하며 살 때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겠는가?입니다. 쉽게 말하면 등 따뜻하고 배부른데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로 살겠는가의 고민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을 기도합니다. 그것이 복임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이커 속의 개구리처럼 현실에 안주하고, 그것을 즐기다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아니 하나님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힘으로 이룬 것처럼 교만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님 앞에 나와 울면서 부르짖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평안해지면 마음이 바뀝니다.
물질의 복을 많이 받은 구두쇠 성도님이 계셨습니다.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몇 일 동안 여러 가지 검사를 했습니다. 드디어 검사결과를 가지고 주치의가 왔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차트를 살펴보던 주치의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장의사 좀 빨리 불러와!” 이 소리를 들은 성도님은 혼비백산했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죽는 것입니까? 제발 좀 살려주세요.” 의사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통곡을 했습니다. 마침 그때 구두쇠 성도님이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이 문병을 왔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목사님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기도하던 성도님이 예배를 마친 후에 말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제게 넘치는 복을 주셨는데 너무 인색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제가 1억원을 헌금하겠습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렇게 많은 돈을...” “제가 너무 미련했습니다. 제가 받은 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필요한 곳에 써주십시오.”
잠시 후에 레지던트인 장의사가 왔습니다. “어디가 제일 불편하십니까?” 알고 보니 주치의가 장의사를 찾은 것은 차트를 확인하기 위해 레지던트를 부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안 구두쇠 성도님이 갑자기 안색이 확 변했습니다. 그리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목사님, 아까 제가 말한 금액에서 0 하나만 빼면 안될까요?”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요?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막상 기도가 응답되면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들을 모아 놓고 유언처럼 선포합니다. 14절 말씀을 다같이 읽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그러므로’는 인관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너희들이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으로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더 잘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섬긴다
(serve/worship)’는 말은 ‘제사를 드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너희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태도를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가? 경외함으로 예배하라 입니다. 경외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함께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보좌 앞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경찰관을 보거나 경찰차가 따라오면 가슴이 덜컥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위반한 것이 없어도 경찰이 따라오면 겁이 납니다. 경찰이 가지고 있는 권세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세자 앞에만 가도 두렵고 떨립니다. 검사를 했던 친구 말에 의하면 아무리 세상에서 힘 있고, 권세 있는 정치인이라도 피고인 자격으로 불려오면 아들같은 검사 앞에서도 떤다고 합니다. 조사를 시작하기 전 제일 먼저 자신의 인적사항을 자백하게 하는데 어떤 사람은 너무 떨려서 자기 이름이나 집 주소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그런데 예배의 자리는 어떤 곳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어떻게 딴 생각을 하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는 없는데요 껌을 씹으면서 예배드리는 분도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찬양을 불러도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것이요,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 앞에서, 예물을 드려도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외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번역에는 ‘일편단심’으로 예배하라고 번역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해서 예배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나뉘지 말고 신실하게 예배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빗물이 한 곳으로 계속 떨어지면 큰 바위도 깨집니다. 태양 빛을 한 곳으로 모으면 빛 에너지가 열 에너지로 바뀌면서 불이 붙습니다. 예배에 집중하면 하늘의 능력이 임합니다. 하늘의 불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전심으로 주님을 예배하면 병든 자가 치유되고, 눌린 자가 자유케 되고, 가난한 자가 부유케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수아는 계속해서 선포합니다.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전에 애굽에서 섬기던 신이나 가나안 땅의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을 치워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만약 너희들이 축복의 땅에 거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면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할 것이라고 준엄하게 경고합니다(20절).
우리들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워렌 위어스비(Warren W. Wiersbe는 현대인의 두 가지 우상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이루어진 일의 공로를 자기 자신에게 돌릴 때 자기가 우상이 되고, 둘째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길 때 그 선물이 우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현대인은 자기 우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모든 일의 영광을 자신이 받으려고 합니다. 신앙의 주어는 언제나 ‘내가’아닌 ‘주님’입니다. 내가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순간 나 자신이 우상이 됩니다. 나의 나 된 모습은 온전히 주님의 은혜임을 겸손히 고백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예배자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우상은 바로 내게 주신 축복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을 더 사랑하면 어떻게 될까요?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빼앗아갈 수 있습니다.
제거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부도 감사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수성가해서 큰 기업을 이뤘습니다. 처음에는 주일성수와 십일조, 봉사와 선교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회사를 핑계 삼아 교회와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주일을 빠지고 골프를 치러가는 횟수가 늘어났습니다. 언제부턴가 십일조도 적당히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를 믿고 회사 경영에 깊이 관여하게 했는데 그만 악의적으로 돈을 빼돌리고, 결국에는 부도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 집사님이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주님이 복 주실 때 잘 했어야 하는데...내가 잘해서 회사가 잘 되는 줄 알고 교만했습니다. 돈 벌고 보니 세상이 좋아서 주님을 멀리했습니다. 지금 건강할 때 부도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계속 회사가 잘 되었으면 영영 주님을 떠날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주님 섬기면서 노력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욕심 부리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더 많이 기도해 주세요”
사도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더 자신을 위해서 쌓고자 하는 탐심이 바로 우상숭배임을 지적합니다. 내 안에 있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내가 만든 하나님을 섬길 때가 있습니다. 에릭 프롬이 말한 것처럼 ‘신의 일식 현상’이 벌어집니다. 일식이 이뤄지면 낮인데도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을 가리고 있는 달과 같은 존재를 제거해야 합니다.
<껍데기 예배는 가라>는 책을 쓴 마크 레버튼(Mark Labberton)은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예배의 태도를 경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고, 세상을 향한 그분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결단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결단을 촉구합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5절) 여호수아의 촉구 앞에 모든 백성들은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겠습니다(16, 21, 24절).” 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세 번씩이나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고, 말씀에 청종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사사기 2장 10절에 보면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그들의 맹세는 공수표가 되고 맙니다. 한 세대가 지나자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베푸신 위대한 역사를 기억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영적 암흑기와 같은 300여년 간의 사사시대가 시작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 너희가 누구를 진정한 예배자로 섬길 것인가를 결단하라는 말씀입니다. 결단하고 순종하며 나아갈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늘의 능력과 기적이 일어납니다.
야곱이 결단하고 벧엘로 올라갈 때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추격하는 자가 없는 권세를 주십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결단하며 하나님을 섬길 때 사자굴에서도 건져 주시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간증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페르시아제국의 총리로 높여주십니다. 엘리야가 850대 1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목숨을 걸고 결단하며 기도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 우상숭배자들을 불태우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가 여러 가지 계획도 세우고 결단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예배자가 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우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일편단심으로 섬기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요,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인 줄 믿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 모두 예배의 승리자가 되어서 신앙생활의 승리자가 되고, 신앙생활의 승리자가 되어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바로 그 속에 물 댄 동산같은 가정이 이뤄지고, 물댄 동산같은 직장, 사업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물 댄 동산 같은 성지교회가 되어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그날을 찬양하며 나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 다시 한번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오늘 네가 섬길 자를 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