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20-24
언제까지 머뭇머뭇하렵니까? / 윤영택 목사
지난 주일에 가정의 우상을 버리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앞세우는 모든 생각과 주장과 행동들이 얼마든지 가정의 우상이 됩니다. 배우자에게 또는 자녀에게 그리고 자녀가 부모에게 바라는 나의 절대적인 요구와 기대가 만족되지 못할 때 찾아오는 절망과 분노, 미움과 다툼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나의 우상 그리고 내 가정의 우상입니다. 가정의 달을 지나며 지난 주간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하고 내 가정의 버려야 할 우상들은 무엇인지 찾아보았습니까?
우상숭배는 다른 말로 어떤 존재 앞에 두려워 굴복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그 무엇을 두려워 하고 그것으로부터 어떤 저주나 피해나 고통을 받을까 무서워 거기 매여 사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우상들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세상은 우리의 육신을 죽일 수 있어도 우리의 영혼은 마음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과 영혼을 아울러 영원한 멸망에 던지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혼탁해지고 하나님의 법이 무시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권력과 즐거움과 기회들을 더 두려워하고 거기 엎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살면 다른 우상들이 우리를 다스리거나 겁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 무서워한다는 말을 귀신에게 해코지 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공포에 떨며 마지못해 머리 숙이는 그런 식의 무서움으로 이해하지 않기 바랍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섬긴다 하는 어떤 이들의 신앙은 마치 악한 영들을 섬기듯 하나님을 어르고 달래는 식으로 눈치보며 흥정하고 어떻게든 화를 면하고 복을 얻어내면 된다는 속임수 신앙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우상숭배일 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아님을 전제하고 오늘의 말씀으로 들어갑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의미가 바로 정리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어정쩡한 태도로 살아갑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머뭇거리지 말고 회복해야 할 여호와 경외함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과감히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는 나의 우상을 버림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아합 왕을 만났습니다.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엘리야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땅에 3년6개월이나 비가 내리지 않는 저주가 내린 것은 가나안에 풍요를 주는 신 바알의 마음을 거스린 엘리야 탓이라 여겼습니다. 엘리야 때문에 부정을 타서 바알 신이 노했으니 엘리야를 잡아 죽이면 진노가 가라앉으리라 생각하고 눈에 불을 켜고 찾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겁도없이 제발로 찾아와 엉뚱한 제안을 합니다. 아합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을 모두 갈멜산으로 불러모으라는 것입니다.
아합은 이 기회에 엘리야를 깨끗이 처치할 수 있다 여기고 사람들을 불러 갈멜산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엘리야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 외친 말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렵니까? 만일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여호와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따르십시오’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두 가지 의견으로 갈라져 있는데 하나는 바알과 여호와 신앙이 혼합된 우상숭배였고 또 하나는 순수한 여호와 신앙입니다. 그러나 이세벨이 워낙 강압적으로 바알을 숭배하게 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핍박하자 이세벨의 칼이 두려운 백성들은 조상들이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내놓고 섬기지 못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버리지도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이스라엘의 미지근한 신앙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목숨을 걸고 대놓고 외쳤지만 백성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 그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엘리야를 죽이려고 서슬이 퍼런 아합 왕과 그를 추종하는 바알의 선지자들 450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달랑 한 사람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감히 누가 엘리야의 말을 듣고 편을 들어주겠습니까? 마음으로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깁니다 할 수 있지만 감히 용기를 내어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태도가 그대로 보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입니까?
이유가 많을 겁니다. 한국에서는 창피해서 더 이상 예수 믿는다는 말을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매일마다 터지는 사회문제 속에 목사들과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개입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 사람들 중에 하나라는 소리 듣기 거북하고 억울하며 창피하여 교회와 멀리하고 기독교인들과 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목사인 저도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으니 같은 교인으로서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불신자들로부터 광신도라는 소리 듣기 싫어 교회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도무지 이성적이지 못하고 비과학적인 해괴망측한 소리나 하고 다니는 통에 인텔리급에 속하는 내가 덤으로 광신도 무리에 들어가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창피하다는 말입니다. 그 말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간혹 이상한 무리들이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점잖은 체면에 중용의 도를 걷겠다고 일부러 미지근한 모습으로 신앙생활합니다. 적당히 세상과 친구하며 살아야 최소한 광신도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모태신앙인으로 어려서부터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에는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부모님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냉정하게 교회를 끊을 수 없어 그럭저럭 교회를 출입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아닌지 확신은 못하지만 혹시라도 너무 어긋나가면 벼락이라도 떨어질까 염려되어 간당간당 매달리는 분도 있습니다. 혹시 인생 막장에 달하면 매달릴 구석은 하나 있어야 한다는 대단히 실용적인 신앙심입니다.
그런가 하면, 본래 하나님도 부처님도 천사도 어떤 영들도 믿지 않고 오직 물질세계만 인정하는 사람이지만 인간관계를 위해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편 혹은 아내와 부모의 권유에 못이겨 교회를 다녀줍니다. 직장의 상사가 그 교회를 다니거나 거래상 필요한 사람을 만나려고 높은 사람에게 눈도장 찍으려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밖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이유는 많이 있을 겁니다.
엘리야가 이런 교인들에게 외칩니다.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렵니까?
어느 쪽이든 참 하나님이 되는 분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 하나님이 책임을 지실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나 어떤 우상을 따르기로 한다면 그곳이 지옥이든 천당이든 그가 여러분과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 동행할 겁니다. 어느쪽입니까? 머뭇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일 너희가 여호와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우리 조상들이 강 건너 살 때 섬기든 신이든지 혹시 너희가 머물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가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신 24:15) 할때 거기 모인 백성이 한 목소리로 대답하길 ‘우리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결코 하지 않으리니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멜산에 모인 그들의 후손들은 엘리야의 말을 듣고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칼이 하나님보다 더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엘리야가 백성에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고 바알의 선지자는 450명이나 된다. 이제 우리가 각각 제단을 쌓고 나무 위에 송아지를 제물로 올리자. 조건은 거기 불을 피우지 말고 각각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불러 불로 응답하는 신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백성들이 엘리야의 제안을 듣고 그 말이 옳다고 대답을 합니다. 마음이 답답한 백성들로서는 어떻게든 눈에 보이는 응답을 내리는 신이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어찌하든 둘 중 하나가 참 하나님으로 판명되면 그분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여긴 현실적인 판단이었을 겁니다.
엘리야가 제시한 조건이 얼마나 어려운 시험입니까?
불도 붙이지 않고 제물이 저절로 불살라지게 해야 하니 무슨 마술이라도 부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오늘 예배 후 바비큐 틀에 석탄을 올려놓고 불을 붙여야는데 혹시 누가 이런 시험을 해보실 분 있습니까? 예배 도중에 불피우려고 미리 나갈 필요도 없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절로 발화하는 쪽이 기도의 능력이 있다 이런 장난스런 내기는 하지 않을 줄 압니다. 엘리야는 송아지 고기 구워먹자고 이런 별난 제안을 한 것이 아니라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 알게 해달라고 생사가 걸린 기도대결을 제안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숫자도 많고 응원단도 많은 바알 선지자들에게 먼저 기회를 줍니다. 바알은 가나안 지역과 지중해 지역에서 번개를 주관하는 신으로 알려졌으니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먼저 해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른 아침부터 정오까지 그리고 저녁 제사를 드리는 시간까지 광란의 춤을 추고 칼로 몸을 그어대며 기도했지만 아무 응답도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기다렸던 백성들이 실망감에 지쳐갈 무렵 예루살렘 성전에서 저녁 소제를 드리는 시간에 엘리야가 백성들을 불러모았습니다. ‘나에게로 가까이 오라’ 그리고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고쳐 쌓기 시작합니다. 그 산에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던 제단이 있었는데 아합과 이세벨의 탄압으로 모두 무너졌고 아무도 찾지도 않고 돌보지 않은채 방치되었다는 말입니다. 무너진 제단,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신앙상태였습니다.
이것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기독인들의 상황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두렵고 핍박이 두려우며 그냥 귀찮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중단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않으며 세상의 흐름을 따라 편리한 쪽을 선택합니다. 일도 하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말고 가정도 돌보지 않고 매일 교회에 나와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눈이 두렵고 예배드리는 일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생겨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이 서서히 또는 급격히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꼭 교회에 나가야 하나? 예수님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 하셨지 꼭 사람들 모인 곳에서 기도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자기를 너그럽게 이해하고 인정해주며 예배하는 삶을 소홀히 여깁니다.
아닙니다. 이제껏 바알의 제단에 눈을 집중하고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단 가까이 모여
야 합니다. 거기에는 아무 응답도 생명도 없습니다. 더 이상 헛된 자리에 머물지 말고 무너진 예배의 단을 다시 쌓기 위해 가까이 모여야 합니다. 엘리야 혼자 아니라 백성들이 함께 힘을 모아 무너진 단을 다시 쌓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처럼 우리가 함께 모여 연약해진 예배의 단을 재정비하며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믿음의 부모들이여, 주일을 예배하는 날이 아니라 놀고 쉬는 날로만 여기는 영국의 비신앙적 문화를 너무 쉽게 따르지 맙시다. 영국교회 안에 좋은 점들도 많지만 주일을 소홀히 여기는 현대 영국 기독교인들의 가벼운 습관은 따라야 할 모범이 결코 못됩니다. 축구 클럽이나 생일 파티를 주일예배와 쉽게 바꾸어 버리는 영국 크리스찬 부모들의 자녀 세대는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아직 소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이런 분위기 속에 흔들리지 않고 깨어있는 소수의 교회와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안식월 기간 중 7월에 옥스포드 시내에 있는 몇 교회들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떤 교회는 연세 드신 어른들만 모였는데 St. Ebbe’s와 St. Aldates 교회는 일단 청년들과 젊은 부부들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그 자녀들이 부모를 따라와 예배당이 어린이들로 가득하였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이 주일학교 시간에 어린이들을 데리고 나갈 때 자녀들의 손을 잡고 교육관으로 가는 젊은 부모들의 뒷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마음이 흐믓하였습니다.
친구들이 모이는 파티에 빠지면 아이가 왕따 당할까 두렵고 하나님께 외면당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말릴 도리가 없습니다. 아직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투명하고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애매한 어린 신앙인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머뭇거리는 자리에 있지 말고 그 마음이 달라지기 바랍니다. 세상과 하나님 두 사이에서 저울질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일년에 몇 차례 다가오는 아이들 생일 파티와 비교되셔야 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기웃거리며 반신반의하여 저울질하는 사람들에게 만홀히 여김을 받으실만한 분이 아닙니다.
주일예배 한 번 빠지고 생일 파티에 간다고 세상이 망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안 믿는다는 것도 아닌데 너무 예민반응이 아니냐 하지 맙시다. 생일날, 금요일 오후, 토요일, 심지어 주일 오후 시간 다 놔두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로 약속한 주일 아침에 꼭 파티를 열고 거기 참석해야만 한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일순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일예배는 내가 크리스찬으로 살기로 작정하였을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은 약속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예배하는 삶을 우선순위로 두겠다는 약속입니다.
다른 날은 내 맘대로 살고 주일날만 예배드리면 교인의 임무를 다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일날만 교인이고 다른 날은 맘대로 죄 짓고 산다면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머뭇거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로 약속한 그 시간을 피해 다른 약속 잡을 줄 아는 부모와 자녀들이 되기 바랍니다.
친구의 생일 파티는 내 아이가 없어도 잘 돌아가지만 나의 건강한 영혼은 예배하는 자리에 있어야 비로소 존재합니다. 그래야 내 자녀들이 부모의 건강한 신앙을 유산으로 받아 그 영혼이 바르게 성장합니다.
가장들이 먼저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며 예배하는 삶을 소중히 여기는 좋은 모범을 보이기 바랍니다. 남편이 중심을 바로 잡지 못하면 아내라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 중 한 쪽은 중심을 바로 잡고 있어야 가정이 흔들리거나 세상의 파도에 통째로 휩쓸려 가지 않습니다. 만일 부모가 머뭇거리면 자녀들 중에 그 어느 누구라도 바로 서있어야 합니다. ‘아빠, 엄마 오늘 주일인데 교회가야 되지 않아요?’묻거든 하나님이 어린아이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인 줄 알고 따르기 바랍니다. ‘오늘은 예배하는 날이니 모든 것 멈추고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자’이런 마음이 그리스도인 가정의 가장들에게 확고하게 자리잡고 가족들이 이에 함께 따르는 즐거움이 있기 바랍니다.
학벌과 학력이라는 바알, 돈과 성공이라는 바알, 인간관계와 인맥쌓기라는 바알, 부동산 투기와 권력이라는 바알을 따르느라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동안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부모와 함께 세상으로 흘러가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부가 되시길 바라고 두번째 세번째가 아니라 언제나 첫째가 되시길 원하십니다. 무너져가는 하나님의 단,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가정이 되기 바랍니다.
한국에서는 아이들 학교 보내기 겁이 난다고 염려합니다. 허물없는 우정, 서로 협력하고 알아주고 위로하는 우정이 희박해지는 세상입니다. 왕따에 폭력 그리고 자살하는 아이들… 누가 이런 세상을 만들었습니까? 가해자들만 그랬을까요? 문제를 일으킨 가정들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의 책임입니다. 우리 어릴 때도 학교 폭력은 있었고 친구들끼리 따돌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아이들은 그 시절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폭력과 범죄에 방치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1등과 최고만 알아주는 세상에서 너도나도 1등 하기 위해 친구도 없고 선생님도 없습니다. 영어 100점, 수학 100점 받는 비결 가르쳐 주는 것만 중요하고 공부 열심히 하여 이웃과 사회를 위해 어떻게 좋은 일을 할까 이런 생각은 가질 틈을 주지 않습니다. 약하고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갈수록 희박해지고 약한 이웃, 어려운 이웃을 짓밟고 내가 행복해지려 합니다. 이것 또한 어른들의 마음에 먼저 자리잡고 있는 사악한 우상입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비열하고 사악한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힘 없는 친구들을 무시하고 괴롭히며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연습합니다. 모두 1등이 될 수 없는데 부모님이 기대하는 1등을 못하니 충분히 똑똑하고 귀한 아이들이 일찌감치 공부에 대한 희망을 접어버립니다. 부모의 병적인 기대와 꾸중을 견디다 못한 어떤 아이들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불만을 풀 곳이 없어 힘없는 친구들을 괴롭히는데 재미를 붙입니다. 마약에 중독되듯 컴퓨터 게임이나 음란물 접속에 빠져들어갑니다. 어떤 아이들은 삶의 의지를 잃고 소중한 목숨을 던져버립니다.
세상이 돌았고 미쳐갑니다. 아이들이 만들어낸 세상이 아닙니다. 오직 내 자녀만 생각하는 어른들이 자기 욕심 이루려고 만들어낸 기형적인 세상입니다. 선생님께 벌을 받던가 매를 맞기라도 하면 학교로 찾아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폭언과 물리적인 힘으로 선생님에게 폭력을 가하는 부모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입니다. 내 자식은 절대 벌받고 매맞을 짓을 할 아이가 아니라고 우기는 부모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힘이 있어야 사람 노릇하고 대우를 받는다는 신념을 신앙으로 삼아 달려드는 사람들이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광란 속에 기독교인들도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목숨처럼 붙들고 바라고 의지하는 우상입니다.
불신 가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가정에게 주시는 약속임을 전제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내 가정과 나를 움직이고 계십니까?
나의 뜻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않고 내 편리한대로 이용하는 신앙은 미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조종을 당하시거나 조롱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내 가정과 세상의 역사와 만물을 주장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정직한 고백을 한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경외하기 바랍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하였습니다. 십계명에 기록된 이 복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자녀들을 어른들의 욕심과 과도한 기대감으로 노엽게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아이들로 살아가게 합시다. 이것이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길입니다. 그래야 내 가정이 주 안에서 바로 서고 가족의 영혼들이 생명 안에 살며 우리 교회와 국가와 민족이 바른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책임이 이렇게 소중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지 말고 분명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편에 계시길 바랍니다.